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로몬의 성전 건축 / 왕상 5:1-18
열왕기상 5-9장까지는, 솔로몬의 치적 중에서, 역사상 가장 큰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성전과 왕궁 건축기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솔로몬 재위 4년에 시작된 성전건축에는 7년간이 소요되었고, 성전 건축이 끝난 직후에 왕궁 건축이 시작되어 13년 만에 왕궁 건축을 완료했습니다. 총 20년이 걸린 엄청난 역사인데, 본문은 성전 건축을 위한 솔로몬의 준비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성전의 역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을 중심으로, 삶이 이루어져 갔습니다. 광야시대에는 성막을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그때는 이동 시기였으며, 불안정한 시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의 통치시대에 와서는 성막의 역사는, 성전의 역사로 전환이 되었습니다. 이때는 정착시대요, 안정기의 시대요, 평화의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의 성전 시대에 이르러, 중앙 성소에서 예배 중심의 삶으로 정착을 하게 되었고, 예루살렘 성전은 종교적, 정치적으로 중심을 이루고, 구심점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솔로몬이 건축한 솔로몬 성전의 의미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전건축에 대한 내용이 나올 때마다, 먼저 말씀드리게 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성경에 등장하는 성전건축이, 오늘날의 예배당 건축에 대한, 그 어떤 당위성도 제공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니, 복음사업이니, 복 받는 길이니 하면서, 예배당 건축을 정당화하며, 교인들로 하여금 예배당 건축에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것은, 복음을 빌미로 하여 개인의 욕망을 채우고자 하는, 거짓교사의 외침에 불과할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 세상을 심판하실 때, 최후로 남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 세워진 교회, 곧 그리스도의 몸이지 예배당이 아닌 것입니다. 예배당은 단지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이는 장소, 건물일 뿐입니다. 예배드리는 곳이라고 하여, 거룩의 의미를 부여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집이니만큼, 내가 사는 집보다 더 잘 지어야한다고 하면서, 온갖 장식과 재료로 호화롭게 치장을 한다고 해도, 건물은 건물일 뿐 다른 무엇으로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예배당을 건축하든 구입을 하든, 그것은 그 교회의 형편과 결정을 따라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일컬으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일인 양 선전한다면, 그것은 복음을 벗어난 자들의 악한 행태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건물을 건물로만 바라보지 못하고, 하나님이 계시는 거룩한 곳으로 바라보는 것 자체가, 말씀에 대한 무지함을 드러내는 것이며, 그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여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1000억을 들여 지은 예배당에서 드리는 예배와, 임대하여 얻은 건물에서 드리는 예배가 다르겠습니까? 그냥 똑같은 기독교 의식으로 드리는 예배일뿐입니다. 다르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그냥 기분상의 문제일 뿐이지, 하나님께서 예배당에 따라, 예배를 달리 구별하시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점들을 기억하고, 본문의 내용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를 찾아간다면, 분명 1000억짜리 예배당을 건축한 것으로 인한, 감격과 감사에 비할 바가 없는, 놀라운 감격과 감사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5절 “여호와께서 내 아버지 다윗에게 하신 말씀에, 내가 너를 이어 네 위에 오르게 할 네 아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리라 하신대로, 내가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려 하오니”
이렇게 말하는 것 때문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신 일인 것처럼 오해합니다. 성전 건축은 다윗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위해 집을 짓고자 하였기 때문입니다. 삼하 7장을 보면, 다윗은 나단 선지자에게, 자신은 궁에 거하는데 하나님의 법궤는 휘장, 곧 초라한 곳에 있음을 말합니다. 다윗의 의도를 아신 하나님은, 다윗에게 지금까지 집이 없었어도, 장막과 회막에 거하면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며, 이스라엘을 인도하셨음을 말합니다. 분명 하나님을 위해 집을 짓고자 하는, 다윗의 의도가 잘못되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끝까지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인간의 의도를 거부하시지 않고, 솔로몬이 건축하도록 허락을 하시는 것입니까?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쁘게 여기시고, 솔로몬이 지은 성전에 거하시며, 이스라엘을 복 주셨던 것이 아닙니다.
행 7:47-50절을 보면, 스데반 집사가 공회로 붙들려 와서 대제사장 앞에서 이러한 말을 합니다.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가 말한바,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스데반 집사의 말은, 비록 솔로몬이 하나님을 위해 집을 지었다고는 하지만, 정작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이 손으로 지은 집에는, 계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을 건축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복 주신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왕상 9:3-5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기도와 네가 내 앞에서 간구한 바를 내가 들었은즉, 나는 네가 건축한 이 성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내 이름을 영원히 그곳에 두며, 내 눈길과 내 마음이 항상 거기에 있으리니, 네가 만일 네 아버지 다윗의 행함 같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며, 내가 네게 명한대로 온갖 일에 순종하여, 내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내가 네 아버지 다윗에게 말하기를,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한 대로, 네 이스라엘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려니와”
솔로몬의 성전 건축이 마쳐졌을 때,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성전을 건축하느라고 수고했으니, 복을 주겠다는 말씀을 하지 않습니다. 성전과 상관없이, 솔로몬이 다윗의 행함같이 행하고, 하나님의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솔로몬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시겠다는 말씀을 합니다. 반면에 법도와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거룩하게 구별한 성전이라 할지라도, 던져 버리겠다고 말씀합니다. 결국 성전은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는 집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법도와 계명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물로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곧 이스라엘이 법도와 계명을 지켜 행하면, 성전은 무사히 존재하는 것이고, 법도와 계명을 지키지 않고 다른 신을 섬기면, 성전이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솔로몬에게 성전을 지으라고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솔로몬이 손으로 지은 성전은, 결국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솔로몬의 성전은 이스라엘의 복의 도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전을 무너뜨림으로써,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존재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도구로 세워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예배당을 지으면, 하나님께 복 받는다는 말을 하는 것이야 말로, 예배당을 자신의 자존심과 이름을 드러내는 용도로만 여기는 자들의, 거짓된 말이라는 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성전을 건축할 것을 허락하심으로써,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은 무너질 수밖에 없지만,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하나님의 손으로 지으신 성전이 있음을 바라보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삼하 7:11절을 보면, 다윗이 집을 짓고자 하는 것을 거부하신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겠다는 말씀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손으로 지어진 성전이, 이스라엘에게 복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집이, 이스라엘에게 복으로 함께 할 것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집을 바라보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지으시는 집은 무엇입니까? 성전은 인간이 하나님께 나오는 장소입니다. 그래서 성전에서는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은, 아무리 크고 화려하다고 해도,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로 인해 더러워진 인간이, 거룩하신 분 앞에 나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옛날 구약의 사람들은, 이것을 성막에서 실감을 해야 했습니다. 제사장이 자기 멋대로 하나님께 나아가면, 죽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현대의 사람들은 이것을 실감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 어떻게 나가든, 죽어 나가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부른다고 해도, 벙어리가 되거나 병에 걸려 죽는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제멋대로 부르고, 제멋대로 생각하고, 제멋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스라엘을 내세워서,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주는 것은, 어떤 인간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은, 창세 이후로 여전히 하나님의 생명에서 멀어진 것이,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곧 죽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죄로 인한 것입니다. 따라서 죄가 걷어지면, 하나님과의 만남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가능해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됨을 뜻하는 것입니다. 죽음에 처한 자를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하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영영한 복입니다. 그런데 이 영원한 복이, 우리의 죄 값을 주님이 대신 치르심으로써, 가능해졌다는 것입니다. 옛날 성막에서 정결한 제물의 피가, 이스라엘의 죄 값을 치름으로, 이스라엘의 죄가 용서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지으신 집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흘린 피가,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치르신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죄가 걷혀지는 것이고, 사망과 어둠에서 해방이 되고, 생명과 빛의 자녀로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성전은 영원한 복으로 오실, 참된 성전이신 그리스도를 보여주고자 하는 모형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에 매이고, 성전을 바라보는 것은,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고전 3:16절을 보면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라는 말을 합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성전은 집이 아닙니다. 성령이 거하심으로 그리스도의 지체로 존재하는, 모든 성도를 성전이라고 일컫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어야 할 성전은 건물이 아닙니다. 에베소서 2:21-22절을 보면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죄로 인해 죽은 우리를, 살리시고 택하시고 부르신 것은, 성전으로 지어가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치르시고, 피 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과 사랑에 감사하며 모이면 됩니다. 이들이 성령 받은 자들이고, 하나님은 이들 곧 택한 자를 부르셔서 성전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로 인해서, 영원한 복에 거하게 된 사람입니다.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은, 그 어떤 것도 복의 통로가 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만 소망하는 그들이, 곧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우리가 많이 부르던 복음 성가 중에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 노래 가사를 보면, 인간은 사랑 받는 권리를 가지고 태어난 것으로 말하지만, 이것이 자기편에 서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결과입니다. 자기편에 서서 하나님을 바라보기에, 하나님을 자신을 사랑하는 분으로만 여길 뿐, 자신을 무너뜨리고 나에게 진노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도 하나님의 진노는 보지 못하고, 다만 나를 구원하시기 위한 사랑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십자가 앞에 선들 죄가 보이겠습니까? 그래서 솔로몬의 성전건축에 대한 내용을 대하면서,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속에 성전을 두셨는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성전 건축에 이방인인 히람이, 적극 참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6절을 보면 솔로몬이 히람에게 벌목하는 일을 부탁합니다. 이스라엘에는 그만한 기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의 부탁에 대해 히람은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8-9절 “이에 솔로몬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당신이 사람을 보내어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거니와, 내 백향목 재목과 잣나무 재목에 대하여는, 당신이 바라시는 대로 할지라. 내 종이 레바논에서 바다로 운반하겠고, 내가 그것을 바다에서 뗏목으로 엮어, 당신이 지정하는 곳으로 보내고, 거기서 그것을 풀리니, 당신은 받으시고 내 원을 이루어, 나의 궁정을 위하여 음식물을 주소서 하고” 이렇게 해서 이방인이 성전 건축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성전 건축에 이방인이 참여하도록 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성전을 세우심으로써, 장차 하나님이 세워주실 참된 성전이,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보여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2-4절 “이에 솔로몬이 히람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당신도 알거니와 내 아버지 다윗이 사방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고, 여호와께서 그의 원수들을 그의 발바닥 밑에 두시기를 기다렸나이다. 이제 내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게 사방의 태평을 주시매, 원수도 없고 재앙도 없도다.” 이 내용을 보면, 성전이 솔로몬 때에 지어진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이 전쟁으로 인해 성전을 건축하지 못했다는 것은, 전쟁 때문에 바빴기 때문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성전 건축은 여호와의 이름을 위한 것이었는데, 여호와의 이름이란 온 세상을 그 이름 앞에 굴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아직 전쟁을 하고 있다는 것은, 여호와의 이름에 굴복하지 않은 원수가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그 원수들을 그 발바닥 밑에 두시기를 기다렸나이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사방의 태평을 주시고, 대적도 없고 재앙도 없다는 것은, 원수가 여호와의 이름 앞에 굴복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7절의 “히람이 솔로몬의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이르되 오늘 여호와를 찬양할지로다 그가 다윗에게 지혜로운 아들을 주사 그 많은 백성을 다스리게 하셨도다 하고”라는 히람의 말이 나옵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이름에 굴복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고, 따라서 히람을 성전건축에 참여하게 하는 것은, 여호와의 이름 앞에 모든 원수가 굴복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전의 의미입니다. 성전은 단순히 제사를 드리고, 의식을 행하는 장소적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성전은, 단지 의식을 행하는 장소적이고 공간적인 의미로 이해하기 때문에, 성전을 현대의 예배당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성전이 세워진 것은, 여호와의 이름 앞에 모든 자의 굴복을 증거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건축된 성전이 무너진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여호와의 이름에 굴복하지 아니한, 이스라엘의 죄악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여호와께서 성전 건축을 마친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 이러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왕상 9:6-9절 “만일 너희나 너희의 자손이, 아주 돌아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경배하면, 내가 이스라엘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성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에서, 속담거리와 이야기거리가 될 것이며, 이 성전이 높을지라도, 지나가는 자마다 놀라며 비웃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성전에 이같이 행하셨는고 하면, 대답하기를 그들이 그들의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을 따라가서 그를 경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심이라 하리라 하셨더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주신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한다는 것은, 여호와께 굴복하지 아니함을 뜻합니다. 그럴 때 거룩히 구별한 성전이라도, 던져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 성전이 무너졌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원수로 행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세우신 성전의 의미인 것입니다. 성전을 무너뜨림으로써,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원수임을 증명하시는 것입니다.
성전은 솔로몬과 히람이 연합하여 위대한 일을 이루었음을 증거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에 온 세상이 굴복해야 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 앞에 굴복한 자로 나오는 그가, 참된 하나님의 백성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성전은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기능으로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여호와께 복종하는 것이었는데, 그들은 계명과 율례를 지키지 않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인간에게는 스스로 여호와께 복종할 의가 없으며, 있다면 자기편에 서서,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하나님의 원수된 것뿐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원수의 세계에, 인간의 손이 아닌 하나님의 손으로, 참된 성전을 세우셨는데, 세상은 참된 성전을 거부해 버립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손으로 지은 것을, 참된 성전으로 고집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참된 성전은 예수님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으로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우리에게 선포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손으로 지은 것, 우리 손으로 행한 것을 바라보고, 그것을 들고 하나님께 나오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원수된 것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인의 몸을 입으시고 오신 예수님이, 친히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심으로, 의를 이루셨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선포 앞에서, 인간은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고백이 있을 따름입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이름 앞에 굴복하는 것이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누구든 여호와께서 세우신, 참된 성전 앞에 굴복하는 그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가 참 이스라엘이며, 굴복하지 아니한 모든 사람이, 이방인으로 일컬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이 무너지고,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은,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원수일 뿐임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참된 성전에서 그러한 사실을 깨닫게 되고, 내가 곧 원수임을 자각한다면,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고백이 있게 되는 것이고, 그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된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솔로몬이 지은 성전이 가지고 있는 의미입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은 구약의 이스라엘 안에 성전을 세우셨는데, 이는 성전에서 하나님을 잘 섬기고, 신앙생활 열심히 하라는 취지로 세우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인간의 손으로 지은 것 자체를 받으시지 않을 정도로, 인간은 불의한 존재일 뿐이라는 것을, 성전의 무너짐으로 자각하고 발견하라고, 성전을 세우셨음을 알게 하옵소서. 또한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준비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위하여, 무언가 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자기의 마음에 합한 자들에게 은혜를 주셔서, 하나님의 귀하신 뜻을 성취시킬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는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를 받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준비시키시는 그 주시는 은혜를 체험하기를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 주님을 위한 좋은 소망을 품게 하시고, 주안에서 아름다운 소망을 갖게 하옵소서. 그리고 성경적인 소망,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소망을 갖게 하옵소서. 그리고 그 소망이 좋은 소망이라면,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이루도록 하신 것처럼, 이루어주시도록 기도하게 하옵소서. 가장 적절한 사람들을 주시고, 가장 좋은 물질들도 제공해 주시고, 뿐만 아니라 가장 좋은 환경을 주셔서, 우리들의 그 좋은 소망들이 아름답게 이루어지는 은혜가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