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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황제를 떠올리면 힘 있는 사람으로 연상되고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존재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속내를 살펴보면 황제에게 막강한 힘을 주고 보탠 사람은 많은 백성들이고, 백성들이 그에게 호응한데는 그 힘을 가지고 외적(外敵)을 막고, 기회의 불평등을 조장하는 사람들을 제압하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논리는 고전(古典)이라면 어떤 책에든지 나와 있으니 요즈음의 민주주의 아래에서 국민이 사람을 뽑아서 뽑힌 사람에게 힘을 몰아준다는 점과 비교하여도 별반 차이가 없다.
이러한 황제가 원래 황제를 세운 뜻대로 그 힘을 백성들을 위하여 사용하면 영웅(英雄)으로 불리고 성군(聖君)으로 칭송을 받는다. 바로 은(殷)의 탕(湯) 임금이 하(夏)의 걸(桀)임금을 방축하였고, 주(周) 무왕(武王)이 은(殷)의 주(紂)임금을 쫓아내고 백성들을 조문(弔問)했으니 탕과 무왕은 비록 국가폭력을 사용하였지만 정당한 것으로 인정받고, 칭송까지 받은 셈이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일 거다.
그런데 이러한 힘을 가지게 되면 하루아침에 태도가 돌변하여 백성을 위하여 쓰라는 힘을 가지고 도리어 힘을 실어준 백성들을 지배하고 탄압하고 죽이는 일이 역사에는 자주 보인다. 이러한 유(類)의 황제는 자리에 오르자마자 태도를 180도 바꾸어 자기 일신(一身)의 원수를 갚으려 들고, 자기 패당을 위하여 온갖 만행을 저지른다.
그런데 만행을 저지르는 황제는 스스로는 자기가 하는 짓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아는지 어떻게 하든지 자신의 만행 소문이 밖으로 나가는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이 악행을 알거나 또는 기록한 것이 있으면 철저하게 없애려고 든다. 악행을 아는 사람이 있거나, 기록이 남아 있다면 자기가 죽은 뒤에라도 폭군이라고 이름이 붙여져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거나 비웃음을 받을 것을 걱정한 것이 아니겠는가? 말하자면 역사를 겁낸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폭군으로는 진시황(秦始皇)과 한무제(漢武帝)가 있다. 진시황은 자기를 비판하는 유가(儒家)들을 산채로 땅에 파묻어 버렸고, 자기를 비판할 가능성이 있는 책들을 다 거두어 불살랐다. 이른바 분서갱유(焚書坑儒)다. 또 한무제(漢武帝)는 자기를 비판하는 사람에게 붙인 죄목(罪目) 가운데 반순복비(反唇腹誹)라는 것이 있었다. 무제의 정책을 감히 입으로 소리 내어 비판할 수는 없으니까 그저‘입을 삐쭉 내미는데’이것은 비록 겉으로는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배속으로 황제를 비난하는 것’이라고 하는 죄목이다. 이쯤 되면 그들의 악행과 폭력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질 법도 한데, 오늘날에는 초등학생정도만 되어도 아는 사실이 되어 버렸다.
역사서에 기록되었고, 그것이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에서 역사는 참으로 신기하다. 없애려고 온갖 노력을 해도 없어지지 않는 것이 역사이다. 사실 독재자가 아무리 자기의 만행을 감추려고 하였지만 역사가는 때로는 목숨을 걸고, 때로는 깊은 곳에 숨어서 이를 기록으로 남겨 놓는다. 예컨대 한무제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사마천은 무제의 악행을 기록하면서 그것이 무제에게 들키면 사람은 죽고 책은 불살라 질 것이니까, 이 책을 ‘석실금고(石室金庫)’에 넣어두라고 하였다. 결과적으로 그 외손자에 의해여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는데 이 책이 바로‘사기(史記)’이다.
그래서 역사에서 한번 칭찬을 받는 것은 곤룡포를 입은 것만큼이나 영광스럽고, 한번 비난을 받은 것은 도끼를 목에 댄 것만큼이나 두렵다는 말까지 나온 것이 아니겠는가?
5호16국 시절에 황제가 되자 사람 죽이기를 밥 먹듯이 한 사람이 있었다. 전진(前秦)의 황제 부생(苻生)이다. 그는 전진왕 부건(苻健)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외눈이었던 그는 자라는 동안 무뢰배로 지냈는데, 그의 형이며 태자였던 부장(苻萇)이 동진(東晉)과의 싸움에서 죽자 참언(讖言)을 믿었던 부건이 부생을 태자로 삼았다. 그리고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드디어 부생은 전진의 황제가 되었다.
이제 그는 막강한 황제의 권력을 갖게 되었으니 성공한 셈이다.
그러나 그는 주어진 권력을 과거에 자기를 깔보거나 비판 한 사람들을 그 죽이는데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부생은 외눈박이였기에 주변 사람들은 그를 기피하였고, 이 때문에 한이 매쳤고 또 그래서 포악해지니 포악하다고 욕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며 그러기에 그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방해하기도 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정적(政敵)이었다. 그는 황가 되자 이들을 철저히 응징하려고 정적을 죽이는 일을 밤낮없이 시행하였다. 그래서 자기의 정치를 보필하던 대신(大臣) 8명을 모두 죽였고, 종실과 훈구, 친척과 충량한 사람도 모두 죽였으니 그 나머지는 말할 거리도 못 된다.
하도 사람을 많이 죽이자 사람들은 ‘부생이 사람을 잔혹하게 많이 죽인다.’고 수근 거렸다. 또 그 때문에 ‘인구가 줄기까지 하였다’는 말까지 돌았다. 이러한 말이 부생의 귀에 안 들어갈 리가 없었다. 드디어 그는 자기의 입장을 정리하여 조서를 내렸다. “짐(朕)이 황천(皇天)의 명령을 받아서 만방에 군림(君臨)하였는데, 황통(皇統)을 잇고 나서 어떤 좋지 않은 일이 있었기에 비방하는 소리를 천하 사람들에게 가득히 부채질하는가?” 자기는 어떤 잘 못도 하지 않았고 세상도 그리 나빠지지 않았는데 왜 비난하느냐고 젊잖게 말한 것이다.
그는 이어서 다시 변명을 하였다. “사람을 죽인 것이 1천 명에 지나지 않는데 이를 잔학(殘虐)하다고 하는가! 길에 다니는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으니, 아직은 드물지는 않다. 바야흐로 마땅히 엄하고 끝까지 간 형벌을 내려야 할 것이니 다시 짐을 어떻게 할 것인가?”자기를 잔학하다고 비난하는 것이 잘 못이고 겨우 1천 명 정도를 죽인 것을 가지고 인구가 줄었다고 비난하는 것도 잘 못이라는 태도다. 반론으로 내 놓은 말이 ‘거리에 아직도 사람이 많으니 자기가 사람을 많이 죽여서 인구가 줄었다는 말은 거짓말이다.’라는 것이다. 그러하니 자기의 방식을 밀고 나가겠다고 선언까지 하였다.
또 황제인 그에게 각지에서 상황보고가 올라왔다. 그 가운데 지난봄부터 동관(潼關)의 서쪽에서 장안(長安)에 이르기 까지 호랑이와 승냥이가 출몰하여 가축은 잡아먹지 않고 사람만 잡아먹는데 그 수가 무려 7백 명이나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 재앙을 물리치려면 나라의 대표인 황제가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건의가 있었다.
그러나 부생은 백성들을 위하여 제사를 지내라는 말을 들어줄 마음이 없었다. 하찮은 백성들이야 죽든 살든 관심 밖이었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그는 말하였다. “들짐승들이 배가 고프면 사람을 잡아먹을 것이고, 배가 부르면 마땅히 스스로 그칠 것인데 어찌 제사를 지내는 일이 있겠소? 또한 하늘이 어찌 백성들을 아끼지 않겠소? 바로 죄를 범한 사람이 많기 때문에 짐을 도와서 그들을 죽이는 것뿐이오.”호랑이에게 잡혀 죽은 백성들은 아마도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늘이 벌을 주는 것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참으로 기가 막힌 대답이었다. 자치통감 권100에 실린 내용이다.
이러한 부생의 기록을 읽으면서 누가 부생을 좋은 황제라고 하겠는가? 사람의 목숨을 초개처럼 생각하였으니, 이러한 황제가 백성들에게 평화와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없다. 아무리 황제가 자기 멋대로 할 수 있는 시대라고 할지라고 이쯤 되면 도저히 용납 되지 않았다. 참다못한 사람들은 일어났고, 결국 사촌 동생인 부견(苻堅)에게 살해되어서야 이 만행은 끝났다.
부생 같은 황제가 살았던 시기는 서기 4세기였는데, 그 후 1천600년이 지난 20세기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중화인민공화국을 건설한 주역인 마오쩌둥은 그 고난의 행군시절,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300만 명이 굶어 죽었고, 덩샤오핑은 천안문 광장에서 자유를 외치는 군중을 탱크로 깔아버렸다. 북한에서도 200만 명이 굶어 죽은 사실을 우리 시대에 직접 보았고 김정은은 그 고모부를 대포로 쏘아 공개적으로 처형하였다.
이들에게 사람을 그렇게 많이 죽게 하였느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할까? 아마도 부생처럼 대답할지 모른다. ‘겨우 300만 명 죽었다고 13억 인구에서 얼마나 줄었겠는가? 새 발의 피다.’‘정치를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그리된 것이다.’라고 할 것이다. 혹은‘나는 직접 죽이지는 않았고 그들이 죄를 지었으니 벌을 받은 것이다.’고 말할 지도 모른다. 또 내가 직접 칼로 죽인 것이 아닌데 왜 내게 책임을 묻는가 하고 화를 낼지도 모른다. 이처럼 책임이 없다는 말은 칼로 살인한 사람이 ‘내가 죽인 것이 아니고 칼이 찌른 겁니다.’라고 대답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집정자(執政者)가 잘 못하여서 벌어진 일이고 정치라는 칼을 잘 못 휘둘러서 죽인 것이라면 분명히 집정자의 책임이다.
저들은 전체주의이고 공산독재주의 나라여서 그렇다고 치자. 그렇다면 21세기 민주사회라는 우리에게는 그러한 일이 없을까? 그런데 정권이 바뀔 적마다 자살하는 사람이 많이 나오는 것을 보면서 이것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노동자 가운데서 자살하는 사람이 나오더니, 기업의 최고 책임을 졌던 사람, 재벌 그룹의 회장, 심지어는 대통령을 지낸 사람, 별을 단 장군, 국회의원, 다른 사람의 죄를 논단하던 검사까지 일일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도 많은 사람이 뒤를 이었으니 말이다.
이들이 왜 자살의 길을 택했을까? 개인의 선택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이 일어날 적마다 사람들은 권력을 가진 사람이 마치 부생처럼 전에 자기를 비난하였던 정적(政敵)이나 현재에 자기를 극열하게 반대하는 사람을 손 본 것이라는 의구심을 갖는다.
권력자가 정적을 제거하려고 적법(適法)이라는 수단을 동원하기도 하고, 혹은 보이지 않는 압력을 넣기도 한다는 것이다. 흔히 하는 말로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없으니 권력을 잡은 김에 정적의 먼지를 털어내 혼을 낸다는 것이다. 정말로 시중에 떠도는 말처럼 정적은 손본 것이라면 그것은 분명히 살인과 같은 것이다. 천명 밖에 죽이지 않았다고 말한 부생 같은 사람은 그래도 솔직하기는 하다고 할 수 있지만 떠도는 말처럼 겉으로는 안 그런척하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죽였다면 이는 비열한 암살(暗殺)이니, 부생보다 더 나쁘다 할 것이다.
그런데 암살하는 힘을 가진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아무리 큰 힘을 가졌다 하여도 그 힘을 갖는 기간은 아주 잠깐 동안이라는 사실이다. ‘권불십년(權不十年)’‘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인 것이다. 세월의 흐름을 거역할 장사는 없기 때문이다. 오늘의 권력자가 내일에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던 예를 한국에서는 많이 보았는데, 그것이 내게는 닥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일을 했다면 정말로 역사가 무엇인지를 모른 무모한 사람이다.
아마도 ‘잘 못 한 사람에게 응징의 벌을 주어야 사회가 고쳐지지 않겠는가?’라고 하면서 휘두르는 권력의 정당성을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정권, 어느 시대엔들 그러한 논리가 없었겠는가? 그렇다면 다음 정권에서도 같은 논리로 자기에게 달려들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는가? 그것을 피해가는 방법은 권력을 내놓지 않는 것일 터이지만, 장기간 권력의 정상에 있었던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도 자리를 내 놓아야 했다. 이것이 역사이다.
우리는 짧은 반세기의 경험에서도 집권자가 각가지 명목으로 정적 도려내기에 주력한 다음에 그를 잇는 집권자도 똑 같은 이유를 가지고 칼을 들이댔던 것을 여러 번 보아왔으니 이정도의 역사만 보아도 이제는 알아차릴 만도 한데, 정적을 도려내는 것만은 변함이 없어 보이는 것은 역사를 쥐어줘도 모르는 것 같다.
아무도 안 보는데서 사람을 죽였으니 드러날 일이 없다고 짧게 생각하겠지만 지금도 사마천 같은 진짜 역사가가 어디에서인가 가감 없이 기록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겉에다 역사가라는 명찰을 달고 권력과 이념의 노예가 된 사람은 역사가가 아니고 노예일 뿐인데 그런 사람을 역사가로 알고 ‘나를 잘 써 주겠지 ’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더더욱 무식함을 드러내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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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읽었습니다.역사를 읽지 않는 사람은 100년을 살아도 100년에 불과하지만 역사를 읽으면수천간의 삶을 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권선생님의 역사를 꿰뚫는 사론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정교수님 말씀을 듣고 글자를 키웠습니다. 저의 역사 칼럼은 이번이 네번째입니다. 이 가운데 올리지 않은 것이 있으면 올리겠습니다. 고견을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