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헌병사령부, 김구 암살범 안두희를 보호하다
안두희에게 암살당한 백범 선생 시신 앞에서 오열하며 조문하는 시민들1949년 6월 26일 낮.
백범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를 탈취한 헌병 대위 김병삼은 필동 헌병사령부로 달렸다.
득의만만한 표정의 김병삼은 스리쿼터에서 내리면서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우선 안 소위를 의무실로 모셔라"
김병삼은 곧장 사령부에서 대기하고 있던 전봉덕 부사령관에게 무사히 빼돌렸다고 보고했다.
장흥 헌병사령관은 이날이 마침 일요일이라 파주로 성묘를 가느라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전봉덕은 만면에 미소를 짓고 의무실로 들어갔다.
침대에 누워 있던 안두희는 벌떡 일어나 거수경례를 했다.
"안 소위~ 큰일을 차질없이 잘 수행했어. 여기서 조용히 쉬고 있으면 일이 저절로 잘 풀릴거야"
일제 때부터 필동에 있던 헌병사령부. 현재는 남산 한옥마을로 변했다. 안두희는 여기서 편안하게 있다가 특무대로 넘어가 칙사 대접을 받는다.전봉덕은 경무대로 달려가 신성모 국방장관과 신태영 육군 참모차장과 함께 이승만 대통령에게 사건 전말을 보고했다.
이승만이 지시했다.
"장흥 헌병사령관이 중국군 출신으로 백범과 친하다지? 당장 전봉덕 부사령관을 승진시켜 수사를 맡기시오"
전봉덕은 즉시 백범 김구 암살사건에 대한 첫 공식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범인은 현장에서 바로 체포되어 헌병사령부에 수감됐다. 그러나 현장에서 상당히 폭행을 당했기 때문에 의식이 회복되기를 기다려 그 배후를 엄중 조사할 작정이나 현장에서 판명한 것은 1인 단독 행위인 듯하다"
그는 수사도 하기 전에 이미 결론을 발표한 셈이다.
이렇게 해서 안두희는 권력의 비호 아래 한국전쟁의 혼란통 속에서 자유의 몸으로 돌아간다.
그러면 백범 암살 당일 분주하게 움직인 헌병사령부의 전봉덕 부사령관과 김병삼 대위는 어떤 인물인가?
◈ 평생 권력의 그늘에 안주한 두 사람의 재미있는 경력
친일파 전봉덕. 한평생 대일본제국과 역대 독재정권에 빌붙어 권세를 누렸다.먼저 전봉덕의 공식 경력을 살펴보자.
인명사전을 보면, 경성제대 법문학부 졸업~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와 행정과 합격~헌병사령관~국무총리 비서실장~서울변호사회 회장~대한변호사협회 회장~법사학회 회장~헌법개정시안 작성소위원회 위원장만 기록돼 있다.
일제시대에 총독부 근무, 평안북도 경찰부 보안과장, 경기도 경찰부 수송 보안과장, 김구 암살 당시의 헌병사령부 부사령관 경력은 쏙 빠져 있다.
1981년에 발간한 고희기념논문집을 살펴봐도 해방 후의 경력만 자세히 적혀 있을 뿐 일제시기의 친일 경찰 경력은 빼놓았다.
그는 80년대 초반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세간의 관심에서 사라졌다.
그러던 전봉덕이 갑자기 언론의 주목을 받은 것은 지난 1992년 4월 귀국했다가 닷새만에 돌연 미국으로 출국한 사건 때문이었다.
그가 서둘러 도망간 것은 그 당시 백범 암살사건에 대한 새로운 사실이 폭로되고 있어 이를 피하기 위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병삼도 마찬가지다.
백범 암살사건당시 헌병순찰과장으로 안두희 소위를 구출한 행동대장이었던 김병삼 대위.공식적인 경력을 보면, 1950년 국방부장관 보좌관, 육군헌병학교 교장, 육군 헌병감, 원호처장, 체신부장관, 호남매일신문 사장 등만 기록돼 있고, 헌병사령부 경력은 쏙 빼놓았다.
재미있는 건 1967년 치러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목포에 출마한 사실도 빠져 있다는 것이다.
당시 박정희는 김대중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해 이 지역구에 육군 소장 출신이자 체신부장관을 지낸 김병삼을 출마시키고 목포에 직접 내려와 지원유세를 했었다.
이 선거가 워낙 격전이어서 전 국민의 관심을 모았고, 여기서 승리한 김대중은 정계의 새로운 스타로 떠올랐다.
1988년 세상을 떠난 김병삼은 죽기 전 끝내 백범 암살사건의 진상을 안 밝히고 비밀을 무덤에까지 안고 갔다.
◈ 믿었던 일본의 패망…전봉덕, 경찰을 떠나 군대로 피신하다
8.15 해방을 맞아 환호하는 시민들. 일본의 패망은 일제의 주구 노릇을 하던 친일경찰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비보였다.일제가 패망하기 직전인 1945년 8월 8일 경기도 경찰부.
오카 경기도 경찰부장은 정례회의에서 부하들에게 중대한 사실을 밝혔다.
"우리 대일본제국의 항복은 시간문제다. 조선은 불행해질 것이다"
전봉덕 수송 보안과장은 눈앞이 노래졌다.
"일본이 떠나면 우리 친일경찰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나?"
해방이 되자 친일경찰들은 일제히 도망가거나 숨어지냈다.
그러나 미군이 주둔하고 일본인 경찰 수뇌부 대신 일제 때의 친일경찰들로 빈 자리를 메꾸자, 전봉독은 경기도 경찰부 보안과장으로 눌러 앉았다.
전봉덕에게 떠나간 일본 대신 미국과 미국이 비호하는 이승만이라는 새 주인이 나타났다.
그러나 1948년 9월 7일 반민족행위 특별처벌법이 제정돼 수사망이 좁혀오자 재빠르게 군대로 도망갔다.
그는 육군사관학교 제1기 고급장교반을 졸업한 뒤 육군 소령으로 임명되었다.
일본군 장교 출신인 채병덕 육군 참모총장. 그의 비호 아래 전봉덕은 헌병사령관으로 승진한다. 채병덕 참모총장의 추천으로 헌병사령부 부사령관으로 부임한 전봉덕은 이른바 국회프락치 사건을 다루면서 이승만 대통령의 눈에 들게 된다.
이어 발생한 백범 김구 암살사건 수사를 지휘하면서 세인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예편을 자청한 후 국무총리 비서실장으로 들어간다.
이어 과거를 세탁하자는 의도여서인지 변호사니 대학 강의니 책 저술이니 자문위원이니 여러 일을 하면서 행정이나 학계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때부터 박정희~전두환 정권 내내 끊임없이 적응하면서 자신의 지위를 유지해나갔다.
◈ 전봉덕의 맏딸 전혜린, 석연치 않은 이유로 자살하다
고 전혜린. 현대 독일작가들의 작품을 국내에 많이 소개했다.1965년 사춘기 소녀들의 우상이었던 전혜린이 갑자기 자살로 인생을 마감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겨우 만 31살의 나이였다.
그녀의 아버지가 그 유명한 전봉덕이란 사실이 알려지면서 세상은 다시 한번 놀랐다.
그녀를 알고 있는 많은 이들은 일세기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하는 천재라는데 모두 동의한다.
우울증 외에는 정확한 이유가 알려져 있지 않은데다 사후 1년만에 발간된 유고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때문에 그녀는 신화로 남았다.
독일문학 번역자가 드물던 때라 헤르만 헤세를 비롯해 하인리히 뵐, 에릭 케스트너, 루이제 린저 같은 현대 독일작가들의 작품을 번역한 공로는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아버지의 과거에 대한 반성 같은 역사의식은 그녀의 글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전봉덕은 맏딸을 자기와 같은 존재로 키우려 했기 때문에 서울대 법대로 진학시켰다.
그러나 그녀는 법대를 중퇴하고 돌연 독일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다음과 같은 글에서 아버지 전봉덕의 존재가 느껴진다.
"일반적으로 장녀가 그렇듯이 나도 매우 부모에 의존하고 있고 부모를 무서워하면서 밀착하고 있는 편이었다. 또한 흔히 딸이 그렇듯 아버지를 숭배하고 있었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아버지 마음에 들고 싶다는 욕망이 의식 밑에도, 또 의식 표면에도 언제나 있었다. 아버지로부터 칭찬받고 싶다는 마음이 실현될 때마다 나는 이 세상의 무엇보다도 행복했었다. 이 욕망은 아직도 내 의식 밑의 심층에 남아 있다"
◈ 백범의 영원한 '비서' 선우진 선생, 한을 못 풀고 서거하다
백범 김구 선생이 서거한 지 60주기가 되는 해에 백범 곁으로 떠난 선우진 선생 (사진=정운현 제공) 2009년 5월 17일 전봉덕과 관련이 깊은 또 하나의 인물이 세상을 떠났다.
백범 김구의 비서를 지낸 선우진 선생이 타계한 것이다.
그는 1949년 6월 26일 백범이 서거할 때까지 만 4년여를 백범을 곁에서 모셨다.
백범을 수행해 평양을 다녀오기도 했고, 백범의 일거수 일투족을 살펴왔다.
그가 남긴 회고록 <백범 선생과 함께 한 나날들>의 한 대목을 읽어보자.
"이미 안두희가 입에서 피를 토하며 마룻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이풍식 씨가 의자로 때려눕힌 것이다. 나도 격분해 의자를 들어 안두희를 다시 후려갈겼다. 그때 갑자기 군 작업복을 입은 괴청년 3~4명이 나타나 나를 제지했다. 그리고 재빨리 안두희를 일으켜 데리고 나가려고 했다. 마침 이때 서대문경찰서 경비주임이 달려왔고, 안두희를 경찰서로 연행하려고 했다.그러자 괴청년 서너 명이 더 나타나 경비주임을 막았다. 경찰이 어떻게 군인을 연행할 수 있느냐고 윽박지르고 안두희를 데리고 나가 문 밖에 있던 스리쿼터에 싣고는 서둘러 사라지고 말았다…나는 백범 선생의 수행비서로서 선생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는, 말할 수 없는 죄책감과 부끄러움을 평생 잊지 못하고 있다. 그날을 결코 잊을 수 없다"
경교장 밖에서 총소리가 들려오기만 기다리고 있던 군인들이 바로 전봉덕이 보낸 헌병사령부 소속 행동대원들이다.
안두희가 타살되고 전봉덕 마저 국내로 들어오지 못하고 미국서 사망했으니 진상은 더더욱 묻힐 수 밖에 없다.
백범 김구선생 묘소에 바쳐진 친일인명사전. (사진=민족문제연구소 제공) 친일경찰 출신의 전봉덕은 2002년 공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명단에 모두 올라가 있다.
선우진 선생은 회고록 서문에서 옆에서 지켜본 백범 김구의 삶을 이렇게 되돌아봤다.
"백범 선생은 독립운동가이자 조국통일에 헌신하신 분이기 이전에 범부를 자처하면서 따뜻한 인간애와 검소, 절제를 몸소 보여주었다. 당신 자신이 으뜸이 되기보다 나라와 국민을 섬긴 겸손한 분이었다. 진정한 지도자는 바로 그러한 분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백범 선생을 그림자처럼 수행하면서 선생의 그러한 면면을 생생히 지켜볼 수 있었다"
http://www.nocutnews.co.kr/news/4072290
첫댓글 김구 선생을 죽였던 안두희 소위는 한번도 실질적 형벌은 받은 적이 없고, 소위에서 중위, 대위, 를 거쳐서 소령으로 진급하였고 제대한후 양구에서 군납으로 여러 부식과 식자재를 납품하는 사업을 하였습니다. 말년에 박기서씨에게 맞아죽었습니다만.
역사를 보면
자신을 바쳐 나라를 구하고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 하신분들과 후손에게 제대로 된 보상도 없고
이런 노력의 보상은 누구에게 받나요
주님께서 심판대에서 보상해 주시는 것도 아니고
애국해야 된다는 건 알지만
애국할수록 손해보는 세상인 것 같습니다
@미가 불신자들 사이에서도 심판대에서 크나큰 차이가 있습니다.
600만 유대인들을 학살한 히틀러와 그에게 학살당한 유대인들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이순신과 고니시 사이에도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이문제는 제가 언젠가 지옥형벌이 일률적으로 영원한가? 하는 의문으로 글을 쓰고 싶었는데 증명하기가 쉽지않은 주제로 또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아서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옥 형벌은 영원합니다만, 지옥에서 형벌받는 것이 모든 불신자들에게 일률적으로 영원하지는 않다고 믿어집니다. 그 근거들은 꽤 나옵니다. 모든 불신자들은 일단 지옥 불못에 던져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불신자들의 고통의 정도와 형기가 다를 것으로 해석됩니다.
계 21:26절에 보시면 만국의 영광이 거룩한 성 새예루살렘에 드나든다고 합니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외에 만국이 어느 나라들입니까? 어느 민족이겠습니까?
또 우리의 조상이나 부모가 지옥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고 있다면 그것을 외면하고 살아가는 것이 무슨 행복이며 천국이겠습니까?
베드로 전서 3장 19-20절에서 예수님이 옥에 있는 영 (죽은 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셨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분명히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해법과 영역이 있을 것을 암시해준다고 생각됩니다.
지옥은 분명히 모든 불신자들에게 개방되어 있고 그 형벌은 영원합니다. 그러나 형벌은
모든 사람들에게 일률적으로 영원하거나 일률적으로 엄청난 고통만 주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독립운동을 하다 죽은 사람들은 양심에 따라 싸우고 죽었습니다. 친일파들은 동족을 강간하고 고문하며 죽이고 치부하고 잘살다가 독립이 되어서는 독재정권을 만들어서 자기들의 치부가 드러나지 않도록 국민들을 속이면서 행복하게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엄청난 고통을 오래 오래 당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매우 공의롭고 정당합니다.
'전혜린'의 동생 '전채린'의 글에서 아버지는 몹시도 '지식(knowlage)'를 숭상하셨던 분이라는 술회를 들었습니다. 아마도 근세조선 500년 동안에 호란이나 왜란 같은 외적의 침입보다도 여러 차례의 '사화(士禍)'로 아까운 인재들을 숱하게 제거했던 '동족상잔'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친일(파) 인먕시전'을 만드는 식의 과거사 심판은 저 개인적으로는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김구'가 있었더라면 이라든가 '박정희'가 없었더라면 하는 식의 (지나간 역사의) 가정법은 언제나 어리석으니까요...
이런 과거사 문제에 관해서 아주 풍부한 사례들로 적절한 기준을 갖고 있는 민족이 있다면 그들은 아마 유대인들일 것입니다. 그들은 유행가사처럼 <잊지는 말아야지> 와 < 과거는 흘러갔다> 로 용서하며 넘어갑니다. 예컨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도 유대인들중에는 독일인들에게 상당한 자유를 보장받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장례사 등이지요. 그들이 유대인들 눈에는 참으로 밉게 보였지만 그들은 전후에 용서되었습니다. 유대인들 역사에 있어서 세리들처럼 로마제국에 빌붙어 지냈던 사람들이 어느 지배민족에게 아첨하여 영화를 누렸던 사람들은 언제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들을 용서하였습니다. 문제는 한국의 경우는
그러한 친일세력들이 한번도 자기들의 실체를 고백하거나 한번도 정죄받은 적도 없으면서 그들이 그 과거의 전력을 무기로 계속하여 한국을 지배해왔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일제시대의 친일파들로서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하고 강간하고 살육하던 자들은 대한민국 건국이후 부귀영화를 누리고 독립운동가들은 암살되거나 그들의 좌익성향으로 말미암아 또는 좌익이라는 누명이 씌어져 대부분 살해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역사에 대하여 독립운동을 하거나 애국적 관점에서 살아야 할 필요가 없고 갖가지 궤변으로 잘 살거나 동족을 등쳐먹어도 된다면, 앞으로는 한국회사에 일하면서 기술 빼내거나 한국회사들과 한국인들을 최대한
이용해먹고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수가 안맞으면 떠나는 사람이 가장 지혜롭고 똑똑한 사람으로 우대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역사 바로세우기의 문제입니다.
한국에서는 과거 친일파들이 그 자랑스러운 과거 행적을 실제적으로 정직하게 드러낸 사람이 한명도 없다고 믿어집니다. 오제도 최운학 같은 사람들은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하고 취조하여 일본인들을 매우 기쁘게 해준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은 건국후 다시 일할 기회를 바로 반공 검사 반공 수사과장으로 자리잡으면서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이런 연장은 일제가 차라리 나았다는 고백이 됩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한국은 일본식민지로 돌아가기를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한국의 국민소득은 금방 올라갑니다. 그리고 부정선거 시비도 없어질 것이며 사고율도 낮아질 것입니다.
이것이 한민족의 방향이겠습니까?
율법을 버린자는 악인을 칭찬하느니라(잠언 28:4)
저는 수많은 사람들을 살육한 이승만을 칭찬할수도 없고 옹호할 수도 없습니다.
박정희가 국민들에 의해 선임된 장면 정부를 반역하여 무너뜨리고 권력을 탈취하고 수많은 거짓말로 국민을 속이며 장준하와 여러 사람들을 살육하거나 혹은 사법살인한 것을 결코 옹호할 수 없습니다. 그의 쿠테타가 정당화 될 수 있다면 차지철이 100만명을 죽여서라도 진압해야 하다고 할 때 그가 책임지겠다고 말할 때 김재규가 총살시킨 사실이 100배 정당화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판단은 죄악을 어떻게 분별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죄악을 옹호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할일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