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적어도 하루에 몇번씩은 걸를 수 없이 들러야만 하는
하지만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화젯거리로 삼기에는
무언가 불결함과 은밀함이 숨겨져 있는 듯
별반 말하고 싶지도 들어도 그리 유쾌하지 않은 꺼림직함이 상존하는 "화장실"..
그 애증어린 화장실이 우리에게는 과연 어떤 의미로 각인되어 있을까..
인분으로 퍼 올려져 기름진 옥토의 밑거름으로 신선한 야채를 제공한 덕에
마루바닥 교실 선생님 앞에서 한웅큼씩 삼켜야 했던 억지 회충약의 원흉?
작은 것, 큰 것, 중(中? 重?)한^^ 것을 망라하는 히스테릭한 배설의 쾌감?
고전도 현대문학도 아닌 그저 가벼운 신문 잡지 정도로 대체되는 지적 욕구의 충족?
찌든 땀과 먼지, 누적된 피로, 인간적 질시와 세파까지 씻어내리고픈 산뜻한 세정?
그러고 보니 화장실의 상태가 그 사회 문화수준의 척도라 했던가
어릴 적 분내나는 '변소'보다는 그 이름의 변화에서부터 느껴지듯
용도도 참 다양해 졌으려니와 위생관리 상태도 무척이나 양호해 졌음에
이젠 화장실에 대한 상상 자체만으로는 위화감이나 배타감에 호들갑까지
떨 일은 없어 마땅하기도 하다.
여친이나 아내의 핸드백을 받아들고 그 앞에서 볼일의 끝을 맞아
목타게 칭찬마려운 반려견마녕 "자기~ 시원해?"를 턱 밑에 속삭이는 사내들의 군상에서
속속들이 민폐인 푼수데기의 전형과 충직하고 사랑겨운 애완남의
극단적 양면성을 절감하며, 본인에게는 더할 바 없이 뿌듯한 자족감을 안겨 주었을
이 시대를 풍미하는 페미니즘과 초식남의 대표적 희화적 풍광에 주목하며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다"는 어느 화장실의 카피는 아이디어의 신선함과
함께 화장실의 격을 엄연히 문화의 드러난 한 부분으로 끌어 올렸다는 생각도 든다.
허나, 똥뚝간 통시 뒷간 측간 측소 적낭 해우소 심지어는 W.C까지 적나라함에서 비롯하여
의미를 희석시키며 품위를 곁들이고자 애쓴 흔적이 묻어나는 명칭 또한 없지 아니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 유래가 너무나도 뻔하디 뻔한 지극히 일반적이고 간헐적이며
제한된 용도의 그것이 그 충실한 본래의 용도만으로 내게 감동까지 줄 일은 없을 터,
결코 찬양의 대상일 수 없던 이 화장실이
어느날 문득 내게 친근한 장소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것도 엄연한 집안 실내 구조물로 자리를 버젓이 차지하고 깔끔하게 정돈된 곳이 아닌
상가 구석에 행여나 드러날세라 몰래 자리잡고 현대판 터치패드형 자물쇠로 외부인의
무작위적 출입을 조용히 거부하는 공유(共有)적이면서도 배타(排他)적인 공간...
갖추어진 서재건, 긴장된 사무실이건, 외진 호텔방이건, 허름한 민박집이건,
널부러진 집안이건, 사색어린 야외건, 고삐풀린 여행지건, 한적한 사찰에서조차
지금껏 찾을 수 없었던, 신기루처럼 존재하듯 아닌 듯 꿈꾸었던 그저 나만의 공간이
그 한켠에 실제로 자리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내 소유가 아니니 누추하다 치장하거나 귀찮게 나서 빗자루질 걸레질 할 일도 없고
구입을 한다거나 따로이 임대료를 내야 할 일이 없으니 경제적으로 부담스러울 일도 없고
바지를 내려도 웃통을 벗어젖혀도 의식할 시선없으니 마음 편하기 이를 데 없고
담배를 피워대도 금연구역입네 간접흡연입네 냄새가 고통스럽네 지랄떨 년놈없어 좋더라
그 안에서 스마트폰으로 장편소설을 읽던, 턱괴고 고민에 퐁당 빠지던,
불편하게 낮잠을 때리던, 잔소리하는 마누라도 눈치볼 윗놈도 모범보여야 할 아랫놈도
체면치레 의식해야할 지인도 없고
오롯이 온전하게 "나"라는 개체만으로 존재할 수가 있었으니...
누군가가 드나들면 대문 여닫는 소리에 인기척을 알아챌 수 있고
들어와 작은문 노크하여 응답하면 아는 척 않고 친구하잔 말 한마디 없이
옆칸으로 이동해 주니 고맙고,
때론 뉴스도 보고,
또 어떨 때는 밀려있던 문자나 메일함도 정리하고,
가끔은 걱정거리나 추억도 들춰보고,
오늘은 무얼 하고 내일은 무얼할까,
또 어떤 날은 내가 대체 무얼하는 인간인지 되돌아 보기도 하지만
아무 일과 생각이 없을 때면 양변기에 퍼질러져 앉아
양쪽 손을 번갈아 가며 검지손톱으로 열손가락 손톱 밑에 낀 때도 긁어가면서
난 하루하루 그 화장실과 잔잔하게 교분을 쌓아왔던 것이다.
내가 화장실이 좋다 한 건
그 곳이 화장실이어서가 아니다.
특별히 그 화장실이 멋져서도 귀해서도 아니다.
그 안에서 무엇을 꼭 해야할 일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내게는 그저 단지 잠시 잠깐잠깐의 도피처가 필요했을 뿐이고
그곳은 내가 발견한 적어도 내게는 불가침(不可侵)의 신성(神聖)한 영역(領域)이었고
마음 편하고 숨통트이는 자유의 공간이었다.
이제 곧 겨울이 다가온다.
한여름 이마에서 가슴까지 땀방울이 흘러내려도 난 그곳을 애용했고
한겨울 엉덩이 맨살이 시려와도 나는 그 곳을 변함없이 찾아 갈 것이다.
내키지 않게 견뎌야 하는 추위도 더위도
마음 깊숙히 감춰져 있는 불덩이나 상처를 보듬고 다스리기에는
턱없이 유치할 정도로 자그마한 일과성적 잡티와도 같은 방해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나는 화장실이 좋다.
특별히 그 화장실이 좋다.
누가 보아도 좋아라 할 곳이 아니기에 나는 더욱 그 화장실이 좋다.
나는 지금도 거기에 가고싶다... ^^
첫댓글 화장실 예찬...? 나도 동감... ^^
재미있게 잘 읽었음.
이구~ 남사시러버라...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