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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내가 택한 나의 종이다!”
첫째주일 |
□ 이사야 42:1-9 □
차준희 (순신대학교・구약학)
I. 본문 사역
1절 “보라, 내가 붙들어 주는 나의 종이다.
내 마음에 드는 내가 택한 사람이다.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으니
그가 이방 민족들에게 판결을 내릴 것이며
2절 그는 소리치지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의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지도 아니 할 것이다.
3절 그는 꺾어진 갈대도 부러뜨리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아니하고
그는 진실하게 판결을 내릴 것이다
4절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꺾이지 아니하고
마침내 땅위에 판결을 바로 세우리니
섬들이 그의 가르침을 고대할 것이다.“
5절 하늘을 창조하여 펼쳤고,
땅과 그 소산을 베푸셨고
땅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셨고
땅위에 걸어다니는 자들에게 영을 준
하나님 야웨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6절 “나 야웨가 의로 너를 부르고
너의 손을 붙잡고
너를 지켜 주어서
너를 백성을 위한 언약과 이방 민족들을 위한 빛으로 삼았다.
7절 이는 소경들의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자들을 감옥에서,
흑암속에 사는 자들을 영창에서 이끌어내기 위함이다.
8절 나는 야웨다. 이것이 나의 이름이다.
나는 나의 영광을 다른 자에게 넘겨주지 않고,
나의 찬송을 우상들에게 내어 주지 아니할 것이다.
9절 보라. 이전의 일들은 이루어졌다.
내가 새 일들을 알려준다
그 일이 싹이 나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들려줄 것이다“
II. 본문 사역에 대한 풀이
위 사역에서는 히브리어 맛소라 본문 Der Masoretische Text : MT 이 억양 부호와 엑센트 부호로써 한 절을 여럿으로 나눈 것과 히브리어 본문에 나타난 단어의 순서를 가능한 한 살려 보고자 하였다. 각 절마다 첫 칸부터 쓰여진 것이 있고 한 칸 들어가서 쓰여진 것이 있다. 첫 칸부터 나온 부분이 매 절마다 두개씩 나오는데, 이것은 각각 각 절의 전반부(a)와 후반부(b)를 나타낸 것이다. 학자들이 각 절을 전반절과 후반절로 나누는 것은 히브리어 맛소라 본문에 나오는 엑센트 부호 ⌈아트나흐⌋(Atnach ∧)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서 위 사역의 모든 절을 전반절과 후반절로 나누어 볼 수 있도록 배치시켰다.
1절의 첫 낱말 ⌈헨⌋(ן : 보라)은 칠십인역 본문 Septuaginta : LXX 에서는 야곱 Ιακωβ 이라는 낱말로 대치되어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또다른 칠십인역 헥사 플라적 비평 논문 Hexaplarishe Rezen-sion der Septuaginta 을 포함하여 이외의 히브리어 필사본들 MSS 에서는 ⌈헨⌋이라는 낱말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은 맛소라 본문의 형태가 칠십인역 논문의 그것보다 원문 Urtext 에 가깝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러한 결과는 마태복음 12장 18절에 의해서도 확인된다.1)
맛소라 본문의 6절 후반절 첫 번째 낱말은 ⌈웨에챠레카⌋ : 그리고 나는 너를 지켰다”이다. 이 낱말의 어근인 ⌈나챠르⌋ רצנ 는 “주시하다, 보호하다, 방어하다, 지키다”2)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런데 칠십인역 본문은 ⌈카이 에비스크루소 세⌋ και ένισχύσω σε 라고 읽고 있다. 그 뜻은 “그리고 나는 너를 강하게 할 것이다”이다. 엘리거 K. Elliger 는 칠십인역 본문의 단어에 근거하여 원문의 본문이 ⌈야챠르⌋ רצי” 일 것이라고 결론짓는다.3) 야챠르는 “형성하다, 만들다. 창조하다”4)라는 뜻이다. 그러나 맛소라 본문이 문법과 의미에 있어서 문제가 될 것도 없고, 또한 굳이 변경하여야 할 필요성도 없어 보이는데다가, 불가타 역본 Vulgata 도 맛소라 본문을 지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에트 세르봐뷔 테⌋ et servavi te : 그리고 나는 너를 돕는다) 맛소라 본문의 낱말을 원문에 가까운 단어로 보아야 한다.5)
III. 본문의 문학 형식과 짜임새
이 본문은 이른바 야웨의 종의 노래 sog. Lieder vom Ebed Jahwe 혹은 Gottesknecht 에 속한다. 물론 엄격한 의미에서 야웨의 종의 노래는 “노래”하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을 따라서 그렇게 부르기로 한다. 제 2 이사야서(이사야 40-55장)에서 처음으로 이 문학 형식을 추려 낸 사람은 둠(B. Duhm : 1847-1928)이다. 그는 이에 속한 본문으로 42장 1절-4절, 49장 1절-6절, 50장 4절-9절, 52장 13절-53장 12절을 꼽았다.6) 오늘의 본문은 이른바 첫 번째 야웨의 종의 노래에 해당된다. 42장 5절-9절의 본문이 42장 1절-4절의 연속된 본문인지 아니면 후대에 한 묶음으로 취급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된다.7) 여기서는 42장 1절-9절 전체를 한 단위로 취급하여 주석하고자 한다.
이 본문의 짜임새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보라, 나의 종이다. (1절-4절)
1) 종의 추천과 무장 (1절)
2) 종의 임무 수행 (2절-3절 전반부)
3) 종의 성공적 임무 수행 (3절 후반부-4절)
2. 내가 의로 너를 부른다(5절-9절)
1) 창조주 하나님 (5절)
2) 종의 사명 :
“백성을 위한 언약”과 “이방민족들을 위한 빛”(6절-7절)
3) “새 일들을 알려준다”(8절-9절)
IV. 본문의 풀이
1절 : 종의 추천과 소망
1절-4절은 원래 하나의 독립된 문학 단위를 이루고 있었던 것 같다. 이 단위의 문학 양식은 “임명의 말 Designationswort ”8)이라기 보다는 “추천의 말 Präsentationwort ”9)로 보는 것이 내용상 타당 한 것으로 보인다. 야웨가 자신의 종을 공개적으로 소개하면서 추천하는 것이다. “보라. 내가 붙들어 주는 나의 종이다. 내 마음에 드는 내가 택한 사람이다”. 이 추천의 말은 예수가 세례 받은 후 하늘로부터 들려 온 소리와 좋은 유비를 이룬다.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막 1:11)10)
야웨는 천상의 왕궁 회의 der himmlische Hofstaat 에서 천상의 존재들에게 야웨의 종을 추천한다.11) 이것은 제 2 이사야의 소명 기사에 해당되는 사 40:1-11에서 야웨가 천상의 존재들에게 포로로 복역 중인 이스라엘을 위로하라(1절)고 명령하는 천상 회의 장면과 유사하다. 제 2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기(기원전 587년-539년)에 활동하였던 무명의 예언자를 일컫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 2 이사야서에 속한 본문들(사 40-55장)은 바벨론의 포로기라는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보라” : 이 단어는 오랫동안 기다렸던 인물의 등장을 나타내는 지시어이다.12)
“나의 종” : 히브리말 ⌈에베드⌋ ד는 “종(곧 노예가 됨 : slave), (노예가 아니라 일시적인) 하인 servant , (군대의) 부하 subordinate , 신하 minister 등”13)을 뜻한다. 이 낱말은 첫째 다른 사람에게 속하여 있기 때문에 자유롭지 못함 Unfreiheit 을 의미하고, 둘째, 힘있는 주인에게 속해 있기 때문에 주인의 보호 Schutz 아래 놓여 있음을 의미하기도 하고, 셋째, 주인을 대신하는 대표 Stellvertretung 14)를 뜻하기도 한다. 이 본문의 종은 사람의 종이 아니라 야웨의 종을 말하는 것이다. 야웨의 종은 어떤 사람에게도 또한 자기 자신에게 조차도 매여 있지 않은 오직 야웨에게만 매인 자이다. 야웨의 종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역사를 지배하고 계시는 야웨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자이다. 동시에 야웨의 종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통치권 가운데 일부를 위임받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신적 통치권을 갖고 있는 자이다.
야웨의 종은 야웨가 자신의 자유의지로 선택한 자이며 (“내 마음에 드는 내가 택한 사람이다” ), 그러기에 야웨가 그를 굳게 붙잡아 준다 (“내가 붙들어 주는 나의 종이다”). 야웨는 그 종을 천상의 존재들 앞에서 야웨의 종으로 당당히 추천한다(“보라, 나의 종이다”).
1절 전반부는 야웨의 종을 소개함과 동시에 추천하고 있으며, 1절 후반부는 그를 무장시켜서 구체적으로 임무를 맡긴다.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으니” : 히브리말 ⌈루아흐⌋ וּר 는 “숨 breath , 바람 wind , 영혼 spirit ”15)을 뜻한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의 힘, 능력 Gotteskraft 으로 볼 수 있다.16) 이것은 엘리야와 같은 예언자에게 임하였던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낸다. 야웨의 종은 과거 문서 이전의 예언자와 같이 하나님의 영으로 채움을 받는다.
“이방 민족들에게 판결을 내리리라” : 본문 사역에서 “판결”로 번역된 히브리말은 ⌈미쉬파트⌋ ט 이다. 이 낱말은 여러 가지로 번역이 가능하다. 예를 들면, “중재에 의한 판결 decision by arbi-tration, 법적 결정 legal decision, 법적 소송 legal case, 소송 lawsuit , 법적 권리 legal claim , 일치 conformity , 공평 justice ”17)등으로 번역된다. 이 낱말은 오늘의 본문 1절, 3절, 4절에서 세 번이나 언급된다.18) 여기에서 이 낱말은 베스터만과 엘리거가 이미 지적하는 바와 같이 “법에 의거한 판단 혹은 판결 Rechtsurteil oder Rechtsentscheid ”로 볼 수 있다.19) 이 판결은 억압하는 나라 바벨론에게는 “심판 판결 Strafurteil ”이요, 동시에 억압당하는 이스라엘과 이스라엘과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바벨론의 종살이하는 이방 민족들에게는 “사면과 은혜의 판결 Begnadigungsurteil ”이다.20) 이것은 먼저는 이스라엘을 향한 야웨의 위대한 구속 행위에 해당된다. 이 구속 행위의 범주에 함께 억압당하는 이방 민족들도 포함된다. 야웨의 구속 지평은 이스라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이방 민족들에게까지 미치는 전세계를 포함하고 있다.
“판결을 내리리라”는 낱말 연결은 희귀한 형태로, 그 뜻은 “판결을 관철시키다, 혹은 알게 하다”21)로 볼 수 있다. 야웨의 종은 이스라엘을 포함한 이방 민족들에게도 야웨의 구원 결정을 선포하여야 한다.
2절-3절 전반부 : 종의 임무 수행
2절은 야웨의 종의 임무 수행 방식을 기록하고 있다. 한 때 이 본문은 야웨의 종이 병들었거나 선포 금지령을 받거나 혹은 감옥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그의 활동이 저지된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보았던 적이 있다.22) 그러나 이 구절은 예언자 아모스로부터 시작하여 포로기 이후에 활동한 에스겔에 이르기까지의 이전의 예언자들의 활동과 야웨의 종의 그것이 대조되는 것을 보여준다. 즉, 야웨의 종은 예언자들이 행하였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행동한다.23)그는 이전 예언자들의 행동 방식을 사용하지 않는다. 예언자들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큰길이나 성문에서 큰 소리로 외쳤다. 예레미야의 성전 설교는 좋은 본보기가 된다(렘 7:1-15; 26장). 그러나 “야웨의 종은 소리 치지도 않고, 그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는다. 그의 소리가 거기에서 들리지 않는다” 왜 그렇게 하였을까? 과거의 이해와 같이 그의 행동이 제약받았기 때문인가? 그의 활동 방식이 이전 시대의 예언자들의 행위와 대조되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 질문을 쉽게 풀린다. 그는 예언자들과 같이 목소리를 높여 외칠 필요가 없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그가 선포해야 하는 미쉬파트의 내용은 더 이상 이전의 예언자들이 주로 외쳤던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기 때문이다.24) 야웨의 종은 이전 예언자들의 메시지와 정반대의 메시지를 전 할 것이다.
2절의 이러한 이해는 3절 전반부에 의해서도 입증된다. “꺽어진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는 이미 심판을 받은 혹은 심판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의 포로 공동체의 상황을 상징하고 있다. “우리의 뼈들은 말랐고 우리의 소망은 없어졌으며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라는 겔 37장 11절에 언급된 인용은 그 당시 포로기에 처한 이스라엘 공동체의 탄식을 잘 드러내 준다. 야웨의 종은 꺼져가는 심지에 기름을 채워 넣어서 다시 빛을 발하게 하고, 이에 꺾여진 갈대도 잘 손질하고 바로 세워서 사용 가능케 한다.25) 이미 심판을 경험하여 자포자기한 자들에게 또 하나의 심판 메시지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야웨의 종의 이러한 임무는 포로 공동체를 위로하고 격려하라는 명령을 받은 제 2 이사야의 임무와도 일치한다:
“너희는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위로하여라!”
너희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예루살렘 주민을 격려하고,
그들에게 일러주어라,
이제 복역 기간이 끝나고,
죄에 대한 형벌도 다 받고,
지은 죄에 비하여
갑절의 벌을 받았다고 외쳐라”
(표준새번역, 사 40:1-2, 비교 사 40:27-31)
3절 후반부 - 4절 : 종의 성공적 임무 수행
첫번째 연(1절)에서 야웨의 종은 야웨에 의해서 선택받고, 야웨의 영으로 무장되어 천상의 존재들에게 추천된다. 그는 바벨론의 지배에 놓인 이스라엘과 이방 민족들에게 해방의 기쁜 소식을 전파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두번째 연(2절-3절 전반부)은 야웨의 종의 명령 수행을 기록한다. 그는 이전의 예언자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활동 할 것이다. 그는 이미 심판을 경험한 이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할 것이다. 첫번째 단락의 마지막 연에 해당되는 3절 후반부 - 4절은 야웨의 종이 그에게 위탁된 임무를 성공적으로 해낼 것이라는 야웨의 약속과 확신을 보여준다.
3절 후반부 첫 낱말 ⌈레메메트⌋ ת 는 ⌈에메트⌋라는 명사와 전치사 ⌈레⌋와의 합성어이다. 에메트라는 히브리말은, “확실 reli-abil-ity, 영구 permanence , 충실 fidelity , 진실 truth ”26)을 뜻한다. 여기에서 레에메트는 “진실하게”, “충실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등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겠다.27) “판결을 내리리라”는 표현(미쉬파트 오찌)은 1절 후반부에 나오는 어구(⌈오찌 미쉬파트⌋)의 단어 배열에 서로 바뀐 것 외에는 다른 것이 없으며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여기에서의 판결도 1절 후반부와 마찬가지로 해방의 기쁜 소식을 뜻한다. 레에메트라는 낱말이 3절 후반부의 맨 처음으로 나온 것으로 보아 이것은 강조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야웨의 종은 야웨로부터 구원의 메시지를 “확실하고 진실하게” 선포할 것이다.
4절의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에서 “쇠하다” ה 라는 동사는 3절 후반부의 “꺼져가는 심지”에서 나오는 “꺼져가는”(⌈케하⌋: ה)이라는 형용사와 어근이 같다. 또한 4절의 “그는 꺽이지 아니라고”에서 “꺾이다”는 3절 전반부의 “꺾어진 갈대”에서 “꺾어진”에 해당되는 낱말과 어근(⌈라차츠⌋ ץצר)이 같다. 야웨의 종이 대면하여야 할 상대는 이미 꺾어졌고 꺼져가는 상태에 놓인 포로 공동체요, 그 자신도 그 공동체에 속하여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절망에게 무릎 꿇지 않는다. 야웨의 종도 포로기의 환경 안에 놓여 있지만 그 환경이 그를 무릎 꿇게 하지는 못한다.
갈대는 스스로에 의해서 꺾여지는 법이 없고, 항상 외부의 힘, 예를 들면 사람, 동물 그리고 폭풍과 폭우 같은 자연의 힘에 의해서 꺾여진다. 이와 마찬가지로 야웨의 종도 저항과 압력이라는 외부의 거센 힘의 위협을 받는다.28) 그러나 그는 쇠하지도 않고 꺾이지도 않고 그의 일을 수행하게 되리라는 약속이 그에게 주어진다. 야웨의 종이 그의 임무 때문에 극심한 고난을 받게 되리라는 사실이 처음으로 암시된다.29)
“마침내”로 번역한 히브리말 ⌈아드⌋ ד 는 원래 “그에 이르기까지(공간적), ~까지(시간적), ~하는 동안(시간적), ~에(방향) 등”30)으로의 뜻을 갖는다. 이러한 문자적 의미에만 매이면 야웨의 종이 땅위에 판결을 바로 세울 때까지만 쇠하지 아니하며, 꺾이지 아니할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래서 야웨의 종은 그의 임무를 완성하자마자 쇠하고 꺾이게 될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본문의 의도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접속사 아드는 “계속 Fortgang , 지속 Fortdauer ”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목표뿐만 아니라, 목표 지점까지 계속되는 시간의 크기를 표시할 수도 있다”31) 이에 근거하여 여기에서는 마침내라는 번역이 본문의 의도를 살릴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땅위에 판결을 바로 세우리니”라는 표현으로 1절의 “이방 민족들에게 판결을 내리리라”라는 표현과 유사하다 :
איצוי םיוגל טכשׁמ
요치 라고임 미쉬파트
טכשׁמ ץראב םישׂי
미쉬파트 바아레츠 야심
4절에서는 1절의 고임(이방 민족들) 대신에 ⌈아레츠⌋(땅)로 쓰고 있다. 고임에는 전치사 ⌈레⌋ ל 가 ⌈아레츠⌋에는 전치사 ⌈베⌋ ב 가 붙어 있다. 4절에서는 동사를 ⌈심⌋ (םישׂ, 놓다 put, 세우다 set up, 부과하다 impose, 임명하다 appoint, 두다 lay, 만들다 make 등)”32)으로 바꾸어 쓰고 있다. 그러나 의미에 있어서는 두 표현은 서로 다르지 않다. “땅위에 판결을 바로 세운다, 준다”와 “이방 민족들에게 판결을 가져다준다”는 결국 같은 내용을 다른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33) 여기에서 ⌈미쉬파트⌋는 1절과 3절에 언급된 미쉬파트와 같은 의미이며, 야웨의 종이 이 땅위에 전해야 하는 것은 세계 역사에 변화를 가져다주는 최근의 야웨의 결정, 즉 구원의 메시지 Heilsbotschaft 이다.34) 야웨의 종이 선포해야만 하는 야웨의 판결은 이스라엘과 전 세계를 위한 구원의 소식 die Heilsbotschaft für Israel und für alle Welt 이다.
“섬들이 그의 가르침을 고대하리라” : 여기서 “섬들(히브리말로 : 이임)”은 사 41장 1절에서도 언급되고 있다(“섬들아 내 앞에 잠잠하라”). 제 2 이사야서에 “섬들”이란 어느 특정 장소를 가리킨다고 보기보다는 아주 멀리 떨어진 장소 즉, 이방 나라를 가리키는 일반적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35) 이방 민족들은 야웨의 종이 선포해야 할 야웨의 판결(구원 선포)을 고대하고 기다린다. 이방 민족들도 야웨의 가르침(토라)이 그들의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 야웨의 가르침은 이스라엘에게만 유효하거나 유용한 것이 아니라 전세계 사람들에게도 필요한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이사야 2:3과 그 맥을 같이 한다 :
“백성들이(모든 민족들이) 오면서 이르기를
‘자, 가자
우리 모두 주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나님이 계신 성전으로
어서 올라가자.
주께서 우리에게
주의 길을 가르치실 것이니,
주께서 가르치시는 길을 따르자‘할 것이다.
교훈이 시온에서 나오며,
주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온다“ (표준새번역)
5절 : 창조주 하나님
히브리어 본문은 “하나님 야웨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로 시작한다. 사역에서는 우리 말 표현 때문에 불가피하게 야웨 하나님을 수식하는 분사구문을 앞에 두었다. “하나님”은 히브리말로 ⌈하엘⌋ ל 로 기록되었다. 이 낱말은 문자적 의미를 그대로 살려 번역하면 “그 하나님”이 된다. 하나님이라는 보통명사 앞에 “그”라는 정관사가 붙어 있는 셈이다. 이것은 야웨께서 참 하나님 wirklich Gott 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며,36) 동시에 하나님의 유일성 Einzigkeit 을 표기하는 것이다.37)
유일하신 참 하나님 야웨는 우주(“하늘”과 “땅”)를 창조하였고, 인간에세 생명(⌈네샤마⌋ ה “호흡”과 ⌈루아흐⌋ וּר “영”)을 주신 창조주이다. 네샤마는 창세기 2장 7절의 “야웨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네샤마⌋)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이 된지라”에서 “생기”의 히브리말이다. 야웨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그 코에 넣어 주신 “생기”(⌈네샤마⌋)가 여기에서 언급된 것이다. 루아흐는 에스겔의 마른 뼈 환상에서 생명의 근원으로 간주되고 있다 : “주 야웨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루아흐)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루아흐⌋)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야웨 인줄을 알리라 하셨다 하라”(겔 37:5-6). 두 본문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네샤마와 루아흐는 한 생명을 이루게 하는 결정적 요소로 생명과 동일시 될 수 있다. 그 생명을 인간에게 주신 분이 하나님이다.
여기에서 히브리말 ⌈암⌋(מע : 백성)은 제 2 이사야에서 흔하게 등장하는 특정한 백성 Volk 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분명히 일반적인 의미로 인류 Menschheit 를 뜻한다.38)
인류, 자연 그리고 우주 모두는 야웨의 피조물이다. 이 모든 것들은 야웨의 창조 작품인 것이다. 그 하나님(하엘)이라는 표시로 야웨의 유일성을 나타낸 것과 마찬가지로 우주의 모든 것이 야웨의 창조물임을 부각시키므로 다시 한번 야웨만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점은 제 2 이사야의 또 다른 다음의 본문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
“하늘을 창조하신 주,
땅을 창조하시고 조성하신 하나님,
땅을 견고하게 하신 분이 말씀하신다.
그 분은 땅을 혼돈 상태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살 수 있게 만드신 분이다.
나는 주다. 나밖에 다른 신은 없다” (표준새번역 사 45:18)
6절-7절 : 종의 사명 - “백성을 위한 언약”과 “이방 민족들을 위한 빛”
6절은 ⌈아니 야웨⌋ הוהי ינא 로 시작한다. 그 뜻은 “나 야웨”이다. 여기서 “나”라는 낱말은 강조되어 쓰여졌다. 이것은 “나외에 다른 신(神)은 있을 수 없는 위대한 하나님인 야웨”라는 뜻이다.39)
“너를 부르고 너의 손을 붙잡고” : “부르다”와 “붙잡다”라는 동사들이 이사야 41장 9절에서 “택하다”라는 동사와 나란히 쓰이고 있다. 즉 같은 의미로 쓰이고 있다. 모두 야웨의 선택 행위를 나타내는 말들이다. “택하다”라는 낱말은 우리의 본문 1절에서 같은 어근의 명사(나의 택한 사람)로 쓰였다. 이사야 42장 1-9절을 한 단위로 취급한다면 6절에서 선택된 자와 1절 - 4절에서 선택받은 자는 동일인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6절에서는 그 야웨의 종에게 구체적인 사명이 주어진다.
“백성을 위한 언약”과 “이방 민족들을 위한 빛” : 야웨께서 무엇을 위해서 종을 선택하고 지켜 주시고 세워 주셨나? 그 질문에 대한 분명한 대답이 “백성을 위한 언약(⌈베리트 암⌋ םע תירב)”과 “이방 민족들을 위한 빛(⌈오르 고임⌋ םיוג רוא) 이라는 두 개념에서 주어졌다. 학자들은 여기서 백성 םע 이 누구를 지칭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 두 부류로 나뉘어 진다. 한 부류는 이 백성이 곧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40) 또 다른 부류는 인류를 지칭하는 것으로 본다.41) 최근에는 후자의 입장이 더 많이 받아들여지고 있다.42) 백성을 위한 언약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 문제는 ⌈베리트⌋ תירב 라는 히브리말의 의미가 무엇이냐 하는 질문과 같다. 이점은 구약 성서 학자 쿠취 E. Kutsch 의 연구로 어느 정도 설득력 있게 규명되었다.43) 보통 “언약”으로 번역되는 베리트는 “규정 Besti-mmung ”, “의무 Verflichtung ”를 뜻한다. 구약성서에서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있어서 서로간에 합의에 이른 상호적인 의무에 대하여서는 나오지 않는다. 야웨는 그가 부르신 종을 “이방 민족들을 위한 빛 Licht für die Völker ”과 같이 “백성을 위한 의무 Verflichtung für das Volk ”로도 삼으셨다. 야웨의 종은 이방 민족들에게 빛을 가져다 주는 자로 만들어진 것과 같이, 동시에 야웨에 의해서 백성(인류)을 위하여 의무를 지니고 있는 자로 세움을 받았다. 그 의무(⌈베리트⌋)의 내용과 목적은 히브리말 샬롬이 뜻하는 것, 즉 생명, 번영, 평화를 지칭한다.44) 즉 야웨의 종은 인류에게 샬롬을 가져다주는 것을 자신의 의무로 여긴다. 그는 이 세상의 모든 민족들에게 구원과 빛을 가져다주는 존재인 것이다.
7절은 6절 후반부의 내용을 보다 더 구체화한다. 야웨의 의해서 이방 민족들에게 빛을 전달해야 하는 의무를 갖게 된 야웨의 종은 “소경들의 눈을 뜨게 할 것이다,” 즉 “감옥에 갇힌 자들을 해방시켜 줄 것이다”. 이스라엘의 운명은 현재 바벨론의 종살이를 하는 이방 민족들의 운명과 일치된다. 야웨는 야웨의 종에게 의무를 지워 주었다. 현재의 어둠 속에 빛을 가져다주도록, 즉 야웨는 야웨의 종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포함한 이방 민족들에게 광명과 해방(구원)을 가져다주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방 민족들에게 그들의 잘못된 종교의 굴레로부터 벗어나도록 한다는 해석을 무리가 있어 보인다.45) 이 본문은 보다 구체적인 사건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바벨론의 포로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정치적 해방을 지칭하는 것이다(참조, 사 47:5, 49:9).46) 이는 바벨론의 속박에 매여 있었던 민족들에게(물론 이스라엘도 여기에 포함된다) 진정한 평화와 자유를 가져다 줄 수 있는 실제적이고 정치적인 토대를 마련해 주는 것을 말한다.46)
8절 - 9절 : “새 일들을 알려 준다”
“나는 야웨다, 이것이 나의 이름이다” : 고대 사회에서는 이름이란 단순한 소리나 실체 없는 연기가 아니라 그렇게 지칭되는 것의 본질 Wesen 을 드러내 주는 것이었다. 위에서 언급된 야웨의 본질은 유일하신 하나님, 창조자, 전세계의 보호자/부양자, 인류역사의 조종자이다.
“나는 나의 영광을 다는 자에게 넘겨주지 않고”: “영광(⌈카보드⌋ דובכ)”은 그를 알아보는 사람에게 경외감을 일으키게 하는 어떤 것이다. 야웨의 영광을 다른 자에게 넘겨주지 않겠다는 말은 결국 야웨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神)을 인정하지 않는 야웨 하나님의 유일성을 의미한다.
“나의 찬송을 우상들에게 내어 주지 아니하니라” : 야웨의 영광은 야웨를 인정하고 그에게 고백하는 찬양을 부르도록 강제한다. 그래서 야웨의 영광과 찬송은 보통 평행구를 이루기도 한다 : “야웨께 영광을 돌리며 섬들 중에서 그의 찬송을 선전할지어다”(사 42:12). 8절에는 유일신론적 요구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페실림⌋ םיליספ 은 “우상들”이라는 뜻이다. 이 낱말은 히브리 동사 ⌈파살⌋ לספ 에서 유래하였다. 이 파살이란 동사는 “잘라 내다, (돌을) 다듬다”47)라는 뜻을 갖는다. 그래서 페실림이란 낱말에는 돌, 진흙, 나무 또는 금속 등으로 잘라 내고 다듬어서 만든 것(우상)이라는 경멸적인 의미가 이미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9절에서는 “이전의 일”과 “새 일”이 대립되었다. 이전의 일이란 아마도 포로기 이전 예언자들의 예언 선포, 즉 심판 선포였을 것이다. 야웨께서 예언자들을 통하여 예고한 심판이 이스라엘에게 적중하였다(기원전 587년). 이제는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철퇴를 맞아 나라를 잃어버리고 현재 포로로 끌려와 종살이를 하고 있는 상황이다. 야웨는 이전에 예고한 것이 적중된 사례를 상기시키고, 분명히 이루어지게 될 새 일을 알려주겠다고 한다. 5절-8절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내려오는 일관된 주장은 야웨만이 참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동시에 야웨는 역사의 주 der Herr der Geschichte 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야웨는 역사의 진행 과정을 미리 예고할 수 있고, 또한 앞서서 말할 수 도 있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새 일이란 어렵지 않게 추정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바벨론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구원의 소식이었을 것이다.
IV. 신학적 메시지
우리는 오늘의 본문에서 과연 야웨의 종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 문제가 중요한 대목이긴 하지만 이점은 아직 학계에서도 일치를 보지 못하는 미해결의 문제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오늘의 본문에서도 야웨가 택하여 추천하고 있는 종의 정체에 대하여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성서 주석자들은 성서가 말하고자 하는 그 근본 의도를 캐기 위하여 본문을 깊이 파고들어 가야 하지만, 또한 성서가 더 이상 말하지 않는 지점에 이르러서는 본문 발굴 작업을 멈출 수도 있어야 한다.
오늘의 설교자는 하나님께서 택하여 부르신 오늘의 성도들을 본문의 야웨의 종과 일치시켜 보아도 무방하리라고 본다. 야웨의 종에 대한 말씀은 목회자에게만 해당되는 말로 국한되지 않고 오늘을 사는 모든 성도들에게 적용되는 말씀이다. 야웨의 종으로 부름 받은 기독교인들의 삶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본문을 따라서 생각해 본다. 이러한 시각에서 설교를 위한 몇 가지 제언을 하고 싶다.
1) 우리 기독교인들은 야웨의 종이요 하나님의 종이다(1절 후반부).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에게 매여 있는 자이다. 하나님께 매여 있는 자는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다. 나아가 이 땅에서 하나님을 대신하는 혹은 하나님을 대표하는 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참 자유를 누린다(요 8:32). 그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강한 손에 의해서 보호를 받는다. 그는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이 자연 속에서 하나님을 대표하는 하나님의 형상 imago dei 이다(창 1:26).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정의, 평화 그리고 창조 세계의 보존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동역한다.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일에 동역하므로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을 보여 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
2) 우리는 하나님의 영으로,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권능으로 무장되어 있으며 또한 무장되어야 한다(1절 후반부). 하나님의 영으로 무장이 되어 있지 않으면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막중한 사명을 능히 감당해 낼 수 없기 때문이다(행 1:8; 참조, 마 19:26).
3) 우리는 하나님의 판결을 만방에 알려야 한다(1절 후반부). 하나님의 판결은 구원과 해방의 기쁜 소식이다. 그러나 이 기쁜 소식은 악을 행하는 자(악인)와 선을 해하는 자(의인)와 구분 없이 모두에게 똑같은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악인에게는 심판의 판결이 될 것이고, 의인에게는 은혜와 구원의 판결이 될 것이다(마 25:31-46).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을 세상에 알려야 한다. 모든 민족들이 하나님의 구원에 초청되었다. 하나님의 구원 대상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전 세계 민족들도 포함하고 있다(암 9:7, 욘 4:10-11)
4) 우리는 꺾어진 갈대요 꺼져가는 심지와도 같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보살피고 소생시키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3절). 우리 사회는 꺾어진 갈대는 부러뜨려 쓰레기통에 처넣고, 꺼져가는 심지는 아예 꺼 버리는 일이 하나의 관행으로 굳어진 생존을 위한 살벌한 혈투장이 되어버린 것같다. 기독교인은 사회의 관심밖에 있는 그늘 지대에 있는 보잘것 없는 자, 소외된 자, 눌린 자, 병든 자, 절망한 자들이 기댈 수 있는 최후의 버팀목이 되어야 한다. 기독교인은 더 잘 살기(경쟁) 보다는 함께 잘 사는(공존) 사회를 꿈꾸고 이를 위해 실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5) 기독교인이라 해서 인생 환난의 무풍지대에 사는 것이 아니다(4절 후반부). 하나님의 뜻에 절대 순복하는 자에게도 때로는 예기치 않는 모진 비바람이 몰아 칠 수 있다. 인생 항로의 역풍으로 난항을 겪기도 한다.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것 때문에 극심한 고난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고난의 현장이 하나님의 마지막 손길은 아니다. 우리는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기 때문이다(렘 29:11; 참조 롬 8:28)
6) 이방 민족들도 하나님의 가르침을 고대하고 있다(4절 후반부). 하나님의 가르침이 그들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가르침 즉, 복음은 전 세계가 필요로 하는 것이다. 복음의 바톤을 받은 우리는 그 바톤을 고대하고 있는 또 다른 사람들에게 넘겨주어야 하지 않을까! 바울이 환상중 보았던 마게도냐의 애절한 손짓을 우리도 보아야 한다(행 16:9-10)
7) 우리는 이웃들과 이방 민족들에게 빛을 전해 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6절). 이 빛은 이웃의 삶의 왜곡을 바로 잡아 주는 것이다(7절). 인간의 삶을 굴절시키고 소외시키고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어둠의 세력을 몰아 낼 수 있는 힘은 빛 이외에는 없다. 어둠이 짙게 깔려 있는 곳에 이 빛을 비추어야 한다. 이제는 이 빛을 입으로 비추지 말고 삶으로 비추어야 할 때이다. 이웃과 이방 민족들을 위한 기독교인의 봉사는 입술의 봉사에서 멈추지 말고 삶의 봉사로 이어져야 한다. 남에게 빛이 되도록 요구하지 말고 스스로 빛이 되어 빛된 삶을 보이므로 빛의 삶을 요구하여야 한다(마 5:14-16).
보라, 내가 택한 나의 종이다!”
첫째주일 |
□ 이사야 42:1-9 □
차준희 (순신대학교・구약학)
I. 본문 사역
1절 “보라, 내가 붙들어 주는 나의 종이다.
내 마음에 드는 내가 택한 사람이다.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으니
그가 이방 민족들에게 판결을 내릴 것이며
2절 그는 소리치지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의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지도 아니 할 것이다.
3절 그는 꺾어진 갈대도 부러뜨리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아니하고
그는 진실하게 판결을 내릴 것이다
4절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꺾이지 아니하고
마침내 땅위에 판결을 바로 세우리니
섬들이 그의 가르침을 고대할 것이다.“
5절 하늘을 창조하여 펼쳤고,
땅과 그 소산을 베푸셨고
땅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셨고
땅위에 걸어다니는 자들에게 영을 준
하나님 야웨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6절 “나 야웨가 의로 너를 부르고
너의 손을 붙잡고
너를 지켜 주어서
너를 백성을 위한 언약과 이방 민족들을 위한 빛으로 삼았다.
7절 이는 소경들의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자들을 감옥에서,
흑암속에 사는 자들을 영창에서 이끌어내기 위함이다.
8절 나는 야웨다. 이것이 나의 이름이다.
나는 나의 영광을 다른 자에게 넘겨주지 않고,
나의 찬송을 우상들에게 내어 주지 아니할 것이다.
9절 보라. 이전의 일들은 이루어졌다.
내가 새 일들을 알려준다
그 일이 싹이 나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들려줄 것이다“
II. 본문 사역에 대한 풀이
위 사역에서는 히브리어 맛소라 본문 Der Masoretische Text : MT 이 억양 부호와 엑센트 부호로써 한 절을 여럿으로 나눈 것과 히브리어 본문에 나타난 단어의 순서를 가능한 한 살려 보고자 하였다. 각 절마다 첫 칸부터 쓰여진 것이 있고 한 칸 들어가서 쓰여진 것이 있다. 첫 칸부터 나온 부분이 매 절마다 두개씩 나오는데, 이것은 각각 각 절의 전반부(a)와 후반부(b)를 나타낸 것이다. 학자들이 각 절을 전반절과 후반절로 나누는 것은 히브리어 맛소라 본문에 나오는 엑센트 부호 ⌈아트나흐⌋(Atnach ∧)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서 위 사역의 모든 절을 전반절과 후반절로 나누어 볼 수 있도록 배치시켰다.
1절의 첫 낱말 ⌈헨⌋(ן : 보라)은 칠십인역 본문 Septuaginta : LXX 에서는 야곱 Ιακωβ 이라는 낱말로 대치되어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또다른 칠십인역 헥사 플라적 비평 논문 Hexaplarishe Rezen-sion der Septuaginta 을 포함하여 이외의 히브리어 필사본들 MSS 에서는 ⌈헨⌋이라는 낱말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은 맛소라 본문의 형태가 칠십인역 논문의 그것보다 원문 Urtext 에 가깝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러한 결과는 마태복음 12장 18절에 의해서도 확인된다.1)
맛소라 본문의 6절 후반절 첫 번째 낱말은 ⌈웨에챠레카⌋ : 그리고 나는 너를 지켰다”이다. 이 낱말의 어근인 ⌈나챠르⌋ רצנ 는 “주시하다, 보호하다, 방어하다, 지키다”2)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런데 칠십인역 본문은 ⌈카이 에비스크루소 세⌋ και ένισχύσω σε 라고 읽고 있다. 그 뜻은 “그리고 나는 너를 강하게 할 것이다”이다. 엘리거 K. Elliger 는 칠십인역 본문의 단어에 근거하여 원문의 본문이 ⌈야챠르⌋ רצי” 일 것이라고 결론짓는다.3) 야챠르는 “형성하다, 만들다. 창조하다”4)라는 뜻이다. 그러나 맛소라 본문이 문법과 의미에 있어서 문제가 될 것도 없고, 또한 굳이 변경하여야 할 필요성도 없어 보이는데다가, 불가타 역본 Vulgata 도 맛소라 본문을 지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에트 세르봐뷔 테⌋ et servavi te : 그리고 나는 너를 돕는다) 맛소라 본문의 낱말을 원문에 가까운 단어로 보아야 한다.5)
III. 본문의 문학 형식과 짜임새
이 본문은 이른바 야웨의 종의 노래 sog. Lieder vom Ebed Jahwe 혹은 Gottesknecht 에 속한다. 물론 엄격한 의미에서 야웨의 종의 노래는 “노래”하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을 따라서 그렇게 부르기로 한다. 제 2 이사야서(이사야 40-55장)에서 처음으로 이 문학 형식을 추려 낸 사람은 둠(B. Duhm : 1847-1928)이다. 그는 이에 속한 본문으로 42장 1절-4절, 49장 1절-6절, 50장 4절-9절, 52장 13절-53장 12절을 꼽았다.6) 오늘의 본문은 이른바 첫 번째 야웨의 종의 노래에 해당된다. 42장 5절-9절의 본문이 42장 1절-4절의 연속된 본문인지 아니면 후대에 한 묶음으로 취급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된다.7) 여기서는 42장 1절-9절 전체를 한 단위로 취급하여 주석하고자 한다.
이 본문의 짜임새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보라, 나의 종이다. (1절-4절)
1) 종의 추천과 무장 (1절)
2) 종의 임무 수행 (2절-3절 전반부)
3) 종의 성공적 임무 수행 (3절 후반부-4절)
2. 내가 의로 너를 부른다(5절-9절)
1) 창조주 하나님 (5절)
2) 종의 사명 :
“백성을 위한 언약”과 “이방민족들을 위한 빛”(6절-7절)
3) “새 일들을 알려준다”(8절-9절)
IV. 본문의 풀이
1절 : 종의 추천과 소망
1절-4절은 원래 하나의 독립된 문학 단위를 이루고 있었던 것 같다. 이 단위의 문학 양식은 “임명의 말 Designationswort ”8)이라기 보다는 “추천의 말 Präsentationwort ”9)로 보는 것이 내용상 타당 한 것으로 보인다. 야웨가 자신의 종을 공개적으로 소개하면서 추천하는 것이다. “보라. 내가 붙들어 주는 나의 종이다. 내 마음에 드는 내가 택한 사람이다”. 이 추천의 말은 예수가 세례 받은 후 하늘로부터 들려 온 소리와 좋은 유비를 이룬다.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막 1:11)10)
야웨는 천상의 왕궁 회의 der himmlische Hofstaat 에서 천상의 존재들에게 야웨의 종을 추천한다.11) 이것은 제 2 이사야의 소명 기사에 해당되는 사 40:1-11에서 야웨가 천상의 존재들에게 포로로 복역 중인 이스라엘을 위로하라(1절)고 명령하는 천상 회의 장면과 유사하다. 제 2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기(기원전 587년-539년)에 활동하였던 무명의 예언자를 일컫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 2 이사야서에 속한 본문들(사 40-55장)은 바벨론의 포로기라는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보라” : 이 단어는 오랫동안 기다렸던 인물의 등장을 나타내는 지시어이다.12)
“나의 종” : 히브리말 ⌈에베드⌋ ד는 “종(곧 노예가 됨 : slave), (노예가 아니라 일시적인) 하인 servant , (군대의) 부하 subordinate , 신하 minister 등”13)을 뜻한다. 이 낱말은 첫째 다른 사람에게 속하여 있기 때문에 자유롭지 못함 Unfreiheit 을 의미하고, 둘째, 힘있는 주인에게 속해 있기 때문에 주인의 보호 Schutz 아래 놓여 있음을 의미하기도 하고, 셋째, 주인을 대신하는 대표 Stellvertretung 14)를 뜻하기도 한다. 이 본문의 종은 사람의 종이 아니라 야웨의 종을 말하는 것이다. 야웨의 종은 어떤 사람에게도 또한 자기 자신에게 조차도 매여 있지 않은 오직 야웨에게만 매인 자이다. 야웨의 종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역사를 지배하고 계시는 야웨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자이다. 동시에 야웨의 종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통치권 가운데 일부를 위임받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신적 통치권을 갖고 있는 자이다.
야웨의 종은 야웨가 자신의 자유의지로 선택한 자이며 (“내 마음에 드는 내가 택한 사람이다” ), 그러기에 야웨가 그를 굳게 붙잡아 준다 (“내가 붙들어 주는 나의 종이다”). 야웨는 그 종을 천상의 존재들 앞에서 야웨의 종으로 당당히 추천한다(“보라, 나의 종이다”).
1절 전반부는 야웨의 종을 소개함과 동시에 추천하고 있으며, 1절 후반부는 그를 무장시켜서 구체적으로 임무를 맡긴다.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으니” : 히브리말 ⌈루아흐⌋ וּר 는 “숨 breath , 바람 wind , 영혼 spirit ”15)을 뜻한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의 힘, 능력 Gotteskraft 으로 볼 수 있다.16) 이것은 엘리야와 같은 예언자에게 임하였던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낸다. 야웨의 종은 과거 문서 이전의 예언자와 같이 하나님의 영으로 채움을 받는다.
“이방 민족들에게 판결을 내리리라” : 본문 사역에서 “판결”로 번역된 히브리말은 ⌈미쉬파트⌋ ט 이다. 이 낱말은 여러 가지로 번역이 가능하다. 예를 들면, “중재에 의한 판결 decision by arbi-tration, 법적 결정 legal decision, 법적 소송 legal case, 소송 lawsuit , 법적 권리 legal claim , 일치 conformity , 공평 justice ”17)등으로 번역된다. 이 낱말은 오늘의 본문 1절, 3절, 4절에서 세 번이나 언급된다.18) 여기에서 이 낱말은 베스터만과 엘리거가 이미 지적하는 바와 같이 “법에 의거한 판단 혹은 판결 Rechtsurteil oder Rechtsentscheid ”로 볼 수 있다.19) 이 판결은 억압하는 나라 바벨론에게는 “심판 판결 Strafurteil ”이요, 동시에 억압당하는 이스라엘과 이스라엘과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바벨론의 종살이하는 이방 민족들에게는 “사면과 은혜의 판결 Begnadigungsurteil ”이다.20) 이것은 먼저는 이스라엘을 향한 야웨의 위대한 구속 행위에 해당된다. 이 구속 행위의 범주에 함께 억압당하는 이방 민족들도 포함된다. 야웨의 구속 지평은 이스라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이방 민족들에게까지 미치는 전세계를 포함하고 있다.
“판결을 내리리라”는 낱말 연결은 희귀한 형태로, 그 뜻은 “판결을 관철시키다, 혹은 알게 하다”21)로 볼 수 있다. 야웨의 종은 이스라엘을 포함한 이방 민족들에게도 야웨의 구원 결정을 선포하여야 한다.
2절-3절 전반부 : 종의 임무 수행
2절은 야웨의 종의 임무 수행 방식을 기록하고 있다. 한 때 이 본문은 야웨의 종이 병들었거나 선포 금지령을 받거나 혹은 감옥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그의 활동이 저지된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보았던 적이 있다.22) 그러나 이 구절은 예언자 아모스로부터 시작하여 포로기 이후에 활동한 에스겔에 이르기까지의 이전의 예언자들의 활동과 야웨의 종의 그것이 대조되는 것을 보여준다. 즉, 야웨의 종은 예언자들이 행하였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행동한다.23)그는 이전 예언자들의 행동 방식을 사용하지 않는다. 예언자들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큰길이나 성문에서 큰 소리로 외쳤다. 예레미야의 성전 설교는 좋은 본보기가 된다(렘 7:1-15; 26장). 그러나 “야웨의 종은 소리 치지도 않고, 그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는다. 그의 소리가 거기에서 들리지 않는다” 왜 그렇게 하였을까? 과거의 이해와 같이 그의 행동이 제약받았기 때문인가? 그의 활동 방식이 이전 시대의 예언자들의 행위와 대조되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 질문을 쉽게 풀린다. 그는 예언자들과 같이 목소리를 높여 외칠 필요가 없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그가 선포해야 하는 미쉬파트의 내용은 더 이상 이전의 예언자들이 주로 외쳤던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기 때문이다.24) 야웨의 종은 이전 예언자들의 메시지와 정반대의 메시지를 전 할 것이다.
2절의 이러한 이해는 3절 전반부에 의해서도 입증된다. “꺽어진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는 이미 심판을 받은 혹은 심판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의 포로 공동체의 상황을 상징하고 있다. “우리의 뼈들은 말랐고 우리의 소망은 없어졌으며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라는 겔 37장 11절에 언급된 인용은 그 당시 포로기에 처한 이스라엘 공동체의 탄식을 잘 드러내 준다. 야웨의 종은 꺼져가는 심지에 기름을 채워 넣어서 다시 빛을 발하게 하고, 이에 꺾여진 갈대도 잘 손질하고 바로 세워서 사용 가능케 한다.25) 이미 심판을 경험하여 자포자기한 자들에게 또 하나의 심판 메시지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야웨의 종의 이러한 임무는 포로 공동체를 위로하고 격려하라는 명령을 받은 제 2 이사야의 임무와도 일치한다:
“너희는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위로하여라!”
너희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예루살렘 주민을 격려하고,
그들에게 일러주어라,
이제 복역 기간이 끝나고,
죄에 대한 형벌도 다 받고,
지은 죄에 비하여
갑절의 벌을 받았다고 외쳐라”
(표준새번역, 사 40:1-2, 비교 사 40:27-31)
3절 후반부 - 4절 : 종의 성공적 임무 수행
첫번째 연(1절)에서 야웨의 종은 야웨에 의해서 선택받고, 야웨의 영으로 무장되어 천상의 존재들에게 추천된다. 그는 바벨론의 지배에 놓인 이스라엘과 이방 민족들에게 해방의 기쁜 소식을 전파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두번째 연(2절-3절 전반부)은 야웨의 종의 명령 수행을 기록한다. 그는 이전의 예언자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활동 할 것이다. 그는 이미 심판을 경험한 이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할 것이다. 첫번째 단락의 마지막 연에 해당되는 3절 후반부 - 4절은 야웨의 종이 그에게 위탁된 임무를 성공적으로 해낼 것이라는 야웨의 약속과 확신을 보여준다.
3절 후반부 첫 낱말 ⌈레메메트⌋ ת 는 ⌈에메트⌋라는 명사와 전치사 ⌈레⌋와의 합성어이다. 에메트라는 히브리말은, “확실 reli-abil-ity, 영구 permanence , 충실 fidelity , 진실 truth ”26)을 뜻한다. 여기에서 레에메트는 “진실하게”, “충실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등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겠다.27) “판결을 내리리라”는 표현(미쉬파트 오찌)은 1절 후반부에 나오는 어구(⌈오찌 미쉬파트⌋)의 단어 배열에 서로 바뀐 것 외에는 다른 것이 없으며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여기에서의 판결도 1절 후반부와 마찬가지로 해방의 기쁜 소식을 뜻한다. 레에메트라는 낱말이 3절 후반부의 맨 처음으로 나온 것으로 보아 이것은 강조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야웨의 종은 야웨로부터 구원의 메시지를 “확실하고 진실하게” 선포할 것이다.
4절의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에서 “쇠하다” ה 라는 동사는 3절 후반부의 “꺼져가는 심지”에서 나오는 “꺼져가는”(⌈케하⌋: ה)이라는 형용사와 어근이 같다. 또한 4절의 “그는 꺽이지 아니라고”에서 “꺾이다”는 3절 전반부의 “꺾어진 갈대”에서 “꺾어진”에 해당되는 낱말과 어근(⌈라차츠⌋ ץצר)이 같다. 야웨의 종이 대면하여야 할 상대는 이미 꺾어졌고 꺼져가는 상태에 놓인 포로 공동체요, 그 자신도 그 공동체에 속하여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절망에게 무릎 꿇지 않는다. 야웨의 종도 포로기의 환경 안에 놓여 있지만 그 환경이 그를 무릎 꿇게 하지는 못한다.
갈대는 스스로에 의해서 꺾여지는 법이 없고, 항상 외부의 힘, 예를 들면 사람, 동물 그리고 폭풍과 폭우 같은 자연의 힘에 의해서 꺾여진다. 이와 마찬가지로 야웨의 종도 저항과 압력이라는 외부의 거센 힘의 위협을 받는다.28) 그러나 그는 쇠하지도 않고 꺾이지도 않고 그의 일을 수행하게 되리라는 약속이 그에게 주어진다. 야웨의 종이 그의 임무 때문에 극심한 고난을 받게 되리라는 사실이 처음으로 암시된다.29)
“마침내”로 번역한 히브리말 ⌈아드⌋ ד 는 원래 “그에 이르기까지(공간적), ~까지(시간적), ~하는 동안(시간적), ~에(방향) 등”30)으로의 뜻을 갖는다. 이러한 문자적 의미에만 매이면 야웨의 종이 땅위에 판결을 바로 세울 때까지만 쇠하지 아니하며, 꺾이지 아니할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래서 야웨의 종은 그의 임무를 완성하자마자 쇠하고 꺾이게 될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본문의 의도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접속사 아드는 “계속 Fortgang , 지속 Fortdauer ”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목표뿐만 아니라, 목표 지점까지 계속되는 시간의 크기를 표시할 수도 있다”31) 이에 근거하여 여기에서는 마침내라는 번역이 본문의 의도를 살릴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땅위에 판결을 바로 세우리니”라는 표현으로 1절의 “이방 민족들에게 판결을 내리리라”라는 표현과 유사하다 :
איצוי םיוגל טכשׁמ
요치 라고임 미쉬파트
טכשׁמ ץראב םישׂי
미쉬파트 바아레츠 야심
4절에서는 1절의 고임(이방 민족들) 대신에 ⌈아레츠⌋(땅)로 쓰고 있다. 고임에는 전치사 ⌈레⌋ ל 가 ⌈아레츠⌋에는 전치사 ⌈베⌋ ב 가 붙어 있다. 4절에서는 동사를 ⌈심⌋ (םישׂ, 놓다 put, 세우다 set up, 부과하다 impose, 임명하다 appoint, 두다 lay, 만들다 make 등)”32)으로 바꾸어 쓰고 있다. 그러나 의미에 있어서는 두 표현은 서로 다르지 않다. “땅위에 판결을 바로 세운다, 준다”와 “이방 민족들에게 판결을 가져다준다”는 결국 같은 내용을 다른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33) 여기에서 ⌈미쉬파트⌋는 1절과 3절에 언급된 미쉬파트와 같은 의미이며, 야웨의 종이 이 땅위에 전해야 하는 것은 세계 역사에 변화를 가져다주는 최근의 야웨의 결정, 즉 구원의 메시지 Heilsbotschaft 이다.34) 야웨의 종이 선포해야만 하는 야웨의 판결은 이스라엘과 전 세계를 위한 구원의 소식 die Heilsbotschaft für Israel und für alle Welt 이다.
“섬들이 그의 가르침을 고대하리라” : 여기서 “섬들(히브리말로 : 이임)”은 사 41장 1절에서도 언급되고 있다(“섬들아 내 앞에 잠잠하라”). 제 2 이사야서에 “섬들”이란 어느 특정 장소를 가리킨다고 보기보다는 아주 멀리 떨어진 장소 즉, 이방 나라를 가리키는 일반적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35) 이방 민족들은 야웨의 종이 선포해야 할 야웨의 판결(구원 선포)을 고대하고 기다린다. 이방 민족들도 야웨의 가르침(토라)이 그들의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 야웨의 가르침은 이스라엘에게만 유효하거나 유용한 것이 아니라 전세계 사람들에게도 필요한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이사야 2:3과 그 맥을 같이 한다 :
“백성들이(모든 민족들이) 오면서 이르기를
‘자, 가자
우리 모두 주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나님이 계신 성전으로
어서 올라가자.
주께서 우리에게
주의 길을 가르치실 것이니,
주께서 가르치시는 길을 따르자‘할 것이다.
교훈이 시온에서 나오며,
주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온다“ (표준새번역)
5절 : 창조주 하나님
히브리어 본문은 “하나님 야웨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로 시작한다. 사역에서는 우리 말 표현 때문에 불가피하게 야웨 하나님을 수식하는 분사구문을 앞에 두었다. “하나님”은 히브리말로 ⌈하엘⌋ ל 로 기록되었다. 이 낱말은 문자적 의미를 그대로 살려 번역하면 “그 하나님”이 된다. 하나님이라는 보통명사 앞에 “그”라는 정관사가 붙어 있는 셈이다. 이것은 야웨께서 참 하나님 wirklich Gott 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며,36) 동시에 하나님의 유일성 Einzigkeit 을 표기하는 것이다.37)
유일하신 참 하나님 야웨는 우주(“하늘”과 “땅”)를 창조하였고, 인간에세 생명(⌈네샤마⌋ ה “호흡”과 ⌈루아흐⌋ וּר “영”)을 주신 창조주이다. 네샤마는 창세기 2장 7절의 “야웨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네샤마⌋)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이 된지라”에서 “생기”의 히브리말이다. 야웨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그 코에 넣어 주신 “생기”(⌈네샤마⌋)가 여기에서 언급된 것이다. 루아흐는 에스겔의 마른 뼈 환상에서 생명의 근원으로 간주되고 있다 : “주 야웨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루아흐)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루아흐⌋)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야웨 인줄을 알리라 하셨다 하라”(겔 37:5-6). 두 본문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네샤마와 루아흐는 한 생명을 이루게 하는 결정적 요소로 생명과 동일시 될 수 있다. 그 생명을 인간에게 주신 분이 하나님이다.
여기에서 히브리말 ⌈암⌋(מע : 백성)은 제 2 이사야에서 흔하게 등장하는 특정한 백성 Volk 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분명히 일반적인 의미로 인류 Menschheit 를 뜻한다.38)
인류, 자연 그리고 우주 모두는 야웨의 피조물이다. 이 모든 것들은 야웨의 창조 작품인 것이다. 그 하나님(하엘)이라는 표시로 야웨의 유일성을 나타낸 것과 마찬가지로 우주의 모든 것이 야웨의 창조물임을 부각시키므로 다시 한번 야웨만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점은 제 2 이사야의 또 다른 다음의 본문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
“하늘을 창조하신 주,
땅을 창조하시고 조성하신 하나님,
땅을 견고하게 하신 분이 말씀하신다.
그 분은 땅을 혼돈 상태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살 수 있게 만드신 분이다.
나는 주다. 나밖에 다른 신은 없다” (표준새번역 사 45:18)
6절-7절 : 종의 사명 - “백성을 위한 언약”과 “이방 민족들을 위한 빛”
6절은 ⌈아니 야웨⌋ הוהי ינא 로 시작한다. 그 뜻은 “나 야웨”이다. 여기서 “나”라는 낱말은 강조되어 쓰여졌다. 이것은 “나외에 다른 신(神)은 있을 수 없는 위대한 하나님인 야웨”라는 뜻이다.39)
“너를 부르고 너의 손을 붙잡고” : “부르다”와 “붙잡다”라는 동사들이 이사야 41장 9절에서 “택하다”라는 동사와 나란히 쓰이고 있다. 즉 같은 의미로 쓰이고 있다. 모두 야웨의 선택 행위를 나타내는 말들이다. “택하다”라는 낱말은 우리의 본문 1절에서 같은 어근의 명사(나의 택한 사람)로 쓰였다. 이사야 42장 1-9절을 한 단위로 취급한다면 6절에서 선택된 자와 1절 - 4절에서 선택받은 자는 동일인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6절에서는 그 야웨의 종에게 구체적인 사명이 주어진다.
“백성을 위한 언약”과 “이방 민족들을 위한 빛” : 야웨께서 무엇을 위해서 종을 선택하고 지켜 주시고 세워 주셨나? 그 질문에 대한 분명한 대답이 “백성을 위한 언약(⌈베리트 암⌋ םע תירב)”과 “이방 민족들을 위한 빛(⌈오르 고임⌋ םיוג רוא) 이라는 두 개념에서 주어졌다. 학자들은 여기서 백성 םע 이 누구를 지칭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 두 부류로 나뉘어 진다. 한 부류는 이 백성이 곧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40) 또 다른 부류는 인류를 지칭하는 것으로 본다.41) 최근에는 후자의 입장이 더 많이 받아들여지고 있다.42) 백성을 위한 언약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 문제는 ⌈베리트⌋ תירב 라는 히브리말의 의미가 무엇이냐 하는 질문과 같다. 이점은 구약 성서 학자 쿠취 E. Kutsch 의 연구로 어느 정도 설득력 있게 규명되었다.43) 보통 “언약”으로 번역되는 베리트는 “규정 Besti-mmung ”, “의무 Verflichtung ”를 뜻한다. 구약성서에서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있어서 서로간에 합의에 이른 상호적인 의무에 대하여서는 나오지 않는다. 야웨는 그가 부르신 종을 “이방 민족들을 위한 빛 Licht für die Völker ”과 같이 “백성을 위한 의무 Verflichtung für das Volk ”로도 삼으셨다. 야웨의 종은 이방 민족들에게 빛을 가져다 주는 자로 만들어진 것과 같이, 동시에 야웨에 의해서 백성(인류)을 위하여 의무를 지니고 있는 자로 세움을 받았다. 그 의무(⌈베리트⌋)의 내용과 목적은 히브리말 샬롬이 뜻하는 것, 즉 생명, 번영, 평화를 지칭한다.44) 즉 야웨의 종은 인류에게 샬롬을 가져다주는 것을 자신의 의무로 여긴다. 그는 이 세상의 모든 민족들에게 구원과 빛을 가져다주는 존재인 것이다.
7절은 6절 후반부의 내용을 보다 더 구체화한다. 야웨의 의해서 이방 민족들에게 빛을 전달해야 하는 의무를 갖게 된 야웨의 종은 “소경들의 눈을 뜨게 할 것이다,” 즉 “감옥에 갇힌 자들을 해방시켜 줄 것이다”. 이스라엘의 운명은 현재 바벨론의 종살이를 하는 이방 민족들의 운명과 일치된다. 야웨는 야웨의 종에게 의무를 지워 주었다. 현재의 어둠 속에 빛을 가져다주도록, 즉 야웨는 야웨의 종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포함한 이방 민족들에게 광명과 해방(구원)을 가져다주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방 민족들에게 그들의 잘못된 종교의 굴레로부터 벗어나도록 한다는 해석을 무리가 있어 보인다.45) 이 본문은 보다 구체적인 사건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바벨론의 포로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정치적 해방을 지칭하는 것이다(참조, 사 47:5, 49:9).46) 이는 바벨론의 속박에 매여 있었던 민족들에게(물론 이스라엘도 여기에 포함된다) 진정한 평화와 자유를 가져다 줄 수 있는 실제적이고 정치적인 토대를 마련해 주는 것을 말한다.46)
8절 - 9절 : “새 일들을 알려 준다”
“나는 야웨다, 이것이 나의 이름이다” : 고대 사회에서는 이름이란 단순한 소리나 실체 없는 연기가 아니라 그렇게 지칭되는 것의 본질 Wesen 을 드러내 주는 것이었다. 위에서 언급된 야웨의 본질은 유일하신 하나님, 창조자, 전세계의 보호자/부양자, 인류역사의 조종자이다.
“나는 나의 영광을 다는 자에게 넘겨주지 않고”: “영광(⌈카보드⌋ דובכ)”은 그를 알아보는 사람에게 경외감을 일으키게 하는 어떤 것이다. 야웨의 영광을 다른 자에게 넘겨주지 않겠다는 말은 결국 야웨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神)을 인정하지 않는 야웨 하나님의 유일성을 의미한다.
“나의 찬송을 우상들에게 내어 주지 아니하니라” : 야웨의 영광은 야웨를 인정하고 그에게 고백하는 찬양을 부르도록 강제한다. 그래서 야웨의 영광과 찬송은 보통 평행구를 이루기도 한다 : “야웨께 영광을 돌리며 섬들 중에서 그의 찬송을 선전할지어다”(사 42:12). 8절에는 유일신론적 요구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페실림⌋ םיליספ 은 “우상들”이라는 뜻이다. 이 낱말은 히브리 동사 ⌈파살⌋ לספ 에서 유래하였다. 이 파살이란 동사는 “잘라 내다, (돌을) 다듬다”47)라는 뜻을 갖는다. 그래서 페실림이란 낱말에는 돌, 진흙, 나무 또는 금속 등으로 잘라 내고 다듬어서 만든 것(우상)이라는 경멸적인 의미가 이미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9절에서는 “이전의 일”과 “새 일”이 대립되었다. 이전의 일이란 아마도 포로기 이전 예언자들의 예언 선포, 즉 심판 선포였을 것이다. 야웨께서 예언자들을 통하여 예고한 심판이 이스라엘에게 적중하였다(기원전 587년). 이제는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철퇴를 맞아 나라를 잃어버리고 현재 포로로 끌려와 종살이를 하고 있는 상황이다. 야웨는 이전에 예고한 것이 적중된 사례를 상기시키고, 분명히 이루어지게 될 새 일을 알려주겠다고 한다. 5절-8절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내려오는 일관된 주장은 야웨만이 참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동시에 야웨는 역사의 주 der Herr der Geschichte 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야웨는 역사의 진행 과정을 미리 예고할 수 있고, 또한 앞서서 말할 수 도 있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새 일이란 어렵지 않게 추정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바벨론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구원의 소식이었을 것이다.
IV. 신학적 메시지
우리는 오늘의 본문에서 과연 야웨의 종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 문제가 중요한 대목이긴 하지만 이점은 아직 학계에서도 일치를 보지 못하는 미해결의 문제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오늘의 본문에서도 야웨가 택하여 추천하고 있는 종의 정체에 대하여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성서 주석자들은 성서가 말하고자 하는 그 근본 의도를 캐기 위하여 본문을 깊이 파고들어 가야 하지만, 또한 성서가 더 이상 말하지 않는 지점에 이르러서는 본문 발굴 작업을 멈출 수도 있어야 한다.
오늘의 설교자는 하나님께서 택하여 부르신 오늘의 성도들을 본문의 야웨의 종과 일치시켜 보아도 무방하리라고 본다. 야웨의 종에 대한 말씀은 목회자에게만 해당되는 말로 국한되지 않고 오늘을 사는 모든 성도들에게 적용되는 말씀이다. 야웨의 종으로 부름 받은 기독교인들의 삶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본문을 따라서 생각해 본다. 이러한 시각에서 설교를 위한 몇 가지 제언을 하고 싶다.
1) 우리 기독교인들은 야웨의 종이요 하나님의 종이다(1절 후반부).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에게 매여 있는 자이다. 하나님께 매여 있는 자는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다. 나아가 이 땅에서 하나님을 대신하는 혹은 하나님을 대표하는 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참 자유를 누린다(요 8:32). 그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강한 손에 의해서 보호를 받는다. 그는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이 자연 속에서 하나님을 대표하는 하나님의 형상 imago dei 이다(창 1:26).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정의, 평화 그리고 창조 세계의 보존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동역한다.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일에 동역하므로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을 보여 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
2) 우리는 하나님의 영으로,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권능으로 무장되어 있으며 또한 무장되어야 한다(1절 후반부). 하나님의 영으로 무장이 되어 있지 않으면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막중한 사명을 능히 감당해 낼 수 없기 때문이다(행 1:8; 참조, 마 19:26).
3) 우리는 하나님의 판결을 만방에 알려야 한다(1절 후반부). 하나님의 판결은 구원과 해방의 기쁜 소식이다. 그러나 이 기쁜 소식은 악을 행하는 자(악인)와 선을 해하는 자(의인)와 구분 없이 모두에게 똑같은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악인에게는 심판의 판결이 될 것이고, 의인에게는 은혜와 구원의 판결이 될 것이다(마 25:31-46).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을 세상에 알려야 한다. 모든 민족들이 하나님의 구원에 초청되었다. 하나님의 구원 대상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전 세계 민족들도 포함하고 있다(암 9:7, 욘 4:10-11)
4) 우리는 꺾어진 갈대요 꺼져가는 심지와도 같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보살피고 소생시키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3절). 우리 사회는 꺾어진 갈대는 부러뜨려 쓰레기통에 처넣고, 꺼져가는 심지는 아예 꺼 버리는 일이 하나의 관행으로 굳어진 생존을 위한 살벌한 혈투장이 되어버린 것같다. 기독교인은 사회의 관심밖에 있는 그늘 지대에 있는 보잘것 없는 자, 소외된 자, 눌린 자, 병든 자, 절망한 자들이 기댈 수 있는 최후의 버팀목이 되어야 한다. 기독교인은 더 잘 살기(경쟁) 보다는 함께 잘 사는(공존) 사회를 꿈꾸고 이를 위해 실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5) 기독교인이라 해서 인생 환난의 무풍지대에 사는 것이 아니다(4절 후반부). 하나님의 뜻에 절대 순복하는 자에게도 때로는 예기치 않는 모진 비바람이 몰아 칠 수 있다. 인생 항로의 역풍으로 난항을 겪기도 한다.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것 때문에 극심한 고난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고난의 현장이 하나님의 마지막 손길은 아니다. 우리는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기 때문이다(렘 29:11; 참조 롬 8:28)
6) 이방 민족들도 하나님의 가르침을 고대하고 있다(4절 후반부). 하나님의 가르침이 그들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가르침 즉, 복음은 전 세계가 필요로 하는 것이다. 복음의 바톤을 받은 우리는 그 바톤을 고대하고 있는 또 다른 사람들에게 넘겨주어야 하지 않을까! 바울이 환상중 보았던 마게도냐의 애절한 손짓을 우리도 보아야 한다(행 16:9-10)
7) 우리는 이웃들과 이방 민족들에게 빛을 전해 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6절). 이 빛은 이웃의 삶의 왜곡을 바로 잡아 주는 것이다(7절). 인간의 삶을 굴절시키고 소외시키고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어둠의 세력을 몰아 낼 수 있는 힘은 빛 이외에는 없다. 어둠이 짙게 깔려 있는 곳에 이 빛을 비추어야 한다. 이제는 이 빛을 입으로 비추지 말고 삶으로 비추어야 할 때이다. 이웃과 이방 민족들을 위한 기독교인의 봉사는 입술의 봉사에서 멈추지 말고 삶의 봉사로 이어져야 한다. 남에게 빛이 되도록 요구하지 말고 스스로 빛이 되어 빛된 삶을 보이므로 빛의 삶을 요구하여야 한다(마 5:1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