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의 발자취 및 현황
문명을 볼 때 기후 참 중요하죠. 하지만 식량에 대한 한쪽 면만 보면 안 됩니다. 인간 이 살기 위해서는 식량쪽도 중요하지만 그 외의 의식주 전반에 관한 여러 요소가 함 께 옵니다. 정치와 경제 문화 등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작용하듯이 식량증산에 따른 도구 역시 중요하거든여. 어떤 목적을 위해서는 그 수단이 필요하듯 그 수단에 수반 된 것도 역시 고려해야 하죠.
양자강쪽(강남)에는 광물자원과 같은 지하자원이 드물 죠. 반면에 황하쪽(강북)에는 지하자원이 풍부하며 그에 따른 운송의 이로움과 선대 문명인 배달,조선이나 다른 민족들의 우수한 문화를 얻기가 쉬웠죠. 전쟁에 대한 두려 움도 크지만 그보다 더 큰 지리적인 이점이 더 많이 작용한 것이죠. 외형적으로 사람 을 볼 때도 그 사람의 얼굴만 보지 않죠. 그사람의 앞면,뒷면,옆면도 보아야 하죠. 그리고 그의 내면적인 모습까지 보려고 노력해야 보다 더 진실에 다가갈 수 있죠. 먹는 것에 대한 것으로 먼저 예를 들 어 설명했지만 중요한 것은 다른 면과 함께 종합적으로 봤으면 해요. 분석만 하고 끝 나면 수술한다며 배만 찢어놓은 것이랑 같죠. 종합도 함께 해야 그 수술에 대한 치료 도 할 수 있는 것이죠
한민족 모두가 유목만 했던 것도 아니고 농경만 했던 것도 아닙니다. 한민족의 일부 는 유목하고 또다른 일부는 농경을 하며 둘 다를 병 행한 부류도 있었습니다. 고대의 한민족의 영토는 드넓었으며 같은 한민족이지만 각각의 지역에 맞게 생활하였을 뿐입 니다. 지금의 각 지역들을 보세요. 어느 한나라가 과학이 발달했다고 해서 그것만 신 경썼던 것도 아니고 관광이 발달했다고 해서 그것만 주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후진국 이라 여겨도 과학이 발달한 나라도 있으며 구식과 신식이 함께 공존하는 나라도 많습니다. 인도,지나,러시아,프랑스, 이탈리아 등등 각 지역마다 그에 맞게 생활을 영위해 갈 뿐입 니다.
너무 한쪽만 보지 마세요. 지금의 지나를 보세요. 해안쪽과 내륙을, 도시와 시골을,부자와 서민들. 넓은 땅덩어리에서 여러가지 방식으로 어우려져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농경을 이미 고대부 터 널리 하고 있던 민족이면서도 강맹한 유목,기마민족이기도 한 민족이 바로 우리랍 니다. 한민족의 수많은 지류 중 어느 하나만 보고 그 지류가 전체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랍니다. 그 지류들을 하나하나가 모여 적용될 때야 한민족을 알 수 있는 것이죠. 유목과 농경을 모두 한 부 여와 고구려는 대표적 반목반농 국가였습니다. 물론 그들의 후예는 말할 것도 없고요
그리고 부여와 고구려는 배달과 조선을 이어받은 나라 중 하나입니다. 유목이나 농경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이헌종이란 이가 <동북아시아 중기구석기문화 연구>에 서, 대륙에서 리프팅된 제 문화권의 유사성에 대해 말한 것이 있는데 검색해보면 도움 될겁니다
역사상에서 홍산 문화와 동일한 석묘계의 묘장법을 채용하고 있는 나라가 고조선이므 로 고조선의 전 단계인 홍산 문화는 고조선의 선 조들이 이룩한 문화로 보지 않을 수 없다는 주장이 그래서 힘을 얻고 있는 것입니다 이 요동, 요서 일대에 발굴된 이 청동 기 유물은 황하유역에서 발굴되는 청동기 유물보다 연대가 훨씬 빨라 중국동부지역 에 발견되는 청 동기에도 상당한 영향 을 주었을 것으로 예상되기까지 합니다
청동기 문화의 실존근거를 홍산문며의 발굴로, 홍산문명의 고조선이나 동이와의 연관 성을 묘실문화의 유사성으로 서술하고 있죠. 그리고 청동기 문명의 원조로 공인된것 은 유목민족인 스키타이인쪽에서이고, 유목민족의 이동성이라는 특성때문에 청동기 문명은 '초 원길' 즉, 지금의 고비사막북쪽과 시베리아 삼림지대 사이에서 서로는 카 스피해와 소아시아 헝가리지방 동으로는 만주와 연해주에 이르는 스텝기후지역인 대초원을 따라 유목민들끼리의 교 류로서 퍼진 것으로 보는 것이 세계사적인 상식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중고등학 교 교과서에도 나오는 것이구요..그래서 특히 동북아 고대에는 유목민족=청동기문 명, 농경민족=신석기문명이라는 공식을 적용하는 것이구요
그래서 농경문명의 우월성에 대한 패러독스에서 벗어나 고대에는 유목민족의 문명적 우위성과 특성에 대해 연구해야 한다는 논조의 책 도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청동기를 전파한 스키타이인 부터 서흉노의 갈래인 훈족, 대제국의 몽골족등을 가장 중심 예로 들면서 말이지요
빙하기는 기원전50-42C까지 엄청난 강우량증가시기를 겪고 다시 기원전42-33c까지 감소를 보이다가 기원전24C에 증가를 보여 건조한 사막지대까지 소택지화가 진행된 다 합니다..... 만주의 경우도 별반 다름이 없어 지금처럼 건조한 상태가 아닌 조금 기온이 높은 다습 한 곳이었지요.....그러므로 산해경의 곳곳에 지금은 보이지 않는 대나무 생장의 기록 이 보여집니다.....대나무는 후에 없어진 것이지요......
숙신의 화살인 <호시>도 그걸로 만든 것이 많습니다....하지만 한웅배달국의 갈래왕 조 상나라와 주나라시대에 나타나게 되는 죽간은 사용하지 않았고 그 대신에 그런 지 역에서 잘 자라고 있던 나무를 써서 껍질이 있는쪽을 얇고 반듯하게 베어내면 큰 손톱 모양의 단면을 가진 한쪽은 둥글고 한쪽이 평평한 가벼운 나무판이 됩니다......거기 에 불로 지져서 녹도문을 새겼을 것입니다......단순한 뜻새김부호가 많았겠지요.......
목간이라고도 볼수 있겠지만 아직은 조금 그렇네요.....이것이 서토(중원대륙)로 들어 가 죽간도 되고 갑골문으로도 달라지며 또 불에 지져 뜻을 아는 걸 본받아 갑골점을 쳤을지도 모릅니다.....실제로 소부리씨는 오래 전부터 짐승의 넓적한 뼈를 사용하여 뼈점을 쳐왔지요.....상(은조선)나라에서도 거북의 등껍질을 쓰기에 앞서 소부리씨(예 맥족)와 같은 짐승의 넓적한 뼈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근세고려에 들어서면서 닥나무로 종이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뛰어난 재질의 종이라 만주와 몽골, 중원대륙 등 아시아 전지역에서 닥나무종이가 최고의 상품으로 떠올랐 죠. 그래서 근세조선의 닥나무종이 한지가 유명해진 것이죠. 타림분지塔爾木盆地(탑리목분지)는 David.H.Childress의 <중국..중앙아시아..인도 의 잃어버린 도시들>이라는 글에서도 기원전3415년까지 민물호수로서 이루어졌으며 이 커다란 호숫가 근처에 이 곳으로부터 나온 타림강과 여러 시내들이 흘렀다고 하였습니다. 고비사막은 이때 기름진 들로서 호수의 기슭에 있었는데 곤륜산맥이 타림호의 남쪽 언저리를 이루고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지구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자연환경을 끊임없이 변화시켜왔고 변해갈 것입니다. 특히 노아의 방주로 유명한 홍수가 일어나던 때가 기원전24C입니다. 이 당시의 홍수는 지금의 터키지역인 소아시아뿐만 아니라 중동,동아시아 등 전세계 적인 홍수기였죠
한웅배달국은 지금의 미국이 51개의 나라인 여러 주들이 뭉친 연방국가처럼 크게 아 홉나라의 연방국가였죠. 물론 한웅배달국의 후예인 단군조선국 역시 여러 제후국을 거느린 연방국가였습니 다. 한웅배달국의 연방제후국 중 하나였던 수메르(수밀이)는 외세에 의해 무너진 것이 아 닙니다. 과거 서양에서 노아의 방주로 일컬어지는 전세계적 기상이변인 홍수에 의해서였습니 다. 물론 그 지역마다 홍수에 대한 기록들이 남아있습니다. 어느 것은 정사로 또 어느 것은 신화, 종교서적(성경) 등등의 방식으로... 이 대홍수라는 천재지변으로 수메르는 무너진 겁니다. 그 뒤 백인민족인 아카드족에 게 혼혈정책을 강요당하고 중동을 지배한 모든 것을 철저히 파괴당하고 말죠. 중원대륙에 있던 한민족연방국가들 그것도 상(은조선)나라 이전의 요,순 임금시대 나 하왕조를 비롯 여러 우리 제후들이 홍수의 범람을 막으려고 한웅배달과 단군조선에 도움을 청하고 받은 기록도 있죠
그래서 그들은 치수법을 배워 범람하는 홍수로 인한 비옥한 토지를 가질 수 있었던 것 이죠. 그리고 징기스칸이 유라시아에 대제국을 세웠을 때 한웅배달이전 한민족의 시조 환국 을 재현한다는 뜻에서 제후국의 이름을 차카타이 한국,오고타이 한국,킵착 한국, 일 한국 등으로 붙이죠
제후국의 왕 또는 어떤 지역의 우두머리를 나타내는 말인 한(汗)은 하늘을 뜻하는 글 자인 한(桓)에서 나온 이름입니다. [주: 단군조선 이전의 우리나라는 한국(桓國) : 고대한국--> 배달한국)즉 한(桓)에서 한(韓), 한(漢), 한(汗)이 나온 것입니다.] 또 한(汗 : HAN)이 몽고로 건너가 칸(KAN : 징기스칸)이 되었으며, 징기스칸의 유럽 정복 때 서구로 건너가 킹(KING)이 되었으며, 그후에 전세계로 퍼지게 되었습니다.
몽골의 칸(KAN)이 서구의 킹(KING)이란 단어로 변화되어 자리잡는 이러한 과정은 하버드대학에서의 연구결과로도 발표된 바 있습니다. 그리고 한류방 세셰속의한국 게시판에서 2007-04-26에 썼던 [위대한 한글]이란 글과 그 댓글,리플등을 읽어보면 꽤 도움이 될 겁니다
물론 2007-05-12에 썼던 [종합보충]이란 글도 읽어봐도 좋을 것입니다. 내용이 길어 서 인내가 필요하지만... 다음 게시판이 최근에 다시 리뉴얼하여 한류방 자유게시판 을 없애는 바람에 그 게시판에 있던 글쓴이mars로 검색해서 보던 자료목록들이 보기 어렵게 됐습니다
굳이 메뉴가 사라진 한류방 자유게시판을 보려면 통합검색이나 세계엔에서 /한류방 자유게시판/이라는 단어를 대입해서 거꾸로 올라가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 자유게 시판을 어렵게 찾아들어가서 다시 글쓴이를 mars로 검색하면 자료목록들이 나옵니 다
본인이 처음 한국상고사의 제왕의 계보를 보고 처음에는 의문이었습니다. 집권기간에 따른 수명이 너무 길어 허황되다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여러 곳에서 조사를 한 결과 꼭 허구라고 볼 수도 없다는 것이었습니 다
이 분들의 연세를 보면,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상식으로 도저히 수긍이 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잖아도 한국 상고사를 부정하고 왜놈들과 쥐나 그리고 한국의 식민주의사관 학자 들에게 좋은 공격 목표의 빌미가 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그전에 부정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것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야 곱은 147세였으며 아브라함은 175세, 모세는 120세, 아담은 930세, 그의 아들 셋은 912세, 노아의 방주 로 이름난 노아는 950세까지 살았다는 기록에 비교하면 참 양호한 편입니다
그러나 그전에 부정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것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야 곱은 147세였으며 아브라함은 175세, 모세는 120세, 아담은 930세, 그의 아들 셋은 912세, 노아의 방주 로 이름난 노아는 950세까지 살았다는 기록에 비교하면 참 양호한 편입니다
그렇다면 보통 인간의 수명은 얼마나 될까?(여기서부터는 예사체를 쓰더라도 양해 ^^;) 이탈리아의 통계학자 보디오는 인간수명의 한계를 70세로 보고 있는데, 이것은 상식 적인 상한선으로서 여러 선진국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는 이야기다. 그러나 프랑,파류,파블로프와 같은 학자들은 100세까지는 생물학적인 접근이 가능하 다고 말하고 있고 르브넬이나 봐만 같은 학자는 115세 전후를 인간 수명의 한계로 보고 있는가 하면, 메치니코프,풀무산,보코모렐 같은 학자들은 150~160세로 주장하고 있다. 한편 하르렐이나 하벤 같은 학자들은 인간의 수명을 성숙에 필요한 시일의 10배로 보 고 있어 200세까지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학자들의 이론이다
그럼 실제로 공식기록에 나타난 장수의 기록을 살펴보면, 덴마크의 도라켄버그는 146세, 스코틀렌드의 잰킨스는 백육십구세, 노르웨이의 요셉 슬린트는 160세, 콜롬비아의 자봐이어 페이러라라는 백육십구세, 헝가리의 야노스 로웬 부부는 모두 장수하여 남편이 172세, 부인이 164세까지 살았는데 공교롭게도 한날 한시에 숨을 거두었고 그 머리맡에는 116세의 아들이 임종을 지켜보았다
구 소련의 코카서스 지방에 살던 사라리 오구리무스리모프는 1973년 9월에 168세3개 월만에 죽었는데 그 당시 아들은 143세였고 막내손자는 93세였다고 하며, 이 지방에는 인구10만명당 10명의 비율로 100세이상의 장수노인이 있다고 한다. 코카서스 지방 외 남이 에콰도르의 발가봐, 캐시물 지방의 훈사왕국 등도 장수자들의 천국으로 100세이상은 보통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서남 해안의 한 마을도 100세 이상된 노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장수 마을로 보도된 적이 있다. 그 외 쥐나 방중술의 원류로 알려진 유해첨은 600세, 이청운 선인은 257세에 세상을 떠났다고 1928년에 상해신보에 보도됐으며 이팔백은 무려 800세를 살았다고 한다. 달마대사는 280세, 히말라야의 성 자 바바자는 600세를 살았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위 글이 무조건 아니다라고 하는 것도 무리라고 본다
100세 전후의 집권기간은 그 개인의 집권으로 보아도 무방하고, 그 이상의 수백년의 집권기간은 개인의 집권이 아닌 왕조의 집권이라는 보는 것이 타 당하다. 나라이름은 동명으로 유지되면서 왕조만 바뀐다는 말이다. 나라를 그대로 이루고 있으면서 왕조만 교체된 역사도 세계에는 부지기수고 나라가 없어졌다가도 다시 그 나라의 후예를 자처하며 그 국가명을 쓴 역사 역시 부지 기수죠.....
가까운 예로 유럽의 왕조들이나 아랍의 국가들을 둘러봐도 알 수 있을 겁니다 @@이 상하게 이 다음 게시판에서는 숫자6과 9를 붙여쓰면 아예 입력이 안 되네요. 아마 음 란성 금칙어로 올라 애꿎은 이들만 생기는 것 같네요.@@
▒ 서량지(徐亮之) : 대만대학 교수>>>대만대학의 서량지 교수는 『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에서 "4천여년 전 한족(漢族)이 중국에 들어오기 전에 中原의 북부 및 남부를 이미 묘족(苗族:동이東夷)이 점령하여 경영하고 있었다. 한족이 중국에 들어온 뒤에 점점 서로 더불어 접촉하였다" 고 하였으며 "은(殷)과 주(周) 이전과 은나라 주나라 대에도 동이의 활동무대가 실로 오늘날(의) 산동, 하북, 발해 연안, 하남, 강소, 안휘, 호북지방, 요동반도, 조선반도의 광대한 지역을 모두 포괄하였는데 "산동반도"가 그 중심지였다" 고 하였다
▒ 왕동령(王棟齡) : 중국 역사학자>>>중국학자인 왕동령(王棟齡)은 『중국사(中國史)』에서 "한족이 중국에 들어오기 이전에 현재(의) - 호북(湖北), 호남(湖南), 강서(江西)등 지방은 본래 "묘족(동이)의 영속지"였다. 이 민족의 나라 이름은 구이(九夷)인데 임금은 치우(蚩尤)였다" 고 주장하고 있다
▒ 임혜상(林惠詳) : 중국 역사학자>>>임혜상(林惠詳)은 『중국민족사(中國民族史)』에서 "맹자가 말하기를 순(舜)임금은 동이의 사람이다고 하였으니, 오늘날 우리가 순임금은 은나라 사람의 조상임을 추측하여 알 수 있다. 은나라 사람이 바로 동이인데 동방에서 흥기하였다 은나라가 망한 뒤 기자(其子)가 동쪽 조선으로 달아난 것은 조선 역시 은민족의 소거지(사는 곳)이기 때문이다" (퍼온이 주: 은민족은 (고)조선민족과 같은 민족이라는 뜻으로 보입니다.) 고 하였다
▒ 시로코고르프 : 소련 역사학자>>>소련의 인류학자인 시로코고르프는 『중국사』 에서 "BC 3,000년경 동이족은 이미 황하 양자강 서강의 중류이동(中流以東)(강의 가운데 의 동쪽)의 중간지역에 살았으며, 지나족은 이보다 1,500~2,000년 후에 동방천자 치우(蚩尤)가 다스리는 동이족의 나라인 강회(江淮)지방에 진출하였다" 고 주장하였다
독일의 고고학자 슐리만[Schliemann, Heinrich]이 트로이를 발견하지 않았다면, 아직도 트로이의 존재는 그냥 신화의 일부나 호머의 이야기로만 치부되어 지금도 진 실이 아닌 허구로 여겨졌겠죠. 그리고 일반사람들이 우리고대사가 거짓이라 치부하는데 그것은 짱골라나 왜의 방해 때문에 우리의 유적을 조사하지 못 해서일뿐이죠. 연구나 조사할 노력조차도 안 해 놓고 무조건 거부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식민사학자들이 실증주의를 주장하는데 그럴수록 더더욱 우리의 유적을 알아보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처음부터 거짓이라는 딱지를 붙인다는 것은 실증사학에 위배 되는 짓 곧, 스스로를 기만하는 자승자박이죠
녹도(신시)문자는 산동성과 강소성,안휘성 어림의 대문구문화 유적지의 질그릇에 새 겨진 그림과 평안도 영변도호부 읍지인 영변지에 적혀져 있는 글씨 그리고 만주 흑룡강성 영안현 서남쪽에 자리잡은 길림성 경박호나 두만강 700여리의 송화강 기슭에 있는 선춘령과 부오소리지역의 새김글씨에 보입니다. 나중에 배달사람 공손헌원(황제)의 일을 적었던 같은 배달사람인 창힐이 일찍이 한웅 배달에 들어와 자부선생에게 배울 때 녹도(신시)문을 처음 보았다고 합니다
그는 이를 깨우쳐 황제(공손헌원) 밑에 일하면서 이 녹도(신시)문을 바탕으로 약 간 고쳐 만들어 새 발자국 모양으로 된 한(韓)자의 실마리를 만들어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한(韓)자의 원형인 한웅배달국시대의 녹도(신시)문자와 한글의 원형인 단군조선국시대의 가림토를 썼던 것으로 보이는데 은조선의 갑골문자보다 더 오래된 내몽골지역의 홍산배달문명에서 신시문자의 형태 의 증거를 찾았다는 지나학자가 고백을 한적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자신들의 역사가 아니라 해서 짱골라들이 그 유물들을 도로 숨기고 그 유적지역을 군사통제구역으로 하여 아무도 접근 못 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누가 증거를 들이대라 하지만 과거 우리 영토를 빼앗긴 상태니 가서 보고 확인할 수 도 없죠
이미 홍산배달문명은 세계학자들에게는 공공연한 비밀이죠, 그리고 해외사이트들에 도 그런 사실이 돌아다니고 홍산문화,하가점문화,장강문화 등 여러 배달 문화 등에 관 한 학자들 논문이 발표되고 있죠. 지금 짱골라들은 세계 여러 학자들의 유적방문조사 를 막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유적들마저 나무를 심어 파괴하거나 댐 건설이라는 미명 하에 물속에 수장시키거나 하는 방식 등으로.... 자신들의 유적이라고 우기는 놈들이 자기 스스로 그 유적들을 파괴한다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배달민족이 이룬 문명의 역사 진실이 밝혀질까봐 그 들은 그 유적들을 군사통제구역으로 해서 아무도 못 들어가게 막고 언론통제를 하고 있죠. 물론 인터넷 포털의 야후나 구글에 협박을 해서 진실을 가리고 조작하는 것도 서슴치 않죠
현재 티벳,위구르 등을 비롯한 수천만의 이민족들을 몰살시키고 여러 소수민족들을 폭력을 동반하며 역사공정하는 등 끊임없이 조작된 내용을 세뇌교육시키고 있죠. 하 루라도 빨리 여러 민족들을 짱골라화시키기 위해... 법륜궁 수련자들을 잡아다 고문하고 장기 적출은 기본이죠. 근래에 뉴스나 신문기사 에서도 나온 내용이니 검색하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몇몇 어떤 내용들은 한국내에 친쥐나를 동조하는 무리가 있는지 몇몇 내용들 은 아예 인터넷접근을 막고 있더군요. 법륜궁을 나타내는 파~뭐시기라 치면 마치 음란성의 내용을 차단하는 양 접근이 안 되죠. 한국정부의 통신부에서 음란사이트 차단과 함께 같이 도매급으로 취급하는 모 양입니다
독일학회에서도 짱골라들의 저런 유적개방을 막고 학자들 조사를 막는 것에 대해 항 의를 하는 중이죠. 전에 러시아학자들이 티벳의 무슨 피라미드라나 몽골 등의 동아시 아의 유적들에 대한 학설발표를 짱골라들이 말도 안 되는 걸로 덮어씌우기 바쁘더군 요. 혹시 매일 짝퉁만 생산하는 짱골라들이 러시아나 미국,독일을 비롯한 유럽보다 과 학 이 앞선다는 생각은 안 하겠지?
러시아 학자들의 티벳의 피라미드 발견이나 몽골과 만주,연해주의 유적들 조사했던 것은 잘 알려진 일이죠.독일학자들의 만주,몽골지역의 고분,피라미드 등 조사와 함께 말이죠. 오마이뉴스나 중앙일보에서도 일부 다루었던 내용이니 찾아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혹은 동북공정이다 서북,서남공정 등으로 날조하고 언론통제하는 짱골라 등 의 행태나 쥐나학자들의 태도가 모범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없겠죠.
짱골라들과 왜놈들의 만행이 굉장히 합리적으로 보인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뿐... 뭐 한국에는 모든 이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조국마저 팔아먹는 친쥐나,친왜,친미 등의 극우매국노들이 판치는 나라니.....진실된 자신의 역사마저 부정하는 나라이니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죠
KBS역사스페셜시리즈에서도 홍산문화 등을 비롯한 여러 배달문명에 관한 내용을 방 영한 적이 있고, MBC에서도 홍산배달문명을 뉴스형식의 방송을 한 적 있죠. 그리고 연세대교수가 요하문명론 이라는 책도 올해에 출간했죠
한웅배달국의 신시에서 나와 중원대륙의 산동성,하남성을 경유한 배달민족 복희씨는 하남성의 진陳에 터전을 잡게 되죠. 이때 복희씨와 함께한 배달민족 비치수리씨(화서華胥부족)들은 새부리(산동성)의 지 마울(제음濟陰)지역에 살림터를 마련하여 크게 일어나게 되고, 복희씨와 함께한 배달민족 누에검씨(뇌신雷神부족)들 역시 산동성지역에 자리를 잡 게 됩니다. 이 누에검씨들은 일찍이 산뽕나무 잎을 먹고 아름다우면서도 고운 실을 뽑아내는 천 잠天蠶(하늘누에)을 잘 다루었는데 복희씨를 따라 가는 중 산동성을 터전으로 잡게 되어 이 산동지 역은 산뽕나무 누에비단실을 만들어내는 누에치기가 성행하게 되죠. 배달민족인 복희씨는 대략 기원전 3528~3413년경의 사람으로서 음양오행의 환역법桓易法을 갑자甲子로 시작하는 복희팔괘를 창안하게 됩니다. 그의 무덤은 현재 산동성 어대현魚臺縣 부산鳧山의 남쪽에 있습니다
참고로 환역(桓易)이란 한웅배달국시대부터 단군조선국시대로 전래된 철학으로서 세 상만물의 구성과 그들 사이의 운행이치를 밝힌것이죠. 훗날 복희가 한웅배달국의 환역을 이용하여 新易을 창안하니 이를 희역(羲易)이라 하 며 한웅배달국의 갈래왕조들인 하(夏)나라 때는 연산역(連山易)으로, 상(은殷조선)나라 때는 귀장역(歸藏易)으로 그리고 주(周)나라때는 문왕과 그 아들 주공이 이를 독자적으로 해석하여 풀이를 해 놓은 주역(周易)으로 변모되어 전해지게 됩니다. 하여튼 여기서 눈여겨 볼것은 한웅배달국시대의 자부선생이란분이 삼청 궁에서 윷놀이를 만들어 환역을 강연했다는 것이죠. 이러한 기록으로 본다면 환역의 역사는 단군조선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듯 합니 다. 환역의 그당시 모습은 알길이 없으나 윷놀이를 가지고 강연하였다 하므로 그것을 단 서로삼아 추론은 가능하리라 봅니다
지나支那란 진시황의 진나라 진(秦)’의 음 [chi’n]이 전와(轉訛)하여 서방 제국에 치나(Cina) ·틴(Thin)으로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지나支那란 용어에는 한민족의 갈 래 민족 지류란 뜻이 함께 담겨있습니다 쥐나 짱골라들의 사서를 주의깊게 들여다 보면 옛날부터 쥐나족들은 북으로는 황하 의 위쪽과 동으로는 태행산맥을 경계로 결코 발을 들여놓지 못 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왜 그들의 도읍이 장안과 낙양을 벗어나지 못 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황하를 경계로 한 하남에서 역사가 이루어진 것이지요. 그 시기 북경을 비롯한 그 주변의 모든 땅은 배달민족의 것이었으며 황하 위쪽은 짱골 라 자신들이 말한 것처럼 서쪽은 서융과 백이 동쪽은 북융과 산융이라는 융적의 땅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진시황이 동으로 순행할때도 그렇고 초한의 싸움도 어디에서 주로 일어났는지 보시면 금방 알게 될 겁니다.
참고로 서융,북융,산융 등으로 불리는 융족은 사실 배달민족의 갈래입니다. 서융만 해 도 한웅배달국 초기에 배달민족인 반고가 가서 세운 배달제후국의 사람들입니 다. 백이의 이夷는 배달민족의 또다른 표현이니 말 안해도 우리 민족이란 것을 아실 것입 니다. 그리고 진시황의 진나라 역시 한웅배달국 갈래왕조입니다. 진나라는 배달민족 그 중에서도 흉노계의 나라입니다. 배달민족은 한웅배달국과 단군조선국으로 시대를 변천해가면서 여러 민족으로 나누 어지는데 북쪽은 배달계 흉노로 서쪽은 배달계 융족 등으로 동쪽은 배달계 동이로 중원대륙에는 회이, 견이, 풍이 등 여러 배달계로 나누어집니다. 그래서 배달민족 말 할 때 구환九桓,구이九夷 등으로 불리는 것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갈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 흉노는 돌궐,선비,몽골,거란,오환,저족 등으로 갈라지죠. 융족은 이후에 강(티벳)족과 흉노의 갈래들인 달단(타타르), 중앙아시아의 여러 부족 들로 갈라지고 합쳐지는 등 변화를 거듭합니다. 동이족 역시 예족,맥족,환족과 숙신,말갈(여진)족 등으로 갈라지고 합쳐지는 변천을 겪습니다. 서흉노는 유럽으로 진출하여 아틸라의 천하를 이루어내죠. 아틸라의 죽음 이후로 그 들은 지금의 헝가리로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선비족은 수나라와 당나라 북위 북연 등 여러 나라를 세우죠. 거란족은 요나라를 세우고, 여진족은 금나라,청나라를 세우죠. 몽골족은 원나라를 일 으키고, 우리는 북부여,동부여,졸본부여(고구려),남부여(백제),대진국(발해) 등을 세우죠. 서돌궐(투르크)은 아랍으로 건너가 오스만투르크(터키)를 이룩하죠
쥐나 짱골라들의 왕조는 한,송,명 셋뿐이죠. 그 외의 대부분 왕조들 삼황오제시대,하,상(은조선),주,춘추전국,진,수,당,요,금,원, 청 등과 북부여,동부여,졸본부여(고구려),남부여(백제),대진국(발해) 등 모두는 한웅배달국과 단군조선국의 제후국 또는 갈래왕조국가들입니다
게르만족이 서고트족,동고트족,반달족,알란족,주트족,색슨족,앵글족 등으로 나누어졌 었죠. 배달 계열 훈족(서흉노)의 유럽침입으로 이들 게르만족계열이 로마(이탈리아), 브리티니아 (영국),갈리아(프랑스),이베리아반도(스페인,포르투갈) 등 서유럽으로 이 동해 퍼지죠
이 사실들에 관한 학자들의 논문도 여러 편이고, 독일의 ZDF방송국에서 도 훈족에 대 해 다큐방송도 있었죠. 어차피 훈족이 흉노계라 하든 투르크(서돌궐)계라 하든 어차피 배달갈래민족이죠. 배 달갈래 흉노계가 나중에 선비,오환,돌궐,거란,몽골,저족 등으로 나누어진 것이니...
보다 많은 이들이 알기를 바라며 옛고토를 회복할 뿐만 아니라 유쾌,상쾌,통쾌한 팍스 코리아나가 되도록 우리 모두 다물하도록 노력했으면 합니다. 근세조선이 침묵을 지 키고 있을 때, 왜국은 1592년이후부터 포르투갈의 조총 등을 비 롯한 문물,난학(네덜 란드 학문),프랑스,독일,미국 등 많은 서양의 문물을 300년간이 나 꾸준히 받아들이 고 발전시켜 지금의 강국이 되었습니다. 물론 독일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수십개의 소 국으로 갈라진 약소국 독일은 끊임없이 주변 유럽의 열강에 당해왔습니다. 하지만 비스마르크의 철혈정책,그로 인한 과학의 집중적 투자 등으로 독일은 하나 의 나라로 통일할 수 있었으며 그 저력 으로 세계1,2차대전까지 일으키는 최강국이 된 것입니다. 서양은 동양으로부터 문 물 을 받기 시작해 서 그리스,로마 문명의 기초를 다질 수 있 었죠. 하지만 중세시대의 미 쳐버린 종교때 문 에 건축 기법 중 시멘트공법마저 잊어버 릴 정도로 암울한 시대 죠
하지만 아랍의 문명을 다시 받아들이면서 르네상스를 이루 어 과거의 학문,문화 등을 서서히 되살리기 시작하죠.세계최초의 종합병원이나 도서 관 아라비아 숫자 등 뛰어 난 동양 아랍문명이 없었다면 어림도 없었죠. 하물며 플라톤 이나 아리스토텔레스 등 의 여러 고대 저서 등이 아랍의 도서관에 보관되지 않았다면 아마 서양의 문명은 벌 써 사장되 어 한참이후에나 다시 발전을 이루어 나갔을 것입니다. 이 부분은 전에 ebs 교육방송 에 방영된 bbc역사관련 다큐멘터리 등에서 나왔던 내용입니다. 배달부터 시작하여 고구려,발해까지 위대 한 선조들이 이룬 업적을 짱골라에게 우리 조상까지 다 빼앗기 고 역사마저 빼앗기게 만든 그 후손이 못 나서 그렇지 그 조상이 못 난 것은 아니죠. 아무리 뛰어나도 그 후 손이 못 나면 아무 소용없죠. 우리의 전례뿐만 아니라 잉카,마 야,캄보디아의 크메르, 인도의 여러 문명,종교때문에 모든 발전이 거의 정체되게 된 근 동,중동의 아랍문명 등등...
서양 역시 마찬가지죠. 동양의 문명이 없었으면 다시 르네 상스를 일으키지도 못 했죠. 또 회계제도는 우리나라도 개성상단의 사개송도치부법이라는 훌륭한 복식부기법이 예전부터 사용되어왔고 시스템도 현대 서양의 그것에 비해 결코 뒤쳐지지 않습니다. 숫자는 한웅배달시대에는 산목으로, 단군조선시대에는 산대 등으로, 시간이 많이 흘 러 근세조선에 들어서는 쥐나의 숫자나 조선산이라는 고유숫자도 사용했습니다. 물론 숫자표현체계는 아라비아숫자가 더 쓰기 편한듯 싶습니다
이 우리부기법은 서양보다 200년이나 앞서있어 1910년대 오스트리아 경영학회에 보 고되어 고려의 회계시스템이 아라비아를 거쳐 유럽에 전파되었다고 주장되었으나 왜국의 학자가 이를 반박하는 논문을 발표하였고 당시 왜국의식민지배를 받던 우리나 라의 상황때문에 묻히게 됩니다. 물론 금속활자에 대한 앞선 사용 또한 마찬가지죠. 참고로 서양이 동양을 서서히 따라붙다가 17세기초에 이르러, 여러 분야의 발전 에서 조금씩 추월하기 시작하죠.
그리고 서양이 세계대항해시대를 열게 된 배경 중 자연의 영향도 큽니다. 15세기에서 18세기까지 유럽은 소빙하기시대였거든요. 그래서 최북단에 있던 영국은 식량문제 등을 비롯한 여러 악조건을 타개하기 위해서 상공업을 장려시키고 과학을 위시한 학문을 공부하 고 세계로 뻗어나갈 필요성이 컸 죠. 이런 복합적인 이유로 끝내는 산업혁명을 일으키 고 그리하여 전세계에 미국,호주 등 의 영연방이 생기게 된 기저가 되죠
7000년을 대륙의 지배자로 군림하다 그 후 2000년은 혼란을 거듭하다 이제는 이렇게 반도에 처박혀 옛 영광은 다 망각하게 되었지만 다시 일어서면 됩니다. 다른 이들이 하는데 위대한 문명의 후손인 우리가 못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역사는 돌고 돕니 다 과거 반도신라나 근세조선같은 어리서은 시대가 있었지만 그들 백성이 나쁜 것이 아 닙니다. 그 위정자들이 나쁜 것이죠
백성들의 판단을 흐리게 하고 악용한 위정자들 이 나쁜 것입니다. 김씨,이씨,박씨,고 씨,강씨,연씨 등의 각 가문이나 혹은 만주,연해 주,경상도,전라도,함경도 등 각 지방이 나 또는 각 왕조 등에는 언제나 영웅과 매국노가 있어왔습니다. 그러니 하나 를 보고 나머지마저 나쁘다고 판 단하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는 자제했으면 합니다. 전두환 이나 노태우 같은 쓰레기 도 있고 한국동해영역을 왜놈들에게 거의 팔아먹은 김대중 도 있습니다
지금도 한국에는 매국노들을 비롯하여 쓰레기 정치가들이 각 지방색을 들먹여서 가 뜩 이나 좁은 나라의 국민들을 쪼개고 서로에게 불화를 일으키도록 만들죠. 우리는 절 대 그들의 어리석은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됩니다 반도내의 배달쥬신족이 다른 지역 의 같은 배달쥬신족들을 배척해서 수많은 전쟁을 스스로 불러낸 것 아닙니까 그러니 우리는 통합하여 앞으로 나아가야지 그렇지 못 하 고 분열하면 지금의 한국은 아니 반 도의 배달쥬신족은 또다시 수많은 종족으로 갈라지고 약해지겠죠. 우리는 합 쳐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 통합되고 강해져야 지금의 몽골내각 이 한국에 연방의 손길 을 보내는 것을 잡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만 주를 아우르고 조 선족을 안을 수 있는 것 입니다. 고대의 배달과 쥬신 역시 지금의 미 국처럼 거대한 영토를 가지고 많은 제후국을 거느 린 연방제국이었습니다. 우리가 나 아갈 길 은 끊임없이 합치고 강해져 나아가는 길입 니다
그리고 이 말하는 본인은 경상도태생 입니다. 하지만 그전에 자랑스런 배달쥬신의 후 예입니다. 다시 한번 고토를 회복하고 배달쥬신 과거의 영광을 재현했으면 합니다. 세 계를 주도 하는 팍스 코리아나를 위한 그 날까지 우리 모두는 다물하도록 노력해야 합 니다
그래야 다 물을 이루어 다시 영광의 진정한 최강 대한국으로 거듭날 수 있는 최소한 의 토대를 마 련할 수 있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 정신의 회복이 꼭 필요합니다. 그러 기 위해서는 올바른 역사부터 먼저 다 시 세워야 하겠죠. 역사란 현실의 거울이요 미 래의 지표라고 합니다. 진실되고 확실 한 역사관정립은 분명히 후대에 남길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자 우리 미래의 도약대가 될 것입니다
평화를 바라면 전쟁을 대비하라!란 말도 있죠. 준비하지 않는 자에게는 기회가 오지 않습니다. 기회가 와도 준비소홀로 실력이 부족하여 그 기회를 잡지 못 하겠죠. 하물 며 주변4강국에 둘러싸인 한국은 풍전등화의 위기라 볼 수 있습니다. 손 놓고 있다가 는 평화는 커녕 모든 것을 잃게 될 겁니다. 과거의 기상을 잃어버린 근세조선만 봐도 알수 있죠
[소위 세계화]라는 것은 우리 자신의 정체성이 확고하게 확립된 위에 이뤄져야 [진 정 한 세계화]가 이뤄질 수 있습니다. 각 국가의 역사교육,민족교육,국민교육이 바로 [그 나라, 혹은 민족의 정체성]을 기르는 교육이죠.[시민교육]은 세계인으로서 갖춰 야할 [보편적인 윤 리/덕목]을 가르치는 것이죠. 따라서 [역사교육]은 없고 [시민교육]만 한다는 찌질이의 절규에 정말 웃기는 일입 니 다.
(옛날 덴마-크의 "그룬트비히"라는 사람은 [너는 크리스찬이 되기 전에 먼저 덴마-크 인이 되라]고 했죠.) 유태인들이 부르짖는 시온주의, 독일의 게르만주의 운운하는 것 도 다 같은 맥락입니다. 미국도 다민족국가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각 민족사회,인종사회로 굴러갑니다. 그 에 따라 인종차별도 심하고... 그래서 미국 정치계에서 스패니쉬계나 흑인종,동양인 등을 비롯한 각 단체들의 힘겨루기가 극심합니다
근데 미국내 한국사회만 결집이 안 되는 편이죠. 그래서 미국에서 부당한 이익을 받 는 면이 더 큽니다. 흑인이나 스패니쉬계 등 은 각각의 정치의원이나 이익,인권 등 다 양한 수단을 마련해 미국 정부에 압력을 주어 보다 많은 것을 이끄는 것에 비하면 정 말이지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 하나가 되고 있는 유럽공동체마저도 각국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합니다. 물론 미국도 마찬가지
그런 기반이 되는 정체성교육도 없이 세계화를 추진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사상누각입 니다. 그렇게 따지면 보스니아 내전이나 아프리카의 여러 내전과 같은 위험을 안게 되 는 겁니다. 체코슬로바키아가 체코나 슬로바키아로 나누어진 것이나 구소련이 무너진 후, 여러 국가가 들어선 것만 봐도 현재는 한울타리의 세계화라는 이 면의 신민족주의시대로 볼 수 있는 겁니다. 하여튼 자신의 주변도 살피지 못 하면서 인류애,세계화를 부르짖는 찌질이들이 된다 면 우리는 곧 무너질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지금 폭풍전야의 풍전등화같은 어려운 상황 에 놓여있는 겁니다. http://blog.daum.net/mykimcj815/9613327 여기 가시면 현재 한-몽 골 국가연합에 관한 내용이 있으니 참고하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홍산배달문명의 발견이 세계 학자들 사이에는 뜨거운 이슈로 떠오르고 있으나 쥐나 짱골라들이 학자들 유적방문조사 자체를 막고 있으니 정말 답답한 실정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더욱더 알려고 강해지려고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처음 시작 은 단일민 족으로 시작했을지 모르나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민족이 여러 계 통으로 나 누어졌죠. 그래서 지금으로서가 아닌 오래전부터 우린 다민족국가라 할 수 있습니다. 부모님과 형제들이 처음에는 하나였지만 시간이 흘러 먼 친척이 되고 그 후 에는 남남 이 되어 다시 서로 만나 부둥켜 살아가는 세상처럼 말입니다 수많은 배달쥬 신족들이 오랜 세월을 거쳐오면서 여러 분파로 나뉘어졌습니다
그래 서 그 기원은 배달쥬신족이라는 것에서 시작되지만 그 세부의 역사에 있어서는 그 분 파된 민족의 고유한 역사인 것입니다. 역사는 그 민족의 것이지, 시대적인 영토 변화 에 따라 역사가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민족의 흥망의 역사에 따라 그 영토의 변 화가 있을 뿐이지요... 몽골의 역사는 몽골 그 자신들의 것이고, 훈제국의 역사는 헝가 리의 것, 오스만투르크 (서돌궐)역사는 터키의 것, 부여 고구려 백제 등의 역사는 대 한민국인 것처럼 우리 형제들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 런데 이것에 대해 억지를 부리는 짱골라들이 문제입니 다. 치우 천 황이나 태호복희씨 등 남의 조상도 자기 조상이라 하고 짱골라의 한,송,명 의 3왕조를 제외한. 수많은 배달쥬신왕조들이 이룬 발견,발명,업적 등을 자기 것이라 고 어거지를 부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니 짱골라의 억지에 대해 우리는 보다 정확 히 민족을 분 류하고 그것에 따라 역사 를 논리적으로 반박하려고 할 뿐이죠
만약 누가 우리 자신이 역사나 민족을 너무 확 대시킨다고 성질을 낼지도 모르죠. 하 지만 그것은 사대주의 매 국노나 짱골라나 쪽바 리 등의 의견에 동조하는 행동일 수 도 있습니다. 우리는 다 만 배달쥬신족이 시간이 지나 이렇게 여러 가지로 나누어졌다 는 사실만 언 급하려 하 고 끝내려 하죠 그러나 짱골라가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 니, 그것에 대해 배달쥬신 족 이 나누어졌다 고 말하는 것 이상의 사실을 지적하며 그 들의 무지를 일깨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문제를 일으킨 것이 아닙니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그 원 인을 제거해야 되는 데, 그 문 제의 원인과 원인제공자인 짱골라나 쪽바리에게는 아 무 말 안 하고 가만히 있 으 면서, 그에 대해 지적하는 우리자신 스스로를 타박한다 면 말이 안 되죠. 그런 어 리석은 짓은 공정하지도 못 할뿐더러 스스로를 자학하는 꼴 이죠
혹시 헝가리나 터키의 유럽,근동 혹은 이전 타타르 등의 중앙아시아 등의 민족들이 우 리와 많이 다르다고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그들의 모습은 오래동안 꾸준히 동양 의 피 보다 서양의 피가 많이 보급된 하나의 결과일뿐입니다 헝가리나 터키 중앙아시 아의 여러국가들의 그 시작은 배달형제들에서 시작하는 것입 니다. 그게 중요합니다
브라질 등을 위시한 남미에서는 같은 부모밑에서라도 황인종, 흑인종,백인종의 다양 한 자식형제들이 태어납니다 유럽이 중남미를 침략하는 과정 중에 워낙 많은 피가 섞 여버렸기 때문이죠. 그들의 가계를 보면 인디언,독일인,스페인,포르투칼,영국인 등 다 양합니다. 그래서 남미에서는 같은 친형제끼리라도 피부색이 다른 것이 다반사입니다
이는 이전에 kbs나 mbc 등의 다큐멘터리 등을 비롯하여 세계각국 유명 방송국들에 서 도 다룬 다큐나 뉴스,과학 등 여러 방송물에서 확인할 수 있으니 한번 참고해도 좋 겠 네요. 그리고 조선족이라 나쁜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뒤에서 못된 짓만 꾸미는 짱골라가 나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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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료동 지역은 [하북성 북부 ~ 압록강(현재의 료하)]에 이르는 지역입니다. 결코 현재 료동반도라 부르는 자그마한 지역이 아닙니다 한편 료하(遼河)는, 현재 북경 바 로 동쪽을 남북으로 흐르고 있는 강인 '란하(?河)'입니다. 따라서 료하는 료동 지역의 가운데를 남북으로 흐르고 있는 강인 것이죠 시대에 따라 지역지정도 달리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금의 요동이란 지역은 8,9세기이후부터 지정된 겁니다. 그 이전 의 요동의 경계와 8,9세기이후의 요동의 경계는 전혀 다릅니다. 요동(遼東)은 漢에 이 르러 다시 또 그 자리를 동쪽으로 넓혀갈 기미를 보이고 있다 만(滿)이 동쪽 가장자리로 삼았던 조하(潮河)는 조백하(潮白河)나 조수(朝水)나 조수(潮水) 또는 조하(朝河)라 고 불려진 우리말 아사물(阿斯河아사하)을 소리값으로 적은 것이죠 그리고 요동왕 한 광(遼東王 韓廣)이 있던 무종(無終)도 우리말로 <닿는 데가 없다>는 말을 그대로 글 로 쓴 것이니 無終도 패수(浿水)였던 백하(白河)의 기슭을 벗어나지 못하였죠. 항우 (項羽)가 장도(臧茶)를 연왕(燕王)으로 삼자 그곳에서 王으로 있던 한광(韓廣)은 요동왕(遼東王)으로 이름을 바꾸고 있다가 장도(臧茶)에게 죽었죠 이 때 한광(韓廣) 은 하북성(河北省) 계현(薊縣)의 무종(無終)에서 遼東을 다스렸다 하니 이 무렵 遼東 은 계현(薊縣)이 있는 곳까지 슬그머니 넓어진 것이죠. 漢은 영정하 아라내와 만나는 패수(浿水)와 그 위쪽인 조하(潮河) 어림의 패수(沛水) 기슭에 걸친 고장을 쉴 새 없 이 치고 들어오는 朝鮮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어설프게 내밀었던 손을 쓸 수조차 없게 다쳤었죠. 그래서 슬그머니 패수(浿水) 서쪽의 옛 燕의 요동새(遼東塞)로 되돌아 간 다음 남겨진 그곳을 한 때 노관의 연(燕)에게 내어주면서 지키도록 하니 그는 다 만 멀리서 바라만 보고 있었을 따름이죠
이것은 훗날 高句麗가 요수(遼水)였던 오늘 날 영정하(永定河)를 바탕으로 요서(遼西)라고 불렀던 하북(河北)과 산서(山西) 언저 리를 <삼국사기>에서도 잘 알고 따로 한요동(漢遼東)과 요동(遼東)으로 틀림없이 나누어 적어 놓았던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죠 <한서>나 <후한서>에도 요동군(遼東郡) 은 하북성(河北省) 유주(幽州)에 들어있죠. 두고 있던 현(縣)으로서는 거용(居庸)과 양평(襄平)과 지금의 신성진(新城鎭)인 신창(新昌) 그리고 서안평(西安平)과 번한(番汗)을 비롯하여 요대(遼隊)가 보이는데 모두가 다 오늘날 하북성(河北省)에 있죠. 참 으로 요동이라는 땅이름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한족의 글쟁이들에게서 속은 것을 아직도 우리의 머릿속에서 지우지 못하고 있는 게 안타깝기만 하죠. <진(秦)의 호해(胡亥)가 동쪽으로 나들이를 하여 갈석(碣石)으로부 터 바다를 따라 남쪽으로 회계(會稽)에 이르렀다>고 그들은 뚜렷하게 말하고 있죠. 이 때 시황제가 세워 놓은 새김돌(刻石각석)에 아랫사람들이 제 이름만 새기고 진시 황의 이름을 빼먹어 그는 크게 노여워 하였다 그 때문에 사람들이 허겁지겁 달려가 다시 새김글을 고치고 돌아왔고, 이때의 일을 그 들은 글속에서 <요동을 갔다 왔다>라고 썼는데 이것을 보고 <갈석이 난하에 있으며 그곳이 바로 요동이다> 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죠.
누가 보아도 진시황이 동쪽 으로 나들이하면서 새김돌을 세운 곳은 자부산과 성산을 거쳐 낭야와 회계로 가는 길목이었고 이 무렵 난하(灤河)의 갈석(碣石)은 모두가 배달민족의 땅이었으니 그 뒤를 이은 호해 (胡亥)도 이곳을 단 한발짝도 다녀 갈 수가 없는 것이죠. 그러므로 호해(胡亥)가 밟은 갈석(碣石)은 누르매(黃河)의 下流에서 회계(會稽) 사이에 있어야 하죠. 이때의 요동 (遼東)은 진나라의 나라터에서 동쪽으로 머나먼 곳이라는 뜻으로 말한 것이니 갈석 (碣石)도 난하(灤河)의 갈석(碣石)이 아닌 산동반도(山東半島) 북쪽 바닷가 어느 곳에 있는 것 을 말하였죠. 나중에 한무제(漢武帝)가 동쪽으로 바라 보았다는 곳도 북위(北魏) 때 그림에는 똑똑하게 누르매(黃河) 어귀로 그려져있죠. 이것으로 보아 무제(武帝)조차 그 때까지도 난하(灤河)에 이르지 못하였고 바다를 따라 가장 북쪽은 누르매 어귀를 넘지 못하였던 것이죠.
송나라때 만들어진 우적도는 화이도를 본딴 것으로 제작 연대가 8,9세기로 보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도 분명히 요가 나오는데 9세기 전후 로까지 중원의 태행산맥 너머를 요동으로 보는 시각은 진이후 부터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고구려영역의 재조명 필요하죠. 삼국사기 - 모본왕 2년(서기 49) 봄에 장수를 보내 한나라의 북평(北平)·어양(漁陽)·상곡(上谷)·태원(太原)을 습격하였 다"라는 기록이 보이는데 태행산맥을 따라 있는 국경지역을 한나라가 침범하니 고구려 모본왕이 이를 응징 태원까지 쳐들어 간 것이다 여기서의 북평은 현재의 북경 이 아니라 태행산맥 아래 부평을 북평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그들의 북쪽 경계선이 결 코 오늘날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현재의 북경 영역을 북평으로 인식한 것은 명 이후에나 가능한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참고로 현재 연은 발해까지 확대되어 고조선은 중원을 결코 쳐다 보지 못하는 것 처럼 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우리가 잘못된 식민 역사를 받아 왔는지 확연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본래 료동 ·료서(遼東·遼西)의 경계는 산서성 동부의 하북성 접경지역인 '료(遼)'입니다. 현재 는 '좌권(左權)'이라 불리는 곳이지요 실제 지나인들이 인정하는 역사는 한나라와 송나라,명나라 밖에 인정 안 하죠. 최근 에 역사공정 시작하면서 전에는 이민족의 왕조들이라고 무시하던 역사를 지네들 것이 라고 우기기 시작한 거죠 이민족들이 과연 누구일까...치우천황을 위시하여 삼황오제,공자,맹자 등 춘추전국시 대,칭기즈칸도 지네 조상의 역사라 우기는 놈들이 그들의 역사관의 맹점은 시간의 연 계성이 없다는 거죠.
살다살다 영토가 곧 역사라는 미친 소리는 처 들어본다. 역사는 그 민족들의 것이지. 그 민족들의 흥망성쇠에 따라 영토의 변화가 생길 뿐이지.. 그러니 지나25사들의 여 러 곳에 그것을 증명해주잖아. 물론 짱골라들이 자랑스러워하는 한나라,송나라,명나 라들조차 그 사실들을 다 없앨 수는 없어 군데군데 숨기거나 조작질만 해두잖아... 맨날 남이 이룩하면 그 밑에서 노예생활하다 주워먹기 바쁜 땅거지같은 새끼들 아주 개지랄을 떨죠. 구린내 나는 바퀴벌레족속들. 맨날 언론통제하고 야후나 구글에도 협 박하더만. 티벳,위구르를 비롯해 수천만인들을 학살하고 있는 짱골라들! 진화가 덜된 해충 바퀴벌레같은 짱골라들. 조작,날조하는 쪽바리와 더불어 세계 기네스북감이다. <동시대 최고의 철 생산 능력>
철은 온도에 따라 3가지로 구분되는데 기본 방식은 유사하다. 당시 철을 만드는데 필요한 재료는 두 가지이다. 바로 철광석과 숯이다.
선철생산 공정은 철광석을 일정한 덩어리로 만들어 숯을 여러 층으로 엇바꾸어 넣고(용재로 석회석을 소량 삽입) 밑에서 불을 지핀 다음 송풍관을 통해 바람을 불어 넣는다.
이때의 연로로도 질이 좋은 숯을 사용하는데 제련로 안의 온도가 올라가면 CO 가스가 형성된다. 로 안의 온도가 700~800도에 이르면 CO 가스에 의해 철산화물이 Fe2O3 → Fe3O4 → FeO → Fe 순으로 환원되며 환원된 철은 탄소와 접촉하여 Fe3C로 된다.
개마무사와 방패, 고구려는 질 좋은 철제무기를 사용하여 적들과의 전투에서 기선을 제압할 수 있었다. 한편 제철로 안의 온도가 1,050~1,100도에 이르면 광석 중에 포함되어 있던 맥석 성분이 석회와 작용하여 광제로 되며 1,200도 이상의 온도에서는 액체 상태의 선철과 갈라진다. 따라서 제철로 안에서는 쇳물과 용융된 광재가 생기는데 광제는 쇳물보다 비중이 작으므로 쇳물 위로 뜰 때 이를 분리하여 쇳물을 뽑아낼 수 있다.
여기에서 선철을 다시 녹여 1,500도 정도로 온도를 높여 강철을 만드는데 과거의 제철 능력으로 볼 때 강철을 만들 수 있는 온도인 1,500도를 만드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물론 강철을 만드는데도 비밀이 있다. 숯(탄소)을 적절하게 배합시키면 제련로 안의 온도가 1,200도가 되어도 철의 용융점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철 속에 탄소가 4.3퍼센트 정도 들어가면 철탄소합금의 용융점이 1,130도로 낮아지며 1,200도 정도에서도 탄소를 적절히 융합하면 철이 용융한다.
제련과정을 거쳐 뽑아낸 철을 괴련철(잡쇠덩이)이라 하는데 아직 불순물이 많이 남아있으므로 괴련철을 다시 불에 달구고 두드리기를 반복한다. 이 과정에서 불순물이 빠져나가고 단단한 철만 남는다.
학자들은 고조선 지역에서 발견되는 강철의 비율을 볼 때 고조선 장인들이 제련로 안의 온도를 적어도 1,400도 정도 유지한 상태에서 철을 14~16시간 정도 녹여냄으로써 질 좋은 강철을 생산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고조선의 장인들이 이와 같은 철을 생산할 수 있었던 것은 제련로의 완벽한 설계, 연료와 탄소 공급원으로서 숯의 사용, 효율적인 송풍관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고조선 영역에서 철 생산지는 매우 광범위하다. 대표적인 것은 은률 일대 노천 철광상으로 철제 망치와 징들이 발견되었다. 또한 『고광록』에 의하면 요하 하류 지역(요동)인 안산과 철령(쌍성), 개주(개평), 요양, 승덕, 심양 등지에서 주로 자철광과 적철광을 채취하여 철을 생산했다고 적혀있다.
'고조선 강철' 최강국가 발돋움 원동력
고조선 지역에서 생산된 강철이 주목받는 이유는 간단하다. 당시에는 서아시아에서도 강철이 생산되기는 했지만 저급품이었다. 그런데 고조선에서 생산된 강철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확보하지 못한 고온의 용광로에서 직접 얻은 질 좋은 것으로 그 연대도 무려 기원전 12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것이 고조선이 강력한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고 추론할 수 있는 근거이다.
한민족이 건설한 2번째 국가로 추정하는 부여의 경우도 철기 생산에 있어서는 선진국이었다. 『삼국지』〈위지동이전〉에는 부여의 군사들이 투구ㆍ활ㆍ화살ㆍ칼ㆍ창을 병기로 삼고 집집마다 갑옷과 휴대 가능한 무기를 갖추고 있었다고 적혀있는데 이것은 거의 다 철로 만든 것이다.
부여 영역에는 철 생산지가 많다. 오늘의 무산일대와 길림성, 흑룡강성, 러시아의 하바로프스크 일대가 철산지로 무산군 범의구석 유적에서 연철제품이 발굴되었고 이들은 기원전 7~5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곧바로 다음 단계인 선철 생산 단계로 이어진다.
기원전 2~1세기에는 강철을 제작했는데 무산군에서 발견된 강철 도끼는 탄소가 1.55퍼센트, 규소가 0.10퍼센트, 망간이 0.12퍼센트, 연이 0.07퍼센트, 유황이 0.08퍼센트였다. 이 도끼는 탄소의 함유량이 1퍼센트 이상인 매우 단단한 극경강으로 부여 사람들이 제품의 용도에 맞게 철을 자유자재로 만들었음을 보여준다.
신성(고이산성) 입구, 고구려는 중요한 철광지를 지키기 위하여 요하 동쪽 평야지대와 산간지대의 경계선인 무순에 신성을 쌓았다.
고조선과 부여의 제철 기술이 고구려로 전승되어 각종 장비를 질 좋은 철로 만들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고구려 동천왕이 철기병 즉 개마무사 5,000명을 동원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그들을 무장시키기 위한 철의 양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개마무사 1인 당 말 갑옷 최소한 40킬로그램, 장병의 갑옷 무게 20킬로그램, 기타 장비를 포함하여 10킬로그램을 휴대한다고 해도 최소한 70킬로그램의 철이 소요된다. 이를 5,000명에 적용한다고 단순하게 계산하더라도 350톤의 철이 필요하며 예비량을 가정한다면 최소한 500여 톤이 필요하다.
현대의 제철 기술로는 500여 톤이 그다지 크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약 1800년 전에 이 정도로 많은 양의 철을 생산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수ㆍ당은 현재의 무순 지역의 신성(고이산성)을 집요하게 공격했고 고구려가 이곳을 수성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는데 이것은 무순 지역이 철 생산지였기 때문이다.
신성은 동천왕 18년(244)에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공한 이래 봉상왕 2년(293) 모용외(慕容廆)의 침입을 격퇴시킨 역사적인 장소로도 유명하다. 또한 영양왕 24년(613) 수양제의 침입이나 보장왕 4년(645) 당태종의 침략 때에도 신성부터 전투가 시작되었다. 신성은 중국의 동진에 있어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으로 신성의 중요성은 보장왕 26년(667) 고구려를 침입한 이적(李勣)의 말에서도 나타난다.
‘신성은 고구려 서변의 요새이니 먼저 이곳을 빼앗지 못하면 나머지 성도 쉽게 취하지 못할 것이다.’
고이산성은 70~140미터 전후의 3개 야산을 하나로 묶은 환성(環城)으로 최고봉인 장군 봉으로부터 세 줄기의 산등성이가 남으로 뻗어 있으며 산꼭대기에 넓은 평지가 있어 마을을 연상케 한다. 신성은 남으로는 혼하와 동쪽으로는 그 지류인 무서하를 천연의 해자로 하고 있으므로 천혜의 방어 조건을 갖추고 있으며 성곽은 서성의 서쪽 외곽인 서성지 일대와 남위성의 서남단과 동성의 동남쪽 산등성이 부분에 주로 남아 있으며, 그 외 많은 부분이 토성이다.
이 성은 산등성이를 따라 총 길이 4킬로미터에 이르며 성 안에 채소를 심을 수 있는 넓은 분지가 있어 고로봉식 산성의 특징을 엿볼 수 있으며 중안분지 안의 큰 초석을 중심으로 주거지의 흔적이 남아있다.
쓰러져 있는 신성(고이산성) 표지석, 중국은 신성을 점령하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경주했으나 고구려에게 번번히 격퇴되었다.
현재는 고이산공원으로 개발되어 있으며 요나라 전탑이 정상에 보인다. 필자가 신성을 찾기 위해 현장을 방문했지만 과거에 혈투가 벌어졌던 흔적은 거의 잦아볼 수 없고 입구를 비롯하여 희미한 증거만 발견할 수 있었다. 더구나 고이산성을 가리키는 석비도 풀 속 흙구덩이에 쓰러진 채로 방치되어 있어 아쉬움을 더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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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골라학자 낙빈기 금석문에도 저것에 대해 어느 정도 발혀져있고, 하 나라와 은나라가 모두 동이족국가이며 은나라의 갑골문은 유명하죠. 그리고 은나라 를 무너뜨린 주나라 역시 동이족국가죠. 춘추전국시대의 모든 나라가 배달 9夷의 후 손이란 것도..홍산배달문명이나 요하문명,하가점문화나 장강문화 등 모두 배달민족들이 이룬 것이 라는 고고학적 사실이나 논문도 계속 나오고 있는 중이고 kbs역사스페셜,중앙일보,동 아일보에서도 다룬 내용이죠. 러시아,미국,독일 등 유럽학자들이 짱골라의 방해로 유적조사방문이 막혀 진행이 지체되고 있는 것도 사실... 민족에 관한 내용은 요사,금사,원사,청사 등에 보면 그들이 모두 고구려나 흉노 등 배달계통 동이의 후예 또는 갈래민족이란 것을 다 밝히고 있습니다. 거란의 요나라와 여진의 금나라,청나라 모두 고구려의 후예라고까지 자처했으며, 특 히 신라가 망한 후 그 신라 왕족 일부가 이들 나라들의 건국에 참여했다는 것도 얘기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나라,금나라,원나라,청나라 등 수많은 북방민족왕조들하에서 짱골라 한족은 똥개와 동급인 최하층계급이었죠. 원나라치하에서 가장 높은 계급이 몽골인,고려인이었고 다음이 티벳인 라마나 이슬람인이었죠. 짱골라는 아예 사람취급 안하고 노예였죠. 또 청나라 조정은 중원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귀순한 한족(漢族)들에 대해서는 매우 관대했고 그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으나 저항하는 명나라 군인들이나 한족들 에 대해서는 철저히 학살합니다.
그리고 한족들의 복종의 징표(徵標)로 치발(& #34201;髮 : 쥬신 고유의 머리양식)과 만주 옷[滿洲服]을 입도록 강요하였습니다. 그래서 "머리를 남기면 머리카락이 남지 않고, 머리카락을 남기면 머리가 남지 않는다 [留頭不留髮 留髮不留頭]."는 유명한 포고문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청나라는 한족(漢族)들의 단지 일시적으로 고개 숙이는 것일 뿐"이라는 사상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치발령(& #34201;髮令)과 만주 옷의 착용을 어기는 자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처벌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약간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타면 으레 나타나는 한족(漢族) 특유의 쥬신에 대한 욕설, 경멸적인 서술이나 패러디와 같은 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장정롱(莊廷& #37992;)이 편찬한 『명사집략(明史輯略 : 1660)』에서 청 초기의 황제들을 묘호가 아니라 그 이름으로 부르고 만주 연호 대신 명나라의 연호를 사 용하자 청나라 조정은 이 책의 출판과 관련된 사람 70여명은 물론 이 책을 구입한 사 람들까지 처형하였습니다.
실제 짱골라들이 자랑하는 한족 왕조는 한,송,명 세 왕조뿐입니다. 그 외의 모든 왕조 들은 한웅배달국이나 단군조선국의 제후 또는 갈래왕조들입니다. 한웅배달국과 단군 조선국이 홍산배달문명이나 요하문명 등 여러 고고학 유적지가 밝히짐에 따라 실재성이 드러난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짱골라들이 지들 조상이라 억지 부리는 복희,신농,요임금,순임금 등 삼황오제마저도 모두 배달민족들이죠. 진시황의 진나라 역시 배달계통 흉노족국가죠. 그러니 짱골라들이 역사공정하려고 발악할 수 밖에...그리고 박창규님의 글도 인용해보겠습니다.
달마는 왜 동쪽으로 갔는가? 그는 인도에서 태어나 중국에 불교를 전할 뜻을 세우고 히말라야를 넘어 동쪽으로 갔다. 이처럼 뜻을 세운 사람 하나의 흔적도 분명히 남아있 는데 거대한 종족의 무리가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이것도 역사를 찾는 후세의 노력부족에서 원인을 찾아야하는 문제겠지만 상상력의 부 족에서 오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 사례 하나를 들어 우리의 상상력을 비약시켜보자 단군신화에 나오는 곰과 호랑이, 이것이 곰 토템족과 호랑이 토템족의 투쟁으로 곰족 이 승리한 역사의 기록이라는 점은 역사가들도 지지하는 설이다. 곰족이 우리가 말하 는 단군조선의 정통구성원이었다면, 호랑이족은 누구였으며 정통성 다툼에 패배한 후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단군신화에서 나타나는 상징성만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으므로, 실제로 역사와 연결시켜보자. 단군왕검의 출현은 환웅 신시배달국의 분열과 멸망을 의미한다. 이 사건은 단순히 환 웅이 아들을 보고 아들이 왕이 되는 사건이 아니다. 이것은 왕조와 왕조의 교체를 너무나 함축적으로 설명한 신화다. 창세기 1장1절과 2절 사이의 간격만큼 먼, 그런 거리를 단 한 사건으로 연결한다. 신화의 용도는 그런 것이다. 천년의 비약이 환웅과 웅녀의 가족사에 숨어있는 셈이다. 이 연결고리에 곰과 호랑이의 설화가 끼어든 것은 우연이 아니다. 말 그대로 원래 함께 살았던 곰과 호랑이가 단군을 기점으로 헤어진다는 의미다. 그것도 마늘과 쑥이라 는 매개체를 통해 곰은 환웅의 적통을 이어받을 옥동자 단군을 낳지만 호랑이는 참지 못하고 도망간다. 그리고 그 후로 그들의 흔적은 사서에 나타나지 않는다. 호랑이는 어디로 갔는가? 우리는 호랑이족이 정통성에 패배해 권력을 잃고 피지배층이 되었다고 상상할 수도 있고 멀리멀리 다른 땅을 찾아 떠나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의 흔적을 찾아떠나보면 호랑이 토템은 멀지 않은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실제로 중국 동북부에는 단군신화와 유사한 내용의 설화가 전하고 있고 산동성에서 청나라 때 발견되어 다시 세워진 고대 사당에는 단군신화의 내용을 그대로 판박이한 듯한 그림이 있는데, 여기서는 곰이 아니라 호랑이가 적통을 잇는다.
호랑이라는 점만 빼면 단군신화와 이야기 줄거리가 같은 벽화가 걸린 이 사당의 이름을 “무씨 사당”이라고 한다. 나는 호랑이족의 출현을 중국왕조의 출현과 동일한 것으로 본다. 물론 이때만 해도 중국적 특징보다는 북방 기마민족의 흔적이 더 많은 고대중국의 국가다. 실제로 초대 단군시대는 중국의 요임금과 맞물려있고, 한단고기가 주장하는대로라면 요임금은 한웅시대에 배달국에 도전했던 황제(黃帝)헌원 이후 최초로 반란을 일으켜 독자적인 나라을 세운 중국왕이다. 한단고기가 조작이라고 하더라도 요임금이 중국의 동북지역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중국 역사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요임금의 어머니는 동쪽 바다로 놀러갔다가 용에게 겁탈당해 요임금을 낳는다. 특히 요임금이 천거하여 왕이 된 순임금의 아버지는 고수라는 사람으로 중국이 아닌 동쪽 나라의 관리였다. 한단고기의 연대기를 믿기만 한다면 순임금이 고조선 관리의 아들이었다는 점을 증거 할 수 있다
이 때만해도 중국과 조선이 민족국가로 분리된 때가 아니었으므로 이런 가능성은 충분하다. 즉, 요임금이나 순임금은 중국보다는 우리종족에게 더 가깝다는 의미다.(그러나 일단 국수주의적인 해석은 삼가자)
요순 뒤를 잇는 하나라와 은나라에 와서 드디어 우리는 호랑이의 정체를 본다. 환웅 의 배달국에서 함께 살았던 곰과 범은 아마도 누가 진정한 계승권자냐라는 적통 의 문 제로 갈라선 것으로 보인다. 단군신화는 그 사실을 매우 상징적이지만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다. 범은 못참고 갔고 곰은 사람이 되어 적통을 이었다는 거다. 적통이 아니라는 이유로 곰족과 갈라선 범족은 이미 환웅시절부터 광범위하게 대륙 에 흩어져있던 夷족(배달 족)을 결합하여 곰족의 조선에 대항하기 시작한다. 그 첫나라가 은나라다. 그들이 배달범족이다. 상상을 돕기 위해 이렇게 정리해보자. 한웅의 신시배달국 시절에 많은 종족들이 연합 을 이루어 살았다. 물론 그중 적통은 고조선으로 나라를 이어간 곰족들이지만 다른 많 은 종족들(말갈,선비 등등)과는 형제국이었을 것이다. 적통을 잇는 과정에서 범족이 분리되자 그들은 곰족과 대립하게 되었고 다른 형제국 들과는 달리 중원으로 흘러들어가 중국족, 즉 화하족과 혼혈문화를 이룬다. 중국문화 자체가 혼혈이라고는 하지만 이들은 상당부분 기마종족의 특징을 지키며 나라를 이어 간다. 이 배달범족은 도대체 언제까지 그 고유성을 지켰을까? 지금은 중국이라는 거대한 흑 탕에 묻혀 고유함을 보기가 쉽지 않지만, 우리는 상당한 사료를 근거로 이 흔적을 한 나라까지 연장할 수 있다. 정말? 그렇다. 우선 주나라에 패퇴한 기자가 동북으로 가서 조선의 제후국인 번조선의 왕이 되는 장 면에서 그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연대기로 보면 진시왕 시절에 해모수가 부여를 세 우고 조선을 폐했으므로, 한나라에 망했다는 조선은 고조선이 아니라 이 번조선이 다.) 성삼문이 읊었다는 백이숙제의 수양산 이야기도 이 시절의 것이다 하는 짓으로 보아 틀림없이 배달족이다...이야기를 이어보면, 은나라가 망한후 주나 라 가 섰지만 많은 수의 배달범족이 여전히 중국땅에 살았다. 그래서 광범위한 혼혈 이 이루어지고 이 때문에 옛조선의 동이족은 더욱 이들을 동족취급하지 않는데 그러다 보니 우리가 알고있는 “사기열전”의 많은 나라들이 우리 갈래인 배달범족의 나라다. 공자가 인자의 나라인 동쪽 나라로 가고싶다고 한 것은 바로 그들의 원래 출신인 배달 나라로 가고싶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공자가 보기에 모략과 후안무치가 난무 한 중원에 비해 동쪽나라의 태평성대는 거의 환상이었으리라.
그러나 세월이 지나고 사람들이 다 타락한 지금에 와서, 태평성대의 이야기는 인기가 없다. 오히려 모사와 정쟁으로 점철된 사기열전은 잘 팔릴지언정 교화와 훈시로 가득 한 옛 조선의 기록은 정말 재미가 없다 사기열전에 나오는 춘추시대의 나라들중 거의 반이 배달범족의 나라였다. 이런 기록은 그들이 조선과 적절히 연합하기도 하고 적대하기도 하면서 나라를 운영했다는 사소한 기록을 죄다 훑어봐야 가능한 어려운 작업이다 사실 심증은 가는데 물증은 없는 것이 중국대륙 내의 배달범족 국가다. 그들이야 혼혈 문화로 뒤덮이기 시작했던 초대 단군시절부터 조금씩 배달족의 순수성, 즉 기마종족적인 요소와 멀어져가고 있었다 우리가 잘 아는 은나라는 틀림없이 기마종족적 요소가 강한 북방민족의 후예였고, 주 나라 동북을 차지한 연나라는 그 국민들 대다수가 漢족이 아닌 사람들이라는 연구 결과가 있다 공자가 태어난 노(魯)나라는 주나라 무왕의 아우가 풍속을 바꾸는데 삼년이 걸렸다 고 고백한 틀림없는 배달범족 국가이고 송(宋)나라와 위(衛)나라도 배달범족국가라 는 증거가 많은 나라들이다 배달범족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고 보아야하지만 한웅배달국 시절에 중국에 터를 잡 은 배달국가, 즉 동이(東夷)가 아닌 다른 夷족 국가로는 제나라와 래나라, 오월동 주 로 유명한 오나라와 월나라가 있다. 특히 패왕항우로 유명한 초나라도 여기에 속한다. 이들을 구성하는 종족들은 주로 蠻夷(만이), 淮夷(회이), 萊夷(래이) 등의 초기 배달족이다. 배달국에 있었던 아홉가지 夷족(九夷)의 후손들인 셈이다 우리가 알고있는 문헌으로의 역사란 쥐나족이 자기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만든 책에 의지하고 있다.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뚜렷한 목적을 갖고 쓰기 시작한 책에서 시작하는 역사 라... 예를 들어 이런 얘기는 어떨까? 이건 정말 학술적이라기보다는 상상력에 의지해 술 마실 때나 꺼내는 추론이다. 사기열전은 이미 한나라라는 화하족의 나라가 선 다음에 나온 책인데, 여기 보면 진시황은 중국땅에서 배달족의 영향을 몰아내기 위해 장성을 세우고 옛기록을 태우고 유 (儒)라고 부르는 지식인들을 매장한다 儒, 지금은 공자학파로 부르지만 그때만해도 공자를 비롯해 제자백가를 모두 유라고 불렀다. 이를 제사장적인 전통을 가진 기마민족의 지식인이라고 추정할 수 있는 근거는 많다. (주 무왕이 기자에게서 배운 사례 등) 단군왕검이라는 제사장적 전통이 곰족의 것이라면 儒라는 지식인적 전통은 배달 범족의 것이었던 셈이다. 진시황은 이런 과정을 거쳐 배달족의 나라들을 제거하기는 했지만 끝내 완성하지는 못하고 전국을 맞는다. 유방과 항우의 혈전으로 삼천만에 달했던 중원의 인구는 육백만으로 줄어들었다 배달범족은 이때 씨가 말라버린 셈이다 이 때부터 “쥐나 짱골라”가 섰다. 漢나라다. 그 한나라가 사기열전을 썼다! 제 종족 이외의 종족을 죄다 제거하고 그 땅에 있는 옛 것을 죄다 자기 것이라고 우기는 "역사전환의 출발점"이다...호랑이들은 서쪽으로 갔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진시왕 때 망했다가 다시 일어나 한나라와 중원을 놓고 일전을 벌인 초(楚)나라는 만이(蠻夷)땅에 살던 웅역이 라는 사람의 조상에서 비롯된다고 사기열전에 적혀있다. 근원을 잘 알 수 없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사마천의 의도를 잘아는 나는 패왕 항우가 배달범족의 마지막 왕이었음을 믿어의심 치 않는다. 정말? 정말! 장기둘 때 생각나겠네? 응! 언제나 초나라를 아래로 취급하는 것, 바꾸면 안되나? 바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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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에 만주일대에는 벌써 메소포타미아 문명보다 1000 년이상 앞선 신석기나 요하문명 등이 있었으니 당시 유적으로봐서는 다양한 종족과 교류했고 복속국가도 많았으므로 백만이상의 인원을 동원할 권력은 그 당시에 갖고 있었을 겁니다.
현재 대련 등지에서는 요하문명 등을 발굴해서 전시회도 하고 세계최초의 문명이라 고 일부 선전도 하고 있죠. 다만 짱골라들이 한민족의 연관성을 숨기려고 무던히 노력 하고 있죠.
그 후 더더욱 은밀하면서도 치밀하게 동북,서남,서북공정을 펼치기 위해 노력했죠.
그것이 최근에 더욱 가시화되어 우리의 분노를 자아내도록 하고 있죠 충분한 시간이 흘러 역사공정이 어느 정도 마무리단계에 돌입하면
그 모든 배달의 유산들을 짱골라 자신들의 것이라 자랑하게 될 겁니다. 북한을 흡수하면 더욱 그런 기반은 탄탄해지죠.
그리고 현재 쥐나학생들은 다들 고구려가 지방정부라고 배우고 있습니다. 저 유적들 은 건축방식이 완전하게 같지는 않다해도 거의 일치하죠. 참고로 고조선과 고구려의 또다른 후예인 여진(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의 자금성 성벽은 원래 지금과 같지 않고. 고구려의 축조식인데
쥐나정부가 고구려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지금처럼 평평하게 개보수했죠. 만주지역 에 활동했던 민족은 고대부터 동이족이었죠. 스키타이라는 말은 서양인들이 원래 그 다지 형편없는 가장 늦게 문명화된 백인을 우월하게 나타내기 위해 말타고 활 쏘는
용맹한 사람들, 초원지대에서 온 이들을 스키타이라면서 백인의 원조라고 했던 겁니 다. 기마와 활은 배달민족들인 고조선,고구려,흉노,몽골,돌궐 등의 대표적 코드죠. 저 초원지대의 끝에 있으며 백인과 혼혈되었던 서흉노인들을 두고 백인들이 지어놓은 말 입니다
인류최초의 문자도 만주지역에서 나왔고 인류최초의 왕이라는개념의 권력자 출현도 이지역에서 처음 나왔다고 최근 자크아탈리의 미래의 물결이라는 책에도 다 나옵니 다. 황하문명은 홍산배달문명,요하문명 등의 한웅배달국과 단군조선국의 후발문명입 니다.
인구폭발이 가장 먼저 일어났고 권력자가 최초로 나오며 문자도 여기서 최초로 나왔 는데 4대문명중 가장 늦은 황하문명이 아시아 최초의 문명일수 없습니다. 이러한 4대 문명 개념은 한반도와 만주가 닫혀있게 되므로써 유럽인들이 19세기에 들어와 이를 제외하고 쓴 엉터리입니다. 게다가 이들 4대문명의 주인공은 현재의 아랍인들이나 인도인들이 아닙니다. 모두 아시아 황인종,검은 머리 편두인들이죠.
홍산배달문명(배달한웅시대)과 한민족의 연관성을 찾아볼 수 있는 하나의 증거는 묘 장법입니다. 고고학 분야에서 묘장법은 매우 중요한데, 그것은 죽은 사람을 장례 치 르 는 의식이야 말로 오랜 기간 변하지 않는 그 민족 고유의 전통이기 때문입니다
홍산문화의 가장 큰 특징은 돌무덤. 중원대륙에서 은나라 이전에는 땅을 파서 묘실을 만들고 시신과 유물을 안장하는 토 광묘가 유행하고 있고 주나라대에 들어와서야 나 무로 곽을 짜서 묘실을 만드는 목관묘가 만들어졌습니다. 역사상 홍산문화와 동일한 돌무덤을 채용하고 있는 나라는 단군조선뿐입니다. 이는 곧 한웅배달의 홍산문화가 단군조선에게로 계승되어진다는 하나의 증거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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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교수 “순수한 漢族은 없다”… 多민족 섞여 혈통 불분명
2007년 02월 16일 | 글 | 베 이징=하종대 동아일보 특파원ㆍorionha@donga.com |
일개 민족이 전 세계 인구의 19%인 13억 명이나 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을 가진 학자가 있었다. 중국 란저우(蘭州)대 생명과학학원의 셰샤오둥(謝小東) 교수. 회족(回族)인 그는 한족(漢族)과 서북지역 소수민족의 유전자(DNA)를 몇 년에 걸쳐 조사했다. 중국 서북지역 소수민족의 기원과 이동 경위를 파악하기 위한 연구였다.
조사 결과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다는 한족은 실제로 1개의 민족이 아니었다. 한족이라고 부를 만한 순수한 혈통이 존재하지도 않았다.
중국 언론은 13일 셰 교수의 연구 결과를 자세히 보도했다.
셰 교수는 “오래 전부터 한족은 중원(中原)에 살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이는 어느 한 시기에 한족을 주변 국가 또는 민족과 구별하기 위해 지역적으로 획정한 것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일반적으로 ‘염제와 황제의 자손(炎黃子孫)’으로 생각돼 온 한족이지만 연구 결과 염제와 황제의 발원지는 중원이 아닌 ‘북적(北狄·북쪽 오랑캐)’지역으로 드러났다는 점이다.
황제(黃帝)의 발원지는 현재의 간쑤(甘肅) 성 친양(沁陽)에서 톈수이(天水)에 이르는 지역이고 염제(炎帝)의 발원지는 간쑤 성 동부에서 산시(陝西) 성 서부에 걸쳐 있는 황토고원으로 이들 지역은 원래 ‘북적’ 지역이었다.
중국 역사에 나타나는 중원의 범위는 산시(山西) 성 남부와 장쑤(江蘇) 성 서부 및 안후이(安徽) 성 서북부를 포함한 허난(河南) 성 일대. 따라서 이 지역에 사는 사람이 바로 중원 사람이라고 생각돼 왔지만 이 역시 사실과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셰 교수는 “연구 결과 현재 소수민족이 된 객가족(客家族)이 오히려 고대 중원인의 문화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드러났다”며 “순수한 한족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오랜 기간에 걸쳐 주변의 소수민족이나 주변 국가가 한족과 융합한 결과”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셰 교수의 연구결과에 중국의 일부 누리꾼은 셰 교수가 한족의 ‘동포감정’을 훼손했다며 사죄할 것을 요구했다.
한족의 비율은 중국 대륙이 92%, 대만이 98%, 홍콩과 마카오가 각각 95%와 97%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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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동아>에서
“漢族, 단일민족 아니다 해!”
중국 유전연구소 충격 발표 … “지배민족 편입된 ‘가짜 한족’ 수천 년간 묵인”
중국을 여행해 본 사람이면 누구나 중국의 남쪽과 북쪽 사람의 생김새가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문외한이 보더라도 광둥(廣東) 지방 사람과 베이징 사람과는 겉모양이 뚜렷이 구분된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자신들을 같은 한족(漢族)이라며, 한족과 닮지 않았다는 말에 상당한 불쾌감을 표하곤 한다. 그러나 최근 중국에서는 이들을 몹시 불쾌하게 할 만한 발표가 있었다. 54개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국가임에도 13억 인구의 92%가 한족이라는 중국 정부의 공식 인구 통계를 부정하는 연구결과를 발표했기 때문. 거대 순수 혈통으로 인정받던 중국 한족이 단일한 민족이 아니라는 이번 연구 결과는 중국 사회를 뒤흔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번 발표가 중국 한족에게 더욱 충격적인 것은 중국 한족의 ‘순수혈통론’에 반기를 들고 나선 주체가 바로 중국 국영 연구소라는 점이었다. 중국 과학원 소속 유전연구소 인류유전자연구센터가 지난 5월 26일 15년 동안 진행한 중국인의 성씨와 유전자 관계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한족이 단일한 민족이 아니라고 전격 선언하고 나선 것. 분석자료를 통해 연구팀이 내린 결론은 중국 남부 지역인 푸젠성(福建省)과 장시성(江西省)에 걸쳐 있는 우이산(武夷山)과 난링산맥(南嶺山脈)을 경계로 남쪽과 북쪽에 거주하는 ‘한족’이 혈연상으로 확연하게 구분된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연구팀은 두 개의 ‘한족’이 한족과 소수 민족 간 유전적 차이보다 더욱 큰 차이점을 보였다고 발표해 파장을 더했다.
난링 산맥 경계 두 개의 ‘별개 집단’
이 연구팀의 한 관계자는 “한족이 통치하던 송나라와 명나라 시기,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등 모두 세 차례의 인구조사 내용을 분석하고 500여 편에 이르는 고문헌과 족보를 참조했다”며 “동시에 수백만 명의 중국인 혈액을 검사해 분석한 결과 이와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고 주장한다.
유전학자들의 이런 연구 결과는 일부 소장 역사학자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더욱 힘을 얻고 있다. 중국의 역사는 황허(黃河) 유역 한족세력의 남방 침략과 정복의 역사였고, 이 과정에서 남방의 토착민이 자신의 출신을 속이고 한족 행세를 하면서 이같은 결과가 빚어졌다는 게 학자들의 주장이다. 북경의 한 역사학자는 “한족만이 중국 사회에서 정치적 파워를 가질 수 있는 상황에서 토착민들이 우월한 중화문화권에 편입하기 위해 한족임을 자처했다”며 “중앙 정부도 소수민족 복속정책의 일환으로 그것을 묵인하고 장려해 왔다”고 말했다. 한편 이들 ‘가짜 한족’ 외에도 한족과 소수민족 간의 결혼으로 인해 태어난 후손 중 절대 다수가 소수민족을 포기하고 사회생활에 유리한 한족을 택한 것도 한족 양산의 주요인으로 꼽힌다. 현재 중국에서 부모의 출신 민족이 서로 다르면 자녀에게 선택 권한이 주어지지만, 소수민족을 택하는 자녀는 거의 없는 실정. 바로 이와 같은 상황이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것이다.
결국 한족은 ‘가짜 한족’에 대한 묵인과 ‘민족 선택제’라는 소수민족 통치 기술로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이는 거꾸로 지배민족으로서 한족의 위치를 수천 년 동안 보전하는 힘이 되었다. 역사학자들은 소수민족을 한족의 수로 압도하려는 중국 정부의 ‘인해전술식’ 인구정책의 결과물이 바로 92%라는 통계수치라고 비웃는다.
어쨌든 ‘중화주의’라는 민족적 개념을 통치 이념의 전면에 내세우는 중국 당국에게 ‘한족이 사실상 두 개의 별개 집단’이라는 사실은 커다란 부담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인지 인류유전자연구센터의 이번 발표는 국영 연구소의 발표임에도 중국 언론매체에 거의 소개하지 않고 있다. 한족의 이익이 중국 전체의 이익을 대변하였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단면이다.
< 소준섭/ 상하이 통신원 > youngji@81890.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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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만리)장성의 이해
첫 번째 오해는 이 모든 어마어마한 건축물을 모두 진시왕이 축조했을 것이라는 점 이다. 물론 진시왕이 만리장성을 축조하긴 했지만 엄밀히 따진다면 만리장성을 처음 만든 사람은 진시왕이 아니다.
굳이 만리장성의 기원을 따진다면 지나 최초의 통일국가 진나라가 아닌 그 전의 춘추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만리장성이라는 말이 문헌에 나타난 것은 전국시대이다.
결국 엄밀히 말하면 진시왕은 전국시대 연(燕)·조(趙)·진(秦) 등의 여러 나라가 외적(흉노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이미 구축했던 장성들을
통일 이후 연결하고 더 연장한 것에 불과하다.
북경대 출판 지나 고대사 교학참고지도집상의 "진장성 (진시왕의 장성)"
진시왕의 장성은 만리장성의 서쪽 일부에 불과하다. (진나라는 원래 서쪽 귀퉁이의 작은 나라에 불과했으니 그 당시 자신의 영토만 지켰으면 됐으니 당연한 일이다. 만약 그 너머를 침범하려 했으면 타국과 전쟁을 각오하야 했을테니까)
지금의 만리장성은 명나라때 완성됐다. 두 번째 오해는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만리장성의 존재가 진시왕 때 축조한 장성의 모습 그대로 일 것이라는 점 이다. 유감스럽게도 진나라 때 축조된 고대 장성은 세월이 흐르고 여러 왕조의 명멸을 거치는 동안 이루어진 수많은 개 ·보수 및 방치 등을 거쳐 거의 본모습을 볼 수 없다.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만리장성은 거의 명나라 시대에 축조된 것 이다. 명의 영락왕 시대 이후부터 진행된 만리장성의 개축은 무려 18차례의 개수를 거쳐서, 16세기 말 동쪽의 하북성 산해관(압록강 인접)으로부터 서쪽의 감숙성 가욕관까지 연결된 실제거리 1만2000여리나 되는 오늘날의 만리장성이 완성되었다
특히 만리장성은 강력한 국가의 상징일 것이라는 일반인의 세 번째 오해와는 달리 실제 역사상 비교적 세력이 약한 한족 왕조 때 더 활발하게 축조 되었다. 만리장성의 축조 목적이 북방의 한민족들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서이므로
실제 한민족국가이면서 문물이 융성했던 당(선비족)대나 유라시아를 통치한 원(몽고족)대, 마지막 왕조 청(만주족)대에는 만리장성에 대한 개보수나 증축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면 더욱 쉽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지나의 상징이 되어버린 만리장성과 진시왕의 악연,
진시왕의 입장으로 볼 때 어쩔 수 없는 고육지책으로 기존의 장성들을 연결하여 만리장성을 축조했을 뿐인데, 두고두고 백성들의 피와 땀을 강탈해간 폭군으로 회자되는 점은 안된 일이나 그의 악명으로 후세가 두고두고 먹고 살게 되었으니 참 역설적이다.
-참 조-
"황제" 란 단어는 복희씨,신농씨,공손헌원,요임금,순임금 등
배달민족이었던 삼황오제(三皇五帝)에서 '황'과 '제'를 따와 삼황오제이상의 위대한 이라고
진시황이 처음 표현한데서 유래합니다. 실제로 진시황의 진나라조차도 배달갈래 흉노계국가입니다.
우리가 Emperor의 의미 "皇帝" 와 삼황오제의 "오제" 중 한명이던 "黃帝" 는 전혀 다릅니다. "黃帝(공손헌원)" 는 "五帝" 중 한 사람일 뿐, 여기서 말하는 "제후국을 거느린 본국의 왕, 지배자" 의 의미인 "황제(皇帝)" 하고는 다른 말 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천자(天子)" 역시도 본디 동이(東夷)가 그들의 왕, 수장을 일컫을때 쓰던 명칭이다라는
건 쥐나 고서에도 나와있습니다.
천손사상이 있던 우리 조상들에게서 나온 특징적 명칭이라 할 수 있죠. 우리의 해, 개, 어라하, 이사금, 마 립간, 거서간, 나랏님, 태왕, 왕, 대왕,열제 등등이 "황제"와 같은 의미의 용어입니다. 졸본부여(고구려)는 태왕,열제(장수태왕이후로 가끔씩 등장)를 썼고, 22담로의 백제(남부여)는 천황이란 용어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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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우리의 사료만으로 설명하려했던 고조선의 역사가 역사공정을 진행중인 중국측과 우리의 역사마저도 의심하며 배척하려는 일부 대한민국인들에게 좀 더 객관적으로 다가가 수 있도록 그 역사의 중심이었던 중국의 사료들로 고조선의 실체를 증명하고 알리는 일이 절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신동아 2004년 2월호에 실린 심백강 민족문화연구원장님의 글을 개재하였으니 그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 역사적, 문화적인 뿌리와 그 범위를 재확인하시어 우리 개개인 하나하나가 역사적 자긍심으로 정수(精髓)를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중국사료에 나타난 東夷 고조선의 실체 >
“동방문화 뿌리는 漢族 아닌 韓族”
- 우리의 조상 동이는 개벽 이래 중국에 살았다 - 동이는 오랑캐가 아니라 동방민족의 뿌리 - 강태공, 맹자, 묵자도 동이족 - 공자가 살고 싶어했던 ‘九夷’가 바로 고조선 - 한·당 이전 중국의 동이와 한반도의 동이는 동일 민족
‘사고전서’에서 단군과 동이족의 실체를 확인한 심백강 원장.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여러 ‘고기(古記)’ 들을 인용하고 있어 우리나라 고대국가에 관한 역사서적이 적지 않이 존재했음을 말해준다.
특히 ‘세종실록(世宗實錄)’에는 ‘고조선비사(古朝鮮秘詞)’ ‘조대기(朝代記)’ ‘삼성밀기(三聖密記)’ ‘삼성기(三聖記)’ 등과 같은 한국의 고대사와 관련한 여러 책들이 거명되고 있어,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삼국사기’ ‘삼국유사’ 이외에 우리 상고사를 밝혀줄 기록들이 남아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임진왜란·병자호란과 같은 병란을 거치고 또 36년에 달하는 일제 강점기를 경유하면서 이러한 귀중한 자료들이 말살되고 인멸되어 오늘에 전하는 것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1.동이는 고조선의 열쇠
이처럼 우리 상고사를 밝혀줄 문헌 자료가 극히 제한적인 현실에서 ‘삼국사기’ ‘삼국유사’ 같은 국내자료만으로 고조선 역사를 비롯한 고대사를 연구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오늘날 잃어버린 상고사를 되찾기 위해서는 국내에 남아 있는 일부 문헌에 국한할 것이 아니라 국내외 사료(史料)를 광범위하게 조사·연구해야만 한다.
그런데 우리 학계는 그동안 자료가 없다는 핑계로 고조선 역사를 적극적으로 찾으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필자는 우리 역사의 뿌리요 또 반만년 역사에서 절반을 차지하는 고조선 역사의 복원이야말로 이 시대의 과제임을 통감하고 먼저 고조선 연구를 문헌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자료들을 국내외에서 널리 발굴, 조사, 수집, 정리하여 7권의 책을 펴낸 바 있다(‘조선세기’ ‘조선왕조실록 중의 단군사료’ ‘사고전서 중 단군사료’ 등).
이번에 다시 ‘사고전서(四庫全書)’ 경부(經部)·사부(史部)·자부(子部)·집부(集部) 중에서 동이사료(東夷史料)를 발췌하여 ‘사고전서 경부 중의 동이사료’ 등 4권의 책으로 묶고 여기에 주요 내용을 간추린 ‘사고전서 중의 동이사료 해제’ 1권을 덧붙여 2500쪽에 달하는 총 5권의 책으로 묶어냈다. 앞으로 ‘사고전서’ 중에서 치우, 고조선, 복희 부분을 따로 책으로 펴낼 예정이다.
‘사고전서’에서 이처럼 방대한 동이 사료를 발췌하여 편찬한 것은, 고조선이야말로 고대 동이가 세운 대표적 국가이며 동이를 추적하면 고조선의 실체를 복원하는 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고전서’는 청대(淸代) 건륭(乾隆) 때 연간 1000여명의 학자를 동원, 10년에 걸쳐 국력을 기울여 편찬한 동양 최대 총서(叢書)로 무려 7만9000여권에 달한다. 선진(先秦)시대부터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역대 중국의 주요 문헌들을 거의 다 망라하고 있는 이 책은 그 사료적 가치를 국내외에서 모두 인정하는 동양의 대표적인 고전 총서다. 특히 그 중에서도 동이 사료 안에는 한국역사·동양역사의 물꼬를 바꿀 수 있는 그야말로 새로운 발견에 필적하는 귀중한 자료들로 가득 차 있다.
이제 우리 사학계가 이 자료들을 충분히 활용한다면 고조선사 복원은 물론, 단절된 부여·고구려·백제·신라의 뿌리를 찾는 일도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기대된다.
그러면 아래에서 ‘사고전서’ 동이 사료 중에서 동이와 고조선의 실체를 밝혀준 새로운 내용 몇 가지를 골라 설명해보기로 한다.
2.동이의 터전이었던 중국
동양 문헌에서 동이라는 말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서경(書經)’ 주서(周書) 주관편(周官篇)으로 다음과 같다. “성왕(成王)이 동이를 정벌(征伐)하자 숙신(肅愼)이 와서 하례했다(成王旣伐東夷, 肅愼來賀).”
성왕은 중국의 서방세력이 동방의 은(殷)나라를 멸망시킨 뒤 세운 서주(西周)의 제2대 왕으로 주 무왕(周武王)의 아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서주세력이 집권하면서부터 동방의 이민족(夷民族)을 서주세력과 구분하여 동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것이 동이라는 용어가 출현한 배경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중국은 서주가 지배하기 이전에 이족이 먼저 지배했고, 따라서 서주의 건국은 동서남북 사방에 퍼져 있는 이족의 거센 반발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최후까지도 서주에 저항한 것이 바로 동이족이었다.
그렇다면 서주세력이 동이라는 호칭을 쓰기 이전에 동방민족의 본래 호칭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이(夷)’였다.
예컨대 ‘서경’에 등장하는 우이(& #54089;夷)·회이(淮夷)·도이(島夷)·내이(萊夷) 등이 그것이다.
이(夷) 앞에 지역명칭을 덧붙여 회하(淮河) 부근에 살면 회이(淮夷), 내산(萊山) 밑에 살면 내이(萊夷)라 불렀던 것이다.
그리고 이(夷)에서 더 거슬러올라가 여(黎), 즉 구려(九黎)가 이(夷)의 원형이었다고 본다.
그러면 이족(夷族)들은 언제부터 중국에서 살게 됐을까. ‘사고전서’ 경부 ‘모시계고편(毛詩稽古編)’ 16권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서경’의 우공편(禹貢篇)을 살펴보면 회이·우이·도이·내이·서융(西戎)이 다 구주(九州)의 경내(境內)에 살고 있었다. 이것은 시기적으로 우(虞)·하(夏)시대로서 중국 안에 존재하는 융적(戎狄)의 유래가 깊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그리고 이 자료는 이 이적(夷狄)들이 멀리 당(唐)·우(虞)시대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올라가 개벽(開闢) 이래로부터 중국 땅에 살고 있던 존재임을 밝히고 있다.
이들은 어느 국한된 지역이 아닌 중국 전역에 골고루 분포되어 살았으나 나중에 화하족(華夏族)이 중국의 집권세력으로 등장하면서 동방에 사는 이(夷)를 동이, 서방에 사는 이를 서융, 남방에 사는 이를 남만, 북방에 사는 이를 북적이라 폄하하여 불렀던 것이다.
실제 삼대(三代)시대, 특히 주(周)시대의 순수한 중국이란 9주(九州) 중 연주(& #53455;州), 예주(豫州), 즉 오늘의 하동성과 하남성 정도가 고작이고 나머지는 순수한 중국인뿐만 아닌 동이족들이 함께 사는 땅이었다는 이야기다.
3.오랑캐가 아니라 동방의 뿌리
동이가 중국의 토착민족이냐 아니면 외부의 침략세력이냐에 대해 고대 학자들 사이에 두 가지 견해가 존재했다.
하나는 동이족이 삼대(三代) 이전부터 중국에 토착민으로 살고 있었는데 진시황(秦始皇)이 이들을 축출했다는 것으로, 한나라 때 학자 공안국(孔安國)이 대표적인 토착론자다.
다른 하나는 은(殷)나라 주왕(紂王) 때 융적(戎狄)이 중국에 침략해 들어와 살게 되었다는 것으로 왕숙(王肅)이 주장한 학설이다.
이 두 견해 가운데서 ‘모시계고편’의 저자는 공안국의 견해를 지지했다.
그가 왕숙보다 공안국의 견해를 지지한 이유는, 공안국이 시기적으로 진(秦)나라와 100년이 넘지 않은 가까운 시기에 살았던 사람으로서 그가 전해들은 내용이 비교적 정확하리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위의 기록으로 볼 때 동이족은 본래 중국의 변방세력도 아니고, 침략세력은 더더욱 아니었으며 개벽 이래 줄곧 중국 땅에 터전을 이루고 살아온 토착인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고전서·사부’와 ‘후한서(後漢書)’ 115권에는 “동방을 이(夷)라고 한다(東方曰夷)”는 ‘예기(禮記)’ 왕제편(王制篇)의 내용을 인용하고 나서 이(夷)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이(夷)란 것은 저(& #55154;)이다(夷者& #55154;也).”
여기서 이(夷)를 저(& #55154;)와 동일한 의미로 풀이했는데 그렇다면 저(& #55154;)란 과연 무엇인가. 저(& #55154;)란 ‘노자(老子)’의 ‘심근고저(深根固& #55154;)’란 말에서 보듯이 일반적으로 근저(根& #55154;)·근본(根本)·근기(根基)·기초(基礎) 등의 의미, 즉 뿌리라는 뜻으로 쓰인다.
그래서 ‘후한서’는 저(& #55154;)의 의미를 다시 저지(& #55154;地), 즉 “모든 만물이 땅에 뿌리를 박고 태어나는 것(萬物 地而出)”이라고 설명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은 땅에 뿌리를 두고 있다. 땅에 뿌리 내리고 움트고 자라서 꽃피고 열매 맺는 근(根)·묘(苗)·화(花)·실(實)의 과정을 겪게 된다.
그런데 이 만물이 땅에 뿌리를 두고 생장하는 만물저지(萬物& #55154;地)의 저(& #55154;)와 동이의 이(夷)를 같은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시사한다.
저(& #55154;)와 이(夷)를 동일한 개념으로 본 이 고대 중국의 해석에서 동이의 이(夷)는 우리가 그동안 알아왔던 오랑캐 이(夷)가 아니라 동방의 뿌리라는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숭고한 뜻을 지닌 동이의 이(夷)자가 어째서 오랑캐라는 뜻으로 변질되었는지, 우리 스스로 비하하여 오랑캐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 이유는 또 무엇인지 안타까울 따름이다.
4.강태공·맹자·묵자도 동이족
‘사고전서’에는 “맹자가 추나라 사람으로, 추나라는 춘추시대에 주나라였고, 주나라는 동이국가”라고 기록돼 있다. ‘사고전서·자부’ ‘유림(喩林)’ 27권에는 “대우(大禹)가 동이에서 태어났다(大禹生於東夷)”라는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태평어람(太平御覽)’ 780권에는 “기(杞)나라는 하(夏)의 후예국인데 동이로 되었다(杞夏餘也 而卽東夷)”라는 기록이 나온다.
기나라가 하의 후예라는 것은 공자도 언급한 사실로, 그 내용이 ‘논어’에 실려 있는데 이런 기록들은 하우(夏禹)가 동이족이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뒷받침해준다.
‘사고전서·자부’ ‘여씨춘추(呂氏春秋)’ 14권에는 “태공망(太公望)은 동이지사(東夷之士)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강태공(姜太公)은 문왕(文王)을 도와 은(殷)을 멸망시키고 서주(西周)왕조를 건립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런데 그가 원래 동이(東夷) 사람이었던 사실이 여기서 증명되고 있다.
‘사고전서·자부’ ‘명현씨족언행유편(名賢氏族言行類編)’ 52권에는 “전국(戰國)시대 송(宋)나라 사람으로 ‘묵자(墨子)’의 저자인 묵적(墨翟)이 본래 고죽군(孤竹君)의 후예”라는 내용이 나온다.
고죽국(孤竹國)은 은(殷)나라 현자인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살던 나라로 동이 국가였으며, ‘삼국유사’ 고조선조에는 “고구려가 본래는 고죽국이었다(高麗本孤竹國)”는 기록이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겸상애(兼相愛)·교상이(交相利)를 제창한 위대한 사상가 묵자 또한 동이족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고전서·경부’ ‘사서석지(四書釋地)’3, 속(續)권 하에는 “맹자(孟子)는 추(鄒)나라 사람인데 추나라는 춘추(春秋)시대에 주(?)나라였고 주나라는 본래 동이 국가였으니 그렇다면 맹자 또한 동이 사람이 아니겠는가”라는 내용도 나온다.
주는 노(魯)나라 부근에 있던 동이 국가로 공자가 쓴 ‘춘추(春秋)’에 그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맹자가 본래 이 주나라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송대(宋代) 4대사서(四大史書) 중 하나인 ‘태평환우기(太平?宇記)’에 보면 맹자가 “요(堯)는 북적지인(北狄之人)”이고 “순(舜)은 동이지인(東夷之人)”이라고 말한 것이 나온다.
공자는 은(殷)의 후예인데 탕왕(湯王)이 건립한 은이 동이의 선민(先民)이 세운 나라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이들뿐 아니라 하우(夏禹)·강태공·묵자·맹자도 모두 동이 출신이었다고 한다면 중국의 화하족(華夏族) 가운데 문왕·주공 이외에 내세울 만한 역사적 인물이 과연 몇이나 되는가.
이런 각도에서 본다면 동양의 사상과 문화를 일군 핵심 인물은 거의가 동이에서 배출됐다는 이야기가 되고, 따라서 동양의 사상과 문화는 중화사상·중국문화가 아니라 동이족에 의해 형성된 동이사상·동이문화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다.
영국인은 인도와 셰익스피어를 바꿀 수 없다고 했는데 이는 한 위대한 인물이 지닌 의미와 가치가 어떤 것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강태공·묵자·맹자 등은 동양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그동안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중국인으로만 알아왔던 이 위대한 인물들이 바로 우리의 조상인 동이족으로 밝혀진 것은 참으로 의미가 깊다.
잃어버렸다 찾은 돈은 잃어버리지 않은 돈보다 더 귀하게 느껴지듯 잃어버렸다 되찾은 조상은 잃어버리지 않은 다른 조상보다 더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5.‘書經’의 ‘우이’가 바로 고조선
‘사고전서·경부’‘우공추지(禹貢錐指)’ 4권에는 “동이 9족(族)을 우이(& #54089;夷)로 보고 우이를 고조선으로 본다”는 견해가 실려 있다.
우이라는 말은 ‘서경’ 요전(堯典)에 나온다(堯分命羲仲 宅 夷 曰?谷). 우이는 바로 요(堯) 당시 존재했던 동양 고전의 기록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이’의 명칭이다.
그런데 이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라면 우리 한민족(韓民族)이 동이 9족의 뿌리요 원류라는 이야기가 된다.
단절된 고조선 역사를 복원하는 데 이런 자료 한 장이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 100권의 가치를 능가한다고 할 수 있다.
“ ‘후한서’와 ‘두씨통전(杜氏通典)’에 모두 동이 9종(九種)을 우이라고 말하였는데 그 땅이 한(漢)의 낙랑(樂浪)·현토군(玄?郡) 지역에 있었다. 그런데 ‘서경’ 우공(禹貢)에 청주(靑州)를 설명하면서 맨 먼저 우이를 언급한 것을 본다면 조선(朝鮮)·구려(句麗) 등 여러 나라가 우(禹) 임금시대에 실제 다 청주지역에 있었다(朝鮮句麗諸國 禹時實皆在靑域).”
이것은 ‘경패(經稗)’ 3권에 나오는 기록이다. 이 자료는 구이(九夷)가 우이(& #54089;夷)이고,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라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오례통고(五禮通考)’ 201권에는 “한무제(漢武帝)가 설치한 현토·낙랑 두 군(郡)이 다 옛 ‘우이’의 땅으로 청주(靑州)지역에 있었다”는 것과 “연(燕)과 진(秦)이 경략(經略)했던 조선은 대체로 우공(禹貢)의 우이지역이었다”는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 자료에서 우리는 우이에서 조선으로, 조선에서 현토·낙랑으로 변화된 고조선의 역사를 읽을 수 있다.
또한 연(燕)·진(秦)시대의 조선과 한 무제가 설치한 현토·낙랑이 모두 오늘의 한반도가 아닌 옛 청주지역, 즉 산동성과 요녕성, 하북성 일대에 위치해 있었던 사실을 이 자료는 밝혀주고 있다.
‘사고전서·사부’ ‘통감기사본말(通鑑紀事本末)’ 29권에는 “당(唐)나라와 신라가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할 때 신라왕 김춘추(金春秋)를 우이도행군총관(& #54089;夷道行軍總管)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당나라에서 신라왕 김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았다는 것은 중국인들이 신라와 백제를 우이의 후예국가로 인정했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일연(一然)이 ‘삼국유사’에서 건국시조 단군과 고조선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더라면 단군 및 고조선의 역사는 묻혀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짧은 기록만 가지고는 고조선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할 길이 없다. 단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라고 한 이 기록은 고조선 2000여년의 역사를 되찾을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다.
마치 콜럼부스의 신대륙 발견에 비길 만한 참으로 중요한 발견이 아닐 수 없다. 앞으로 동양문헌상에서 우이를 추적하면 그동안 잃어버린 채 살아온 고조선의 전모를 복원할 길이 열리게 될 것이다.
6. 공자가 살고 싶어했던 나라 ‘구이’
‘사고전서·자부’ ‘명의고(名義考)’ 5권에 “구이(九夷)는 동이이고 동이는 기자조선(箕子朝鮮)으로 공자가 가서 살고자 했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라는 내용이 실려 있다.
또 ‘사고전서·경부’ ‘주례전경석원(周禮全經釋原)’ 8권에는 “동이 기자의 나라는 공자가 가서 살고 싶어하던 곳이다(東夷箕子之國 孔子所欲居)”라고 했다.
‘논어’에는 “공자가 구이에 가서 살고 싶어했다(子欲居九夷)”는 기록만 있고 구이가 바로 기자조선이라는 말은 없다.
그런데 ‘명의고(名義考)’ 5권은 공자가 가서 살고 싶어했던 그 나라가 바로 기자조선이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어 중요한 의미가 있다.
우리는 이런 자료를 통해서 고조선이 여러 동이 국가들 중에서도 특별히 문화적 수준이 높고 대표성을 띤 동이 국가로, 공자가 마음속으로 동경하던 나라였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십일경문대(十一經問對)’ 1권에는 ‘논어’ 자한편(子罕篇)의 ‘자욕거구이 혹왈누 여지하 자왈 군자거지 하루지유(子欲居九夷 或曰陋 如之何 子曰 君子居之 何陋之有)’라는 대목을 논하여 “여기서 말하는 군자는 기자를 가리킨 것이지, 공자가 자칭해서 군자라고 한 것이 아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그동안 우리는 ‘논어’의 이 부분을 주자의 해석에 따라 “군자거지(君子居之)면 하루지유(何陋之有)리요” 즉 “군자가 가서 산다면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라고 하여 그 군자가 공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런데 이 자료는 “군자거지(君子居之)니 하루지유(何陋之有)리요” 즉 “구이에는 군자인 기자가 살았으니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라고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공자는 평소 겸양의 미덕을 강조해 자칭 군자라고 했을 가능성이 적고, 또 ‘산해경(山海經)’에도 “동방에 군자의 나라가 있다”는 기록이 있는 점으로 보아 공자가 가서 살고자 했던 구이를 기자조선으로 보고 “기자조선은 일찍이 군자인 기자가 도덕정치를 펼친 문화국가이니 가서 산들 무슨 누추할 것이 있겠는가”라는 뜻으로 풀이하는 것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
이런 자료도 공자가 가서 살고 싶어했던 구이가 바로 고조선이었음을 뒷받침하는 좋은 근거라 하겠다.
‘사고전서·경부’ ‘상서주소(尙書注疏)’ 17권에는 “성왕(成王)이 동이를 정벌하자 숙신(肅愼)이 와서 축하했다(成王旣伐東夷 肅愼來賀)”라는 주관서(周官序)의 내용과 여기에 대한 공안국(孔安國)의 다음과 같은 전(傳)이 실려 있다.
“해동(海東)의 제이(諸夷)인 구려(駒麗)·부여(扶餘)·한(?=韓)·맥(貊)의 무리가 무왕이 상(商)나라를 이기자 다 길을 통하였는데 성왕이 즉위하자 배반하였으므로 성왕이 이들을 정벌하여 복종시킨 것이다.”
그리고 이 대목의 소(疏)에는 ‘정의(正義)’를 다음과 같이 기재했다. “여기 말한 동이는 비단 회수상(淮水上)의 동이만이 아니기에 해동의 제이(諸夷)라고 한 것이다. 고구려·부여·한·맥의 무리는 다 공안국의 시기에도 이런 명칭이 (붙어) 있었던 것이다.”
공안국의 말처럼 주 무왕이 당시에 정벌했던 동이가 해동에 있던 여러 동이, 즉 구려·부여·한·맥의 무리였다고 한다면 구려·부여·한·맥은 한대(漢代) 훨씬 이전인 주(周)나라 시기에 이미 존재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공안국은 한(漢)나라 때 유명한 학자로 그의 학설은 어느 누구의 주장보다도 설득력이 있다고 할 수 있는 만큼 이 자료는 한·당(漢唐)나라 이전 고구려·부여·삼한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삼국유사’는 신라가 중국 전한(前漢) 선제(宣帝) 오봉(五鳳) 갑자년(甲子年)(B.C 57)에, 고구려가 전한 원제(元帝) 건소(建昭) 계미년(癸未年)(B.C 38)에, 백제가 전한 성제(成帝) 영시(永始) 을사년(乙巳年)(B.C 16)에 각각 건국된 것으로 기술했다.
고구려·백제·신라의 상한이 모두 중국 한(漢)나라 시대로 되어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우리 나라 고대사 연구에 쌍벽을 이루는 자료지만 ‘삼국사기’는 우리 역사의 기술을 삼국시대로 국한시킨 한계를 갖고 있고, ‘삼국유사’는 단군 및 고조선의 역사까지 다루고 있지만 고구려·백제·신라의 출발을 모두 중국 서한(西漢)시대로 한정시켰다.
그것은 일연이 승려의 신분으로 몇몇 제한된 자료에 의존하고 ‘사고전서’와 같은 방대한 중국의 사료를 섭렵할 수 없다 보니 역부족에서 온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사고전서’와 같은 권위 있는 자료를 통해서 고구려·부여·삼한 등의 뿌리가 확인된 만큼 잘못된 국사교과서의 내용부터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입으로는 반만년 역사를 이야기하면서도 ‘삼국사기’‘삼국유사’ 위주로 고대사를 연구하고 가르쳤으며, 한·당시대에 존재했던 고구려·백제·신라가 우리 역사의 뿌리라는 착각 속에 살고 있었다.
7.중국의 동이와 한반도의 동이
현재 한국의 강단 사학자들은 한·당 이전 중국의 동이와 한·당 이후 한반도의 동이가 서로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뚜렷한 학술적 근거는 없다. 그럼에도 이 논리를 수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한국의 동이와 중국의 동이를 연결시킬 경우, 고구려·백제·신라의 역사를 한반도에 국한시켜온 종래 주장의 모순을 스스로 드러내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라 추측된다.
그러나 한·당 이전 중국의 동이와 한·당 이후 한민족의 동이가 동일하며 서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은 ‘사고전서’의 여러 사료에서 여실히 증명된다.
예컨대 “동이 9족이 우이고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다”라는 ‘우공추지’의 기록,
“구이(九夷)는 현토·낙랑·고구려 등을 말한다”는 ‘사서혹문’의 기록,
“당나라와 신라가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할 때 신라왕 김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았다”는 ‘통감기사본말’ 등의 기록을 통해 볼 때 한·당 이전 중국의 동이와 고구려·백제·신라의 동이는 맥을 같이하고 있으며 둘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도 “신라는 조선의 유민에 의해 건립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고조선이 동이라면 그 뒤를 계승한 신라가 고조선의 동이와 동일한 동이임은 너무나 자명한 이치다.
문학과 역사가 다른 점은 문학이 있을 수 있는 일을 쓰는 것이라면 역사는 있었던 일을 쓴다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는 참이어야지 거짓이 있어서는 안 된다.
있었던 일을 없었다고 해서도 안되고 없었던 일을 있었다고 해서도 안되며 동일한 것을 다르다고 해서도 안되고 다른 것을 동일하다고 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8.동양역사의 진짜 주역은 누구인가
7만9000여권에 달하는 방대한 ‘사고전서’에서 동이에 관련한 사료만 따로 추려 묶으니 우리의 눈을 놀라게 하고 귀를 의심케 하는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동이에 관한 새로운 기록을 4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동이는 동양의 지류가 아닌 본류, 피지배자가 아닌 지배자, 아시아의 조역이 아닌 주역, 변방이 아닌 중심, 동양문화의 아류가 아닌 원류였다.
둘째, 동이가 바로 고조선이다.
셋째, 중국인으로만 알았던 요순과 공자, 백이, 숙제, 강태공, 맹자, 묵자 등이 동이족 출신이다.
넷째, 부여의 뿌리가 부유이고 부유는 산동성 부산이 발원지이며, 고구려는 한나라 때 생긴 신생국가가 아니라 하우(夏禹)시대에도 존재했으며 당나라 때까지만 해도 내몽골 지역 적봉시(중국 요서지역 홍산문화유적지)가 고구려의 서쪽 영토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오늘날 중국에는 몽골족, 만족, 묘족, 회족, 장족 등 한족(漢族) 이외에 55개에 달하는 소수민족이 있지만 이들은 결국 동이족과 한족에서 분파된 지류와 지맥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동양 역사 발전의 양대 주역인 동이족과 한족, 두 민족 가운데 동방민족의 뿌리는 과연 누구인가.
다시 말해 어느 민족이 동양 역사의 여명을 열었으며 동양 역사를 추동시킨 원동력인가. 바로 동이족이다.
한족의 시조는 염제 신농씨와 황제 헌원씨다. 사마천은 ‘사기’에 황제를 한족의 시조로 기술하였고, 오늘날 한족들은 자신들을 염제의 자손이라 말한다.
그런데 동이족의 시조는 신농과 황제보다 앞선 시기에 중국의 주인으로 군림한 태호 복희씨다. 공자는 ‘주역’ 계사(繫辭)에서 “복희 시대를 지나 신농씨 시대가 도래하고 신농씨 시대가 지나 황제 시대가 전개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한·당 이후 중국의 지배세력으로 등장한 한족(漢族)이 본래 중국의 중심세력이었던 동이의 역사를 이민족(異民族)의 역사로 왜곡·말살하기 시작했다.
또 동이의 중심세력이었던 한민족(韓民族)이 신라 이후 국력이 크게 약화되고, 조선조에 접어들어 중국의 아류인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함으로써 동이의 역사와 문화를 잃어버린 것이다.
9.출발점 없는 한국사
우리나라는 이집트·바빌로니아·인도·중국 등과 함께 세계적으로 긴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다. 그러나 반만년을 이어온 우리 역사는 지금 뿌리가 없다. 고조선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현재 1권은 없이 2권부터 발행된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 42권이 뿌리 없는 한국사의 몰골을 단적으로 반영한다고 하겠다.
한 나라에서 역사의 단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곧 그 나라의 얼과 정신과 문화와 정기의 단절을 의미한다.
광복 후 60년이 다 되어가지만 세계의 마지막 분단국가라는 오명을 씻는 것은 고사하고 다시 동서로 나뉘고 동서가 다시 보수니 진보니 하는 갈래로 갈려 혼미에 혼미를 거듭하고 있는 원인은 역사의 단절, 그리고 그로 인한 민족얼의 상실에 있다.
국사교과서는 출발부터 기형이다. 왜냐하면 단군 조선 1000년은 역사가 아닌 신화로 취급하고, 기자조선은 ‘기자동래설’이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삭제해 우리의 실제 역사가 침략자 신분인 연나라 사람(燕人) 위만(衛滿)의 위만조선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뿌리가 잘려나간 이런 역사교육이 국민에게 민족적 긍지와 문화적 자신감을 심어줄 리 없다.
최근 일본 이시하라 도쿄(東京) 도지사가 “한일합방은 조선인들의 선택에 의한 것이었다”는 망언(妄言)을 하고 중국에서는 한국의 고구려사가 자기들의 역사라고 터무니없는 주장을 펴는 것도 따지고 보면 우리 역사가 제대로 정립되지 못하고 허점투성이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광복 이후 1960~70년대는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이 시대적인 과제였고, 1980~90년대는 민주화가 시대적 요청이었다면, 오늘 당면한 시대적 과제는 단절된 역사의 복원과 민족정체성의 확립이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실증사학을 주장하는 강단사학계는 자료의 결핍을 이유로 고조선사의 연구와 복원에 적극성을 띠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사고전서’와 같은 국내외가 인정하는 권위 있는 자료를 통해 고조선의 실체 및 고구려·백제·신라의 뿌리가 밝혀진 이상 이런 사료를 토대로 고조선 및 삼국사를 위시한 한국의 고대사를 다시 정립하여 국사교과서를 새로 써야 할 것이다.
동이 9족이 하나로 뭉쳐 대화합과 통일의 시대를 연 위대한 시대 고조선의 역사가 되살아난다면, 아직도 분단의 상처를 안고 있는 우리 민족이 분단의 장벽을 넘어 화합과 통일의 길로 나아가는 돌파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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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에 나타난 고조선과 고구려의 계승성
이 자료는 고구려의 고조선 계승에 대한 종족, 영토, 문화상으로의 역사적 증거들을 중국의 사료를 바탕으로 증명한 자료로써 우리의 시각이 아닌 옛 중국인의 시각을 포함해 그 실재를 풀어갔므로 동북공정의 주체인 중국인들 역시 이에 숙응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겠습니다.
한자가 많은 관계로 읽기에 불편함이 없도록 괄호를 만들어 한글로 독음을 달아봤습니다. 중복되는 한자는 독음을 달지 않은것도 있으니 이는 윗부분의 독음을 참고하시면 되겠고, 역사 사료를 언급한 부분에 대해서는 사료의 출처에만 독음을 달았고, 내용부분은 사료의 독음보다 한자 자체가 글의 내용들을 풀어가는 열쇄가 되는 관계로 자료의 고유성을 살리기 위해 부러 독음을 달지 않았습니다.
참고로 이 자료에서는 '예족'을 언급함에 있어 '예'라는 한자어를 '濊'와 '穢'두가지를 혼용하였는데 이는 두 '예'자 모두 맞게 쓰였음을 알려드립니다. 濊는 본래 '예족'을 가리키는 종족이름으로 쓰인 것이었으며, 穢자는 禾자가 부수로 붙은것을 보아 벼농사문화를 영위하는 민족이었음을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가 아니었나 추론해 봅니다. 일전에 충북 청원에서 1만5000년전의 벼농사의 흔적인 볍씨가 발견되었다는 글을 올린적이 있었는데 이와 맥을 같이하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 중국 사서에 나타난 고조선과 고구려의 계승성 >
심백강 역사학박사 / 민족문화연구원장
1. 머리말
최근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서 우리 고구려사를 자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며 일찍이 유례가 없는 역사침략을 강행하고 있다. 고대 중국인이 고구려사를 중국사와 다른 한국사라고 史料로써 증명한 것을 현대 중국인이 고구려사는 중국사라고 억지를 부리며 역사침략을 시도하는 의도가 무엇일까?
우리는 저들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장황하게 설명하기 앞서 먼저 중국이 왜 오늘 이 시점에서 동북공정을 하게 되었는지 그 원인과 배경부터 규명해야 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 원인과 배경이 정확히 규명될 때만이 거기에 대한 정확한 대안의 수립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동안 우리 강단사학계는 한국 고대사연구에서 고조선을 부정해 왔고 고구려사 연구도 대륙에 있던 고구려를 소홀히 한 채 한반도를 중심으로 진행해 왔다. 즉 중국이 동북공정을 통해 한국사 침탈을 강행하기 전에 우리자신이 먼저 우리 역사의 단절과 축소를 자행 했던 것이다.
우리 강단사학 일각의 자주성이 결여된 이런 연구결과가 오늘 중국의 동북공정을 초래하는데 직간접의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서둘러 단절된 고조선사를 복원하고 한반도 중심의 삼국사연구를 대륙 중심으로 탈바꿈 하는 역사인식, 역사연구 방법론의 대전환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 우리 강단사학은 이런 시대적 요구를 외면한채 여전히 타성에 젖어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최근 고구려연구재단에서 출판된 『고조선,단군,부여』라는 저술을 통해서 볼 때 종래 고조선,단군,부여에 대한 부정적 시각에서 한걸음도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를 올바로 정립하여 중국의 동북공정에 제대로 대응 하라는 국민적 열망을 안고 출범한 단체가 국민의 세금으로 이런 연구결과물을 내놓은데 대하여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솔직히 실망을 금할 수 없다.
이등박문은 우리입장에서는 역적이지만 일본인의 입장에서는 영웅이다. 그래서 그의 동상을 일본 중의원 대청마루에 세워두고 민족의 영웅으로서 기린다. 마찬가지로 동북공정은 우리 입장에서 보면 역사침략이지만 그들의 입장에서는 중국 중심의 역사를 새로 쓰는 작업이다.
이제 우리도 중국 중심의 사대사관, 일본 중심의 식민사관을 버리고 한국 중심의 자주사관의 바탕 위에서 자랑스러운 우리 역사를 새로 써야 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지금 이 시점에서 동북공정 보다 더 무서운 것이 우리 강단사학,실증사학에 내재된 단절사관이고 축소사관이다.
역사학의 혁명 없이는 동북공정을 뛰어 넘을 묘안은 없다. 新史學(신사학),新史觀(신사학)으로 역사에 새 바람을 일으키는 것만이 역사 지키기와 역사 바로 세우기의 유일한 대안이다.
중국의 동북공정이 일시적으로 사료를 왜곡하는 일은 가능하지만 자기 조상들이 써놓은 수천년 전해 내려온 원사료를 말살할 수는 없을 것이며 원사료가 파괴 되지 않고 존재하는 한 왜곡된 역사는 언제든지 시정이 가능한 것이다.
본 연구는 고조선과 고구려의 계승성을 민족적,영토적,문화적 각 방면에서 주로 중국의 사서들을 중심으로 고찰함으로써 고구려사가 중국사가 아니고 고조선을 계승한 한국사라는 사실을 체계적으로 밝혀보고자 한다.
2. 종족상에서 본 고조선과 고구려의 계승성
일반적으로 民族(민족)과 種族(종족)은 본질상에서 큰 차이가 있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본래 하나의 종족이 나누어져서 여러개 종족으로 된다. 예컨대 부여족이 백제족과 고구려족으로 분파된 것이 그 좋은 예이다. 또 하나의 민족이 그 안에 무수한 종족을 포함하기도 한다. 오늘날 중국민족 안에 56개 종족이 내포되어 있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따라서 우리는 종족이 혈통상의 관련성을 의미한다면 민족은 문화상의 동질성을 가리킨다고 말 할 수 있다. 즉 종족이라고 할 때는 생물상& #8228;체질상의 명사인 것이고 민족이라고 하면 정치상& #8228;문화상의 명사인 것이다. 그러면 고조선족과 고구려족은 종족상에서 상호 어떤 계승성이 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중국인들은 고조선족을 穢族(예족), 고구려족을 貊族(맥족)으로 인식하였다. 우리는 무엇으로 그것을 알 수 있는가. 『漢書(한서)』王莽傳(왕망전)에 보면 고구려를 다음과 같이 貊人(맥인)으로 호칭하고 있다. “先是莽發高句麗兵 當伐胡 不欲行 郡强迫之 皆亡出塞 因犯法爲寇遼西 大尹田譚追擊之 爲所殺 州郡歸咎於句麗侯騶 嚴尤秦言 貊人犯法 不從騶起 正有& #23427;心 宜令州郡且尉安之……莽不尉安 穢貊遂反……於是貊人愈犯邊” 그리고 『後漢書(후한서)』東夷列傳(동이열전) 고구려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句麗一名貊耳 有別種依小水爲居 因名小水貊 出好弓 所謂貊弓是也”. 우리는 이런 기록을 통해서 중국인들이 고구려인을 貊族(맥족)으로 이해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陳壽(진수)의 『三國志(삼국지)』東夷傳 濊條(동이전 예조)에서는 箕子朝鮮(기자조선)과 衛滿朝鮮(위만조선)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고조선문제를 고조선조가 아닌 濊條(예조)에서 다루고 있다는 것은 濊(예)를 고조선과 동일시하고 濊族(예족)을 고조선족으로 이해하였다는 것을 설명해 준다.
그러면 穢族(예족)과 貊族(맥족)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동일민족인가 다른 민족인가. 예족과 맥족은 기본적으로 東夷(동이)계열에 속하는 동일 민족이다. 예족이든 맥족이든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모두 東夷族(동이족)에서 출발된 민족인 것이다. 그러면 굳이 예와 맥으로 구분하여 부르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司馬遷(사마천) 『史記(사기)』索隱(색은)과 『漢書(한서)』武帝紀(무제기)에 모두 “東夷濊君(동이예군)”이라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濊族(예족)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 가지 않고 주로 동방의 원거주지에 그대로 거주하던 夷族(이족)을 가리킨 것으로 파악된다. 『史記』索隱 “姚察以武帝時 東夷濊君降 爲倉海郡”. 『史記』正義 “漢書武帝紀云 元年東夷濊君南閭等降 爲倉海郡”.
그리고 貊族은 같은 東夷族이지만 나중에 동북방으로 이주해가서 살던 동이족으로서 이들을 원래 동방에 거주하던 東夷와 구별하여 貊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본다. 『周禮秋官注』 “夷隸 征東夷所穫”. “貊隸 征東北夷所穫”. 엄격히 말하면 예와 맥은 명칭은 다르지만 뿌리가 같은 동일민족인 것이다. 따라서 史書상에서는 “예”와 “맥”을 분리해서 쓴 경우가 있지만 이 양자를 “濊貊(예맥)”으로 합칭한 경우도 허다하다. 『後漢書』東夷 高句麗傳 “濊貊 連年寇秒……濊貊率服”.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것은 『三國志』고구려조에는 東濊(동예), 三韓條(삼한조)에는 韓濊(한예)가 보이고 광개토왕비문과 『北史』신라조에도 韓濊(한예)라는 기록이 있으며 『隋書(수서)』에는 遼濊(요예)라는 표현이 등장하고 『漢書(한서)』의 天文志(천문지)에는 胡貊(호맥), 『後漢書(후한서)』東夷列傳(동이열전)에는 大水貊(대수맥),小水貊(소수맥) 楊雄(양웅)『百官箴(백관잠)』에는 東貊(동맥)& #8228;奚貊(계맥) 『三國史記』에는 梁貊(양맥)이 나온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穢(예)는 東方夷(동방이)의 통칭이고 貊(맥)은 東北夷(동북이)의 통칭이며 그것을 다시 세분하면 거주지역에 따라서 그와 같이 구별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고대사회에서 중국인들은 西周(서주)이래 자기들과 다른 異民族(이민족)을 호칭할 때 통상 夷(이) 또는 東夷(동이)라고 하였다.
『서경』禹貢(우공)편에 鳥夷(도이),& #23886;夷(우이),萊夷(내이),淮夷(회이) 등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서 夷族(이족)들은 西周(서주) 이전부터 토착민으로서 중국에 터전을 이루고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夷族들은 중국의 토착민족으로서 중국의 동방에서 출발하여 나중에는 어느 한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중국의 전 지역에 걸쳐서 널리 분포되어 살았으며 여기서 四夷라는 명칭이 생겨나게 되었다.
고조선은 동이 계열에 속하는 여러 부족 들이 모여서 최초로 세운 나라이다. 따라서 고조선민족은 중국의 동방, 동남방, 동북방을 중심으로 분포되어 활동하던 동이계열의 부족들이 다양하게 포함 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때 고조선 국가 구성의 기본성분은 濊族(예족)이고 주요성분은 맥족이었다고 본다. 東北夷(동죽이)인 貊族(맥족)은 결국 東夷인 濊族(예족)에서 분파된 것이라고 할 때 貊族은 혈통상에서 濊族을 계승한 것이 자명하다. 또 고구려는 고조선 멸망이후 고조선의 옛 터전에서 그 유민인 穢族과 貊族을 중심으로 건국했으므로 고구려는 민족상에서 고조선을 계승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 할 것이다.
3. 영토상에서 본 고조선과 고구려의 계승성
고조선과 고구려가 영토상에서 어떤 계승성이 있는지 밝히기 위해서는 고조선과 고구려의 영토가 과연 오늘의 어느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는지 우선 그것부터 정확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山海經(산해경)』18권 海內經(해내경)에서는 고조선의 위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 名曰朝鮮”. 여기서 北海(북해)는 渤海(발해)를 가리킨다. 『산해경』해내경에서 고조선국의 위치로 설명된 “발해의 모통이”를 오늘 그 해당하는 지점을 찾아본다면 중국의 산동성,하북성& #8228;요녕성 그리고 한반도 일대가 여기에 해당하는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동해의 안쪽이라”고 말한 만큼 절강성,강소성까지를 포함하는 보다 광범한 지역으로 비정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동해의 안쪽 발해의 모통이에 고조선국이 있다”는 『山海經』海內經의 표현은 너무 추상적인 감이 없지 않다.
『산해경』12권 海內北經(해내북경)을 보면 거기에는 고조선의 위치를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朝鮮在列陽東 海北山南 列陽屬燕” “조선은 列陽(열양)의 동쪽에 있다 바다의 북쪽이고 산의 남쪽이다. 列陽(열양)은 연나라에 속해 있다”는 기록을 통해서 볼 때 『산해경』해내북경에 말한 고조선의 위치는 오늘의 河北省 秦皇島市 盧龍縣(하북성 진황도시 농용현) 일대라고 필자는 추정한다.
필자가 이렇게 추정하는 이유는 두가지다. 첫째, “고조선이 列陽(열양)의 동쪽에 있는데 列陽은 燕(연)에 속해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宋代 四大史書(송대 사대사서) 중의 하나인 『太平& #23536;宇記(태평환우기)』의 河北道 平州 盧龍縣條(하북도 평주 노용현조)에 따르면 宋代(송대)의 平州(평주)가 禹貢 九州(우공 구주)에서는 冀州(기주), 周(주)나라 때는 幽州(유주)지역이고 春秋(춘추)시대에는 山戎孤竹(산융고죽),白狄肥子國(백적비자국)이며 전국 시대는 燕(연)에 소속되었다가 秦始皇(진시황)이 천하를 兼倂(겸병:통일)한 뒤 右北平(우북평) 및 遼西 2郡(요서 2군) 지역으로 되고 漢(한)나라 때는 遼西郡(요서군)의 肥如縣(비여현)으로 唐(당)나라 때 다시 平州(평주)로 변경된 사실을 전하고 있다.
『太平& #23536;宇記(태평환우기)』에 의하면 唐宋(당송)시대의 平州가 秦漢(진한)시대엔 右北平(우북평),遼西(요서)였고 전국시대에는 燕(연)나라에 소속된 지역이었음을 의미한다. 즉 바꾸어 말하면 列陽(열양)은 전국시대 때 燕에 속해 있다가 秦漢(진한)시대에 右北平 遼西(우북평 요서)로 바귀고 唐宋시대엔 平州로 되었던 것인데 그 平州가 오늘의 하북성 진황도시 일대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산해경』에 말한 “燕(연)에 소속된 列陽(열양)의 동쪽에 있다”는 고조선이 바로 오늘의 하북성 동쪽 秦皇島市(진황도시) 일대에 위치해 있었다고 추단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는 “고조선이 海北山南(해북산남)에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바다가 발해를 가리킨다는 것은 긴말을 요치 않는다. 다만 여기 말하는 山이 과연 어떤 산을 가리킨 것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발해를 중심으로 볼 때 산동성의 태산, 하북성의 갈석산, 요서의 의무려산, 요동의 개마대산 등 여러 명산 들이 발해부근에 포진 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러한 여러 명산 들 중에서 고조선이 위치해 있었던 海北山南의 산은 과연 어떤 산일까. 필자는 그 산이 바로 碣石山(갈우산)이라고 비정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太平& #23536;宇記(태평환우기)』 河北道 盧龍縣條(하북도 노용현조)를 보면 “여기에 갈석산이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갈석산은 盧龍縣(노용현) 남쪽 23리에 있는데 발해 곁에 竭然(갈연)히 우뚝 서 있기 때문에 그래서 이름을 갈석산이라 한다”는 설명이 덧붙여져 있다.
이러한 기록들은 『산해경』에 말하는 “海北山南”은 海北은 발해북쪽, 산남은 갈석산 남쪽을 의미하며 고조선은 발해 북쪽 갈석산 남쪽 즉 오늘의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일대에 위치해 있었다고 보기에 충분한 근거가 된다고 하겠다.
그리고 오늘의 河北省 秦皇島市 盧龍縣(하북도 평주 노용현조) 일대가 바로 고조선 지역임을 추단케 하는 보다 결정적인 근거는 『太平& #23536;宇記(태평환우기)』盧龍縣條(노용현조)의 다음 기록에서 찾아진다. “朝鮮城 卽箕子受封之地 今有廢城(조선성 즉기자수봉지지 금유폐성)” 箕子(기자)가 다스리던 고조선의 옛성이 宋(송)나라 당시까지도 그 유적이 그대로 남아 보존되어 있었다는 이 기록을 통해서 우리는 『산해경』해내북경에 말하는 고조선의 위치가 오늘의 하북성 진황도시 일대라는 확증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다만 箕子(기자)가 다스린 朝鮮城(조선성)이 盧龍縣(노용현)에 있었다는 기록을 통해서 볼 때 오늘의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즉 발해와 갈석산을 중심으로 한 그 일대는 고조선의 수도가 위치해 있던 지역이고 이 지역을 중심으로 발해의 북쪽, 갈석산의 남쪽 연나라 열양의 동쪽 지역 즉 오늘의 하북성 요녕성 한반도의 광범한 지역에 걸쳐서 고조선의 영토가 위치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기자조선시대 발해,갈석산을 중심으로 하북성 요녕성 등 중국 동북지방의 광대한 지역에 걸쳐 위치해 있었던 고조선은 후일 서방 2천여리의 땅을 연나라 장군 秦開(진개)에 의해 탈취 당함으로써 그 영역이 滿潘汗(만번한)을 국경선으로 대폭 축소되게 된다. 고조선 영역의 중심지가 발해 갈석산에서 요동으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 『위략』의 저자 魚& #35938;(어환)은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昔箕子之後朝鮮侯 見周衰燕自尊爲王 欲東略地 朝鮮侯亦自稱王 欲興兵逆擊燕 以尊周室 其大夫禮諫之 乃止 使禮西說燕 燕止之不攻 後子孫稍驕虐 燕乃遣將秦開 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潘汗爲界 朝鮮遂弱”.
그러면 고조선이 서쪽으로 2천여리의 땅을 연나라에게 빼앗기고 국경선이 滿潘汗(만번한)으로 축소되게 된 시기가 구체적으로 언제쯤일까. 고조선을 침략한 연나라 장수 秦開(진개)는 燕昭王(연소왕 : 기원전 311-279)때 사람이다. 따라서 우리는 기원전 4세기 말 ~3세기 초에 고조선 영역의 대폭적인 축소가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고조선의 서쪽 영토가 축소된 이후의 국경선으로 된 滿潘汗(만번한)을 압록강으로 보느냐 아니면 요하로 보느냐에 대해서는 오늘날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러나 滿潘汗 서쪽 즉 요동에서 북경 永平府(영평부)까지 2천여리 땅이 본래는 고조선 땅이였다는 사실은 丁茶山(정다산)도 『我邦疆域考(아방강역고)』에서 다음과 같이 인정하였다. “鏞按 今之永平府 古之北平郡也 且据魏略 潘汗以西二千餘里 在古爲箕氏之有 今自遼東而西行二千餘里 正得永平府境 一統志所言 眞有據也”.
고조선 영역이 기원전 3세기 이전까지는 오늘의 요녕성 및 하북성 동부를 포괄하는 광대한 지역을 차지하였으나 기원전 3세기 초 서방 2천여리 땅을 연나라에게 빼앗기고 오늘의 요하 이동으로 영역이 축소 되면서 고조선은 국력이 크게 약화되게 되었는데 그 후 연나라 사람이 衛滿(위만)이 고조선에 망명해 왔다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위만조선이다.
그러면 위만조선은 오늘의 어디에 위치해 있었는가 위만조선이 어디에 있었는지 그 소재를 밝히기 위해서는 『사기』조선열전에 보이는 다음 기사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衛滿& #39755;結蠻夷服 而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障 稍役屬眞番朝鮮蠻夷 及故燕齊亡命者王之 都王險”.
사마천은 『사기』조선열전에서 위만이 동쪽으로 조선에 올 때 浿水를 건너 왔다고 썼다. 위만이 건너 온 이 패수가 어디 있었는지 그 소재가 파악되면 당시 고조선의 위치가 드러나게 된다. 이 패수에 대하여 여러 가지 異說이 있는데 대체로 1) 요동에 있었다. 2) 낙랑군에 있었다. 3) 한반도의 대동강이다. 4) 압록강이라는 네가지 설로 요약된다.
『사기』에 위만이 패수를 건너와서 “秦故空地上下障(진고공지상하장)”에 거주했다고 했는데 진시황이 한반도의 압록강이나 대동강에 上下障(상하장)을 설치한 일은 없다. 그리고 『사기』조선열전 索隱(색은)에 應& #21165;(응소)가 “遼東有險瀆縣 朝鮮王舊都(요동유험독횬 조선왕구도)”라고 말한 것으로 볼 때 필자는 요동 패수설이 비교적 설득력이 있으며 따라서 위만조선은 요동에 있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위만조선은 결국 그 손자대에 이르러 망하고 만다. 漢武帝(한무제)는 元封(원봉) 2년에 천하의 사형수들을 끌어모아 위만조선을 공격하여 그 이듬해 여름 멸망시키고 그 지역을 樂浪(낙랑),臨屯(임둔),玄& #33759;(현토),眞番(진번)으로 쪼개어 漢4군으로 삼았다.4) 『漢書』권6 武帝紀 “元封 2年 朝鮮王攻殺遼東都尉 & #36858;募天下死罪擊朝鮮……遣樓船將軍楊僕 左將軍荀& #24408; 將應募罪人擊朝鮮 三年……夏 朝鮮斬其王右渠降 以其地爲樂浪臨屯玄& #33759;眞番”.
漢武帝(한무제)가 고조선의 영토를 무력으로 침략한 뒤 그것을 넷으로 분할하여 漢四郡(한사군)을 세웠지만 몇백년도 아니고 수천년을 두고 내려 온 고조선민족이 하루아침에 없어질리 만무했다. 일부 한족에 흡수 동화되기도 하는 것이 불가피한 현상 이었겠지만 대부분의 고조선 민족은 엄연히 그대로 잔존하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穢貊(예맥)을 비롯한 고조선 유민들은 곧바로 여러 나라를 세워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후한시대에 접어들자 끊임없이 상호 연대를 통해 漢族과 싸우며 고토회복운동을 전개해 나갔는데 그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존재가 바로 고구려였다는 사실이 다음의 사료에서 입증되고 있다. 『後漢書(후한서)』권 5 安帝紀 “安帝元初 五年……夏六月 高句麗與穢貊寇玄& #33759;”, “建光元年 春正月 幽州刺使馮煥 率郡太守 討高句麗穢貊不克……夏四月 穢貊復與鮮卑寇遼東 遼東太守蔡諷追擊 戰歿 冬十二月 高句麗馬韓穢貊圍玄& #33759;”.
따라서 고구려를 중심으로 단합한 고조선 유민들은 후한시대를 지나 위진 남북조 시대에 이르러서는 잃어버린 고조선영토를 거의 회복하다시피 하였다. 『周書(주서)』에 보이는 다음의 기록이 그것을 잘 뒷받침 한다고 하겠다. 『周書』49권 異域列傳 高麗 “高句麗者……治平壤城……其外有國內城及漢城 亦別都也 復有遼東玄& #33759;等數十城”.고구려는 당시에 玄& #33759;(현토)지방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다 『梁書』권 54 諸夷列傳 “高句麗者……其國 漢之玄& #33759;郡也 在遼東之東”.
. 漢의 四郡중 玄& #33759;郡(현토군)을 발판으로 삼은 고구려는 遼東(요동)지방에 있는 수십성을 차지하고 또 오늘의 한반도의 漢城(한성)과 平壤城(평양성)까지를 확보함으로써 고조선시대의 영토를 거의 계승하고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는 隋煬帝(수양제)시대에 이르러서는 요동과 아울러서 발해,갈석산 일대까지도 그 영향권아래 둠으로서 고조선 전성기시대의 영토를 거의 다 차지했다는 사실을 다음의 기록은 역력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隋書(수서)』4권 煬帝紀 “八年春正月……下午下詔曰……高句麗小醜 昏迷不恭 崇聚渤碣之間 薦食遼穢之境”.
周(주)시대의 朝鮮 땅이 漢의 玄& #33759;(현토),樂浪(낙랑)이고 隋(수)의 고구려라는 다음의 두 기록은 고조선과 고구려가 시대의 차이를 두고 동일한 지역에 세워진 국가라는 즉 고조선 영토에서 고구려 영토로 계승된 영토상의 계승성을 요약해서 잘 보여 준다고 하겠다. 『宋史(송사)』487권 外國傳 “高麗本曰高句麗 禹別九州 屬冀州之地 周爲箕子之國 漢之玄& #33759;郡也 在遼東”. 『欽定盛京通志(흠정성경통지)』권 23 歷代建置沿革表 “蓋平,復州,寧海,岫巖,鳳凰城 則周之朝鮮 漢之玄& #33759;樂浪 隋之高句麗”.
4. 문화상에서 본 고조선과 고구려의 계승성
고조선과 고구려의 문화상 동질성 내지는 계승성에 대하여 여러 경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三國志』濊傳(예전)에서 “其耆老 自謂與句麗同種……言語法俗 大抵與句麗同”이라 한 것을 볼 때 고구려는 고조선과 동일한 민족으로서 언어와 풍속이 기본적으로 서로 같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고구려의 문화가 고조선의 문화와 구체적으로 어떤 점에서 같았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고조선은 犯禁(범금)8조를 통해서 볼 때 형법을 엄격하게 적용함으로써 백성들이 대문을 걸지 않고 생활하는 안정된 사회를 이룩했다. 『漢書』地理志 “樂浪朝鮮民犯禁八條 相殺以當時償殺 相傷以穀償 相盜者 男沒入爲其家奴 女子爲婢 欲自贖者人五十萬 雖免爲民 俗猶羞之……是以其民終不相盜 無門戶之閉”.
다음의 기록에서 보면 고구려도 역시 국법을 매우 엄정하게 집행함으로서 도둑이 없는 사회를 이룩했음을 알 수 있다. 『隋書(수서)』東夷列傳 高麗條 “反逆者縛之於柱& #29191;而斬之 籍沒其家 盜則償十倍 用刑旣峻 罕有犯者” 『舊唐書(구당서)』東夷列傳 高麗條“大體用法嚴峻 少有犯者 乃至路不拾遺”.
그리고 고조선에서는 남녀가 혼인하는데 있어 재물을 따지지 않는 풍습이 있었다. 『漢書』地理志 “嫁娶無所讐”.
그런데 고구려에서도 혼인은 남녀의 서로 사랑 하는 감정을 소중히 여기고 혼인에 재물이 오가는 경우 그것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혼인문화가 있었다. 『周書』異域列傳 高麗條 “嫁娶之禮 略無財弊 若受財者 謂之賣婢 俗甚恥之”.
그리고 『三國志』東夷傳 濊條(예조)에 따르면 濊族(예족)들은 항상 10월이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밤낮으로 음주 가무하면서 즐겼는데 이를 舞天(무천)이라 했다고 한다. “常用十月節祭天 晝夜飮酒歌舞 名之謂舞天”.
그런데 고구려에도 역시 이와 비슷한 풍습이 있었다. “10월이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국중대회를 개최하는데 이름을 東盟(동맹)이라 한다”는 기록이 그것을 잘 설명한다. 『三國志』東夷傳 高句麗條 “以十月祭天 國中大會 名曰東盟”.
고조선과 고구려는 이러한 일련의 사료들을 통해서 검토해 볼 때 이것이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는 어려우며 혼인문화,제례문화,놀이문화 등 문화 전반에 걸쳐서 동질성과 계승성이 농후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고 하겠다.
5. 맺는말
우리 고대사를 연구하는데 있어 통상 세가지 난제에 직면하게 된다. 첫째, 200년~300년 전도 아니고 4000년~5000년을 흘러온 과거 역사를 연구하자면 그것을 뒷받침할 史料의 확보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둘째 우리 손으로 기록한 고대사료가 많지 않고 주로 중국인의 손에 의해 기술된 사료에 의존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事大主義(사대주의)의 함정에 빠질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셋째 근대 일제식민통치 35년을 거치면서 이때 식민통치를 학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일제가 만들어 놓은 植民史觀(식민사관)의 잔재가 아직도 불식되지 않고 남아 있어 그 장벽을 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지금 농경사회,산업사회를 지나 정보화 사회에 살고 있다. 정보화 사회란 문화자본 지식기반 사회를 의미한다. 세계가 바야흐로 문화중심 역사전쟁시대로 접어든 지금 고대사 연구의 3대 난관을 극복하고 우리 역사의 眞相(진상)을 復元(복원)하는 것이야말로 국민적 국가적 시대적 당면과제가 아닐 수 없다.
위에서 우리는 민족상으로나 영토상으로나 문화상으로나 고구려는 고조선을 계승한 국가가 명백하다는 사실을 중국의 여러 사료들을 통해서 확인하였다. 이 소 논문이 동북공정의 허상을 타파하고 우리역사의 진상을 복원하는데 조그마한 보탬이라도 되어지기를 기대하는 마음 간절하다.
# 우리의 유산, 한의학 역사에 대해
기원전 3000~2000년경 배달쥬신족의 동이인 3황 중, 태호복희씨의 팔괘사상의 창안과, 신농의 염제가 약으로 쓸 수 있는 식물을 처음으로 발견,조사하여 많은 업적을 남겼다고 한다. 그들의 연구와 조사가 입으로 전해져 후에 그 뜻을 이어받은 사람이 만들었다고 전해오는 '신농본초경'이야말로 약용식물의 발전의 기초가 되는 본초서의 시초이다. 이후 배달쥬신족의 중국왕조에서는 신수본초,증류본초,가우본초를 시작으로 많은 본초서가 출판되었다. 그 후 이들을 보충개편하여 짱골라의 쥐나왕조 명나라에서 본초강목이 1596년 이시진에 의해 출산되었다. 1611년 이씨조선에서 더욱 발전된 허준의 동의보감이 태어나게 된다.
참고로 1923년 8월9일 함경북도 경흥군 웅기면 송평동 패총에서 발굴되어 지금도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 보존되고 있는 폄석은 고고학적으로 세계최초의 돌침이다. 배달쥬신족의 고대국가 한단시대에 폄석술(침구술)과 탕약이 쥐나로 전파 전수되었다는 사실은 마왕퇴에서 출토된 유물들에서도 어느 정도 나타난다. 마왕퇴에서 출토된 2100여년전 [백서 , 음양11맥구경] 중에서 일찍이 팔,눈,뺨,인후와 상호관련된 "귀의 맥"을 계시하였다. 이 때 벌써 11경맥과 경혈이 확정되어 있었고, 침술과 뜸술 또한 현대 침구학 이론과 별반 다른 점이 없을 정도로 발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최근 쥐나 학자들도 영추경이 고대 배달,조선에서 전래된 의술이란 것을 발표한바 있으며, 침술의 경전으로 추앙받고 있는 황제내경에서까지 침술의 발생은 배달,조선임을 서술하고 있다. [황제내경 소문 권 제4 이법방의론 제12장]에서 "폄석은 동방으로부터 전래되었다"라고 하였으며 [산해경]에서도 "동방에서 돌로 만든 폄석이 먼저 생산된다"라는 기록이 있고, [통현지요부]에서 "요동 동쪽에 폄석을 이용한 치료술(침술)이 발달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이 쥐나의 고 역사서의 기록들도 침술의 발상지가 힌결같이 요동 동쪽 한단민족에서 발생,발전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배달쥬신 선조들의 유산을 모두 남의 것으로 당연히 받아들이는 세뇌당한 현세태가 참 한심하다. 짱골라의 쥐나왕조 한,송,명과 이들 짱골라왕조를 제외한, 그 이전부터 중원대륙과 만주를 지배해 온 대부분의 우리 배달쥬신 중국의 왕조들을 혼동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중원 대부분의 역사를 지배한 배달쥬신왕조들의 위대한 발견,발명,업적들은 우리 형제,민족의 것이다.
짱골라의 왕조는 한,송,명 뿐이다. 그 외의 수많은 왕조는 배달쥬신이 이룬 업적이다. 배달,조선,요,순,하,상(은),주,춘추 전국,위,수(선비),당(선비),요(거란),금(말갈,여진),원(몽골),청(여진,만주) 등 수많은 배달쥬신일족들이 이룬 역사이다. 따라서 짱골라들 시대에 만들어진 발견이나 발명은 인정되나 그 외의 시대는 배달쥬신의 발견이나 발명이다. 시대에 따라 영토의 변화는 있을지언정, 역사는 그 민족의 것이다. 얼마나 못 났으면 남의 조상도 지 조상이라고 우기는 짱골라가 굉장히 합리적으로 보이는가....짱골라들이 역사조작한 것은 이미 2000년이상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는 절대 마음 을 놓아서는 안 될 상황 에 처해 있다. 준비하지 않는 자에게는 결국 멸망으로 나아갈 뿐이지. 우리의 어리석은 과거의 역사가 잘 증명 해주지 .
북한은 모든 민간요법을 총망라해서 임상실험해서 효능있는 것을 정리해 기존에 있 던 한의학과 접목해 고려의학으로 발전시켰습니다. 이에 반해 남한은 양의학만 중요 시한 나머지 한의학이나 기치료,민간요법을 등한시한 것이 이 상태까지 왔습니다
최근에 들어서 유럽과 미국은 한의학과 서양의학을 접목시켜 대체의학의 가능성에 중 점을 두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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