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에 관한 꿈을 꾸고 그 꿈이 실제로 세상의 종말을 예언한다고 말하는 게 옳을까?
꿈을 이해하려면 ‘왜 이렇게 이상한 꿈을 꾸게 되었는가?’라고 질문을 던지며 꿈을 이루는 모든 요소를 남김없이 밝혀야 한다. 꿈의 자율적인 힘을 중시한다면 느부갓네살의 비극적인 운명을 피할 수 있다.
꿈은 우리가 지나쳐 버린 문제를 상기시킨다. 새로운 관점에서 문제를 돌아보게 만들고, 그 문제의 해결책을 암시한다. 달리 말해 꿈은 의식의 부족한 인식을 보완해준다. 스스로 온순한 성격이라 믿고 행동하는 사람은 꿈에서 나폴레옹과 같은 자신을 만나게 되며, 독불장군 같은 독신 여성은 매춘부가 되는 꿈을 꾼다. 헌신적인 목사는 교인을 목 졸라 죽이는 꿈을 꾸기도 한다. 꿈꾸는 사람의 인격과 그가 살아가면서 지나치거나 무시했던 일들이 꿈을 통해 드러난다.
물론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믿고 있는 것이 실제의 자신이 아니듯이, 꿈에 나타난 모습이 참된 자신은 아니다. 온순한 사람이 나폴레옹은 아니며, 독신 여자가 매춘부도 아니다. 그리고 목사가 살인자일 수도 없다. 진실은 그 사이 어디엔가 있다.
꿈은 꿈꾸는 당사자의 내적 상황을 반복해서 나타낸다. 철저히 인격과 관련이 있다. 즉 꿈은 당사자의 인격을 제외한 외부적인 그 어떤 일과도 상관이 없다. 물론 예외가 있기는 하나 매우 드물다. 따라서 모든 꿈은 꿈꾸는 사람 자신의 문제, 그리고 자신과 세상과의 관계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종말에 관한 꿈을 꾸고 이 꿈이 실제로 세상의 종말을 예언하고 있다고 말하면 그것은 정신 착란이다. 꿈은 인간의 내적인 세계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따라서 꿈은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중대한 변화와 연관된다. 꿈에서 삼촌이 죽었다고 삼촌에게 죽음을 대비하라고 전할 필요는 없다. 이 꿈은 삼촌이 겪게 될 일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꿈꾼 당사자의 내적 경험이다. 즉 삼촌을 상징으로 한 자신 내부에서의 어떤 죽음을 의미한다.
‘그림자’ 또는 ‘또 다른 자아’는 꿈의 여러 가지 외형적 형상 중 하나다. 불빛 아래에 서면 그림자가 생긴다. 그러나 땅을 내려다보지 않는 한 자기를 따라다니는 어두운 그림자를 깨닫지 못한다. 그림자는 인격의 어두운 부분이다. 그림자는 항상 우리와 함께하지만 평상시에는 인식하지 못한다.
그림자는 인간의 의식이 받아들이길 거부하는 한 부분(노여움, 결점, 병, 유치한 면, 관능성, 반항심 또는 열등감 같은 것)이다.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고 직면하기 싫어하는 자신에 관한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어디서 그 그림자를 볼 수 있는가?
그림자는 꿈에서 사악하고 열등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우리의 무의식 가운데 내재하는 그림자는 인간의 욕망과 성취 가운데 존재한다. 또 인종 편견이나 파괴된 인간관계의 근저에서 동성의 사람들에게 투사되고 있다. 우리가 이런 그림자를 무시하면 무시할수록 부정적인 면으로 존재를 드러낸다.
우리는 그림자를 ‘페르소나’(persona)와 비교하여 이해할 수 있다. 페르소나는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쓰고 나온 가면이다. 페르소나는 우리가 쓰고 있는 ‘얼굴’이다. 우리가 속한 집단은 우리에게 특정한 페르소나를 요구하고, 반대로 우리는 집단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페르소나를 쓰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페르소나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려고 한다.
특히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모습으로만 자신을 보려고 한다. 이때 그림자는 페르소나와 적대적인 관계가 된다. 우리가 선하고 온화한 면만 인정할수록 그림자는 반대로 난폭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아주 강하고 용기 있는 사람이 되려고 하면 할수록 나약한 그림자가 우리를 따라다니는 것이다.
이러한 그림자는 그 사람의 의식세계에서의 특성, 무의식에 억압되어 있는 측면들, 그리고 그가 선택한 페르소나 등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림자는 어느 정도 문화적인 현상이라 말할 수 있다. 즉 한 개인의 삶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 문화에서 억압당하고 무시되어진 측면을 그림자가 보여 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식과 교육, 혹은 예의와 도덕을 궤변적으로 강조하는 우리 시대에 있어서 집단적 그림자는 무시당한 원초적인 인간이다.
그림자 없이 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 자아는 반드시 무의식 세계에 남아 있는 다른 요소들을 희생시켜 자신의 개성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든 것이 그림자를 악한 존재로 만든다. 물론 우리가 그림자를 의식하지 못하면 못할수록 더 자율적으로 활동한다. 그림자가 엄청난 규모로 폭발하듯이 소란스럽게 나타나기도 하고, 우리의 욕망과 성취 사이에 아무도 모르게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나 그림자를 의식적으로 깨달으면 그림자는 인격에 보탬이 되는 많은 긍정적 가치로 환원된다. 그리하여 우리가 완전한 인간성을 갖추는 데 필요한 겸손, 소박함, 일상의 소중함, 에너지로서의 본능을 완비하게 된다.
그림자는 이상한 특성을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그림자의 어두운 면에도 하나님과 가까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그림자와 씨름하는 것은 야곱의 경우처럼 우리 자신이 하나님과 씨름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눈 안에 있는 들보인 그림자를 본다는 것이 종교적 체험, 즉 하나님과 직면함에 있어 필수적인 것이다.
-존 A. 샌포드, <꿈, 잊혀진 하나님의 언어>(동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