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소
말을 할 수 있게 되는 단계를 보면 우선 눈이 뜨이고, 눈이 상대방의 말과 행동을 보고 들어 말에의 귀가 트게 된 후, 그 소리를 흉내 내서 입이 열리게 되면서 비로서 말 할 줄 안다고 인정받기에 이르는 것 같습니다. 손자 손녀를 키워봤으면 금방 고개를 끄덕일 줄로 압니다. 자기 자식 키울 때는 바빠서 잘 모르고 지났을 거구요 . . .
이민, 취업, 유학, 파견 등 해외에 처음 가서는 세 번째 단계의 초반에 해당되는 단계에서 헤매가며 뿌리를 내렸으리라 짐작이 됩니다.
그 때 헤비작 거리던 기억이 생생하다 구요. 그래도 그때가 좋았다 구요. . . ?
저도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처음 일본 가서 한달 쯤 되었나요. 하루 종일 한마디도 못하던 때 . . .
한 달이 되니까 갑갑해서 못 견디겠더군요. 그때 저를 찾아오신 선배님이 계셨는데 그제 서야 제 입이 열리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 분은 일본식 교육을 중학교 1학년 까지 받았으니 언어는 물론 그곳 사정에도 밝아 부산서 서울 출장오신 분 같았습니다. 맞아요. 그 분은 부산 사람이라 부산 사투리가 심했어요.
저는 이래봬도 변두리 여주이기는 하지만 엄연한 수도권 출신인지라 그분 말을 90% 정도 밖에 못 알아들었습니다. 그것도 집중하여 귀를 기우려서 . . .
그러니 일본 사람 이야기는 알아들었으면 제가 얼마나 알아들었겠어요. 그래도 그날 제 입은 모처럼 100% 열려 오랜만에 답답함을 날려 보냈습니다.
그때 그분의 이야기 중 ‘오이소’ , 부산 사투리 일거 같죠? 그런데 고구려 말입니다. 그 이야기 잠간하렵니다.
도오쿄오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면, 아다미 온천이라고 옛날에는 우리나라 온양온천 만큼이나 일본 사람들 신혼여행 많이 왔던 곳에서 더 내려오면, 오오이소(大磯)라는 항구가 있답니다.
아주 옛날 고구려와 백제가 당나라에 망할 무렵 고구려 사람들 1800여명이 이곳에 도착했답니다.
쿠르즈선을 전세 내어 왔어도 2번에 걸쳐 와야 될 규모인데 그 당시 상황에서 일시에 왔을 리는 만무고 어쩌다 몇 명씩 왔을 터인데 그 때마다 먼저 도착한 사람들이 오이소! 오이소! 했다고 합니다.
이 광경을 보던 토착인들이 배가 도착한 곳을 오이소라고 불렀고 그것이 항구 명으로 되었다고 합니다. 같은 발음의 한자를 찾다보니 大磯로 되고 부르기는 大는 오오 발음이고 磯는 이소 발음이어서 오오이소가 되었답니다.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속초에 아바이 마을은 불과 70여년 전의 피난민으로 인해 생긴 지명을 생각해 보면 무리는 아니잖아요.
당장 그날 저녁 숙소로 돌아와서 지도를 펼쳤습니다.
어렵지 않게 오오이소 항구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항구 바로 뒷 산의 이름이 高麗山이었고 그 산에는 高麗神社도, 그리고 시내(市內) 쪽으로는 우리나라 洞에 해당하는 구역인 高麗1, 高麗2가 있는 것입니다.
그때 생긴 커다란 의문! 때문에 역사를 바라보는 제 눈이 확 달라졌습니다.
왜 왔을까? 그거야 거의 의문의 여지 없이 나라가 위태롭고 혼란하여 살길을 찾기 위해서의 탈출 이었을 거고 (이런 거야 월남의 보-트 피플, 시리아 난민 등 지금도 이 지구상에는 흔한 일),
그 다음 공도리 다운 의문, 어떻게 왔을까?
고구려에서 서해안, 남해안을 거쳐 대마도, 규슈에 도착, 먼저 간사람 수소문하며 다시 오사카로 그리고 더 북쪽인 오오이소 까지 그 멀고 먼 여정, 고생길, 열악한 뱃 事情, 중간에 바다에서 죽은 사람, 지쳐서 중간에 주저앉은 사람, 그러면서 1800명이 되려면 몇 명이 떠나, 몇 년이나 걸렸을까?
그리고 백제 사람들은 더 많이 건너 왔을 텐데 이들의 흔적은 왜 이 곳에는 없지?
이산가족 상봉의 여의도 모습을 상기하면서 그들이 도착한 항구의 모습을 가늠해 봤습니다.
그리고 잠을 청하면서 상상해 보았습니다. 나도 상황에 따라 여기에 머물러 살면 1300년 후 나의 일본인 후손들의 마음을 ? . . .
엊그제 만났던 재일 교포, 2차 대전 후 일본에 버려진 이 나라 사람들,
많은 사람이 일본 성으로 바꾸고 귀화하였는데, 차별이란 모든 차별을 버텨가며 자기는 끝까지 국적을 지키고 있다고 . . .
나라가 뭔데 . . . ? z z z . . .
이날 이후 나는 아마추어 역사가가 되었습니다.
오이소 관련하여 현장을 가보기도 하고, 문헌을 찾아보기도 하고, 인터넷 검색도 해보고 했습니다. 허지만 흔적만 보일 뿐 그리고 제 발목은 잡고 놓아주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찾은 기록과 추측을 적어보겠습니다.
당나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침공하던 때 불안한 백성들이 일본으로 이주가 시작됐고,
아마도 양 지역간 무역을 하던 상인들을 매개로 이루어졌으리라 추측이 되는 군요.
양 지역의 정부의 외교 차원에서 파견된 관리들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백제 사람들은 주로 오사카, 나라 근방에 집중적으로 거처를 정한 것 같고, 고구려 사람은 그곳에서 밀려 더 북쪽인 지금의 토오쿄 근방(關東)에 퍼져 살게 되었던거 같습니다.
이때가 660년에서 고구려 백제가 완전히 망한 670~680년대가 아닐까 추측 됩니다.
기록에는 고구려의 사신 二位玄武若光이 666년에 大和(야마도)정권의 수도 나라에 온 것으로 되어 있는데 二位玄武는 姓이 아니라 품계와 직위라 판단되며 이름은 若光으로 고구려의 왕족이라 하였으니 姓은 高씨가 되겠지요.
그는 사신으로 와서, 고구려가 망하면서 고국으로의 귀환은 무산되었고, 하여 고구려 유민이 많이 있다는 곳으로 온 곳이 오이소 입니다.
마침 중심축 없이 흐터져 있던 고구려계 유민들이 왕족인 若光을 중심으로 뭉치는 계기가 되었고
오오사카, 나라는 물론 관동지방에 흐터져 있던 고구려 유민들이 몰려들게 되지 않았나 추측됩니다.
그들이 갖고 있는 우수한 농토목 기술, 장사 수완 등으로 농지를 개간하고 시장을 크게 형성해가지 않았을까 추측되는 군요.
사람을 모으고 시장이 활성화 되면서 호객행위가 떠들썩했을 것으로 보아 오이소라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의문이 하나 생겼습니다.
高麗라 써놓고 읽기는 고마라고 합니다. 고마, 구마, 곰, 개마 많이 듣는 말 아닙니까. 단군신화 곰에서부터 곰나루의 웅진, 구마모토와 같은 곰과 관련된 일본의 수많은 지명, 전설, 이 퍼즐 조각들을 어떻게 꿰어 맞추어야 될지 . . . 커다란 숙제로 제게 밀려왔습니다.
(그걸 왜 내 숙제로 여겼지? 오지랍 넓게?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 . . 그러면서도 지금도 숙제라고 생각하고 있는거 같으니 . . . 주제넘게 . . . 아마 이 나라에 오래 살아서 생긴 풍토병 아닐까요? 건강보험 적용 않된다구요 . . . 할수 없죠.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 수밖에 . . . )
梁나라 사신 梁職貢圖의 귀국보고서에는 所治城固麻 라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城이 있어 통치를 하는 곳을 고마라고 하였던 거 같습니다. 일본에서는 駒, 貊도 고마로 읽습니다. 공주의 곰나루를 久麻那利로 표기한 곳도 있고요. 고구려는 高氏의 駒麗(고마) 나라라는 의미인거 아닌가요?.
若光王은 오이소에서 더 북쪽으로 이주하게 되어 그곳에 또 하나의 개척지를 열었는데
현 지명으로 高麗鄕(고마사토)입니다. 이때 1800여명이 이주한 것으로 나타났고,
아마도 오오이소에도 많은 사람이 남았겠지요. 그 주변에는 高麗驛(고마에키), 高麗川(고마가와), 高麗神社등 고구려의 흔적이 많습니다.
若光王은 이곳에 뿌리를 내린지 50년 후인 716년에 大和(야마토) 정부로부터 그 지역을 郡으로 승격받기에 이릅니다. 그는 製紙, 製鐵, 銅 생산을 열어 일본 關東지방의 큰 세력으로 등장하였던 것입니다.
이곳을 근원으로 하여 태어난 성씨는 高麗(고마), 貊(고구려 22대 안장왕 3대손),
新井, 吉川, 勝, 井上 . . . 등, 그리고 눈이 가는 성씨 高倉, 이 성씨의 시조는 광개토대왕의 5대손 背奈福德의 後裔 福信입니다.
高倉는 일본에서는 다카쿠라라 읽는데, 고쿠라 즉 고구려를 발음은 같게, 표기는 다르게 하여 성씨로 삼은 것이 아닌가 추측이 됩니다. 즉 고구려를 姓으로 삼은 일본의 성씨가 高倉 입니다.
견강부회라고요 . . . ? 제 몸안의 DNA 해석입니다.
이정도 정리하고 나니 그 전에 이상하다고 여겼던 것의 실마리가 若光王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궁금하다구요 ?
토오쿄오에 황궁이 있죠. 헤자로 둘러싸여 있는데 둘레길이 잘 되어 있습니다.
구경삼아 한바퀴 돌다보면 북쪽에 황궁으로 연결된 다리가 있고, 입구 문이 있는데
그 문의 현판이 高麗門입니다. 이 뜬금없이 제게 다가온 이 현판,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일까요? 한반도와 관련된 문구나 이야기는 지우고 훼손하고 그것도 驚氣 수준으로 . . .
명치유신 이후 高麗鄕 일대가 시로 승격할 때 高麗市로 하면 되는데,
高 앞에 日을 언져 日高市라고 하였던 그런 나라 사람들이 황궁의 후문 간판에
高麗를 왜 지우지 못했을까?
그리고 2017년 9월 20일 현 일본천황이 직접 高麗鄕을 방문한 이유?
그 실마리(머리)가 바로 고구려의 약광왕이었던 것입니다.
이제 高麗門은 외롭지 않습니다.
50주년 기념의해 2017 丁酉년이여 잘 가이소! 가기여! 가그레!
그리고 2018 戊戌년이여 어서 오이소! 오이소! 오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