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잔인한 공수부대원 살려줬는데…….
증 언 자 : 신봉섭(남)
생년월일 : 1949. 2. 6 (당시 나이 31세)
직 업 : 택시기사(현재 택시기사)
조사일시 : 1988. 7
개 요
차량을 타고 다니며 시위대에 참여하다 광천동 공단 입구에서 군인들을 붙잡아 두들겨패다가 공수부대 중위를 병원으로 후송해 줌. 이후 교도소에 갔다가 총격을 받았으며 차량시위를 주도하였다. 도청내 식량을 보급하였다.
차량을 타고 다니며 선동을 하다
19일 아침 산수동 집에서 혼자 걸어서 시내로 나오다보니 제일은행과 상업은행 앞 도로에는 계엄군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고, 한국은행과 광주은행 앞에는 시민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한국은행 사거리에 리어커 한 대가 있고 시민들이 웅성거리길래 가까이 가서 보니 얼굴과 몸 등에 칼에 찔린 시체 두 구가 실려 있었다. 온몸과 얼굴에 피가 범벅이 되어 쳐다보기가 두려울 정도였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그것을 보고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그때 선배 한 분이 15톤 트럭을 타고 오시길래 함께 올라탔다. 그때부터 시내 골목과 도로 곳곳을 다니면서 외쳤다.
"시민 여러분, 강 건너 등불이 아닙니다. 보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도청으로 갑시다."
마이크도 없었지만 중심가 주위는 거의 다 돌았다. 1시간 30분 가량 다니다가 광천동 공단 입구 사거리 앞에 도착했다. 바로 앞에서 공수대의 군용 지프차 7, 8대가 라이트를 켜고 들어왔다. 시내로 해서 상무대로 가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때까지는 총이 없었으므로 몽둥이와 돌 등을 던져서 차를 완전히 망가뜨려버렸 다. 그때 공수대원은 한 차에 두세 명씩 타고 있었다. 모두들 흠씬 두들겨맞고 도망갔는데 한 놈이 잘못 걸렸다. 공수부대 중위인데 중앙로에서 본 시체를 생각하면서 우리도 그놈들 죽여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몽둥이로 때리고 구둣발로 밟고 하다 보니 피를 흘렸는데, 사람들은 피를 보자 더욱 감정이 격해져서 정말로 죽일 태세로 덤벼들었다. 그런데 이 녀석이 두손을 싹싹 빌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내가 제일 먼저 몽둥이로 쳤지만 이놈을 살려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성한 지프차에 태우고 머리를 아래로 처박고 있으라고 했다.
내가 시동을 걸고 출발하려는데 함께 있던 사람들이 흥분해서 말했다.
"저놈을 죽여버리자. 뭐 하려고 저런 녀석을 살려주려고 하느냐?"
"아직 목숨이 붙어있고 이 사람도 옷만 벗으면 우리와 똑같은 사람 아닙니까 ?"
하고 내가 설득했다.
내가 그날 처음으로 지프차를 타고 시내로 나왔을 것이다. 거리에서 시민들이 박수를 치고 손을 흔들면서 환호해 주었다. 서광주경찰서 아래 도로를 시민들이 나무로 차단하고 있었는데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사람이 죽어간다. 이 사람도 옷만 벗으면 우리의 형제이지 않느냐"고 사정을 말했더니 길을 내주었다. 그래서 아세아극장 앞에 김광록병원에 데려다주었다. 그에게 이야기하기를 내가 차를 멈추면 병원 앞인 줄 알고 뛰어들어가라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끝장이니까 알아서 하라고 했다. 병원 앞에 내려주니까 정신없이 들어갔다. 그리고 뒤로 청년 20명 남짓이 그놈을 보고서 쫓아 들어가는 것 같았다.
교도소에서 총격을 받다
그런 후에 나는 금남로를 따라서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면서 유유히 올라왔다.
중앙로쯤 리어커 있는 곳에 차를 세우고 시민들 6명을 태웠다. 그리고 금남로-유동 삼거리로 해서 광주역으로 왔다. 뒤에 차 서너 대를 따르게 하고 지휘를 처음 시작했다. 기름이 떨어진 차는 주유소에 가서 기름을 넣게 하고 전신전화국에 불지르려는 놈은 못 지르게 하면서 MBC 방송국을 거쳐 학동으로 해서 순찰을 돌기 시작했다. 오후 2-3시경에 광주역 앞에 도착했는데 계엄군들이 광주시내를 쓸어버리려고 내려온다는 말들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우리도 이러고 있으면 안 되겠다. 무슨 대처를 해야 하지 않느냐"고 했다. 차를 보이는 대로 역전에 모이라고 했더니 50여 대 가량이 모였던 것 같다. 내가 총지휘를 하며 장성 비아정류소로 데려갔다. 그곳에 도착해서 공수부대가 내려오면 모두 죽여버리려고 바리케이드를 쳤다. 바리케이드를 치고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는 것을 보아 아마 그런 말들은 유언비어였다고 판단했다.
그때 떠도는 이야기 중에 공수대원은 전부가 경상도놈들이라는 말이 있었기 때문에 지나가는 차 중 경상도 차들은 못 가게 하고 때리기도 했다. 아마 차량이 10대 남짓 그렇게 됐을 것이다. 두세 시간을 기다려서 5시 가량이 되었는데도 오지 않길래 다시 시내로 들어오려고 동부진입로(고속버스 인터체인지)에 이르렀다.
우리들은 머리에 '계엄 해제하라', '노동3권 보장하라', '김대중 석방하라'는 띠를 두르고 있었다. 교도소 근처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교도소에 있던 군인들이 총을 쏘아댔다. 정신없이 운전하다가 차가 뒤집혀 부상도 당하고 정신이 아른해져 근처에 있는 학산종합고등학교로 들어가서 안정을 취하다가 걸어서 집에 들어와버렸다. 교도소 안에서 밖으로 총을 쏘았기 때문에 군인의 수를 파악하기는 힘들었고 갑작스런 총격으로 내 차가 뒤집히는 바람에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다.
20일 오전 11시경에 집 앞에 나와 있다가 지프차가 지나가길래 올라탔다. 학동, 지원동, 유동, 서방 등 거의 모든 지역을 순회하고 다녔다. 2시경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근처에서 공수대원이 짝지어 다니면서 젊은이들만 보이면 무조건 잡고 때리는 것을 보았다. 잡힌 젊은이들은 속옷만 입힌 채로 꿇어앉혀두고 사정없이 밟고 곤봉으로 내려쳤다. 나는 전날 차가 뒤집어질 때 다리에 부상을 당했기 때문에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이곳저곳 계속 다니면서 상황을 알리고 혹시 나쁜 일이 있으면 말리는 일들을 하였다. 소방차, 앰뷸런스까지 요란하게 다니는 것을 보았다. 어디를 가나 시민들의 격려와 환호가 대단하였다. 그날은 순찰활동으로 거의 하루를 다 보냈다.
차량시위에 참여
19일에도 택시로 시위를 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시민들의 참여가 적어서 무산되었다. 20일 무등경기장으로 1백50-2백대의 차량이 모였다. 아직 헤드라이트를 켜긴 이른 시간이었으나(5시, 6시) 모두 헤드라이트를 켜고 광주역을 지나 유동으로, 그리고 금남로를 통해 도청으로 향했다. 시민들의 환호 또한 대단했고 도청 앞의 공수대들도 움츠러들었던 것 같다. 수백 대의 차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모여드니 그 여세가 가히 대단했다. 나는 그때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금남로에 들어서서 한참 도청으로 진입하려는데 최루탄 때문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골목으로 빠져나왔는데, 뒤에 들으니 유리창을 깨고 곤봉으로 안내양, 기사, 가릴 것 없이 때리고 잡아갔다고 했다. 시민과 함께 한 기사들의 투쟁은 정말 훌륭한 일이었다고 여겨진다.
도청에 식량을 공급하다
21일은 몸이 불편해서 집에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22일부터는 두 가지 일을 하였다. 그 하나는 시민군들의 식량조달 담당이었다. 순찰하러 지원동, 학동 등 거의 모든 동을 다니면서 시민들이 자진해서 먹을 것을 실어주었다. 지금 내가 양동 사람들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가장 어려운 사람들이 제일 많이 협조해 주고 먹을 것들도 많이 주었기 때문이다. 식량을 도청의 시민군들에게 계속 나르는 일로 하루를 거의 보내다시피 했다. 아울러서 상무대, 전남대병원, 적십자병원 등에 부상자 후송하는 차를 옆에서 보조하는 일과 상무대에 관의 준비상황을 한 번씩 둘러보았다.
26일까지 내가 한 일은 치안유지를 위한 시내순찰과 부상자를 후송하는 앰뷸런스를 보조하고 식량을 도청에 배급하는 일이었다. 5일 동안 그렇게 보냈으므로 언제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구체적인 기억이 없다. 그리고 마지막 27일은 오후에야 나와 보니 이미 도청이 점령되어 버린 후였다.
구속 후 기소유예로 석방되다
시골을 한번 다녀온 뒤 부산으로 내려가려고 6월 3일인가 5일쯤에 고속버스터미널에 나갔다가 잡혔다. 먼저 광주 서부경찰서로 가서 한두 달 동안 조사를 받았다. 가니까 작전사령관 잡아왔다면서 난리를 떨었다. "김대중이가 대통령 되면 한자리 준다더냐", "누구의 지령 받고 했느냐", "총 어디 숨겼냐. 총 내놓아라"고 하며 무릎을 꿇게 하고 밟고 때리고 했다. 나는 그들에게 "내가 어디 자리 얻의려고 누구의 지시 받고 한 적은 없으며 난 총을 잡지도 않았던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조사를 받다가 상무대의 계엄사로 옮겨가게 되었다. 첫 조사를 받고 곰곰히 궁리를 했다. 어떻게 하면 내가 나의 죄과를 적게 할 것인가 고민하던중 18일 공수대 중위를 병원에 데려다주어서 살렸다는 이야기를 했다. 물론 내가 제일 먼저 몽둥이로 때리고 했던 부분을 삭제했다. 김광록병원 원장이 불려나와서 증언을 할 때 "누가 실어다준 것이 분명하다. 그 시간에 그런 몸으로 공수복장을 한 채로 병원까지 올 수는 없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특A등급이던 것이 A급으로 내려지고 조사를 대여섯번 받고 기소유예로 풀려나왔다.
상무대에서의 일은 다시 생각하기도 싫다. 무조건 군화발로 밟고 기분내키는 대로 때리는 등 말로 하기조차 두려울 정도였다. 기소유예로 나와서 병원에 들르니 원장이 진작부터 만나려고 했다며 하고 많은 병원 중에 왜 하필 우리 병원에 실어와서 몇 번씩 계엄사에 불려다니게 만드냐면서 반기셨다. 이야기를 들으니 그날 공수가 들어오고 난 뒤 청년들과 시민들이 들어와서 내놓으라고 하면서 뒤지는데, 그래도 인간의 생명인지라 지하 보일러실에 숨겨두었다가 가고 난 뒤 찢어진 머리를 꿰매주었다. 그리고 공수복장을 벗겨보니 속에 트레이닝을 입었길래 그 차림으로 병원 뒤문으로 내보냈다고 했다. 그 사람이 27일 아침에 공수복장에 무전기까지 차고 와서는 고맙다고 하면서 다음에 자신을 태워다준 사람을 꼭 찾아달라고 하면서 그때 벗어두었던 공수복을 찾아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질책이 두려워선지 자신의 이름과 연락처 등은 알려주지 않았다고 했다.
그 당시 산수동 집에서 화정동으로 이사한 것도 그 녀석들의 감시가 싫어서였다. 나에게는 직접 찾아오지 않았지만 주위에 다니면서 내 행동이나 상황을 계속 조사하고 다녔다. 그런데 화정동으로 이사해도 그곳까지 따라다녔다.
몸이 예전에는 정말 좋았는데 요즘에는 후유증이 심하다. 그렇지만 지금까지는 나보다 더 심한 사람도 많은데 부상자 신고를 한다는 것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것도 하나의 권리라 여겨져서 이번에 부상자연맹에 신고서를 냈다. 나는 언제나 그때 나의 행동을 자랑스레 여기고 광주시민을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기회만 주어진다면 국회에서라도 증언할 결심이다.(조사.정리 이종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