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서예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三道軒정태수
顔眞卿 撰幷書 '顔氏家廟碑'(780년) |
흔히 중국의 서예는 크게 두 조류로 분류한다. 하나는 왕희지를 중심으로 한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안진경을 중심으로 한 것이다. 이것은 전통적인 서와 현대적인 서라는 기준에서 설정된 개념이지만 최근 이러한 개념설정이 다소 수정되었다. 기존에는 왕희지를 전통파로 확정하고 안진경을 혁신파로 규정한 데에서 안진경이 반왕희지의 서예적 성향을 보이고 있다고 보았으나, 안진경이 결코 왕희지를 반하지 않았다는 점이 확인되면서 개념 수정이 불가피하게 된 것이다. 안진경은 전통서예에 대한 혁식이 분명하지만 결코 왕희지를 반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를 초월한 서예가로 인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통과 혁신의 개념에서 혁신의 입장에 선 안진경은 후대에 끼친 영향이 지대하다. 그만큼 서예사가들은 중국서예의 조류를 바꿀 만큼 안진경의 서예적 위치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초당의 전형주의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서예문화를 형성하고, 또 인문학에서 성대하게 꽃을 발하는 북송대의 서예문화가 안진경과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주목한 결과이다. 거기에는 그의 높은 인품과 충절이 한 몫을 하였다.
'신당서'에 안진경의 전기가 보인다. 안진경은 안사고(顔師古)의 5세 종손(從孫)으로 자가 청신(淸臣)이며, 어렸을 때는 선문자(羨門子)라 하였고, 호는 응방(應方)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훗날 세상사람들은 그의 사람됨을 존경하여 성명을 부르지 않고 다만 노공(魯公)이라 호칭하고 있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모친의 슬하에서 직접 훈도를 받아 26세 때 진사에 급제하여 평원태수(平原太守)에 올랐다. 장안 출신으로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였는데, 당조의 재건을 위해 헌신하다 덕종(德宗) 정원(貞元) 원년(785) 8월 정적 이희열(李希烈)에 의해 채주(蔡州 : 河南省) 용흥사(龍興寺)에서 액살(縊殺)되었다. 그때 나이 77세였다.
그의 글씨는 대부분 비에 남아 있으나 이외에도 임금에게 올린 세 개의 표(表)와 세 편의 초고 즉 삼표(三表)와 삼고(三稿)가 유명하다. 금년 여름, 필자는 경주에서 발견된 신라시대 무장사비의 복원이라는 과제를 맡아 왕희지 글씨를 탐색하기 위하여 서안(西安)의 비림(碑林)을 방문한 적이 있다. 이때 왕희지의 '집자성교서' 뿐만 아니라 안진경의 '안근례비'와 '안씨가묘비'를 직접 목도하였다. 그 때 석경을 비롯하여 왕희지류의 글씨들이 대부분 정교한 소자였으나, 안진경의 글씨들은 활기찬 대자서로 쓰여져 웅혼한 기상과 고풍스런 면모가 참으로 아름다워 닳아진 비면을 어루만지며 감탄하였다.
여기에 소개하는 '안씨가묘비'는 안진경이 72세 때 쓴 최만년의 글씨이다. 사면에 글씨가 새겨져 있어 '사면비'라고도 지칭되며, 전액은 이양빙(李陽?)이 썼다. 이 비는 이전에 쓰여진 '안근례비'나 '다보탑비'의 정연한 세련미가 한껏 성숙되어 고풍스럽고 소박한 풍격을 자아내고 있다. 원필의 맛을 살려 주경한 필획을 구사하고 있는데 대자서로 쓰여진 '마고산선단기(麻姑山仙壇記)'와 더불어 안진경 후기 해서의 대표작으로 불린다.
참고로 구양순이 76세 때 쓴 '구성궁예천명'과 안진경이 72세 때 쓴 '안씨가묘비'를 비교해보면 그 심미적 특징을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왕희지를 전형으로 삼은 구양순과 이를 탈피하여 독자적 서의 경지를 개척한 안진경은 모두 당대를 대표하는 작가들이지만 서로 다른 필세를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은혁(사단법인 한국서예문화연구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