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소포타미아 미술 ( Mesopotamia )
메소포타미아 남부지역에서 가장 오래 된 문명을 이룩한 수메르인(sumer)의 미술.
메소포타미아란 그리스어로 ‘두 강의 사이’를 뜻하는
말로, 티그리스강(江)과 유프라테스강(江) 사이에 있는 광활한 지역을 가리킨다.
현재의 이라크를 중심으로
시리아의 북동부, 이란의 남서부가 포함된다.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 부근을 경계로 하여
홍적대지(洪積臺地)인 북부의 아시리아와 충적평야인 남부의 바빌로니아로 나누어지며, 바빌로니아는
다시 북부의 아카드와 남부의 수메르로 나누어진다. 수메르에서 일어난 세계 최고(最古)의 문명을
모체로 하여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형성되었다. 강 유역을 제외한 지역은 사막 또는 반사막이다.
이 지역에는 수만 년 전부터 인류가 살았던 흔적이 있으며,
BC 5000~BC 4000년에는 농경생활을 영위한 정착주민도 나타나고, 이어 BC 3500~BC
3000년에는 이미 역사시대로 접어들었다. 즉 수메르인에 의해 많은 도시국가가 건설되고
설형문자도 만들어졌다. 그리고 수메르인이 건설한 도시국가에 국왕이 나타난 BC
3000~BC 2340년에 이르는 초기 왕조시대에는 도시문명의 발달과 함께 미술 또한 고도로
발달하였지만, 현재까지 남아 있는 유물은 그리 많지 않았다.
건축물은 석재가 거의
산출되지 않기 때문에 수메르인은 햇볕에 말린 벽돌이나 목재로 집을 지었다. 따라서
그들 건축물은 건축물의 기초부분을 제외하고는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라가시·
우르·우루크·니푸르·에리두·키시 등의 도시 폐허가 그 좋은 예이다. 이 중 우르에서는
초기 왕조시대의 분묘군이 발굴되고 그 곳에서 천장이 돔으로 된 지하실이 발견되었다.
지구라트[聖塔]도 오래 된 것은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그러나 우루크에는
BC 3500~BC 3000년에 건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지구라트의 유적이 있으며, 그 성전 바깥 벽이
백색 도료를 사용한 벽돌로 건립된 데서 ‘하얀 신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이
‘하얀 신전’은 구부러진 참배통로가 있는 수메르 종교건축의 특징을 엿볼 수 있는
유구이기도 하다.
조각에서도 석재의 부족을 말해 주듯 규모가 큰 것은 거의 없다.
그러나 신전의 예배상(像)과 봉헌상(像), 기념비적인 부조, 장식조각 등이 여러
유적에서 발굴되었다. 이 중 우루크에서 발굴된 《여성 두상(女性頭像)》는 ‘하얀 신전’과
거의 같은 시대의 대리석으로 된 상으로, 감성적인 표현이 뛰어나다. 또 아스마르(고대 이름은
에슈누나)의 아브신전에서 발굴된 일군의 신상(神像)은 이보다 5세기 정도 뒤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같은 대리석으로 된 것으로 원뿔과 원통을 바탕으로 한 뛰어난 기하학적 형태를
보이고 있다. 이들 예배상의 거대한 눈에는 채색된 동공을 끼워넣었으며, 이는 예배자와 눈에
의한 영혼의 교신(交信)을 말해주고 있다. 한편, 목재와 금박·라피스라줄리[靑金石]·조가비
등을 소재로 만든 조각상이나 부조는 정교하고 사실적으로 만들어졌다. 곧, 우르 제1·2왕조의
왕묘군(BC 2000년대 후기)에서 발굴되어 현재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떨기나무에 뒷다리로
선 숫양[雄羊]》은 그 좋은 예이다. 이 밖에도 같은 시대 우르 왕묘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황금의
투구와 식기, 조가비를 세공해 장식한 하프, 그리고 유명한 《우르의 스탠더드》 등이 미술적
일품으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바빌로니아 Babylonia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에 위치한 이라크의 남부를 바빌로니아라고 했다. 최초의
주민들은 수메르 인들로 기원전 3천년 이전부터 문자를 발명해 그들의 문화와 종교·예술을 고대
서아시아 전역에 전파시켰다. 수메르 인들은 전반적인 생활양식뿐만 아니라 예술·종교·문학에
있어서도 후세인이나 고대 동방의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여 주었다. 바빌로니아에서는
예술가와 장인의 구별이 없었으며 그들은 모두 존경을 받았고, 그들의 기술을 지혜의 화신인
에아신에게서 부여받았다고 생각했다.
바빌론 제1왕조를 가리키기도 한다. BC 4000년대 말 이곳 남부에 세운
수메르인(人)의 도시국가에서, 바빌로니아 문명의 기초가 된 수준 높은 도시문명이 피어났다.
BC 2350년 무렵 셈계(系) 아카드인(人)의 사르곤 1세가 통일국가를 건설하여, 181년 동안의
아카드시대에 수메르의 문화는 셈족화되어 오리엔트의 각 지방에 전파되었다. 그 뒤 한동안 혼란이
계속되다가, BC 2050년 무렵 수메르인의 우르나무가 우르 제3왕조를 창시하고, 이 왕조는 5대 107년
만에 엘람인(人)에게 멸망된다. BC 1830년경 이신·라르사와, 아모리인(人)의 수무아붐(재위
BC 1831~BC 1817)이 개창한 바빌론 제1왕조가 패권을 다투었다.
바빌론 제1왕조의 6대왕 함무라비는
숙적인 이신·라르사를 토벌하고 가까운 이웃을 평정, 엘람에서 시리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또한 중앙집권제도를 확립하고, 수도 바빌론에 성벽을 쌓고 각지의 신전을 재흥하여 마르두크신(神)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를 재편성, 신상(神像)을 안치하였다. 운하를 파고 도로도 정비하여 무역을
융성하게 하였으므로 국력이 충실해져서, 바빌론은 오리엔트의 중심도시로서 번영하였다.
또 법전(法典)을 반포하고 역(曆)을 통일하였으며, 아카드어(語)를 국어로 정하여 그 보급에
노력함으로써, 문화적으로도 바빌로니아의 세계가 성립하였다. 그러나 다음 왕 삼수일루나(재위
BC 1686~BC 1648) 때에는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점차로 쇠약해져, BC 1530년 무렵 히타이트인(人)의
침입으로 멸망하였다.
이 시대의 문화를 나타내는 유적·유물은, 그 중심이 되는 바빌론이
아시리아시대에 완전히 파괴되었기 때문에 의외로 적다. 마리·우르 등 도시유적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데, 마리에서 발견된 왕궁터와 2만 수천 매의 점토판(粘土板)은 매우 귀중하다. 조각으로는
수사에서 발견된 함무라비 법전비(法典碑) 상부의 부조(浮彫), 함무라비왕 두상(頭像), 마리에서
출토된 노래하는 여인의 좌상이, 벽화로는 마리 왕궁의 프레스코 벽화 등이 꼽힌다.
기원전 3천년 초 바빌로니아의 도기 제작은 이미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 앗시리아의 아르파시야와
이란의 수사에서 출토된 도기는 모양도 아름답고 채색한 장식의 취향과 기술도 뛰어났던 것을
보여준다.
바빌로니아의 건축에는 진흙과 짚으로 만든 벽돌과 삼목이 주재료로 사용되었다.
궁전이나 신전의 외벽은 화려한 장식을 붙여 치장했으나 내구성이 없는 진흙 벽돌로만 되어 있어
오래가지 못했다. 그러므로 바빌론의 건축물들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바빌론 건축의 특징적인 요소는 약간 튀어나온 버팀벽이 달린 정면과 계단을 쌓거나 삼각형 모양으로
된 수직의 수로와 총안이다. 또 가장 독특한 건축물은 '지구라트'라고 하는 거대한 계단식 탑이다.
이것은 모든 주요 신전에 필수적인 것이었는데 거대한 진흙 벽돌을 층층이 올라갈수록 점점 작아지게
쌓고 꼭대기에는 성전을 만들어 바깥 계단으로 가게 되어 있다.
[ 페르세폴리스의 다리우스 1세 계단의 부조 ]
기원전 2500년경에는 팔장을 낀 자세의 자연스러운 환조 석회석상들이 나타난다. 그러나 바빌로니아
돌 공예의 진정한 매체는 저부조이다. 벽화와 함께 발달한 이 부조는 채색이 되어 있으며, 입체적
효과를 덧붙인 정교한 벽화의 변형이다. 벽화는 고운 바탕의 흰색 석고벽에 검은색으로 윤곽을 그린
다음 붉은 색과 검은색과 칠했으며, 청·황·노색을 제한적으로 사용했다. 벽화는 전형적인 왕실
의식·제사·서임식·사자의 사냥 장면등을 묘사한 것으로
릴리프에서와 같이 인습에 따라 머리와 다리는 옆 모습, 몸통은 앞 모습이며 눈은 보통 앞을
바라보고 있다.
바빌로니아 고유의 특징적인 조각은 매우 단단한 돌로 만든 작은 원통형 도장에 무늬를 조각한
'미니아튀르'이다. 기원전 5천∼3천년 사이에 거의 보편적으로 사용된 이 도장은 서 아시아 전역
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발달 순서가 분명히 나타난다. 가장 훌륭한 작품들은 아카드 시대에 제작된
것들로 주제도 흥미롭고 완성품의 아름다움도 뛰어나다.
그 외에 조개나 유리·돌·상아로도
모양을 만들고 조각을 해서 큰 작품을 장식하거나 모자이크 조각으로 사용했다. 동이 사용된 예는
유사 이전에도 발견되었으나 많은 양을 사용하고 또 장식용으로 금속을 쓴 것은 바빌로니아인들이
최초였다. 그들은 금·은·동으로 많은 작품을 제작했으며 처음에는 망치로 두들겨 펴서 만들었으나
나중에는 청동 적조물로 신전이나 궁전 입구에 괴물상을 만들어 세우기도 했다.
바빌론 제1왕조
멸망 뒤의 바빌로니아는 끊임없는 이민족(異民族)의 침입으로, 왕조·민족이 분립(分立)하여 항쟁하는
시대가 계속되었다. 아시리아제국의 지배 후에 신바빌로니아(칼데아)시대가 성립하여 번영을
되찾았으나 그 존속은 1세기도 채 못되어, BC 538년 페르시아제국에 멸망되었다.
앗시리아 Assyria : (기원전 1,000년경 ∼ 612)
[ 사자의 부조 ]
메소포타미아 북부 티그리스강(江) 유역 지방에서 발생한 미술.
앗시리아 미술은 메소포타미아 미술의 슈메르·악카드의 전통을 잘 소화시켰고 그 위에 전혀 다른
경지를 열어 고대 오리엔트 미술에 하나의 새로운 유형을 명확히 창조해 그 지리적인 환경에 따라
시리아, 소아시아, 더 나아가 에게해 주변의 미술에까지 그 영향을 미쳤다.
앗시리아 미술의 새 경지란 공적과 권위를 과시하는 것이어서 외정(外征), 향연, 사자사냥등을
주제로 한 묘사가 아주 구체적이며 기록성을 중시했다. 특히 동물의 표현에는 박진감 넘치는
사실성을 발휘하고 있다. 현실주의 스타일로 강력한 힘의 표현을 하였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생에 대한 억척스러운 집착을 고집하는 성격을 이런 앗시리아 미술에서 볼 수 있다.
인류문명의 여명기에 아시리아를
포함한 북(北)메소포타미아 일대는 문화적으로는 오히려 바빌로니아를 앞지르고 있었으나,
바빌로니아가 관개경작(灌漑耕作)에 의해서 농작물의 증산으로 번영하자 이 지방의 문화는 급속도로
진보하였고 아시리아는 오히려 뒤떨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BC 3000년대의 아시리아 미술은
같은 시대의 바빌로니아·수메르·아카드 미술의 지방판(地方版)에 지나지 않았으며 이 상태는
BC 2000년대가 된 뒤에도 한참 계속되었다. 다만 조각(彫刻)은 BC 2000년대 후반이 되어 한때
아시리아를 지배했던 미타니의 영향으로 수메르·아카드 양식과는 다른 아시리아적 성격을 점차
나타내게 되었다. 즉, 일반적으로 양식이 답답하고 비례가 압축되었으며 좌우대칭을 중시하고
의상에 풍부한 장식을 좋아하는 점 등이 그렇다. BC 1000년대의 아시리아 미술은 이 나라의
제국주의적 발전에 힘입어 최성기(最盛期)를 맞이한다.
흔히 아시리아 미술이라 하면 그 특성이
확립된 시기요, 신(新)아시리아 미술로 불리기도 하는 BC 9세기에서 BC 7세기에 걸친 미술을 말한다.
건축으로는 아슈르나시르팔이 세운 님루드의 궁전,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의 아르스란 타슈의 궁전,
사르곤 2세의 코르사바드의 궁전 등이 있었는데 보수적인 아시리아인은 석재를 손쉽게 입수할 수 있는
지방에서도 수메르의 전통에 따라 볕에 말린 벽돌을 주재료로 사용하였다. 다만 입구의 좌우나
바깥쪽에 인두수신(人頭獸身)의 거상(巨像)을 세우고, 방 내부에는 부조가 있는
설화석고(雪花石膏:alabaster) 등의 석판을 벽면 아랫부분에 둘러서 붙였다.
궁전에는 옥좌실(玉座室)이 있는 알현실, 왕의 거실, 왕비의 거실 등을 포함하는 일곽과
조신(朝臣)이 사는 일곽, 신전이나 지구라트[聖塔]가 있는 일곽 등이 있고, 중앙에는 정원이 있었다.
지구라트는 코르사바드에서는 7층으로 구성되어 있어 흉벽이 있는 비스듬한 길이 건물의 주위를
돌아서 정상까지 달하였다. 조각의 유품은 주로 부조(浮彫)이다. 환조(丸彫:입체조각)는 포효하는
사자나 유익인두(有翼人頭)의 황소 또는 사자, 인상(人像)으로는 아슈르나시르팔 2세상(像)이나
나브 신상(神像) 등이 있는데 형체보다도 표면 세부묘사에 중점을 둔 부조적 표현이었다.
부조의 주제는 종교적 의식, 전쟁, 수렵조공자(朝貢者)의 행렬 등 왕의 권위와 제국의 위력을
과시하는 것을 좋아했고 시대적인 변화는 없으나 구도와 양식에는 진전을 보였다. 즉, BC 9세기
전반의 아슈르나시르팔 2세 시대의 것은 살붙임이 얇고 인물의 비례가 답답하며 때로는 명문(銘文)이
작품의 표면을 덮기도 했다.
BC 8세기 후반,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나 사르곤 2세에 와서는
살붙임이 도톰해지고 뚜렷해졌으며 작품 표면은 물론 배경에도 명문을 넣는 일은 없어졌다.
그 후의 센나케리브 시대에는 작은 인물을 많이 담은 우화적 구도가 행해졌다. 그러나 아시리아
부조의 최고 작품은 니네베의 궁전 유적에서 출토된 아슈르바니팔왕 시대의 것으로, 살붙임도
풍부하고 기교는 소박하며 표현은 자유롭고 힘에 넘친다. 그 중에서도 ‘사자의 방’의 부조는
동물묘사가 세계적인 걸작이다. 유약(釉藥)을 끼얹은 벽돌이나 회화도 궁전 내부장식에 사용되었다.
공예품으로는 먼저 청동(靑銅) 제품으로서 사자형의 주조종(鑄造鐘), 그리고 샬마네세르
3세(BC 858∼BC 824)의 사적(事蹟)을 찍어낸 문표면의 장식이었던 띠 모양의 판이 유명하다.
상아조각품으로는 부조도 있고 줄새김도 있는데 채색된 것이 가구에 장식되었으며 님루드나
아르스란 타슈 등지에서 뛰어난 작품이 출토되었다. 표현양식면에서 볼 때에는 아시리아적인 것
이외에 페니키아적인 것, 이집트적인 것이 있다. 원통인장(圓筒印章)은 주제도 양식도 모두 벽면
부조를 따랐다. 또한 BC 1000년대의 아시리아 미술은 가까운 인접제국의 미술에 다소간 영향을
끼쳤는데 그 중에서도 아케메네스왕조의 페르시아 미술의 형성에 크게 공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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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브 아도 여왕의 공후 메소포타미아 B.C 2735년경 나무 금박 높이 107cm 남 이라크출토 |
숲속의 산양 메소포타미아 B.C 2750년경 금박 조개 라피스 라즈리 나무높이 47.5cm 남 이라크 우르 출토 |
구테아 입상 메소포타미아 소메르 B.C 2200년경 섬록암. 높이 150cm. 텔로 출토 |
이드리 미 왕상 메소포타미아 B.C. B.C 1400년경 백석. 높이 104cm 실아 아라라크 출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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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상 B.C. 2700년경 에슈눈나 |
대예배상의 두부(석고) B.C. 2700년경 텔아스마르 아부신전 |
이쿠-샤마간왕의 상(석고) B.C. 2400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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