연안김씨열녀비각
열녀비위치 :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용촌2리
설악봉이 마주 바라 보이는 곳에 봉수대가 있었다는 국사봉이 솟아있고 바로 그 아래로는 요지호가 동해로 흘러가며 용촌천을 만들어 농토에 젖줄 같은 역활을 하고 있었다. 앞면에는 깊고 푸른 동해바다가 있어 수십년 전에는 이 마을을 용포동이라 이름하였고 뒤편으로는 잔잔한 언덕 같은 성황산이 성곽처럼 마을을 둘러싸 평화를 지켜주는 듯 하였다.
조선조 고종 때 노병곤이라는 분이 위로는 부모를 모시고 아래로는 어린 동생을 거느리고 나이 어린 아내를 맞아 아무 걱정 근심 없이 오순도순 단란하게 살았다. 그러다가 뜻밖에 병에 걸려 앓아 눕게 되니 집안은 온통 날마다 먹구름이 덮힌 듯 근심과 걱정이 가실 날이 없었다. 아내 연안김씨는 가문 높은 양가집 딸로서 나이는 어렸지만 남편의 병간호에 온 정성을 다하였다. 그는 백방으로 쫓아 다니면서 좋다는 약을 다 구하여 남편을 보살폈으나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 마침내 생명이 위독하게 되었다. 부인은 자기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넣어가면서 회생되기를 바랐지만 그 정성도 아랑곳없이 끝내는 운명하고 말았다. 그 때 남편의 나이 18세요. 부인 연안김씨의 나이는 겨우 13세에 청상과부가 되었다. 그 후 가신 남편의 혼을 모시고 수절하여 살아 오다가 바로 아래 동생인 노병서의 장남 재용을 양자로 삼아 부군의 대를 잇게 하였다. 부인은 양자인 재용을 서울 휘문고보를 졸업시키고 동경까지 유학을 보내 조도전대학까지 졸업시키는 맹렬여성이기도 하였다. 그는 평생동안 시부모에게는 효부였고 끝까지 정절을 지키며 죽은 남편을 사모하는 열녀였다. 이런 연유로 예조 학사원에서 내리는 효부 표창을 받았고 양자인 재용에게는 근엄하면서도 자애로운 현모이기도 하였다. 13세의 어린나이로 남편을 여의고 청상과부가 되어 죽은 남편의 혼을 모시고 평생을 일편단심 사모하고 정절을 지키면서 살아오다 1952년 그 생을 마쳤다. 광주 노씨 문중에서는 연안김씨의 열녀됨을 기리기 위하여 1952년 10월 10일 마을 어구에 연안김씨 열녀비각을 건립하고 그의 생존 때 업적을 새겨 영구보존케 하여 그들 후대에게 전하게 하였다
조선왕조시대는 신분이 높을 수록 10세 내외의 조혼으로 꽃다운 젊은 시절부터 엄격한 법도에 눌려 평생을 집 문앞을 벗어나지 못하였고 여기에 으레 따르는 시집살이의 정신적, 육체적 고됨은 상상조차 할 수 없으리라. 그러나 13세의 어린 나이에 청상과부가 되어 내외 법이 엄격했던 그 시절의 폐쇄사회에서 얼마나 기막힌 이성으로 자기 자신과 싸우며 살아 왔을까. 오직 인종만을 미덕으로 알고 살아온 여인상을 바로 눈 앞에서 보는 것 같아 오늘날에 사는 우리로써는 새삼 가슴 뜨거워짐을 느낄 따름이다.
전봉상효자각 효자각위치 :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교동리
바로 이곳에 자손 대대로 정선 씨 가문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마을 입구에 조선조 선조때(1567 ~ 1608)사람으로 부모에게 효심이 지극하던 전씨 문중의 46대 조상인 봉상 51대 조상인 공순 54대 조상인 재후 세 분의 효자비가 모셔진 8각 지붕의 효자각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다.
지금으로 부터 약 400여년전 조선조 선조시대 간성 교동리에는 할아버지는 심도부위요 아버지는 참봉벼슬을 한 순신(당시 참봉 1540 ~1586, 중종~선조)이라는 분이 아들 형제를 슬하에 두고 있었다. 형은 봉걸이요동생은 봉상이라 이름하였다.
그 형제 중에서도 동생인 봉상은 아주 영명하여 등화가친하여 독서삼매경에 묻힐 정도로 공부만 하는 소년으로 항상 웃어른들에게는 공손하며 부모에게는 효행이 극진한 아이로 어릴때부터 어진 천성을 지닌 소년으로 소문나 있었다.
봉상이 일곱살 되던 어린 소년에게는 몹시도 춥게 느껴지는 겨울철이였었다. 아버님 순신이 여러날 동안 다리가 몹시 쑤시고 아파 누워만 계셨기에 그때만 하여도 별로 신통한 치료 약이나 의원이 있는 시절도 아니라 다만 하느님께 기도드리며 비는 수 밖에 없는 어느 날 어른들 말씀에 잉어를 고아 먹으면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나 워낙 가세가 빈곤하여 쇠고기 한번 잡수어 본 일이 없는 아버님께서 잉어고기를 먹고 싶어 하는 것을 보고는 일곱살 밖에 되지 않는 소년 봉상은 온통 산과 들이 눈으로 뒤덮힌 하얀 길을 헤치며 잉어를 구해 보려고 찾아 나선 것이다. 여인상을 바로 눈 앞에서 보는 것 같아 오늘날에 사는 우리로써는 새삼 가슴 뜨거워짐을 느낄 따름이다.
산꼭대기에 올라서서 눈 아래 사방을 굽어 보았으나 어디가서 잉어를 잡을지 걱정이 태산 같았고 눈앞이 캄캄하였으나 무엇인가 생각해 보자 그리고 잉어에 대한 생각만 머리속에 꽉 차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에야 한 생각이 번쩍 들었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동호리 호수가 얼른 떠올랐다.
새벽 찬바람에 동호리까지 깊은 눈길을 혼자 간다는 것은 정말 어린 소년에게는 힘겨운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러나 효성이 극진한 봉산에게는 곰곰히 생각할 틈이 없었다. 아버님의 병환을 염려하여 정월 추위에 얼어죽지 않은 것만 감지덕지 천행으로 여기고 무작정 걸어만 갔다. 그리하여 동호리 호수가에 거의 가까이 왔을 무렵 홀연히 겨울 하늘이 검게 변하더니 뇌성벽력으로 온통 천지를 뒤덮어 놓을 듯이 바람이 세차게 불고 난데없이 팔뚝만한 잉어 두마리가 봉산의 눈앞에 떨어지는 것이었다.
효자는 하늘이 알아준다 하더니 착한 어린 아들의 지극한 효심에 감복함인지 봉상 소년의 반가움은 그 어디에 비할 수 있겠읍니까?
눈 덮힌 겨울철에 얻은 귀한 잉어를 아버님께 봉양할 수 있는 봉상의 기쁜 마음은 과연 어떠하였겠습니까?
그의 어질고 착한 성품이 훗날에도 그 아버님 순신이 위독하여 사경을 헤매고 있을때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여 7일 동안이나 곤히 잠들다 다시 깨어나 병세를 회복하여 3년이나 더 사시게 하였다. 이는 그의 효심이 얼마나 깊고 깊었나 하는 것은 오늘에 사는 후손에게 큰 교훈이 아닐 수가 없다.
그후 후대 자손들이 이 거룩한 조상의 뜻을 받들어 1610년에 정축 1칸에 8각 지붕의 효자각을 짖고 봉산, 공순, 재후, 세분의 효자석비를 세웠는데 그 후대에도 많은 효자가 배출되었다 한다.
노상언효자각
효자각위치 :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용촌2리
소재공 12대손 노상언은 총명하고 지혜롭고 행실이 바르고 사리를 바르게 판단하여 의로운 이을 행하여 부모에 극진한 효도는 물론 웃어른들을 공경하는 등 선비다운 행실과 선행을 다 하였다고 하여 효자칙지를 받은 후 140년전 노씨 문중에서 이 문을 건립하였으나 전쟁으로 여기 저기 옮겨 지었다가 현재 용촌2리에 재건하였다.
착지등은 분실되었으나 효행에 대한 것은 동국 명현록에 기록되었다.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용촌2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효자각은 1892년 세워졌으며 현판에는 "효자학생 노상언지문"이라 쓰여 있다.
100여년전 포의한사로 한평생을 학처럼 고고하게 살다 간 노선비의 넋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한 것이다.
어렸을때부터 부모를 도와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주경야독하여 산림처사로 썩긴 아까운 인물이였으며 벼슬길에 나가도록 부모나 주위 사람들이 권고하였으나 예의 바르고 효성이 지극한 그는 한치도 부모님 곁을 떠난 일이 없었으며 학문은 자신을 완성하기 위해 누구나 해야 할 뿐 벼슬을 위해 닦는 것이 아나라는 그의 신념이 흙이 생명을 발하는 것은 농부가손에서 씨앗이 뿌려졌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제 마음에 학문의 씨앗을 뿌리고 가꾸지 않는다면 불효가 되며 생명을 잃은 흙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노선비가 마흔이 넘은 해였다. 가뭄이 극심해 마을 앞 냇가는 먼지가 일고 논바닥이 거북이등처럼 갈라졌다. 가뭄 탓으로 농사는 흉작이었다. 곡간의 곡식은 금새 바닥이 났으므로 노선비는 늙은 부모님께 쌀밥을 드리기 위해 겨울동안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였고 봄눈이 녹을 즈음 노선비의 부친께서 갑자기 몸져 누워 아버님의수척한 얼굴을 더이상 곁에서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노선비가 벽장 문을 열고 논문서를 꺼내는 것을 본 그 아내는 "여보 그건 우리 식구의 명줄입니다."라고 만류하였으나 "땅이야 돈을 벌어 다시 살 수 있어도 아버님의 생명은 천금을 주고도 다시 살 수 없지 않소" 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떨구고 울먹였다.
그날부터 노씨 부부는 정성껏 약을 드린 후 정한수를 떠 놓고 병환이 빨리 완쾌되길 빌었다. 지성이면 감천인지 부친의 병환이 완쾌되자 마을 뿐만이 아니라 온 고을이 노상언 효자 이야기를 떠들썩하였다.
그는 이렇듯 효심이 극진하였고 학문도 인격과 자아 완성을 위해서만 평생을 닦았으며 벼슬길에 미련도 없이 오직 자연에 묻혀 욕심없이 고고하게 학처럼 살다 간 선비 중 선비였다.
함희석함씨4세5효자효자각
효자각위치 :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오봉리 396
희석의 아버지인 덕인은(조선 순조 28년 무자 3년 서기 1828년 5월10일생~경신년 서기 1860년3월1일 졸수는 33세)3형제를 두었으며 희석은 그의 장남이였다. 어렸을때부터 천성이 온후하여 부모를 극진히 공경하였으며 가세가 빈곤하여 하고 싶었던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집안 일을 도맡아 하여 왔으며 항상 부친이 술을 좋아하였으므로 10여세의 어린 소년이지만 혹시 부친에게 실수나 유고가 있을까봐 늘 걱정이 되어 멀고 가까운 곳을 가리지 않고 찾아 다니며 효행 봉양하였다.
무오년 겨울 부친이 병환으로 앓아 눕게되자 엄동설한에 얼음은 깨고 잉어를 잡아다가 약으로 봉양하여 다시 소생케 하였으며 경신년 서기 1860년 2월 천화가 나서 영동 구읍이 일시에 화란이 일어나던 때 부친이 술에 취하여 귀가 도중 길가에서 잠들었다가 큰 화상을 입어 움직일 수 없게 되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지성으로 간호하였다고 한다. 그때 당시 희석의 나이는 16세였었다.
동년 경신년 3월 1일 서기 1860년 부친의 상을 입고 3년간이나 묘앞에 아버지가 좋아하는 술과 과일을 차려 놓고 밤에는 범의 호위 아래 시묘하였다.
그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조정으로부터 정여를 하사받았다.
『효자전통대부돈영부도정』 희석은 조선조 헌종 12년 10월7일에 출생하였으며 서기 1918년 10월 14일 졸하였다.
자는 사언이요 호는 오헌 이요 묘는 공현진 선유담에 있다. 슬하에는 영두, 영준, 영우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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