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리라.”(요한 6,56)
오늘 복음 말씀은 이번 주간 계속되는 요한복음의 말씀으로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는 기적을 행한 후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향해 말씀을 건네시는데 오늘 복음이 바로 그 부분입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군중들을 향한 영원한 삶을 약속해 주는 살아있는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입니다. 계속되는 복음의 말씀, 언뜻 보기에 계속 반복되는 듯 느껴지는 복음의 말씀은 사실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니 보다 직설적으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군중들의 굳은 마음에 예수님이 그들의 마음의 문을 열기 위해 반복하여 하시는 말씀이라고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계속 반복하여 하느님의 진리를 설명하시는 예수님과 그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도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군중들의 대립, 그 대립이 오늘 복음 안에서 극대화되기에 이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유다인들이 이렇게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때에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요한 6,52)
이제 급기야 싸움이 일어납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그 말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수준을 넘어 그 말의 진의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무리가 반반으로 나뉘어 서로 다투는 이 같은 상황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군중들의 예수님을 향한 적대적 마음이 거의 극에 달했음을 드러내 보여줍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예수님은 이들의 이 같은 상황을 잠재울 생각은 하지 않으시고 마치 이들의 대립을 더욱 심각하게 만들려고 작정하신 것인지 정말 작심하고 더 강하게 이제껏 이야기했던 그 생명의 빵에 관해 다시금 이야기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가 생명을 얻지 못한다.”(요한 6,53)
예수님은 불에 기름을 붓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의 살을 어떻게 먹을 수 있겠냐며 서로 싸우고 있는 사람들에게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된다는 말씀을 건네심으로서 이제는 그들의 마음의 적대심을 극에 달하게 만들어 버리시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오늘 복음의 상황과 마주하며 우리 마음 안에 하나의 의문이 생겨납니다. 예수님은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상황을 극으로 몰고 가시는 것일까? 예수님은 이 같은 위기의 상황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셨던 것일까? 도대체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셨기에 이 같은 급박하고 위급한 상황까지 몰고 가시는 것일까?
이 같은 의문에 대한 답을 오늘 복음 말씀을 인용한 복음환호송의 말씀 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환호송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리라.”(요한 6,56)
예수님의 이 말씀 안에서 드러나듯 예수님께서 자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먹고 마시라고 하신 이유는 우리가 예수님 안에 머무르고 그 분이 우리 안에 머무르는 예수님과 우리의 완전한 일치를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과 우리가 하나와 완전히 일치되기 위한 방법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내어주시는 당신의 삶, 그것을 우리가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나와는 다른 너를 만나 나와 너가 하나가 되는 일은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 할 수 있습니다. 나와 너는 너무나 다르고 서로 다른 이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이 불가능을 가능케 하십니다. 바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 주심으로서, 나를 완전히 버림으로서 너와 하나가 되는 사랑의 기적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 기적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는 그 극한의 사랑을 이루어지고 이 사랑의 기적이 일어나기에 앞서 예수님은 오늘 복음의 말씀을 통해 그 십자가상 죽음의 갖는 구원의 가치와 의미를 설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나와 너가 만나 서로 다른 둘이 하나가 되는 사랑의 기적.
바로 이 기적을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에게 선포하며 그 놀라운 기적의 이야기를 오늘 독서의 사도행전의 말씀 안에서 바오로로 다시 태어나는 사울의 모습을 통해 다시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유다인 사울은 그 박해의 박차를 가하기 위해 칼을 차고 다마스커스로 향해 갑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모두 잡아 박해를 넘어 죽음에 처하게 하려했던 박해자 사울은 그러나 그 여정 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빛으로 만나게 되고 그 만남을 통해 그의 삶이 180도 완전하게 변화됩니다. 가혹한 박해자가 부활소식을 전하는 복음 선포자로, 그것도 이방인들에게 복음은 선포하는 이방인의 사도로 변화되는 바오로의 이 같은 변화는 사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하느님과 완전히 하나가 되는 일치를 통한 기적의 사건으로 밖에는 설명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특별히 예수님이 보낸 하나니아스를 통해 바오로의 눈에 있던 비늘이 떨어지며 새로운 눈으로 새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바오로의 모습은 그의 변화된 삶이 어떻게 가능해졌는지를 상징적으로 설명해 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같은 면에서 오늘 영성체송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언제나 되뇌십시오.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시어, 우리를 속량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속량으로 우리의 삶에 변화가, 우리 힘으로는 결코 가능해 보이지 않았던 그 변화가 바로 그 속량으로 가능해집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우리가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일치로 이끌어 주며 그 일치가 우리 삶의 가장 큰 행복이자 기쁨의 원천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오늘 말씀이 이야기하는 바처럼, 모든 이가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일치, 오늘 복음의 말씀처럼 하느님 안에 우리가 머무르고 하느님이 우리 안에 머무른 그 일치를 통해 여러분 모두가 하느님과 함께 참 기쁨 속에서 나날의 삶을 보내시기를 언제나 기도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시어, 우리를 속량하셨네. 알렐루야.”(영성체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