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의 시, 거울의 제국[제2편]
윤동주는 ‘거울’과 관련된 인상적인 시편을 선보인 바 있다. 「참회록」에서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이다지도 욕될까“라고 썼다. 이때 ‘구리 거울’은 얼굴표면을 비추는 도구를 넘어서서 보이지 않는 내면의 윤리성을 점검하는 사회장 “사회는 거울로서 출현한다”(피에르 르장드르)으로 작동한다.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통해서 예민한 양심의 소유자인 식민지 지식인 청년이 일본 유학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을 한, 제 나라의 주권을 빼앗은 ‘악의 제국’ 일본과 타협을 하고 만 자신의 욕됨을 보았다. 거울의 극한, 절대적 거울이란 ‘신’이다. 신은 우리 죄의 유무를 판단하고 선고한다. 윤동주는 ‘구리 거울’에서 자신의 죄를 읽어내고, 죄로 얼룩진 욕된 자아를 투시한다. 그의 정서적 바탕이 된 부끄러움은 그런 자기성찰의 소산이다. 다시 말하면 “신은 모든 거울에 앞서는 <거울>”이고, 그 거울은 텅 빈 신체, 그리고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신과 닮았다. “거울을 거울에 비추어도, 무한 반사 속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다.” 거울은 얼굴-표면과 더불어 얼굴-표면 아래에 숨은 불가시적인 내면과 양심을 비쳐낸다. 윤동주의 자기 양심의 표백으로서의 ‘구리 거울’과 이상의 소리가 완벽하게 소거된 조용한 세상, 오른쪽과 왼쪽이 바뀌어 전도된 세계로서의 ‘거울’은 다르다. 윤동주의 ‘구리 거울’이 내면을 살피는 장치로서 윤리적 고백을 낳는 매개물이라면, 이상의 ‘거울’은 분열된 자아의 다름을 정신분석적으로 파열하듯이 드러낸다.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거울속에도귀가있소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소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
내악수를받을줄모르는-악수를모르는왼손잡이오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는구료마는
거울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만이라도했겠소
나는지금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있소
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에골몰할게요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요마는
또꽤닮았소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 이상, 「거울」 전문
이상의 자아가 분열증을 앓았을 뿐만 아니라 병적 나르시시즘에 물들어 있다는 사실은 널리 공감되는 사실이다. 나르키소스의 ‘호수’와 이상의 ‘거울’은 상호조응한다. 어느날 숲속에서 사냥을 하던 나르키소스가 찬탄하고 열광한 것은 다름아닌 호수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다. 그는 왜 사라지는 이미지를 붙잡으려고 했을까? 나르키소스에게 자기 모습을 비추고 있는 호수는 ‘이것은 나다’라고 속삭이는 에코다. 나르키소스는 그 속삭임에 유혹당한다. 「거울」에서 ‘나’는 자기 이미지에 도취된다. ‘나’는 ‘거울 속의 나’와 ‘거울 밖의 나’로 분열된 채 거울에 나타난 자기 이미지에 놀라고 신기해하면서 유희에 빠진다. 나르키소스가 그랬듯이 거울은 이상에게 ‘이것은 나다’라고 속삭이는 에코다. 처음 만나는 ‘근대’의 신기성에 매혹되고 이끌리는 ‘모던뽀이’ 이상이 거울에 고스란히 나타난다. 거울에 비친 상은 ‘나’이면서 동시에 ‘나’를 벗어난다. 거울은 ‘나’를 고스란히 비추지만 그것은 이미지이고 표상일 뿐이다. ‘거울’에 비쳐진 ‘나’와 거울 밖에 서 있는 ‘나’ 사이에 소격(疏隔)이 있다. 이 간격과 분리가 가능한 것은 주체와 이미지 사이의 거리 때문이다. 주체와 이미지 사이는 벌어진 상처와 같다. 거울 밖의 ‘나’는 오른손잡이지만 거울 속의 ‘나’는 왼손잡이다. “내악수를받을줄모르는-악수모르는왼손잡이오” ‘나’는 왼손잡이가 아니다. 거울에 비친 ‘나’는 진짜 ‘나’가 아니다. ‘거울’의 세계란 허상들이 춤추는 가상현실, 이미지들만 바글거리는 세계인 까닭이다.
장석주 「은유의 힘」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