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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신비에 쌓인 섶다리, 그리고 적멸보궁 박종인의 여행편지 12 - 영월1
강원도 영월로 갔습니다. 온천지가 푸른 신비에 싸인 아침이었습니다. 흘러가는 서강(西江) 물살 위로 그림자가 비춥니다. 그림자를 자세히 보니 거기에 숲이 있고 소나무가 있고, 산이 있고, 다리가 있습니다. 그 모든 사물을 반영하는 강물, 그리 맑은 강물은 태어나서 처음 보았습니다.
이 맑은 물을 보십시오
그 맑은 물을 가로지르는 다리 이름은 섶다리입니다. 강원도 영월 판운리 서강 자락에 있습니다. 해마다 가을이면 다리가 서고, 해마다 장마가 지면 떠내려가는 ‘찰라적’ 다리지요. 그 찰라의 미학이 아쉬워 사람들은 일년 삼백육십오일 굳건하게 서 있도록 다리를 만들었습니다. 다리를 건너고, 맑은 강물을 바라보고, 그리고 석가모니의 흔적이 남은 적멸보궁(寂滅寶宮)으로 갔습니다. 여행의 주제? 희망과 소망과 꿈과 여유입니다. 다음 주까지 두 번으로 나누어 영월에서 편지를 띄웁니다. 들려드릴 이야기가 하도 많아서 한번으로는 너무 부족합니다. 오늘 띄우는 영월 편지는 수도권에서 하룻나들이로 충분한 코스를 잡았습니다.
아이가 학교로 갑니다. 눈에 보이는 천지사물이 모조리 맑습니다.
하나, 푸른 다리를 만나다 - 서강 섶다리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푸른 아침이었습니다. 가볍게 구름이 내려앉은 하늘 아래에 서강이 흐릅니다. 정확하게는 평창강입니다. 저 멀리 산자락이 구름을 바라보고 있는데, 강을 자세히 보니 낯선 다리가 하나 눈을 붙잡습니다. 강의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을 잇고 있으니 다리가 분명한데, 보통 봐왔던 콘크리트 다리도 아니고 징검다리도 아닙니다. 나무입니다. 통나무를 잘라 교각으로 삼고 그 위에 흙을 덮어쓴 솔가지가 가득한 살아 있는 다리입니다. 그 살아 있는 다리가 푸른 아침 햇살에 고고히 서 있었습니다.
영월 주천면 판운리의 아침입니다.
사람들은 그 다리를 섶다리라 불렀습니다.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득한 예부터 조선 사람들은 작은 나무들을 묶어서 다리를 만들었습니다. 그 작은 나무들을 우리말로 섶나무라 합니다.
판운리의 섶다리도 그러합니다. 해마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버드나무를 켜서 교각을 만들고, 소나무 가지와 참나무 가지를 쳐서 상판을 만들고 그 위에 솔가지를 얹고 흙을 쌓아 사람이 밟을 길을 냈습니다. 그러다 이듬해 장마가 지면 섶다리는 자기의 소임을 다하고 하류로 떠내려가곤 했습니다. 이를 악물고 붙어 있기 보다는 자연으로 회귀하는게 이치에 맞다는 섭리를 사람도 다리도 알고 있던 게지요.
지금 판운리의 섶다리는 섭리와 무관하게 오래오래 서 있습니다. 그리움을 만족시키려는 사람들에게 그리움을 오래도록 보여주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오래 버틸 수 있도록 다리를 새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해마다 가을이면 섶다리가 주인공이 되어 축제가 벌어집니다. 그 왁자지껄한 시간은 지나고, 한적한 다리가 은근히 사람들을 부릅니다.
오래오래 머물렀습니다
나는 거기 강변에 오래 머물며 강물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산 그림자와 강변의 나목(裸木) 무리, 그리고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맑은 강물이 섶다리와 함께 그려놓은 거대한 풍경화 속에 내가 있었습니다. 먼 곳에서 오직 다리 하나 보기 위해 서강까지 가리? 꼭 가보십시오. 세상 사는 데 마음 헛헛해진 분들에게 서강 섶다리 일별을 권합니다.
천 개의 돌 속에 천 개의 마음
둘, 천 개의 돌 속에 천 개의 마음을 만나다 - 법흥리 돌탑
법흥리로 갔습니다. 다른 곳에서 게으르게 시간을 허비하느라, 날이 저물 무렵이었습니다. 법흥리에는 계곡이 있고, 계곡 끝자락에는 법흥사 적멸보궁이 있습니다. 적멸보궁을 가는 길목에 급하게 차를 세웠습니다. 길 왼편에 무심(無心)으로 쌓은 돌탑들이 모여 있는 것이었습니다.
석공(石工)들이 막 작업을 중단하고 새참을 먹으러 간 듯, 드럼통으로 만든 난로에는 온기가 남아 있고, 공구들이 이리저리 앉아 있습니다. 커다란 물레방아 옆으로 탑들이 도열합니다. 잘 생긴 원추형 탑에 못난이 바보 탑까지, 아직 탑으로 완성되지 못한 크고 작은 돌들 위로 사람들의 소원이 쌓여 가고 있었습니다. 그늘진 절벽 아래 있는 탓에, 그 빛깔은 푸릅니다. 푸르디 푸릅니다.
못 생겨서 더 정겨운 탑
누가 이 거대한 작업을 하고 있을꼬. 의문은 100미터 뒤에서 풀렸습니다. 도로 위로 플래카드가 나부끼는데, ‘나의 복, 소원 탑쌓기 체험장’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래요, 길 떠난 나그네들과 마을 주민들이 합심해서 쌓는 탑인 거예요. 명산대처마다 객들이 쌓아놓은 돌탑들이 많지요.
어느 개인이 아니라 법흥리를 스쳐가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모아 쌓는 탑, 쌓는 소원이었습니다. 각 지방자치단체에서 벌이고 있는 웬만한 이벤트의 몇 백 배는 되는 감동에, 나는 또 거기에 오래 머물렀습니다. 기대도 예상도 하지 못했던 마음의 선물이었습니다.
적멸보궁 연등
寂·滅·寶·宮(적멸보궁) - 아무도 말을 하지 않다
계곡 끝에 법흥사가 있습니다. 굉장히 큰 절입니다. 행정구역으로는 영월군 수주면 법흥리. 선덕여왕 때인 643년,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정진 도중 문수보살을 만나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받고 돌아와 창건한 절입니다. 불상을 모신 다른 절과 달리, 석가모니 진신사리가 있기에 불상이 없습니다. 이 땅에는 그런 적멸보궁이 다섯군데 있습니다. 여러차례 중건을 거쳐 오늘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발굴 작업이 진행 중입니다.
님, 반드시 법흥사 적멸보궁 가는 길을 오르십시오. 우람한 송림으로 에워싸인 그 오솔길은 명상과 사색의 길입니다. 길을 오르다 뒤돌아 보십시오. 하늘과 맞닿은 아홉 봉우리들이 그리 아름답습니다.
적멸보궁 가는 오솔길. 세월 잊은 나무들이 엉켜 있습니다
어두운 오솔길을 오릅니다. 하늘이 연보라빛으로 물들어가는 시각이었습니다. 돌로 만든 축대를 지나, 오른편으로 급하게 꺾인 오솔길. 적멸보궁 가는 길입니다. 가로등이 켜집니다. 세월을 알 수 없는 나무 뿌리들이 발길을 붙듭니다. 모퉁이를 지나고, 또 모퉁이를 지나고, 돌계단을 만났을 때 위를 바라보니 거기에 연등들이 발갛게 빛나고 있습니다. 나는 신성의 공간에 닿은 것입니다.
앞마당 세 방향을 연등들이 호위하고 있고, 한쪽에 적멸보궁이 있습니다. 옆문으로 힐끗 속을 바라봤습니다. 불상 대신에 진신사리가 나무 상자 속에 들어 있습니다. 몇몇 아낙네들이 큰절을 하며 소원을 빕니다. 한 분은 오래도록 일어나지 않고 시간이 멎은 듯 멈춰 있습니다.
어둠 속에서 연등이 나를 반겼습니다
사진은 감히 찍지 않았습니다. 아니, 굳이 찍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 옛날 석가모니가 큰 깨달음을 얻은 인도 부다가야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순례를 온 한 프랑스 구도자에게 물었습니다.
“깨우침은 그대 마음에 있다고 들었다. 그런데 왜 이곳까지 왔는가.”
그가 대답했습니다.
“성지(聖地)는 달리 성지가 아니다. 그곳을 성지라고 생각하고 온 사람들의 마음이 모여서 성지를 만드는 것. 미운 맘 먹고 성지에 오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나.”
똑같은 마음입니다. 진신사리가 있어 성지이지만, 그곳을 찾은 사람들의 선량한 마음에 더욱 더 성지가 되는 것. 그 마음이 어둠 속 연등처럼, 한 줄기 촛불처럼 환하게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2008.11.
돌담 사이 처마 밑 옛집의 향기… 고향의 그리움 달래주네
논산 명재 고택과 관촉사
잊힌 것에 대한 그리움이 옛 집에 배어 있다. 잊힌 선비 정신, 잊힌 우리 것, 잊힌 여유…. 논산 명재 고택에 어둠이 깔린다.
충남 논산은 한 나라의 수도였던 이웃 마을 공주와 부여에 가려 비산비야(非山非野), 산도 아니고 들도 아닌 밋밋한 얼굴로 천 년을 살았다. 장군 계백과 오천 결사대가 5만 나당 연합군과 백제 최후의 전쟁을 치른 이래 논산은 그랬다. 망국(亡國)의 설움과 계백의 충절을 버무려 천오백 년을 버티며 살았다. 윤완식(57)은 그 논산벌에 산다. 그가 사는 18세기 한옥 명재 고택은 문화 답사의 목적지며 동시에 드물게 하룻밤을 묵을 수 있는 우아한 고택이다. 논산 관촉사 은진미륵의 두 얼굴. 근엄한 앞모습과 장난기 가득한 옆모습.
◇고고한 선비의 숨결, 명재 고택
그리고 계백 유적지와 개태사로 간다. 계백 유적지는 논산의 비장한 얼굴이다. 왜(倭) 나라에 전수했던 백제의 군사기술, 그리고 계백의 무덤과 관련 유적들이 있다. 개태사는 왕건이 지은 절이다. 고려 왕조와 운명을 같이해, 조선 시대에 허망하게 사라지고 터만 남았다가 일제 때 중창됐다. 볼 거리는 딱히 없으나, 본전에 모신 석불 3존과 철확, 그러니까 무쇠솥은 가치롭다. 논산 사람이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이 꼭 묻는 질문이 있다고 한다. "은진미륵 보았니, 개태사 철확 보았니, 강경 미내다리 보았니." 일제 때 지름 2m, 둘레 6.28m, 높이 97㎝인 이 가마솥이 들판에서 발견되면서 절도 다시 지어졌으니 이승에서나 저승에서나 개태사 철확은 인기다.
2013.02.07. /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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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음의 정원 원문보기 글쓴이: 마음의 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