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친구 민자. 지난겨울 서툰 자전거를 타고 야쿠르트를 배달하다가 빙판길에 넘어져 발목뼈에 금이 가 기브스를 했다는, 삐끗한 삶에 질질 끌려 함박눈이 길을 지워버린 용문동 뚝방 어디쯤 허름한 학습지 공장에 다닌다는,
썩어가는 다리를 치료하지 못해 대들보에 목을 매달 수밖에 없었던 상이용사 아버지를 두었던, 씨받이로 탐낸 동네 남자들 피해 야반도주 하듯 서울로 이사해 하룻밤도 편히 주무시지 못한 어머니의 슬픈 노랫 가락 젖은 눈빛이 목구멍에 가시처럼 아리다는, 그래서 3교대 낮, 밤 시내버스 안내양 아가씨로 서울시내를 빙빙 돌며 돈을 모아 친정 집 사주었다는, 영업용 택시 운전하는 남편과 맞선으로 서른 고개 훌쩍 넘 겨 결혼했다는,
민자, 이제 영세한 학습지 공장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다. 알콜중독 되어, 밖으로 방문 잠가놓고 출근해야 하는 시어머니, 일보다는 고스톱 으로 한 탕 잡아보겠다는 남편, 빙 빙 빙 집에서 노란 주둥이 빼물고 하루종일 모이 물어오길 기다리는 새끼들 주변을 돌고 있다. 뭔가 기원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를 잃어버린 것 같기도 하다. 아니 더듬이를 잃어버린 일개미 같다. 엉성한 문틈으로 들어온 황소바람이 힝힝거리며 학습지를 들춰보기도 하고 난로에 올려진 주전자에서 따뜻한 기억들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기도 하는 학습지 공장 안에서 그녀는,
늘 밀려난 삶 언저리를 빙빙 돌고 있다. 죽을 때까지 제자리를 돌 수 밖에 없는 가젤 한 마리. 식구들이 도란도란 이야기할 수 있는 고구마 냄새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작은집을 갖는 것만이 소원이라는,
어릴 적 이웃집에 살았던, 언니들이 식모 살아 중학교까지 마치게 했 던, 그렇게도 효성이 지극했던 내 친구 민자는,
'낙하하는 것의 이름을 안들 睡蓮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대한매일 박소연
백 송이 꽃을 피운 수련은 어느덧 물에 잠겼다. 서서히 문이 열리고 있었고,바람은 그때 태어났다.
나의 이름은 피곤한 바람이다. 나는 백 송이 수련이 내뱉은 한숨이다.
햇빛이 몸을 데워 비상했고, 몸 속에는 한 방울 물이 갈증을 태우고 있다. 내 몸은 지금 구름빛이다.
나는 가볍다. 후두둑 떨어지는 적색 열매처럼 가까운 미래에 나는 돌아갈 것이다. 이마에 떨어지는 것, 얼굴에 번지는 것
내게 쇄도하는 현기증. 그대 몸에 얼룩지는 오래된 바람,흰 손길에 갇혀 나는 물 밑에 있고 나는 오므라들어 졸고,
백 송이 꽃을 피운 수련은 어느덧 물에 잠겼고, 물 위를 지나던 나는 바람이요 장막이요, 그때 저기 부유하는 꽃잎.
가문비냉장고 동아일보 김중일
내 생의 뒷산 가문비나무 아래, 누가 버리고 간 냉장고 한 대가 있다 그날부터 가문비나무는 잔뜩 독오른 한 마리 산짐승처럼 갸르릉거린다 푸른 털은 안테나처럼 사위를 잡아당긴다 수신되는 이름은 보드랍게 빛나고, 생생불식 꿈틀거린다 가문비나무는 냉장고를 방치하고, 얽매이고, 도망가고, 붙들린다 기억의 먼 곳에서, 썩지 않는 바람이 반짝이며 달려와 냉장고 문고리를 잡고, 비껴간다 사랑했던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데리고 찾아와서 벼린 칼을 놓고 돌아갔다 매일 오는 무지렁이 중년남자는 하루에 한 뼘씩 늙어갔다 상처는, 오랜 가뭄 같았다 영영 밝은 나무, 혈관으로 흐르는 고통은 몇 볼트인가 냉장고가 가문비나무 배꼽 아래로 꾸욱 플러그를 꽂아 넣고, 가문비나무는 빙점 아래서 부동액 같은 혈액을 끌어올린다
가까운 곳에, 묘지가 있다고 했다 가문비나무가 냉장고 문열고 타박타박 걸어 들어가 문 닫으면 한 생 부풀어오르는 무덤, 푸른 봉분 하나가 있다는,
고수부지 동양일보 유현숙
내 몸은 저장물을 다 비워낸 고수부지이다
큰 물이 날 때에나 강은 내 어깨를 잠시 빌리며
저 혼자 하루도 도도히 흘러간다
물이 빠져나간 그 자리엔 밀려 온 세월 하나가
상흔처럼 뒹굴고 있다
급하게 달려 온 저 물길은 이제
강의 하류 어디쯤에서 노곤한 몸 풀고 싶은 것일까
제 몸에서 흘려 놓은 것들 미처 쓸어담지 못하고
서둘러 떠난다
내 전신을 훑고 지나간 물길은 저기 어디
산하를 지나가다 그리운 안부 하나쯤 부쳐 줄런지
때로 급류에 떠밀린 적이 있었다해도
한때 신세졌던 내 어깨 한 켠능 잊지 말기를
욕심내 보는이 청맹과니 같은
그대가 빌려 쓴건 어깨 뿐이라는데
나는 왜 가뭄에 배 터진 논배미처럼
쩍쩍 갈라진 전신을 앓고 있는가
새들은 북국으로 날아간다 매일신문 이향
강 건너 쌍림공단 쪽에서 깃털에 따스함을 숨기고
쇠기러기 한 떼가 북국으로 날아간다
뭉텅뭉텅 욕설 게워내는 굴뚝 위로
폭설이 내려 세상의 길들 질척거린다
눈발에 못이긴 나무들 길게 휘어지고
섬유공장 연사실 대낮에도 알전구가 껌벅거린다
서른 두살의 조선족 김금화씨는
귀마개 꽁꽁 틀어막아도 눈내리는 소리 들린다
윙윙대는 기계소리가 푸른 뽕잎 갉아먹고
다급하게 실 토해내어 고치를 만든다
고치 속으로 들어간 그녀는
수천마리 나비가 되어 꿈 속을 날아다닌다
몰래 숨겨둔 적금통장에는
삼만원 미만의 싸락눈이 하얗게 쌓인다
두고 온 북국 눈발에 파묻힌 무도
연초록 싹 내밀어 봄을 기다리겠지
막내의 바짓단도 겨울해만큼 짧아졌는지
더 자랄데 없어 서걱이는 강둑의 갈대가
그리움에 얼굴 묻고 우는 저녁
젖몸살로 뒤척이다 뱉아놓은 보랏빛 한숨
한 가닥 물고 북국으로 날아가는
저 쇠기러기 떼
바퀴는 끝없이 구른다 무등일보 문지원
드디어 팡파레 소리가 만국기처럼 펄럭인다.
좌석 뒤에 돗자리를 편 가족은
다닥다닥 붙어 앉아 간밤의 꿈을 응원한다
십이월의 바람은 시린 호주머니에 가득하고
배팅 된 전광판의 숫자가 달음질치기 시작한다
박수 소리보다 선수들의 헬맷이 야무지게 빛난다
비탈 진 길에서는 페달을 더욱 세차게 밟아야 한다
함성이 선수들의 붉은 다리만큼 굵어지면
욕설도 응원을 비는 무슨 부적이라고 간간이
카악 칵 가래침까지 뒤통수에 붙여준다
누가 들여왔을까 세 발 자전거, 아이의
작은 발등에 노란 전표가 붙었다 날아간다
경기 막바지에 다다른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빠르다
허기진 오후까지 채워주는 알진 통감자
사람들 입에서 뜨거운 김이 뿜어져 나온다
자리다툼하는 바퀴에 햇살이 사납게 퉁겨진다
조금만 더! 저기가 고지다!
선수들의 각진 턱이 페달과 함께 부러질 것 같다
골인 지점을 막 지나가는 바퀴들을 향해
사람들의 눈에선 정밀한 플래시 불빛이 터진다
우승한 선수의 주변으로 환성이 모였다 흩어지고
풀죽은 어깨들이 전표처럼 구겨진다
우승을 점치던 책자들과 빨갛게 벌렁거리던 밑줄들과
차갑게 식은 한숨들이 텅 빈 관람석에 채워지고
갈기갈기 라인이 그려진 가슴들이
하루를 올라타고 페달을 굴린다 갑자기 컴컴해져 오는 저녁을
응시하는 눈동자들, 두 개의 검은 바퀴가
이탈할 수 없는 어둠 속 트랙을 따라 털털털 굴러가고 있다.
감성돔을 찾아서 문화일보 윤성학
홀로 바위에 몸을 묶었다
바다가 변한다
영등철이 지나 바다가 몸을 바꿔 체온을 올리고
파도의 깃을 세우면
그들은 산란의 춤을 추기 시작한다
빠른 물살이 곶부리를 휘어감는 곳
빠른 리듬을 타고 온다
영등 감생이의 시즌이다
바닷물의 출렁거림은 흐름과 갈래를 지녔다
가장 강한 놈은 가장 빠른 곳에서만 논다
릴을 던져라 저기 본류대를 향해
가쁜 숨 참으며
마음 속 깊이로 채비를 흘려라
거칠고 빠른 그곳
거기 비늘을 펄떡이는 완강함
릴을 던져라
바다는 몸을 뒤채며 이리저리 본류대를 끌고 움직이지만
큰 놈은 언제나 본류에 있다
본류는 멀고
먼 데서부터 입질은 온다
바다의 마개를 뽑아 올릴 힘으로 나를 잡아채야 한다
팽팽한 포물선을 그리며 발밑에까지 끌려온 마찰저항
마지막 순간이 올 때
언제나 거기 있다
막, 채비를 흘려보냈다
온다
사냥감을 찾아서 부산일보 안차애
1
배꼽에서 비스듬히 3㎝ 위쪽 지점을 깊이 맞뚫어
피어싱(piercing)한다
생각보다 많은 출혈량은 있었지만
멧돼지 어금니 모양의 둥근 봉 두 개를 마주 꽂아
기쁨을 장식한다
바야흐로 성인식이다
어제는 들소 뿔 모양 장신구를
그제는 사슴의 목뼈 모양 링을
며칠 전엔 상아 모양 고깔을
미간에 귓바퀴에 귓불과 입술에 바짝 매달았다
비로소 야생 동물의 더운 피가 쿵쾅거리며 온 몸을 뛰어다니고
2
사냥감이야 늘 지천이다
혼다 4기통 오토바이로 시속 100㎞ 남짓 달리다 보면
알타미라 동굴 근처의 바람을 사로잡을 수도 있다
지중해 노래방에서 고래고래 악을 쓰다 느닷없이
오호츠크해산 고래 한마리가 친구 입 속에서 튀어나오는 걸
깔깔대며 잡기도 한다
취향이야 늘 바뀌기도 하므로,
오늘밤엔 늙은 아버지의 가슴 뼈 밑에 숨어사는
느린 곰의 촌스러운 진지함을 새삼 사로잡아
혓바닥에 박고 싶다,아주 가학적으로
빈 들에 서다 불교신문 이정원
저, 무청 푸르딩딩한 대님만 남은
들판
우수에 잠겨 침침하다
단물로 품었던 속정까지 내주고야
빈 들이 되었다.
산발한 은발로 밭두둑 억새꽃
몇날 며칠 손짓 거듭했어도
내 안에도 썰렁 썰렁 비어가는 들판 있는거
눈치 못채고 있다가
11월이 들녘 끝자락부터 아득 아득 저물어 오면
나도 못내 저물어 땅거미가 되는 것인데
저물다가 문득
自盡하려 곤두박히는 나뭇잎 보았다
재빠른 하강곡선
그속에 잎맥같은 무수한 길이 보였다
뿌리에서 잎맥까지 이어진
길따라 나섰다
감은눈 속으로도 휘영청 열린
길은 이제 들숨에서 시작되고
날숨으로 끝나가고 있다
뿌리가 준비한 거한 목숨들
길 가운데 빼곡했다
텅텅 비워야 겨울은 그 빈 여백에
작은 움 하나를 그리기 시작한다는 깨달음
그 길 어느 도중에야 섬광처럼 왔다
내 비어가는 속 뜰 어디엔가도
형형안 만다라 한폭 쟁여져 있으려나
다시 빈들에 서 본다
冬 安居에 들고 있는 초겨울
저 들판
바람 쓸리는대로 지는 잎새처럼 떨어져
섭생의 가드레일 같은
난해한 눈빛으로 열반경을 읽고 가는
새 떼 한무리
가뭇없는 허공에 銀紙처럼 구겨박혀
일몰이 된다
버스칸에 앉은 돌부처 세계일보 심은희
생은 울렁거림이다;(누군가 말을 걸어오는지)
목젖을 타고 올라오는 건
환멸이란 이름의 멀미다
그만 살았으면 싶은 노인들의 푸념 또는 수작처럼
부끄러움도 없이 늘어진 가로수들이나
심하게 쳐진 할머니 입꼬리에 걸린 담배처럼 언제라도 툭
떨어질 듯이 과자 봉지를 들고 질주하는 어린 아이를 볼 때면
그것은 어김없이 찾아오는 것이다
기어이 아이의 과자는 축포처럼 공중분해되고
어디선가 날아든 비둘기들은 겁도 없는 상이군인처럼
버스전용차선으로 뛰어든다 순간 나는
위험 수위를 넘어서고 있는 어머니의 노동을
떠올렸다 그리고 잠시 비틀거렸는지도 모르겠다
아! 이제 알겠다 콘크리트 벽에 일렬로 달라붙어
초호화 캐스팅을 자랑하는 나이트 클럽 벽보를
무슨 복권처럼 긁고 있는 노인들을 볼 때면 왜
까닭모를 화가 치미는지를
버스는 이내 저 홀로 풍성한 계절을 맞이한 청소차를
아슬아슬 비껴나간다 청소차에서 분명
낯익은 해골 하나가 또르르 굴러 떨어졌다
차가 덜컥덜컥거리며 정류장에 멈출 때마다
짤랑거리며 들어서는 건 언젠가는 내 몸 가장
투명한 부분을 밀치고 들어설 낯선 불행들일 것이다;갑자기 숨이 가빠온다
(아까부터 누군가 말을 걸어오는데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