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의 수행 아닌 수행
한동안 불교를 공부해 오면서 몇 가지 지속적인 궁금증이 있었다. 바로 방편과 본질에 관한 의문이었다. 첫 번째 의문이 들었던 점은 많은 경전들을 살펴보면, 종단의 소의경전인 반야심경과 금강경, 육조단경을 비롯해서 수많은 초기 대승경전들이 공통적으로 ‘수행’에 대해서는 설하지 않고, 다만 진리에 대해서만 설해져 있다는 점이었다.
이상했던 점은, 내가 살아오면서 불교계에서, 또 많은 스님들이나 책 등을 통해 정말 절대적일 정도로 들어왔던 ‘수행해야 한다’는 말이 정작 가장 중요한 경전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동안 불교계에서 본다면 불자가 수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죄악과도 같이 느껴졌다. 불자라면, 수행자라면 당연히 기도와 수행을 필수적으로 해야 한다. 수행을 얼마나 잘 하느냐가 그 사람이 얼마나 훌륭한 불자인지, 스님인지를 가늠하는 척도처럼 느껴지곤 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절대적으로 철저하게 실천해야 할 수행을 대승경전의 핵심인 초기 대승경전들과 선불교의 초기 조사선의 주요 어록들에서는 왜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는 것일까? 심지어 조사선의 수많은 어록들을 보면 좌선관심 수행에 대해서 오히려 수행을 하지 말도록 권하고 있다. 수행 위주의 북종선에 비해 혜능의 남종선은 좌선 수행을 통해서가 아닌 직지인심 견성성불에서 보듯이 조사와의 문답을 통해 곧장 법을 드러내고 있다.
이와 관련해 또 한 가지 의문점은 불법은 유위법이 아니라 무위법이며, 유위행이 아닌 무위행을 통해서만 가까워질 수 있는 공부라는 점이다. 무위라는 것은 말 그대로 함이 없는 것으로, 의도적인 노력이나 작위적인 수행 등을 통해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렇듯 불법은 바로 무위법이지 결코 유위법은 아닌 것이다.
이러한 대 전제에서 볼 때, 그동안 한국불교에서 내가 접해 왔던 불법은 너무나도 유위법적인 수행, 뼈를 깎는 정진, 장좌불와와 좌선수행을 과도하게 강조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기도를 할 때에도 3,000배나 1만배 수행이며, 장괘합장하고 금강경 7독이며, 대비주 108독, 몇 시간이고 앉아서 독경이나 염불을 하는 등의 뼈를 깎는 치열한 수행정진과 가행정진, 철야정진 등이야말로 진정한 수행자에게 필수적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면 경전이나 조사 어록에서도, 무위법이라는 근본과도 합당하지 않는 수행이 지금의 우리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수행이라는 방편이 역사를 이어오면서 수많은 중생들을 위해 자비방편으로 시설이 되었을 것이고, 그 수행이라는 방편이 오래도록 정착되다 보니 지금에 와서는 이것이 곧 가장 중요한 본질인 양 호도된 것이 아닌가 싶다.
불법은 세간법에서처럼 목표를 정해놓고 열심히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공부는 인과법이나 유위법이 아닌 것이다. 불법은 불이법이며 중도다. 취하거나 버리는 공부가 아닌 것이다. 아무리 방편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 수행조차도 취해서는 안 된다. 수행을 취하는 것은 수행이 완성된 부처와 수행 안 된 중생을 나누는 이분법일 뿐이다.
조사선은 그 어떤 수행도 정해두지 않음으로써 모든 방편을 거두어 이렇게도 저렇게도 할 수 없어 완전한 무위에 이르도록 한다. 참된 간화선 또한 조사선의 전통을 이을 뿐, 특정한 방법이나 인위적 노력을 요하지 않는다. 위빠사나 또한 다만 분별없이 알아차릴 뿐 특정한 수행법에 의지하고 기대게 된다면 그것은 유위의 방편에 치우친 것일 뿐이다.
이처럼 참된 수행은 수행을 하되, 수행을 하지 않는 것이다. 하되 함이 없이 행하는 것이다. 요즘 불자들의 수행을 보면 수행의 참 뜻에 어긋나 경쟁하듯이, 형식에 너무 치우쳐서, 유위적이고 작위적으로 행하는 것을 보게 된다. 참된 수행은 수행을 하지 않는 수행, 무위의 가르침임을 잊지 말자. 하되 행함이 없이 행하자.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 합니다.사랑 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오늘 가입했어요. 아침마다 스님의 목탁소리를 들으며 마음공부 넘 감사했어요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하되 함이 없이 하자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