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바로읽기05-지안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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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여래의 참 모습
如理實見分 第五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신체적 특징을 가지고
여래라 볼 수 있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신체적 특징을 가지고
여래라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신체적 특징은
바로 신체적 특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신체적 특징들은
모두 헛된 것이니
신체적 특징이
신체적 특징 아님을 본다면
바로 여래를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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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설 :
‘如來를 무엇으로 보느냐?
몸매가 갖춰진 육체의 모습
곧 신체적 특징을 가지고
여래라고 하겠느냐?’
하고 물은 이 말은
눈이 보는 시각에서
여래를 찾지 말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가시감각적인 객관 경계의
겉모양을 분별하는 인식으로
여래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모양을 인식하는 것은
실상을 미혹한 것임에도
이를 모르고 감각에만 의존하여
사물의 진상을 모르는 것이
중생이기 때문에
일단은 외형의 가상을 떠나야
여래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보는 사물의 외형적 모습은
임시적으로 나타나 있는
거짓 모습에 불과하다.
모두가 무상(無常)에 속해 있는 것이다.
변하여 없어지는 것이므로
실제의 참모습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시간을 따라 변천하는
임시적인 가상을 실체가 있는 것인 양
착각하는 것은 전도된 소견이다.
그런데도
중생들의 집착 속에는
이 전도된 소견이 꽉 차서
실상의 진리에는 눈이 멀고,
따라서 실견이 아닌
망견으로 사물을 분별하고,
거기에 고정관념을 만들어 놓고
자기 고집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실유가 아닌 가유의 상태는
그 실체가 없는 공한 것임을 알아야
집착을 벗어나
진실한 지견을 가질 수 있으며
여기서 바로
부처님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신체적 특징은 헛된 것이다.’라고 한 것은
상을 부정하고 공을 드러내는 말이다.
‘신체적 특징이
신체적 특징이 아님을 본다면
바로 여래를 보리라.’한 것은
공한 속에
실상의 참 모습이 있다는 말이다.
이것을 ‘진공묘유의 도리’라 한다.
반야경 계통의 경전에서
공의 이치를 설파해 낸 것은
공을 통해서 묘유를 찾아내는 도리이다.
중생의 집착이 생기는 원인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면
가히 감각적인 객관 대상에 대하여
실체를 모르고 겉모양을 인식하는
분별심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저렇다.’
하는 분별에서
생각의 고집이 일어나는 것이 집착이다.
이것이 미혹이 되어
실상의 진리에 어긋난 업행이 야기된다.
금강경의 대의를
‘집착을 부수고 공을 나타내는 것’이라 하여
‘파이집 현삼공(破二執 現三空)’이라 한다.
아집과 법집의
두 집착을 부수어
아공과 법공
그리고 공한 것마저 공한
구공(俱空)의 이치를 나타내는
법문이라는 것이다.
또『金剛經』의 사구게를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이라 하여
중요시 여겨왔는데
이 경문이 바로 모양 없는 모양인
여래를 보는 도리를 밝혀 놓은 것이다.
『般若心經』에서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 하여
색과 공을 등치시킨 이야기는
색을 공으로 보고
공에서 색을 보아
색과 공이 둘이 아닌 하나로 보는
중도의 이치를 천명한 것인데,
이 중도 역시
진공묘유의 도리를 달리 말한 것이다.
공이 내재되지 않은 색이 없으며
색을 떠나 공만 존재할 수도 없는 것이다.
마치 병 속에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은 상태를
빈 병이라 하는 것처럼
공의 개념을 빈 것이라 한다면,
병이 전제되고서 비었다 하는 것이므로
공과 색은 떨어지지 않고
붙어 있는 결과가 된다.
또 비어 있는 병이기에
그 병 속에 다른 내용물을
담을 수 있는 성능이 있다.
그리하여
빈 것이 비지 않게 될 인연을
잠재적으로 갖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공은 공이면서
동시에 공이 아닌 불공이라는 것이
진공묘유의 본뜻이다.
[이야기]6
스물일곱 번의 의심
『금강경』은
수보리가 마음속으로 의문을 일으키면
부처님이 그것을 알고 넌지시
다시 수보리에게
다른 질문을 던지면서
의심을 풀어주는 내용으로 전문이 전개된다.
전문에 걸쳐서
수보리가 27번의 의심에 걸린다.
이 의심을 다 끊어주므로 27단의라 한다.
예로부터
『금강경』의 이 27단의의 내용을 두고
‘넝쿨반야’라 말해 왔는데
넝쿨이 얽힌 것처럼
복잡하다는 뜻에서 한 말이다.
『금강경』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27단의의 내용을 잘 알아야 한다고 했다.
부처님이 멸도한 뒤 1000년쯤 지나
북인도 건타라국(乾陀羅國:Gandhara)에
무착(無着:Asanga)이라는
인물이 출현하였다.
그는 보살로 불리어질 정도로
불법을 통달해서 많은 공을 남겼다.
그가 일광정(日光定)이라는
선정에 들어 도솔타천에 올라가
미륵(彌勒:Maitreya)보살을 친견하고
80게송을 받아왔다.
이 게송에 의해
그는 <금강반야론>이라는 책을 지어
『금강경』의 뜻을 풀이 하였다.
그리고 그의 아우인
천친(天親:Vasubandhu)에게
이것을 전해 주었다.
천친은 세친(世親)이라고도 하는데
다시 『금강반야바라밀경론』을 지었다.
세친은 이 논 속에서
27가지의 의심을 세워서
경의 뜻을 풀어가는 실마리를 삼았다.
제일 먼저 일어난 의심은
“상(相)에 머물지 말고 보시를 하라.”
곧 관념적인 생각이
앞선 상태가 되지 말고 보시를 하라한
<묘행무주분>의 부처님 말씀에 대하여
‘보시 등을 하는 것은
결국 장차 부처가 되기 위한 수행이므로
보시에는 어떤 목적
곧 부처가 되겠다는
목적이 분명히 있는 것이다.
목적을 위해서 노력한다면
마음은 목적에 대한
생각이 꽉 차 있게 된다.
목적의식이 차 있는 마음이
어떻게 상을 떠날 수가 있는가?
또 설사
상에 머무르지 않는
수행이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부처가 되면
부처는 32상을 갖춘 성인이다.
그렇다면
상 없는 수행을 하여
상 있는 부처가 된단 말인가?
이러한 의심이 일어난 것이다.
이 의심을 없애주기 위하여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물은 말이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신체의 모습 곧 몸매로써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이다.
수보리는 다시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신체의 모습으로써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신체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은
신체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상 없는 수행으로
상 있는 부처가 된다는 것은
말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수보리가
부처님이 다시 묻는 말에
스스로 상 있는 신체적 모습으로
부처를 볼 수 없다고 대답하고
또 스스로 설명하기를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신체적 모습이란
모양을 떠나 존재하는
법신의 부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라는 뜻으로 대답을 하였다.
다시 말해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신체적 특징으로
‘여래’를 보겠느냐 하신 여래는
32상이 갖춰진 인간의 몸매로 된
여래가 아닌
청정법신의 여래를 말하는 것이므로
이 법신 여래는
몸매의 모습으로 보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이리하여
처음 일으켰던 의심이
저절로 풀어져 버린 것이다.
그런데 수보리가
다시 의문에 사로잡힌다.
그것은
‘모양을 떠나 여래를 본다.
또 모양 없는 수행으로
모양 없는 부처가 된다.’
이것이 결론인데
이것은 중생들이 이해하기엔
무척 어려운 말이다.
이런 어려운 말을
누가 제대로 믿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다음 장에서
“세존이시여,
자못 어떤 중생이
이 말을 듣고
진실한 믿음을 내겠습니까?” 하였다.
여기에 부처님은
“그런 말 하지 말라.”
여래가 멸도한 후 맨 마지막 오백세
곧 말세에도
계를 지니고 복을 닦는 자가 있어
믿음을 낼 것이라 하시고
이런 사람은
한 두 부처님이 아닌
천 만 부처님께 선근을 심은 이들이며,
일체 관념의
고집이 없는 중생이라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