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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의 혼인 잔치가 이르렀고(41)
말씀: 계 19:1-9. 2025년 3월 2일 일요일 오전11시
오늘 말씀은 성경의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이 땅에서 큰 바빌론의 멸망에 대한 환상을 보고 천사를 통해 그 설명을 들었습니다. 큰 환란 때 큰 바빌론의 멸망은 먼저 종교적, 영적 도시로서의 바빌론이 땅의 열 왕들에게 멸망합니다. 짐승 위에 탄 여자가 짐승의 머리에 난 열 뿔에게 멸망당한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역사적으로 바빌론 종교 체계를 그대로 계승한 로마 캐톨릭은 중세 1,000년 동안 유럽의 왕들을 지배했습니다. 교황은 왕들보다 압도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었고 왕들은 교황을 알현할 때 무릎을 꿇고 그 발에 입을 맞추어야 했습니다. 교황은 때로 왕들을 임명하기도 하고 파면하기도 했습니다. 종교 권력이 정치권력을 압도한 것입니다.
로마가 캐톨릭을 국교로 삼은 후 로마 황제는 교회의 머리로 자신을 임명했습니다. 교황은 땅의 왕들 위에 군림했던 역사에 비추어 볼 때 큰 환란 때 짐승 위에 탄 여자(바빌론)는 이보다 더 큰 권세와 권능을 가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이 큰 도시 바빌론을 땅의 왕들 위에 군림하는 도시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종교적이고 정치적이며 상업적인 도시로서 큰 바빌론은 하나님께서 직접 심판하시는데 한 시간 만에 불타고 맷돌이 바다 속에 던져져 보이지 않듯이 땅 속으로 묻혀 버립니다. 바빌론의 멸망은 자연 현상이 아니라 대언자들을 통해 이미 말씀하신 심판의 결과입니다. 땅에서 큰 바빌론이 무너지고 멸망한 것을 본 후에 요한은 하늘에 있는 일들을 보고 듣습니다.
계19:1-6절에는 하늘에서 기쁨이 네 번에 걸쳐 선포 되있습니다.
큰 바빌론이 멸망할 때 땅에서 슬피 울며 애곡하는 왕들, 상인들, 뱃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와 반대로 하늘에서는 큰 바빌론의 멸망을 기뻐하며 주님을 찬양하는 무리들이 나옵니다. 하늘에서 할렐루야가 4번이나 울려 퍼집니다(1,3,4,6). 2번은 바빌론의 멸망과 같은 주의 심판에 대한 기쁨의 찬양이고 2번은 다가올 사건 즉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대한 찬양입니다.
하늘에서 있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는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가장 놀라운 장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랑입니다. 교회는 그분의 몸이요 신부입니다. 우리는 현재 정혼한 처녀입니다(고후11:2). 우리는 계시록에서는 “신부”란 말씀을 세 번(21:2,9, 22:17)볼 수 있습니다.
저 하늘에 있는 교회는 “점이나 주름이나 그런 것이 없는 영광스러운 교회”요 “거룩하고 흠이 없는 교회”입니다(엡5:27). 침례요한은 “예수님께서 신부를 얻는 신랑이요 자신은 신랑의 친구”라고 말합니다(요3:29). 구약 성도들은 신랑의 친구들에 해당합니다. 신약 성도들은 그분의 몸인 교회이며 신부에 해당합니다. 큰 환란 때 성도들은 신부의 친구들에 해당합니다. 이들은 처녀들,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은 손님들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구분은 성경을 통해서 명백하게 볼 수 있습니다. 구약의 성도들과 신약의 성도들과 환란 성도들에 대해서 영적인 구분이 안 되면 성경을 이해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신랑을 맞으러 가는 열 명의 처녀들(마25)은 신부가 아니라 신부의 친구들로서 들러리들입니다. 이 처녀들은 한 신부가아니라 복수로 여럿이며 결혼할 대상자로 신랑을 맞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결혼식에서 돌아오는 신랑을 맞으러 가는 자들입니다(하늘의 왕국). 혼인 예식은 신부가 신랑을 맞으러 가지 않고 신랑이 신부를 맞으러 갑니다. 예수님의 예표인 이삭은 신랑으로서 광야로 나아가 리브가를 맞습니다(창24:65).
어린양은 하늘의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살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을 신부라고 표현합니다(계21:2,9,10). 땅의 큰 도시 바빌론이 창녀요 음녀였다면 하늘의 예루살렘은 거룩한 도시요 어린양의 아내입니다.
우리는 지금 중동 땅에 있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에 대한 주의 말씀을 보는 것입니다.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로운 자니 곧 우리 모두의 어머니(갈4:26)라고 했습니다.
하늘의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도시, 곧 하늘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입니다(계3:12,21:2). 성경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시 곧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히12:22)에 우리가 이르게 된다고 말합니다. [나 요한이 보니 거룩한 도시 새 예루살렘이 신부가 자기 남편을 위해 단장한 것 같이 예비하고 하늘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더라.](계21:2).
“거룩한 도시 새 예루살렘”이라고 말합니다. 이곳은 전능자 하나님과 어린양께서 친히 거하시고 그 도시의 성전이기 때문에 거룩한 도시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거하게 될 도시가 바로 이곳 예루살렘입니다. 우리는 어린양의 아내라 불리는 거룩한 도시 새 예루살렘을 보는데(계21:9,10) 성경은 왜 거룩한 예루살렘을 일컬어 신부라고 부릅니까? 사도 바울은 ‘우리 모두의 어머니’라 했고 사도 요한은 ‘어린양의 아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 본문 말씀을 보겠습니다.
1절입니다. [이 일들 뒤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많은 사람들의 큰 음성이 이르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존귀와 권능이 [주]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계19:1).
“이 이들 뒤에 내가 들으니...”(1)란 말씀은 18장의 사건 즉 큰 바빌론의 멸망 후를 말합니다. 요한에게 주시는 주님의 계시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늘에 많은 사람들의 큰 음성이 이르되...”(1). 하늘에 많은 사람들의 큰 음성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이단 종파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하늘에는 144,000명만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는 큰 환란에서 나온 “아무도 셀 수 없는 큰 무리”(계7:9)의 사람들도 있습니다. 인류의 전 역사를 통해 볼 때 하늘에 있게 될 구원 받은 사람들은 결코 적은 수가 아닙니다.
큰 환란 때 하늘에 있는 사람들과 땅에 있는 사람들의 차이를 생각해 보십시오. 땅에 있는 사람들은 큰 환란의 재앙, 진노의 심판을 다 받아야 합니다. 하늘에 있는 사람들은 영광스런 몸을 입고 안식합니다. 그들은 주님과 함께 있습니다.
땅에 있는 사람들은 땅에 속한 몸 안에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사람들은 하늘에 속한 몸, 영광스런 몸, 영에 속한 몸을 입습니다. 주님은 부활을 부정하는 사두개인들에게 하늘에서는 천사들과 같은 몸을 입는다고 하셨습니다. 크리스천들은 그리스도와 같은 형상, 같은 몸을 입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위에 있는 것들에 애정을 두고 땅에 있는 것들에 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자, 그럼 한 가지 묻겠습니다. 하늘에는 누가 있습니까? 하늘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하늘에 누가 있고 무엇이 있는지 모른다면 결코 하늘에 있는 것들을 소망하고 애정을 두지 못할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 땅에 있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들이 죽었다, 잠들었다, 세상을 떠났다, 돌아갔다고 말합니다. 죽었다, 잠들었다는 것은 몸에 관한 것입니다. 떠났다는 것은 혼에 관한 것입니다. 돌아갔다는 것은 몸은 흙으로 영은 하나님께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흙은 전에 있던 대로 땅으로 돌아가며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리라.](전12:7)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입술에 진리가 있고 말씀이 있습니다. 동네 이웃에 나이 많은 어른이 죽으면 사람들은 말하기를, “그 분이 돌아가셨대요.”합니다.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정확히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한 번도 보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그 입술에 주의 말씀을 말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그러나 그것이 무어라고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이 있어 네 입에 있고 네 마음에 있느니라, 하나니 그것은 곧 우리가 선포하는 믿음의 말씀이라.](롬10:8)고 합니다. 우리가 선포하는 믿음의 말씀은 사람들의 입에 있고 마음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불신자들을 통해 듣는 주의 말씀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은 정직해야 해, 신실해야 해, 죄를 짓고는 못 산다, 사람은 믿음이 있어야 한다, 세상이 점점 타락하고 미쳐가고 있다. 지금은 말세다, 등등... 이런 말들이 모두 그들의 입에 있고 그들의 마음에 있습니다. 제가 강단에서 전하는 것보다 여러분들은 T.V나 라디오에서 더 많이, 더 자주 듣는 주의 말씀들이 세상 사람들의 입에 있습니다.
특히 연말이면 온 종일 거리에서 주의 말씀이 선포됩니다. “불우한 이웃을 도웁시다. 우리 모두 이웃 사랑을 실천합시다.”이것은 정확히 주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선포하는 믿음의 말씀이 사람들의 입에 있고 마음에 있습니다. 하늘에는 부활한 구약 성도들이 있습니다. 휴거 때 들림 받은 신약 성도들이 있습니다. 큰 환란 때 들림 받은 환란 성도들이 있습니다.
요한은 하늘에 많은 사람들의 큰 음성이 있고 그들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늘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이 바로 하늘 왕국입니다(딤후4:18). 이미 여러 차례 반복해서 다루었지만 다시 한 번 정리하며 살펴보겠습니다.
※ 하늘에 있는 많은 사람들.
부활한 구약 성도들. [무덤들이 열리며 잠든 성도들의 많은 몸이 일어나 그분의 부활 뒤에 무덤 밖으로 나와서 거룩한 도시로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나타났더라.](마27:52-53). 이 사건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실 때 일어난 사건입니다. 구약 성도들의 몸이 일어났고 주님의 부활 뒤에 구약 성도들은 무덤 밖으로 나와서 많은 사람에게 보였습니다. 아브라함의 품에 있던 성도들이 부활했고 이들은 주님께서 올라가실 때 함께 이끌어 가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이르시기를, 그분께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실 때에 포로로 잡힌 자들을 포로로 이끄시고 사람들에게 선물들을 주셨도다, 하시느니라.](엡4:8). 에녹, 엘리야, 모세 뿐 아니라 아브라함과 같은 이들이 지금 저 하늘에 있습니다.
부활, 휴거된 신약 성도들.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자들은 나팔 소리와 함께 일어납니다. 땅에서 살아 있던 자들은 하늘로 채여 올라가게 됩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한 신비를 보이노니 우리가 다 잠자지 아니하고 마지막 나팔 소리가 날 때에 눈 깜짝할 사이에 순식간에 다 변화되리라.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일으켜지며 우리가 변화되리니 이는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반드시 죽지 아니함을 입을 것이기 때문이라.](고전15:51-53). 우리는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믿습니다. 우리의 몸이 지금 죽는다면 혼은 저 하늘에 주와 함께 있습니다. 부활은 혼이 아니라 몸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의 몸이 주님과 같은 영광스런 몸을 입는데 하늘에 속한 몸을 입습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음성과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뒤에 살아서 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들 속으로 채여 올라가 공중에서 [주]를 만나리라.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4:16,17). 이 말씀은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복된 소망, 영광스런 소망입니다.
환란 성도들입니다. 큰 환란에서 나온 무리들 중에 하늘에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일 뒤에 내가 보니, 보라, 아무도 셀 수 없는 큰 무리 곧 모든 민족들과 족속들과 백성들과 언어들에 속한 큰 무리가 흰 예복을 입고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든 채 왕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계7:9). 요한이 본 이들은 신약 성도들이 아닙니다. 이들은 흰 예복을 입고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왕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 있습니다. 땅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누구입니까? “큰 환란에서 나온 사람들”(계7:14)입니다.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양]께서 시온 산 위에 서 계시고 그분과 함께 십사만 사천 명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 안에는 그분의 [아버지]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더라.](계14:1). 이들은 큰 환란 때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지파에서 봉인된 자들로 144000인데 하늘로 들림을 받아 하늘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늘에는 누구 있는가? 하늘에는 하나님과 어린양이 계시고 왕좌 주변에 있는 그룹들이 있고, 무수히 많은 천사들이 있고 또한 이 땅에서 들림을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스물 네 장로들은 분명히 하늘에 있는 사람들이지 어떤 영들이나 천사들이 아닙니다. 땅에 있던 십사만 사천이나 큰 환란에서 나온 셀 수 없는 큰 무리들은 땅에서 들림을 받아 저 하늘에 있습니다. 목 베임을 당해 제단 아래 있던 혼들(계6:9)은 부활해서 저 하늘에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시 곧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과 무수한 천사들의 무리와 하늘에 기록된 처음 난 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모든 자들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완전하게 된 의인들의 영들과](히12:22-23). 우리는 하늘에 있는 것들에 대해 볼 수 있는데 영적 존재들 외에 “하늘에 기록된 처음 난 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완전하게 된 의인들의 영들”이란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계시록에서 요한이 보고 들은 사람들은 이 땅에서 저 하늘로 들림 받은 사람들입니다.
다시 1절입니다.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존귀와 권능이 주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계19:1).
19:1-6절에는 찬양에 관해 일곱 가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1절에는 하늘에서 많은 사람들이 찬양합니다. 4절에는 스물 네 장로와 네 짐승이 찬양합니다. 5절에는 왕좌에서 한 음성이 나옵니다. 6절에는 큰 무리의 음성과 많은 물들의 소리와 우렁찬 천둥의 소리 같은 음성이 나옵니다. “할렐루야”는 “너희는 주를 찬양하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저 하늘에 있는 사람들의 음성을 통해 하늘에서는 히브리어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사울에게 나타나실 때 히브리어로 말씀하셨습니다(행26:14). 흔히 천상의 언어, 천사의 언어라고 말하는 언어는 이상한 방언이 아니라 히브리어입니다.
2절입니다. [이는 그분의 심판들이 참되고 의롭기 때문이니 그분께서 음행으로 땅을 부패시킨 그 큰 음녀를 심판하셨고 자신의 종들의 피의 원수를 그녀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계19:2).
땅에 거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심판이 부당하다, 억울하다고 여길지 몰라도 하늘에 거하는 사람들은 그분의 심판들은 참되고 의롭다고 인정하며 찬양합니다. 성도들이 하늘에 올라가면 주님이 땅에 행하시는 일들에 대해 다 듣고 보고 알고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사람들은 큰 바빌론에 대해 “음행으로 땅을 부패시킨 그 큰 음녀”라고 말합니다. 큰 바빌론의 음행은 우상숭배입니다.
“자신의 종들의 피의 원수를 그녀의 손에 갚으셨도다.”(2).
이 땅에서 죽임을 당한 큰 환란 성도들은 주님께 원수를 갚아 주실 것을 구했습니다(6:10). 주님은 그들에게 피의 보복을 약속하셨습니다(히10:30, 롬12:17-21). 우리는 사적으로 누군가에게 원수를 갚지 않습니다. 우리는 대적하는 자들,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원수를 갚아 주시는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면 주님은 원수를 갚아 주십니다.
주님은 초림 때 “주의 받아 주시는 해”를 선포했습니다.
재림 때 “우리 하나님의 원수 갚으시는 날을 포고”합니다(사61:2).
“자신의 종들의 피의 원수를 그녀의 손에 갚으셨도다.”(2). 이것은 하늘에 있는 사람들의 외침이요 심판하신 주님께 대한 찬양입니다.
3절입니다. [그들이 다시 이르되, 할렐루야, 하매 그녀의 연기가 영원무궁토록 올라가더라.](계19:3).
땅에서 우리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구속하신 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늘에서 우리는 심판하시는 주님, 복수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는 땅과 하늘, 은혜의 때와 보복의 날의 차이입니다. 하늘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할렐루야”라고 하는데 이는 히브리어 발음을 따른 것입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알렐루야”라고 되어 있습니다. 발음과 표기의 차이입니다. 성경에 4번만 표기되어 있는데 현대 역본들에는 구약에서 23번 신약에 4번 총 27번 나옵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시편에 나오는 할렐루야 23번을 모두 “Praise (ye) the LORD.”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할렐루야에서 “야”는 주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하나님]께 노래하며 노래로 그분의 이름을 찬양하라. 자신의 이름 {야}에 의거하여 하늘들을 타시는 분을 높이 찬양하며 그분 앞에서 기뻐할지어다.](시68:4).
하늘에서 심판하시는 주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그녀의 연기가 영원무궁토록 올라가더라.”(3)는 말씀이 있습니다. 큰 바빌론이 받는 심판이나 짐승의 형상에게 경배하고 표를 받은 자들이 받은 심판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불에 던져지는 것으로 “고통의 연기”입니다. [그들의 고통의 연기가 영원무궁토록 올라갈 것이며 짐승과 그의 형상에게 경배하는 자들과 누구든지 그의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낮이나 밤이나 안식을 얻지 못하리라.](계14:11).
지옥불은 결코 꺼지지 않습니다. 혼이 지옥에 던져진 자들은 큰 왕좌 심판을 받은 뒤에는 불 못으로 던져집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께서 그 생명을 거절한 자들에게 영원한 저주의 형벌을 주십니다. 복과 저주, 생명과 사망, 하늘과 지옥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복과 생명을 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면서 문자적 지옥, 저주, 심판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속은 자들입니다. 지옥의 불길, 고통의 연기는 그 사실을 불신하고 부정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4절입니다. [또 스물네 장로와 네 짐승이 엎드려 왕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며 이르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계19:4).
계시록에서 마지막으로 언급되는 스물네 장로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들이 누구인지 그 정체를 배웠습니다. 스물 네 장로는 왕좌 둘레에 앉아 있고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썼으며 어린양의 피로 구속 받은 자들로서 [주의 피로 모든 족속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서 우리를 구속하사 하나님께 드리신](계5:9) 신약의 크리스천들을 예표합니다(계4:4,10, 5:8,14, 11:6).
이들은 주님 앞에 엎드려 자신들의 왕관을 던져 드렸습니다. 이들은 저마다 하프와 향이 가득한 금병들을 가지고 어린양 앞에 드렸고(계5:8) 그분 앞에 엎드려 영원무궁토록 살아 계시는 그분께 경배했습니다(계5:14, 11:16). 지금 본문에서도 스물 네 장로가 하는 일은 엎드려 왕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며 찬양하는 것입니다.
스물 네 장로들에 관한 말씀들을 보면 우리가 저 하늘에서 무엇을 하는지 볼 수 있습니다. 하늘에서는 아무 할 일이 없는 줄로 아는 이들은 성경에 무지한 자들입니다. 하늘에 올라 간 사람들은 하늘에 관광하러 간 것이 아니라 ‘살러’ 간 것입니다.
땅에 속한 흙의 몸을 벗고 하늘에 속한 부활의 신비한 몸을 입고 하늘로 삶의 거처를 옮긴 것입니다. 주와 함께 거하며 주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일이 우리의 주된 사역입니다. 하늘에서 우리는 참된 경배의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하늘에서 우리는 참된 찬양의 즐거움을 일상적으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할렐루야”(4). 하늘에서 경배가 있고 찬양이 있습니다.
“스물네 장로와 네 짐승(그룹)”이란 표현에 주목하십시오. 장로들이 네 짐승 즉 그룹보다 앞서 언급됩니다. 구속받은 성도가 하늘에서 천사들보다 뛰어나고 그룹들보다 뛰어납니다.
5절입니다. [왕좌에서 한 음성이 나서 이르되, 하나님의 모든 종들아, 그분을 두려워하는 자들아, 작은 자든지 큰 자든지 너희는 다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라, 하더라.](계19:5).
왕좌에서 한 음성이 났는데 땅에 심판을 집행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명령이 나왔습니다. 왕좌로부터 나온 음성(계4:5)은 영들일 수도 있고 어린양일 수도 있습니다(계7:10).
이 구절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진리는 저 하늘에 있는 많은 사람들도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늘에는 차별이 없다, 차이가 없다는 것은 공산주의의 허상입니다. 성경은 “작은 자든지 큰 자든지 너희는 다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합니다. 분명히 작은 자와 큰 자가 있음을 말씀합니다. 크리스천들은 하늘에서 받는 영광, 유업의 보상이 다 다릅니다. 그가 행한 대로 받는 보상은 해의 영광과 달의 영광이 다르고 별들의 영광이 다르듯이 성도들의 영광이 모두 다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어떤 이들이 “....다른 이들은 고문을 당하되 더 좋은 부활을 얻으려고 구출받기를 원치 아니하였으며”(히11:35)라고 합니다. 성경은 보상이 있고 더 큰 보상이 있고 더 좋은 부활을 말합니다. 하늘에도 작은 자가 있고 큰 자가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십시오.
다시 5절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종들아, 그분을 두려워하는 자들아, 작은 자든지 큰 자든지 너희는 다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라.”(계19:5)고 합니다.
하나님은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찬양은 주님의 어떠하심에 대한 우리의 반응입니다. 경이로움에 대한 반응이 찬양입니다. “너희는 다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하는데 이는 주님을 알 때, 주님이 행하시는 일을 알 때 마음속에서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주를 찬양하라.”는 것은 우리에게 주신 명령이며 특권입니다.
찬양은 찬송가를 부르는 것만이 아닙니다. 시나 노래, 곡조, 춤으로 찬양할 수 있고 선한 행위로 찬양할 수도 있고 의의 열매로 그분을 찬양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주를 찬양한다고 할 때 찬송가 몇 곡 부르는 것으로 안다면 큰 오해입니다. 주님을 찬양하는 것은 그분의 어떠하심을 깨닫고 그분을 인정하고 그에 합당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찬양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 주님께 찬양이 되어야 합니다.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밝히 보이고 교회의 한가운데서 노래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하시며](히2:12). 노래로 찬양하는 것은 가장 일반적인 찬양입니다. 노래는 곡조가 있는 주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을 곡조, 가락에 맞추어 선포하는 것이 찬송으로 주님을 찬양하는 방법입니다. 찬송가는 우리의 감정이나 기분이나 즐거움을 위해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주님의 어떠하심, 주의 말씀, 주의 사역을 드러내어 선포하기 위해 부르는 것입니다.
오늘날 찬양 사역자들이 악기를 들고 분위기를 고조하고 사람들의 흥을 돋우기 위해 부르는 노래는 가증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으로 말미암아 계속해서 찬양의 희생을 [하나님]께 드리자. 그것은 곧 그분의 이름에 감사를 드리는 우리 입술의 열매니라.](히13:15).
“찬양의 희생”이 무엇인지 보십시오. 성경적 정의가 정확하게 나와 있습니다.
찬양은 “그분의 이름에 감사를 드리는 우리 입술의 열매”입니다. 우리는 시, 노래, 간증, 복음 선포, 설교, 감사, 영적 대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주의 이름에 감사를 드릴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찬양의 희생입니다.
6절입니다. [또 내가 들으니 큰 무리의 소리 같기도 하고 많은 물들의 소리 같기도 하며 강력한 천둥들의 소리 같기도 한 음성이 이르되, 할렐루야,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분께서 통치하시는도다.](계19:6).
왕좌에서 나는 음성은 “큰 무리의 소리, 많은 물들의 소리, 강력한 천둥들의 소리”와 같습니다. 찬양의 핵심 내용은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분께서 통치하시는도다.”(6)입니다. 주님이 통치하시는 세상이 하늘의 왕국입니다. “전능하신 분”(전능자)이란 말은 성경에서 58번 나오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전능자시며 주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앞으로 올 주 곧 전능자 하나님이십니다(계1:8, 4:8, 11:17). “하나님 전능자, 하나님 곧 전능자, 전능자 하나님”이란 말씀이 성경에 반복적으로 나오는데 하나님과 전능자는 상호 교환해서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 표현은 신약 성경에서는 거의 나오지 않다가 계시록에서 집중적으로 다시 언급됩니다.
“주 하나님 전능자여”(계4:8)라고 하는데 이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간략하게 표현한 것으로 주는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은 성령, 전능자는 아버지 하나님을 일컫습니다. “이르되, 오 [주] [하나님] [전능자]여, .........”(계11:17).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자 하나님으로 자신을 계시하시고 ‘여호와’란 이름으로 계시하지 않으셨습니다. 계시록에서 하나님은 히브리 조상들에게 계시할 때 쓰신 이름을 사용하고 계십니다. 계시록은 구약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 주의 약속을 성취하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주] [하나님] [전능자]여, 주의 일들은 크고 놀라우시나이다....”(계15:3). 같은 표현입니다. 하늘에서 성도들이 하나님을 부를 때 사용하는 이름이 ‘주 하나님 전능자’입니다. [또 내가 들으니 제단에서 다른 소리가 나서 이르되, 과연 그러하니이다. [주] [하나님] [전능자]여, 주의 심판들은 참되고 의로우시나이다, 하더라.](계16:7). 동일한 말씀입니다.
하늘에서는 누구나 하나님을 일컬을 때 “주 하나님 전능자여”라고 부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내가 그 안에서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전능자]와 [어린양]께서 그 도시의 성전이시기 때문이라.](계21:22). “주 하나님 전능자”는 하나님께서 주이시고 전능자이신 분이시란 말씀입니다.
7절입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그분께 존귀를 돌리자. [어린양]의 혼인 잔치가 다가왔고 그분의 아내가 자신을 예비하였도다.](계19:7).
“어린양의 혼인 잔치가 다가왔고”(7). 지금 교회는 주님과 정혼 상태입니다. 정혼자는 이미 법적으로 아내입니다(마1:18-20). 어린양의 아내는 자신을 예비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큰 환란 전에 하늘로 들림을 받은 후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각자 행한 일을 불로 심판받습니다. 성도들이 자기 육체로 행한 일, 이 땅에서 행한 일들을 시험 받습니다.
어떤 일은 모두 불타 없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행한 일들 중에 불에 탈 것은 다 타고 금, 은, 보석은 남게 됩니다. 이 시험을 받은 후 성도들의 모습은 이렇습니다. “........그러나 그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에 의해 받는 것같이 받으리라.”(고전3:15). 우리가 행한 일들이 불을 지날 때 불에 타고 나면 우리 자신은 불에 의해 받는 것 같이 구원을 받습니다. 설사 모든 행한 일이 다 타도 구원에서 떨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어린양의 아내가 자신을 예비했다는 말씀은 그리스도의 심판석을 통과한 후의 시점을 말합니다. 어린양의 아내는 구약 성도나 환란 성도가 아닙니다. 어린양의 아내는 하늘의 예루살렘이라고 말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간음한 아내로 나옵니다(사54:1-10, 호2:1-17). 이스라엘은 땅에 속합니다. 교회는 하늘에 속합니다.
이스라엘은 주님의 용서를 받았지만 처녀가 될 수 없습니다. 교회는 그분의 신부입니다.
8절입니다. [깨끗하고 흰, 고운 아마포 옷을 차려입는 것이 그녀에게 허락되었으니 그 고운 아마포는 성도들의 의니라, 하더라.](계19:8).
땅의 큰 음녀가 입었던 옷은 자주색, 주홍색 옷입니다. 어린양의 신부가 차려 입는 옷은 깨끗하고 흰, 고운 아마포 옷입니다. “그 고운 아마포는 성도들의 의니라.”고 합니다. 신부는 의로 옷 입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의는 믿음의 행위로 주어진 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는 선물로 주어집니다. 구원 받은 후 성도들의 선한 행위, 거룩한 행실, 주를 위해 받는 고난과 섬김, 형제 사랑 등은 모두 성도들의 의로 유업의 보상을 결정짓는 것입니다.
옷은 우리의 수치를 가려줍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들은 수치를 당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구원에 관한 문제입니다. 본문은 구원이 아니라 구원 받은 성도들의 믿음의 행위, 사랑의 수고, 인내의 소망, 주를 섬기는 등의 의로운 행위가 없다면 우리는 주님 앞에서 손실의 고통을 당할 것입니다. 저 하늘에서 보상의 손실은 결코 적지 않습니다.
“고운 아마포는 성도들의 의니라.”고 했는데 저 하늘에서는 각자 입은 옷을 통해 그 사람의 영광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의 신분의 차이는 썩어질 것으로 돈과 권력과 명성에 있지만 하늘에서의 신분의 차이는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보상으로 얻어지는 영광입니다.
“성도들의 의니라.”(8). 우리는 흔히 의를 말할 때 “......우리의 모든 의는 더러운 누더기 같으며.........”(사64:6)란 말씀을 주로 사용하는데, 이 말씀은 육신의 의, 자기 의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는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고 있습니다.
주님은 성도들에게 고운 아마포에 해당하는 의가 무엇인지 알려 줍니다.
[네 형제에게 무엇을 꾸어 줄 때에 너는 그의 집으로 들어가 그의 담보물을 취하지 말라. 너는 밖에 서 있고 네게 꾸는 사람이 담보물을 밖으로 가지고 나와 네게 줄 것이며 그 사람이 가난하거든 너는 그의 담보물을 가진 채 잠자지 말고 어떤 경우든지 해가 질 때에 담보물을 그에게 다시 넘겨줄지니라. 그러면 그가 자기 옷을 입고 자며 너를 축복하리니 그것이 {주} 네 [하나님] 앞에서 네게 의가 되리라.](신24:10-13).
한 마디로 이웃 사랑, 형제 사랑입니다. 담보물, 돈을 빌려 주는 일인데 이익을 취하지 않고 도움을 주는 행위를 성경은 “그것이 주 네 하나님 앞에서 네게 의가 되리라.”고 하십니다.
어느 시대에나 돈 문제로 고통을 받는 혼들이 많이 있습니다. 담보물을 취하지 않고 빌려 주고 담보물을 받은 경우에는 해가 지기 전에 돌려주면 그것이 ‘의’가 된다는 것입니다.
신약에서 우리 주님은 [오희려 너희는 너희 원수들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며 아무것도 다시 바라지 말고 빌려주라. 그러면 너희 보상이 클 것이요, 또 너희가 가장 높으신 분의 아이들이 되리니 그분께서는 감사하지 아니하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 친절하시니라.](눅6:35)고 하십니다. 하늘에서 보상을 크게 받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 이것입니다.
[그가 재물을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히 지속되고 그의 뿔이 존귀하게 높여지리로다.](시112:9). 재물과 의가 함께 나온다는 사실에 주목하십시오. “의”란 뭔가를 주고 베푸는 행위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구절을 성도들의 연보와 구제에 적용해서 선포합니다.
[(이것은 기록된 바, 그가 널리 재물을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히 남아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고후9:9). 이런 구절은 결코 헌금 요구나 은근히 압박을 가하는 설교가 아닙니다. 크리스천이 된 후 현실에서 의를 갖고 보상을 얻는 가장 실질적인 문제입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가 그들에게 이르되, 평안히 떠나라. 너희는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하라, 하고는 몸에 필요한 그것들을 너희가 그들에게 주지 아니하면 그것이 무슨 유익을 주겠느냐? 이와 같이 믿음도 행위가 없으면 그것만으로는 죽은 것이니라.](약2:15-17).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믿음에 대해서 쉽게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지만 행위가 없는 믿음이라면 죽은 것이요 헛된 것입니다. 믿음은 행위의 문제입니다. 이 점에 각별히 주의하십시오. 믿음이 없는 행위를 종교 행위, 율법적 행위, 위선이라고 비난하지만 행위가 없는 믿음은 더 문제입니다. 행위가 없는 믿음이 어떤 것인지 성경은 정확히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믿음의 행위가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의가 됩니다. [그러나 누가 이 세상의 좋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도 동정하는 마음을 닫아 그를 피하면 어찌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 거하겠느냐?](요일3:17).
지금 구제와 형제 사랑의 관계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행위는 내게 아무 유익이 없고, 행위가 없는 사랑은 lip service(입술발림) 밖에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시기 때문에 ‘사랑의 수고’에 대해 충분히 보상해 주십니다.
9절입니다. [그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양]의 혼인 만찬에 부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이르되, 이것들은 [하나님]의 참된 말씀들이라, 하기에](계19:9).
어린양의 혼인 만찬에 부름 받은 자들은 복이 있습니다. 교회는 혼인 만찬에 부름 받은 자들이 아니라 신부로서 혼인 만찬의 주인공입니다. 혼인 만찬에 부름 받은 자들은 신랑의 친구들, 신부의 친구들입니다. 교회는 그분의 신부이지 초청 받은 손님들이 아닙니다. 어린양의 혼인만찬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이루어집니다.
큰 환란 동안 땅에 있는 자들 중에 깨어 있는 사람들, 끝까지 견딘 자들(마24:13), 육체로 구원 받은 자들(마24:22)은 땅에서 하늘의 왕국에 들어갑니다. 이들은 하늘 혼인식에서 땅으로 돌아온 주인을 맞아야 합니다(눅12:36,마25:6). 지금 교회는 주님과 정혼한 상태로 순결한 처녀입니다(고후11:1-3). 교회가 하늘로 들림 받아 어린양의 신부로 혼인식을 위한 준비를 하는데 점이나 주름이 없는 영광스런 교회가 되기 위해 그리스도의 심판석을(고전3:10-15, 고후5:10-11, 롬14:10-12) 통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성도들은 자기가 행한 의로운 행위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성경은 성도들에게 자기 옷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보라, 내가 도둑같이 오나니 깨어 있어 자기 옷을 지킴으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그들에게 자기 수치를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계16:15).
[이는 네가 이르기를, 나는 부자며 재산을 불렸으므로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 하면서 네 비참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 내가 네게 권고하노니 너는 내게서 불로 정제한 금을 사서 부유한 자가 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네 벌거벗은 수치를 드러내지 말며 네 눈에 안약을 발라서 볼지니라.](계3:17-18).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교회는 옷을 입지 않고 있는 벌거벗은 자들임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육신적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린 자녀들아, 이제 그분 안에 거하라. 이것은 그분께서 나타나실 때에 우리가 확신을 가지게 하려 함이요, 또 그분께서 오실 때에 우리가 그분 앞에서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요일2:28). 벌거벗은 자들이 되지 않도록 우리는 그분 안에 거해야 합니다.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베푸시는 분은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의 가족들(엡3:15)은 신랑인 예수 그리스도와 신부인 크리스천들, 율법시대 이전에 구원받은 “왕후들”(queens)과 “후궁들”(concubines), 환란 때 들림 받은 “처녀들”(아6:8-9)입니다. 율법시대에 구원받은 이스라엘로서 “친구들”(요3:29,15:14), 환란 때 구원받은 이방인인 “손님들”이 있습니다(시45, 아6:8-10).
크리스천들이 성경을 올바로 나누지 못하면 자기가 어린양의 신부인지 결혼식에 주인공인지 초대받은 하객인지 분간을 못하고 설교합니다. 신부는 결코 등불을 가지고 신랑을 맞으러 가지 않습니다. 지혜로운 다섯 처녀들은 신부가 아닙니다. 신부인 교회에게 신랑 맞을 준비를 하라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또 내게 이르되, 이것들은 [하나님]의 참된 말씀들이라, 하기에](9).
사도 요한이 계시로 받은 이 말씀들은 모두 하나님의 참된 말씀들입니다. 요한의 사적인 해석이나 저작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참된 말씀들입니다. 주의 말씀은 순수하고 완전하고 영원합니다. 주의 말씀은 우리가 신뢰할 때 방패가 됩니다. 이 말씀을 듣고 믿는 모든 이들에게 주의 평강과 기쁨이 넘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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