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팽Frederic Chopin은 거의 피아노 곡만 작곡했다. 피아노에 대한 강한 열정은 그를 피아노의 혁신자로 만들었는데, 그처럼 많은 것을 얻기 위해 자신의 영역을 한정시킨 작곡가는 없었다 쇼팽은 키보드 테크닉의 혁명을 일으켜 이 악기의 잠재적인 가능성을 넓혔다. 그는 또한 진보적인 화성과 반음계적인 어법을 사용했고, 조調적인 처리에 있어서는 때때로 바그너를 넘어 드뷔시와 쉰베르크의 세계에까지 도달했다.
쇼팽은 유아 때부터 유달리 피아노 소리를 좋아했다고 한다. 네 살 때부터 일곱 살 누이로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재능이 뛰어나 여덟 살 때 처음으로 콘서트를 열 정도였다. 1825년에는 처음으로 ‘론도’(C단조 작품 1)를 작곡했다. 쇼팽은 1830년 11월 2일 고국 폴란드를 떠나 비엔나로 갔다. 1831년 9월 8일 쇼팽이 슈투트가르트에 있을 때 러시아가 바르샤바를 침공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후로 줄곧 망명 생활을 한 그는 끝내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39세의 나이로 파리에서 죽음을 맞았다.
쇼팽의 4곡의 발라드Ballades는 1831년부터 1842년까지 11년간 작곡한 것이다. 원래 의미의 발라드(서술적이고 문학적인 내용을 가진 곡)와는 거리가 있었다. 슈만은 발라드 제2번에 대해 폴란드의 애국자인 아담 미츠키에비츠Adam Mickiewicz의 시에서 암시를 받았다고 시사했다. 그러나 쇼팽은 자기 작품에 있어 어떠한 표제나 음악 외적인 요소를 사용하기를 꺼려했고, 어떤 문학적인 영감이라도 순수한 음악적인 상념으로 전환시켜 왔다. 발라드 제1번(1831~35)은 쇼팽의 작품 중 가장 거칠고 독창적인 작품이고 제2번(1836)은 환상적이며 이지적이다. 제3번(1840~41)은 경쾌하고 화려한 귀족 취미가 넘치는 곡이다. 완전히 성숙한 쇼팽의 진수를 보여주는 제4번(1842)은 인간으로서, 예술가로서, 가장 완벽한 작품이다.
즉흥곡Impromptus은 1834년에서 1842년 사이 즉흥적인 요소를 기초로 해 만든 짧은 악곡들이다. 프랑스의 작곡가 비제는 “오직 한 사람, 쇼팽만이 즉흥적인 것을 어떻게 쓰는지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쇼팽의 즉흥곡은 매우 자연스러운데, 결코 무궤도 하지 않고 명확하게 정리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즉흥곡에서도 쇼팽의 천재성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제1번(1837)은 소란스러운 주제를 거쳐 고요한 중간부가 나타나서 격렬해지고는 다시 오프닝으로 돌아간다. 제2번(1839)은 발라드의 서술적인 요소와 녹턴의 명상적인 요소를 갖춘, 즉흥곡 중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곡이다. 제3번(1842)은 우아하고 잘 다듬어진 작품이지만 그리 많이 연주되는 곡은 아니다. 제4번(1834)은 쇼팽의 나이 24세 때의 작품으로 쇼팽이 죽은 후 출판사가 ‘즉흥환상곡Fantaisie-Impromptu’이라는 타이틀이 붙인 것이다. 쇼팽의 작품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다.
폴란드의 피아니스트 아담 하라셰비치Adam Harasiewicz가 쇼팽의 즉흥곡 1~4번과 발라드 1~4번을 연주한 음반이 있다. 국내에서는 <The Romantic Piano>(필립스/성음)라는 이름으로 1983년 발매된 바 있다.
1937년 폴란드에서 태어난 아담 하라셰비치는 1950년 크라크프 음악원에 입학해 폴란드 피아노 교육계의 대부였던 즈비그니예프 제비예츠키Zbigniew Drzewiecki를 사사했다. 이탈리아로 유학해 베네데티 미켈란젤리에게서도 가르침을 받았다. 1955년 바르샤바의 쇼팽 콩쿠르에서 아쉬케나지를 누르고 우승해 일약 그 이름이 높아졌다. 서방에서의 데뷔는 1958년이었는데, 홀라이저Heinrich Hollreiser가 지휘하는 빈 필과 쇼팽의 협주곡 2곡을 협연해 레코딩 데뷔했다. 쇼팽 탄생 150주년이었던 1960년, 폴란드 정부의 파견으로 미국에도 등장해 화제를 일으킨 이래 국제적으로도 활약했다.
하라셰비치는 쇼팽이 특기여서 대부분의 레코드 레퍼토리는 쇼팽으로 채워졌다. 시원하고 청결한 해석이 상쾌한 인상을 주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소위 낭만적인 쇼팽이 아니고, 루바토를 억제한 스트레이트한 연주인데, 그 속에 약간이나마 향토색이 엿보이며 현대적인 감각의 호연을 펼친다는 평가를 받는다.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우승의 낭보를 전했던 2015년 제17회 바르샤바 국제 쇼팽 콩쿠르에서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필립 앙트레몽이 조성진에게 최악의 점수를 주었는데, 이 콩쿠르의 또 다른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사람이 아담 하라셰비치였다.
아라셰비치는 1980년대 성음 라이센스 시절 가장 흔한 쇼팽 피아노 음반의 대명사였다. 쇼팽의 피아노 소품을 하라셰비치의 필립스 음반으로 시작한 애호가들이 많았다. 아라셰비치는 LP 시대 유일하게 필립스 레이블에서 쇼팽 피아노 작품 전곡 녹음을 남긴 것 말고는 거의 녹음 활동을 하지 않아 지금은 잊힌 쇼팽 스페셜리스트로 기억된다.
즈비그니예프 제비예츠키를 사사한 전통파 피아니스트인 하라셰비치는 스승 제비예츠키가 가장 아끼는 애제자였다. 뛰어난 테크닉과 음악적 해석 능력, 감수성은 폴란드 낭만주의 피아니즘의 전통을 가장 잘 계승한 피아니스트로 전도유망했다.
아쉬케나지를 누르고 바르샤바 콩쿠르에서 1등에 오를 정도로 각광받았지만 그는 연주회와 녹음 활동을 극도로 꺼렸고 컨디션이 완벽하지 않으면 연주하지 않을 정도로 예민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벨기에서 몇 년을 보내고 1957년 필립스 레이블과 녹음 계약을 맺고 1958년부터 1972년까지 쇼팽 피아노 작품 전곡 녹음을 완성한다. 이 전집은 그의 유일한 LP 시대의 음원이다. 1955년 하라셰비치가 쇼팽 콩쿠르 우승 직후 기념으로 폴란드 MUZA 레이블에서 남긴 쇼팽 피아노 협주곡 2번 연주는 LP가 희귀해 구하기 어렵다.
하라셰비치는 쇼팽 외에 폴란드의 근대 음악 작곡가 카롤 시마노프스키의 작품들도 종종 연주회에서 연주했지만 여전히 쇼팽 스페셜리스트로 남아 있다. 그의 쇼팽 연주는 폴란드 낭만주의 감성과 뛰어난 음악적 균형 감각, 음악적 감수성이 빚어낸 뛰어난 명연주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