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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50편 3절-14절: 우리 하나님이 임하사 잠잠치 아니하시니 그 앞에는 불이 삼키고 그 사방에는 광풍이 불리로다 하나님이 그 백성을 판단하시려고 윗 하늘과 아래 땅에 반포하여 이르시되 나의 성도를 내 앞에 모으라 곧 제사로 나와 언약한 자니라 하시도다 하늘이 그 공의를 선포하리니 하나님 그는 심판장이심이로다(셀라) 내 백성아 들을찌어다 내가 말하리라 이스라엘아 내가 네게 증거하리라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 내가 너의 제물을 인하여는 너를 책망치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수염소를 취치 아니하리니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새들도 나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3절: ‘우리 하나님이 임하사 잠잠치 아니하시니 그 앞에는 불이 삼키고 그 사방에는 광풍이 불리로다.’ ‘우리 하나님이 임하사 잠잠치 아니하시니.’ 하나님께서는 모른 채 한다거나, 방치해 둔다거나, 그냥 그대로 보고만 계시지 않는다는 거다.
‘그 앞에는 불이 삼키고.’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상태를 징벌로 징계로 표현하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불의 성질은 뜨겁고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것이니까 고통이요 진노요 심판을 말하는 거다. 즉 불에 타질 것에 소원 목적을 하고 그것을 잔뜩 쌓아놓고 살면 불에 타지는구나. 성경은 믿는 자기에게 주시는 말씀이니 이 말씀 역시 안 믿는 사람에게만 하는 말씀으로 생각을 하지 말고 예수님을 믿어도 세상 것에 대한 소원성으로 들어가 있으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불 맛을 보게 된다는 거다.
‘그 사방에는 광풍이 불리로다.’ 광풍의 성질은 몰아가고 날려버린다. 이것을 사건으로 보면 전쟁의 바람이 아닐까 생각이 된다. 이방군대들이 광풍같이 몰려온다는 거다. 우리 영적 이스라엘은, 즉 예수님을 믿는 기독자들은 이방인들의 세계, 안 믿는 세계는 말할 필요가 없다. 예수를 안 믿는다면 세상에서 아무리 부자라고 할지라도 지옥에 가는 거다. 그러니 안 믿는 세계는 말할 필요가 없는 거고, 예수를 믿으면서도 안 믿는 사람들의 마음을 품고 교회에 다니는 내가 문제라 그 말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 비물질적인 바람이, 즉 세상 소원성을 가르치는 바람이 불고 있다. 교훈적으로 기도적으로 소원성으로 세상바람이 불고 있으니, 이런 기운으로 떠들고 있으니, 이런 걸 성령의 불이라고 하고 있으니 이렇게 되면 교인들의 신앙 믿음의 정신이 죽느냐, 살아나느냐? 죽는다.
성도는 진리신앙을 가지고 진리이치의 사람으로 만들어지고, 성장이 되고, 그 실력으로 올라가야 하는 건데, 이렇게 되는 것은 순전한 진리이치,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밖에 없다. 그럼에도 교회에 세상 것을 끌고 들어와서 하나님의 말씀과 비빔밥을 해 놓으면 이런 말을 듣는 교인들은 구별 분별력이 없게 된다. 따라서 목사님들의 메시지는 천국 것과 세상 것이 딱딱 나눠져야 한다. 정신적 사상적으로 딱딱 갈라져야 한다.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 마음을 품는 것은 세상이로구나’ 하고 딱 쪼갤 수 있게 해야 한다.
진리이치의 말씀을 들을 때 귀가 있는 사람은 자기가 사심 없이 양심적으로 듣는다면 웬만하면 ‘이게 세상이구나. 이게 하나님의 뜻이로구나’ 이런 정도는 알 수 있다. 그러나 평소에 세상 쪽으로 워낙 많이 듣던 사람은 진리이치의 말씀이 이상하게 들리는 거다. 이단소리로 들리는 거다.
늘 세상적인 말씀을 듣던 사람은 진리이치의 말씀이 자기가 늘 먹던 세상 밥하고는 다르기 때문에 자기 입맛에 안 맞는 거다. 그러나 늘 진리의 밥을 먹던 사람은 그 정신, 마음, 소원, 목적이 사람의 인격과 성품 쪽으로 가 있기 때문에 사람을 깨닫게 하고 인격과 성품이 하나님을 닮게 하는 말씀이 아니면 ‘이건 내가 먹을 음식이 아니로구나. 내가 먹을 정신이 아니로구나. 내가 가르침을 받아서는 안 되겠구나. 사람이 못 쓰게 되겠구나’ 라고 하게 된다. 분별이 되니까 ‘이 말씀을 들으면 사람이 어떻게 되겠구나’ 하는 것이 알아지는 거다.
그런데 진리말씀을 듣는 사람에게 있을 수 있는 문제는 진리말씀을 워낙 많이 듣다보면 지식으로는 환한데 자기를 쳐다보는 눈이 부족해서 진리말씀을 들을 때마다 자기를 비판하고 자기를 분해하고 자기에 대해 적용을 해야 되겠는데 자기는 완전자가 된 것처럼 남만 비판할 수 있다. 이건 안 된다.
옳은 지식을 가지고 남만 비판하는 자도 얻어맞아야 하고, 옳은 말씀을 안 들으려고 하는 자도 얻어맞아야 한다. 그러니 똑같이 취급을 당하는 거다. 문제는 자기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데 있는 거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아멘’ 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좋은 것을 자기 자체화 인격화 시키지 않는다면 날카로운 송곳을 주머니에 넣고 있는 것과 같아서 고통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이 세상만사를 보면 인간세계의 고통은 남이 만든 게 아니다. 다 자기가 만든 거다. 그런데 대부분 보면 자기의 고통의 원인을 남에게 돌리며 남을 원망하고 있다. 그러니 이게 얼마나 큰 고통이냐? 이건 지옥의 마음이다.
교회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목사님이다. 교회 안에 세상정신이 들어왔으면 목사님이 이걸 빨리 알아차리고 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이 세상정신을 몰아내고 하나님의 말씀성을 집어넣어야 교인들이 신령한 하늘의 만나를 먹게 된다. 그리고 각 교인들은 자기가 교회에 다니면서 어떤 가르침의 바람을 타고 있는 건지 심사를 하고 미리 미리 신앙실력을 준비해야 한다. 무슨 말이냐? 말씀의 정신으로 튼튼하게 무장을 해서 세상바람에 휘말리지 않아야 한다는 거다.
교회 안에도 유행바람이 많다.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성경을 안 읽고 옳은 진리이치를 듣지 않으면 이걸 모른다. 그리고 교회라고 해서 다 똑같은 게 아니다. 학교라고 해서 다 똑같으냐? 학교마다 다 다르다. 그리고 한 학교 안에서도 선생님들의 실력이 다 똑같은가? 성격이 더러운 선생도 있다. 어떻게 보면 애들을 가르치는 선생의 성격이 아이들보다 못한 선생도 있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교회는 세상에 있기 때문에 100% 완전한 것이 아니다. 교회에는 별의 별 사람이 다 들어오고, 목사도 별의 별 목사가 다 있다. 목사님이라면 일반적 도덕성은 올라서야 하는데 일반사람들도 이해가 안 되는 목사도 있다. 구약시대나, 마지막 시대나, 지금이나 똑같다. 교회 안에서 이런 일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성경을 본다면 어찌 저럴 수가 있을까?’ 할 정도의 목사도 많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참 진리로 된 옳은 성도와, 비진리의 교인을 구별하고 악인들을 심판하시는 일에 언제든지 무엇이든지 다 붙잡고 쓰신다. 이 사람에게는 이런 것을 붙잡고 와서 진노의 몽둥이로 쳐버리고, 저 사람에게는 다른 것을 가지고 와서 다른 각도로 두들겨 패기도 하신다. 안 붙잡고 쓰시는 게 없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능력자시다. 능력자이신 이 분이 나에게 좋은 이적 기사를 일으키는 것만이 아니라 교만한 자를 깨닫게 하고 바로 세우기 위해 나에게 고통이 되는 이적 기사를 일으키기도 하신다. 인간은 이 분의 생각을 따라가지 못한다. 그러니까 우리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자체화 시키는 것밖에 없다. 다른 도리가 없다.
4절-5절: ‘하나님이 그 백성을 판단하시려고 윗 하늘과 아래 땅에 반포하여 이르시되 나의 성도를 내 앞에 모으라. 곧 제사로 나와 언약한 자니라 하시도다.’ 쉽게 생각하면 ‘윗 하늘’이란 천군천사들, 그러니까 영물들, 또 시온사상을 가진 성도들이라고 볼 수 있는데, 천군천사들도 신령적인 존재요, 시온사상을 가진 성도들도 하늘의 신령적인 신앙을 가진 자들이라는 면에서, 즉 질이 같다는 면에서 이렇게 볼 수 있다.
‘아래 땅’은 인간세상이요, 각 나라들과 자연 만물들을 말함인데, 땅의 소원 목적을 가진 것과 땅에 뿌리를 박아놓고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 ‘반포’란 성도들을 불러들이라는 명령을 말한다. 그러니까 세상 안에서 훈련과 연단을 받고 있는 성도들과, 힘이 약해서 어쩔 수 없이 기독교 안의 비진리 단체 속에 붙어있는 성도들을 다 불러들이라는 명령이다. 즉 성도를 하나님 앞으로 불러들이는데 있어서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을 다 등용시킨다는 말이다.
예수 믿는 사람은 성도를 불러들인다는 이 말씀을 자기를 빼놓고 생각하면 안 된다. 성도 자기 하나를 위해서 그와 같은 역사를 하시는 거라 그 말이다. 성도 자기 하나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을 전부 등용을 시킨다는 이게 믿어지느냐? 지금 밖에 비가 오는데 누구를 위해 비가 오는 거냐? 나만 쏙 빼놓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오는 거냐? 나는 쏙 빼놓고 우산장수를 위해서 오는 거냐?
모든 성경구절 속에 자기가 안 들어가는 것이 없다. 하나님께서 성도 자기를 염두에 두고 말씀하시는 것을 강하게 느껴라 그 말이다. 이 공간 가운데 공기가 흐르고 있는데 누구를 위해서 흐르고 있는 거냐? 나를 위해서 흐르고 있는 거다. 왜 나를 위해 흐르고 있는 거냐? 숨을 쉬라는 거다. 그럼에도 숨 쉬기 싫거든 쉬지 말아라. 하나님께서 숨을 안 쉬게 만들어 버리면, 공기를 싹 거둬 가시면 끝나는 거다. 공기가 있는 것을 보니 숨을 쉬라는 거다. 그러면 네가 산다.
성도가 만물보다 귀하냐? 자기가 만물보다 귀하냐 그 말이다. 확실히 귀하냐? 세상 사람들이 우리 궁극교회 교인을 ‘밉게 생겼다느니 눈이 찢어졌다느니’ 할지라도 성도 자기는 만물보다 귀하냐? 확실히 그러냐? 미스코리아보다 귀하냐? 귀한 그 가치를 어떻게 말로 다 할 수 있겠느냐? 어떻게 돈으로 따질 수 있겠느냐? 우리는 긍지를 가져야 한다. 내가 못생겼어도 ‘하나님의 솜씨가 이렇다’ 하고 확 드러낼 수 있겠느냐, 아니면 ‘나는 왜 이렇게 생겼나?’ 하면서 코도 깎고 눈도 찢고 하고 싶으냐?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은 얼굴이 어떻게 생겼든 사람을 절대로 그 위주로 보지 말아라. 그 위주로 선택을 해서 시집장가를 가면 너는 죽을 때까지 눈물을 흘리게 된다. 우리 동네에 부부가 인류대학을 나왔는데, 여자가 시집온 그 날부터 지금까지 눈물 속에서 살고 있다. 남편은 마마보이라서 자기 엄마가 돌아가시니까 일도 안 하고 맨 소주만 마시고 있고, 자기 엄마가 쓰던 장롱도 버리지 못하게 하고. 그러니 그 집이 어떻게 되겠느냐?
‘이르시되 나의 성도를 내 앞에 모으라. 곧 제사로 나와 언약한 자니라 하시도다.’ 성도는 제사로써 여호와 하나님과 언약된 자들이다. 제사는 예배의 행위다. 구약시대 때는 하나님 앞에 아무 흠과 티가 없는 3년 된 어린양을 잡아서 찍어서 쪼갬으로써 언약이 이뤄진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중보사역인 구속을 계시하는 거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은 성도는 특별한 자들이다. 궁극교인 자기에게는 다른 교인들보다 ‘특’이 붙어있다. 우리 성도는 세상에서 특별한 자들이다.
제사의 언약 속에는 죄 사함의 뜻이 들어있다. 또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의 사람으로 성장되고 이뤄지는 약속이 들어있다. 지금의 예배도 일종의 제사다. 그래서 이 예배 속에는 죄 사함도 들어있고 성장성도 들어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된 백성들을 판단하신다. 성도는 성도대로 구별이 되고, 악인은 악인대로 추려진다. 성도들 틈에 섞여있는 악인들, 또 악인들 틈에 섞여 있는 성도들을 다 분리할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 기독자들은 자기가 어느 신앙노선으로 가고 있는지 면밀히 심사를 하고 분석을 해서 하나님의 본질적인 진리신앙 노선으로 걸어가야 한다. 이렇게 걸어가다 보면 하나님의 의사에 맞는 단일성적인 사람으로 만들어진다. 심판의 날이 오면 자기가 만들어진 대로의 심판 앞에 변명이 있을 수가 없는 거다.
성경은 한 마디로 우리로 당신처럼 만들어지라는 말씀인데 말귀를 못 알아듣는 교인들은 ‘하라. 하지 마라’ 라고 하는 성경구절대로 하는 것에만 신경을 써서 눈에 보이는 일은 잔뜩 해 놓지만 하나님의 성품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없다. 사람이 만들어지지는 않은 채 눈에 보이는 일을 아무리 잔뜩 해 놔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하늘에는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이 많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화려하게 예배당을 지어놨다고 해도 다 불에 타지는 거고, 하늘의 것과 비교를 하면 비교가 안 된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억만금을 들여서 예배당을 지어놔도 천국의 문처럼 진주 문이 있느냐?
6절: ‘하늘이 그 공의를 선포하리니 하나님 그는 심판장이심이로다(셀라).’ 하나님의 공의는 절대정확 완전무결이다. 죽음 넘어 신령세계에까지 영원히 절대정확하고 완전무결이다. 하나님 외에는 절대정확한 분은 없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창세 이후 마지막까지 신앙이라고 하는 도덕적 수준과, 양심과 정신과 사상과 소원과 목적과 취미를 총 망라해서 판단하고 평가하고 심판하여 정죄를 할 수 있는 분이다.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는 성격적으로나 성질적으로 성분적으로나 숨길 수가 없고, 이질적이며 비진리적인 요소를 숨길 수가 없다. 사망적인 것을 생명적인 것처럼 숨길 수가 없는 거다. 죽은 자와 산 자를 언제 아느냐? 군대에서 다 취침을 시켜놓고 죽은 자를 거기에 갖다놓으면 그 옆에서 자는 사람들이 송장을 보고 ‘자는구나’ 라고 한다. 그러나 ‘연병장에 집합’ 하는 명령이 떨어지면 산 사람은 다 일어나지만 송장은 그대로 드러누워 있다.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은 다 산 자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산 자는 마음 속에서 정신이 일어난다. 깨달음으로 일어나고 지혜지식으로 일어난다. 선악과를 따먹은 일반지식이 진리지식인 것처럼 숨길 수가 없고, 외모 모양 덩어리 큰 것이 아무리 진짜라고 큰 소리를 쳐도 속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눈을 속일 수 없다. 하나님의 공의는 인정정실을 따라 봐주지 않고 그대로 심판하신다.
우리가 성경 하나님의 말씀을 볼 때 예수님의 활동은 세상에서 말하고 주장하는 그런 도덕성이 아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도덕성이 우리 주님의 생각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수님의 활동이 일반 도덕성처럼 보여도 우리의 구원을 위해 성령의 활동으로 된 거다. 하나님의 활동이요 성령의 활동이다. 예수님의 도덕성은 우리로 영원 궁극적 신령세계 천국까지 효력성을 가지는 신령한 하나님의 도덕성이다.
기독교의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공의에 맞춰서 하는 거다. 따라서 목사님의 설교는 하나님의 공의로, 순전히 하늘의 것으로 나가야 한다. 세상 것과 하늘의 것, 임시 것과 영원한 것, 생명적인 것과 사망적인 것이 나눠져야 한다. 성격적으로도 나눠지고, 성질적으로도 나눠지고, 성분적으로도 나눠져야 한다. 이런 말씀을 늘 들을 때 생활에서 이치적으로 가치판단 평가적으로 믿음이 들어가는 거다. 이게 아닌 일반 도덕성, 세상기준에 맞춰서 성경을 보고 가르친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역행하는 신앙이 돼버린다. 그 결과는 심판이다.
7절: ‘내 백성아, 들을찌어다. 내가 말하리라. 이스라엘아, 내가 네게 증거하리라.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것이고, 세상백성이라면 세상의 말을 들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는 누구의 백성이기에 누구의 말을 듣기를 좋아하느냐?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할지라도 자기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보다 인간의 말을 더 소중히 여긴 적은 없는가? 예를 들어서 주일 날 집에 손님이 왔다고 예배에 빠진 일은 없는가? 주일날은 하나님의 날이다. 하나님의 것을 받는 날이다. 어떤 이유로 빠졌더라도 빠졌으면 그만큼 하나님의 은혜는 없는 거다. 그 날은 생명의 말씀을 굶은 거다. 아파서 굶었든지 세상 쪽으로 따라가느라고, 세상소원 목적을 들어주느라고 굶었든지 그 심판은 그대로 들어가는 거다.
주일날 한 번 두 번 까먹어 봐라. 그 다음은 슬슬 목사님과 교인들의 눈치를 보게 되고, 이렇게 되니 처음에는 맨 앞 줄에 앉다가, 다음에는 중간쯤 앉다가, 나중에는 맨 끝에 앉는다. 아무렴 주일날 한 번 두 번 까먹다 보면 얼굴이 부끄러워서 맨 앞에 앉을 수 있나? 그러다 보면 자기 스스로 왕따가 돼서 교회에 정이 안 드는 거다. 이렇게 되면 ‘교회가 사랑이 없고, 뭐가 어떻고’ 이런 말을 하다가 어느 날인가 인사도 없이 다른 교회로 휙 가버린다. 우리교회가 사랑이 없느냐? 그렇다면 사랑이 많은 네가 앞장서서 사랑을 많이 행하라.
자기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건 그 결과가 자기에게 그대로 들어간다. 지금 당장 발등에 불이 안 붙어놓으니까 그냥 덤덤하겠지만 아니다. 신앙 면에 있어서는 그대로 들어간다. 사상적으로 그대로 들어간다. 그리고 자기의 그 신앙이 다른 사람에게 거울처럼 그대로 비춰지는 거다. 이것에 대한 인격 면의 수치를 알아라.
내가 아무리 믿음이 없을지라도 예배에 꼬박꼬박 참석해서 말씀을 듣다보면 아무렴 아는 사람도 많아지고 인사도 많아진다. 이렇게 하다가 피치 못한 사정으로 교회에 한 번 안 나오면 다른 교인들이 ‘어? 늘 나오던 사람이 왜 안 나오지?’ 하게 된다. 교인들이 이런 생각을 하는 자체가 자기에게 사랑이 가고 있다는 증거다. 이런 느낌들을 우습게 여기면 안 된다. 사람이라면 다 이런 마음이 들어있다. 이걸 무시하지 말아라.
사단 마귀는 거짓 종들을 붙잡고 교인들에게 세상과 세상의 것이 좋다고 자랑삼아 증거를 한다. 그러나 이런 증거는 하나님의 증거가 아니다. 이런 증거는 이방인들이 듣기 좋아하는 소리다. 이방인들은 세상을 좋아하기 때문에 세상의 증거를 듣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니 누구의 증거를 듣느냐? 하나님의 증거를, 주님의 증거를 듣는다. 이 주님의 증거는 나에 대한 실상적인 증거이니 이 증거를 듣는 거다.
8절: ‘내가 너의 제물을 인하여는 너를 책망치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 제물을 인하여는 책망치 않는다고 했다. 왜냐? 너의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면 이게 무슨 말이냐? 제물을 꼬박꼬박 잘 냈다는 말인가, 아니면 제물을 많이 내서 많이 쌓여있다는 말인가?
9절-13절: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수염소를 취치 아니하리니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새들도 나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하나님께서는 제물에 욕심을 내는 분이 아니다. 왜냐하면 산과 들판에 뛰노는 모든 짐승이 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8절에 ‘너의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다’는 게 무슨 뜻이냐? 날마다 번제를 드려서 좋다는 말씀인가, 번제가 날마다 하나님 앞에 놓여져 있다는 말씀인가? 만일 번제의 제물이 항상 하나님 앞에 놓여져 있다면 매번 번거롭게 짐승을 잡지 않아도 날마다 번제를 드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것처럼 ‘너의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다’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제물이 항상 놓여져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예배의 제사를 드릴 수 있는 거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양이나 염소를 가지고 올 필요가 없다. 계시적으로 이렇게 되는 거다. 지금 하나님 앞에 항상 예수라는 제물이 없다면 우리는 구약시대처럼 맨날 양이나 염소를 하나님 앞에 가지고 가야 한다.
14절: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할 것이 너무 많다. 한두 가지로 될 게 아니다.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 감사할 게 많다. 자기가 인간으로 존재되어 있는 것도 감사다. 구속에 감사, 나의 이룰구원을 위해 사건 환경을 동원시킴에 감사, 말씀 깨달음에 감사. 이런 걸 어떻게 말로 다 감사를 할 수 있겠느냐?
이에 앞서서 첫째는 나를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냐? 만일 자기를 송충이나 파리나 지렁이로 만들었다면 벌써 새들에게 먹혔을 것이고, 파리채에 맞아 죽었을 거고, 지렁이로 지음 받았다면 개미떼에게 물려 죽었을 거다. 그렇게 죽어도 누가 나를 위해 울어주지도 않는다. 이걸 생각해 봐라. 나를 소로 만들었다면 벌써 도살장에서 이리 저리 잘려나갔을 거다.
두 번째는 나를 하나님을 닮을 수 있는 자로 지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이냐? 같은 사람인데도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 이 좋은 것을 사람들이 왜 모를까? 아는 것도 신기하지만 모르는 것도 참 신기하다. 예수님이 믿어지는 것도 신기하고, 교회에 가고 싶다고 하면서도 안 믿어지는 것도 신기하다. 이게 무슨 작용일까? 뇌 속에 믿게 해 주는 핏줄이 하나 안 통해서 안 믿어지는 건가? 이런 면을 생각해 봐라. 믿는다는 이게 얼마나 감사하냐? 교회에 나오는 것도 오기 싫은데 억지로 나오는 교인이 있는가 하면, 빨리 오고 싶어서 남 먼저 와서 기다리는 사람도 있는데 이것도 참 신기하다. 마음의 그 작용성이 참으로 신기하다.
세 번째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지만 장차 신령천국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그 천국을 누릴 수 있다는 이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세상에 살면서 남편에게 얻어맞고 자식들도 잘못되고 하면 어머니가 미쳐버리는 일이 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어머니는 그런 일을 당해도 하나님 앞에 나와서 펑펑 울고 나면 시원하다. 이게 어디냐? 이것도 감사한 거다. 생각할수록 신비롭고 얼마나 감사한 건지?
꼭 무슨 육신적인 조건이 잘 돼야 만이 감사가 나오는 것은 너무 저질이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아는 사람은 어떤 형편에서든지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기 마련이다. 부모의 은혜를 아는 사람은 부모로부터 물질적으로 무슨 큰 것을 받지 않더라도 자기를 낳아주셨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늘 감사한 거다. 우리 주일학생들은 부모에게 감사한 마음이 늘 있어야 한다. 이게 없으면 안 된다. 스승의 은혜를 아는 사람은 스승에게 늘 고마운 마음이 든다. 은혜를 받았으면 고마운 마음이 들기 마련이다.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제사는 인간을 보고 드리는 게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제사를 하면서 그 보상으로 세상의 것을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받은 것에 대한 감사한 마음으로 드리는 거다. 감사한 마음이 없는 제사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