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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은 새 옷 입고 처음처럼 가는 길
--송영숙 시집 {남자들이여 출산하라}의 시세계
반경환
1.
송영숙 시인은 대전에서 태어났고, 1993년 {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는『 』와 『벙어리 매미』등이 있고, 현재 호서문학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충남 계룡산 자락에서 “내 방 책장 맨 위층은 최상급 시인의 자리/ 거긴 공기도 달라서/ 지존만이 오를 수 있는 봉머리다”([당신의 포지션])라는 시구에서처럼 최고의 시인이 되기 위해서 그의 무한한 시적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고 할 수가 있다. 송영숙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인 {남자들이여 출산하라}는 ‘사랑의 시학’의 소산이며,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이루어질 수 있는 사랑의 변증법을 통하여, ‘순수미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가 있다.
제주도 세화우체국에서
너에게 편지를 써
사랑이라고 두 글자만 써서
발신인 주소 없이 빠른우편으로 보냈어
너는 뛸 듯이 기뻐하겠지
첫사랑이 찾아왔다며
미안하지만 나야
화풀이는 바다에게
거리마다 수국이 불두화가 지천이야
갑자기 부처님께 너의 안부를 물었지 뭐야
부처님 느닷없어 하시겠지만
화풀이는 바다에게
----[근질] 전문
근질筋質이란 무엇인가? 근질이란 근섬유 내의 근원섬유根源纖維 사이를 메우고 있는 세포질을 말하지만, 그러나 송영숙 시인의 [근질]은 ‘근질거리다’의 동사에 가까운 명사라고 생각된다. ‘근질거리다’는 어떤 벌레에 물리거나 이물질이 닿을 때마다 ‘가렵다’는 것을 말하고, 따라서 그 불유쾌한 자극을 참을 수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송영숙 시인의 [근질]은 사랑이 그 주제이긴 하지만, 고귀하고 순결한 사랑이 아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즉, ‘배반 당한 애정’을 표현한 시라고 할 수가 있다. 고귀하고 순결한 사랑이 배반을 당하고, 이 ‘배반 당한 애정’은 그의 의식과 무의식을 참을 수 없는 가려움증처럼 자극한다. 가려움증은 불유쾌함이고, 불유쾌함은 반드시 그 대상을 찾아서 복수를 하게 되는 것이다. “제주도 세화우체국에서” “사랑”이란 “두 글자만 써서” “발신인 주소도 없이 빠른우편으로”너에게 보냈다는 것이 그것을 말해주고, “너는 뛸 듯이 기뻐하겠지/ 첫사랑이 찾아왔다며”라는 시구가 그것을 말해준다. 시적 화자에게 사랑은 가려움증이며 불유쾌함이지만, 그 대상인 너에게는 언제, 어느 때나 첫사랑이고 삶의 황홀함이다. 따라서 시적 화자인 ‘나’는 자기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익명으로 가짜 연서를 쓰는 것이고, 이것이 ‘배반 당한 애정’, 즉, 무서운 복수심의 표현이 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그가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미안하지만 나에게 원망을 하지 말고, 바다에게 화풀이를 하라는 것이다.
첫사랑이 아닌 선남선녀가 만나 사랑을 했지만, 어쩔 수 없이 헤어졌고, 그 상처는 남아 이처럼 [근질]이란 가짜 연서를 쓰게 만들었던 것이다. 일종의 투사投射이자 반동형성反動形成이지만, 고귀하고 순결한 사랑이 더럽고 비천한 사랑으로 변모하는 것은 단 한 순간이고, 이처럼 악연으로 이어진 원인은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너’에게 있다는 것이 시적 화자의 원망이기도 한 것이다. 거리마다 수국과 불두화가 지천인 것을 보고 부처님의 마음으로 다 용서를 하고 싶었지만, 그러나 나는 부처가 아니니 “화풀이는 바다에게” 하라는 것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가려움증이고 불유쾌함이며, 일종의 투사이자 반동형성으로 무서운 복수심을 낳게 만든다. 모든 것은 ‘네 탓이고, 내 탓은 없다’는 자기 방어적인 선민의식은 [너는 나 못 잊는다], [잘 가라 치사한 새끼], [단발머리], [연락처 좀 주세요] 등을 통해서 그야말로 너무나도 적나라하고 노골적으로 분출된다.
호피무늬 거죽으로 조용히 살지만
내가 기린이다
서서 자고 서서 먹는 네 발 짐승
숨어 있는 너를 비겁한 너를
천년이고 백년이고 기다리고야 말겠다
너는 내가 우습지
아카시아 잎이나 세는 놈 같지
까불지 마라 너는 나 못 잊는다
내 속에 용 있다 사슴 있다 소 있다 말 있다
네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
널 잡아올 수 있지만 기다리는 젠틀맨
나는 전생에 여우
너를 잡으러 거기서부터 여기까지 왔다
---[너는 나 못 잊는다] 전문
호피무늬 거죽으로 조용히 살지만 서서 자고 서서 먹는 기린, 숨어 있는 너를 비겁한 너를 천년이고 백년이고 기다리고야 말겠다는 기린, “너는 내가 우습지/ 아카시아 잎이나 세는 놈” 같지만 “까불지 마라 너는 나 못 잊는다”는 기린, “내 속에 용 있고, 사슴 있고, 소 있고, 말 있다는 기린, “네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 널 잡아올 수 있지만” 기다리겠는 기린, “나는 전생에 여우/ 너를 잡으러 거기서부터 여기까지 왔다”는 기린은 무서운 복수심의 화신이며, 그에게는 자비와 용서와 관용의 미덕이 조금도 없는 것 같다. “숨어 있는” “비겁한 너”는 도대체 누구이란 말인가? 송영숙 시인의 [근질]이 그래도 비교적 유머러스하고 낭만적인 복수심의 산물이라면, 여우에서 기린으로 생물학적인 변신을 꾀하고, 천년이고 백년이고 너를 꼭 붙잡고야 말겠다는 무서운 복수심은 그야말로 최후의 막장극을 보는 듯 하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마도 그는 시적 화자의 정신과 육체를 유린하고 떠난 자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분노하는 자는 눈이 멀고 치명적인 맹목과 광기에 사로잡히게 된다. ‘비겁한 놈’, ‘나를 우습게 보는 놈’, ‘까불지 마라’ 등의 막말을 동원한 [너는 나 못 잊는다]의 분노는,
뜻을 이룬 자는 떠난다 하셨지요
옳습니다 지당하신 말씀
쟁여놓은 슬픔 넘쳐흐르던 하필 그날이었죠
얻어먹은 밥이 모래알이더군요
당신은 무릇 반가半跏로 사유思惟하고 있었으나
속을 알 수 없었고
치사한 새끼 넌 아웃이야 말로는 못하고
사과는 우리 오래 사랑한 값으로 여기시라
저는 그걸 말이라고 뱉어놓기는 했지만
못 먹는 것 말고 다 먹던 시절은 갔습니다
안녕 땡큐 쏘 머치
라는 [잘 가라 치사한 새끼]에게서도 더욱더 노골적으로 적나라게 표출되고 있다. 분노는 이성이 아닌 흥분의 산물이고, 타자의 주체성과 그의 자유 의사를 짓밟고, 그리고 끝끝내는 그를 욕하면서 그와 똑같이 닮아간다. 자비와 용서와 관용의 미덕이 없어지고, 모든 것을 그의 탓으로 돌리는 책임전가와 함께, 아주 편협하고 극심한 도덕성의 마비증세를 겪게 된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명제는 자기 반성과 자기 비판으로 이어지지 않고, 오직 그를 붙잡아 그야말로 무서운 복수를 하고 말겠다는 신념과 이성의 광기에 사로잡히게 된다. “내 속에 용 있다 사슴 있다 소 있다 말 있다”라는 시구도 이성의 광기의 산물이고, “나는 전생에 여우/ 너를 잡으러 거기서부터 여기까지 왔다”라는 시구도 이성의 광기의 산물이다. ‘나는 전지전능한 신이고 그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라는 식의 이성의 광기는 분노의 산물이지만, 그의 분노는
우리 아파트 뒷동 302동
자살 소동 두 번째다
봄꽃 흐드러질 무렵 첫 번째 시도하여
온 동네 시끄럽더니
다시 에어매트가 펼쳐졌다
이 푸르디 푸른 신새벽에
무슨 일이니 대체
소문에 단발머리 여학생이라고 하던데
라는 [단발머리]의 주인공처럼 자살 소동을 일으키거나, 또는
이놈의 술을 끊어야 한다 이유는 주사酒邪다 술 찰랑 가득 찰 때면 휴대폰 연락처를 손끝으로 넘기며 삭제를 하는 것인데
삭제에도 나름 철칙은 있어서 쓸데없이 비위를 건드리는 자 상습적으로 거짓말하고 이간질하는 자 약속 어기기를 밥 먹듯 하는 자 부모 형제 등지고 남의 부모 형제 모시는 자 혼자 밥 먹는 자 삭제 삭제 삭제 이제 몇 안 남았다
아무리 그래도 술 없는 세상 빡빡하잖아 견딜 수 없잖아 딱딱한 책상머리 매콤한 담배 연기 지금이 어느 시댄데 담배냐구요 니가 뭔데 임마! 꺼져 임마! 삭제하고 몇 안 남은 내 소중한 인연들이여 나와서 한 잔 합시다
라는 [연락처 좀 주세요]에서처럼, “쓸데없이 비위를 건드리는 자, 상습적으로 거짓말하고 이간질하는 자, 약속 어기기를 밥 먹듯 하는 자, 부모 형제 등지고 남의 부모 형제 모시는 자, 혼자 밥 먹는 자” 등을 무차별적으로 삭제를 하고 살생부를 적어보지만, 그러나 그는 그 무서운 복수심을 실현시키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먼저 파멸(자살 소동)시키거나 백기투항을 하고, 이룰 수 있는 사랑, 즉, “몇 안 남은 내 소중한 인연들”을 찾아 나선다.
분노는 아주 뛰어나고, 분노는 아주 힘이 세다. 분노는 키가 크고, 분노는 눈이 밝다. 분노는 보이지 않는 곳을 다 보며, 여우의 간계를 다 갖고 있다. 이것이 ‘여우 콤플렉스’이고, 이것이 이 세상에서 키가 제일 작은 여우가 이 세상에서 제일 키가 큰 ‘기린’이 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더없이 거룩하고 순수한 사랑을 잃으면 우리는 모두가 다 같이 미치광이가 되고 그 무서운 복수심을 구체화시키고자 하지만, 그러나 그에게 수많은 상처와 원한을 남기고 떠난 자보다도 자기 자신이 더 먼저 파멸하는 비극을 맛보게 된다.
무서운 복수심은 배반 당한 애정의 산물이지만, 이 무서운 복수심은 새로운 사랑에 의해서만 치유된다고 할 수가 있다. ‘이룰 수 없는 사랑’이 ‘이룰 수 있는 사랑’을 찾아 나서고, ‘이룰 수 있는 사랑’이 ‘이룰 수 없는 사랑’으로 변모되는 ‘사랑’----, 이 ‘정반합의 변증법’ 속에 모든 ‘사랑의 시학’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
2
나비 한 마리 배롱나무 맨다리에
배롱나무 바보라고 쓴다
배롱나무 몸 비틀며 간지럽다고 웃는다
배롱나무의 웃음은 슬픔
나비는 말을 안 한다
나비는 욕을 모른다
나비만 아는 배롱나무의 언어
나비야 나비야 내친김에
곁눈 짓 그만하고
어떻게 지내는지 사연이나 길게 적어봐
배롱나무 간지러워 미쳐서 돌아가시게
----[근황] 전문
순수예술은 자연과 사물을 그 어떤 목적도 없이 있는 그대로 즐길 수 있는 것을 말하고, 상업예술은 예술을 빙자하여 돈벌이에 그 목적을 두는 예술을 말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고대사회의 예술작품마저도 경제적 가치로 평가하는 사회이며, 따지고 보면 오늘날은 순수예술과 상업예술(대중예술)의 경계가 무너지고 그 모든 예술을 상업예술로 만들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그러나 순수예술과 상업예술의 경계가 무너진 이 순간에도 상업예술이 침투할 수 없는 공간이 있으니, 그것은 동화의 세계와 일 자체가 기쁨이 되는 창작의 세계라고 할 수가 있다. 송영숙 시인의 [근황]은 동화 속의 자연, 아니, 자연 속의 동화를 순수미로 표현해낸 대단히 아름답고 뛰어난 걸작품이라고 할 수가 있다. “나비 한 마리 배롱나무 맨다리/ 배롱나무 바보라고” 쓰면, “배롱나무 몸 비틀며 간지럽다고” 웃는다. 나비 한 마리가 ‘배롱나무 바보’라는 말과 글자를 알 리도 없고, 배롱나무가 나비 한 마리의 유혹적인 희롱의 몸짓에서 ‘배롱나무 바보’라는 말과 글자를 읽을 리도 없다. 이 모든 것이 송영숙 시인이 나비 한 마리와 배롱나무를 인간화시키고, 그들의 몸짓과 수작을 동화(자연)의 세계로 창출해낸 것이다.
나비 한 마리와 배롱나무는 인간의 언어도 모르고 경제학의 잣대로 모르니, 그만큼 순수하고 때 묻지 않았지만, 그러나 ‘배롱나무 바보’라는 나비 한 마리의 유혹적인 희롱에 배롱나무는 마냥 즐겁고 기쁘게 웃을 수가 없다. 배롱나무의 웃음은 그만큼 쓸쓸하고 허탈한 슬픔이지만, 그러나 나비는 말도 안 하고 욕도 모른다. 나비 한 마리의 유혹적인 희롱은 거룩하고 순수한 사랑의 언어가 되고, 나비 한 마리의 희롱에 배롱나무는 이렇게 대답한다. “나비야 나비야 내친김에/ 곁눈 짓 그만하고/ 어떻게 지내는지 사연이나 길게 적어봐// 배롱나무 간지러워 미쳐서 돌아가시게”라고----. ‘배롱나무 바보’는 반어이고, ‘배롱나무 바보’는 배롱나무를 너무나도 사랑하는 나비의 더없이 부드럽고 달콤한 사랑의 밀어이기도 한 것이다. 요컨대 나비 한 마리와 배롱나무는 이처럼 전희前戱를 즐긴 것이고, 그 다음에, “배롱나무 간지러워 미쳐서 돌아가시게”는 성교의 절정, 즉, 대단원의 클라이막스를 뜻한다. 나비 한 마리는 수컷이 되고, 배롱나무는 암컷이 된다. 자연의 성교는 종과 종의 경계를 넘어선 성교이며,
티비에서 다섯 아이 엄마가 웃는다
아이 다섯의 아빠가 각각으로 다섯이란다
한 대 맞은 듯 몽롱하다
저쯤은 되어야 감히 사랑했다고
그때그때 충실했다고 말할 수 있지
저 젊은 엄마와
아이 다섯과
남편 다섯이
다 같이 소풍 가면 일처다부
거룩하여라 펄럭이는 치맛자락이여
울려라 둥둥둥 천둥 같이 북을 때려라
갈기를 나부끼며 우뚝 선
저 여전사의 졸개가 되고 싶어
등채를 쥐고 맨 앞에 서고 싶어
상모를 돌리며 날장구를 치고 싶어
----[저쯤은 되어야] 전문
라는, 다섯 아이의 아빠가 다 다른, 다섯 아이의 엄마의 웃음처럼, 더없이 순수하고 때 묻지 않은 순수예술, 즉, 고귀하고 거룩한 사랑이다. 이 지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거룩한 사랑은 선악을 넘어선 사랑이며, 경제학의 법칙도 모르는 자연의 사랑이라고 할 수가 있다. 다섯 아이의 아빠가 다 다른 것이 그 어떤 문제가 되고, 나비와 벌떼들이 그 어떤 풀과 나무와 꽃밭에서 혼음을 하거나 이종교배를 한들 도대체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된단 말인가? 도덕이란, 성 윤리란 더럽고 추한 사랑, 즉, 이룰 수 없는 사랑의 기초가 되고, 선악을 넘어선 동화(자연) 속의 사랑이란 순수하고 때 묻지 않은 사랑, 즉, 이룰 수 있는 사랑의 기초가 된다. 사랑은 종교도 모르고, 사랑은 국경도 모른다. 사랑은 이념도 모르고, 사랑은 도덕도 모른다.
오래된 사진첩을 정리하다가
발등을 찍는 사진 한 장
제주도 어느 식물원 호랑이 석등에
둘이 타고 앉아 영화를 찍고 있다
손가락 만하게 돌돌 말려있는 후지필름
남은 페이지 가늠하며 한 컷 한 컷 박았을 그날
그래 그때는 좋았지
그대나 나나 눈이 멀어서
앞자리에서 고삐를 쥔 긴 머리의 젊은 여자
그 뒤에서 양손으로 여자의 허리 움켜잡고 있는
조금 늙은 남자
보아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편네의 미소가 저것이다
참 늠름하기도 하지
---- [그때가 좋았다] 부분
송영숙 시인의 [그때가 좋았다]는 추억(동화) 속의 사진 한 장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정영화의 한 장면이라고 할 수가 있다. 요컨대 “앞자리에서 고삐를 쥔 긴 머리의 젊은 여자”와 “그 뒤에서 양손으로 여자의 허리 움켜잡고 있는/ 조금 늙은 남자”가 연출해낸 순정영화의 명장면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보아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편”과 그 아내의 미소가 거기에 담겨 있는 것이고, 그는 그 거룩하고 순수한 사랑을 추억하며, “세상의 남자들이여, 출산하라”고 그 무엇보다도 가장 힘 있고, 압도적으로 명령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문명 속의 사랑은 이룰 수 없는 사랑이고, 이룰 수 없는 사랑은 불모성을 자랑하는 사랑이다. 자연 속의 사랑은 이룰 수 있는 사랑이고, 이룰 수 있는 사랑은 생산성을 자랑하는 사랑이다.
비켜라 바쁘다
뭐 그리 바쁘냐고
밥하고 빨래하고 애 낳으러 간다
숨어서 혼자 노는 남자들이여
우린 여기까지다
이제 그대들의 앞치마가 펄럭일 시간
연꽃무늬 이불 털어 하늘에 널고
나와서 밥하고 빨래하고 출산하라
입은 다물고 공손하게
튼튼한 팔뚝과 장엄한 종아리로
아기를 품어
배가 남산만 해지도록 키우다가
콩나물 사러 나올 때는
배꼽 볼록 나오게
얇은 티셔츠 한 장 잊지 말기를
---[남자들이여 출산하라] 전문
삼포세대란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세대를 말하고, 오포세대란 연애, 결혼, 출산 이외에서도 내집마련과 취업을 포기한 세대를 말하며, 칠포세대란 희망과 인간 관계까지도 포기한 세대를 말한다. 삼포와 오포와 칠포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음화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세태 풍조이자 그 결과라고 할 수가 있다. 더 많이, 더 빨리, 돈에 대한 탐욕이 생산과 소비의 장을 다 움켜쥐고, 이제는 ‘고용 없는 성장’을 외치며 모든 젊은이들의 일자리를 다 빼앗고 말았던 것이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주축을 이루던 산업화의 단계에서 이제는 모든 생산과정을 전산화시키고, 그 결과, 컴퓨터와 로봇과 인공지능이 그 모든 일자리를 장악하게 되었다. 노동집약적인 산업현장에서 ‘고용 없는 성장’으로의 눈부신 발전은 소수의 자본가들에게 모든 부를 독점하게 만들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꿈과 희망을 다 빼앗아 버린 ‘풍요 속의 빈곤’을 안겨주게 되었던 것이다. 오죽하면 우리 젊은이들이 연애, 결혼, 출산, 내집마련, 취업 등을 다 포기하고, 마치 바퀴벌레처럼 숨어 살게 되었단 말인가? 자본주의 사회는 소수의 부자들을 위하여 빈곤을 확대 생산하는 반인륜적인 사회이며, 컴퓨터와 스마트폰과 인정지능 등이 출현할수록 ‘나홀로 족’이 늘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공동체 사회는 붕괴되어가고, 미래의 꿈과 희망을 잃어버린 우리 젊은이들은 어쩔 수 없이 바퀴벌레와도 같은 지하생활자가 되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송영숙 시인의 [남자들이여 출산하라]는 너무나도 과격하고 충격적인 여성해방주의자들의 외침 소리와도 같지만, 그러나 그의 [남자들이여 출산하라]는 시는 모든 꿈과 희망을 잃고 자포자기한 우리 젊은이들을 향한 최후의 경고장이라고도 할 수가 있다. 날이면 날마다가 공휴일이고, 숨어서 혼자 노는 젊은이들에게 일은 우리 여자들이 할 테니, 이제는 애를 낳고 그 아이들을 키우며 집안 살림을 하라는 것이다. 우리 여성들은 “비켜라 바쁘다/ 뭐 그리 바쁘냐고/ 밥하고 빨래하고 애 낳으러 간다”라는 시구에서처럼, 사무실에서, 산업현장에서, 거리에서 일을 하고, “밥하고 빨래하고” “애”까지 낳아 키우고 있으니, 이제 그만 빈둥빈둥 놀지 말고 집안 살림이라도 하라는 것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도둑질이라도 하라는 말이 있듯이, “입은 다물고 공손하게/ 튼튼한 팔뚝과 장엄한 종아리로/ 아기를 품어/ 배가 남산만 해지도록 키우다가/ 콩나물 사러 나올 때는/ 배꼽 볼록 나오게/ 얇은 티셔츠 한 장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송영숙 시인의 표제시인 [남자들이여 출산하라]는 무시무시한 익살이자 난처함의 유모어라고 할 수가 있으면서도, 소위 ‘나홀로 족’의 우리 젊은이들을 향한 최후의 경고장이라고 할 수가 있다.
결혼 지옥이라는 프로가 다 있지 뭐야 결혼이 지옥이라고 대놓고 말하는 꼬맹이들아 결혼이 우습지 암 우습고 말고
귀 좀 줘 봐 즐거운 결혼 따윈 없단다 놀던 아이들 중 용케도 엑스맨을 골라 곁을 나누어주는 거지 왜 있잖아 쿵 심장 떨어지듯 화끈하게 바닥으로 나동그라지는 거 그래 그것을 지옥이라 치자
지옥은 새 옷 입고 처음처럼 가는 길
희망을 가져봐 지루하지 않은 청룡 열차 이제라도 신나게 너의 그 애와 나란히 앉아 소리쳐봐 다 가져봐 찡긋 오늘 어때
---[찡긋 오늘 어때] 전문
송영숙 시인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통해 그 무서운 복수심을 극복하고, 이루어질 수 있는 사랑을 찾아냈고, 이 ‘사랑의 시학’을 통해 ‘순수미의 극치’를 이루어냈다고 할 수가 있다. [남자들이여 출산하라]는 무시무시한 익살이자 난처함의 유모어의 소산이지만, 소위 삼포, 오포, 칠포세대들, 즉, ‘결혼지옥’이라는 우리 젊은이들에게 이 세상에서 꿈과 희망을 찾아주고자 하는 우리 어머니들의 간절한 소망을 담고 있는 시라고 할 수가 있다. 그렇다. 그의 시, [찡긋 오늘 어때]에서는 “지옥은 새 옷 입고 처음처럼 가는 길”이라고 말하고, “결혼이 지옥이라고 대놓고 말하는 꼬맹이들”에게 너무나도 분명하고 확실하게 이렇게 말한다. “귀 좀 줘 봐 즐거운 결혼 따윈 없단다 놀던 아이들 중 용케도 엑스맨을 골라 곁을 나누어주는 거지 왜 있잖아 쿵 심장 떨어지듯 화끈하게 바닥으로 나동그라지는 거 그래 그것을 지옥이라 치자”가 그것이고, “지옥은 새 옷 입고 처음처럼 가는 길// 희망을 가져봐 지루하지 않은 청룡 열차 이제라도 신나게 너의 그 애와 나란히 앉아 소리쳐봐 다 가져봐 찡긋 오늘 어때”라고 말한다. 결혼은 지옥이라고 말하지만, “지옥은 새 옷 입고 처음처럼 가는 길”이라는 잠언과 경구는 내가 최근에 읽은 가장 뛰어난 시구이며, 이 세상의 삶의 본능에 대한 옹호이자 그 찬가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지옥은 새 옷 입고 처음처럼 가는 길”----. 이 잠언과 경구는 송영숙 시인의 ‘사랑의 시학’의 가장 깊은 핵심적인 주제이며, 그 ‘순수미의 극치’라고 할 수가 있다.
3
최초의 대서사 시인이자 최후의 대서사 시인이었던 호머의 인생관과 세계관은 무엇이고, 그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할 수가 있는 것일까? 인생관이란 우리 인간들의 삶의 안목을 말하고, 세계관이란 그가 이 세상을 어떻게 보고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삶의 방법을 말한다. 호머는 요정 칼립소가 제안했던 영생불사의 삶도 거절했는데, 왜냐하면 전지전능한 신이 아닌 유한한 인간의 삶을 옹호했기 때문이다. 또한, 호머는 무사안일 속의 행복한 삶도 거절했는데, 왜냐하면 이 세상의 삶은 어차피 수많은 고통과 그 고통 속의 삶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영생불사의 삶은 전지전능한 신의 삶이지 인간의 삶이 아니었던 것이고, 또한, 이 세상의 삶은 고통 속의 삶이지 무사안일 속의 삶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호머는 그의 분신이자 전인류의 영웅이었던 오딧세우스를 통해서 우리 인간들의 삶을 옹호하고, 고통에 고통을 가중시키며, 그 고통 속의 삶을 살다가 갔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교만해질래 자신만만해져서
기고만장해져서 천하를 내려다볼래
눈은 독사 코는 코끼리 안하무인이 되어
이쁜 놈들 나쁜 놈들
모조리 후려 한데 부려놓고
얼차려 시킬래
그러니까 내가 종일 웃는 거 같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맨드라미를 심으면 시들시들
선인장을 들이면 시름시름
풀이 죽었다
그래봤자 죽기밖에 더하겠냐만
아직은 활화산
빨갛게 넘치는 것이 있으니
불문곡직하고 다시 피어나고 싶은 거지
내가 나라서 참 다행이지만
가끔은 풍경소리 들으며 뻔뻔하게
후리하게 호래자식 감정으로
음탕하게 방탕한 느낌으로
아무렇게나 화끈하게 끝내주게
----[화끈하게 끝내주게] 전문
송영숙 시인의 [화끈하게 끝내주게]는 이 세상의 어중이 떠중이들의 한탕주의적인 삶을 노래한 것 같지만, 그러나 그 기고만장한 객기의 이면에는 “맨드라미를 심으면 시들시들/ 선인장을 들이면 시름시름/ 풀이 죽었”던 만고풍상의 삶이 축적되어 있었던 것이다. 시인은, 영웅은 최고급의 인식의 제전의 전사이고, 최고급의 인식의 제전의 전사는 결코 쉽게 한탄하거나 좌절하지 않는다. 그는 “눈은 독사 코는 코끼리 안하무인이 되어/ 이쁜 놈들 나쁜 놈들/ 모조리 후려 한데 부려놓고/ 얼차려 ” 시킬 힘(지혜)이 있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이고, 따라서 “그래봤자 죽기밖에 더 하겠”느냐고 이 죽음을 더욱더 크게 끌어 안으면 “아직은 활화산/ 빨갛게 넘치는 것”, 즉, 불문곡직하고 삶의 의지가 다시 꽃피어나는 것이다.
시는 낙천주의를 양식화시킨 것이고, 행복한 꿈의 한 양식이다. 시는 이 세상의 삶의 찬가이며, 우리가 시를 쓰는 동안은 그 모든 일들이 다 축제가 된다. “내가 나라서 참 다행이지만/ 가끔은 풍경소리 들으며 뻔뻔하게/ 후리하게 호래자식 감정으로/ 음탕하게 방탕한 느낌으로/ 아무렇게나 화끈하게 끝내주게” 사는 것 같지만, 그러나 이 기고만장한 삶의 이면에는 이룰 수 없었던 사랑, 즉, 그 무서운 복수심을 극복한 자의 삶의 기쁨과 그 환희가 담겨 있는 것이다.
시는 이룰 수 있는 사랑이고, 그 사랑의 기쁨이고, 그 삶의 찬가이다. 지옥을 새 옷 입고 처음처럼 가는 길의 기쁨이고, “정식이 오빠는 죽어서 좋겠네”([정식이 오빠는 좋겠네])의 기쁨이고, “누군가 내다버린 고서 한 뭉치/ 안아 들고 집으로 오는 길”([백중])의 기쁨이다.
내 방 책장 맨 위층은 최상급 시인의 자리
거긴 공기도 달라서
지존만이 오를 수 있는 봉머리다
찬물에 눈을 씻고
제일로 꼽는 시인의 순서로
홍동백서 진설하듯 시집을 모신다
문시인 김시인 이시인 김시인 박시인 허시인
그들의 포지션은 계절별로 바뀌는데
오늘이 그날
반절로 합장하고
죄송합니다 자리 좀 바꾸겠습니다
축하드립니다 한 칸 오르시겠습니다. 고하면
머리를 긁적이며 제각각 나앉으신다
그중 보스는 누구니 누구니 해도 문시인
가고 없어도 내 마음속의 영원한 캡틴
어차피 좋은 시 쓰지 못할 바에야
좋은 시 찾아 읽는 것으로
밥값을 대신하기로 했다
한 폭의 가로 족자처럼
노을 색으로 번져가는 책등의 풍경
저 아우라
----[당신의 포지션] 전문
송영숙 시인은 “내 방 책장 맨 위층은 최상급 시인의 자리”라고 말하고, 그 책장의 공간은 “공기도 달라서/ 지존만이 오를 수 있는 봉머리”라고 말한다. 고귀하고 위대한 인물을 존경하고 찬양하면 자기 자신도 고귀하고 위대한 인물이 되지만, 이 세상의 어중이 떠중이들을 사랑하고 그들과 어울려 돌아다니면 이 세상의 어중이 떠중이들이 될 수밖에 없다. 송영숙 시인은 “찬물에 눈을 씻고/ 제일로 꼽는 시인의 순서로/ 홍동백서 진설하듯” 제일급의 시인들을 모셔왔던 것이고, 그 결과, “문시인 김시인 이시인 김시인 박시인 허시인” 등의 “포지션은 계절별로 바뀌는데” 나는 그 자리에 오를 수가 없었다고 한탄을 한다. 아니다. “어차피 좋은 시 쓰지 못할 바에야/ 좋은 시 찾아 읽는 것으로/ 밥값을 대신하기로 했다”라는 시구와 “한 폭의 가로 족자처럼/ 노을 색으로 번져가는 책등의 풍경/ 저 아우라”의 시구는 하늘마저도 감동시키고, 이처럼 송영숙 시인을 최상급 시인의 자리로 등극시켜 놓고 있었던 것이다.
최상급 시인은 ‘시인 중의 시인’이며, 모든 사상과 이론을 정복하고 그 앎을 육화시켜 최고급의 인식의 제전을 펼쳐 보이는 사람을 말한다. 그는 과거의 역사적 사실과 동시대의 시대정신을 꿰뚫어보고 그 시대를 앞서간 사람이며, [달 달 무슨 달]에서처럼 동시대의 반항아이자 파렴치한의 껍질을 벗어던지고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난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다. ‘시인 중의 시인’은 전인류의 스승이자 아버지이고, 최후의 심판관과도 같은 사람이며, 송영숙 시인은 그 시인이 되기 위하여, 이 불모의 땅, 충청도에서 그처럼 ‘고통의 지옥훈련과정’을 거쳐왔던 것이다. 송영숙 시인의 세 번째 시집 {남자들이여 출산하라}는 지옥을 새 길처럼, 아니 소풍처럼 다녀온 지혜와 용기와 성실성의 소산이며, 그의 아름답고 행복한 소우주라고 할 수가 있다.
그렇다. 시인의 길은 “누군가 내다버린 고서 한 뭉치/ 안아 들고 집으로 오는 길”이고, “새 옷 입고 처음처럼” 지옥으로 가는 길이다.
무사무욕한 시선과 순수미의 극치----. 시는 모든 고통의 만병통치약이며, 시만큼 그 옷자락이 넓고 대자대비한 것도 없다. 시는 부처이고, 예수이며, 우리는 시인들이 있기 때문에 이 어렵고 힘든 세상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