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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추의 세월
엊그제 꽃피고 새우는 봄인가 싶더니 유난히도 비가 많이 내리던 여름이 가고 모든 것을 다 주고 떠나려하는 가을의 끝자락에 와 있다. 가을빛이 하늘과 바람의 틈에서 사과와 감의 색을 붉게, 그리고 노랗게 물들이며, 가만 두어도 떨어질 나뭇잎들을 바람은 마구 흔들어
대는 계절이다.
나이 칠십과 팔십의 중간에서 로즈마리라는 허브 식물에 매력을 느껴 그 걸 기르려고 시골에 귀향이 아닌 귀향을 한지도 나이테를 감돌 듯 세월은 흘러 어언 4년 을 뒤로하려 한다. 나는 그 흐르는 세월 속에서 수많은 고통을 겪으며 로즈마리를 잘 기르려 무던히도 몸부림치는 삶이었다.
가을걷이가 끝나가는 밭둑엔 그렇게도 귀찮게 하던 바랭이 풀과 기타 잡초들이 가을의 마지막 양광을 받으며 야위어가고 있다. 나는 그 속에서 지나온 세월들을 뒤 돌아보니 긍지와 회한이 점철된다. 긍지는 아픈 몸으로 잘 버티었다는 것이고, 회한은 로즈마리를 왜 기르기를 했던 가이다.
초년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나는 사정없이 허룸한 늙은 인생이어서 이 말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 한다 그래서 파란 잎가에 드리워진 추색을 붙들고 울고 싶은 심정인 것은 부인 할 수 없음을 어찌하랴!!
나무들은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하게 너울들을 벗을 채비들을 하고 있다.
그렇게도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많은 비가 내렸어도 흐르는 시간에 따라 어김없이 찾아온 가을, 나뭇잎 가에 드리운 추색이 세월의 무상을 말해주고 있다. 높은 담벼락에 담쟁이덩굴 잎에도 태양이 핥고 간 자리인지 세월이 딛고 간 발자국인지 그 색이 붉으스래 하게 변해가고 있다.
아침저녁으로 불어오는 찬바람이 밭가에 파란 단감의 그 떫디떫은 맛을 어느새 거둬 갔는지 단맛을 내며 노랗게 물들어 가고 사과는 빨갛게 모과는 노랗게 색을 달리하며 영양분을 저장하기에 바쁘다. 시원한 바람과 드높은 하늘 밑에 온갖 곡식들의 풍요가 영글어가고 있음은 대자연의 섭리가 빚은 가을빛의 신비로움이다.
내가 로즈마리라는 식물을 기르게 된 동기는 허부에 대한 이론서를 발간하면서 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허브라는 식물은 향초라고 알고들 있다. 하지만 유럽에서는 과일, 곡식, 채소 등을 허브로 총칭한다. 로즈마리라는 식물은 드물게 나무 자체에서 향기가 날 뿐만이 아니라 그 향기가 머리를 맑게 하는 작용을 한다.
이 식물에 매력을 느꼈을 뿐 아니라 분재로 만들어, 그것을 기르기 한 사람에게 향기를 맡게 해 그 효용을 십분 활용토록 하고자 해서 시작 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시작한 것이 여서 이 분야에 자문을 얻을 수가 없었기에 이론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모종을 구입해 노지에 기르기를 했다.
그런데 이것은 이론과 실제가 너무 달랐다. 생태적으로 열대식물이기 때문에 기후 차이가 있었다. 첫 해 겨울이 와서 월동에 대해 고민을 안 할 수가 없었다. 허브 시험장 전문가 박사를 초대해 월동에 대해 자문을 구하니 스마트폰으로 기후 즉 온도를 체크해 보더니 월동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해 비닐 터널을 하지 않았다.
12월의 추위에 나무들의 파란 잎 색이 시커멓게 변하기 시작했다. 이때의 나는 미치고 환장을 할 것 같았다. 이듬해 봄 나무들이 전부 죽고 말았다. 다시 하우스에 있는 나무들에서 모종을 삽목하기 시작했다. 이왕지사 시작한 것 제대로 하자고 5만여 수를 삽목을 해 잘 기르고노지와 하우스에서 키우기 시작했다.
문제는 하우스를 임대 하는데 소위 말해서 바가지를 많이 썼었다. 쉽게 말해서 촌닭이 읍 닭 눈알을 빼먹는 격이었다. 그리고 일하는 사람들이다. 옛날 시골 사람들의 순수한 면만을 생각하고 일을 시작 했던 것이 큰 실수였다. 분재로 만들려면 3년은 키워야 밑동이 엄지손가락만 하게 큰다. 그래야 분재수로 만들 수가 있다.
인부 품 삵이 새참과 중식을 제공하고 여자는 칠만 원 남자는 십이만 원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인부들의 손을 빌려야 하니 경비가 생각기보다 많이 지출이 됐다.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려면 부부간에 해야 한다. 그래서 인건비 따먹기를 해야 수지 타산이 맞는다고 본다.
위에서 옛날 시골 인심이 아니라고 했다. 남자들은 그런대로 보아줄 만 한 대, 여자들에 대해서는 좀 비판을 해야 내가 겪은 것에 대한 분이 풀릴 것 같다. 지난 날 여인들은 순박한 면이 있었는데 지금의 여인들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소위 말해서 발랑 까지다 못해 정말이지 여자의 순수한 면이란 없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다.
30년 전 프랑스 르몽드지에 한국에는 윤락녀들이 3백만 명이란 기사가 실렸었다. 여기에 더해 서울대 사회학과 이온죽 교수는 실제로 더 될 거라고까지 했었다. 여기서 윤락녀들이 가정으로 파고 든 결과의 피해는 실로 막대 하다고 본다. 특히 교육 문제라고 생각하며 더해 지금 우리나라 여인들은 다수 부끄러운 줄 모르고 이혼을 밥 먹듯이 하고 하려한다. 다시 말해서 참을 줄을 모르고 이혼 이혼의 노래들을 부른다. 이런 여인들의 과거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점심을 먹으러 가면 남자들은 나를 어렵게 대한다. 그런데 여자들은 일부를 제외 하고는 그렇지를 않는다. 보편적으로 점심은 칠천 원이다. 그런데 남자들은 의례히 칠천 원짜리를 먹을 줄 아는데, 여자들은 메뉴가 구구 각색이다. 어디가면 오리 탕이나 로스를 잘합디다가 아니면 염소 탕 을 잘한다고 이것들이 제각각이다.
물론 비싼 음식들을 사주면 좋을 줄 알지만 지불할 사람의 주머니 사정도 생각 해 주어야 할 것 아니냔 말이다. 위에서 윤락녀에 대해서 쓴 것은 바로 남의 주머니 사정은 생각지 않고 내가 농사에 농자도 모른다고 바가지를 씌우려는 행동을 하는 여자들 중 거듭 과거를 의심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솔직한 내 심정이다.
그리고 요즘 시골에는 과부들이 많다. 100세 시대라 남녀 간의 수명이 길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시골에는 현재까지는 여자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일을 같이 하면서 인부들을 관찰해 본다. 남편들이 있는 여자들은 행동들이 예의가 있다. 그런데 과부들의 일부는 정말이지 여자이기를 포기한 것 같았다.
점심을 먹으러 가면 거의가 비싼 것 먹으러 가자는 여자들은 과부들이다. 그리고 과부라도 출신지를 잘 모르는 외지에서 시집와서 살다가 혼자되어 사는 여자들이 예의가 없다. 주변 마을에서 시집와 살다가 혼자된 분들의 과거는 어느 정도 알 수가 있다. 그래서 출신을 잘 모르는 여인들의 과거가 의심스럽다고 의심을 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반문해 본다.
혹자는 홀로 과부된 것도 억울한데, 좀 뭐한 여인으로 매도하는 것은 너무하지 않느냐고 할 수도 있다. 글 쓴김에 보태면 비싼 점심을 먹자하는 일부의 과부들은, 남자들이 꼬득일려고 맛집으로 데리고 위 아래로 먹여주니 그것에 버릇이 든 결과가 아닌 가 추측해 본다.
아무튼 4년여 동안 인부들에게 시달린 것의 감정이 별로 좋지 않아서 이런 글을 쓰게 되었고 연구 대상이 아닌 가 싶다. 5만 여 그루의 나무를 잘 키웠다. 그리고 겨울이 와 월동을 하려고 둑에 활촉을 박아 비닐을 씌우려 하니 단골로 일하는 아주머니가 나무 주변에 왕겨를 깔아 주어야 한다기에 왕겨를 깔았더니 뿌리들이 산소 공급이 원활치 않아 또 시커멓게 타 죽는다. 그 여자 말을 듣는 것이 큰 잘못이었다.
그 여인은 소위 말해서 일에는 여장부이다. 웬만한 남자들 뺨칠 정도로 일을 잘하고 농사일에는 일가견이 있다. 이것은 그녀의 경험의 결과이다. 그래서 그 여자 말이라면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나무를 죽이고 말았다. 그녀는 다른 인부보다 인건비를 이만 원씩을 더 주고 새참도 두 세배를 더 먹는다.
다행이 삽목을 해 놓은 것이 있어서 이듬 해 봄 다시 노지와 하우스에 심었다. 그런데 200평 하우스 두 동에 물이 잘 나오지 않아 겨울에 다시 비닐을 씌울 요량으로 전부 위 비닐을 뜯어 벗겨 버렸다. 그런데 올해 유난히도 비가 많이 와서 가지들이 다 썩어 버렸다. 이것들을 분재로 만들고 했는데 뭐 사람도 죽고 사는데 그래도 내가 살아있는 것에 위안을 해야 했다.
하우스에 나무들을 옮겨 심은 다음 풀들이 많이 자라 인부들을 시켜 두 번이나 풀을 뽑고 나무들 주변에 복합 비료를 주었었다. 그런데 나무들은 죽는데 풀들은 비료를 먹으니 살판이 났다고들 잘 자란다. 아무래도 내 팔자엔 나무 기르기는 포기 하라고 하는가보다. 하고 이제 앞발 뒷발 다 들고 로즈마리여!! 안녕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포기를 하니 마음은 편하다.
삽상한 바람과 드높은 하늘 사이 입추를 만나고 온 처서에서 논의 벼가 익어 가는가 싶더니 추분을 지난들에는 어느덧 밭가에 심어진 호박덩굴 사이에 개 쑥부쟁이와 온갖 잡초들이 바람에 흔들거린다. 사람은 늙을수록 보기가 싫지만, 호박은 늙을수록 영양이 많다는 호박이 누렇게 익어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흔히들 멸치가 고기이고 호박꽃이 꽃이냐고들 한다. 그러나 이것은 호박에 대한 모독이고 더 나아가 호박의 외모만 보고 그 진면목을 모르고 탱자하며 나불대는 것이다. 벌, 나비 그리고 온갖 곤충들이 호박꽃을 제일 좋아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고작 하루 이틀 피었다가 지는 양귀비꽃이 최고라고들 한다.
내 말이 틀리나 맞나를 알려면 기회가 있을 때 호박꽃 속에 들어있는 벌을 한번 관찰 해 보시라 아무리 벌들이 자기 속에 들어와 괴롭혀도 넉넉하게 대해 준다는 것을 볼 수 있음이다. 그렇게 벌 나비에게 꿀을 제공 하고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큰 열매를 가을이면 달린다. 이제 그 호박위에 가을비가 내리니 쓸쓸하기만 하다.
나는 부모 복이 없어 또래들이 책보 메고 학교에 갈 때 지게지고 산에서 나무하고 들에서 꼴 베느라 학교에 못 갔다. 그래서 가방 끈은 무지하게 짧다. 하지만 농촌의 실상은 어느 누구 보다도 잘 알 수 있다. 청소년 시절에 세경으로 쌀 세가마니를 받고 머슴을 일 년 살아 보았다.
또래들은 먼 산에 아지랑이 가물거리면, 거의가 힘들게 머슴 사는 것을 포기하고 객지로 도망들을 갔다. 나는 이를 악물고 고난을 참으며 자연과 벗하며 그야말로 주경야독 즉 낮에는 주인이 시키는 대로 일하고 밤에는 이장 집 누나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공부를 했다. 사춘기 때 유난히도 댕기 머리가 길고 피부가 고운 누나의 마음이 좋았다.
머슴을 일 년간 살아보니 인간은 배워야 한다는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세경으로 받은 쌀 세가마니를 밑천으로 중학교를 헤어진 운동화를 신고 왕복 40리 길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혼자서 산길을 걸어 다녔다. 인자하신 큰어머님이 새벽에 밥을 해 주신 덕분에, 산등성이에 올라서서 학교 운동장을 바라보아서 학생들이 운동장에 있으면 지각을 안했다는 안도의 한 숨을 쉬었다.
어쩌면 그 머슴살이 경험 때문에 허부 기르기를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크나 큰 잘못이다. 육체적으로는 말 할 것도 없고 경제적으로도 많은 피해를 보았다. 그러나 어쩌랴 이미 버스가 떠난 뒤 손드는 꼴인 것을 그래도 머슴살이 책을 쓸 수 있는 것은 얻었지 않았느냐고 반문해 본다.
과학 영농을 한다면서 한다는 짓이 겨우 비료와 농약이다. 우리 인간과 결부시켜 보면 비료는 영양제이고 농약은 항생제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 토지는 영양제가 필요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우리 조상들은 퇴비만 주어도 농사를 지을 수 있었을 뿐 많이 아니라 화강암 토양에는 거름만으로도 작물을 충분히 기를 수 있다.
그런데 과학 영농을 한답시고 인산과 요소 성분이 많이 들어간 복합 비료를 일본에서 배워와 만들어 쓰고 있다. 사실 일본의 토양은 화산재 토양이어서 비가 오면 땅이 물기를 머금지 못하고 슬슬 밑으로 흘려 내리니 그 부족한 인산을 보충해 주어야 한다. 우리 토양에 맞지 않는 비료를 주니 우리 땅은 조금씩 죽어가고 있다.
과거 4~50년 전에는 지금처럼 비료와 농약으로 농사를 지은 것이 아니라 풀을 베어다가 숭굴숭굴 작두에 썰어서 소나 돼지의 배설물이나 사람의 인분과 섞어서 발효 숙성 시켜서 그것을 작물을 심거나 씨를 뿌리기 전에 뿌려서 농사를 지었었다. 나는 실제로 머슴을 살면서 체험을 했기 때문에 자세히 쓸 수가 있다.
지난 날 머슴살이를 하면서 축적해 놓은 농촌의 4계절의 풍습과 풍광을 10여 년을 걸쳐 써 놓았는데, 풍습들의 사진을 덜 마련이 되어서 발간을 못하고 있는데 내년에는 얼굴을 보이려 한다. 사실 우리나라는 머슴의 문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거엔 머슴살이 외에 일자리란 거의 없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회사 생활과 같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머슴살이 했던 것을 부끄럽게들 생각들을 한다. 그래서 숨기고 있다. 나더러 쪽 팔리니 숨기라고들 한다. 얼마나 자신이 없으면 그러느냐고 반문하고 싶다. 사업 실패와 부도 그리고 병든 몸으로 노숙을 해도 내 마음에는 항상 희망이 있었고 또 일어 설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시골에 내려와 작물 기르기를 하다가 실패로 경제적으로 큰 손해를 보았지만, 그 져 사람도 죽고 사는데 이깟 것 정도야 할 수 있는 것은 머슴살이에서 그 힘들었던 경험들이, 옹이가 지도록 등짐 진 세월들을 생각 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버지가 머슴을 살아 충북에서 제일가는 부를 이루어 물려주었는데, 그의 자서전을 만들어 주면서 자기 아버지의 머슴살이를 쓰려하니 한사코 말리더란 말이다.
이제 가만 두어도 시들 잡초들과 고춧대 고구마 잎들을 자연 제초제인 서리가 내려 몰골이 앙상해 지려는 때에 차를 몰고 이 풍광에 마음을 빼앗겨 하루에도 몇 십km씩 돌아다닌다. 서울에서는 맛 볼 수 없는 이 행복을 그 누가 알리오. 참으로 말로 표현키 어렵다 하겠다.
해마다 겨울이 오면 추위에 떨고 다니는 조카가 안쓰러워 눈시울을 적시던 큰어머님께 효도를 못한 것이 내 가슴에 회한과 그리움으로 남음을 어찌 하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