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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시간은 지나가고 있지만
아직 봄빛은 황홀해 글쓰기 좋은 계절입니다
수강생 전원 시 한 편씩 써 오시고 수업자료는 각자 출력해서 가져오세요^^
장소 : 한양대 에리카캠퍼스 학술정보관 3층 시자료실
일시 : 4월 22일 화요일, 9시 50분 입실
죽음과 현장성
신동옥(시인)
세밑을 지나 시 쓰는 선배를 만났다. 초벌 구운 고기를 앞에 두고 우리는 서로 사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학입시에 실패한 그이의 아들 이야기, 내 신혼 생활과 뒤늦은 공부 이야기, 선배의 직장에서 일어나는 자잘하고 귀찮은 소란들, 정신없이 보낸 어린 시절의 광가난무에 대한 기억들…… 두서없이 이어지는 대화가 허전한 심사를 불러올 무렵 서로에게 손을 흔들었다. 으레 결론은 열심히 쓰자는 다짐이었다. 선배는 내 손에 말아 쥔 책을 가리키며 무얼 그리 열심히 읽느냐 물었다. 계간지였다. “너는 아직 현장에 있으니.” 선배는 시를 쓰는 ‘우리가’ ‘서로 다른 곳’에 몸을 담고 있기라도 하다는 듯이 뇌까렸다. 계간평을 쓰기 위해 지난 계절의 시들을 훑어 읽으며 문득 선배가 스치듯 흘린 ‘현장’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시인에게 현장은 무얼까? 시인이 시에 현장성을 주입하는가? 시가 시인에게 현장성을 부여하는가? 어느 쪽이든 현장성을 가지는 시는 일종의 유기체가 될 것이다. 시가 현장의 일이라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생동하는 장소라는 의미에서 ‘토포스’를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선배는 내가 말아 쥔 잡지를 두고 시가 발생하고 이야기되고 향수되는 맨 처음의 자리를 가리킨 것이리라. 선배는 현장성이라고 말하면서, ‘문학장’이니, ‘향유 구조’니, ‘토포스’니 하는 단어들이 지시하는 복잡한 의미망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이다. 그보다는 복잡한 관념어를 주어로 두고 생각하는 방식에서 멀어졌다고 하는 폭이 맞겠다. 선배는 이제 다달이 쏟아지는 잡지를 읽을 여력이 없다는 말을 한 셈이 될 테고 말이다.
(설날 떡값으로 일 년 치 원고료를 당겨서 받고 쓰는 필자의 부채감에도 현장성이 깃들일 여력은 없는 것만 같아, 하루 쉬고 글을 이어가기로 한다)
한 편의 시를 쓰고 발표하고 반응을 살핀다. 기획특집에서는 무슨 이야기가 논점이 되고 있는지도 놓칠 수 없다. 최근에 나온 시집들은 무어며 대개 어떤 반응을 얻고 있는지도 궁금하다. 비슷한 시기에 시를 쓰기 시작한 동료들은 어디만큼 가 있는지, 자신만 새삼 헤매고 있는 건 아닌지 두려운 마음이 일기도 한다. 한 권의 시집을 낼 수는 있을까? 회의가 든다. 한편으로는 불안하고, 불안한 자신을 내팽개쳐두는데 익숙해져서 외려 무감하다. 결국 시인은 시를 쓸 때만 시인이다. 때로 시를 쓴다는 말은 시를 사유한다는 말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생각이 시와 같은 의미를 지니고 詩作을 한다는 것은 시의 잉여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식을 키우고 아내와 타투고 앞날을 걱정하고 술을 진탕 먹고 집으로 돌아가 주말 농장을 걱정하며 살아간다. 그러한 일상 역시 시의 일부분이 된다. 이때 시와 시인은 분리된다. 시인은 늘상 시인이 아닌 자신을 껴안고 살아야 한다. 이때 일상은 사유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현장성을 가진다는 말은 일상을 사유한다는 말과 같다. 시인은 일상을 사유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시인과 시인이 아닌 자신을 분리하고, 그런 분리가 무너질 때 어느 한축으로 함몰된다. 시와 일상의 문제는 정념의 죽음의 문제와 같은 지점을 가리킨다.
그림자를 기다린다
그림자는 급소가 없다
그림자를 기다린다
그림자만 한 급소가 없다
그림자가 그림자를 가격한다
급소만 한 내가 없다
나는 없다
그림자가 기다린다
- 장승리, 「나방」(『실천문학』 2013년 겨울호) 전문
나방은 야행성이다. 나방은 날개를 맞배지붕처럼 모으고 불빛 아래로 달려들었다가 멀찌감치 떨어져 쉰다. 나방 날개에는 털이 돋아 있다. 날개와 온몸에는 알 수 없는 각질이나 먼지가 잔뜩 묻어 있다. 어떤 나방은 독을 가지고 있다. 나방은 나비목에 속하지만 우리가 흔히 아는 나비가 아니다. 나방은 나비이면서 나비가 아니다. 독(“급소”)과 관계를 가진다는 점, 달려들고 멀어지면서도 떨어지지 않는다(“그림자”)는 점에서 나방은 무서운 아름다움과 같은 것을 은유하기도 한다. 사람은 보통 자신의 그림자를 보지 않는다. 그림자는 인간의 몸이 빛을 모두 투과하지도 않고 반사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실증한다. 날렵하다면 날렵하게 여기서 저기로, 저기서 여기로 옮아가는데 익숙한 사람의 몸이 말 그대로 살아 있음을 증거한다. 살아 있는 인간에게 그림자는 ‘살아 있음의 이중성’을 드러내는 지표가 된다. 필요한 만큼의 빛을 흡수하고 나머지는 굴절시키거나 반사하는 인간의 몸을 그림자를 통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림자가 발바닥에 붙어 있을 때 무생물이면서도 생물이 된다는 아이러니가 생긴다. 그림자는 무생물이기 때문에 “급소가 없다.” 그림자는 그림자의 소유주의 ‘살아 있음’을 말하기 때문에 “그림자만 한” 치명적인 “급소는 없다.” 이러한 이중성은 물론 죽음을 생각하면서 삶을 바라보는 관조적 태도에서 기인한다. 쓸쓸하고 깊은 관조의 순간에라야 인간은 잠시 세계의 급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사유가 없는 일상은 죽음에 다름 아니고, 그런 자신을 보듬지 않으면 생물에 불과할 것을 아는 때문이다. 죽어 있는 그림자가 살아 있는 그림자를 가리기도 하고, 서로 몸을 섞기도 하고, 어둠에 묻히기도 하면서 “그림자가 그림자를 가격한다.” 그림자는 인간에게 공격성을 가지지 않는다. 그림자는 인간에게 싸움을 걸지 않는다. 오직 빛과 어둠을 현장으로 거느리면서, 스스로를 태어나게 하는 외부와 내부를 허물어뜨리면서 싸울 뿐이다. 인간이 자신의 내부와 외부를 허물어뜨리면서 싸울 수 있는 순간은 언제일까? 죽음에 이르는 격렬한 섹스, 결국 죽음을 껴안는 순간일 것이다. 때문에 시인은 그림자를 보는 순간 “나는 없다”라고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이 시를 쓰는 순간은 아마도 “그림자가 기다리는” 순간이 될 테다. 독을 차고 온몸이 급소가 되어 불빛으로 달려드는 나방이 그림자를 보여주듯이, 시인이 일상을 사유할 때 죽음은 잠시 태어난다.
영혼은 정말로 빛으로 돌아가나 쨍쨍하나
작은 폭발로 빛과 어둠이 생겼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
나의 조상이 공기와 돌멩이라는 것은 너무 신비롭지 않은가
그렇다 정말 그 빛으로 걸어 들어가야 하나
죽고 싶은데 발이 다 무슨 소용이니
오늘 내가 입은 옷은 너무 웃기고
나의 대답은 너무 황당하고
손과 발은 더럽기 짝이 없다
나뭇잎이 대기의 먼지를 부지런히 묻히는 동안
바람이 태어난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말이다
사계절 피의 폭풍이 이는데 말이다
지붕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죽을 수도 없다니 너무 냉정하지 않은가
어떤 미래도 마음에 그리지 않고
산더미처럼 쌓인 옷더미에서
내가 입을 수 있는 옷과 입을 수 없는 옷을 골라 왔다
벌거벗은 내 몸을 당신은 모르겠지
나의 몸을 가렸던 흡족한 불길을 당신은 본 적 없다
- 이근화, 「정말 그 빛으로 들어갔을까」(『작가세계』 2013년 겨울호) 부분
그림자는 그러니까 “나의 몸을 가렸던 흡족한 불길”이 될 테다. ‘벌거벗은 내 몸을 아는 당신’이 그림자라면 ‘빛으로 돌아가는 영혼’의 마지막 길동무는 그림자일 것이다. 비유가 그렇다는 말이다. 물질로서의 인간의 몸이 “활활 타오르는 피 눈물 오줌” 다 어디로 가버리고, 약품처리를 잘 한 시체로 남을 때 살아 있는 몸과 죽은 몸의 차이는 별반 없다. 적당한 온도와 습기를 보면 죽을 듯이 달려드는 나방과 같은 영혼이라도 있다면 모를까? 기실 물활론적인 세계관이란 ‘원자’에 생명의 의미를 부여하는데서 시작된다. 루크레티우스가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의 서장 부분에서 꽃의 여신 플로라를 찬양한 이유도 여기 있다. “공기와 돌멩이”와 같은 분명한 실체가 원자인데 그것은 수증기처럼 존재하며 심지어 운동을 하고, 인간이 알 수 없는 방식으로 결합되어서 인간을 만든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나면 영혼은 부정될 테지만 말이다.
시인은 서두에 죽음의 현장을 이렇게 쓴다. “죽은 사람은 차고 딱딱한 줄 알았는데/ 의외로 멀쩡히 누워 있다” ‘죽고 싶은데 발이 다 무슨 소용이며’(빛으로 걸어 들어가든 말든 상관이 없으므로), 영혼은 다 무슨 말이냐. 일상을 사는 시인의 “손과 발은 더럽기 짝이 없다” 순환론적인 자연관이나 인과에 의지한 결정론은 시를 통해 간단없이 부정된다. 결국 살아 있음은 “사계절 피의 폭풍이 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인은 홀로 살아 있음의 이중적 의미를 본다. 바로 죽음의 현장성 말이다. 무엇이 일어나서 다음에 무엇으로 변하든, 무엇이 어떻게 진화하든, 무엇이 어떻게 창조되든 “오늘 내가 입은 옷”과는 무관하다. 시인에게 일상은, 일상이 죽음으로 체현하는 현장성은 명명백백하지만, 그 ‘白日下의 盲目’이 외려 눈부실 지경이다. 백일하의 맹목으로 죽음은 누워서 발가벗은 자신의 몸을 보라고 이른다. 발가벗은 자신의 몸에서 죽음을 읽는 태도는 아무튼 부드러운 충동을 불러온다. 그 충동은 아무튼 삶을 향해 있고 말이다. 무감해지는 순간마다 인간은 세계와 절연을 하고 있다. 그것도 무의지의 의지량을 동원해가며, 공포도 불안도 없는 망각 속에서 멸종해가는 초식공룡처럼 말이다.
멸종의 목록이 있는 달력엔 우수나 소만도 없다
움트지 않는 고백으로 숫자를 거느린 생몰연대만 있다
반복되는 날짜들
찢어진 꽃잎은 과거로 진화해 갈 뿐이다
철의 씨앗이 가득한 대장장이는 자연의 모양과 그들의 울음소리로 연장을 만든다 두 손이 멸종에 이르렀다지
기일도 없이 숨어 있는 위기의 식물들 혹은 동물들
지린내에 기댄 광릉요강꽃이 휘청거리는 향기로 남는다
자태에 어긋나는
천한 이름이 피우는 말갛게 정제된 슬픔
수명은 도도한 흐름의 방향타다
승리의 눈빛이 거침없었던 반달가슴곰
동물원에서 불리는 비굴한 이름
목말랐던 야생의 이름으로 전설이 되어가는
흔적마저 핥아먹은 비열한 식욕은 무거운 끝을 가진다
동강난 서식지가 달력 안에서 기생하지만
여전히 늙어가는 것으로 가벼워지는 숫자들
윤전기 소리마저 작아지고 있다는 소식과
새로운 종을 생산해 내는 기술의 속도
씨앗은 먼 미래이고 꽃은 멸종의 이름으로 만개해 있다
- 이지호, 「멸종력」(『현대시』 2014년 2월호) 부분
우리가 사는 하루하루는 나날의 ‘탄생력’으로 채워지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럴지도 모른다. 의미가 있건 없건 무언가가 꼬물꼬물 태어나서 꾸역꾸역 나이를 처먹으면서 사건을 몰아오는 것처럼 보이니 말이다. 무언가와 싸운 것도 같고 손을 내밀어 화해한 것도 같은데 아무래도 의뭉스러운 무언가가 남아 있다. 음흉한 웃음이나 구토를 몰고 오는 허기 같은 것이 남아 있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시인이 귀신도 아니고 말이다, 生肉하고 滅入하라고 24절기는 만들어 놓은 것 아닌가. 그런데 시인은 또 이렇게 시작한다. “멸종의 목록이 있는 달력엔 우수나 소만도 없다/ 움트지 않는 고백으로 숫자를 거느린 생몰 연대만 있다” 이렇게 새로 탄생한 “멸종력”은 앞서 말한 ‘탄생력’과 하등 다를 바 없다. 인간이 “자연의 모양과 그들의 울음소리”를 본 따서 ‘연장을 만드는’ 일이 멸종을 재촉하는 ‘죽음의 생산’과 다를 바 없으니 말이다. 익숙한 문명비판이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종을 생산해내는 기술의 속도”는 사유가 없는 죽음의 다른 표현이고, 문명의 동의어가 된다. 시인의 미래학은 암울하기 그지없는 진단으로 빼곡하다. “씨앗은 먼 미래이고 꽃은 멸종의 이름으로 만개해 있다”라니. 어떻게 이런 진단이 가능했겠는가? 이이에게 인간은 어떻게 정의되는 존재인가? 시인은 곧장 대답한다. “생일이 없는 두 발 짐승”!
양면성이 없는 회의나 부정은 때로 공소하다. 그런데 “생일이 없는 두 발 짐승”이라면 태어난 적이 없으니 죽지도 못한다는 의미에서 지독해도 아주 지독한 냉소를 품고 있다. 이정도의 냉소라면 어떤 가치에 대한 판단을 품고 있다는 의미에서 말 그대로 죽음조차 허락하지 않는 인간의 일상학 내지는 미래학이라고 할만하다. 시인은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려서, 저 아이러니스트들의 부정과 불가지론자들의 회의와 상대주의자들의 냉소를 받아 적는 일도 이제는 식상할 따름이다. 시의 현장성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오래전에 “이 종이에도 무한한 현장성이 깃들일 수 있다면”이라고 쓴 적 있다, 그것도 시라고 제목까지 달고 있는 작품에다 말이다. 그때는 이런 시들을 읽지 못해서 단순한 열망 같은 것을 고스란히 받아 적는데서 시를 그쳤다. 오늘 나는 가치에 대한 무관심이 상대주의를 초래한다는 아주 평범한 답을 얻는다. 본래적인 인간은 유적 인간이라는 의미에서 ‘인터내셔널’이다. 이 시대의 인터내셔널은 인간의 무리로 주어지는 개념이 아니기에, 처절하게 각자성을 살아내는 시인의 사명일 수 있을 것이다. 가운데서도 꿈을 꾸게 만드는 정념의 지배를 받는 시인 말이다. 현장성의 다른 속성은 그런 의미에서 ‘꿈을 꾸게 만드는 정념’에 지배받는 수동적 능동성에 있을 수도 있다.
내 사랑 Y
지금 열차는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소
열차 안에는 마작을 하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잠을 청하거나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은 보이지만 모두
나 같은 망명객은 아닌 것 같소
호주머니에는 당신이 건네주었던 동전보다 조금 더 많은 지폐가 들어 있고
곧 당신의 유산을 상속받을 테니 당분간 도피 생활은 문제없을 것 같소
나는 선동가지만 누워 있기를 좋아하고
노동자를 위한 책을 썼지만 책을 쓰기 위해 당신의 수고로움을 요구했지
신념은 곧 불화의 근원이었고
사랑하는 당신이 눈을 감는 날까지 나는 초라한 도망자 신세였소
요즘처럼 책 한 자 눈에 들어오지 않는 우울한 시절에는
커피 한 잔 끓여 마실 수 없을 만큼 손이 덜덜 떨리는 분노에 사로잡힌다오
어느 곳에서도 내 책을 모조리 불태우는 현명한 지도자가 나오지 않아
나는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세상과 불화하며 유랑한다오
[……중략……]
생활에 대해서는 조금 터득한 게 있소
나는 시민들을 따라 열차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갈 예정이오
물려줄 것 없는 가난한 사상가로 늙어 죽는 것이 내 꿈이라오
따뜻한 나라에서 관광객들에게 기념품 판매를 하기로 결심했소
어제의 나는 완벽하게 유기되었고
나는 장미꽃을 바치기 위한 긴 행렬에 줄을 서서 장례에 동참할 것이오
- 최예슬, 「상속자들」(『시인동네』 2013년 겨울호) 부분
현장성의 이중적인 의미에 무게를 두고 보자면, 시인은 아무래도 시인일 때는 죽음에 정직한 태도로 일상을 보고 시인이 아닐 때는 꿈을 꾸게 만드는 정념의 지배에 정직한 태도로 삶을 보는 인간일 것이다. 죽음에 정직할 때는 가까스로 “망명객”의 지위를 얻고 삶을 바라볼 테고, 정념을 희구하는 순간에는 “선동가”의 태도로 돌변할 것이다. 이 시대는 저 분서갱유의 시대도 아니고, 시인추방론 시대에 접신接神하는 위계를 보증하는 시대도 아니다. 시인은 냉소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어느 곳에서도 내 책을 모조리 불태우는 현명한 지도자가 나오지 않아”서 일상은 일상인 그대로 평온한 것처럼 흘러가는 것이다. 선동가의 전의도, 망명객의 우수도, 노동자의 수고로움도 없이 불화하는 신념만을 추동하는 시대라는 것이다. 이 소모적인 논쟁의 발단을 시인에게 물려준 이는 누구일까? 고작해야 책이 읽히지 않을 때라야 우울감을 느끼니 일찍이 보들레르가 파리의 19세기를 두고 읽어낸 근대의 우울을 지나쳐도 한참은 지나쳐 버렸다. “손이 덜덜 떨리는 분노”는 ‘커피 한 잔 끓여 마실 수 없는’ 소소한 삶의 단절에서 기인하는 게 고작이다. 길을 가다가 넘어져서 ‘쪽이 팔려서’ 분노하고, 우리와 무관한 듯이 쓰이는 선언문은 “먹고 살기 위한” 일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사실 관계를 수월히 넘어서버리는 정치와 미디어 조작에 익숙하니 스펙타클은 이제 무의식이 아니라 삶의 의지를 규제하기에 이른 것만 같다. 이러한 시대에 “당신의 유산을 상속”받기는 할 일인데, 당신은 누구이며 무엇을 상속해준다는 말인가? 시인은 선언한다.
“나는 장미꽃을 바치기 위한 긴 행렬에 줄을 서서 장례에 동참할 것이오”
망명객이 되어 관광객에게 꽃을 판다는 아이러니, 자의로 제가 디딘 땅을 박차고 다른 일상을 선택할 것이라는 결의에 다름 아니다. 한마디로 ‘장엄한 바보짓’에 목숨을 걸겠다는 선언인 것이다. 저 유명한 「바보이반」의 19세기 러시아에 등장했던 ‘유로디브이’, 구걸하며 노래를 부르고 기도를 하는 거지의 무리, 신들려 있고 예언력이 있으며 때로 치유력까지 발휘하는 무리가 되겠다는 것이다. 이 아득한 한 시절의 알레고리가 다시금 의미를 가지는 것은 ‘거지’가 ‘신자유주의식으로 말하자면’ 경제적으로 선택을 포기한 자들이고, 이들의 자발적 무능이 사회 질서에 폭력적인 태도로 비쳐진다는 것에서 혁명성을 띨 수 있다는 것이다. 역시 익숙한 장미와 술과 총의 알레고리다. 비유는 여기서 비롯된다. 시의 현장성은 아득한 한 시절의 자존감에 대한 알레고리로 기능할 수도 있다는 사실. 어쩌면 이러한 낭만주의(내면의 리얼리즘을 간직한)와 자유주의의 공통점은 그 ‘눈먼 입’들의 예언적인 치유력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 도저한 개인주의의 계기들 말이다. 멍청해서 불가능해 보이는 아니 불가능해보일 정도로 무모해서 완전한 무정부 상태를 희구하는 신념 말이다. 그런 신념을 조장하는 박석 같은 에고이즘으로 시의 현장성은 일상을 부여안을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무시무시한 책임이 뒤따른다. 무슨 일이 있어도 스스로를 놓지 않아야한다는 의지 말이다. 결국 이 시대의 시적 자유주의는 의지의 문제다. 저 19세기의 유로디브이가 혁명적 낭만주의로 껴안았던 말 그대로의 소박함을 품 넓은 태도로 껴안는 일이 중요하다. 결국 현장성은 소박함에의 의지, 일상과 맞서기, 시인인 자신을 둘로 쪼개서 바라보기를 통해 선취될 일이다. 그러니 시도 열심히 쓰고 발표도 간간히 하고, 마누라 자식 새끼랑 싸움도 하고 술꼬장은 적당히 부리며 살 일이다. 김수영 식으로 말한다면 조금 비껴 서있는 태도 말이다. 일찍이 김수영은 이렇게 쓰지 않았던가?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絶頂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김수영, 「어느날 고궁을 나오며」에서)
옹졸해도 좋으니 반항 좀 해보아라. 그래야 현장성이라는 것이 생길 것 아니냐! 이 시를 읽는 독자 여러분은 아무래도 현장에 있으니 하는 말이다. 자 이제, 지금까지 중언부언 끼적여온 계간평의 맥락을 빌어 아래의 시를 읽어보시오. 40매 청탁의 계간평이 53매를 넘어서고 있다. 이런다고 원고료를 더 받는 것도 아니어서, 글은 이만 줄인다. 여름호에 계속.
너는 대체 무슨 방을 원했느냐고 물을 것이다. 나는 원했다. 아무도 없는 방과 혼자 있는 방과 같이 있는 방을.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너는 물을 것이다. 이 방은 이미 실현됐다고 말할 것이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나 혼자 너와 얘기하고 있으니 심심하고 무료하고 떠들썩하기까지 한 이 방에서 누가 먼저 나갈 것인가. 나는 아니다. 너도 아니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 김언, 「방」(『시로여는세상』 2013년 겨울호)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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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네 잘 알겠습니다 반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