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정주=역사평론가] 김정희는 정확한 숫자를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호를 사용했다. 그가 평생 사용했다는 호는 주장하는 사람에 따라 적게는 100여개에서부터 많게는 500여 개나 된다. 최근에는 김정희의 명호(名號)만을 조사하고 연구해 그 숫자가 정확하게(?) 343개라고 주장하는 책까지 나왔다. 어쨌든 김정희의 호가 몇 백 개에 달한다는 사실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그는 호에 관한 한 어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독보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김정희가 평생 수백여 개의 호를 썼지만 그를 대표하는 호를 든다면 단연 추사(秋史)와 완당(阮堂)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다. 더욱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김정희하면 ‘추사’를 가장 먼저, 그리고 ‘추사체(秋史體)’를 가장 쉽게 떠올릴 것이다. 반면 완당이라는 호는 좀 낯선 느낌이 들 것이다. 그런데 유홍준 교수는 김정희의 평전(評傳)을 출간할 때 그 책의 제목을 ‘추사평전’이 아닌 ‘완당평전’이라고 붙였다. 김정희의 삶과 학문의 궤적을 추적해보면 그를 대표하는 호는 추사가 아니라 완당이기 때문에 ‘완당평전’이 맞다는 얘기다. 심지어 김정희가 청나라의 수도 연경(북경)에 다녀온 이후부터는 “이제 김정희를 추사라고 부르는 것보다 완당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의 행적에 더 어울린다. 실제로 김정희는 중년에 들어서면 추사라는 낙관은 거의 쓰지 않고 주로 완당이라고 했다.”(유홍준 저, 『완당평전1』, 학고재, 2002. P104)고까지 적었다. 그래서 필자는 ‘추사’와 ‘완당’이라는 호를 본격적으로 탐사해보면서 김정희를 대표할 호가 과연 추사인지 아니면 완당인지에 대해 가늠해보고자 한다. 먼저 ‘추사’에 관한 기록과 이야기부터 뒤져보자. <계속> 추사(秋史) 김정희② 고증학·금석학·역사학의 독보적 권위자
[한정주=역사평론가] 먼저 북한산 비봉의 진흥왕순수비에 대해 알아보자. 김정희는 31세가 되는 1816년 7월 김경연과 함께 북한산 승가사를 유람하다가 비문을 발견해 이끼를 벗겨내고 오랜 세월이 지나 이지러지거나 마멸되어 희미해진 글자들을 수차례에 걸쳐 탁본을 반복해 확인했는가 하면, 그 다음해인 1817년 6월8일에는 조인영과 함께 다시 그곳을 찾아가 비문 속의 글자를 하나하나 낱낱이 조사하여 68자를 구해 돌아왔고, 그 후 다시 두자를 더해 모두 70자의 글자를 얻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것을 진흥왕의 옛 비석으로 단정하고 나자 1200년의 고적(古蹟)이 하루아침에 환히 밝혀져서 무학대사의 비(碑)라는 황당하고 기궤한 설이 변파(辨破)되었다. 금석학(金石學)이 세상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 바로 이와 같다. 이것이 어찌 우리들이 밝혀낸 일개 금석의 인연에서 그치겠는가”라고 하면서 역사적 사실에 접근하는데 금석학이 얼마나 귀중하고 가치 있는 학문인지를 새삼 강조하기까지 했다. 김정희가 금석학적 연구를 통해 비로소 무학대사비로 잘못 전해져온 북한산 비봉의 비석이 신라 때 세운 진흥왕순수비라는 사실을 밝힌 것은 역사학적으로 볼 때 하나의 중대한 사건이었다. “이상 신라 진흥왕순수비는 지금 한양도성의 북쪽으로 20리쯤 떨어져 있는 북한산 승가사(僧伽寺) 옆에 자리한 비봉(碑峯) 정상에 있다. 이 비석의 길이는 6척 2촌 3푼이고, 넓이는 3척에다 두께는 7촌이다. 바위를 깎고 뚫어서 밑받침으로 삼았고, 위에는 방첨(方簽)을 덮었는데, 지금 그 방첨은 벗겨져 아래로 떨어져 있다. 전자(篆字)로 쓴 비석의 전액(篆額)도 없고, 비석 뒷면에 새긴 음기(陰記)도 없다. 대개 비문은 12행(十二行)으로 글자가 희미하거나 명확하지 않아서 매 행(行)마다 몇 자인지도 분별하기 어려웠다. … 전체 비문 가운데 분별해낸 것이 70자(字)이다. 제1행이 12자, 제2행이 3자, 제3행이 4자, 제4행이 3자, 제5행이 7자, 제6행이 4자, 제7행이 3자, 제8행이 11자, 제9행이 11자, 제10행이 8자, 제11행이 4자이고 제12행은 희미하고 명확하지 않아 한 글자도 얻을 수가 없었다. 북한산은 한사군(漢四郡)의 강역이었으나 뒤에 고구려의 소유가 되었다가 진흥왕 시대에 이르러 신라에 소속되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본기(本紀)’에 의거하면, 진흥왕 16년에 왕이 북한산에 순행(巡幸)하여 영토의 경계를 획정하였고, 18년에는 북한산주(北漢山州)를 설치하였다. 곧 진흥왕이 새롭게 획득한 땅이었다. … 이러한 것으로 본다면 북한산은 신라와 고구려의 경계인데, 이 비석으로 곧 경계를 정하였다고 하겠다. 비문에는 연월(年月)이 닳아 없어져서 어느 해에 세워졌는지 알 수가 없다. … 이 비석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요승(妖僧) 무학(無學)이 잘못 찾아 이곳에 이른 비(碑)’라고 그릇되게 일컬어져왔다. 그런데 병자년(丙子年 : 1816년) 가을에 내가 김경연과 함께 승가사에서 유람하다가 이 비석을 보게 되었다. 비면(碑面)에는 이끼가 두껍게 덮여 있어서 마치 아무런 글자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손으로 비면을 문지르자 글자의 형태와 비슷한 것이 있었는데 더럽혀지고 이지러진 흔적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더욱이 그때 해가 이끼가 덮인 비면에 닿아서 비춰보자 이끼가 글자 획을 따라 들어가 ‘파임’은 꺾어지고 ‘삐침’은 더럽혀져 있었다. 이에 희미하게나마 글자를 찾아서 시험 삼아 종이를 대고 탁본을 떴는데, 글자의 형체가 황초령비와 매우 비슷하였다.
제1행에 있는 진흥(眞興)의 진(眞) 자는 약간 닳아 희미했으나 여러 차례에 걸쳐 탁본을 떠서 살펴보니, 진(眞) 자라는 것을 의심할 까닭이 없었다. 이에 마침내 이것을 진흥왕의 옛 비석으로 단정하고 나자 1200년의 고적(古蹟)이 하루아침에 환히 밝혀져서 무학대사의 비(碑)라는 황당하고 기궤한 설이 변파(辨破)되었다. 금석학(金石學)이 세상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 바로 이와 같다. 이것이 어찌 우리들이 밝혀낸 일개 금석의 인연에서 그치겠는가. 그 다음해인 정축년(丁丑年 : 1817년) 여름에 또한 조인영과 함께 비봉에 올라 68자를 살피고 정한 다음 돌아왔고, 그 뒤 다시 두 글자를 얻어서 모두 합해 70자가 되었다. 비의 좌측에 ‘이것은 신라 진흥대왕의 순수비이다. 병자년 7월에 김정희와 김경연이 와서 읽다’라고 새기고, 또한 예자(隸字)로 ‘정축년 6월 8일 김정희와 조인영이 와서 남은 글자 68자를 살피고 정했다’라고 새겼다.” 『완당전집』, ‘진흥왕의 두 순수비를 상고한다(眞興二碑攷)’ 젊은 시절 북한산 비봉에 세워져 있던 비가 무학대사비가 아니라 진흥왕의 순수비라는 사실을 처음 밝힌 김정희는 47세가 되는 1832년 함경도관찰사로 나가는 절친한 벗 권돈인에게 또 다른 진흥왕순수비인 함경도 함흥의 황초령비를 찾아가 탁본한 다음 자신에게 보내달라고 특별히 부탁했다. 예전에 외가 쪽 친척을 통해 구한 황초령비 탁본이 있었지만 실제 직접 현장에 가서 구한 탁본의 필요성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금석학에 대한 김정희의 열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던 권돈인은 함경도관찰사로 부임하자마자 황초령비를 다시 찾아내 탁본해서 김정희에게 보내주었다. 이후 김정희는 다시 진흥왕 순수비와 삼국사 관련 기록과 문헌을 깊이 연구했고, 마침내 ‘진흥왕의 두 순수비를 상고한다’는 뜻의 이른바 ‘진흥이비고(眞興二碑攷)’ 혹은 ‘예당금석과안록(禮堂金石過眼錄)’이라고 부르는 걸출한 금석역사학 논문을 썼다. 20대 중반부터 20여 년 넘게 지속적으로 이어져 온 김정희의 금석학과 역사학 연구가 비로소 큰 열매를 맺게 되는 순간이었다. 여기에서 김정희는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의 여러 탁본을 자세하게 소개한 다음 거기에 새겨진 글자를 해독하고 각종 역사서 및 문헌과 비교 대조해 고증·해석하고 “법흥(法興)이나 진흥(眞興)이라는 칭호는 왕이 사망하고 장사지낸 뒤에 칭한 시호(諡號)가 아니다. 이는 살아 있을 때 부른 칭호였다”라고 하거나 “지금 안변에서부터 함흥에 이르기까지 거리가 310리이고, 함흥에서부터 단천에 이르기까지가 3백 80리이니, 거리를 논한 것 역시 잘못되었다. 더욱이 단천에 진흥왕비가 있다는 명확한 증거를 보지 못했으니, 단천 이남의 땅이 신라로 꺾여 들어왔다는 말 역시 잘못되었다고 하겠다”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견해를 밝혀 하나의 역사 학설을 만들기까지 했다. “이상의 신라 진흥왕순수비는 함경도 함흥부(咸興府) 북쪽으로 110리쯤 떨어져 있는 황초령 아래에 있었는데, 지금은 비가 없어져버렸다. 나는 단지 이단(二段)으로 되어 있는 탁본만을 얻었을 뿐이다. 이를 합해서 살펴보니, 12행으로 되어 있고 길이와 넓이는 알 방법이 없었다. … 이상 대개 12행인데, 글자가 완전한 것이 239자이고 불완전한 것이 13자였다. 또한 깎인 글자가 17자이고 빈 칸은 셋으로 총 272자였다. 비석의 상단은 이미 사라져버렸으니 그 규수(圭首)와 전자(篆字)로 쓴 비석의 전액(篆額)은 상세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북한산의 진흥왕순수비 또한 이 황초령의 진흥왕순수비와 동시에 세워진 것이지만 규수를 만들지 않았다. 이 황초령비 역시 북한산비와 동일한 사례일 것이다. … 신라왕의 시호(諡號)는 중엽부터 일어났고, 처음에는 모두 방언(方言)으로 호칭하였다. 그러므로 거서간(居西干)이라고 호칭한 것이 하나이고, 차차웅(次次雄)이라고 호칭한 것이 하나이고, 이사금(尼師今)이라고 호칭한 것이 열여섯이고, 마립간(麻立干)이라고 호칭한 것이 넷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의거하면 지증마립간(智證麻立干) 15년에 ‘왕이 사망하였다. 시호를 지증(智證)이라고 하였다. 신라의 시법(諡法)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왕이 사망한 뒤에는 반드시 시호를 썼다. 그러므로 진흥왕 본기(本紀)에도 역시 37년에 ‘왕이 사망하였다. 시호를 진흥(眞興)이라고 하였다’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이 비석은 진흥왕이 스스로 만들어 세웠는데 그 제액(題額)에 엄연히 ‘진흥대왕(眞興大王)’이라고 호칭했고, 북한산 비문에도 역시 ‘진흥(眞興)’이라는 두 글자가 있다. 이러한 것으로 살펴본다면, 법흥(法興)이나 진흥(眞興)이라는 칭호는 왕이 사망하고 장사지낸 뒤에 칭한 시호(諡號)가 아니다. 이는 살아 있을 때 부른 칭호였다. … 진흥왕 16년에 과연 북한산에 순수(巡狩)한 사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영토의 경계를 정한 일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역사서에서 빠뜨리고 기록하지 않는 것도 아닌데 어찌하여 이같이 누누이 여러 말을 잘못되게 늘어놓았는가. 지금 안변에서부터 함흥에 이르기까지 거리가 310리이고, 함흥에서부터 단천에 이르기까지가 380리이니 거리를 논한 것 역시 잘못되었다. 더욱이 단천에 진흥왕비가 있다는 명확한 증거를 보지 못했으니 단천 이남의 땅이 신라로 꺾여 들어왔다는 말 역시 잘못되었다고 하겠다.” 『완당전집』, ‘진흥왕의 두 순수비를 상고한다(眞興二碑攷)’ 금석학과 역사학의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는 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공감할 것이다. 오늘날에도 금석(金石)에 새겨진 문자나 문양을 탁본(拓本)하고 다시 그것을 고증하고 해독·해석하는 일은 역사학도가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교양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김정희가 학문적으로는 ‘금석문과 역사’에서, 또한 예술적으로는 ‘그림과 서예’에서 탁월한 대가였다는 사실은 그가 사망한 1856년(철종 7년) 10월10일자 『철종실록(哲宗實錄)』에 실려 있는 ‘김정희의 졸기(卒記)’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전 참판 김정희가 사망하였다. 김정희는 이조판서 김노경의 아들이다. 그는 총명하고 기억력이 뛰어나 여러 가지 책을 널리 읽었다. ‘금석도사(金石圖史)’ 곧 금석문과 그림과 역사에 깊이 통달했고, ‘초서(草書)‧해서(楷書)‧전서(篆書)‧예서(隸書)’ 등 서예에 있어서 참다운 경지를 신기하게 깨달았다.” 『철종실록』, 철종 7년(1856년) 10월10일 더욱이 김정희가 31세 때 지은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은 젊은 시절부터 금석학과 고증학과 역사학을 하나로 융합했던 김정희의 면모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다. 김정희의 학문 연구 방법이 실증과 고증과 변증이었다면 ‘사실에 의거하여 진리를 찾는다’는 실사구시(實事求是)는 그의 학문의 근저에 자리하고 있던 철학적 모티브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김정희는 어떤 학문과 사상이 올바르다거나 잘못되었다고 다툴 필요도 없이 학문하는 사람은 오로지 널리 배우고 견실하게 행동하면서 ‘사실에 의거하여 진리를 찾는다’는 말만을 주장하고 실천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한서(漢書)』 ‘하간헌왕전(河間獻王傳)’에서 말하기를, ‘실사구시(實事求是)’ 곧 사실에 의거하여 진리를 찾는다고 하였다. 이 말은 학문의 가장 중요한 도리이다. 만약 사실에 의거하지 않고 단지 공허하고 허술한 방도를 편리하다고 생각하거나, 그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단지 선입견(先入見)을 주된 것으로 삼는다면 성현(聖賢)의 도리에 배치(背馳)되지 않는 것이 없게 된다. … 학문하는 도리는 마땅히 사실에 의거하여 진리를 찾는 것에 있으니, 헛된 논설에 기대어 잘못된 곳에 숨어서는 안 된다. … 대체로 성현의 도리는 몸소 실천하면서 공론(空論)을 숭상하지 않는 것이다. 마땅히 진실한 것을 추구하고 헛된 것에 의거해서는 안 된다. 만약 아득하거나 어두운 속에서 이것을 찾거나 공허하고 광활한 가운데에서 이것을 방치한다면 옳은 것과 그릇된 것을 변별(辨別)할 수 없고 본의(本意)를 완전히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학문하는 도리는 한(漢)나라와 송(宋)나라의 경계를 구분할 필요가 없고, 또한 구태여 정현(鄭玄)과 왕숙(王肅) 그리고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장점과 단점을 따질 필요가 없다. 더욱이 주희(朱熹)와 육구연(陸九淵) 그리고 설선(薛瑄)과 왕수인(王守仁)의 문호를 다툴 필요가 없다. 다만 마음을 평온하게 하고 기운을 고요하게 다스려 널리 배우고 독실하게 행동하면서 사실에 의거하여 진리를 찾는다는 ‘실사구시(實事求是)’ 이 말만을 오로지 주장하며 실천해나가는 것이 옳다.” 『완당전집』, ‘실사구시설’ 필자가 앞서 언급했던 공자의 『춘추』가 추구한 역사철학은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술이부작(述而不作)’ 즉 ‘서술하되 창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말은 ‘사실대로 기록할 뿐 임의로 지어내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술이부작’의 철학은 김정희가 역사적 실체와 진실에 접근할 때 철학적 모티브로 삼은 ‘사실에 의거하여 진리를 찾는다’는 이른바 ‘실사구시(實事求是)’와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다. 실사구시의 역사철학은 특히 근대 역사학의 새 장을 연 ‘실증주의 역사학’과 닮아 있다. 금석학과 역사학에 이 ‘실사구시’의 철학을 적용했던 김정희는 금석문에 남겨진 글자에 의거하여 역사의 실체를 찾고 또한 진실을 밝히려고 했다. 다시 말해 필자는 ‘추(秋)’라는 글자에는 ‘춘추(春秋)’라는 의미가 담겨 있고, 다시 ‘춘추’에는 김정희의 역사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 ‘술이부작’과 ‘실사구시’의 정신이 새겨져 있다고 본다. 따라서 ‘추(秋)’에는 진흥왕 순수비와 같은 금석문(金石文)의 옛 기록을 고증하고 해석하면서 그 시대의 역사적 실체에 다가가는 금석역사가(金石歷史家) 김정희의 모습이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다. ‘사(史)’에는 별다른 해석을 달 필요도 없이 ‘역사 혹은 역사가’의 뜻과 의미가 담겨져 있다. ‘추사’라는 호를 통해 우리는 금석학과 고증학과 역사학을 한 가지로 융합했던 김정희를 엿볼 수 있다. 따라서 ‘추사’가 담고 있는 의미는 곧 ‘금석서화가’보다는 ‘금석역사가’에 더 가깝다고 보아야 한다. <계속>
추사(秋史) 김정희④ 완원(阮元)·옹방강(翁方綱)을 스승으로 삼다
[한정주=역사평론가] 앞서 소개한 책에서 최준호씨는 “흔히 말하길 사람은 그 이름이나 명호의 의미대로 산다고 한다”고 밝히면서 김정희의 삶은 “추사의 의미를 따라 살았다”고 했다. 김정희를 대표할 호는 ‘추사’라는 주장이다. 이 때문에 그는 김정희의 명호를 총 정리한 책의 제목을 『추사, 명호처럼 살다』라고 붙였다. 반면 유홍준 교수는 김정희의 삶과 학문을 대표할 호는 추사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까닭에 그는 김정희의 삶과 학문을 총체적으로 조명한 평전의 제목을 『완당평전』이라고 붙였다. 그렇다면 김정희는 언제부터, 또 어떻게 완당(阮堂)이라는 호를 쓰게 되었던 것일까? 김정희의 삶과 철학, 학문과 예술 세계에서 가장 분수령이 되는 시기는 24세가 되는 1809년(순조 6년)에 동지겸사은부사(冬至兼私恩副使)가 되어 청나라에 가는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 자제군관 자격으로 연경에 다녀온 때다. 청나라에 가기 이전 모든 학문과 예술 분야에서 천재적 기질을 보였던 김정희가 스승으로 모신 사람은 바로 북학파의 두뇌나 다름없던 초정 박제가였다. 박제가만한 포부와 학식과 경륜을 갖춘 대학자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어렸을 때부터 자존심과 자부심이 남달랐던 천재 김정희를 가르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 때문에 불행하게도 1805년 나이 20세 때 스승 박제가가 갑자기 사망하자 김정희는 나라 안에서 가르침을 받을 만한 스승을 결코 만날 수 없었다. 어쨌든 김정희는 박제가를 스승으로 모신 덕분에 일찍부터 북학에 뜻을 두고 학문을 익히고 지식을 쌓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청나라의 학계와 문예계에 관한 소식과 주요 학자와 문사들에 관한 정보를 자주 접할 수 있었다. 그래서 박제가가 세상을 떠난 후 오직 연경에 가서 예전에 스승과 교류했던 청나라의 대학자들을 직접 만나 교제를 맺고 가르침을 받겠다는 소망을 간직한 채 하루하루를 보내다시피 했다. 그러한 소망을 실현할 기회가 스승 박제가가 사망한 지 4년이 지난 1809년 마침내 찾아온 것이다. 그 해 10월28일 한양을 떠난 김정희가 연경에 도착한 후 가장 먼저 만났던 사람은 스승 박제가가 세 번째 연행(燕行) 때 사귄 조강(曹江)이라는 상해 출신의 지식인이었다. 그리고 이 조강을 통해 서송(徐松)이라는 학자를 소개받았고, 다시 서송을 통해 당대 최고의 대학자였던 옹방강과 완원을 만나게 된다. 옹방강과 완원, 이 두 사람과의 만남은 앞서 언급했듯이 김정희의 삶과 학문 및 예술에서 중대한 분수령이 되었다. 김정희 연구의 권위자인 일본인 동양철학자 후지츠카 치카시(藤塚鄰)는 이들의 만남이 19세기 조선의 지성사에서 차지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이렇게 평가했다. “특히 박제가의 제자로 조선 500년 역사상 보기 드문 영재(英材) 완당 김정희가 출현하여 연경에 가서 옹방강(翁方綱)과 완원(阮元), 두 경사(經師)를 알게 되고, 여러 명현들과 왕래하여 청조 학문의 핵심을 잡아 귀국하자 조선의 학계는 실사구시의 학문으로 빠른 진전을 보여 500년 내로 보지 못했던 진전을 보게 되었다.”(유홍준 저, 『알기 쉽게 간추린 완당평전 김정희』, 학고재, 2006. P43에서 재인용) 김정희 이전 18세기 조선 지식인들의 활약상을 감안해보면 약간 지나치다고밖에 볼 수 없는 미화와 찬사지만 어쨌든 후지츠카가 내린 결론대로 김정희는 옹방강과 완원을 만난 이후 지속된 교류를 통해 명실상부 ‘청조학(淸朝學) 연구의 제일인자’로 거듭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옹방강과 완원 중 김정희가 먼저 찾아가 만난 사람은 당시 47세의 나이로 청조학(淸朝學)이라 일컫는 청나라의 학술계를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던 대학자 완원이었다. 연경에 도착한 후 해를 넘긴 김정희는 1810년 1월 태화쌍비지관(太華雙碑之館)으로 완원을 찾아가 사제(師弟)의 도의를 맺었다. 김정희를 만난 완원은 비록 자신보다 22년이나 연하였지만 김정희가 천재적인 자질을 갖추고 있는데다가 이미 높은 학문적 수준에 도달해있다는 사실을 엿보고 크게 놀라는 한편 진심으로 기뻐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이 편찬의 책임자로 참여해 각 권마다 서문까지 썼을 만큼 정성을 기울인 『13경주소교감기(十三經注疏校勘記)』 한 질을 선물로 주었다. 모두 245권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방대한 규모의 서적은 유학의 13경(十三經)에 대해-한(漢)나라에서부터 명(明)나라에 이르기까지-역대 학자들의 저술을 총 정리하고 종합해 놓은 경전 연구의 최고 대작(大作)이었다. 그밖에도 완원은 청조학, 즉 고증학과 금석학의 수많은 이론과 학설을 전해 주었는데, 김정희는 그것들을 모두 기록으로 남겨 조선으로 돌아온 후 평생 학문의 지침서로 삼았다고 한다. 완당(阮堂)이라는 호 역시 이때 김정희가 완원과 맺은 사제의 인연으로 탄생했다. 완원(阮元)에서 ‘완(阮)’자를 따와 김정희가 마침내 자신의 당호를 ‘완당’이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완당이라는 호의 탄생 배경에 대해서는 크게 이론이 없지만, 이 호가 완원이 김정희에게 주어 사제의 인증을 확실히 하였다는 주장과 함께 김정희의 자작(自作)이라는 의견 역시 제기되고 있다. 여하튼 완원의 이름에서 따와 자신의 호를 삼았을 정도로 김정희의 삶과 철학, 학문과 예술 세계에서 완원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었다. 첫 번째 스승 박제가와의 인연은 15세 무렵부터 20세까지 불과 5년 정도였던데 반해 완원과의 교류는 이때부터 완원이 사망한 1849년까지 무려 40여 년 가까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김정희가 당시 연경에서 만났던 또 한 명의 스승인 옹방강은 이미 나이가 많아 1818년 사망했기 때문에 완원이 김정희의 삶과 학문에 끼친 영향력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완원을 만나 배움의 기쁨을 한껏 만끽했던 김정희는 그 흥분이 미처 가라앉기도 전인 1월 29일 청나라의 원로학자인 옹방강을 찾아가 또한 사제의 도의를 맺었다. 당시 나이 78세였던 옹방강은 명실상부 청나라 학계를 대표하는 원로학자였다. 특히 옹방강은 고서화와 희귀 금석문(탁본)과 전적 수집에 남다른 관심과 탁월한 수완을 보여 ‘석묵서루(石墨書樓)’라고 이름 붙인 자신의 서고에 무려 8만 점에 달하는 수장품을 보관하고 이를 학문 연구의 자료로 활용했다고 한다. 옹방강은 김정희에게 이 서고를 마음껏 둘러보도록 허락했고 김정희는 조선에서는 평생 구경할 수 없는 진귀한 서적과 금석학의 자료들을 직접 보고 기록으로 남겼다. 또한 완원이 그랬던 것처럼 옹방강 역시 김정희에게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여러 서적과 서화는 물론 귀중한 금석문의 탁본까지 선물로 주었다. 더욱이 완원과의 만남에서 ‘완당’이라는 호를 얻었던 것처럼 김정희는 옹방강과의 만남을 통해 ‘보담재(寶覃齋)’라는 호를 얻었다. 즉 소동파를 흠모했던 옹방강이 자신의 서재 이름을 ‘소동파를 보배롭게 여기는 서재’라는 의미로 ‘보소재(寶蘇齋)’라고 한 뜻을 좇아 김정희는 ‘담계(覃溪) 옹방강을 보배롭게 여기고 받드는 서재’라는 뜻으로 자신의 서재 이름을 ‘보담재(寶覃齋)’라고 하고 또 하나의 자호(自號)로 사용했다. 이 ‘보담재’라는 호는 오늘날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사실 당대의 사람들에게는 추사나 완당과 더불어 김정희를 대표하는 또 다른 호로 크게 대접받았다. 심지어 최준호씨는 “사실 추사가 중국 북경에 갈 때까지 사용한 명호는 이름과 자를 제외하곤 한 두 개가 고작이었는데 중국 연경에서 보담주인(寶覃主人)이란 명호를 새롭게 얻게 되었다. 이는 추사가 귀국한 후 보담재주인, 보담재, 보담재인 등의 명호를 쓰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바야흐로 명호 보담주인으로부터 추사의 명호벽(名號癖)이 시작된 것이다. 이후 추사의 명호는 전 세계에서 으뜸이자 온갖 호화찬란한 면모를 지니게 되었다.”(최준호 저, 『추사, 명호처럼 살다』, 아미재, 2012. P121)라고까지 주장하고 있다. 평생 수백 개의 호를 사용한 김정희의 이른바 명호벽(名號癖), 즉 명호에 대한 애정과 집착(?)은 ‘담계 옹방강을 보배롭게 여기고 섬긴다’는 뜻의 보담(寶覃)의 작호(作號)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김정희의 명호 인생에서 보담재가 차지하는 비중이-추사나 완당 못지않게-그만큼 컸다는 얘기다. <계속> 추사(秋史) 김정희⑤ 삶과 학문·예술세계 대변하는 호 ‘완당(阮堂)’
[한정주=역사평론가] 이렇듯 청조학의 일인자이자 최고 권위자였던 완원과 옹방강을 만나 평생에 두 번 다시 얻기 힘든 소중한 인연을 맺고 조선으로 돌아온 김정희는 이후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학문과 예술의 경지를 성취할 수 있었다. 이러한 까닭에 김정희는 훗날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시절 자신의 초상에 붙인 글에서 옹방강과 완원과 자신의 관계를 이렇게 표현하기까지 했다. “담계 옹방강은 ‘옛 경전을 탐닉한다’고 말했고, 운대(雲臺) 완원은 ‘다른 사람이 그렇다고 말하더라도 나 역시 그렇다고 말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 두 분의 말씀을 좇아 나의 평생을 다 바쳤다.” 『완당전집』, ‘또한 소조(小照)에 스스로 붙여(自題小照又)’ 그래서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유홍준 교수는 청나라에서 조선으로 돌아온 이후부터 이제 김정희는 ‘추사에서 완당’으로 탈바꿈했다고 하면서 “30대로 들어서면 김정희의 호는 추사보다도 완당으로 더 널리 불리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30대 이후 김정희가 완원의 청조학을 익히고 연구해 가히 ‘청조학의 제일인자’로 거듭났기 때문에 ‘완당’이라는 호에서 그의 정체성과 진면목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김정희의 여러 기록과 서화 작품들을 살펴보더라도 그가 ‘추사’라는 호보다는 ‘완당’이라는 호를 더 애호(愛好)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김정희가 완당이라는 호를 얼마나 아꼈는가를 확인할 수 있는 구체적인 사례가 다름 아닌 ‘세한도(歲寒圖)’다. 김정희의 고고한 기상과 정신세계를 집약해놓았다고 평가받는 ‘세한도’는 그의 생애 최고 걸작품이었다. 제주도에 유배온 지 5년째 되는 1844년 김정희의 나이 59세 때 제자인 우선(藕船) 이상적에게 그림을 그려주고 화제(畵題)를 써준 ‘세한도’는 이미 최고의 경지에 오른 대학자이자 예술가였던 김정희의 학문 세계와 예술의 미학을 가감 없이 들여다볼 수 있는 명작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김정희는 수많은 호를 제쳐두고 ‘완당’ 혹은 ‘완당노인’이라는 호를 사용했다. 먼저 그림의 제목에 해당하는 화제(畵題)에서 김정희는 ‘歲寒圖 蕅船是賞 阮堂(세한도. 우선시상. 완당)’이라고 썼다. 이 화제를 풀이하면 ‘세한도. 우선(蕅船) 이 그림을 감상해보게. 완당’이라는 뜻이다. 이상적은 호(號)가 우선(藕船)인데 김정희는 이를 우선(蕅船)이라 바꿔 쓴 것이다. 그림의 제목에 ‘완당’이라고 쓰고 낙관을 찍은 김정희는 그림에 붙이는 글, 즉 ‘발문(跋文)’에서는 ‘완당노인’이라는 호를 사용했다. “지난해에 『만학(晩學)』과 『대운(大雲)』 두 책을 보내주고 올해에는 우경(藕畊)의 『문편(文編)』을 보내오니, 이러한 일은 모두 세상에서 흔히 있는 일이 아니다. 천만 리 머나먼 곳에서 구입해오고, 그것도 여러 해가 걸려서 얻은 것으로 일시에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세상은 도도히 흐르는 물결처럼 오직 권세와 이익만을 좇아 따라가서 마음을 기울이고 공력을 쏟아 붓는 것이 상례인데 권세와 이익에 붙지 않고 바다 밖에 있는 초췌하고 메마른 나 같은 사람에게 돌아왔도다. 태사공(太史公: 사마천)이 말하기를 ‘권세와 이익으로 합한 자는 권세와 이익이 다하면 서로 멀어진다’고 하였다. 그대 역시 세상의 도도한 흐름 가운데 있는 한 사람인데 도도히 권세와 이익의 바깥에서 초연히 스스로 분발하니 권세와 이익으로 나를 보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태사공의 말이 잘못된 것인가? 공자가 말하기를 ‘날이 차가워진(歲寒) 다음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여전히 푸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사계절 내내 시들지 않는 것이니 날이 차가워지기(歲寒) 이전에도 한결같이 소나무와 잣나무이고 날이 차가워진(歲寒) 다음에도 한결같이 소나무와 잣나무이다. 그러나 특별히 성인(聖人)은 날이 차가워진(歲寒) 다음을 칭찬하였는데, 지금 그대가 나를 대하는 것이 이전이라고 해서 더한 것이 없고 이후라고 해서 덜한 것이 없다. 이전에 나를 대한 것으로 말미암아 그대를 칭찬할만한 것은 없다고 해도 이후로 나를 대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그대는 성인이 칭찬한 것으로 역시 칭찬할 수 있지 않겠는가. 성인이 특별히 칭찬한 것은 단지 날이 차가워진 다음에 시드는 것이 아니라 정조(貞操)과 굴하지 않는 절개에 있을 뿐이다. 아! 쓸쓸하고 슬픈 이 마음이여!! 완당노인(阮堂老人)이 쓰다.” 세한도를 그릴 당시 김정희는 비록 유배객의 불운한 신세였지만 이미 조선과 청나라 두 나라에서 ‘최고의 청조학자(淸朝學者)이자 서화가(書畵家)’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59세였던 김정희의 학문과 예술은 완숙의 수준을 넘어서 어느 누구도 넘겨볼 수 없는 독보적인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이 때문에 이상적이 스승이 그려준 ‘세한도’를 가지고 청나라를 방문해 그곳의 이름 높은 학자와 문사들에게 보여주자 아낌없는 환호와 찬사가 쏟아졌고, 그것으로도 모자라던지 무려 16명이 앞 다투어 ‘세한도’에 제찬(題贊)을 썼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당시 김정희의 국제적 명성과 권위가 어느 정도였는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런 김정희가 일생의 명작으로 남긴 세한도에 완당이라는 호를 사용했다. 그렇게 한 뜻이 무엇일까? 그것은 다른 어떤 호보다 자신의 삶과 학문 및 예술 세계를 대변해주는 호가 다름 아닌 완당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표현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렇게 본다면 김정희의 생애 전체를 살펴볼 때 추사라는 호보다는 완당이라는 호가 그의 뜻과 철학에 더 부합하지 않나 하는 결론을 조심스럽게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비록 일반 사람들에게 익숙한 호는 ‘추사’지만 김정희를 대변하고 대표하는 호는 ‘완당’이 더 합당하다는 얘기다. 따라서 ‘추사인가 아니면 완당인가’라는 호 대결(?)은 ‘완당’의 판정승이라고 하겠다. <계속> 추사(秋史) 김정희⑥ 조선의 서예와 차 문화의 선도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