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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우리나라가 무역 1조 달러를 달성하는 원년이 돼야 합니 다. 그런데 급변하는 국내외 무역환경을 감안할 때 목표 달성이 말 처럼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국내 중소기업들이 더 욱 적극적으로 수출 전선에 나서야 합니다. 우리나라 중소기업 열 곳 중 다섯 곳 이상이 1달러도 벌어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진 자원이라곤 사람뿐인 나라에서 한 번도 해외시장을 경험하지 않 은 중소기업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비좁은 안방에서 싸울 힘이 있으면 바깥으로 나가라고 적극 권하고 싶습 니다. 한국 제품을 기다리는 바이어들은 널리고 널렸습니다.” 가지런히 빗어 넘긴 머리와 짙은 하늘색 와이셔츠, 붉은 넥타이 가 트레이드마크인 그의 입에서 쉴 새 없이 열변이 터져 나왔다. 그에게 외국은 더 이상 땅 설고 물 선 남의 나라가 아닌 듯했다. 마 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쳐들어가(?) 달러를 움켜쥘 것 같았다. 이 렇게 주장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의료제품 전문기업인 메타바이 오메드(www.meta-biomed.com)의 오석송 대표이사 회장이다. 푸른 와이셔츠만큼 생각이 젊고 붉은 넥타이만큼이나 정열적인 오석송 회장을 만나 그의 수출 인생과 수출 철학을 들었다. 죽기로 결심하다 ‘이 많은 빚을 어떻게 갚지? 앞으로 평생을 갚아도 못 갚을 것 같 은데…. 가족이나 친지들 볼 면목도 없고, 이럴 바엔 차라리 죽는 게 낫지.’ 1993년 6월 어느 날, 오 회장은 죽기로 결심했다. 나름 자신감을 갖고 사업을 벌였지만 하는 일마다 실패의 연속이었다. 빚은 눈덩 이처럼 불어났고, 주위의 시선도 점차 싸늘해져만 갔다. 그의 머 리 위에 드리운 인생의 먹구름은 너무도 두꺼워 아무리 시간이 지 나도 옅은 빛줄기조차 나타나지 않을 것 같았다. 경기도 송추에 있는 선친 산소로 향했다. 죽기 전에 아버지를 만 나고 싶었다. 발걸음은 무거웠고 가슴속에는 회한이 밀려왔다. 무 덤가에 앉아 소주를 들이키기 시작했다. 죽음보다 더한 절망을 느 끼며 짐승처럼 포효하다 쓰러졌다. 그러다가 먼동이 틀 무렵 머리 카락이 쭈뼛거리는 느낌에 눈을 떴다. 아버지가 어서 일어나라고 호통을 치며 두 어깨를 흔드는 것 같았다. “죽은 줄 알았는데 다시 살아나니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실 패한 나는 어제 죽었고, 다시 시작해야 하는 내가 오늘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이제부터는 덤으로 사는 인생이란 생각이 들었고, 죽 을 각오로 임하면 안 되는 일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랬더니 마 음이 차분해지면서 여유마저 생기더군요.” 아버지 산소를 뒤로 하고 내딛는 여명의 발걸음은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자살을 생각할 만큼 사정이 절박했습니까? “대천에 있는 영보탄광에 근무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자회사인 지방 연탄회사를 직접 운영하면서 경영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농협과 함께 농촌에 연탄을 공급하는 일을 하며 사업 기획의 중 요성을 알았고, ‘이렇게 하면 나도 사장이 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1989년에 국내외에서 직접 사업체를 운 영했는데, 막상 내 사업을 해 보니 어려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 었습니다. 갈수록 빚은 늘고 성과는 없고, 앞뒤가 꽉 막힌 상황이 었습니다
.” 첫 사업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1987년에 치아 신경 치료제인 근관충전재를 생산하는 한국슈어 프로덕트에 관리이사로 입사했다가 전 재산을 털어서 회사를 인수했습니다. 미국계 회사였는데, 경영진이 노사문제로 골치를 썩 다가 미국으로 철수한 뒤였습니다. 당시 이 회사가 전 세계 근관충 전재 시장점유율이 40%나 돼 유망하다고 본 거죠. 하지만 실상은 달랐습니다. 회사를 살리기보다 투쟁을 일삼는 강성 노조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했습니다. 가족들도 노조 때문에 많이 힘들어 했습 니다. 결국 사업이란 게 자금과 기술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는 깨 달음을 얻고 노조에 떠밀리다시피 회사를 나왔죠.” 해외에서도 사업을 벌이셨습니까? “한국슈어프로덕트를 나온 뒤 형제는 물론 이모, 고모 할 것 없이 주위의 친·인척들에게 돈을 빌려 인건비가 싼 인도네시아로 날 아갔습니다. 그곳에서 현지 투자자와 함께 자본금 100만 달러짜 리 회사를 세우고 근관충전재 공장 가동에 들어갔습니다. 제품에 대한 개념이 현저히 떨어지는 현지 주민들을 일일이 가르쳐 가며 고생한 끝에 제품을 본격적으로 생산할 즈음 예상치 못한 벽에 부 딪혔습니다. 해외시장의 반응이 ‘메이드 인 인도네시아’ 라벨이 붙 은 근관충전재라 믿을 수 없다는 거였습니다. 주문은 취소되고 재 고는 쌓여 가고, 결국 3년 만에 35만 달러를 모두 날리고 빈털터리 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거듭된 실패로 주위에서 걱정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만. “집안 어른을 비롯해 지인들 볼 낯이 없었습니다. 한 번 실패한 것 도 모자라 주위의 돈이란 돈은 모두 끌어모아 사업을 했는데 또 망 해 버렸으니…. 아무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죽을 결심을 하 게 된 것입니다.” 재기의 땅, 충청북도 오석송 회장은 충남 서천 사람으로 현재 메타바이오메드의 소재 지인 충청북도 오창과는 아무런 연고가 없다. 그런데도 오 회장이 충북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은 그전에 사업을 하던 시절 보은에 외주 를 줬던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1993년 9월 청주 모충동에 메타 치재산업이란 회사를 세우고 재기에 나섰다. “고등학교때 친구들이 부인들 몰래 서로 맞보증까지 서 가면서 종잣돈 5,000만 원을 만들어 줬습니다. 참으로 대단하고 고마운 친구들이죠. 그 돈을 받아 들고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비장한 마 음으로 청주에 내려가 반지하 60평 공장을 빌려 여전히 미련이 남 아 있던 근관충전재 공장을 다시 세웠습니다.” 친구들이 모아 준 돈은 눈물이 날 만큼 고마웠지만 사업 자금으 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청주 산동네에 사는 아주머니 12명 으로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생산성은 인도네시아 시절보 다 월등히 높았다. 사장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뛰어다니는 것 을 직접 확인한 데다 자기 손을 거친 제품이 해외로 수출된다는 데 자부심을 느낀 아주머니들이 마치 자기 일처럼 성실하게 일을 해 준 것이다. “회사라야 보잘 것 없을 만큼 작았지만, 사장이 영어와 일본어 를 곧잘 하고 경리 업무부터 물품 운송까지 직접 맡아서 하는 걸 본 아주머니들이 감동해서 그랬는지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당시 제품을 봉고차에 싣고 배송했는데, 핸들을 놓으면 좌우로 제멋대 로 굴러가는 고물차였습니다. 그때 아주머니들 사이에 ‘열심히 일 해서 사장 차 바꿔 주자’, ‘책상이 낡았는데 그것도 새것으로 사주 자’ 라는 합의(?)까지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죽어라고 발로 뛰자 그만큼의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바 이어들 사이에 메타에서 만드는 제품은 믿을 수 있다는 입소문 이 퍼지면서 오더가 밀려들기 시작했다.(결국 근관충전재는 메 타바이오메드가 세계 최고의 기술력과 생산량을 자랑하는 아이 템이 됐다. 전체 매출 가운데 15%를 차지하고 있으며, 전 세계 인 구 중 연간 8,000만 명이 메타 제품으로 신경 치료를 받고 있다. 현재 17% 정도인 세계시장점유율을 2015년에는 50%까지 끌어올 릴 계획이다.) 운이 열리다 근관충전재가 주력 수출 품목으로 자리를 잡자 오석송 회장은 다 른 아이템으로 눈을 돌렸다. 세계에서 7번째로 수술용 생분해성 봉합사를 개발해 낸 것이다. “1999년에 기술연구소를 설립하고 새로운 아이템을 찾을 때였 는데, 전북대학교에 특강을 하러 갔다가 생분해성 봉합원사 얘기 를 우연히 듣고 미래를 걸 만한 사업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김학용 전북대 섬유공학과 교수와 의기투합해 봉합사 개발에 도 전하기로 했습니다. 높은 기술력이 요구되는 만큼 고부가가치 제 품이었습니다.” 그러나 ‘생분해성 봉합원사 프로젝트’는 말처럼 쉽지 않았다. 1998년 당시 메타바이오메드의 매출은 28억 원 정도였는데, 프로 젝트에 필요한 자금은 그 두 배에 가까운 50억 원이나 필요했다. 투자자를 구하러 창업투자회사를 비롯해 웬만한 덴 다 찾아다녔 지만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조그만 기업이 세계적인 기업들이 쥐 락펴락하는 분야에 뛰어든 것도 이해하지 못했고, 고품질 제품 생 산이 가능할 것으로도 보지 않았다. 오 회장을 아는 어떤 사람은 “ 그냥 현재 하는 거 갖고 먹고살지 왜 사서 고생을 하려고 하느냐. 또 죽고 싶냐”는 말까지 했다. “하지만 저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제품에 대한 확신도 강했고, ‘어차 피 덤으로 사는 인생인데 뭐가 아쉬우랴’ 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결국 오 회장은 수술용 생분해성 봉합사 개발에 성공했고, 이 제 품은 현재 230억 원이 넘는 전체 매출의 절반을 차지하는 수준까 지 성장했다. 운도 따랐다. 2002년 오창 공장에서 본격적인 생산 을 앞두고 있었지만, 마땅한 판로가 없었다. 그는 이듬해인 2003 년 독일에서 열린 메디컬쇼에 샘플을 들고 출품해 한국에서도 제 대로 된 생분해성 봉합사가 생산된다는 사실을 알리는 데 주력했 다. 그런데 그 즈음 이라크 전쟁이 발발하면서 메타바이오메드에 기회가 왔다. 세계적인 의료기기 회사인 비브라운의 대량 오더를 받게 된 것이다. 해외 유명 전시회라면 하나도 빼놓지 않고 찾아다 녔는데, 이 노력이 통했는지 바이어의 눈에 든 것이다. 비즈니스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다 메타바이오메드는 전체 매출의 95%가 수출에서 발생하는 전형 적인 무역기업이다. 매년 매출액 대비 10% 이상을 연구·개발 (R&D)에 투자해 생산된 제품을 전 세계 90여 개국에 수출하고 있 으며, 매년 20% 이상의 높은 매출 증가율을 기록 중이다. 충북 오 창과 오송생명과학단지에서도 제품을 생산하지만, 해외에도 공 장이 두 군데나 있다. 중국 내몽고에서 100명, 캄보디아에서 900 명을 고용,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근관충전재를 생산하고 있다. 수출 초기 해외 출장 때 고생이 많으셨다면서요? “작은 회사다 보니 사람을 넉넉하게 쓸 수 없어 저 혼자 해외에 나 갈 때가 많았습니다. 1년 중 100여 일을 해외에서 보내면서 혼자 부스를 꾸미고 상담하고 판매까지 했죠. 그런데 좀 이름 있는 전 시회는 샘플을 팔지 못하게 하지 않습니까? 그래도 출장비를 건 지려면 어쩔 수 없이 샘플을 팔아야 했기에 세관원의 눈치를 봐 가 며 매번 150kg이 넘는 짐을 혼자서 들고 나갔습니다.
1인당 부칠수 있는 짐의 중량 한도에 맞추느라 제품을 30kg 정도씩 몇 개 가 방에 나눠 담아 앞뒤 사람에게 양해를 구한 뒤 그 사람들 이름으로 부치곤 했지요. 그리고 또 전시회에 가서는 부스를 비운 새 바이 어가 올까 봐 아예 전날 저녁부터 물이나 음료수를 마시지 않았습 니다. 돌이켜 보면 어떻게 그렇게까지 하면서 출장을 다녔는지 나 스스로도 놀랄 정도입니다. 10여 년을 그런 방식으로 외국에 나가 제품을 홍보하면서 바이어를 늘려 나갔습니다.” 회장님의 뛰어난 술 실력이 마케팅에 큰 도움이 됐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만. “2003년 봉합사 신제품을 들고 한 달에 한 번꼴로 중국으로 건너 가 상담을 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바이어가 쉽게 만나 주나요? 그 래서 중국에서는 ‘관시(關係)’가 중요하다고 보고 상대가 술을 원 하면 끝장을 볼 때까지 마시면서 친분을 다졌습니다. 아마 지금까 지 마신 중국술만 100병은 족히 될 겁니다.” 오석송 회장은 그러면서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 2007년 중국 내몽고 바오터우(包頭)에 공장을 지을 때 복잡한 인·허가와 관료주의 때문에 좀처럼 진척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바오터우 시장을 청주로 초청해 만찬을 하면서 산삼 배양 근이 들어간, 충북 특산 ‘휘’라는 술을 권했다. 당시 그 시장은 몸 이 좋지 않아 술을 자제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건강에 최고라 는 이야기를 들은 시장이 술을 한잔 두잔 받아 마셨고, 결국 동행 한 바오터우 시청 직원을 그 자리에 불러내 “오 사장이 원하는 대 로 해 줘라. 그렇지 않으면 당신을 해고하겠다”는 지시를 내리기 에 이르렀다. 이후 바오터우 공장 건설이 순풍을 타기 시작한 것 은 물론이다. (오석송 회장의 말을 빌리면, 그는 1년에 술을 400번 정도 마신다. 오 회장에게 술은 비즈니스를 성사시키고 친구를 만 드는 좋은 매개체다.) 실버산업의 글로벌 강자가 될 터 얼마 전 메타바이오메드는 인공뼈 관련 특허를 취득하고, 이를 적 용한 제품을 오는 4분기에 출시한다는 언론 보도 자료를 냈다. 인 공뼈는 정형외과나 신경외과에서 경추, 요추 등 뼈 부분의 대체나 복구에 주로 사용되는 제품이다. 메타바이오메드의 인공뼈는 기 존의 인공뼈 구조와 달리 경추, 요추 외에 모든 결손 뼈 부위에 사 용할 수 있어 적용 범위가 넓고, 진짜 인간의 뼈와 매우 흡사하다.
시제품의 전 임상시험을 모두 마쳤으며, 올해 안에 국내 제조품목
허가와 유럽 CE 인증 및 미국 식품의약국(FDA) 등록을 거쳐 4분기 중에는 국내외 시장에 출시할 계획이다. 의료기기산업 분석 보
고서에 따르면, 올해 국내 인체 경조직(硬組織) 대체시장의 규모
는 약 1,000억 원에 달하고, 해외시장의 경우 4조 원대로 추산된
다. 메타바이오메드는 인공뼈가 국내 수입 물량을 대체하고, 해외
매출에도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가 하면 메타의 차세대 품목 중에는 혈관 문합기, 요실금 치
료용 메시 등도 있다. 혈관 문합기는 수술이나 장기를 이식할 때
혈관을 이어 주는 일종의 연결 고리로, 사람의 손으로 혈관을 문합
해 숙련도에 따라 실패 확률이 높고 시술 시간이 오래 걸리는 기존
의 단점을 보완한 것이다. 그리고 요실금 치료용 메시는 봉합사 원
천 제조기술을 접목시켜 기존 요실금 메시가 조직에 상처를 주거
나 이물감을 주던 단점을 없앴다.
메타바이오메드는 지난 3월 충북 청원군에 위치한 오송생명과
학단지로 본사와 공장, 기술연구소를 이전했다. 이로써 세계적인
의료용 소재 개발 전문업체로 도약하겠다는 오석송 회장의 구상
도 착착 진행되고 있다.
“대한민국 바이오기술(BT)산업의 중심인 오송단지에 때맞춰
이전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고령화사회로 접어든 국가가 많고,
각 정부의 의료 혜택 확대로 의료 수요 또한 꾸준히 증가하고 있습
니다. 메타는 인류의 건강한 삶과 행복에 기여하기 위해 오송단지
의 BT 인프라와 그간 형성된 메타의 산학연 네트워크를 연계, 한
국을 대표하는 바이오기업으로 우뚝 설 것입니다.”
특히 메타는 신사업 진출과 기업 인수·합병(M&A)을 양 날개
로 삼아 실버산업의 글로벌 강자로 확고히 자리 잡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다. 이를 위해 지난해에는 치과장비 전문업체인 에스덴티
를 인수했다. 또 계속되는 국책 연구 과제를 통해 신사업 진출을 추
진하고 있으며, M&A에도 계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일 예정이다.
스토리가 있는 이미지 메이킹
오석송 회장은 멀리서도 금세 알아볼 수 있다. 늘 회사의 영문명
인 ‘META’가 새겨진 파란 와이셔츠에 빨간 넥타이만 착용하기 때
문이다. 또 20여 년 동안 똑같은 향기의 스킨과 헤어스타일을 고
집하고 있다.
“그렇습니다. 저는 항시 파란 와이셔츠를 입고 빨간 넥타이를
맵니다. 그러다 보니 단벌신사로 오해받기도 하죠. 하지만 그렇
게 하는 것은 저 자신이 프로 세일즈맨이기 때문입니다. 와이셔츠
를 맞출 때 처음부터 ‘META’ 이름을 박는데, 이는 ‘메타맨’임을 잊
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빨간 넥타이는 약 140개 정도 갖고 있습니
다. 빨강은 정열을 상징하죠. 특히 중국에서는 붉은색이 부의 상
징이고 비즈니스는 부의 창출이기 때문에 빨간 넥타이를 즐겨 맵
니다.” (오 회장이 쓰는 헤어로션이나 스킨로션도 ‘아라미스’라는
오직 한 가지 브랜드다. 그는 또 일주일에 한 번씩 이발을 해 자신
의 헤어스타일이 바뀌는 일이 없도록 하고 있다.)
오 회장은 요즘 푸른 와이셔츠와 붉은 넥타이를 직원들에게도
열심히 분양 중이다.
“얼마 전 푸른색 와이셔츠를 400장 맞춰 직원들에게 나눠 줬습
니다. 해외영업을 담당하는 직원들에게는 특히 더 많이 줬습니다.
전시장이라는 데가 무수히 많은 사람이 오가는 복잡한 곳 아닙니
까? 그 속에서도 파란 와이셔츠와 빨간 넥타이를 맨 사람은 ‘메타
맨’이라고 단박에 알아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고 보면 오석송 회장의 이미지 메이킹 노력은 새로 이전한
오송 본사에도 잘 나타난다. 자신의 이름인 ‘오석송’에서 착안해
다섯 그루의 소나무를 본사 정원 이곳저곳에 무리지어 심어 놓고
소나무 사이사이에 큼직하고 멋진 돌을 배치했다. 그 ‘오석송(五
石松)’으로 인해 회사에 들어선 사람들은 메타바이오메드를 보다
쉽게 기억하게 된다.
“매일 아침 4시에 일어나 5시 반이면 회사에 도착합니다. 혼자
사업 구상도 하고 신문도 보면서 시간을 보냅니다. 그리고는 생각
합니다. 새로운 하루는 매일 시작되고, 해외에는 새로운 시장이
항상 생겨나고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