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김민호 목사
대림절 4주 주일설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요한복음 1장 44~51절)
-----------------------------------------------------------------------------------------------------------------
오늘은 대림절 네 번째 주일입니다. 기다림의 끝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대림절 첫주 설교에서 예수님이 우리를 만나러 출발하셨다는 표현을 했는데, 이제 예수님이 저 멀리서 보일 듯 말 듯 다가오고 계시다고 표현해도 될 것 같습니다.
나의 왕, 나의 주인, 나의 구원자, 나의 친구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게 만나게 될 소망을 품으시고 뚜렷하게 예수님이 보일 때까지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시는 대림절 마지막 주 되시기를 바랍니다.
대림절 기간 동안 복음서를 살펴보고 있고 오늘은 요한 복음 1장을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예수님이 빌립과 나다나엘 이라는 제자를 부르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43절과 44절을 읽어 드립니다.
“43.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44.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아멘.
예수님이 빌립을 부르시면서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의 제자들를 부르신 기록을 보면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는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베드와 안드레 형제, 야고보와 요한 형제를 부르셨고(마 1:18~22, 막 1:16~20, 눅 5;1~11), 같은 동네에 살던 (알패오의 아들) 마태(레위)도 부르셨습니다.(마 9:9, 막 2:14, 눅 5:27)
요한복음에는 제자들을 부른 이야기가 조금 특이 합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자신에게 세례 받으시러 나아오심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라는 말을 하였고, 자신을 따르던 제자들에게 저 예수님을 따라가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 였다고(요 1:40) 나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였던 한 사람은 안드레였습니다. 그럼 세례 요한의 제자 중 두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갔다고 했는데, 안드레 말고 누가 세례 요한의 제자였을까요?
바로 요한 복음의 저자인 야고보의 동생인 사도 요한입니다. 이렇게 요한 복음은 예수님을 처음 따른 제자들을 예수님이 부르신 것이 아니라 세례 요한의 말을 듣고 그들이 자발적으로 따라 간 것으로 기록된 점이 특이 합니다.
그리고 요한 복음에 빌립과 나다나엘을 부르시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이야기는 오직 요한 복음에만 나오는 기록입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안드레는 이후 형인 시몬을 예수님에게 데려감, 요 1:42)와 , 요한(요한도 자기 형인 야고보를 예수님에게 데려 갔을 것으로 추정)이 자신을 따라온 후에 갈릴리로 나가시려고 하셨습니다. 이 찰나에 빌립을 만납니다.
빌립을 만난 예수님은 다른 제자들에게 하신 것과 같이 다짜고짜 “나를 따르라”라고 한 마디 하셨습니다. 이에 대해 빌립이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나오지 않았으나 그 역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을 것이 예상 됩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부르심의 과정을 보면, 예수님은 부르실 자들을 단독으로 선택 하시고, 부르실 자들을 직접 찾아 가시고, “나를 따라오라” “모든 것을 버려라” 라고 분명하게 요구하시는 분임을 다시 확인 할 수 있습니다.
대림절은 예수님이 정말 나를 택하시고 찾아 오신다는 사실을 믿고 소망 하는 절기 입니다. 그리고 즉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설 수 있는 마음의 준비와 결단을 하는 시간 이십니다.
성탄의 아침이 점점 다가오면서 예수님이 점점 우리에게 가까이 오셔서, 함께 가자고 말씀 하여 주시는 우리 주 예수 스리스도의 크신 은혜 앞에 겸손 함으로, 순종 함으로, 그리고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주님과 동행의 길을 나서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빌립은 같은 동네에 사는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자신이 만난 예수님을 소개 합니다. 45~46절을 읽어 드립니다.
“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46.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아멘.
나다나엘은 ‘하나님이 주심(선물)’이라는 뜻이며, 바돌로매 라는 제자와 동일 인물로 여겨 집니다. ‘바돌로매’는 돌로매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베드로의 본 이름은 시몬 인데 예수님이 그를 부를 때 ‘바요나 시몬’ 이라고 하십니다. 바요나는 바돌로매와 바찬가지로 요나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빌립은 나다나엘(바돌로매)에게, 내가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를 만났는데 그 분은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가 기록(예언)한 바로 그 메시아(그리스도)라고 소개하였습니다. 성경에서 구약 성경을 가르키는 표현으로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이라고 함축하여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는데 지난 번 제가 성경 개관 설명 드리면서 유대인들은 성경을 ‘타나크’라고 부르는데 이 말은 모세오경을 가르키는 ‘토라’, 예언서를 가리키는 ‘네비임’, 성문서를 가리키는 ‘케투빔’, 이 세 단어의 앞 글자에 모음을 붙여서 만든 단어가 ‘타나크’라고 말씀 드린 적이 있습니다. ‘타나크’라고 하면 유대인들이 구약성경을 부르는 말이라는 것을 상식으로 알고 계시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빌립이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가 기록한 것이라고 한 것은 모세 오경, 역사서, 선지서, 시가서(성문서) 이렇게 구분하려는 것이 아니라 구약성경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구약성경에서 증거되고 예언된 메시아(그리스도)를 자신이 직접 두 눈으로 보고, 만나고, “나를 따라오라”는 말까지 들었다고 전해 주었습니다. 빌립은 당연히 나다나엘도 예수님께로 데려 가기 위해서 이 말을 해 준 겁니다.
그런데 의문이 생깁니다. 빌립은 예수님에게서 “나를 따라오라”는 말 이외에 어떤 대화를 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빌립은 예수님이 성경에 기록된 메시아(그리스도)라는 것을 확신하고 나다나엘에게까지 이런 전도를 하는 것일까요? 그냥 깨닫게 된 과정은 일일이 생략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될까요?
바로 이런 대목이 요한복음만의 특징입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메시아,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를 말하지 말라고 입단속을 시키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귀신에게 조차도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경고 하십니다.
그런데 요한 복음에서는 예수님이 그리스도 라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공개적인 것은 물론이고 적극적이고 효과적으로 예수님이 그리스도 였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전파하고 선포합니다.
빌립은 이러한 요한 복음서의 기록 목표의 배경 하에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이미 처음부터 확실하게 듣고, 깨닫고, 기쁜 나머지 나다나엘게 즉시로 가서 전도를 한 것입니다.
만약 요한복음이 없었다면 예수님이 그리스도 라는 사실이 강하게 전달되는 것이 많이 약화 되었을 법도 한데 요한복음으로 인하여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성경이 예언하는 구원자(메시아)가 확실하다는 강력한 증거를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네 편의 복음서가 주어진 것은 참으로 진리를 전파하기 위한 성령의 역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빌립은 드디어 메시아를 만났다는 감격과 기쁨과 흥분에 넘쳐서 말을 전했지만 빌립의 말을 들은 나다다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반문합니다.
나다나엘은 어리둥절했고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나다나엘은 종교적인 중심지가 아닌 변두리 어촌 촌동네에서 선한 것(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메시아의 출현)이 날 수가 없다 라고 전면 부정하는 반응을 보입니다.
혹시 이 나사렛 동네에서 예술가나 기술자나 군인이나 부자가 나왔다면 그나마 있을 수 있는 일이겠지만,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있듯이 이 곳 나사렛은 성경이 예언한 메시아가 나타날 종교의 중심지가 절대로 아니며 거룩한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놔두고 이런 이방 땅으로 여기는 촌 구석에서 메시아가 나타났다는 말은 수긍하기도 힘들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나다나엘의 이러한 반응은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보아서 너무나도 당연한 반응입니다. 누구라도 예수님을 만나지 않은 상태에서 전해 듣기만 한다면 그 내용이 사실인지, 과장된 이야기인지, 꾸며낸 괘변인지를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사람은 각자 자신이 지식적으로 알고 있으며 경험한 것 까지만 받아들이려고 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빌립과 같은 교회 동료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찾아와서 어제 낮에 하나님이 알려 주셔서 이렇게 말씀 하셨으니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어제 밤에 하나님이 환상으로 이런 일들을 보여 주셨으니 그냥 포기하는 것이 좋겠어, 이번 주에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이런 마음을 주셨는데 일을 크게 벌리는 것이 좋겠어, 이런 식으로 말하였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여러 분들은 그 말을 듣고 즉시로 동의하고 실행 하실 수 있나요? 거의 다 뒤로 물러나는 반응을 보이실 겁니다. 내가 직접 듣지 않았고, 확인이 불가능하게 단지 전해들은 말들에 대해서는 의심과 의문을 품고 방어적으로 경계심을 갖는 것이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사람의 말에는 그렇게 반응해도 되는데 성령 하나님의 음성이라면 이런 식의 대응은 불순종을 자초하는 일입니다.
나다나엘처럼 무슨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거야,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마 라고 발끈해서 용수철처럼 거부의 반응이 튀어 나오는 불신앙의 마음이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보지 않고도 믿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 것으로 받아들이기가 결코 쉽지 않은 겁니다.
나다나엘의 강한 의구심이 드는 반응을 본 빌립이 침착하게 대답 합니다. “와서 보라”, 마치 예수님의 화법 같습니다. 간단하지만 아주 묵직한 대답입니다. 내가 더 설명해주어야 아무 의미가 없을 듯 하니 직접 만나보고 그런 말을 계속할 수 있는지 보자 라는 빌립의 대응입니다.
“와서 보라”라는 말을 들은 나다나엘은 의문과 궁금증을 가득 품고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47~49절을 읽어 드립니다.
“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48.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아멘.
나다나엘은 궁금한 것이 많아서 예수님을 만나면 질문할 것들을 머리 속에 그리고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를 보자 마자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단 번에 나다나엘의 인품과 신앙을 꿰뜷어 보셨습니다.
‘참으로(알레도스)’라는 말은 정말로 확실하다는 뜻이며, ‘간사한 것(돌로스)’은 속임수나 간교함을 말합니다. 두 말이 완전히 대조적입니다. 참으로, 정말로 학실하게 괜찮은 사람이라고 평가 받을 정도로 나다나엘은 예수님이 보시기에도 인정 받을 만큼 인품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나다나엘과 같은 사람들을 일컬어 신약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들 이다 라고 표현을 하며, 이 대상에는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타락하고 종교인들이 위선적이 되어가더라도 그 중에는 참으로 간사한 것이 없이 거룩하게 구별된 자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사람과 환경을 탓하며 간사함과 타협하며 자신의 죄악을 변명하는 것은 비겁한 일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나다나엘은 깜짝 놀라서“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라고 놀라워 했고, 예수님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자신을 과거부터 훤히 알고 있었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나다나엘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말씀 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인간의 심령을 감찰 하시는 하나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와서 보라”라고 해서 긴가민가 따라 오기는 했는데 오자마자 무슨 질문 하나 던져보지도 못하고 이전의 의문과 궁금증이 단번에 해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만나는 자들에게 일어나는 충격적인 감동과 변화의 시작입니다. “와서 보라”, 단 한마디에 순종하여 나아오기만 하면 누구에게나 이런 엄청난 사건이 일어 납니다.
나다나엘은 심장이 주저 앉는 심정으로 예수님 앞에 엎드리며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신앙 고백을 드립니다. 불과 얼마 전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라고 강력하게 의문을 제기했던 나다나엘이 한 순간에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베드로와 마르다에 버금가는 신앙고백을 드리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나다나엘은 그제서야 왜 빌립이 자기를 찾아왔는지 완전히 이해 할 수 있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지만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는 것을 나다나엘이 제대로 증명해 주었습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표면적인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다 라고 했습니다. 전해 듣기만 하는 믿음의 이야기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 믿음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판에 새기고 입술로 고백하고 증거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나다나엘도 이제 빌립과 같이 기쁨이 충만하여 나사렛 출신 요셉의 아들 예수가 율법과 선지자의 글에 기록된 그리스도라(메시아)는 사실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주체할 수 없는 힘에 이끌려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전도의 역사, 성령의 역사, 그리고 만남이 주는 능력의 역사가 주는 실체들입니다.
나다나엘의 신앙고백을 들은 예수님은 50, 51절로 대답 하십니다.
“5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51.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아멘.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고 하셨습니다. 나다나엘로서는 지금 겪은 일도 충격적인데 이 보다 더 큰 일을 보겠다는 말은 상상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정신이 혼미할 정도인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은 진실로 라는 말씀을 두 번이나 하시면서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말씀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천사들일 것이고 인자는 예수님 이시기에, 하늘에서 천사들이 예수님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광경도 보게 해 주시겠다는 곧 하나님의 나라가 나다나엘에게 임하였다는 선포이십니다.
네가 나와 함께 다니는 모든 순간에 더 이상 세상의 것을 보지 아니하고 하나님 나라가 활짝 열려있는 하늘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고,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천국의 이야기를 듣게 될 것이고,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영생복락의 나라가 충만하게 임하게 됨을 경험하게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이제부터 나다나엘은 세상에 속한자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입니다.
더 큰 일을 보게 하시겠다는 말씀에서 오병이어의 현장 사건을 반면고사로 삼으면 될 것 같습니다. 떡을 배부르게 먹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계신 곳을 따라가기만 하면 언제 든지 배고픔을 면할 줄 알고 따라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영생의 떡을 먹으라고 하자 많은 사람들이 다 떠났습니다. 만약 나다나엘이 처음 예수님을 만난 경험에 만족하고 더 큰 일을 보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아니한다면 먹을 떡만 구하는 어리석은 군중과 다를 바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더 큰 일을 보게 하시겠다는 실상은 당장의 문제 해결과 먹을 거리가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의 나라, 그 곳만을 바라고, 그 곳만을 누리고, 그곳만을 소망하며 사는 삶을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자 이유입니다.
나다나엘에게 “이 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라고 하신 것은 소망을 주시고, 의무를 주시고, 책임을 동시에 주시는 은혜의 말씀입니다. 일생 동안 반드시 새기고 또 새겨야 하는 존귀한 말씀입니다. “더 큰 일을 보리라”는 말씀을 듣고, 진짜로 더 큰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데까지 이를 수 있도록 굳건한 믿음을 지닌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와 성장을 게속해서 이루어 가야 합니다.
말씀의 결론을 맺어 봅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제자를 부르시는 장면이지만 특별히 그 제자들이 다른 사람을 연쇄적으로 부르러 가서 데려오는 장면들을 보여 줍니다. 세례 요한의 두 제자였던 안드레와 요한은 자신의 형제인 베드로와 야고보를 데려와서(요한이 야고보를 전도했다는 기록은 없으나 정황상 추정) 예수님을 만나게 했고, 빌립은 친구인 나다나엘을 데려왔습니다.
먼저 예수님을 만나서 경험한 제자들은 자신이 경험한 예수님을 만난 기쁨을 주체할 수 없어서 다른 친구에게 전해주기에 열심을 냈습니다. 복음(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성탄)은 나만의 기쁨이 아니라 온 세상의 기쁨입니다. 나만의 개인적인 만남이 아니라 이웃과 가족과 지인들에게 기쁨의 소식을 함께 나누도록 소개하는 것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대림절 마지막주를 보내고 성찬의 기쁨을 준비하는 우리 모두에게는 “이 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는 은혜의 말씀이 선포되었습니다. 우리는 먼저 예수님을 만나 기쁨을 누린 자들로 내 주변의 모든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소식을 전하는데 열심을 내야 합니다. 그래야만 진정한 제자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겁니다.
누구에게라도 찾아 가셔서 “와서 보라” 담대하게 선포 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 주님이 찾아오는 모든 자들에게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말하여 주실 것입니다.
대림절 마지막 한 주, 간절히 소망하는 자들을 주목하여 보고 계시고,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고 계시는 주님 앞으로 가까이 더 가까이 나아가셔서, 더 큰 일을 직접 보시고, 더 큰 감동적인 만남의 체험을 이루시는 복된 성탄을 맞이 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고 만남의 기회를 허락하여 주시니 감사를 올려 드립니다. 겸손하고 정결한 몸과 마음으로 아기 예수 탄생을 맞이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더 큰 일을 보도록 하늘 문을 열어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