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님 화엄경 강설 43】 13
2> 보현(普賢)보살이 답하다
爾時에 普賢菩薩이 告普眼菩薩言하사대 善哉라 佛子야 如汝所言하야 若此菩薩摩訶薩이 同一切佛인댄 以何義故로 不名爲佛이며 乃至不能捨菩薩道오
그때에 보현보살이 보안보살에게 말하였습니다.
“훌륭하십니다[善哉]. 불자시여, 그대가 말한 바와 같이 ‘만약 이 보살마하살이 일체 부처님과 같다면 무슨 뜻으로 부처님이라 이름하지 않으며, 내지 보살의 도를 버리지 않는다.’라고 하는가.”
▶강설 ; 보안보살이 의심하고 물은 내용을 보현보살이 거듭 거론하고 나서 아래에서 하나하나 그 뜻을 밝혀 나간다. 즉 수행의 과위는 부처님과 꼭 같아서 부족함이 없는데도 계속해서 보살이라고 부르는 까닭을 설명하는 내용이다.
佛子야 此菩薩摩訶薩이 已能修習去來今世一切菩薩種種行願하야 入智境界일새 則名爲佛이요 於如來所에 修菩薩行하야 無有休息일새 說名菩薩이며
“불자여, 이 보살마하살이 이미 과거 미래 현재 세상의 일체 보살의 갖가지 행(行)과 원(願)을 닦아서 지혜의 경계에 들어갔으므로 곧 ‘부처님’이라고 이름해야 하지만, 부처님이 계신 데서 보살의 행을 닦아서 쉬지 않으므로 보살이라 이름하느니라.”
▶강설 ; 불교에는 초기불교, 근본불교, 소승불교, 원시불교, 부파불교, 상좌부불교, 대중부불교, 초기 대승불교, 중기 대승불교, 후기 대승불교, 비밀불교, 다시 중국으로 건너오면 선불교, 또 한국에서는 호국불교, 기도불교, 기복불교, 인간불교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어떤 불교와 어떤 경전을 의지하고 불교를 말하는가에 따라서 그 의미는 크게 차이가 난다. 모두 다 나름대로의 뜻하는 바와 목적하는 바가 있겠으나 그러나 그 가운데서 부처님의 뜻에 가장 잘 맞고, 가장 이상적이며, 가장 바람직한 불교를 화엄경에 근거하여 설정한다면 대승보살불교라고 할 것이다. 대승보살불교는 오로지 중생 교화를 위한 불교이다.
만약 부처님 가르침[佛敎]의 본래의 목적을 중생들을 교화하고 제도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견성도 성불도 열반도 해탈도 모두 중생을 교화하고 제도하기 위한 준비과정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중생 교화를 위해서 견성하고 성불하고 열반하고 해탈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살의 수행이 부처님과 꼭 같다하더라도 수행하는 본래의 목적이 중생 교화라면 중생을 교화하는 사람들 중에 가장 이상적인 소임자의 이름은 보살이기 때문에 부처님이라고 하지 않고 보살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것이 보현보살의 답이다.
如來諸力에 皆悉已入일새 則名十力이요 雖成十力이나 行普賢行하야 而無休息일새 說名菩薩이며
“여래의 모든 힘에 다 이미 들어갔으면 곧 ‘열 가지 힘[十力]’이라 하고, 비록 열 가지 힘을 성취하였으나 보현의 행을 닦아서 쉬지 않으므로 보살이라 이름하느니라.”
▶강설 ; 또 부처님을 달리 ‘열 가지 힘’이라고 부른다. 보살이 비록 이 열 가지 힘을 갖추었더라도 보현의 행을 닦아서 쉬지 않으므로 보살이라 하고 부처님이니 열 가지 힘이니 하지 않는다. 보살은 이미 부처님의 경지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화엄 대승보살불교에서는 부처님이 궁극의 경지가 아니고 보살이다. 부처님은 대승보살이 되기 위한 중간 과정이다.
知一切法하야 而能演說일새 名一切智요 雖能演說一切諸法이나 於一一法에 善巧思惟하야 未嘗止息일새 說名菩薩이며
“일체 법을 알고 능히 연설하면 ‘일체 지혜’라 이름하고, 비록 일체 모든 법을 능히 연설하면서도 낱낱 법에 잘 사유하여 아직 쉬지 않으므로 보살이라 이름하느니라.”
▶강설 ; 또 부처님을 달리 ‘일체 지혜’라고 부른다. 보살이 비록 일체 지혜를 갖추어 모든 법을 능히 연설하면서도 낱낱 법에 잘 사유하여 아직 쉬지 않으므로 보살이라 이름한다. 보살은 중생들을 교화하고 제도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부처님도 중생들을 교화할 때는 그 소임이 보살이기 때문이다. 대승보살불교는 이것이 본래의 참 모습이다.
知一切法이 無有二相일새 是則說名悟一切法이요 於二不二一切諸法差別之道에 善巧觀察하야 展轉增勝하야 無有休息일새 說名菩薩이며
“일체 법의 두 모양이 없음을 알므로 이것이 곧 ‘일체 법을 깨달았다’ 이름하고, 둘이며 둘이 아닌 일체 모든 법의 차별한 길을 교묘하게 관찰하고 점점 더 수승하게 하여 쉬지 않으므로 보살이라 이름하느니라.”
▶강설 ; 법성은 원융해서 두 가지 모양이 없다. 현상은 천차만별로 차별하지만 그 본성은 차별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이치를 잘 관찰하여 더욱 수승하여지고 또한 쉬지도 않으므로 보살이라 한다. 이미 그와 같은 부처님의 경지에 이르렀으나 그 경지에 멈춰있지 않고 쉬지 않고 정진하는 것이 보살의 이상적인 모습이다. 만약 어느 경지에 올랐다고 해서 쉬는 이는 보살이 아니다.
已能明見普眼境界일새 說名普眼이요 雖能證得普眼境界나 念念增長하야 未曾休息일새 說名菩薩이며
“이미 능히 넓은 눈의 경계를 밝게 봄으로 ‘넓은 눈’이라 이름하고 비록 능히 넓은 눈의 경계를 증득하였으나 잠깐잠깐마다 증장하여 쉬지 않으므로 보살이라 이름하느니라.”
▶강설 ; 넓은 눈의 경계를 밝게 봄으로 ‘넓은 눈’이라 하는 것도 또한 부처님의 경지이다. 이미 이와 같은 부처님의 경지에 이르렀으나 더욱 더 증장하여 쉬지 않으므로 보살이라 한다.
於一切法에 悉能明照하야 離諸闇障일새 名無礙見이요 常勤憶念無礙見者일새 說名菩薩이며
“일체 법을 다 잘 비추어 모든 어둠을 떠났으므로 ‘걸림 없이 보는 이’라 하고, 걸림 없이 보는 이를 항상 부지런히 생각하므로 보살이라 이름하느니라.”
▶강설 ; 부처님은 일체 법에 대해서 걸림 없이 본다. 만약 일체 법에 걸림이 있으면 부처님이라 할 수 없다. 이와 같은 경지에 이르렀으므로 부처님을 또한 ‘걸림 없이 보는 이’라고 하지만 그것에 멈추지 않고 항상 부지런히 걸림 없이 보는 부처님을 생각하므로 보살이라 한다.
已得諸佛智慧之眼일새 是則說名覺一切法이요 觀諸如來正覺智眼하야 而不放逸일새 說名菩薩이며
“모든 부처님의 지혜의 눈을 얻었으므로 곧 ‘일체 법을 깨달았다.’고 이름하고, 모든 여래의 바른 깨달음의 지혜의 눈을 관찰하여 방일하지 않으므로 보살이라 이름하느니라.”
▶강설 ; 일체 법을 깨달았으나 모든 여래의 바른 깨달음의 지혜의 눈을 관찰하여 방일하지 않으므로 보살이라 한다. 보살은 이와 같이 쉬지 않고 깨달음의 지혜를 관찰하는 것이다.
住佛所住하야 與佛無二일새 說名與佛無二住者요 爲佛攝受하야 修諸智慧일새 說名菩薩이며
“부처님의 머무는 데 머물러 부처님으로 더불어 둘이 아니므로 ‘부처님과 둘이 없이 머문 이’라 이름하고, 부처님의 거두어 주심을 받아 모든 지혜를 닦으므로 보살이라 이름하느니라.”
▶강설 ; 만약 보살이 부처님이 머무는 경지에 머무르면 그대로 부처님과 다르지 않고 둘이 아니다. 그러면서 계속하여 부처님의 섭수함을 받고 모든 지혜를 닦으면 그것이 바람직한 보살행이다. 그래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인 보살이라 한다.
常觀一切世間實際일새 是則說名住實際者요 雖常觀察諸法實際나 而不證入하고 亦不捨離일새 說名菩薩이며
“일체 세간의 실제를 항상 관찰하므로 곧 ‘실제에 머문 이’라 이름하고, 비록 모든 법의 실제를 항상 관찰하면서도 증득하지 않고 또한 버리지도 않으므로 보살이라 이름하느니라.”
▶강설 ; 부처님을 또한 실제에 머문 이라 한다. 보살은 비록 모든 법의 실제를 항상 관찰하면서도 그 실제를 증득하지 않고, 또한 버리지도 않으므로 진정한 보살이다.
不來不去하고 無同無異하야 此等分別을 悉皆永息일새 是則說名休息願者요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으며,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아서 이러한 분별이 아주 쉬었으므로 ‘원을 쉬어버린 이’라 이름하느니라.”
▶강설 ; 여기에서 ‘원을 쉬어버린 이[休息願者]’라는 것은 공(空)과 무상(無相)과 무작(無作)과 무원(無願)의 뜻이다. 즉 욕구와 목적과 욕망을 갖지 않는 것을 말한다. 아래에 나오는 보현의 원과는 다르다. 그래서 원을 쉬어버린 이라고 하였다.
廣大修習하야 圓滿不退일새 則名未息普賢願者며 了知法界의 無有邊際와 一切諸法의 一相無相일새 是則說名究竟法界에 捨菩薩道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