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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7
어느 정도 복을 받고 싶습니까? / 김경수 목사
인생론 중에 운명론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모든 일이 미리 정해진 필연적인 법칙에 의해 일어나므로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이론입니다. 의외로 운명론에 입각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마도 현실의 상황을 극복할 수 없는 염세적인 면이 없지 않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일을 쉽게 정리해 버리는 것입니다. 나쁜 일이 발생해도 운명이라고 여기면서 단념해 버리는 것입니다. 물론 도움이 되는 부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운명론의 치명적인 약점은 미래와 희망을 품을 수 없다는 것이며 절망적인 요소가 오히려 다분합니다. 환난과 문제를 만나게 되면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살면 되는 것입니다. 한숨을 쉬면서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에 포기하면서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인생은 정해진 것일까요? 저는 이 운명론에 절대적으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인생은 정해진 코스로 진행되는 것이 아닌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인생은 어떻게 전개되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 말씀에 한 여인이 나옵니다.
남편이 있었는데 죽고 두 아들을 데리고 살아가기가 심히도 힘든 여인입니다. 만약에 이 여인이 그런 상황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이고 미래를 포기했더라면 불행했을텐데 오늘 말씀은 상황을 반전시키는 놀라운 사건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들의 삶과 미래가 더욱 풍성해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먼저는, 미래가 복되기를 소원한다면 핍절의식과 패배의식을 버려야 합니다.
이 여인의 남편은 선지자 학교에 다니며 하나님을 잘 믿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죽게 된 것입니다. 그의 아내는 두 아들을 데리고 살아야 하는데 설상가상으로 빚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채권자가 와서 빚을 갚으라고 독촉을 합니다. 이틀이 멀다하고 와서 요구를 하니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루는 채권자가 하는 말이 빚을 갚지 못하면 두 아들을 데리고 가서 종으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남편을 여읜 것만 해도 억장이 무너지는 일인데 삶의 소망이 되는 자식들을 종으로 삼겠다고 데려간다고 하니 절망적입니다. 달리 방도가 없습니다. 절대적인 위기입니다. 미래가 불투명하니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여인의 마음속에는 핍절의식과 패배의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이 여인은 운명론자가 아니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어떻게든 반전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사를 찾아온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절대적인 절망 가운데 빠져 있어도 운명론자가 아니라면 주님 앞으로 나오십시오. 나에게 방법이 없고 길이 보이지 않아도 주님 앞으로 나오면 문이 열리고 길이 보이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엘리사에게 찾아가서 자초지종을 모두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했던 남편이 죽었다는 것과 채권자가 와서 두 아들을 데리고 가겠다는 상황을 말합니다. 엘리사는 무엇이라고 말하였습니까?
(2)-“엘리사가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왜 주님 앞으로 매일 나아가야 하는지 아십니까? 오늘은 어제와 다른 하루입니다. 똑같지 않기에 수많은 변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 대부분은 나에게 좋지 않은 일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을 매일 매순간 주님 앞에 가지고 나아가서 아뢰면 예외 없이 엘리사와 같은 부드러운 사랑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너무나 흥분되는 말씀이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성경은 항상 하나님 앞으로 나오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4:16)-“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쉬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기도하는데 왜 걱정하며 염려하십니까? 매순간 주님 앞에 우리들의 필요를 간구하시고 주님의 인도를 요청하십시오. 그리하면 꾸짖지 아니하시는 좋으신 주님께서 친절하게 도와주시고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엘리사는 그 여인에게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를 말하라고 하였을 때 그녀의 대답 속에 핍절의식과 패배의식으로 충만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2)-“그가 이르되 계집종의 집에 기름 한 그릇 외에는 아무것도 없나이다”
생각 속에 미래가 있습니다. 생각이 절망과 패배로 차있으면 결코 미래는 기대할 것이 하나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미래는 생각이 바뀌지 아니하면 기약할 수 없습니다. 미래는 우리들의 생각 속에 담겨 있는 씨앗에 의해 전개되고 열매 맺는 것입니다. 부정적이고 패배적인 생각을 하게 되면 알맹이가 없는 쭉정이만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긍정적이고 가능성의 사고를 하면 미래에 100배의 결실을 보게 될 것입니다.
1491년 스페인 지브랄타 해역 앞에는 다음과 같은 팻말이 있었다고 합니다.
No more ahead. 즉 “지구는 여기서 끝이다”는 뜻입니다. 초대교회 시대에도 땅끝은 스페인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해 콜롬버스라고 하는 사람이 그곳을 지나가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하는군요.
More ahead. 즉,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끝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안 된다, 못 한다, 할 수 없다, 힘들다, 피곤하다, 약하다, 등등. 이런 부정적이고 패배적인 생각이나 말을 절대로 하지 마십시오. 만약에 이런 생각과 말들을 하게 되면 단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 어떤 것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방법도 없고 문도 열리지 아니하며 길도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원하신 것도 부정적이고 패배적인 생각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절대로 부정적이고 패배적인 생각을 통해서 오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배운 중요한 교훈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는 깨달은 그 날부터 생각과 말을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 날 그에게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육신적으로는 죽은 몸인데 자기 아내와 그 밤에 잠을 자고 나니 아이가 들어선 것입니다.
생각과 말을 바꾸면 그 순간부터 모든 것이 생동감을 갖게 됩니다.
생각과 말을 바꾼 것뿐인데 모든 것이 달라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프리카는 비가 오지 않는 척박한 곳입니다. 그런데 비가 오면 바로 그 순간부터 죽은 땅에서 풀이 올라오기 시작하고 나무에서 잎사귀가 피기 시작합니다.
우리들의 생각과 말이 그러합니다. 흔히들 아니 생각과 말을 바꾼다고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하고 의아해 할 것입니다. 해보지 않고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긍정적이고 가능성의 사고를 하게 되는 그 순간부터 모든 것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더 놀라운 것은 주님 안에서 긍정적이고 가능성의 사고는 더욱 폭발적인 변화를 가져옵니다.
나의 생각이 바뀌고 말이 달라지는 그 순간부터 자녀들이 변화하고 남편이 달라지고 아내가 바뀌기 시작합니다. 직장 동료들이 알아보고 사업에 관계된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생각과 말을 바꾸셔야 합니다. 훈련을 하지 아니하면 안 됩니다. 반복적으로 계속해서 하지 아니하면 안 됩니다.
엘리사는 핍절의식과 패배의식 그리고 절망감에 쌓여 있는 이 여인에게 생각을 바꿀 수 있고 동기부여가 되는 지시를 합니다.
(3)-“너는 밖에 나가서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리라 빈 그릇을 빌리되 조금 빌리지 말고”
아직 하나님의 기적은 나타나지 않았고 눈에 보이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사의 말속에 이미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이 담겨 있고 긍정적이고 가능성의 사고를 할 수 있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리라고 한 것입니다. 왠지 잘될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왠지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날 것 같지 않습니까? 말 자체가 동기부여가 됩니다. “많이 빌려야지” 하는 생각과 동시에 핍절의식이 사라지고 느낌적으로도 형통할 것 같은 기대를 갖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 마음에 소원을 두시고 일을 행하십니다. 결코 부정적이고 패배의식에 쌓여 있으며 절망감으로 한숨 쉬고 있는 사람을 통해서 축복하시고 일하시는 일이 없으십니다.
이 여인은 그릇을 빌리면서 할 수 있는 한 많이 빌려야 되겠다는 풍성한 의식과 하나님의 기적과 축복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언제나 풍성한 의식과 하나님의 기적과 축복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얼마만큼 큰 기대를 가져야 할까요?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제한을 두지 않습니다. 정해진 것이 없습니다. 할 수 있는 대로 빌리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백 그릇 정도 빌리면 좋겠습니까? 아닙니다. 온 동네를 다 돌고 이웃 동네까지 다니면서 그릇을 빌리는 것입니다. 천 그릇을 빌리면 더 좋습니다. 만 그릇을 빌리면 더 좋습니다. 백만 그릇을 빌리십시오. 하나님의 축복은 제한이 없습니다. 어마어마한 양의 그릇을 빌리십시오. 아무리 많은 양의 그릇을 빌려도 괜찮습니다. 끝없이 부어주시고 싶으신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요10:10)-“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여인은 종국적으로 하나님의 기적으로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며 묵상하면서 얼마나 아쉬었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빚진 채무를 갚고 겨우 자신과 두 아들이 근근히 살아갈 수 있을 만큼 그릇을 빌렸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 여인이 더 많은 그릇을 빌렸다면 하나님의 기적과 축복을 더 받았을 것이며 흘러넘치는 하나님의 복을 많은 사람들에게도 나누어 줄 수 있었을텐데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90% 이상의 사람들은 아무 꿈도 없이 산다고 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 중에도 비전과 꿈이 없이 산다는 것입니다. 절통한 일이 아닙니까? 한량없는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가난하게 산다는 것입니다. 하늘을 날을 수 있는 독수리가 닭처럼 땅에 있는 곡식 낟알이나 쪼아 먹고 산다면 얼마나 불쌍한 일입니까? 저와 여러분들은 더 높이 날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늘의 왕자요 공주입니다.
이와 같은 비전과 꿈이 있는 사람들, 하나님의 기적과 축복을 사모하는 사람들은 기도생활을 하는 것을 보면 압니다. 기도하는 마음과 모습이 다릅니다. 하나님의 기적과 축복을 기대하는 사람들은 기도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기도의 잠을 자지 않습니다. 그들은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열망으로 충만해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에 미쳐서 삽니다. 기도줄을 놓으면 죽는 줄 압니다. 그리고 그 비전과 꿈 때문에 사사로운 것들은 포기할 줄도 압니다. 고난과 힘든 역경이 와도 감내하는 인내를 보여줍니다.
대표적인 사람으로 요셉을 보십시오. 그에게는 놀라운 꿈이 있었습니다. 부모조차 자기에게 절을 하는 꿈으로 보아서 만인이 우러러 보는 위치에 있는 복을 꿈꾼 것입니다. 이 꿈 때문에 형들도 용서할 수 있었고 아름다운 여인의 유혹도 뿌리칠 수 있었으며 재상이 되어서도 결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아름답게 사역하는 멋진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비전과 꿈이 있는 사람은 결코 무례하지 않습니다. 경거망동하지 않습니다.
혹자는 하나님으로부터 꿈을 받지 못했다고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꿈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을 잘 살펴보십시오. 꿈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도 있지만 스스로 가질 수도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엘리사는 그 여인에게 빌릴 수 있는 대로 빌리라는 것입니다. 제한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릇의 모양에도 제약을 두지 않았습니다. 어떤 그릇이든지 얼마만큼의 그릇이든지 그 여인 스스로가 판단하고 결정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 수 있는 대로 큰 꿈을 꾸십시오. 큰 비전을 가지십시오. 엄청난 하나님의 기적과 축복을 사모하십시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여인은 하나님의 기적과 축복을 누릴 수 있었을까요?
순종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순종은 신앙생활에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순종이 천천만만 제사보다 낫습니다. 신앙생활을 얼마나 하든지, 얼마나 봉사하든지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순종하면서 자존심이 상했다고 생각지 마십시오. 권위자를 위해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은 나를 위한 것이며 하나님의 기적과 축복을 담는 마음입니다.
할 수 있는 대로 우리들 속에 잠재해 있는 불순종을 깨뜨리고 버려야 합니다. 불순종은 나의 인격을 파괴하며 결코 성공적일 수 없고 열매를 맺을 수도 없습니다.
만약에 이 여인이 말도 되지 않는 것이라고 여겨서 순종하지 아니했다면 어찌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이 여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람 군대 장관이었던 나아만 장군도 엘리사의 말에 순간적으로 기분이 상했습니다만 그는 자신을 위해서 요단강에 몸을 담구는 순종을 합니다. 순종은 권위자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순종은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나아가 이 여인은 엘리사의 말한 대로 문을 닫고 빈 그릇에 기름을 붓기 시작합니다. 왜 문을 닫고 기름을 부으라고 했을까요? 이 여인이 그릇을 빌릴 때 동네 사람들은 의아했을 것입니다. 왜 그토록 많은 그릇을 빌릴까라고 궁금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의 집을 기웃거리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방안에서 이상한 일을 목격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많은 조롱과 비웃음을 보였을 것입니다. 불신적 조롱과 비웃음은 이 여인의 믿음과 순종을 여지없이 파괴시킬 수 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기적과 축복은 이런 불신적 조롱이나 비웃음으로 방해를 받습니다.
부정적이고 패배적이며 불신과 두려움의 말들을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아예 듣지도 마십시오. 그런 사람과 함께하는 것은 불행한 결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할 수 있는 대로 엄청난 꿈과 비전을 가지십시오.
생각과 말만 바꾸어도 즉시로 환경이 달라지고 주변의 사람들이 변화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기적과 축복을 누리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강건한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형통한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나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어마어마한 복을 사모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