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한 위대한 설교자의 설교를 배울 때 빠지기 쉬운 함정 중 하나는 그의 위대한 명성이나 혹은 업적에 지나치게 주목함으로 그의 설교 이면에 존재하는 참된 정신을 간과하는 것이다. 한 위대한 설교자의 탄생은 종종 그를 둘러싼 문화적, 사회적, 인격적, 영적인 요인들과 같은 다양한 삶의 경험과 훈련을 함의한다. 따라서 설교에 대한 올바른 연구는 설교자를 형성했던 삶의 자리와 유리되어서는 안 된다. 만약 한 위대한 설교자의 설교를 연구하는 이가 단순히 그의 설교 방법론만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지극히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언젠가 로이드 존스가 기술이나 기교로 설교에 접근하기 시작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경고했던 것처럼 방법론에 관한 지나친 관심은 설교에 대한 피상적 이해를 초래할 수 있다. 따라서 스펄전 설교의 올바른 이해, 특히 폴 쿡(P. Cook)이 지적하듯, 그의 모든 설교의 대표적 특징인 “복음설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삶의 행적들을 함께 추적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스펄전의 동생이 잘 표현하듯, 그의 설교가 성공한 주된 이유는 “그가 나사렛 예수를 사랑하고 나사렛 예수는 그를 사랑했다”는 사실에 있기 때문이다.
무거운 죄의 짐을 진 어린 순례자 존 웨슬리, 마틴 로이드 존스를 비롯한 많은 설교의 거인들의 삶이 그러하듯, 스펄전의 회심 경험은 그의 소명과 설교 사역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849년 여름, 15세였던 스펄전은 뉴마켓 마을의 학교에 진학했다. 당시 그는 이미 성경과 신학에 어느 정도 정통했지만 여전히 회심을 경험하지 못했다. 스펄전은 유아시절 보았던 천로역정에 나오는 무거운 죄의 짐을 등에 졌던 순례자처럼 죄의 짐으로 인한 깊은 번민과 함께 그것으로 인한 구원을 간절히 열망하고 있었다. 그는 말한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이, 죄는 내게 견딜 수 없는 무거운 죄짐이었다. 내가 두려워했던 것은 지옥이 아니라 죄 자체였다.” 스펄전은 이 당시에 경험했던 극심한 영적 고통과 죄에 대한 깊은 인식을 그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인간으로 창조되기보다는 차라리 개구리나 두꺼비로 창조되었기를 더 원했습니다. 내 생각에 가장 미천한 피조물이라 할지라도 나보다 훨씬 훌륭해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극악무도하며, 상스러운 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당시에 그러한 무거운 죄의 짐을 벗어버리는 데 도움을 주는 설교를 듣기란 쉽지 않았다. 스펄전은 그의 영적 필요와 당시 강단에서 행해졌던 설교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어떤 목사님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설교했습니다. 그러나 그 설교는 구원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알고 싶어 하는 불쌍한 죄인에게는 너무나 숭고한 진리였을 뿐입니다. 또 다른 훌륭한 목사님은 율법에 관해 설교했습니다. 그러나 그 설교는 씨가 뿌려지지도 않은 밭에 쟁기를 사용하는 방법에 관한 설교였습니다. 또 다른 목사님은 실리적인 설교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발이 없는 사람들에게 기동 훈련을 가르치는 장교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알고자 했던 것은 ‘나는 죄를 어떻게 용서 받을 수 있는가’였고 아무도 그것에 관해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아틀리히에서 만난 구원 그러나 죄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는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일어났다. 1849년 12월 스펄전이 수학하던 뉴마켓 학교에 열병이 발생하여 임시휴교 조치가 내려졌다. 이로 인해 스펄전은 콜체스터의 집으로 돌아와 가족과 함께 지내야만 했다. 이 기간 동안 스펄전의 가족들은 아버지를 따라 주일이면 집에서 18km 떨어진 톨스베리의 교회에 예배를 갔다. 그런데 1850년 1월 6일 주일 아침은 심한 눈보라 때문에 그곳으로 가지 못하고 어머니의 권유로 콜체스터의 교회로 예배드리러 길을 나섰다. 그러나 이마저도 심한 눈보라 때문에 여의치 않아 스펄전은 눈보라를 피하기 위해 아틀리히 스트리트의 작은 교회당 안으로 들어갔다. 스펄전은 이 순간을 이렇게 회상한다. “만약 어느 주일날 아침, 예배당을 찾아가던 나에게 눈보라를 보내주신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없었다면 나는 아직도 어둠과 절망 속에서 머물렀을 거라는 생각을 가끔씩 한다.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되자 나는 골목길로 접어 들었고 작은 감리교회에 이르렀다.” 스펄전은 그곳에서 한 무명의 평신도 설교자의 설교를 통해 그토록 갈망하던 구원의 빛을 발견했다. “목사님은 그날 아침 오지 않으셨다. 아마 눈보라 때문에 길이 막혔던 것 같다. 결국 매우 마른 한 남자 - 구두쟁이거나 재봉사, 또는 그런 류의 직업을 가진 이로 보이는 - 가 설교를 하려고 단위에 섰다. 그의 설교 제목은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사 45:22)”였다. 그는 단어의 발음조차 정확하지 않았다. … 가까스로 10분 정도 설교하자 그는 능력의 한계에 다다랐다. 그러자 그는 발코니 아래 앉아있던 나를 쳐다보았다. … 그는 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마치 내 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젊은이, 당신은 비참해 보이는군요’라고 말했다.… 그러더니 그는 손을 높이 들고 ‘젊은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오! 바라보시오! 바라보시오! 바라보시오! 당신은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사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라고 외쳤다.” 스펄전은 바로 그 순간을 이렇게 말한다. “그때 나는 구원의 길을 바라보았다. … 나는 더 이상 바라볼 수 없는 지경까지 바라보았다. … 그러자 내 영혼을 결박했던 쇠사슬이 산산조각 났다. … 나는 어둠에서 놀라운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단순히 예수님을 앙망하는 것으로 절망에서 건짐을 받은 것이다.”1 이 아틀리히교회에서의 회심 사건은 훗날 스펄전의 설교 사역에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첫째, 설교 메시지의 중심주제로서의 그리스도의 복음의 중대성에 대한 자각이다. 훗날 스펄전은 그의 학생들에게 이렇게 권면한다. “그리스도를 전하십시오. 그분은 마치 자석과 같아서 그분에게 속한 이들을 다 자신에게 이끄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회심하는 영혼을 보고 싶다면 더욱 열심히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합니다. 모든 설교 속에 그리스도께서 계셔야 합니다. 그분이야말로 모든 신학의 머리와 바탕이 되셔야 합니다.” 둘째, 댈리모어(A. Dallimore)가 적절하게 말하듯, 그가 들었던 많은 설교자들이 복음을 보다 쉽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전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무명의 설교자처럼 가장 직설적이며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설교해야 할 필요를 깨우쳐 주었다.2
라크강,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다 이후 뉴마켓으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스펄전은 세례를 받았다. 1850년 5월 3일 어머니의 생신이었던 그날, 스펄전은 아침 일찍 일어나 두 시간 동안 은밀한 기도와 헌신을 드린 후 작은 시골길을 따라 13km를 걸어 라크강의 아일럼에서 캔트로우(W. Cantlow)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가 세례를 받았던 날은 비록 5월이었지만 영국의 봄이 그러하듯, 여전히 스산하고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스펄전은 그 날에 관하여 그의 전기에서 이렇게 회상한다. “넘실대는 강물 속으로 들어갈 순서가 되었을 때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러나 몇 발자국 안으로 들어가서 나룻배에 탄 사람들과 양편 강가에 늘어선 사람들을 보자 하늘과 땅과 지옥이 나를 응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 그곳에서 어린양을 따르는 자로 내 자신을 고백하는 것이 전혀 부끄럽지 않았고 소심함은 금세 사라졌다. 그 후로는 그런 감정을 결코 느낀 적이 없다. 또한 침례식 후 어떤 말이든 담대히 할 수 있게 되었고 수천 가지 두려움을 라크강에 버리고 왔다.” 아일럼에서의 세례식은 그에게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를 위한 더 큰 열망과 열정을 불러 일으켰다. 그 감격적인 날 밤, 스펄전은 그의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예수님과 그분의 십자가만을 사랑하고 나의 전 생애를 그 분의 뜻을 확장시키는 일과 그 분이 기뻐하시는 길을 가는 데 바치기로 서약한다. 바로 단 한 가지 오직 하나님만을 영화롭게 하는 목적만을 가슴에 품은 채.”
케임브리지, 거인의 설교학교 세례식 이후 스펄전은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게 되었는데 이 사역을 언제나 자랑스럽게 여겼다. “나는 학사나 석사 학위, 혹은 사람에게 수여되는 어떤 학위보다 주일학교 교사라는 학위가 더 좋다.”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스펄전의 말은 사람들을 사로잡는 힘이 있어 그 교회의 많은 어른들조차 그의 강의를 들으러 나왔다. 이즈음 스펄전은 자신의 삶에 목회의 사역이 놓여있음을 본격적으로 의식하며 설교를 통한 복음전도 사역을 갈망했다. 스펄전은 그의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아버지처럼 하나님께서 성공적인 복음 전도자로 만들어 주실 때를 얼마나 간절히 갈망했는지 모릅니다. 바로 한 죄인이 예수께 붙들려 나오는 것을 보기를 얼마나 소원했는지요! 저는 아버지의 고귀한 특권을 몹시 부러워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당신께서 언젠가 하나님의 미천한 도구인 제가 사람들에게 설교하는 모습을 보고 기뻐하게 되시길 소원합니다.” 스펄전의 회심 사건이 예기치 않은 것이었듯, 그의 설교 사역의 길도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열렸다. 뉴마켓에서 캠브리지로 이사한 후 스펄전은 세인트 앤드류 침례교회를 출석했는데, 이 교회에는 인근의 작은 교회들을 설교로 돕는 “평신도 설교자 연합회”(Lay Preachers’ Association)가 운영되고 있었다. 스펄전은 이 모임의 책임을 맡고 있던 제임스 빈터(J. Vinter)의 부탁으로 그곳에서 약 7km 떨어진 테버샴(Teversham)의 작은 오두막에서 설교하게 되었다. 비록 몇 명의 농부들과 그 아내들이 전부였지만 스펄전은 힘을 다해 설교했고 그 설교는 참석한 이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3 이 설교 사역을 계기로 스펄전은 캠브리지 주변의 여러 마을에서 정기적으로 설교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 소년 설교자의 복음에 대한 확신과 구령의 열정은 너무나 뜨거워서, 기록에 따르면 스펄전은 자주 하루 종일 일한 후 12km를 걸어가 설교하곤 했다. 스펄전은 심한 비바람이 치는 어두운 밤에 방수 장화와 외투를 쓴 채 등불을 들고 설교처로 가기 위해 들판을 가로질러 걸어가곤 했다. 영국 시골 마을의 칠흑 같은 어두움, 스산한 비바람, 그리고 뼈에 스며드는 으스스한 추위를 아는 사람은 이 소년 설교자의 구령의 열정이 어떤 것인지를 알 것이다. 전해오는 한 이야기는 스펄전의 열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번은 날씨가 너무나 스산하고 험악하여 마을 사람들은 순회 설교가가 예배를 인도하러 그 마을에 오리라 상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교회에 오지 않았고 스펄전이 도착했을 때 예배당에는 한 사람도 없었다. 스펄전은 돌아가지 않고 집집마다 찾아가 사람들을 불러내어 함께 예배를 드렸다. 농부의 부엌이나 오두막, 혹은 외양간에서 가난하고 평범한 이들에게 설교했던 이러한 순회설교의 경험은 훗날 스펄전의 설교 사역을 위한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곧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설교를 연마하는 좋은 학교가 되어 주었고, 이것은 훗날 스펄전 설교의 대중성에 기여했다. 스펄전은 이 시절의 경험을 이렇게 말한다. “나는 즐거이 훈련받을 수 있는 학교를 가졌던 셈이고 그 안에서 계속적인 훈련을 거쳐서 지금의 내가 가지고 있는 평이한 설교를 습득하게 되었습니다.”
워터비치, 부흥을 보다 평신도 설교 사역을 시작한 지 오래지 않아 이 17세의 비범한 소년 설교자는 케임브리지 근교에 자리한 워터비치(Waterbeach)에 있는 작은 침례교회에서 정식 목사가 되어 줄 것을 요청받았다. 당시 워터비치는 “영국에서 가장 악독한 지역으로 이 마을은 온갖 종류의 도둑과 악한으로 들끓었다.” 그러나 복음을 설교하는 것에 관한 이 소년 설교자의 열정은 그것보다 훨씬 더 대단했다. 스펄전은 예배당에서 설교했을 뿐 아니라 거리와 골목에서 사람들을 직접 만나 설교하기도 했다. 스펄전의 열정적인 설교 사역으로 인해 40여 명이었던 그 교회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정기적인 참석자들의 수가 400명 이상 육박하게 되었다. 그리고 예배당에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문과 창문들을 열어놓아 사람들은 밖에 선 채 그들이 여태껏 들어보지 못했던 설교를 경청했다. 이 기간 동안 스펄전의 사역에서 주목할 것은 그의 설교 사역을 통하여 극악한 워터비치 마을 전체가 회심했다는 사실이다. 스펄전의 설교로 회심한 한 여인은 자신이 경험한 이 영광스러운 사건을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불경함과 술취함으로 악명 높은 마을을 지나쳐 본 적이 있습니까? 한때는 사람 구실을 했지만 술집 기둥에 기대있거나 서성거리고 거리를 비틀거리며 돌아다니는 헐벗고 불쌍한 이를 본 적이 있습니까? … 그러나 몇 년 후 그 마을에 복음이 전파되었을 때 그 마을을 거닐 수 있는 특권을 가져본 적이 있습니까? 나는 그 특권을 가졌습니다.” 이 여인은 마을에 일어났던 일에 관해 계속해서 이렇게 증언한다. “그 마을에 한 젊은이가 찾아왔습니다. 그는 대단한 학식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지만 구령의 열정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 작은 오두막집 예배당이 발 디딜 틈도 없이 붐볐고, 그 마을에서 가장 큰 깡패 소굴이 울음바다로 변했으며, 교회의 저주였던 자들이 교회의 축복이 되었습니다. 온갖 종류의 도둑과 악한으로 들끓던 그 곳이 완전히 새로워진 이유는 악행을 일삼던 이들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 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은 전혀 과장된 말도 아니며 모르고 하는 말도 아닙니다. …이제 마을을 통과해서 걷는 것은 즐거움입니다. 술취함과 방탕함도 없고 모든 남녀가 기쁜 마음으로 일하러 가며 영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해질 녘이 되면 가난한 농부가 자녀들을 불러모아 ‘진리의 책’을 읽어주며 함께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나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저녁 무렵이면 마을의 모든 집에서 찬송 소리가 흘러나와 모든 사람의 마음에 메아리친다고 말입니다.”4 그러나 워터비치의 교인들은 그들이 사랑했던 이 설교자를 하나님의 대의(大義)를 위하여 떠나보낼 준비를 해야만 했다.
런던이 그에게 나아오다 스펄전의 회심과 설교 사역으로의 입문이 그러하듯, 런던의 이 소년 설교자의 발견 역시 예기치 않은 하나님의 섭리로 진행되었다. 1853년 11월 캠브리지 주일학교 연합회의 한 모임에서 우연히 스펄전의 연설을 들었던 조지 굴드(G. Gould)라는 사람은 이 젊은 설교자에 게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그에 관한 소식을 가까운 친구인 런던의 뉴 파크 스트리트 교회의 집사였던 윌리암 올니(W. Olney)에게 알렸다. 마침 그 교회는 목사를 찾고 있었고, 뉴 파크 스트리트 교회는 스펄전에게 한 주일만 설교해 줄 것을 요청하는 초청의 편지를 보냈다. 스펄전은 이제 19세 밖에 되지 않은 자신에게 온 이 부탁에 그들이 동명이인을 착각한 것 같다는 답장을 보냈다. 그러나 교회 측은 그들이 원하는 스펄전이 맞다고 답장했고 스펄전은 1853년 12월 런던에서의 역사적인 첫 설교를 하게 된다. 뉴 파크 스트리트 교회는 런던의 저명한 비국교도 교회들 중 하나로 이 교회에서 목회했던 세 사람의 뛰어난 설교자, 벤자민 키치(B. Keach), 존 길(J. Gill), 존 리폰(J. Rippon)의 명성은 런던에 막 도착한 젊은 스펄전에게 큰 부담을 주었다. 스펄전은 토요일 밤을 블룸즈버리에 위치한 어느 한 하숙집에서 보냈는데, 방을 함께 썼던 젊은이들은 런던에 설교하러 온 촌스런 복장의 시골 목사를 조롱했다. 그날 밤 스펄전은 워터비치의 동료가 몹시 그리웠다. 다음날 아침, 뉴 파크 스트리트 교회에 도착한 스펄전은 그 첫인상을 이렇게 적었다. “나는 한 순간 나의 무모함에 놀랐다. 나의 눈에, 그것은 크고 화려하며 압도감을 주는 건물이었다. 그 곳은 부유하고 높은 신분의 청중들을 암시하고 있었고, 나의 설교를 기쁨과 빛으로 삼아왔던 소박한 시골 사람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날 아침 스펄전은 요한계시록 14:5을 본문으로 강단에 섰으나 1,200개의 좌석을 가지고 있었던 교회에 앉아 있는 신도는 많이 잡아야 200명, 적게 잡으면 80여 명뿐이었다. 오전의 설교는 대단히 인상적이어서 저녁 예배 때 청중은 평상시보다 훨씬 더 늘어났다. 역사가였던 홀덴 파이크는 그 날의 설교를 이렇게 말한다. “회중들의 감동을 이루 다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놀라웠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낙담한 상태에서 용기를 얻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배가 끝나도 집으로 갈 생각을 하지 않았고, 삼삼오오 모여 설교에 관해 이야기하며 이 놀라운 설교자가 다시 설교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교회에 요구했다. 이후 스펄전은 1854년 2월 런던에서 목사직을 맡게 된 이후 죽을 때까지 40년 가까이 그곳에서 사역했다. 스펄전이 부임했을 때, 성도들은 200명 정도였지만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좌석을 1,200석에서 1,800석으로 늘려야 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자리가 없어 돌아갈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현대와 달리 특별한 광고 수단이 없었음에도 설교를 들은 교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자발적인 열정으로 전하고 권면해서 많은 이들이 예배에 참석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가치가 있다. 몰려드는 사람들로 인해 비좁아진 예배당은 더 넓은 새로운 예배당으로 건축해야 했다. 스펄전은 새로운 예배당의 위치로 런던 동쪽의 엘리펀트 앤드 캐슬(Elephant and Castle) 지역을 선정했는데, 이곳은 헨리 8세 통치기에 재세례파들이 화형을 당한 곳이라 스펄전은 이곳을 더욱 마음에 두었다. 순교자의 피가 교회의 씨앗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의 이름을 ‘터버너클(Tabernacle, 장막)’이라고 정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의 나그네로 살다가 가기 때문에 이 곳은 단지 일시적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1861년 3월 31일 메트로폴리탄 터버너클교회에서 첫 예배가 드려지던 날, 그는 고작 26살의 나이였지만, 회중의 숫자는 처음 런던에서 설교했던 때의 80여 명에서 6,000명으로 늘어났다. 스펄전의 회중은 대부분 교회에 다니지 않았던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은 그의 설교를 통해서 놀라운 변화를 경험했다. 워터비치에서 그랬던 것처럼 술주정뱅이들, 창녀들, 도둑들의 삶이 변화되고 가정들이 새롭게 변화되었다. 스펄전은 목회를 하는 동안 10,800명에게 세례를 주었으며 14,700명이 터버너클교회의 성도가 되었다. 스펄전의 설교집은 그가 사망할 무렵까지 5천부가 팔렸으며, 오늘날에 그 판매 부수는 3억 부가 넘었다.
런던이 들어야 했던 복음 스펄전의 이러한 성공적인 설교 사역의 주된 이유 중 한 가지는 그의 설교의 목적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스펄전은 설교의 목적을 회중의 회심으로 삼았다. 스펄전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의 궁극적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이며, 이러한 목적은 주로 영혼을 구원함으로 성취된다. 따라서 설교 사역은 ‘회중의 구원’에 초점 맞추어져야 한다.5 한 설교에서 스펄전은 이에 관하여 이렇게 피력한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설교자보다 한 영혼을 죽음에서 구하는 도구가 되고 싶다. 캔터베리의 대주교가 되기보다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여인을 예수님 앞에 인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박학다식한 박사가 되어 신학논쟁에서 승리를 거두는 것보다 한 영혼을 구덩이에서 건져내는 것이 내게 더 영광스러운 일이다.” 이를 위하여 스펄전은 그리스도의 대속을 그의 설교의 핵심 주제로 삼았으며 설교를 통하여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속죄가 전파되기를 열망했다. “나는 속죄가 나의 설교의 중심 주제가 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모든 설교를 포기할 것이다. 왜냐하면 속죄가 선포되지 않는다면 설교할 가치가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6 이러한 스펄전의 설교의 목표는 아틀리히에서의 회심 이후 워터비치의 사역 초기부터 일관된 그의 주제였다. 워터비치 사역 중에 스펄전은 그의 고모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저는 ‘소년 설교가’ 또는 ‘젊은이’로 불립니다. … 내일이면 이제 나이도 18세이며 약 1년 반 전에 설교를 시작한 이래 188회째 설교를 맞습니다. 설교는 내 생애의 큰 목표입니다. 나는 복음 증거 외에는 다른 무엇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설교가로서 15년을 지낸 후 스펄전은 한 설교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설교한 것은 오직 이 이름뿐이었고,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 달콤한 맛을 지니고 있습니다. 만일 더 전할 말이 단 한마디 있다면 그 또한 그 분의 이름입니다. 오직 예수님뿐,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영혼의 회심에 대한 스펄전의 특심한 관심은 그의 교회 사역 속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스펄전은 터버너클교회의 다양한 사역과 조직들 중에 ‘메신저’ 사역에 큰 관심을 가졌다. 메신저 사역의 시작은 그의 목회 사역과 관련 있는데, 원래 스펄전은 매주 화요일 오후 시간을 영혼의 문제에 관해 고민하는 이를 위한 상담의 시간으로 할애했었다. 그러나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의 숫자가 너무나 많아져서 스펄전은 교회에서 영적으로 사려 깊은 ‘메신저’라는 이들을 임명하여 각 개인을 순서대로 방문하여 그들의 영적 진전 상태를 확인하고 기록하도록 하였다.7 메신저들은 스펄전의 지도에 따라 새로운 구도자들을 영적으로 지도하며, 지침에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태어난 이들을 교회에 보고하였으며, 교회는 매 주 2~3일 정도를 세례와 교인 가입을 위한 시간으로 할애했다. 이를 통하여 스펄전은 터버너클의 교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과 일일이 개인 면담을 가졌다. 스펄전은 말한다. “최근에 나는 40명과 일일이 면담하면서 그들의 경험을 듣고 그들을 교회에 추천했습니다. 그들과 그저 몇 마디 말을 주고받은 것이 아니라 최선의 판단력으로 그들을 점검했습니다.” 다른 한편, 스펄전의 복음전도적 설교의 성공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다. 스펄전이 십대 시절 자신의 영혼의 구원에 대한 설교를 듣기 어려웠다고 한탄했듯, 당시에 런던의 많은 강단에서 복음 설교를 듣기란 쉽지 않았으며 스펄전처럼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직접적으로 대면할 수 있도록 하는 설교 방식은 영국 교회에서 거의 사라져 가고 있었다. 당시의 많은 설교자들이 “옛 복음”을 전하는 대신 당시의 급격한 시대적 조류에서 비롯된 “과학”을 설교하고 있었다. 스펄전은 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런던의 다른 설교자들에 관해 언급하며 “그들은 복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고 적었다. 그리고 스펄전은 자신의 설교의 성공 이유에 관해 그의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그들은 영적으로 너무 굶주려서 한 조각의 빵과도 같은 복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세상이 들어야 하는 복음 이러한 시대의 흐름이 있긴 했지만, 스펄전의 회심 설교가 더욱 힘이 있었던 것은 그의 설교가 단순히 지적 이해에 그치지 않고 깊은 절망 속에서 나온 구원의 체험과 그것에 근거한 확신과 열정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펄전은 테버샴의 오두막에서 행했던 설교를 훗날 이렇게 회상한다. “나는 나의 영혼을 하나님께 의탁하며 조용히 걸었습니다. 그리고 분명 그 몇몇의 불쌍한 농부들에게 예수님의 사랑과 그 달콤함을 전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내 영혼 속에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8 따라서 이 거인의 설교를 진정 배우고자 하는 설교자는 그가 그랬던 것처럼, 복음의 능력과 그것으로 감동된 불타는 가슴을 먼저 배워야 할 것이다. “설교자는 증인”이어야 한다고 역설했던 토마스 롱(T. Long)의 말처럼, 스펄전의 설교가 그토록 힘 있었던 것은 옛 사도들이 그러했듯 그가 전한 복음은 그가 듣고 보고 만진 것(요일 1:1)이기 때문이다. 어느 해지는 저녁, 사역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나지막이 읊조렸던 스펄전의 감동적인 글은 이 거인의 설교를 참으로 배우기 원하는 설교자들이 오래 기억할 가치가 있다. “늦은 가을 어느 목요일 날, 덜위치(Dulwich) 너머의 사역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헌(Heren) 언덕 마루 꼭대기를 넘어야만 했다. 나는 올라야 할 가파른 언덕에서부터 뻗어나온 평지를 따라가고 있었다. 더 낮은 길을 멋진 마차를 타고 가고 있을 때, 나는 내 앞에 반짝이는 (가스등) 불빛 하나를 보았다. 그리고 언덕에 가까워지자 그 불빛은 점점 언덕을 따라 올라가고 그 뒤로 일련의 별들이 생겨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 일렬로 늘어선 갓 태어난 별들은 램프 하나하나가 차례대로 연결되어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것은 언덕 아래에서 꼭대기까지 뻗어 있었다. 나는 램프를 밝히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또한 그의 이름도, 그의 나이도, 그의 사는 곳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가 밝혀놓은 빛들을 나는 보았고, 그것들은 그가 떠난 버린 후에도 남아있었다. 마차를 타고 가면서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영생의 거룩한 불꽃으로 한 영혼, 한 영혼의 빛을 밝히는 데에 나의 삶을 바치겠다고 얼마나 간절하게 희망해 왔던가!?사역을 하는 동안 내 자신을 최대한 숨기며, 나의 일이 끝났을 때에 영원한 광채 속으로 사라지리라.’”
주) 1. 교회사의 유명한 회심사건인 이 사건은 스펄전의 63권의 설교집에서 26차례나 언급된다.
2. Arnold Dallimore, Spurgeon A New Biography (Edinburgh: Banner of Truth Trust, 1985), 20.
3. 스펄전의 설교에 깊은 감명을 받았던 한 노부인이 그에게 물었다. “복된 자여, 당신의 나이가 몇입니까? 스펄전은 대답했다. “제 나이는 전혀 신경쓰지 마십시오. 오직 주 예수님과 그 분의 보배로움만을 생각하십시오.” C. H. Spurgeon, C. H. Spurgeon Autobiography, Vol 1: The Early Years, rev. ed. (Edinburgh: Banner of truth, 1976), 87. 4. Spurgeon, Early Years, 193~94. 5. Spurgeon, Lectures, 336. Cf. idem, MTP Vol. XXXVI, 277.
7. 메신저들은 주님을 영접했다고 고백하는 이들을 다룰 때, 참된 회심의 징표로 세 가지를 기준 삼았다. 첫째, 스스로 죄인임을 느끼며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을 믿는가? 둘째, 변화된 삶을 살며, 죄에 대한 승리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 그리고 다른 이들을 전도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셋째, 은혜의 교리에 대한 기본적 이해를 가지고 있으며, 구원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과 그 분의 행위로 이루어지며 구원하신 이가 그를 영원히 지켜주신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는가? Dallimore, Spurgeon, 81.
우리가 한 위대한 설교자의 설교를 배울 때 빠지기 쉬운 함정 중 하나는 그의 위대한 명성이나 혹은 업적에 지나치게 주목함으로 그의 설교 이면에 존재하는 참된 정신을 간과하는 것이다. 한 위대한 설교자의 탄생은 종종 그를 둘러싼 문화적, 사회적, 인격적, 영적인 요인들과 같은 다양한 삶의 경험과 훈련을 함의한다. 따라서 설교에 대한 올바른 연구는 설교자를 형성했던 삶의 자리와 유리되어서는 안 된다. 만약 한 위대한 설교자의 설교를 연구하는 이가 단순히 그의 설교 방법론만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지극히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언젠가 로이드 존스가 기술이나 기교로 설교에 접근하기 시작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경고했던 것처럼 방법론에 관한 지나친 관심은 설교에 대한 피상적 이해를 초래할 수 있다. 따라서 스펄전 설교의 올바른 이해, 특히 폴 쿡(P. Cook)이 지적하듯, 그의 모든 설교의 대표적 특징인 “복음설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삶의 행적들을 함께 추적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스펄전의 동생이 잘 표현하듯, 그의 설교가 성공한 주된 이유는 “그가 나사렛 예수를 사랑하고 나사렛 예수는 그를 사랑했다”는 사실에 있기 때문이다.
무거운 죄의 짐을 진 어린 순례자 존 웨슬리, 마틴 로이드 존스를 비롯한 많은 설교의 거인들의 삶이 그러하듯, 스펄전의 회심 경험은 그의 소명과 설교 사역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849년 여름, 15세였던 스펄전은 뉴마켓 마을의 학교에 진학했다. 당시 그는 이미 성경과 신학에 어느 정도 정통했지만 여전히 회심을 경험하지 못했다. 스펄전은 유아시절 보았던 천로역정에 나오는 무거운 죄의 짐을 등에 졌던 순례자처럼 죄의 짐으로 인한 깊은 번민과 함께 그것으로 인한 구원을 간절히 열망하고 있었다. 그는 말한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이, 죄는 내게 견딜 수 없는 무거운 죄짐이었다. 내가 두려워했던 것은 지옥이 아니라 죄 자체였다.” 스펄전은 이 당시에 경험했던 극심한 영적 고통과 죄에 대한 깊은 인식을 그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인간으로 창조되기보다는 차라리 개구리나 두꺼비로 창조되었기를 더 원했습니다. 내 생각에 가장 미천한 피조물이라 할지라도 나보다 훨씬 훌륭해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극악무도하며, 상스러운 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당시에 그러한 무거운 죄의 짐을 벗어버리는 데 도움을 주는 설교를 듣기란 쉽지 않았다. 스펄전은 그의 영적 필요와 당시 강단에서 행해졌던 설교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어떤 목사님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설교했습니다. 그러나 그 설교는 구원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알고 싶어 하는 불쌍한 죄인에게는 너무나 숭고한 진리였을 뿐입니다. 또 다른 훌륭한 목사님은 율법에 관해 설교했습니다. 그러나 그 설교는 씨가 뿌려지지도 않은 밭에 쟁기를 사용하는 방법에 관한 설교였습니다. 또 다른 목사님은 실리적인 설교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발이 없는 사람들에게 기동 훈련을 가르치는 장교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알고자 했던 것은 ‘나는 죄를 어떻게 용서 받을 수 있는가’였고 아무도 그것에 관해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아틀리히에서 만난 구원 그러나 죄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는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일어났다. 1849년 12월 스펄전이 수학하던 뉴마켓 학교에 열병이 발생하여 임시휴교 조치가 내려졌다. 이로 인해 스펄전은 콜체스터의 집으로 돌아와 가족과 함께 지내야만 했다. 이 기간 동안 스펄전의 가족들은 아버지를 따라 주일이면 집에서 18km 떨어진 톨스베리의 교회에 예배를 갔다. 그런데 1850년 1월 6일 주일 아침은 심한 눈보라 때문에 그곳으로 가지 못하고 어머니의 권유로 콜체스터의 교회로 예배드리러 길을 나섰다. 그러나 이마저도 심한 눈보라 때문에 여의치 않아 스펄전은 눈보라를 피하기 위해 아틀리히 스트리트의 작은 교회당 안으로 들어갔다. 스펄전은 이 순간을 이렇게 회상한다. “만약 어느 주일날 아침, 예배당을 찾아가던 나에게 눈보라를 보내주신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없었다면 나는 아직도 어둠과 절망 속에서 머물렀을 거라는 생각을 가끔씩 한다.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되자 나는 골목길로 접어 들었고 작은 감리교회에 이르렀다.” 스펄전은 그곳에서 한 무명의 평신도 설교자의 설교를 통해 그토록 갈망하던 구원의 빛을 발견했다. “목사님은 그날 아침 오지 않으셨다. 아마 눈보라 때문에 길이 막혔던 것 같다. 결국 매우 마른 한 남자 - 구두쟁이거나 재봉사, 또는 그런 류의 직업을 가진 이로 보이는 - 가 설교를 하려고 단위에 섰다. 그의 설교 제목은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사 45:22)”였다. 그는 단어의 발음조차 정확하지 않았다. … 가까스로 10분 정도 설교하자 그는 능력의 한계에 다다랐다. 그러자 그는 발코니 아래 앉아있던 나를 쳐다보았다. … 그는 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마치 내 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젊은이, 당신은 비참해 보이는군요’라고 말했다.… 그러더니 그는 손을 높이 들고 ‘젊은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오! 바라보시오! 바라보시오! 바라보시오! 당신은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사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라고 외쳤다.” 스펄전은 바로 그 순간을 이렇게 말한다. “그때 나는 구원의 길을 바라보았다. … 나는 더 이상 바라볼 수 없는 지경까지 바라보았다. … 그러자 내 영혼을 결박했던 쇠사슬이 산산조각 났다. … 나는 어둠에서 놀라운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단순히 예수님을 앙망하는 것으로 절망에서 건짐을 받은 것이다.”1 이 아틀리히교회에서의 회심 사건은 훗날 스펄전의 설교 사역에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첫째, 설교 메시지의 중심주제로서의 그리스도의 복음의 중대성에 대한 자각이다. 훗날 스펄전은 그의 학생들에게 이렇게 권면한다. “그리스도를 전하십시오. 그분은 마치 자석과 같아서 그분에게 속한 이들을 다 자신에게 이끄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회심하는 영혼을 보고 싶다면 더욱 열심히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합니다. 모든 설교 속에 그리스도께서 계셔야 합니다. 그분이야말로 모든 신학의 머리와 바탕이 되셔야 합니다.” 둘째, 댈리모어(A. Dallimore)가 적절하게 말하듯, 그가 들었던 많은 설교자들이 복음을 보다 쉽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전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무명의 설교자처럼 가장 직설적이며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설교해야 할 필요를 깨우쳐 주었다.2
라크강,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다 이후 뉴마켓으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스펄전은 세례를 받았다. 1850년 5월 3일 어머니의 생신이었던 그날, 스펄전은 아침 일찍 일어나 두 시간 동안 은밀한 기도와 헌신을 드린 후 작은 시골길을 따라 13km를 걸어 라크강의 아일럼에서 캔트로우(W. Cantlow)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가 세례를 받았던 날은 비록 5월이었지만 영국의 봄이 그러하듯, 여전히 스산하고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스펄전은 그 날에 관하여 그의 전기에서 이렇게 회상한다. “넘실대는 강물 속으로 들어갈 순서가 되었을 때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러나 몇 발자국 안으로 들어가서 나룻배에 탄 사람들과 양편 강가에 늘어선 사람들을 보자 하늘과 땅과 지옥이 나를 응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 그곳에서 어린양을 따르는 자로 내 자신을 고백하는 것이 전혀 부끄럽지 않았고 소심함은 금세 사라졌다. 그 후로는 그런 감정을 결코 느낀 적이 없다. 또한 침례식 후 어떤 말이든 담대히 할 수 있게 되었고 수천 가지 두려움을 라크강에 버리고 왔다.” 아일럼에서의 세례식은 그에게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를 위한 더 큰 열망과 열정을 불러 일으켰다. 그 감격적인 날 밤, 스펄전은 그의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예수님과 그분의 십자가만을 사랑하고 나의 전 생애를 그 분의 뜻을 확장시키는 일과 그 분이 기뻐하시는 길을 가는 데 바치기로 서약한다. 바로 단 한 가지 오직 하나님만을 영화롭게 하는 목적만을 가슴에 품은 채.”
케임브리지, 거인의 설교학교 세례식 이후 스펄전은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게 되었는데 이 사역을 언제나 자랑스럽게 여겼다. “나는 학사나 석사 학위, 혹은 사람에게 수여되는 어떤 학위보다 주일학교 교사라는 학위가 더 좋다.”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스펄전의 말은 사람들을 사로잡는 힘이 있어 그 교회의 많은 어른들조차 그의 강의를 들으러 나왔다. 이즈음 스펄전은 자신의 삶에 목회의 사역이 놓여있음을 본격적으로 의식하며 설교를 통한 복음전도 사역을 갈망했다. 스펄전은 그의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아버지처럼 하나님께서 성공적인 복음 전도자로 만들어 주실 때를 얼마나 간절히 갈망했는지 모릅니다. 바로 한 죄인이 예수께 붙들려 나오는 것을 보기를 얼마나 소원했는지요! 저는 아버지의 고귀한 특권을 몹시 부러워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당신께서 언젠가 하나님의 미천한 도구인 제가 사람들에게 설교하는 모습을 보고 기뻐하게 되시길 소원합니다.” 스펄전의 회심 사건이 예기치 않은 것이었듯, 그의 설교 사역의 길도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열렸다. 뉴마켓에서 캠브리지로 이사한 후 스펄전은 세인트 앤드류 침례교회를 출석했는데, 이 교회에는 인근의 작은 교회들을 설교로 돕는 “평신도 설교자 연합회”(Lay Preachers’ Association)가 운영되고 있었다. 스펄전은 이 모임의 책임을 맡고 있던 제임스 빈터(J. Vinter)의 부탁으로 그곳에서 약 7km 떨어진 테버샴(Teversham)의 작은 오두막에서 설교하게 되었다. 비록 몇 명의 농부들과 그 아내들이 전부였지만 스펄전은 힘을 다해 설교했고 그 설교는 참석한 이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3 이 설교 사역을 계기로 스펄전은 캠브리지 주변의 여러 마을에서 정기적으로 설교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 소년 설교자의 복음에 대한 확신과 구령의 열정은 너무나 뜨거워서, 기록에 따르면 스펄전은 자주 하루 종일 일한 후 12km를 걸어가 설교하곤 했다. 스펄전은 심한 비바람이 치는 어두운 밤에 방수 장화와 외투를 쓴 채 등불을 들고 설교처로 가기 위해 들판을 가로질러 걸어가곤 했다. 영국 시골 마을의 칠흑 같은 어두움, 스산한 비바람, 그리고 뼈에 스며드는 으스스한 추위를 아는 사람은 이 소년 설교자의 구령의 열정이 어떤 것인지를 알 것이다. 전해오는 한 이야기는 스펄전의 열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번은 날씨가 너무나 스산하고 험악하여 마을 사람들은 순회 설교가가 예배를 인도하러 그 마을에 오리라 상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교회에 오지 않았고 스펄전이 도착했을 때 예배당에는 한 사람도 없었다. 스펄전은 돌아가지 않고 집집마다 찾아가 사람들을 불러내어 함께 예배를 드렸다. 농부의 부엌이나 오두막, 혹은 외양간에서 가난하고 평범한 이들에게 설교했던 이러한 순회설교의 경험은 훗날 스펄전의 설교 사역을 위한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곧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설교를 연마하는 좋은 학교가 되어 주었고, 이것은 훗날 스펄전 설교의 대중성에 기여했다. 스펄전은 이 시절의 경험을 이렇게 말한다. “나는 즐거이 훈련받을 수 있는 학교를 가졌던 셈이고 그 안에서 계속적인 훈련을 거쳐서 지금의 내가 가지고 있는 평이한 설교를 습득하게 되었습니다.”
워터비치, 부흥을 보다 평신도 설교 사역을 시작한 지 오래지 않아 이 17세의 비범한 소년 설교자는 케임브리지 근교에 자리한 워터비치(Waterbeach)에 있는 작은 침례교회에서 정식 목사가 되어 줄 것을 요청받았다. 당시 워터비치는 “영국에서 가장 악독한 지역으로 이 마을은 온갖 종류의 도둑과 악한으로 들끓었다.” 그러나 복음을 설교하는 것에 관한 이 소년 설교자의 열정은 그것보다 훨씬 더 대단했다. 스펄전은 예배당에서 설교했을 뿐 아니라 거리와 골목에서 사람들을 직접 만나 설교하기도 했다. 스펄전의 열정적인 설교 사역으로 인해 40여 명이었던 그 교회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정기적인 참석자들의 수가 400명 이상 육박하게 되었다. 그리고 예배당에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문과 창문들을 열어놓아 사람들은 밖에 선 채 그들이 여태껏 들어보지 못했던 설교를 경청했다. 이 기간 동안 스펄전의 사역에서 주목할 것은 그의 설교 사역을 통하여 극악한 워터비치 마을 전체가 회심했다는 사실이다. 스펄전의 설교로 회심한 한 여인은 자신이 경험한 이 영광스러운 사건을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불경함과 술취함으로 악명 높은 마을을 지나쳐 본 적이 있습니까? 한때는 사람 구실을 했지만 술집 기둥에 기대있거나 서성거리고 거리를 비틀거리며 돌아다니는 헐벗고 불쌍한 이를 본 적이 있습니까? … 그러나 몇 년 후 그 마을에 복음이 전파되었을 때 그 마을을 거닐 수 있는 특권을 가져본 적이 있습니까? 나는 그 특권을 가졌습니다.” 이 여인은 마을에 일어났던 일에 관해 계속해서 이렇게 증언한다. “그 마을에 한 젊은이가 찾아왔습니다. 그는 대단한 학식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지만 구령의 열정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 작은 오두막집 예배당이 발 디딜 틈도 없이 붐볐고, 그 마을에서 가장 큰 깡패 소굴이 울음바다로 변했으며, 교회의 저주였던 자들이 교회의 축복이 되었습니다. 온갖 종류의 도둑과 악한으로 들끓던 그 곳이 완전히 새로워진 이유는 악행을 일삼던 이들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 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은 전혀 과장된 말도 아니며 모르고 하는 말도 아닙니다. …이제 마을을 통과해서 걷는 것은 즐거움입니다. 술취함과 방탕함도 없고 모든 남녀가 기쁜 마음으로 일하러 가며 영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해질 녘이 되면 가난한 농부가 자녀들을 불러모아 ‘진리의 책’을 읽어주며 함께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나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저녁 무렵이면 마을의 모든 집에서 찬송 소리가 흘러나와 모든 사람의 마음에 메아리친다고 말입니다.”4 그러나 워터비치의 교인들은 그들이 사랑했던 이 설교자를 하나님의 대의(大義)를 위하여 떠나보낼 준비를 해야만 했다.
런던이 그에게 나아오다 스펄전의 회심과 설교 사역으로의 입문이 그러하듯, 런던의 이 소년 설교자의 발견 역시 예기치 않은 하나님의 섭리로 진행되었다. 1853년 11월 캠브리지 주일학교 연합회의 한 모임에서 우연히 스펄전의 연설을 들었던 조지 굴드(G. Gould)라는 사람은 이 젊은 설교자에 게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그에 관한 소식을 가까운 친구인 런던의 뉴 파크 스트리트 교회의 집사였던 윌리암 올니(W. Olney)에게 알렸다. 마침 그 교회는 목사를 찾고 있었고, 뉴 파크 스트리트 교회는 스펄전에게 한 주일만 설교해 줄 것을 요청하는 초청의 편지를 보냈다. 스펄전은 이제 19세 밖에 되지 않은 자신에게 온 이 부탁에 그들이 동명이인을 착각한 것 같다는 답장을 보냈다. 그러나 교회 측은 그들이 원하는 스펄전이 맞다고 답장했고 스펄전은 1853년 12월 런던에서의 역사적인 첫 설교를 하게 된다. 뉴 파크 스트리트 교회는 런던의 저명한 비국교도 교회들 중 하나로 이 교회에서 목회했던 세 사람의 뛰어난 설교자, 벤자민 키치(B. Keach), 존 길(J. Gill), 존 리폰(J. Rippon)의 명성은 런던에 막 도착한 젊은 스펄전에게 큰 부담을 주었다. 스펄전은 토요일 밤을 블룸즈버리에 위치한 어느 한 하숙집에서 보냈는데, 방을 함께 썼던 젊은이들은 런던에 설교하러 온 촌스런 복장의 시골 목사를 조롱했다. 그날 밤 스펄전은 워터비치의 동료가 몹시 그리웠다. 다음날 아침, 뉴 파크 스트리트 교회에 도착한 스펄전은 그 첫인상을 이렇게 적었다. “나는 한 순간 나의 무모함에 놀랐다. 나의 눈에, 그것은 크고 화려하며 압도감을 주는 건물이었다. 그 곳은 부유하고 높은 신분의 청중들을 암시하고 있었고, 나의 설교를 기쁨과 빛으로 삼아왔던 소박한 시골 사람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날 아침 스펄전은 요한계시록 14:5을 본문으로 강단에 섰으나 1,200개의 좌석을 가지고 있었던 교회에 앉아 있는 신도는 많이 잡아야 200명, 적게 잡으면 80여 명뿐이었다. 오전의 설교는 대단히 인상적이어서 저녁 예배 때 청중은 평상시보다 훨씬 더 늘어났다. 역사가였던 홀덴 파이크는 그 날의 설교를 이렇게 말한다. “회중들의 감동을 이루 다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놀라웠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낙담한 상태에서 용기를 얻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배가 끝나도 집으로 갈 생각을 하지 않았고, 삼삼오오 모여 설교에 관해 이야기하며 이 놀라운 설교자가 다시 설교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교회에 요구했다. 이후 스펄전은 1854년 2월 런던에서 목사직을 맡게 된 이후 죽을 때까지 40년 가까이 그곳에서 사역했다. 스펄전이 부임했을 때, 성도들은 200명 정도였지만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좌석을 1,200석에서 1,800석으로 늘려야 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자리가 없어 돌아갈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현대와 달리 특별한 광고 수단이 없었음에도 설교를 들은 교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자발적인 열정으로 전하고 권면해서 많은 이들이 예배에 참석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가치가 있다. 몰려드는 사람들로 인해 비좁아진 예배당은 더 넓은 새로운 예배당으로 건축해야 했다. 스펄전은 새로운 예배당의 위치로 런던 동쪽의 엘리펀트 앤드 캐슬(Elephant and Castle) 지역을 선정했는데, 이곳은 헨리 8세 통치기에 재세례파들이 화형을 당한 곳이라 스펄전은 이곳을 더욱 마음에 두었다. 순교자의 피가 교회의 씨앗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의 이름을 ‘터버너클(Tabernacle, 장막)’이라고 정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의 나그네로 살다가 가기 때문에 이 곳은 단지 일시적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1861년 3월 31일 메트로폴리탄 터버너클교회에서 첫 예배가 드려지던 날, 그는 고작 26살의 나이였지만, 회중의 숫자는 처음 런던에서 설교했던 때의 80여 명에서 6,000명으로 늘어났다. 스펄전의 회중은 대부분 교회에 다니지 않았던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은 그의 설교를 통해서 놀라운 변화를 경험했다. 워터비치에서 그랬던 것처럼 술주정뱅이들, 창녀들, 도둑들의 삶이 변화되고 가정들이 새롭게 변화되었다. 스펄전은 목회를 하는 동안 10,800명에게 세례를 주었으며 14,700명이 터버너클교회의 성도가 되었다. 스펄전의 설교집은 그가 사망할 무렵까지 5천부가 팔렸으며, 오늘날에 그 판매 부수는 3억 부가 넘었다.
런던이 들어야 했던 복음 스펄전의 이러한 성공적인 설교 사역의 주된 이유 중 한 가지는 그의 설교의 목적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스펄전은 설교의 목적을 회중의 회심으로 삼았다. 스펄전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의 궁극적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이며, 이러한 목적은 주로 영혼을 구원함으로 성취된다. 따라서 설교 사역은 ‘회중의 구원’에 초점 맞추어져야 한다.5 한 설교에서 스펄전은 이에 관하여 이렇게 피력한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설교자보다 한 영혼을 죽음에서 구하는 도구가 되고 싶다. 캔터베리의 대주교가 되기보다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여인을 예수님 앞에 인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박학다식한 박사가 되어 신학논쟁에서 승리를 거두는 것보다 한 영혼을 구덩이에서 건져내는 것이 내게 더 영광스러운 일이다.” 이를 위하여 스펄전은 그리스도의 대속을 그의 설교의 핵심 주제로 삼았으며 설교를 통하여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속죄가 전파되기를 열망했다. “나는 속죄가 나의 설교의 중심 주제가 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모든 설교를 포기할 것이다. 왜냐하면 속죄가 선포되지 않는다면 설교할 가치가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6 이러한 스펄전의 설교의 목표는 아틀리히에서의 회심 이후 워터비치의 사역 초기부터 일관된 그의 주제였다. 워터비치 사역 중에 스펄전은 그의 고모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저는 ‘소년 설교가’ 또는 ‘젊은이’로 불립니다. … 내일이면 이제 나이도 18세이며 약 1년 반 전에 설교를 시작한 이래 188회째 설교를 맞습니다. 설교는 내 생애의 큰 목표입니다. 나는 복음 증거 외에는 다른 무엇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설교가로서 15년을 지낸 후 스펄전은 한 설교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설교한 것은 오직 이 이름뿐이었고,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 달콤한 맛을 지니고 있습니다. 만일 더 전할 말이 단 한마디 있다면 그 또한 그 분의 이름입니다. 오직 예수님뿐,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영혼의 회심에 대한 스펄전의 특심한 관심은 그의 교회 사역 속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스펄전은 터버너클교회의 다양한 사역과 조직들 중에 ‘메신저’ 사역에 큰 관심을 가졌다. 메신저 사역의 시작은 그의 목회 사역과 관련 있는데, 원래 스펄전은 매주 화요일 오후 시간을 영혼의 문제에 관해 고민하는 이를 위한 상담의 시간으로 할애했었다. 그러나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의 숫자가 너무나 많아져서 스펄전은 교회에서 영적으로 사려 깊은 ‘메신저’라는 이들을 임명하여 각 개인을 순서대로 방문하여 그들의 영적 진전 상태를 확인하고 기록하도록 하였다.7 메신저들은 스펄전의 지도에 따라 새로운 구도자들을 영적으로 지도하며, 지침에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태어난 이들을 교회에 보고하였으며, 교회는 매 주 2~3일 정도를 세례와 교인 가입을 위한 시간으로 할애했다. 이를 통하여 스펄전은 터버너클의 교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과 일일이 개인 면담을 가졌다. 스펄전은 말한다. “최근에 나는 40명과 일일이 면담하면서 그들의 경험을 듣고 그들을 교회에 추천했습니다. 그들과 그저 몇 마디 말을 주고받은 것이 아니라 최선의 판단력으로 그들을 점검했습니다.” 다른 한편, 스펄전의 복음전도적 설교의 성공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다. 스펄전이 십대 시절 자신의 영혼의 구원에 대한 설교를 듣기 어려웠다고 한탄했듯, 당시에 런던의 많은 강단에서 복음 설교를 듣기란 쉽지 않았으며 스펄전처럼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직접적으로 대면할 수 있도록 하는 설교 방식은 영국 교회에서 거의 사라져 가고 있었다. 당시의 많은 설교자들이 “옛 복음”을 전하는 대신 당시의 급격한 시대적 조류에서 비롯된 “과학”을 설교하고 있었다. 스펄전은 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런던의 다른 설교자들에 관해 언급하며 “그들은 복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고 적었다. 그리고 스펄전은 자신의 설교의 성공 이유에 관해 그의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그들은 영적으로 너무 굶주려서 한 조각의 빵과도 같은 복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세상이 들어야 하는 복음 이러한 시대의 흐름이 있긴 했지만, 스펄전의 회심 설교가 더욱 힘이 있었던 것은 그의 설교가 단순히 지적 이해에 그치지 않고 깊은 절망 속에서 나온 구원의 체험과 그것에 근거한 확신과 열정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펄전은 테버샴의 오두막에서 행했던 설교를 훗날 이렇게 회상한다. “나는 나의 영혼을 하나님께 의탁하며 조용히 걸었습니다. 그리고 분명 그 몇몇의 불쌍한 농부들에게 예수님의 사랑과 그 달콤함을 전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내 영혼 속에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8 따라서 이 거인의 설교를 진정 배우고자 하는 설교자는 그가 그랬던 것처럼, 복음의 능력과 그것으로 감동된 불타는 가슴을 먼저 배워야 할 것이다. “설교자는 증인”이어야 한다고 역설했던 토마스 롱(T. Long)의 말처럼, 스펄전의 설교가 그토록 힘 있었던 것은 옛 사도들이 그러했듯 그가 전한 복음은 그가 듣고 보고 만진 것(요일 1:1)이기 때문이다. 어느 해지는 저녁, 사역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나지막이 읊조렸던 스펄전의 감동적인 글은 이 거인의 설교를 참으로 배우기 원하는 설교자들이 오래 기억할 가치가 있다. “늦은 가을 어느 목요일 날, 덜위치(Dulwich) 너머의 사역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헌(Heren) 언덕 마루 꼭대기를 넘어야만 했다. 나는 올라야 할 가파른 언덕에서부터 뻗어나온 평지를 따라가고 있었다. 더 낮은 길을 멋진 마차를 타고 가고 있을 때, 나는 내 앞에 반짝이는 (가스등) 불빛 하나를 보았다. 그리고 언덕에 가까워지자 그 불빛은 점점 언덕을 따라 올라가고 그 뒤로 일련의 별들이 생겨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 일렬로 늘어선 갓 태어난 별들은 램프 하나하나가 차례대로 연결되어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것은 언덕 아래에서 꼭대기까지 뻗어 있었다. 나는 램프를 밝히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또한 그의 이름도, 그의 나이도, 그의 사는 곳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가 밝혀놓은 빛들을 나는 보았고, 그것들은 그가 떠난 버린 후에도 남아있었다. 마차를 타고 가면서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영생의 거룩한 불꽃으로 한 영혼, 한 영혼의 빛을 밝히는 데에 나의 삶을 바치겠다고 얼마나 간절하게 희망해 왔던가!?사역을 하는 동안 내 자신을 최대한 숨기며, 나의 일이 끝났을 때에 영원한 광채 속으로 사라지리라.’”
주) 1. 교회사의 유명한 회심사건인 이 사건은 스펄전의 63권의 설교집에서 26차례나 언급된다.
2. Arnold Dallimore, Spurgeon A New Biography (Edinburgh: Banner of Truth Trust, 1985), 20.
3. 스펄전의 설교에 깊은 감명을 받았던 한 노부인이 그에게 물었다. “복된 자여, 당신의 나이가 몇입니까? 스펄전은 대답했다. “제 나이는 전혀 신경쓰지 마십시오. 오직 주 예수님과 그 분의 보배로움만을 생각하십시오.” C. H. Spurgeon, C. H. Spurgeon Autobiography, Vol 1: The Early Years, rev. ed. (Edinburgh: Banner of truth, 1976), 87. 4. Spurgeon, Early Years, 193~94. 5. Spurgeon, Lectures, 336. Cf. idem, MTP Vol. XXXVI, 277.
7. 메신저들은 주님을 영접했다고 고백하는 이들을 다룰 때, 참된 회심의 징표로 세 가지를 기준 삼았다. 첫째, 스스로 죄인임을 느끼며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을 믿는가? 둘째, 변화된 삶을 살며, 죄에 대한 승리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 그리고 다른 이들을 전도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셋째, 은혜의 교리에 대한 기본적 이해를 가지고 있으며, 구원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과 그 분의 행위로 이루어지며 구원하신 이가 그를 영원히 지켜주신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는가? Dallimore, Spurgeon, 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