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중추원사 성억(成抑)이 졸(卒)하였다.
억(抑)은 예조 판서 성석인(成石因)의 아들인데, 음직(蔭職)으로 공정고 주부(供正庫注簿)에 보직(補職)되어 여러 벼슬을 거쳐 사헌 감찰(司憲監察)에 옮기고, 공조 좌랑ㆍ정랑을 거치어 갑오년에 군자 부정(軍資副正)으로 아버지의 상사를 당하고, 기복하여 대호군(大護軍)이 되었다가 병신에 재차 옮기어 승정원 동부대언(同副代言)이 되고, 명년에 좌군 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에 승진하고, 임인년에 나가서 전라도 도관찰사가 되었다가 공조 참판에 옮겼다.
정미년에 우군 도총제(右軍都摠制)가 되어 어머니의 상중에 있다가 1년이 넘어 기복(起復)하고, 경술년에 공조 판서를 제수하였다가 조금 뒤에 중군 도총제(中軍都摠制)로 고치고, 명년에 의정부 참찬으로 발탁되고, 을묘년에 다시 공조 판서를 제수하고, 기미년에 의정부 우찬성에 승진하고 다음해에 중추원 사(中樞院使)에 제수되었다. 병인년에 판중추원사 겸 판병조사가 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죽으니 나이 63이었다. 조회를 2일 동안 정지하고 부의(賻儀)를 더하게 하고 관(官)에서 장사를 지내게 하였다.
시호를 희정(僖靖)이라 하니,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희(僖)이요, 너그럽고 즐거워하여 아름답게 마친 것이 정(靖)이다. 억(抑)의 딸이 성녕 대군(誠寧大君)의 부인이 되었는데, 태종(太宗)이 성녕(誠寧)의 일찍 죽은 것을 슬퍼하여 일찍이 세종(世宗)에게 부탁하기를,
“성씨(成氏) 일족은 공신의 예로 대접하라.”
하였다. 이 때문에 대우가 특별히 달랐고 은총과 권애가 우악(優渥)하였다. 아들은 성득식(成得識)ㆍ성중식(成重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