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3년 다해 3월12일 사순 제4주간 화요일
[청주] 핑계없는 무덤이 없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독서 : 에제 47, 1 - 9. 12
† 복음 : 요한 5, 1 - 16
★ 에제키엘 예언자는 환시를 통해 모든 피조물이 성전에서
흘러내리는 물로 생명을 얻어 활력을 갖게 되는 것을 본다.
이는 앞으로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주실 영원한 구원에
대한 약속을 상징하는 것이다(제1독서).
★ 예수님 시대에 이스라엘에서는 예루살렘의 벳자타 못의
물이 출렁거릴 때 처음으로 뛰어드는 사람은 병이 낫는다고
믿고 있었다. 그 못가에는 서른여덟 해 동안이나 누워 있는
사람이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그를 일으키셨다. 그에게 새
생명을 준 것은 벳자타의 물이 아니라, 생명의 물을 약속하신
예수님이셨던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 나오는 벳자타 못 주위에는 눈먼 이, 다리
저는 이, 팔다리가 말라비틀어진 이 같은 병자들이 많이
누워 있었습니다. 왜 이토록 많은 병자들이 못가에 모여
있었을까요? 벳자타 못에 이따금 천사가 내려오면 물이
출렁거리게 되는데, 그 순간 가장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치유된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언뜻 보면 벳자타 못은 모든 병자에게 ‘희망의 못’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 소개된 서른여덟 해
동안이나 앓고 있는 병자에게는 ‘절망의 못’일 수밖에
없습니다. 물이 출렁거릴 때 가장 먼저 물속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동작이 빠른 이, 곧 덜 아픈 사람입니다.
많이 아프면 아플수록 1등일 수 있는 가능성은 적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서른여덟 해나 앓고 있는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건강해지고 싶으냐?” 하고 물으셨을 때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
벳자타 못 주위의 병자들 중에서 가장 먼저 물속에 뛰어든
이만의 병이 낫는다는 것은 민간 신앙이었고, 그 믿음은
세속의 이치와도 너무나 닮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다르셨습니다. 1등만 인정해 주는 ‘절망의 못’ 벳자타에서
꼴등의 삶을 살고 있었던 병자를 도와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당시의 민간 신앙과는 참으로 다릅니다.
세속의 이치와도 다릅니다. 주님께서는 1등이 아닌 꼴등을
가장 먼저 생각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한 주님께 나약한
우리의 모습을 온전히 내어 드리는 태도가 바로 우리의
신앙인 것입니다.
-매일 미사 -
◈ [청주]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2013년 3월12일 사순 제4주간 화요일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었다.>
+ 요한 5,1-16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
성당제단 카펫을 교체하였습니다. 저녁6시경에 시작한
작업이 새벽 5시 반이 되어서 끝났습니다. 아주 꼼꼼하게
정성을 다하여 시공을 하였습니다. 피곤한 내색 없이
세밀하게 정성을 다하는 모습을 보면서 전문가는 무엇이
달라도 다르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이러저러한
핑계를 대고 다음날 낮에 할 수도 있을 터인데 신자들에게
불편을 끼치고 싶지 않다고 밤을 새워 일을 하신 사랑을
기억하며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무엇이고
결과가 있는 것은 반드시 원인이 있듯이 무슨 일이든지
핑계거리는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핑계를 댄다는 것은
대개는 자기를 인정하지 않고 탓을 남에게 돌리는 마음이
거기에 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주 하느님께서 아담에게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주더냐?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따 먹었느냐?” 하고
물으시자 아내핑계를 댑니다. 또 아내는 뱀에게 책임을
떠넘겼습니다. (창세3,11- 13)
루카복음 14장15절 이하에 보면 혼인 잔치의 비유가
나옵니다. 초대받은 사람들 중 첫 사람은 “밭을 샀는데
그것을 보아야 한다.”고 하였고 다른 사람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부려보려고 가는 중”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방금 장가를 들었소.” 하며
핑계를 대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벳자타 못가에는 이따금 주님의
천사가 내려와 물을 휘젓곤 하였는데 물이 움직일 때 맨
먼저 못에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이든 나았습니다.
그런데 많은 병자 중 어떤 사람은 서른여덟 해나 앓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건강해 지고 싶으냐?”
하고 물으시자 그는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저 못 속에 넣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가 “예, 낫고 싶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안타깝게도 그는 물이 움직일 때 자기를
물에 넣어주지 않는 사람들과 자기보다 먼저 물에 들어가는
어떤 사람을 탓하고 원망하는 투로 대답을 대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낫게 해 주실 분이라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자기의 처지를 한탄하며 낫고 싶은 희망을
표현하였습니다.
여러분은 ‘나쁜 놈’이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나뿐 놈’
이랍니다. 오직 나만 아는 사람이지요. 오직 자기에게만
관심을 두고 있었으니 그렇게 38년 동안이나 있었지
않았을까? 또한 주변에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었더라면
그렇게 오랜 고통 속에 머물러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하긴 주변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 그럴만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 나가라.”(요한 5,8) 하시자
유다인들이 병이 나은 사람에게 “오늘은 안식일이오. 들것을
들고 다니는 것은 합당하지 않소.”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들 것을 들었다는 것, 다시 말하면 안식일에 일을
하는 것만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보아야 할 것은
38년이나 앓다가 걸어가게 되었다는 것을 봐야 했습니다.
살리는 일은 선한 일입니다. 선한 일은 적극적으로 권장할
일입니다. 걸어가는 것은 앞으로도 이러한 일이 계속될
것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살리는
일은 이미 시작 되었고 앞으로도 지속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일이 있다고 해서 남을 탓하지도 말고, 규정을
내세워 살리는 일을 막지도 말아야 하겠습니다. 규정을 내세워
살리는 일을 막는다면 그것도 하나의 핑계거리가 될 것이요,
사람을 위한 법이 오히려 법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것으로 본말이
뒤바뀔 것입니다. “병든 사람이 병든 질서를 만들고 병든 질서가
다시 병든 사람을 낳습니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예수님께서
끊어버리십니다.” (이현주)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메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낫기를 원하느냐?"
2013년 다해 3월12일 사순 제4주간 화요일
<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었다. >
복음 : 요한 5,1-16
< "낫기를 원하느냐?" >
혜민 스님에게 이제 서른이 되는 한 여자가 삶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저는 직장에서도 미운 사람이 생기고, 삶의 의미도
무언지 모르겠고... 그래서 새로운 진로를 위해 직장을
그만둘까 말까 고민 중인데... ”
이렇게 말하고 있는 그 분에게 말을 끊고 혜민 스님이
느닷없이 되물었습니다.
“애인 있으세요?”
그 여자는 놀라서, “아... 아니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말을 끊어서 죄송합니다. 여자 분이 솔로로 서른 정도 되면
많은 분들이 여러 고민을 하고 되지만, 연애를 하시는 게
제일 필요한 것 같습니다. 아마도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그것인 것 같습니다.”
저는 매우 날카로운 대답이라 생각했습니다. 남자는 일을
위해서, 여자는 사랑을 위해서 창조되었다고 합니다.
사랑을 못해서 발생하는 문제인데, 눈앞의 문제만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들도 실제로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모른 채 당장 앞에 놓인 눈에 보이는 문제에만
집중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38년이나 벳자타 연못에 뛰어들어
병을 고치려는 사람을 치유해 주십니다. 사실 그 병자는
예수님이 누구인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에게처럼 이 사람에게 “믿느냐?”라고 물어보시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믿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십니다. 바로 ‘무엇을 원하느냐’입니다.
“낫기를 원하느냐?”
병자가 38년씩이나 벳자타 연못에서 물이 흔들리기를
기다렸다면 당연히 낫기를 원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예수님의 질문은 이것이었을 것입니다.
“너는 벳자타 연못에 가장 먼저 뛰어들기를 원하는 것이냐,
아니면 진정 낫기를 원하는 것이냐?”
이 병자는 처음에 원했던 낫기를 원한다는 것은 잊어버리고,
시간이 흐르면서는 가장 먼저 물에 뛰어드는 것만을 원하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노처녀가 결혼하는 것이 가장
시급함에도 자기가 행복하지 못한 이유를 당장 눈에 보이는
직장의 문제로 핑계를 대고 있었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노처녀가 결혼하게 된다면 참으로 행복해질까요?
아이를 낳고 또 삶의 어려움에 봉착하게 될 것입니다.
남편이 미워지는 일도 생길 수 있습니다.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를 본인 스스로 깨달아야합니다. 결혼하는
것인지, 아니면 참으로 행복해지는 것인지. 지금 눈앞에
당면한 문제가 해결되어도 여전히 많은 문제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우리에게
물어보시는 것입니다.
저는 행복해지는 것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 방법으로는
예쁜 여자와 결혼하고, 돈도 많이 벌고, 사회에서도 인정받는
사람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행복해지고
싶어하는 저의 원의를 보시고 지금 바라보고 있는 것들을
모두 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혼도 포기하고 돈 버는
것도 포기하고 사회에서 성취하려고 하는 야망도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저는 세상의 이치를 알고 싶었습니다. 진리를 깨우치고
싶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책도 읽고 여러 분야에 관심을
가지며 공부하려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런
것으로는 진리를 깨우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저의 행복을 위해 사제의 길로 불러주셨고,
참 진리를 알게 해 주시기 위해 성경과 신학을 공부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을 아는 것이 참 행복이고 참 진리를
깨우치는 것임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나 당장 내가 행복하고 또 더 알게 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에서 눈을 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가끔 비가 오면 달팽이와 지렁이가 길 위로 올라옵니다.
그리고 비가 그친 상태에서 산책을 하다보면 길 한가운데서
꿈틀거리는 지렁이와 달팽이를 봅니다. 저는 걷다가 달팽이는
들어서 나무에 붙여주고, 아직 꿈틀거리는 지렁이는
나뭇가지로 흙이 있는 곳으로 던져줍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이 개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하찮은 미물도 살고 싶다는 것을 압니다.
살기 위해서 발버둥 치다가 길 위로 올라온 것입니다.
그것을 알면서 그냥 지나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물며
하느님이야 우리가 길을 잘못 들었을 때면 어떻게
느끼실까요? 하느님도 우리가 살고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원한다는 것을 잘 아십니다.
소화 데레사는 자신을 계단을 올라가지 못하고 밑에서
주춤거리고 있는 어린 아기로 비유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열심히 계단을 올라가고 있습니다. 그 때 하느님은 안쓰러운
마음에 소화 데레사를 번쩍 들어 맨 앞에 올려놓는다는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당장 눈앞의 계단을 오르거나, 베짜타
연못에 뛰어드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왜 그것을 하기를
원하고 있느냐’입니다. 진정으로 원한다면 하느님은 그
사람의 원의를 절대 그냥 지나치시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 즉 행복, 사랑, 기쁨, 평화 등을
원합시다. 내가 행복해지기만을 원하시면 하느님은 가장
빠른 길로 그 목적에 도달하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인천]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
우선 여러분 덕분에 시카고에 잘 도착했다는 보고
드립니다. 어렸을 때에는 정말로 비행기를 타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비행기 타봤다는 사람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릅니다. 그 높은 곳을 날아서 간다는 것
또한 아주 빨리 간다는 것도 중요한 이유지만, 무엇보다도
당시에는 비행기 타는 사람이 흔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요? 이제는 비행기 타는
것이 너무나 힘듭니다. 작년에 남미 다녀올 때 너무 오랜
시간을 탔었기 때문인지 이제는 비행기 타는 것이 하나의
커다란 짐입니다. 힘들고 지겹다는 생각 때문일까요? 그래서
이번 시카고 행은 특히 힘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비행기 안에서 기도하고 묵상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행기 타고 가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시카고에까지
가서 특강을 한다는 것이며, 교우들에게 더욱 더 주님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단순히 12시간이
넘는 비행의 힘듦만을 생각하고 있으니 얼마나 한심하던지요.
중요한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야 어떤 기준을
가지고 나의 궁극적인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냥 순간의 것만을 생각하고 있다면 목표점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엉뚱한 것만을 쫓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벳자타 연못 옆에 38년 동안 앉아
있었던 병자가 그러했지요. 그에게 예수님께서 소원을
묻습니다. 우리들은 그의 소원이 당연히 건강일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38년 동안이나 건강 때문에 고생했으니까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건강해지고 싶으냐?”고 물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그의 소원은 달랐습니다. 그의 소원은
연못이 출렁거릴 때 자기를 연못 속에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들어갈 수 있도록 처음으로 넣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물이 출렁일 때 처음으로 들어가야 병이 낫는다고
했거든요.
이 소원이 과연 근본적인 소원일까요?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의 미신에 불과합니다. 그런데도 근본적인 건강이
아니라 오히려 미신에 집착하는 벳자타 연못의 병자이지요.
이처럼 우리 역시 가장 근본적인 주님의 구원이 아닌 엉뚱한
것만을 청하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까? 그리고 이런 모습이
과연 벳자타 연못의 병자와 무엇이 다를까요?
그런데 병의 치유 역시 근본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더
근본적인 것은 죄를 짓지 않고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병자를 만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 우리의 삶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의 삶. 주님의 마음에 드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사순시기도 이제 막바지를 치닫고 있습니다. 이 시기에
우리는 얼마나 주님의 마음에 드는 삶을 살고 있는지를
스스로 반성해보셨으면 합니다.
배려라는 말에는 ‘생각할 려’자가 들어간다. 상대를 생각하는
행동이 공감으로 가는 지름길이다(조세형).
시카고에 드디어 왔습니다. 여기에는 아직도 눈이 많이
보이네요.
혹시~~~
시카고 공항에서 입국심사를 받기 위해 기다리는데, 아주
뚱뚱한 경찰과 함께 조그마한 경찰견 한 마리가 제 곁으로
오는 것입니다. 이상한 물건도 없는데 저를 향해 다가오는
경찰과 경찰견. 괜히 겁이 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머리 회전을 시킵니다.
‘내 가방 속에 혹시 있어서는 안 될 물건이 있는 것이 아닌가?
혹시 누가 내 가방에다가 이상한 것을 넣은 것 아냐?’
그런데 이 경찰과 경찰견은 제 옆을 지나서 멕시코인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다가섭니다. 그리고 어디로 데려가더군요.
잘못한 것도 없는데, 경찰과 경찰관을 보니까 특히 우리나라가
아닌 먼 나라에 있다 보니 괜히 위축되는 제 자신을 보게
됩니다. 죄가 없는데도 이렇게 불안한데 죄가 있으면 어떨까요?
그러면서 하느님 앞에서도 이렇지 않을까 싶네요. 먼 훗날 주님
앞에서 섰을 때 과연 떳떳하게 있을 수 있을까요? 전지전능하신
분 앞에 서 있다는 것 자체가 벌벌 떨 수 있는 상황인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에 죄까지 가득 지은 나라면 도저히 그 앞에 서
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 앞에 떳떳할 수 없습니다. 단지 조금이라도
서 있기 위해 죄를 짓지 않는 것이고, 조금이라도 주님 옆에
있고자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더욱 더 뜻깊은 사순시기가 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했으면 합니다.
- 인천 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서울] 신앙인들은 이미 진화하고 있는 겁니다.
의학적으로 환자에게 어림도 없는 말 한마디 ‘완쾌해
져라!’ 그랬거든요. 그런데 그게 그리 됐으니 이 어인
일인지 도통 이해가 안 가지요. 이해하길 거부하면
퇴화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진화할 겁니다.
달인, 장풍, 초능력 같은 걸 하는 사람들을 보면 신기하지만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초능력자로 인간들이
진화할 도착점이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을 믿음이 그
시작이기에 신앙인들은 이미 진화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그러자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어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갔다.(요한 5,8~9)”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수도회] 해방과 파스카의 날인 안식일
2013년 다해 3월12일 사순 제4주간 화요일
- 요한5,1-16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었다."
<해방과 파스카의 날인 안식일>
예루살렘의 ‘양 문’은 요즘은 ‘스테파노’ 성문이라고도 불리는데,
이 문은 오늘날 예루살렘 동쪽에서 성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문이기도 합니다.
예루살렘 성 동쪽에서 ‘양 문’ 즉 ‘스테파노 성문’을 통해 성안으로
들어가 100미터 쯤 걸어가면 성 안나 성당에 이르는데, 바로 그
자리가 벳자타 못이 있던 자리입니다.
벳자타라는 말은 ‘자비의 집’ ‘새로운 집’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벳자타 못은 오늘날 수영장의
모습을 띠고 있었습니다. 벳자타 못의 길이는 120미터 폭은
6미터 정도였는데, 이 못은 5개의 주랑으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벳자타 못 아래 깊은 곳에는 두 개의 물 저장소가 자리
잡고 있었는데, 이 저장소는 땅 속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물로 늘 가득 차 있었습니다. 벳자타 못의 치료용 물은
바로 이 저장소로부터 공급되었습니다.
하루에 몇 번 시간에 맞춰 땅속에 있던 샘에서 물 저장소를
통해 벳자타 못으로 물이 솟아올랐는데, 당시 사람들은 이
순간이 치유 과정에 특별히 도움을 준다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물의 움직임과 병자의
치유는 천사의 등장과 개입으로 인한 효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벳자타 못가에는 장장 38년 동안이나 질병에 시달리던
사람 하나가 누워있었는데 마침 그곳을 지나가시던
예수님과 마주칩니다.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라는 환자의 말을 통해 그의 병은 꽤나
심각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중증의 중풍병자였을 것입니다.
참으로 가련하고 혹독한 인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1년
2년도 아니고 장장 38년입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유다인들의 평균 수명 길어봐야 40~50세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환자는 거의 평생을 병고에 시달렸다고
보면 틀림없습니다.
단 하루라도 내 발로 한번 서보는 것, 그것은 아마도 평생에
걸친 소원이었을 것입니다. 마음껏 한번 허리 펴고 하늘
한번 올려다봤으면 죽어도 여한이 없었을 것입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죽을힘을 다해 벳자타 못까지 기어온
그였습니다. 마음으로는 수백 번도 타이밍에 맞춰 물로
뛰어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물이 출렁거릴 때 그를
물로 넣어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힘겹게 벳자타 못까지
다가선 그였지만 더 큰 절망과 상실감에 힘겨워하고
있던 그였습니다.
이런 벳자타의 환우에게 예수님께서 다가서십니다. 그저
말씀 한 마디로 그의 평생에 걸친 소원을 들어주십니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그런데 하필 새 삶을 얻은 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당시
안식일 규정이라는 덫에 사로잡혀 스스로의 몸에다
족쇄를 채우고 살아가던 유다 지도층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 법을 통해 자신들 스스로의 손발도 꽁꽁
묶어버렸지만, 호시탐탐 백성들에게 올가미를 채우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었습니다.
하필 그들 앞으로 치유된 환자가 자신의 들것을 들고
걸어갔습니다. 즉시 추궁을 시작합니다. “오늘은 안식일이오.
들것을 들고 다니는 것은 합당하지 않소.”
예수님께서는 벳자타 못 환우의 치유를 통해 당시 만연되어
있던 안식일 규정의 대중적 오류와 모순을 용감하게
지적하십니다.
당시 안식일 법에 따르면 아무리 안식일이라 할지라도
목말라하는 동물에게는 물 정도는 먹일 수 있었습니다.
또한 동물이 죽을 위험에 처하면 살려낼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안식일이라 할지라도 동물보다 훨씬
소중하고 가치 있는 인간은 왜 살려낼 수 없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중증 환우들을 삶으로
돌아오게 하는 치유활동은 결코 안식일 법에 저축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 예수님의 생각이었습니다.
안식일은 하느님을 경배하기 위해 쉬는 날이라는 의미도
지니지만 해방과 파스카를 기념하는 의미도 지닙니다.
당시 안식일에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이집트로부터
구해내신 하느님의 놀라운 업적을 기념했습니다.
그렇다면 병으로부터 한 인간을 해방시키고,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건너오게 하는 예수님의 치유행위는 안식일에
적극 권장되어야 할 일이 틀림없었던 것입니다.
치유행위야말로 안식일의 정신에 가장 잘 들어맞는 일이
분명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공생활 전체는 우리 인간들을 모든 죄와
억압과 그릇된 오류에서 해방시키기고 하느님 아버지께로
돌아 서게 하기 위한 삶이었습니다.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생명의 물이 흘러나오는 성전
오늘 독서 에제키엘서에는 주님의 집 문지방 밑에서 물이
솟아 흐르고, 그 물이 강이 되어,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고 전합니다. 이 말씀에
근거한 믿음 때문이었겠지만, 복음처럼 수많은 병자들이
예루살렘 성전 근처의 벳자타 연못에 모여 있었던 것은
하느님께서 머무신다고 믿었던 성전의 거룩한 힘이 그
연못에 조금이라도 흘러내려, 그 힘으로 병을 치유받고
싶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을 다시 곰곰이 묵상해 봅니다. 주님의 집에서
솟아난 물이 흐르고 흘러, 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살아나고,
온갖 과일나무가 자란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치유가
일어나고 평화가 만들어지는 곳은 성당 안이 아니라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곳의 현장이 아닐까요? 주님의 집에
들어와 기도하고 그분을 모시고 다시 세상 곳곳으로 흘러가
살아가는 우리들 각자가 바로 주님의 집 문지방 밑에서
솟아난 샘물이요, 온갖 생물의 갈증을 촉촉이 적시는
생명수요, 맛있는 과일을 내게 하는 원천이지 않을까요?
성전의 거룩한 힘이 우리들 각자에게 실려서, 아쉬움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활기를 불어넣는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 김귀웅 신부(서울대교구 중견사제연수) -
◈ [기타] 소나무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2013년3월12일 화요일 복음묵상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 (요한5,7)
----
이 글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들, 그 중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들 안에서, 가장 선할 수 있는
것도 사람이고 가장 악할 수 있는 것도 사람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38년간 누워있는 상태로 누군가 자신을 벳자타라는
치유의 못에 집어넣어주기를 기다렸다 한다. 38년이라면,
당시 인간수명을 생각해봐도 대부분의 삶을 그렇게
있었다는 이야기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그곳에 있던 아픈 이들과 그들의 가족은
철저하게 이기적이었다는 이야기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38년간 몸을 가누지 못해 누워있던
이에게 도움의 손길을 주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
말이다.
그를 본 예수님의 마음이 오죽이나 안타깝고 서글프셨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아마도 그냥 지나치실 수도 없었을
것이고, 세상이 왜 이렇게 돌아가고 있는가 하는 탄식도
체험하셨으리라.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노랫말을 무척 좋아한다.
이 노랫말이 전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게
살고 있다는 말이 아니라, 꽃보다 아름답게 살 수 있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노래하는 것이리라. 꽃보다
아름다워야 하는 것이 사람이 것만 무엇이 우리를
이토록 추하게 만들고 있는 것일까?
오늘 복음에서 전하는 이 가련한 이의 이야기는, 2천년 전,
어느 별난 곳에서 별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우리가 서있는 어느
곳에서도 너무도 쉽게 볼 수 있는 아픈 이야기다.
아름답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힘이 필요한 세상이다.
지금 이 순간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묵묵하게 아름다운
세상을 위해, 아름다운 인간으로의 회복을 위해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이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에게
그저 감동이나 격려의 박수를 보내는 것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가능하면 많은 마음들이 그들과 함께 움직여야
한다.
꽃보다 아름다운 것이 사람일 수 있다는 것을 보일 수
있는 우리였으면 좋겠다. 그것이 결국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셨던 그분의 삶이었고 유언이 아니었겠는가?
사람이 꽃보다도 아름다울 수 있고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고 끝까지 믿어야만 한다. 그래야 우리의 희망이
거짓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기타] <거룩한내맡김영성>'하다'의 반대말은?-이해욱신부
<斷想> 16. "하다"의 반대말은?
"하다"의 반대말은?
"되다"? "되어지다"? "하지 않다"? "안하다"? "못하다"?
우리가 보통 "~~을(를) 하다."라고 말할 때,
그 "하다"의 반대말은 무엇인가?
"하다"를 한영(韓英)사전에서 찾아보니, 첫 번째로
나온 것이 "행하다.(do, act, try, make practice)"였다.
"do"의 반대말은 "do not"?
"do not"보다 "give up"보다 "abandon"이 더 가깝다.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 6."내맡긴다"는 말의 의미는?
(2) 참고)
그리고 "~~하다."의 한자말은 "위(爲)"이다.
"爲"는 "할 위, 행위 위, 만들 위"라고 옥편에 나와 있다.
원숭이가 앞 발톱으로 머리를 긁고 있는 모양을 본뜬
글자라 한다. 원숭이의 재주로는 무엇이나 "할 수 있다"는
데서 "하다"의 뜻이 되었다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발견하게 되었는데, 이 "爲"에
사람 "人" 자가 붙으면 "거짓 僞"가 된다는 사실이다.
"僞"의 뜻은 "사람이 천리(天理)에 따르지 않고, 후천적으로
만들어 내는 일은 진리(眞理)에 어긋난다."하여 '거짓',
'가짜'의 뜻이 됨"으로 적혀 있다.(秘法漢字, 학일출판사)
야! 정말 기가 막히다!
"천리(天理)"란 하늘의 이치, 하늘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섭리(攝理), 곧 "하느님의 뜻"이다.
사람이 하면 거짓(僞)이 되고, 사람이 하지 않으면 爲,
진짜 爲, 그냥(자연스럽게) 하는 것, 自然(스스로
그러함)이 된다. "自然"이란, "원래 스스로의 모습"을 말한다.
"스스로"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니 "저절로" "자진하여"
"제 힘으로"라고 나와 있다. 이 세상에 자기 스스로,
자진(自進)하여, 저절로, 제 힘으로 된 것이 무엇이겠는가?
뻔할 뻔! 그것은 오직 하나!
모든 것의 원인자(原因者)! "하느님"이시다.
"자연(自然)"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니,
1.세상에 스스로 존재하거나 우주에 저절로 이루어지는
모든 존재나 상태
2.사람의 힘을 더하지 않은 天然 그대로의 존재
3.스스로 존재하거나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뜻을 나타내는
말
4.의식이나 경험 대상의 전체
5.사람과 물질의 고유성 혹은 본연성 등으로 나와 있다.
자! 이제 우리는 아무것에나 "자연, 자연..."을 이야기
하지 말아야 하겠다. 자연이란 하느님과 관계된 모든 것이다.
하느님과 관계된 사람만이 자연을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여튼, 사람이 하는 것은 모두 거짓이다, 가짜(僞)
이다? 사람이 하지 않는 것은 모두 진실, 진짜(爲)이다?
그러면, 진실로 하기 위해서(爲)는 내가 하지 않고(無爲)
해야(行) 하는 것, 그것뿐이다. "무위행(無爲行)"이어야
하는 것이다. 무위행할 때 비로소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진실, 진짜"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사는
모든 것도 마찬가지이다.
무엇이나 잘하는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는데,
지 머리만 믿고 지 스스로 혼자만 하다보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다. 어디로? 뻔하지 --- 지옥으로!
루치펠이 그랬고, 또 내가 그랬었다.
하라, 하지말고 하라!
하지마라, 네가 하지말라!
네 안에 계신 그분께서 하시게 하라!
살라, 삶없이 살라! 살지마라, 네가 살지말라!
네 안에 계신 그분께서 사시게 하라!
"爲"의 반대말은 그래서 "僞"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거짓 없이 참 삶(진실과 진리)을 살기 위해서는 내가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하시게 해야 하는데 하느님께서
하시게 하는 최고의 방법이 바로 나를 이 세상에 있게끔
하신 나의 주인님, 하느님을 나의 주인으로 인정해 드리고
그래서 나의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이며 그 하느님의
것들을 모두 다, 1%도 남김없이
(사도행전 5,1-2 하나니아스와 사피라)
하느님께 맡겨야, 아니 "내맡겨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거룩한 내맡김"인 것이다!
- 동경한인성당 이해욱 프란치스코 신부 -
거룩한 내맡김의 집 <마리아처럼>
http://cafe.daum.net/likeamaria/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