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할수있는 일본] 한반도에 미칠영향은… 달라지는 동북아 안보 지형 / 일본의 ‘6·25 개입’
[전쟁할 수 있는 일본] … 6·25 때 옛 일본군도 한반도에 투입됐다
요시다 “한반도 해역 기뢰 제거는 전투행위 … 비밀로 하라”
6·25 때 옛 일본군도 한반도에 투입됐다
한반도 유사시 일본 자위대는 미군의 요청으로 한반도에 진입할 수 있을까.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 범위가 미군의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과 이어지면서 논란을 부르고 있다.
우리 정부는 “우리 측의 요청 또는 동의가 없는 한 용인될 수 없다” 는 입장이고, 일본도 이를 인정한 상태다. 한민구 국방부 장관은 지난 21일 국회 법사위에서 “북한이 전쟁을 일으키면 전작권을 가진 미군이 일본 자위대에 (한반도에) 들어오라고 하면 거절할 수 있겠나” 라는 질의에 “있다” 고 답변했다.
그런데도 논란이 완전히 가라앉지 않는 것은 미군의 지휘 또는 요청으로 일본이 사실상 병력에 해당하는 작전요원을 한국에 보낸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중앙SUNDAY가 한국 · 미국 · 일본 등의 각종 기록과 증언을 분석한 결과 미군은 6·25전쟁 당시 한국 정부의 동의 없이 제2차 세계대전 참전 경험이 있는 옛 일본군과 다수의 민간인을 한반도로 불러들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양영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군사부장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기록을 인용해 “1950년 7월 20일 대전 전투에 참전한 주일 미군 24사단을 따라 들어온 일본인 군 노무자들에게 소총이 지급됐다” 며 “이들은 북한 4사단 정예부대의 기습공격을 받아 여러 명이 사망했다” 고 말했다. 당시 종군기자(로이터통신)로 활동한 지갑종(88) 유엔한국참전군협회장도 “미군은 일제시대 한반도에서 열차 기관사로 일하던 본토 일본인을 소집해 데려와 미군 수송열차를 운전하도록 했다” 고 증언했다.
1950년 주로 퇴역 군인들로 구성된 일본 해상보안청 대원 1200여 명이 54척의 소해정 (掃海艇)을 타고 원산 상륙작전과 진남포 · 해주 · 군산 앞바다 기뢰제거 작전에 투입된 사실은 이미 학계에서 확인됐다. 또 2000년 7월 8일자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한국전쟁에 참전 중이던 일본 선원 나카하라 가쿠이치가 51년 9월 6일 미군 상륙정(LST)에 승선했다가 사고로 숨졌다. 주일 유엔군총사령부는 이 사실을 51년 9월 13일 일본 외무성에 통보했다.
일본의 ‘6·25 개입’ 어떻게 이뤄졌나
일본이 6·25전쟁 때 한반도에서 미군이 주도한 유엔군을 도와 실질적 군사작전에 해당하는 활동을 광범위하게 전개했던 사실이 국내외 각종 자료에서 확인됐다.
1945년 8월 태평양전쟁 패배 후 일본군은 한반도에서 물러갔다. 하지만 불과 5년 만인 50년 옛 일본 군인 등을 비롯한 다수의 일본인이 한반도에 다시 들어와 비밀리에 군사작전에 참여한 것이다.
중앙SUNDAY는 오쿠보 다케오(大久保武雄) 전 일본 해상보안청 장관의 회고록 『해명(海鳴)의 날들』(1978년), 일본 정부의 『해상보안청 50년사』(1998년), 일본 방위연구소 다니무라 후미오(谷村文雄) 연구원의 일본 특별소해대(掃海隊) 활동 관련 학술 논문, 일본 학자 오누마 히사오(大沼久夫)가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에서 발굴한 유엔군 총사령부(GHQ) 문서, 남기정 서울대 일본연구소 교수의 도쿄대 박사학위 논문 (조선전쟁과 일본), 양영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군사부장이 발굴한 미국 국립문서 기록관리청(NARA)의 대전 전투 관련 기록, 일본 아사히(朝日)신문의 기획 보도,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6·25 일본 참전의 비밀’(박건식 연출) 등의 자료를 종합 분석해 일본의 6·25전쟁 관련 행적을 재구성했다.
최근 일본에서도 1950년 경찰예비대의 조직과 훈련 경험을 다룬 『반란병의 전언』이라는 전 대원의 자전적 소설이 발간돼 6·25와의 관련성이 새삼 화제를 모으고 있다. 이들 내용을 종합하면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일본 본토를 점령한 미군에 의해 해산됐던 옛 일본 군인들과 현직 공무원, 그리고 다수의 민간인이 여러 방향에서 6·25전쟁 기간에 한반도에서 전개된 군사작전에 투입됐다. 한때 미국 의회에서 논의했던 공식 전투병 파병은 없었다고 하더라도 일본인들은 소총을 들고 전투도 했다. 남기정 교수는 “6·25전쟁은 북한과 중국 · 소련에 맞서 한국과 미국 · 일본이 함께 싸운 전쟁이었다” 고 규정했다.
이승만 대통령(왼쪽)이 1950년 2월 18일 더글러스 맥아더 연합국 최고사령관의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해 하네다 공군기지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사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일본, 패전 5년 만에 재무장 첫 단추
50년 6월 25일 오전 4시 김일성이 남침 도발해오자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정부와 일본에 있던 미 극동군사령부에 긴급 지원을 요청했다. 27일 일본에 주둔하던 미 극동 해군과 공군이 한반도로 출동했고, 30일에는 4개 사단 규모의 주일 미 지상군이 들어왔다. 전쟁 발발 초기 일본은 한국에서 철수한 미국인 등 2001명에게 긴급 피란처 역할을 했지만 다른 적극적 역할은 할 수 없었다. 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이후에도 명목상 천황제가 유지됐지만 GHQ 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가 일본의 실질적 통치자였다. 특히 GHQ를 주도한 미 극동군사령부는 46년 11월 대일본제국헌법을 수정해 ‘전쟁 포기, 전력 불보유, 교전권 부인’ 을 담은 새 일본국헌법을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이 터지자 맥아더 사령관은 한반도로 출동한 주일 미군의 공백을 메운다는 명분으로 7월 8일 일본 경찰예비대를 창설한다. 경찰예비대는 52년 보안대를 거쳐 54년 사실상의 군대인 자위대로 탈바꿈한다. 2차 대전 패전 이후 불과 5년 만에 일본 재무장의 첫 단추를 미국이 끼워준 셈이다.
6월 27일 유엔 안보리에서 유엔회원국의 한국 지원 결의안이 통과되고 7월 8일 유엔군이 창설되자 일본은 상당한 압력을 받는다. 하지만 평화헌법의 제약 때문에 갈등하던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당시 총리는 북한군의 공세로 유엔군이 부산 일대까지 밀리자 8월 29일 맥아더 원수에게 “필요로 하는 어떤 시설과 노력도 제공할 용의가 있다” 고 말했다. 이에 따라 규슈(九州) 비행장과 사세보(佐世保) 해군기지가 미군의 후방기지 역할을 했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계기로 일본인들은 한반도에 더 직접적으로 발을 들여놓게 된다. 일본 해군과 육군 장교 출신 3명은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기 전에 현지를 정찰하고, 인천항 수위가 가장 높아 상륙작전을 하기 좋은 시점이 9월 15일이라고 알려줬다.
미군 병참 업무도 일본인들이 맡아
상륙작전에 앞서 옛 일본군 정보장교 200~300명은 한반도 식민지배 시절의 경험을 토대로 만든 지도 등 상세한 한반도 지리 정보를 미군에 제공했다.
일본인들은 미군 상륙함(LST)에 탑승해 병참 업무도 맡았다. 심지어 일본의 한 중소기업은 상륙작전 때 쓸 사다리를 미군의 주문으로 제작해 공급했다는 증언도 있다.
9·28 서울 수복 직후 맥아더 사령관은 주력부대를 육로로 북상시키면서 제10군단에 원산상륙작전을 지시했다. 북상한 지상군의 원활한 보급을 위해 바다를 이용하겠다는 ‘임진왜란 전법’ 이었다. 10월 20일을 원산 상륙작전 D데이로 잡고 있던 미군에 복병이 나타났다. 9월 4일 진남포에서 북한군이 매설한 기뢰가 발견됐던 것이다. 원산 앞바다에도 소련제 기뢰 3000발이 매설된 것으로 드러났다.
다급해진 미 극동해군은 10월 2일 오쿠보 해상보안청 장관에게 일본 소해정의 작전 지원을 요청했다. 미군의 민감한 요청을 들은 오쿠보 장관은 즉시 요시다 총리에게 보고했다. 다니무라 후미오 일본 방위연구소 연구원의 논문에 따르면 당시 요시다 총리는 한반도 해역에서 진행하는 소해작업을 전투행위로 판단했다. 그 때문에 해상보안청법(25조)에서 비군사적 부대로 명시된 해상보안청 소해부대를 파견하는 것이 요시다 총리에게는 상당한 정치적 부담 요인이었다. 소해작전에 일본인이 투입된 사실이 외부로 공개될 경우의 파장을 의식한 요시다는 “기뢰를 제거해야 한다면 협력은 하되 비밀로 하라” 고 지시했다.
‘6·25 파병’ 규모, 일본이 네 번째
10월 8일 일본 해군 출신이 주축이 된 일본 특별소해대원들은 시모노세키(下關)항을 출발했고, 도중에 이들에게 소총이 지급됐다. 원산 앞바다에서 미군과 함께 기뢰 제거 작업을 하던 17일 오후 일본 소해정 MS14호가 기뢰와 접촉했다. 이 사고로 나카타니 사카타로(中谷坂太郞·당시 21세)가 실종되고 22명이 다쳤다. 일본 정부는 전사 통보를 하면서 가족들에게 함구령을 내렸다. 원산뿐 아니라 진남포 · 해주 · 군산 앞바다에서 1200명의 일본 소해대원과 소해정(掃海艇) 54척이 투입됐다.
남기정 교수는 “일본은 6·25전쟁 때 공식 참전한 유엔 16개 회원국에 이어 사실상 17번째 참전국이었다” 며 “소해부대 대원 수만 따져도 일본은 미국 · 영국 · 프랑스에 이어 6·25 참전 규모로 보면 세계 4위 규모” 라고 설명했다.
일본의 개입은 바다에서만 이뤄진 게 아니었다. 시라즈카란 일본인이 51년 11월 서울 인근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기록도 있다. 남하하던 북한군 저지 임무를 맡았던 미 24사단은 50년 7월 20일 대전에서 북한군 4사단 정예부대의 기습공격을 받았다. 윌리엄 딘 사단장이 포로가 된 당시 대전 전투 와중에 다수의 일본인이 소총을 들고 싸우다 사망했다(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자료). 이들은 일본 현지에서 미군들과 함께 생활하다 우리 정부 승인도 없이 몰래 들어왔던 일본인 노무자들이었다.
일본인의 혈액도 한반도로 보내졌다. 생체실험으로 악명 높은 일본 관동군 731부대 출신 군인들은 일본 혈액은행을 설립했다. 이들은 전쟁 중에 싼값에 일본인의 혈액을 사들여 한국 전선에 비싼 값에 되팔아 차익을 챙겼다. 후쿠오카(福岡)에 있던 유엔군 후방병원에는 일본 간호사들이 파견돼 미군을 치료했다.
맥아더, 日 참전 부인… 요시다 “기억 없다”
일본인의 사실상 참전은 6·25전쟁 당시에도 상당한 논란을 일으켰다. 박헌영 북한 외상은 50년 10월 15일 소련군에 붙잡힌 일본인 포로들을 근거로 “한국전쟁에 일본군 부대가 참전한 것은 국제연합법과 일본헌법을 위반한 것” 이라고 비난했다.
이와 관련해 이승만 대통령은 “만약 일본군이 미군을 도운다는 이유로 한국 전선에 참전하면 우리는 공산당이 아니라 일본군과 먼저 싸울 것” 이라고 선언했다. 6·25전쟁 때 종군기자(로이터통신)로 활동한 지갑종(88) 유엔한국참전군협회장은 “이 대통령은 원산상륙작전 이후 중공군 개입(10월 25일) 이전 시점에 그런 발언을 했다” 고 회고했다. 이에 대해 맥아더 원수는 참전설을 강하게 부인했다. 미 육군이 발간한 전쟁사 기록에 따르면 맥아더는 “전투 목적이 아닌 인도적 목적으로 일본 소해정을 사용했다” 고 미 국방부에 보고했다.
51년 당시 30대 의원이던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는 대정부 질문에서 “한국 파병은 일본의 (평화헌법) 기조를 흔드는 것 아닌가” 라며 요시다 총리를 추궁했다. 요시다 총리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고 발뺌했다.
하지만 일본의 참전이란 역사적 진실을 끝내 감출 수는 없었다. 로버트 머피 전 주일 미국대사(52∼53년 재임)는 후일 “(35년간의 식민통치 경험으로) 한국을 잘 아는 수천 명의 일본인 전문가들이 한국에 가서 (6·25전쟁을) 돕지 않았다면 연합군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 이라고 말했다. 일본의 6·25전쟁 개입 사실을 증언한 것이다.
남기정 교수는 “일본 소해부대원들은 민간인이 아니라 공무원 신분으로 참전했다” 며 “일본 정부의 국가 의지가 있었다고 봐야 한다” 고 분석했다.
집단적 자위권은 한국에 양날의 칼
일본은 6·25전쟁을 계기로 막대한 전리품을 챙겼다. 일본이 얻은 전쟁 특수만 62억 달러(최근 환율로 7조4000억원) 규모였다. 무엇보다 일본은 6·25전쟁 중이던 51년 열린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독립국이 됐고 이 과정에서 식민지 배상 책임과 독도 문제에서 유리한 입장에 섰다. 52년 3월 GHQ는 일본 정부의 무기 생산도 허가했다.
6·25전쟁 때 일본인들이 한국 정부나 이승만 대통령의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한반도에 들어왔다는 역사적 기록은 한반도에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일본은 패전 직후에도 한반도를 식민지로 유지하기 위해 미국 · 소련과 협상했다” 며 “식민지 향수가 있는 일본 우익들은 한반도에 급변사태가 발생하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 이라고 우려했다.
남기정 교수
양영조 전사부장은 “집단적 자위권 관련 안보법안 통과로 일본이 다시 한반도에 들어올 가능성이 6·25전쟁 때보다 훨씬 커졌다” 고 분석했다. 게다가 일본 해상자위대는 세계 2~3위, 항공자위대는 세계 4위로 평가될 정도로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다(박영준 국방대 교수).
정옥임(전 미국 브루킹스연구소 연구원) 고려대 초빙교수는 “집단적 자위권은 한국의 안보에 양날의 칼과 같다” 며 “한 · 미 동맹을 보험으로 갖고 미국의 틀 속에서 일본을 바라보면서 북한의 도발에 분명한 대응책을 갖고 있어야 한다” 고 말했다.
- 중앙선데이 제446호 | 장세정 기자 | 2015.09.26
[전쟁할 수 있는 일본] … 한반도에 미칠 영향은
일본, 70년 만에 ‘전쟁 가능한 나라’ 복귀 / 수만 명 반대 시위 속 강행 처리
일본, 70년 만에 ‘전쟁 가능한 나라’ 복귀 / 수만 명 반대 시위 속 강행 처리 안보법안이 일본 참의원 본회의에서 통과되기 직전인 18일 밤 도쿄 의회 앞에서 ‘전쟁 반대’라는 플래카드를 든 시위대가 구호를 외치고 있다. [AP=뉴시스]
유사시 주일 미군 한반도 파병 땐 자위대 후방 지원 가능
[전쟁할 수 있는 일본] 한반도에 미칠 영향은
야당과 시민단체들의 격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19일 오전 2시18분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 정부가 참의원 본회의에서 11개 안보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들에 대해 일본 내는 물론이고 한국과 중국, 북한 등에서 우려와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일본 국내에서는 이 법안들이 국가 정책수단으로서 전쟁을 포기한 헌법에 위배된다는 비판이 강력하게 제기됐다. 한국 내 주요 언론들은 이들 법안에 의해 ‘전쟁할 수 있는 일본’이 됐다고 경계하는 시각을 보이고 있다. 북한 관영매체들도 연일 이 법안들이 “군국주의 재생의 위험성” 을 갖는 것이라 보도하고 있다.
반면 법안 강행을 관철한 아베 정권과 이를 지지하고 있는 일본과 미국 내 안보 전문가들은 이 법안들이 일본의 억제태세를 강화시켜 일본 및 아태 지역의 안정을 높이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이 법안들의 내용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상반되는 평가들이 나오는지 객관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미군 외 타국군도 군사시설 이용 가능
소위 안보 관련 11개 법안은 이번에 개정 대상이 된 자위대법 · 국제평화협력법 · 중요영향사태안전확보법 · 선박검사활동법 · 무력공격사태대처법 · 미군행동관련조치법 · 특정공공시설이용법 · 해상수송규제법 · 포로취급법 · 국가안전보장회의설치법 등 10개 법안과 새로 제정된 국제평화지원법 등을 가리킨다.
이 법안들의 내용을 보면 공통으로 두 가지 경향이 발견된다.
첫째, 이 법률안들은 일본이 직면하게 될 안보 위기사태를 일본에 대한 직접무력공격사태 · 중요영향사태 · 존립위기사태라는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눠 각각의 경우에 육 · 해 · 공 자위대와 항만 · 비행장 등을 관리하는 국가기관, 해상보안청과 지방자치단체 등이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지를 규정하고 있다. 예컨대 미군행동관련조치법은 종전에 상정되던 무력공격사태뿐 아니라 존립위기사태에 처해서도 미군 행동과 관련해 일본이 지원을 확대할 수 있도록 했고, 특정공공시설이용법은 무력공격사태나 존립위기사태 시 미군 이외 타국군도 항만과 비행장을 이용할 수 있게 했다. 해상수송규제법도 종전에 적용되던 무력공격사태뿐 아니라 새롭게 규정된 존립위기사태에 있어서도 해상수송을 규제할 수 있게 개정된 것이다.
둘째, 국제평화협력법 개정안과 새롭게 제정된 국제평화지원법은 유엔 주관의 평화유지활동(PKO)이나 여타의 국제평화활동에 참가하는 일본 자위대가 외국 군대들이 수행하는 군사 및 비군사활동에 대해 후방 지원을 확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관련 국가 공격 받을 때도 자위권 행사
원래 이 안보법제들의 상당수는 1997년 9월, 미·일 간에 방위협력을 위한 가이드라인이 개정되면서 책정된 것이다. ‘미 · 일 가이드라인 1997’은 일본에 대한 직접무력사태뿐만 아니라 주변사태, 즉 일본의 안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일본 이외 지역에서의 유사사태 발생 시에도 미 · 일 간 안보협력이 확대될 수 있다는 점을 처음으로 제시한 바 있었다. 이러한 주변사태 개념을 적용해 99년과 2000년에 주변사태안전확보법 · 선박검사활동법이 제정됐고, 2003~2004년 무력공격사태법 · 해상수송규제법 · 미군행동원활화법 · 교통통신이용법 · 국민보호법 · 포로취급법 등의 소위 10여 개 유사 관련 법제가 성립됐다.
그런데 잘 알려진 바처럼 아베 정부가 재등장하면서 그동안 평화헌법과 전수방위 원칙하에서 행사가 금기시돼 왔던 집단적 자위권을 2014년 7월의 각의 결정을 통해 용인하게 됐다. 다만 아베 정부는 연립여당인 공명당 등의 반발을 고려해 종전에 적용되던 직접적 무력공격사태 및 주변사태 개념과 구별되는 ‘존립위기사태’라는 경우에 한해 집단적 자위권을 제한적으로 행사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즉 일본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타국에 대한 무력공격이 발생해 이로 인해 일본의 존립이 위협받고 국민의 생명과 자유, 행복추구권이 근저에서 무너질 명백한 위험이 있는 ‘존립위기사태’에 다른 적당한 수단이 없을 때 필요 최소한도의 무력으로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하겠다는 세 가지 원칙을 밝힌 것이다.
시민단체선 “아베가 헌법 위반” 반발
이같이 ‘존립위기사태’라는 개념하에서 집단적 자위권 행사가 용인됨에 따라 아베 정부는 기존 10여 개 안보법안에 대한 개정에 착수하게 됐다. 이 과정에서 종전의 주변사태 개념을 ‘중요영향사태’로 변경하고, 그에 더해 ‘존립위기사태’라는 상황을 추가하면서 일본이 개별적 자위권뿐 아니라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할 경우 자위대와 일본 국가기관들이 수행해야 할 역할들을 기존 법률안에 추가한 게 이번에 성립된 안보법제들인 것이다.
다만 일본 시민단체와 헌법학자들은 안보 관련 법제들의 근간이 되고 있는 집단적 자위권 용인이 전쟁을 국가 정책수단으로 부정하고 있는 현행 일본 헌법을 위반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에 더해 헌법 개정이라는 정당한 절차 없이 해석 변경만으로 안보법제 성립을 강행한 아베 정부의 일방적 정치수순에 대한 불만도 더해지면서 전례 없이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 입장에서는 안보법제 채택 등 일본의 안보정책 변화가 한반도 안보에 어떤 영향을 주게 될 것인지를 냉정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관련해 일본이 규정하는 무력공격사태·중요영향사태 · 존립위기사태 등의 상황에서 일본이 미 · 일 동맹하에서 한반도에 대해 어떤 정책을 전개할 수 있는지를 현실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일본 정부의 설명에 의하면 무력공격사태란 북한이 탄도미사일 발사나 공작선 침투를 통해 직접 일본의 영해와 영토를 침범하는 것을 말한다. 이 경우 일본은 집단적 자위권 행사 없이도 자위대법에 규정된 방위출동 개념에 의해 미사일을 요격하거나 공작선을 격퇴하는 무력행사를 할 수 있다. 실제로 2001년 12월에 북한 공작선이 일본 연안에 침투했을 때 일본 해상자위대가 관련 법에 따라 격침시켰다.
한반도 영토 · 영해 · 영공 접근 못해
중요영향사태(종전의 주변사태)란 예컨대 한반도에서 남북한 간에 분쟁이 발생해 미군과 한국군이 북한과 교전에 돌입한 경우를 가리킨다. 이 경우 일본은 중요영향사태안전확보법 등에 의해 전방에 투입되는 주일미군 등을 후방 지원할 수 있다. 단 이 경우에도 일본은 한국 정부의 허가 없이는 북한 지역을 포함한 한반도 영해 및 영공에 대한 자위대의 접근과 무력행사를 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아베 총리가 국회에서 설명한 바에 따르면 존립위기사태란 일본의 미사일 방어를 담당하는 미국 함선에 대해 북한이 공격을 가하거나 미국을 향해 발사한 북한 탄도미사일이 일본 공역을 통과하는 경우를 가리키고 있다. 이 경우 일본에 대한 직접적인 무력공격이 아닐지라도 일본 정부는 국가안전보장회의 논의를 거쳐 집단적 자위권을 발동해 미국 함선에 대한 공격을 물리치거나 탄도미사일을 요격할 수 있다. 단 이 경우에도 아베 총리는 한국이나 북한 영내로 자위대를 파견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아베 총리는 호르무즈해협 등 다른 지역에서 미국 등에 대해 집단적 자위권이 행사된다고 해도 직접적 무력공격 참가는 불가하고 자위대의 역할은 집단적 자위권 행사의 세 가지 원칙에 따라 후방 지원에 한정될 것이라는 설명도 하고 있다.
이같이 새로 성립된 안보법제들과 그에 대한 일본 정부의 해석을 분석하면 집단적 자위권 개념하에서 일본의 무력행사 상황이 확대된 것은 분명하지만 한국 안보에 직접적 위해가 되는 요소들은 그다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북한의 무모한 군사도발에 대한 억제태세 강화, 나아가 한·미 동맹의 운용태세 강화에 이어지는 요소들이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북한 언론에서 주장하듯이 군국주의로 회귀한다고 보는 관점도 지나치게 과장된 것이다. 유엔 회원국으로서 미·일 동맹을 견지하고 있는 21세기의 일본이 국제연맹과 주요 군축회의 등을 탈퇴하면서 세계 주요 국가들을 가상 적국으로 삼아 전쟁을 벌였던 30년대의 전철을 밟을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 아태지역 재균형 노려 환영
현재의 일본은 90년대 이래 지속적으로 추구하던 보통국가의 길, 즉 경제력에 상응하는 안보 역할의 국제적 확대를 추구하는 노선을 가고 있다고 여겨진다. 한때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가였던 독일과 이탈리아가 지금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동맹의 일원이 돼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중동 지역 등의 국제분쟁에 참가하고 있는 수준의 보통군사국가가 일본 안보정책 변화의 지향점이 되고 있다고 보인다.
이 같은 보통군사국가의 노선은 아태 지역에서 재균형정책을 전개하면서 중국의 영향력 증대를 제어하려는 미국의 입장에선 환영할 만한 것이다. 올해 4월에 미국과 일본이 집단적 자위권 개념이 반영된 신가이드라인을 공표한 것은 일본의 보통군사국가화에 대한 미국 정부의 지지 입장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안보법제가 갖고 있는 한반도 안보상의 긍정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위안부를 포함한 역사 문제에 대해 미심쩍은 입장을 취해 오고 불필요하게 영유권 문제를 제기해 온 일본의 태도로 인해 그 안보정책에 대한 의구심을 쉽게 해소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일본이 진정 독일이나 이탈리아와 같은 21세기 보통군사국가의 길을 가고자 한다면 우선 역사나 영유권 문제로 촉발된 근린 우방들로부터의 불신을 해소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일본의 안전보장에도 도움이 되는 길이 될 것이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총재인 자민당을 중심으로 한 여당이 자위대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가 가능한 안보법안을 국회에서 강행 처리했다. 이에 따라 동북아 안보지형에 상당한 변화가 예상된다. 당장 한국과 중국은 일본의 향후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한반도와 동북아를 둘러싸고 군비 경쟁이 가속화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중·일 간에 자칫 국지전 발생 가능성도 거론된다. 무엇보다 북한의 전면적 도발이 일어날 경우 1945년 해방 이후 일본군이 다시 한반도에 들어올 가능성도 완전 배제하기 어렵다는 전망이 나온다.
이명찬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이명찬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일본 게이오대 국제정치학 박사)은 전쟁이 가능한 ‘보통국가’로 가는 길을 착착 밟아 온 일본의 외교안보 전략과 정책을 연구해 온 학자다. 그에게 이번 법안의 의미, 아베 총리의 의도, 앞으로 동북아와 한반도에 끼칠 영향 등을 들었다.
- 일본 국민의 강한 반대에도 안보법안을 강행 처리한 아베 총리의 의도는. “아베 정권의 숙원은 ‘전후 레짐(Regime · 체제)으로부터의 탈각(脫却·벗어남)’이다. 전후 레짐이란 일본이 일으킨 침략전쟁의 전승국인 미국의 일방적 강요에 의해 만들어진 평화헌법 9조에 따라 형성된 ‘자학(自虐)사관’이 만연한 일본을 지칭한다. 일본 우익세력은 현재의 일본이 미국의 반(半)식민지이고, 이를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헌법을 개정해 명실상부한 독립국가의 면모를 갖추는 것이라고 줄곧 주장해 왔다. 아베 총리의 숙원은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총리가 이루지 못한 꿈을 실현하는 것이다.”
- 사실상 날치기 처리 이후 일본에서 예상되는 정치적 후폭풍은. “헌법학자들 대다수가 위헌이라고 인식하는 안보법안이 통과됐지만 이를 무력화하려는 일본 국내의 반발은 계속될 것이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아베 총리는 중의원과 참의원 해산을 통해 신임을 물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 경우 총선에서 야당의 대응이 이후 일본 정치의 흐름을 결정할 것이다. 문제는 소선거구제도에서 분열된 야당으로는 아베 정권의 질주를 막을 수 없다는 점이다.”
- 앞으로 한반도와 동북아, 세계 정세에 줄 영향과 함의는. “경제대국 일본이 가까운 미래에 군사대국으로 국제사회에 등장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물론 일본의 군사대국화가 곧바로 세계 정세에 위협이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럼에도 동북아를 둘러싼 국제 정세가 불안정해질 경우 군사적 충돌 위험성은 더 커졌다.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를 둘러싸고 중·일 간에 국지전이 일어날 수도 있다. 주변국과의 군비 경쟁 가능성도 커졌다. 한국 입장에서는 전략적 계산에 넣어야 할 또 하나의 군사대국이 이웃에 등장한 의미가 있다.”
- 미국은 환영 성명을 냈는데, 미국이 기획하고 아베 총리가 실행한 것 아닌가.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징벌적인 개혁을 일본에 강요했다. 하지만 냉전이 시작되고 50년 한반도에서 6·25전쟁이 발발하자 곧바로 일본 헌법 9조를 개정해 군대를 창설하도록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당시 총리를 압박했다. 요시다 총리는 이에 반발하고 경무장(輕武裝)과 경제 우선이라는 ‘요시다 독트린’을 발표했다. 집단적 자위권을 인정하지 않는 ‘전수(專守)방위’를 자위대의 역할로 정착시켰다. 그러나 90년 걸프전을 계기로 미국은 일본의 군사적 역할 확대를 요구해 왔다. 그 요구가 25년의 세월을 거쳐 이번에 실행에 옮겨진 것이다. 아베 총리는 내심 미국의 군사적 요구를 들어주면서 반대급부로 역사 문제에서 미국이 일본 편에 서 주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 일본의 안보법안은 북한 위협 대응이 주요 목적인가, 궁극적으로 중국의 팽창을 겨냥한 것인가. “일본의 안보법안이 지향하는 보통국가화는 결국 일본의 국익을 실현하는 수단으로 군사력을 활용하려는 것이다. 전후 엄격하게 금지해 왔던 군사력의 외교적 수단화를 실행에 옮긴 것이다. 경제력 쇠퇴로 약화된 국가경쟁력을 군사력으로 보완하려는 것이다. 군사력의 외교적 수단화에 있어 대상은 단기적으로는 북한이나 중국이 되겠지만 장기적으로는 모든 국가가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이번 법안의 본질이다.”
- 일본이 31년 만주사변을 도발한 기념일(9월 18일) 밤에 법안을 강행 처리해 중국이 더 반발하고 있다. “일본 우익이 역사 문제에 그만큼 무신경함을 보여 주는 일례로 볼 수 있다. 아베 총리도 2013년 5월 생체실험으로 악명 높은 일본 관동군의 731부대를 연상시키는 자위대 비행기에 탑승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비판받았다.”
- 중국 외교부의 대응 수위를 어떻게 보나. “중 · 일 양국 관계를 대국 관계로 인식하고, 패권 다툼을 강조하는 전통적인 국제정치학의 관점에서 냉정하게 대응할 것이다. 센카쿠 열도 문제로 양국 관계가 가장 악화됐을 때도 중 · 일 정상회담이 두 번이나 열렸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현재는 중국과 미 · 일이 대치하는 구도이지만 장기적으로는 미 · 중 관계가 반드시 충돌로 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 북한의 위협 때문에 일본 안보법안은 한국에 ‘양날의 칼’ 같은데. “만약 북한 문제를 잘못 처리해 무력 사용이 불가피한 상황이 발생한 경우 반드시 승리하기 위해 한 · 미 연합군의 힘만으로 부족함을 느낀다면 일본의 도움도 받아야 할 것이다. 이 경우 집단적 자위권 행사가 미군의 전투력에 큰 보탬이 될 것이다. 일본에 대한 한국의 우려는 이러한 경우를 방지하는 노력으로 대치돼야 할 것이다. 이번에 한국 외교부는 현실적인 입장에서 논평 수위를 정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일본의 조치를 환영하는 상황에서 한 · 미 동맹을 강화해야 하는 한국 입장에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다.”
- 그럼에도 일본 군대가 한반도에 다시 올 수도 있다는 가능성 자체에 거부감이 있는데. “북한 문제를 잘 관리해 무력 사용 없이 평화적 통일을 달성한다면 일본 군대가 다시 한반도에 진입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게 우리의 현명한 대응이며 끝까지 추구해야 할 국가 목표일 것이다.”
- 중앙선데이 제445호 | 장세정 기자 | 2015.09.20
일본, 70년 만에 ‘전쟁 가능한 나라’ 복귀
[안보법안 통과에 박수 치는 일본 참의원] 일본을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만드는 안보법안이 19일 새벽 참의원 본회의에서 통과된 직후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자민당 등 여당 의원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하고 있다.
일본, 70년 만에 ‘전쟁 가능한 나라’ 복귀
19일 오전 2시18분 집단적 자위권 법제화 등을 담은 안보 관련 11개 법 제 · 개정안이 찬성 148표, 반대 90표로 일본 참의원(상원)을 통과했다. 자위대법·무력공격사태대처법 · 국제평화협력법 · 중요영향사태안전확보법 · 선박검사활동법 · 미군행동관련조치법 · 특정공공시설이용법 · 해상수송규제법 · 포로취급법 · 국가안전보장회의설치법 등 10개 법안이 개정됐고, 국제평화지원법이 제정됐다.
특히 개정된 무력공격사태대처법에 따르면 ‘일본의 존립이 위협받고 국민의 권리가 근저로부터 뒤집힐 명백한 위험이 있는 경우’를 ‘존립위기사태’로 규정해 자위대가 타국에 대한 무력행사를 할 수 있도록 했다.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 전범국 일본은 그동안 평화헌법 9조에 따라 자위 차원의 실력행사만 가능했지만 앞으로는 해외에서 무력을 행사하고 전쟁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수만 명의 일본 시민이 법안에 반대하며 시위를 했지만 연립여당인 자민당과 공명당 외에 차세대당 등 군소 3개 야당까지 가세해 법안을 강행처리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관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시민과 그들의 평화로운 삶을 보호하고 전쟁을 방지하는 데 필요한 입법” 이라며 “우리 자녀와 후손들의 평화를 위한 법적 기반을 마련해 냈다” 고 주장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개정 법률이 민주주의에 역행하고 평화헌법 9조에 위배된다는 위헌 논란 후폭풍이 불고 있다.
한국 정부는 이날 외교부 대변인 명의의 논평을 내고 “일본이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함에 있어 한반도 안보와 국익과 관련된 사안에서 우리 측의 요청 또는 동의가 없는 한 용인될 수 없다” 고 밝혔다. 이어 “일본 정부는 일관되게 유지해 온 평화헌법의 정신을 견지하면서 지역의 평화와 안정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투명하게 추진해야 한다” 고 덧붙였다. 중국은 반대의견을 밝혔다. 중국 외교부 훙레이(洪磊) 대변인은 “일본이 군사력을 강화하며 안보정책을 바꾼 것은 평화 · 발전 · 협력의 시대 조류와 전혀 맞지 않다” 며 “일본이 역사의 교훈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일본 국내외의 정의로운 목소리에 귀 기울일 것을 정중히 촉구한다” 고 말했다.
반면 미국 국무부는 “동맹을 강화하고 지역적 · 국제적 안보활동에 적극적 역할을 하려는 일본의 노력을 환영한다” 고 논평했다.
- 중앙선데이 제445호 | 장세정 기자 | 2015.09.20
[김영희 칼럼] 아베 신조, 역사에 등을 돌리다
아베 신조, 역사에 등을 돌리다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조부 세대로부터 두 줄기의 피를 이어받았다. 하나는 반전 · 평화주의 정치가였던 할아버지 아베 간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제2차 세계대전의 A급 전범인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의 것이다. 아베 간은 태평양전쟁 발발 다음해인 1942년 중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도조 히데키의 군벌정치를 비판하면서 당선된 반골 정치인이었다. 아베의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는 도조 전시내각의 상무대신으로 군수물자 조달의 총책임자였다.
아베 신조는 친할아버지를 제치고 외할아버지를 롤모델로 선택해 일본의 군국주의적 과거를 선양하는 극단적 보수주의자, 민족주의자, 역사수정주의자가 되어 버렸다. 그런 아베의 등장으로 한 · 일, 중 · 일 과거사 갈등은 깊은 수렁에 빠졌다. 외할아버지가 못다 이룬 꿈을 이루려는 아베에게 평화헌법 9조는 목의 가시다. 헌법을 고쳐 일본을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만들어 다시 세계에 대국으로 군림하는 것이 그의 꿈, 이 아니라 현실적인 목표다.
아베 내각은 지난해 7월 ‘집단자위권 행사를 용인하는 각의 결정’을 내리고 올 들어서는 11개의 안보 관련 법안을 중 · 참의원에서 통과시켰다. 일본은 미국으로부터 더 많이, 더 실질적인 안보 역할을 강화하라는 압박을 꾸준히 받아 왔다. 그래서 지난해 아베의 미국 방문 때 두 나라의 외무 · 국방장관들이 만나는 2+2 회의에서 1978년 제정되고 97년 북한의 핵 개발을 염두에 두고 개정된 방위가이드라인을 다시 강화 · 개정했다. 이 가이드라인은 앞선 두 개정가이드라인의 극동 유사시, 주변 사태의 활동범위를 글로벌 규모로 확대해 미군이 전쟁하는 곳이면 언제, 어디든지 일본 자위대가 참전하는 길이 열렸다. 미 · 일 군사일체화가 실현된 것이다.
일본의 군국입국에 아시아 국가들은 불안하다. 일본에는 세계인들이 결코 잊을 수 없는 국제적인 부전(不戰)조약 위반의 전과가 있기 때문이다. 1차 대전 후 미국과 프랑스가 부전조약을 체결했다. 일본의 외교적 노력으로 이 조약은 국제연맹의 비준을 받아 ‘국권의 발동으로서의 전쟁’ 은 국제법 위반으로 규정 되었다. 그런 일본이 독일 · 이탈리아와 함께 추축을 형성해 2차 대전을 일으켜 5000만 명 이상의 희생자를 냈다. 일본에 대한 주변 국가들의 불신이 깊어 가는 가운데 집단자위권의 범위 확대, 미 · 일 방위 가이드라인의 강화로 군사 · 안보에 관한 한 일본이 미국의 51번째 주로 편입되는 인상을 주는 것은 참으로 불길하다.
아베에게는 구체적인 전쟁 유전자가 있다. 1954년 자위대가 창설되자 재군비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요시다 시게루의 자유당 정권에 대한 국민적 저항을 본 아베의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는 하토야마 이치로와 함께 요시다의 자유당 정권을 무너뜨리고 하토야마를 총재로 일본 민주당을 창당해 간사장이 되었다. 두 사람은 “미국이 강압적으로 만든 헌법을 개정해 자주헌법을 제정하고, 자위대를 일본군으로 바꾸어 진정한 독립을 확립하는 개헌과 재군비를 주장했다. 그러나 1955년 총선에서 일본민주당은 개헌선을 확보하지 못했다. 아베는 외할아버지 꿈을 이루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것 같다.
일본에서 나온 『군사입국에의 야망』이라는 책의 네 명의 공저자들은 (1)병기체제 · 설비 같은 하드웨어 (2)법률 · 제도 · 조직 같은 시스템 (3)인재 · 가치관 · 전략 같은 소프트웨어를 전쟁을 할 수 있는 세 가지 요소로 든다. 그들에 따르면 미국의 군사전략에 추종하는 일본의 전쟁 대응 체제는 하드웨어가 선행하고, 시스템과 소프트웨어가 따르는 방식이다. ‘이즈모’ 형 헬리콥터 탑재 항공모함과 수백㎞의 범위를 커버하는 레이더를 장착한 5척의 이지스함이 하드웨어의 대표적 사례다. 선행하는 하드웨어에 법체계와 제도(시스템)와 가치관(소프트웨어)이 따른다. 아베는 ‘재생교육’이라는 걸로 교육제도를 뜯어고쳐 자학사관을 탈피하고 일본에 대한 존경과 자존심을 되살리려고 한다.
이마누엘 칸트: “전쟁에는 특별한 동인(動因)은 필요 없다. 명예욕이 발동하면 전쟁이 일어난다.” 아베가 일본을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만들어 청사에 이름을 남기고 싶은 치기 어린 명예욕이 주위를 불안하게 한다. 시사지 ‘이코노미스트’의 2013년 1월 5일자 아베의 극우행보 비판 기사 제목이 ‘역사에 등을 돌리다(Back to the future)’인 건 시사적이다. 영화 ‘백 투 더 퓨처’ 에서는 소년 마티 맥플라이가 타임머신을 타고 1955년의 과거로 돌아간다. 영화 속의 백(back)은 과거로 돌아감을 의미하지만 이코노미스트 기사의 아베 신조는 미래에 등(back)을 돌린다. 아베 묘사에 걸출한 제목이다. 그는 미래를 말한다. 그러나 과거에 대한 바른 인식 없이 밝은 미래는 없다.
- 중앙일보 |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 | 2015.10.02
[김영희 칼럼 D] 아베 신조가 친할아버지를 닮았다면…
아베 신조, 역사에 등을 돌리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할아버지 세대로부터 두 줄기의 상극하는 피를 이어받았다. 하나는 반전, 평화주의 정치가였던 할아버지 아베 칸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2차대전의 A급 전범인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의 것이다. 아베 칸은 태평양 전쟁 발발 다음해인 1942년 중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도조 히데키의 군벌정치를 비판하면서 당선된 반골 정치인이었다. 아베의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는 1936년 만주국 정부 산업부 차관으로 만주의 경제적 침탈을 지휘했다. 그는 1940년 귀국하여 1941년 도조 히데키 내각의 상공대신에 취임하여 군수물자 조달의 책임자가 되었다. 그의 별명은 "쇼와의 요괴"였다.
아베 신조는 친할아버지를 제치고 외할아버지를 롤모델로 선택하여 일본의 국군주의적 과거를 선양하는 극단적 보수주의자, 민족주의자, 역사수정주의자가 되어버렸다. 만약 아베 신조가 친할아버지-아버지의 정치적 유전자를 이어 받았다면 아베 신조의 정치노선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아베 신조의 아버지 아베 신타로는 마이니치 신문 가자출신 정치인으로 농림대신, 내각 관방장관, 자민당 정조회장, 통상대신, 외무대신, 자민당 총무회장 등 거의 모든 요직을 거쳐 총리가 되는건 시간문제였다. 그는 외무대신시절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그의 가장 가까운 한국인 친구는 70년대의 대미 로비 스트 박동선이었다. 아베 신타로는 1990년 암 선고를 받고 이듬해 67세로 세상을 떠났다.
외할아버지가 못다 이룬 꿈을 이루려는 아베에게 평화헌법 9조는 목의 가시다. 헌법을 고쳐 일본을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만들어 다시 세계에 대국으로 군림하는 것이 그의 꿈이 아니라 현실적인 목표다. 아베 내각은 작년 7월 "집단자위권행사를 용인하는 각의 결정" 을 내리고 올 들어서는 11개의 안보관련 법안을 중.참의원에서 통과시켰다. 일본은 미국으로부터 더 많이, 더 실질적인 안보역할을 강화하라는 압박을 꾸준히 받아왔다. 그래서 작년 아베의 미국 방문때 두 나라의 외무.국방장관들이 만나는 2+2 회의에서 1978년 제정되고, 1997년 북한의 핵 개발을 염두에 두고 개정된 방위가이드라인을 다시 강화.개정했다. 이 가이드라인은 앞선 두 개정가이드라인의 극동 유사시, 주변사태의 활동범위를 글로벌 규모로 확대하여 미군이 전쟁하는 곳이면 언제, 어디든지 일본 자위대가 참전하는 길이 열렸다. 미일 군사일체화가 실현된 것이다.
일본의 군국입국에 아시아 국가들은 불안하다. 일본에게는 세계인들이 결코 잊을 수 없는 국제적인 부전(不戰)조약 위반의 전과가 있기 때문이다. 1차대전 후 미국과 프랑스가 부전조약을 체결했다. 일본의 외교적 노력으로 이 조약은 국제연맹의 비준을 받아 "국권의 발동으로서의 전쟁" 은 국제법 위반으로 규정되었다. 그런 일본이 독일. 이탈리아와 함께 추축국을 형성하여 2차대전을 일으켜 5000만명 이상의 희생자를 냈다. 일본에 대한 주변국가들의 불신이 깊어가는 가운데 집단자위권의 범위 확대, 미일 방위 가이드라인의 강화로 군사.안보에 관한 한 일본이 미국의 51번째 주로 편입되는 인상을 주는 것은 참으로 불길하다.
아베에게는 구체적인 전쟁 유전자가 있다. 1954년 자위대가 창설되자 재군비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요시다 시게루의 자유당 정권에 대한 국민적 저항을 본 아베의 와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는 하토야마 이치로와 함께 요시다의 자유당 정권을 무너뜨리고 하토야마를 총재로 일본 민주당을 창당하여 간사장이 되었다. 두 사람은 "미국이 강압적으로 만든 헌법을 개정하여 자주헌법을 제정하고, 자위대를 일본군으로 바꾸어 진정한 독립을 확립하는 개헌과 재군비를 주장했다. 그러나 일본 민주당은 1955년 총선에서 개헌선을 확보하지 못하고 결국 자유당과 다시 통합하여 오늘의 자민당을 만들었다. 아베 신조는 외할아버지가 그때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의 포로가 된 것 같다.
흥미로운 것은 요시다 시게루는 아소 타로 전 총리(현 부총리)의 외할아버지이고, 하토야마 이치로는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의 할아버지라는 사실이다. 총리를 세 번 지낸 하토야마 이치로의 두 손자 중 유키오는 이미 총리를 지냈고 쿠니오는 총리 코스를 착실히 밟고 있다. 우리가 북한의 세습정치를 비판할 때 일본 여론이 침묵하는 것은 일본이 지구상에서 세습정치가 가장 심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아베는 헬리콥터 항공모함,이지스함 등으로 하드웨어를 강화하는 한편 "재생교육"으로 교육제도를 뜯어 고쳐 자학사관을 탈피하고 일본에 대한 존경과 자존심을 되살리려고 한다. 그런 틀 안에서 왜곡된 역사교과서가 만들어지고 배포된다.
이마뉴엘 칸트 : "전쟁에 특별한 동인(動因)은 필요없다. 명예욕이 발동하면 전쟁이 일어난다." 일본을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만들어 청사에 이름을 남기고싶은 아베의 치기어린 명예욕이 주위를 불안하게 한다. 시사지 "이코노미스트"의 2013년 1월 5일자 아베의 극우행보 비판 기사 제목이 "역사에 등을 돌리다"(Back to the future)인 건 시사적이다. 영화 백 투 더 퓨처에서는 소년 마티 맥플라이는 타임머신을 타고 1955년의 과거로 돌아간다. 영화 속의 백(back)은 과거로 돌아감을 의미하지만 이코노미스트 기사의 아베 신조는 미래에 등(back)을 돌린다. 아베 묘사에 걸출한 제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