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 8화. 신문지 위의 첫 밥상
미국에 도착하여 가장 처음 눈에 띈 것은 거리의 아파트나 빌딩들이 3,4층을 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설명에 의하면 잦은 지진 때문에 고층 건물을 짓지 않고, 거의 나무로 건축한다고 했다.
서울의 고층 건물이 눈에 익숙한 나로서는 그런 단층 건물들로 찬 거리들이 아기자기하고 귀엽게 느껴졌다.
우리는 한 달 전, 아버지가 미국 출장왔을 때 구해 놓은, 지은 지 채 한 달이 안 되는 아파트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집 안에 들어서니 아직 덜 빠져나간 페인트 냄새가 코를 찔렀다. 회색 카펫을 빼고는 집 안 전체가 새하얗게 단장되어 있었다. 마치 살균 소독을 해놓은 병원의 내부같이 느껴졌다. 너무나 선뜻한 느낌마저 들어 몸서리를 쳤다. 텅 빈 실내가 너무나 차갑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문득 서울 우리 집이 떠올랐다.
‘구석구석에 우리 식구의 따스한 손때가 묻은 그 집…내 낙서로 가득한 방 한 쪽의 벽면…언니와 내가 매일 밤 두드리던 피아노…봄마다 한바탕 피는 개나리꽃…내 방 한 구석의 작은 책상…그 위에서 밤마다 쓰던 일기, 그리고 매일 학교에서 보는 친구들에게 마치 헤세라도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심오한(?) 뜻과 철학이 담긴 긴긴 편지를 쓰던 날들…….’
자칫 한 번이라도 마음의 문을 열면 거침없이 밀려들어올 회상의 썰물에 나도 모르게 쓸려 나갈까봐 나는 다시 한 번 모질게 마음을 먹었다.
‘한국 생각 따위는 할 필요가 없어. 이 바보야. 이제 이곳이 하나밖에 없는 네 집이야. 먼 훗날 눈부시게 화려한 성공을 해서 한국 땅에 다시 발을 디딜 때까진.’
첫날밤은 그럭저럭 부모님 친구분 댁에서 묵었다. 이튿날 어머니와 나는 아파트로 와서 가지고온 짐을 푸느라 한나절을 보냈다. 대강 정리를 끝마치고 나니 어드덧 점심때가 지나 있었다. 하지만 점심을 먹으려니 어처구니없게도 먹을 방도가 없었다. 가스는 2,3일 뒤에야 들어온다는 것이었고, 나가고 싶어도 차가 없었다. 설령 차가 있더라도,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문 밖으로 한 발짝이라도 나가면 길을 잃을 판이었다.
일단 있는 대로 상을 차려 보았다. 상추 몇 잎, 밥, 고추장 등이 전부였다. 그나마 아직 식탁도 마련하지 못해 카펫 위에 신문지를 깔아놓고 그 위에 음식을 늘어놓았다.
시장한 가운데 주섬주섬 먹다 보니 언뜻 처량하고 처참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생활을 하러 이 곳까지 온 것이 아닌데…….’ 하는. 하지만 그 신문지 위의 점심은 앞으로 펼쳐질 더 큰 고생의 시작에 불과한 것임을 그때는 알 수 없었다.
많이 쓰이는 영어 표현 중에 ‘It was all downhill from there.’라는 문구가 있다. ‘그때부터 일이 갈수록 점점 더 심해 갔다.’는 뜻이다.
Well, it was all downhill from there.
<법정> 28화. 눈과 마음
늘 같이 있고 싶은 친구를 보내면서 우리는 속으로 뇌인다. ‘마음이 지척이면 천리도 지척이요…’ 공간적인 거리를 정신적인 관념으로 단축시키고 싶은 심정에서다. 뿐만 아니라 시간적인 간격마저 두고 싶지 않아서 일념(一念)이 무량겁(無量劫)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지극히 식물성스러운 이러한 사유경향(思惟傾向)은 우리 조상들이 즐겨 부르던 옛시조나 가요를 통해서도 우리들 핏줄에 스며 흐른다. 어떤 현실을 정면으로 맞서 대결하기보다는 저만치 우회로(迂廻路)를 통해 극복하려는 것이다. 이같은 경향을 약자의 체념이라고 흘기는 눈들은 서양 사람들의 흉내를 내어 꼬부라진 혀로 이렇게 도전한다. ‘눈에서 멀면 마음에서도 멀다’고.
일리가 있는 지당한 말씀. 아무리 정다운 사이라 할지라도 멀리 떨어진 채 마주 대할 기회를 갖지 못한다면, 유행가의 가사 쪼가리처럼 언젠가는 희미한 옛그림자가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이란 한없이 굳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형편없이 헤플 수도 있다. 세상은 이래서 더욱 분주해지고 있다. 교통순경은 연방 손짓을 해야 하고, 차는 시간을 대 가느라 기를 쓰고 달려야 한다. 눈에서 멀리하지 않기 위해 찾아 나서느라고, 눈을 크게 뜨고 저마다 찾느라고.
어제 만난 그는, 요즘도 바쁘냐는 물음에 계속 바쁘다고 했다. 직장 일 때문이 아니라 사람을 보느라고, 주말이면 ‘관상쟁이가’가 되어 그놈의 선을 보아야 한다는 것. 지난 봄부터 보아오는데도 선뜻 마음에 들지 않아 계속 근무중이란다. 참 수고가 많겠다. 짝을 맞추느라 애 많이 쓰겠네.
그래, 여기 문제가 있는 것이다. 보긴 눈으로 보는데 판단은 마음으로 하고 있다. 보고 또 보아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똑같은 눈으로 보는데 어떤 마음에는 들고 어떤 마음에는 스쳐 지나간다. 그러고 보면 눈은 한낱 거울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제약회사의 나팔을 빌 것도 없이 창문에 불과한 것이 사람의 눈이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즉 오늘의 우리들은 눈에만 의존하려는 데에 맹점이 있는 것이다. 눈앞에 드러난 물량(物量)의 형태와 상승하는 곡선에만 최대의 관심을 기울인다. 그 부피 아래 깔린 ‘인간’이나 곡선 배후에서 시들고 있는 뜰에는 마음을 두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또한 사람의 눈이다. 마음을 빼앗기고 나면 눈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번들거리는 저 탐욕의 눈에서 우리는 그 마음의 명암(明暗)을 읽을 수 있다. 탐욕의 안개가 스스로의 시야(視野)를 차단한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려면 도수 높은 안경을 쓸 것이 아니라. 허심탄회(虛心坦懷)한 빈 마음이 있어야 한다. 사물을 꿰뚫어보는 직관력이란 시력 얼마의 그 육안으로는 결코 얻어질 수 없는 것. 그것은 일체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텅 빈, 그래서 투명해진 마음의 눈이다. 눈과 안목의 차이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진정한 친구는 내 영혼의 얼굴. 그는 내 마음의 소망이 응답된 것이니까. 친구를 위해 나직이 기도할 때 두 영혼은 하나가 된다. 맑고 맑게 서로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친구 사이에는 말이 없어도 모든 생각과 소원과 기대가 소리 없는 기쁨으로 교류된다. 이때 비로소 눈과 마음은 산하(山河)와 세월을 넘어 일치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