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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대한 이해에 근거한 사회
[10] 신경윤리, 신경교육의 주제들
뇌과학을 통해 인간을 이해하고,
이 이해를 근거로 사회 시스템을 인간답게 바꿔갈 수도 있고,
뇌과학을 활용해서 각자가 더욱 치열하게 경쟁하며 사회 변화에 적응하게 할 수도 있다.
개인은 물론 자신의 행복을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사회의 존재 이유도 구성원들의 행복이다.
…
사회를 위해서 사람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사회가 존재한다.
뇌과학이 사람을 이용하고 고치는 데 쓰이기보다는,
인간을 이해하고, 인간다운 사회를 만드는 데 보탬이 되기를 바란다.
사람들은 경험을 통해 외부 세계를 내면화한 표상의 세계를 살아간다.
이는 특별한 경험 이후 행동이 달라진 경우에 확연히 드러난다.
예컨대 알파고와 이세돌의 경기 이후 많은 사람들이 인공지능에 관심을 가지고, 투자를 늘리는 등 이전
과는 다른 행동을 하게 되었다.
이는 대결이 있던 며칠 사이에 인공지능 기술(외부 세계)이 크게 발전했기 때문이 아니라, 대결을 보는
동안 인공지능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표상)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자신과 세상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이처럼 행동을 바꾸고, 인식의 변화가 여러 사람들에게서 일어나면
사회 제도와 풍습이 바뀐다.
과학의 모든 분야가 세상에 대한 인식을 바꿔가지만, 뇌과학은 인간의 마음에 대한 인식을 바꾼다는 점
에서 특별하다.
궁금하고 매혹적임에도 손에 잡히지 않는 마음과 달리, 물리적 토대를 가진 뇌에 대한 과학은 미더울
뿐만 아니라 흥미롭다.
‘내가/쟤가 저런 행동을 하는 건 혹시 이런 이유인걸까?’ 상상도 하게 되고,
‘현실 분야에 적용(translation)하면 어떨까’ 영감도 생기곤 한다.
그래서 신경경제학, 신경교육학, 신경법학, 신경마케팅, 신경미학 등 뇌과학과 관련된 분야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문제는 이토록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뇌과학이 과학적 발견과 현장을 구체적으로 연결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뇌과학자들은 현장에 대해 잘 모르거나, 현장 적용에 뛰어들 여력이 부족하고, 현장 전문가들은 뇌과학을
잘 모른다.
결국 왜곡된 뇌과학 지식이 확산되고, 잘못된 지식에 근거하여 의사결정을 내리는 일들이 생겨났다.[1]
뇌과학이 흥미로운 만큼 뇌과학에 관한 현혹과 위협이 범람했고, 악용될 여지도 컸다.
그래서 2002년경 신경윤리학(neuroethics)이라는 분야가 등장했다.[2][3]
신경윤리학에서는 뇌과학이 사회에 적용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각종 법적, 윤리적, 사회적 문제를 고찰
한다.
주제가 다양한 만큼 뇌과학자, 법률가, 철학자, 의사, 환자 가족, 과학 기자, 정책가 등 다양한 사람들이
신경윤리학 연구에 참여한다.
우리나라에서 자주 등장하는 신경윤리학 주제들을 살펴보자.
신경교육 (1): 아동기 뇌 발달
뇌는 환경적, 경험적, 생리적 변화에 따라 구조와 기능을 변화시키는 특성(가소성)을 평생 유지한다.
하지만 발달 중인 뇌의 가소성은 성인 뇌의 가소성보다 훨씬 크며, 발달 단계별로 경험할 것으로 기대
되는 자극들을 충분히 경험해야 잘 발달할 수 있다.[4]
예컨대 시각 뇌가 발달하는 시기인 생애 초기에 아기 고양이의 눈을 가려 시각 경험을 차단하면,
나중에 눈 가리개를 풀어도 고양이는 한동안 세상을 보지 못한다.
이처럼 특정 종류의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관련된 뇌 부위들이 발달하는 기간을 민감한 시기
(sensitive period)라고 부른다.
민감한 시기가 지나면 관련된 뇌 부위들의 가소성이 크게 감소하므로 발달 단계별로 필요한 자극들을
충분히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컨대 아동기에는 부모의 관심과 반응이 중요하다.[5][6]
만 4세 무렵의 아동에게 부모가 적절히 반응해주지 않으면 서술 기억(지식이나 경험처럼 의식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기억)과 해마의 발달이 저해된다고 한다.
부모의 반응성은 10여년 뒤까지 영향을 미쳐서, 부모의 적절한 반응이 부족했던 아동들은 청소년기에
사회적인 스트레스에 대한 호르몬 반응이 둔감한 경향을 보인다고 한다.
이 나이 또래 아동들에게는 장난감과 읽을 거리에 대한 접근성 같은 인지적인 자극도 중요하다.[6]
이런 자극이 부족한 환경에서 자란 아동들은 청소년기가 되었을 때 낮은 언어 능력과 작업 기억 능력을
보인다.
반대로 저소득층 아동들에게 인지 자극이 될만한 놀잇감들을 제공했더니 자존감이 향상되고, 폭력성이
낮아졌으며, 학업성취도가 높아졌다고 한다.
이 효과는 성인기에까지 이어져서 이 아동들은 비슷한 조건의 다른 아동들에 비해 소득과 학력이 높았고
범죄로 인한 수감률도 낮았다.
뇌 발달에 대한 이런 사실들은 사회 보장 제도에서 저소득층 아동들을 어떻게 지원하면 큰 효과를 발휘
할지 힌트를 제공한다.
또 부모가 자녀들에게 적절하게 반응할 수 있게 안내하고, 자녀들과 함께 할 정신적,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는 것이 중요함을 시사한다.[7]
신경교육 (2): 청소년기의 뇌 발달
청소년기에는 동년배들간의 사회적인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사회성에 관련된 뇌 부위들이 발달한다
(아래 그림).
청소년기에는 이들 영역에서 시냅스 가지치기와 수초화 작업이 활발히 일어난다.[8][9]
시냅스는 신경세포들 간에 신호를 주고받는 접속 부분인데 시냅스 가지치기는 잘 사용하지 않는 시냅스를
없애버리는 과정을 뜻한다.
신경세포의 축색돌기를 전선의 피복처럼 감싸서 전기 신호의 전달 속도와 효율을 높여주는 부분을 수초
라고 하며, 축색돌기를 수초로 감싸는 과정을 수초화라고 한다.
» [그림] 청소년기의 뇌 발달. A: 후부 상측두 고랑 (posterior superior temporal sulcus; pSTS)은 사회적인 제스처를 이해하는 데, 측두엽-두정엽 연접부위(temporoparietal junction; TPJ) 는 타인의 마음을 유추하는 데, 등안쪽 전전두엽(dorsomedial prefrontal cortex; dmPFC)은 자신과 타인의 성격 특성을 살펴 타인의 마음을 유추하는 데 관련된다고 한다. 또, 전측두피질 (anterior temporal cortex; ATC) 은 감정과 사회적 기억의 통합에, 하측두이랑(inferior frontal gyrus; IFG)은 사회적인 상황의 이해에 관련된다고 한다. 청소년기에는 이 영역들에서 시냅스 가지치기와 수초화가 활발히 일어나서, 이 영역들의 회백질(신경세포가 밀집한 부분)은 감소하는 반면, 백색질(수초로 둘러싸인 축색돌기가 밀집한 부분. 지방질인 수초가 흰색)은 증가한다. 출처/ slideshare.net. B: 녹색 신경세포와 파란색 신경세포 사이의 시냅스가 흰 숫자로 표시되었다. 녹색 신경세포에서 파란색 신경세포와 시냅스를 형성하는 스파인을 노랗게 표시했다. 사용하지 않는 스파인을 제거함으로써 시냅스 가지치기가 일어난다. 출처/ conte.harvard.edu. C: 축색돌기를 감싼 수초. 출처/ keywordsuggest.org.
청소년기에는 개별 부위들의 발달만이 아니라 이 부위들 간의 연결 정도도 변하며, 청소년들은 아동이나
성인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 부위들을 활용한다.[10]
예컨대 감정적인 얼굴 표정 (슬픔, 행복, 화남 등)을 볼 때, 청소년들은 주의 집중과 감정에 관련된 영역인
편도체와 기억에 관련된 영역인 해마, 그리고 감정과 사회적 기억의 통합에 관여하는 영역인 전측두피질
(ATC)를 성인보다 더 많이 사용한다고 한다 (위 그림 A).
청소년기는 굴러가는 말똥만 봐도 까르르 넘어간다는 밝은 시기이기도 하지만, 예민한 만큼 충동적이고
서툰 시기이기도 하다.[4]
사춘기 청소년들은 사회적, 정서적 자극에 노출되면 감정 조절을 어려워 한다.
또 청소년들은 아동과 성인에 비해 공포의 소거(fear extinction)를 못한다.
공포의 소거란 예전에는 위험했던 자극이 이제는 안전함을 학습하는 과정인데, 소거가 잘 되지 않으면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PTSD)이나 불안에 시달리게 된다.
또 동년배들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9][10]
사회적인 배척을 경험할 때, 만 11세에서 16세 사이의 청소년들은 성인과 아동에 비해 더 큰 고통을
느낀다고 한다.
또한 동료들로부터 사회적인 배척을 경험하고 나면, 이 동료들이 옆에 있을 때 위험을 감수하는 행동이
늘어난다.[11]
이런 행동은 청소년기에 발달하는 사회적인 뇌 영역중의 하나인 오른쪽 측두엽-두정엽 연접부위(TPJ)의
높은 활동성과 관련이 있다 (위 그림 A).
동년배들의 평가, 사회적인 배척과 보상,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청소년기의 특징들 덕분에 청소년기
에는 타인의 관점, 의도, 감정을 알아차리는 능력과 사회성이 크게 발달한다.
그런데 사회성을 발달시키는 바로 이 특징들이 청소년들을 우울과 불안에 취약하게 만들기도 한다.
연구에 따르면 사회 불안 장애(social anxiety disorder)의 50%가 만 13세 이전에, 90%가 만 23세 이전에 시작된다고 한다.[10]
청소년기 발달 특성에 대한 이해는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 복지 정책에 중요한 참고가 될 수 있다.[9]
신경교육 (3): 왜곡과 확대해석의 위험
최신 뇌과학에 근거했다는 교육 상품은 듣는 사람을 혹하게 하지만, 이런 상품들이 과학적으로 검증된
경우는 아직 드물다.[12]
잘못된 정보가 과학적 사실인양 돌아다니는 경우도 많다.[13][14]
예컨대, “천재는 뇌 전체를 사용하지만 일반인들은 뇌의 10%만 사용한다”는 사실이 아니다.
여러 부위들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뇌의 구조상 10%만 사용하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문장은 뇌를 많이 쓸수록 좋다는 판단에 근거하고 있는데, 간질 발작은 뇌 활동이 지나치게
많을 때 일어난다.
그런데 잘못된 지식을 바로잡기엔 비전공자들이 뇌과학 전문 자료에 접근하기가 어렵다.[14]
과학 저널들은 비싼 구독료를 내야만 볼 수 있고, 대개는 외국어로 되어 있으며, 전문 지식이 없이는
해석도 어렵다.
일상적인 용어가 뇌과학에서 다르게 쓰이기도 한다.[14][15]
예컨대, 흔히 ‘동기를 부여한다’고 할 때의 동기(motivation)는 입시처럼 장기적인 목표를 위해서 노력
하는 의욕을 뜻한다.
하지만 뇌과학에서 동기는 즉각적인 행동의 유발을 뜻한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에 가지고 있던 바람, 불안, 편견이 결합하면 단편적인 뇌과학 지식이 단정적으로
확대 해석될 수 있다.[14]
예를 들어, 앞에서 저소득층 아동들에게 인지자극이 될 만한 놀잇감을 제공했더니 성적이 높아졌다고
했지만, 이것이 이미 놀잇감이 충분한 아이들에게 놀잇감을 더 사준다고 성적이 오른다는 뜻은 아니다.
외국어 조기교육 열풍도 언어의 민감한 시기에 대한 확대 해석 탓이 적지 않다.[16]
하나부터 열까지 다 챙겨줘야 했던 아동들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이면 제법 많은 것을 스스로 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되기까지 미운 7살 등 각기 다른 특징을 보이는 시기들을 지난다.
그런데도 언어에만 민감한 시기가 있을까?
연령대별로 여러 종류의 민감한 시기가 겹쳐서 진행되는데도[4][17] 외국어 등 몇 개의 영역에만 편중된,
그것도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 교육을 시키면 다른 민감한 시기들의 진행을 방해하지 않을까?
앞에서 청소년기가 사회성과 정서 발달에 중요하다고 했지만, 청소년기가 사회성과 정서 발달에만 중요
하다는 뜻은 아니다.
청소년기 이외의 시기들이 사회성과 정서 발달에 중요하지 않다는 뜻 또한 아니다.
그러므로 사회성과 정서 발달에만 치중한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면, 청소년기에 진행되는 우리가 아직
모르는 민감한 시기들의 진행을 방해할 수 있다.
자연스레 두면 배울 것을 더 잘해주려다가 방해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복잡한 지식을 단순화시켜 기억하려고 한다.
나도 다른 분야의 전공자가 구구절절 이야기하는 걸 듣고 있으면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고, 결론이 뭔지,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지부터 궁금해지곤 한다.
하지만 “그래서 결국 이렇다는 거냐”라고 극도로 단순화시킨 문장을 가지고 내 확인을 요청할 때면
등골이 서늘해진다.
편견이나 바람에 과학적 근거까지 있다고 믿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15]
전문가들도 비전문가들과 소통하는 연습이 필요하지만(정말 쉽지 않다[18]), 비전문가들도 쉽게 배워서
간단명확한 결론을 내려는 태도를 고쳐야 한다.
어떤 분야든 사람들이 복잡하게 공부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고, 지나치게 단순화된 단정적인 지식은
나에게도 해로울 수 있다.
신경교육 (4): 변화
뇌과학으로 교육을 개선하려는 조심스러운 시도는 이미 일어나고 있다.[19]
예컨대 미국에서는 청소년들이 수면 부족에 시달린다는 보고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20]
원인을 조사한 결과, 사춘기 청소년들의 하루 생체 리듬은 정상인보다 1-3시간씩 늦다는 사실이 발견됐다. 이 현상은 여러 문화권과 여러 생물종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또, 사춘기가 1-2년 일찍 시작되는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1-2년 일찍 하루 생체 리듬이 늦어지는 것으로
드러났다.
수면 부족은 정보 수행 능력과 기억력, 의욕을 감소시키고 짜증과 우울감을 유발한다.
수면의 중요성을 고려한 일부 고등학교에서는 등교 시간을 7시 15분에서 8시 40분으로 늦춘 뒤 1만 2000명의 학생을 4년간 관찰했다.[21]
연구에 따르면, 수업 중 수면, 피로와 우울감이 감소하고 출석률과 성적, 의욕이 높아졌다고 한다.
뇌에 대한 지식은 교사들이 학생들을 지도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발달 과정에 대한 이해는 학생들에게 연령대에 맞는 기대를 갖고 대하도록 해주고, 학부모들과 대화할 때도 도움이 된다고 한다.
자폐증이나 난독증 같은 질환에 대한 이해는 질환을 가진 학생들을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참고가 되며,
가소성에 대한 이해는 학생들의 변화를 믿고 기다릴 수 있게 돕는다.
또한 뇌과학에 근거했다는 상품을 접할 때 지침이 된다고 한다.[22]
교육 현장에서 어떤 뇌과학 지식이 필요한지, 어떤 뇌과학 지식이 왜곡되었는지는 뇌과학자와 현장 교육
자들이 교류해야만 알 수 있다.
나아가 교육 현장의 필요와 뇌과학 지식을 접목하여 교육 프로그램을 개선하려면, 앞의 등교 시간 사례
처럼 뇌과학자와 교육 전문가들이 단계별로 조목조목 연구해가는 과정이 필요하다.[23]
국가에서 표준 교과 과정을 전국에 보급하던 시절에는 이 표준을 따르기만 하면 됐다.
하지만 인공지능의 도입으로 직업 시장이 요동치고, 사회 변화와 기술 발전에 힘입어 곳곳에서 다양한
교육 실험이 일어나면, 신경교육의 현장적용 (translation)은 점점 더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다.
다양한 교육 상품들 속에서 우왕좌왕하지 않으려면 교육 소비자들도 끊임없이 공부해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경쟁사회와 뇌 (1): 기능 증진의 효과와 부작용
‘집중력이 더 좋아지면 좋겠다.
잠을 적게 자도 되면 얼마나 좋을까?’
경쟁에 치이는 바쁜 현대인들이라면 한번쯤 이런 상상을 해 봤을 것이다.
요즘은 아이들조차 경쟁에 내몰려서, 주의력 결핍 과잉 행동장애(ADHD)가 아닌데도 ADHD 진단을
받고 약을 먹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런데 ADHD 환자가 아니어도 ADHD 약이 집중력을 높여줄까?
ADHD 진단은 전 세계적으로 급증해서 미국에서는 만 4세에서 17세의 11%가 ADHD 진단을 받았다고
한다.[24]
그러나 ADHD 약을 먹고 잠잠해지더라도 성적 상승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으며(무엇에 집중할지는 아이
에게 달렸기에), 성적이 오르더라도 일시적이었다고 한다.
ADHD 약을 복용한 경우와 복용하지 않은 만 7-10세 아동들의 3년 뒤와 8년 뒤를 비교해보면 성적과
사회 적응성에 차이가 없었다.
성인의 경우에도 ADHD 약은 집중력이 향상되었다는 느낌을 줄 뿐, 실제로 인지 수행력을 개선하지는
않으며 작업의 종류에 따라서는 방해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
해외 출장과 밤샘 근무가 잦아지면서, 기면증 환자들이 먹는 약을 일반인들이 복용하는 경우도 늘어났다.
[3]
우울증 약으로 쓰이는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SSRI)를 부정적인 감정을 줄이고 자신감을 얻을
목적으로 비타민처럼 복용하는 경우도 생겼다.
최근에는 뇌기능 증진을 위해서 뇌에 직접 전기자극을 주기도 한다고 한다
(예: 경두개 직류전기자극; tDCS).[25]
하지만 건강한 사람들이 질병 치료를 위한 약물(또는 치료법)을 기능 증진(enhancement) 목적으로 장기간 복용하면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예컨대, ADHD 계열의 약물은 중독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감정기복, 수면 장애, 식욕 감퇴, 심박수 증가와
같은 부작용이 따른다.[23]
발달 중인 뇌가 신경 계통에 작용하는 약물을 장기 복용했을 때의 부작용도 무시할 수 없다.
더욱이 부작용이 밝혀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곤 한다.
벤조다이아제핀 계열의 약물은 어머니들의 작은 도우미(Mother’s little helper)라고 불리며 1960-80년
대에 큰 인기를 누렸는데, 2000년대 들어서야 중독의 위험성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경쟁사회와 뇌 (2): 증진은 정말 증진일까?
경쟁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은 약의 부작용을 감수해서라도 눈앞의 경쟁에서 이기고 싶은 욕구에 흔들릴
수 있다.
설혹 약을 먹기 싫더라도, 주변 사람들이 약을 먹으면 나도 먹어야 할 것 같은 부담을 느낄 수 있다.
실제로 영국의 학부모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 대부분의 학부모들은 자녀에게 ADHD 약을 먹이기를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같은 반의 다른 학생들이 약을 먹는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다시 물었더니 ‘그렇다면 나도 먹이
겠다’라고 응답했다.
고용주나 고객의 압박도 있을 수 있다.
예컨대 수면이 부족한 외과 의사들에게 기면증 약을 먹였더니, 약을 먹지 않은 경우에 비해 머리가 맑았
으며, 기면증 약은 카페인처럼 손떨림 부작용도 적다고 한다.[26]
당신이 환자 가족이나 병원장이라면 의사에게 기면증 약을 먹어달라는 직간접적인 요구를 하지 않겠는가?
근무 환경 개선이나 사회 복지 향상처럼 근본적인 해결에 힘쓰는 대신 약을 주어 값싸게 해결하려고 하게
되지는 않을까?[27]
경쟁에 치이다 보면 사람과 인생을 생산과 성취의 수단처럼 여기기 쉽다.
경쟁이 없을 수야 없겠지만, 자기 자신이나 생명처럼 소중한 것을 약과 기술로 뜯어고치기 전에 성취와
효율을 재는 잣대가 진짜인지부터 확인해야 하지 않을까.
예컨대 잠자는 시간은 아깝게 여겨지곤 하지만 수면에는 중요한 기능이 있다.[28]
외부 정보가 들어오지 않는 수면 중에는, 새로운 기억이 기존의 기억과 통합되고 시냅스들을 재정비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된다.
수면이 시냅스의 가소성(학습과 기억에 꼭 필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학습량이 많은 아동기와
청소년기에는 수면량이 많다고 한다.
수면은 주의 집중과도 깊은 관계가 있어서, 주의 집중은 수면과 함께 진화했으리라는 추론까지 제시되고
있다.[29]
수면을 비롯한 뇌의 기능, 뇌의 발달 과정은 아직도 미지의 영역이다. 당장 눈앞의 문제만 보았을 때 효율
적인 것이 범위를 넓혀 보았을 때도 효율적일지, 뇌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알게 된 다음에도 지금 생각
하는 증진이 진짜 증진일지는 따져봐야 할 일이다.
인간을 위하는 사회
뇌과학을 통해 인간을 이해하고, 이 이해를 근거로 사회 시스템을 인간답게 바꿔갈 수도 있고, 뇌과학을
활용해서 각자가 더욱 치열하게 경쟁하며 사회 변화에 적응하게 할 수도 있다.
개인은 물론 자신의 행복을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사회의 존재 이유도 구성원들의 행복이다.
루이스 캐럴의 소설에 나오는 붉은 여왕처럼 각자 죽어라 뛰어야 한다면 뭐하러 모여서 살겠나.
사회에 맞춰 사람을 바꿀 게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이해에 근거한 인간다운 사회가 되도록 사회도 바꿔
가야 하지 않을까.
이와 관련된 사례가 있다.
응급실에서 대기 중이던 환자들이 폭력을 휘두르는 일이 잦아진다면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까?
응급실 폭력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고, CCTV와 보안 요원을 추가 배치하면 될까?
폭력 성향이 짙어 보이는 이들을 별도로 관리하는 건 어떨까?
영국에서는 조금 다른 접근을 취했다.[30]
먼저 사람들이 어떤 때 왜 폭력적으로 변하는지를 조사했다.
조사를 통해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른 채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던 환자들이 불안한 나머지
분노를 터트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안내 모니터와 팸플릿으로 환자들에게 진행 상황을 실시간으로
알려주었다.
그 결과 폭력 빈도가 50%까지 줄었고, 폭력으로 인한 비용 부담도 극적으로 감소했다.
사람을 이해하여 문제를 재구성하고, 그에 맞춰 시스템을 수정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사회를 위해서 사람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사회가 존재한다.
뇌과학이 사람을 이용하고 고치는 데 쓰이기보다는, 인간을 이해하고, 인간다운 사회를 만드는 데 보탬이
되기를 바란다.
[출처와 각주]
[1] Is misused neuroscience defining early years and child protection policy?
(The Guardian 2014.04.26)
2014년 영국에서는 생애 첫 3년이 뇌를 결정한다는 믿음에 근거하여 입양 절차에 26주라는 시간 제한을
두는 법이 발효되었다.
이 과정에서 어떤 증거가 언론과 의회에서 사용되었는가, 뇌과학에 대한 어떤 오해가 어떻게 작용할 수
있는가를 두고 논의가 있었다.
[2] 신경인문학 연구회. 뇌과학, 경계를 넘다. 바다출판사 (2012).
[3] Farah MJ (2012) Neuroethics: the ethical, legal, and societal impact of neuroscience.
Annu Rev Psychol. 63:571-91.
[4] Fuhrmann D et al. (2015) Adolescence as a Sensitive Period of Brain Development.
Trends Cogn Sci. 19:558-66.
[5] Farah MJ et al. (2008) Environmental stimulation, parental nurturance and cognitive
development in humans. Dev Sci. 11:793-801.
[6] Hackman DA et al. (2010) Socioeconomic status and the brain:
mechanistic insights from human and animal research. Nat Rev Neurosci. 11:651-9.
[7] 그외에 음악 교육은 언어 능력과 운동 능력을 향상시키고, 신체 운동은 정신 건강과 뇌 발달을 돕는
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또 과도한 스트레스는 학생들의 집중을 방해해서 학습 능률을 떨어뜨린다고 한다.
이런 사실들은 입시 위주의 과목에만 치중하여 운동과 음악 등의 과목을 등한시하고, 학생들을 지나친
경쟁과 불안 속에 몰아넣는 것이 공부에 방해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8] Paus T et al. (2008) Why do many psychiatric disorders emerge during adolescence?
Nat Rev Neurosci. 9:947-57.
[9] Blakemore SJ & Mills KL (2014) Is adolescence a sensitive period for sociocultural
processing? Annu Rev Psychol. 65:187-207.
[10] Kilford EJ et al. (2016) The development of social cognition in adolescence:
An integrated perspective. Neurosci Biobehav Rev. 70:106-120.
[11] 실험적으로 사회적인 배척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는 Cyber ball 실험이 사용되곤 한다.
Cyber ball 실험에서는 피험자가 다른 두 명의 피험자(실제로는 컴퓨터 프로그램이거나 실험자)와 모니터
상에서 공을 주고받는 놀이를 한다.
이때 다른 두명의 (가상) 피험자들끼리만 공을 주고 받음으로써, 피험자가 사회적인 배척을 느끼게 한다.
간혹 학교 폭력과 왕따에 시달리던 중고등학생이 자살을 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접한다.
어른들 눈에는 청소년들이 미숙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비춰질 수 있지만, 청소년들에게는 동년
배들의 배척이 자살을 선택할만큼 심각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12] Kathryn HP & John TB (2007) The Brain/Education Barrier. Science. 317:1293.
[13] O‘Connor C et al. (2012) Neuroscience in the public sphere. Neuron. 74:220-6.
[14] Howard-Jones PA (2014) Neuroscience and education: myths and mess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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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캐럴 리브스. 과학의 언어: 어떻게 과학을 제대로 이해하고 비평하고 향유할 것인가. 궁리 (2010).
[16] 민감한 시기의 예전 표현을 사용한, “언어의 결정적 시기”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17] Nelson EE et al. (2014) Growing pains and pleasures: how emotional learning guid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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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과학자의 커뮤니케이션과 매사페, http://goo.gl/g2eM6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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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교육 현장에서 중요한 문제들은 뇌과학에서 중요한 문제들과 다르다.
따라서 교육 현장과 접목한 연구 성과는 뇌과학 분야의 주요 저널에 실리기 어렵고, 뇌과학자들의 실적
평가에 반영되기도 어렵다.
이래서야 뇌과학자들이 협력 연구에 참여하도록 유도하기가 어렵다.
대학원에서 실험과 연구 진행을 훈련받은 교사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점은 신경교육 분야의 발전에 긍정
적이지만, 입시 위주의 교육 체제에서는 선생님들도 행동 반경이 좁을 수 밖에 없지 않을까.
The Royal Society (2011) Brain Waves Module 2: Neuroscience: i
mplications for education and lifelong lear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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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Modafinil has mixed effects on dozy surgeons. (Reuters 2011.11.02).
[27] Dance A (2016) A dose of intelligence. Nature 531:S2-3.
본문에서는 논의되지 않았지만 기능 증진 목적의 약물 복용은 공정성 문제도 초래한다.
그래서 2015년 프로 비디오 게임 대회에서는 스포츠 경기에서처럼 도핑 테스트를 통해서 약물 복용의
여부를 검사하였다.
ADHD 약을 비롯한 약물들의 정상인에서의 기능 증진 효과는 불분명하지만, 효과가 더 좋은 수단이
빈부격차를 더욱 심화시킬 것이라는 우려도 돌고 있다.
[28] Tononi G & Cirelli C (2014) Sleep and the price of plasticity: from synaptic and cellular
homeostasis to memory consolidation and integration. Neuron. 81:12-34.
[29] Kirszenblat L & van Swinderen B (2015) The Yin and Yang of Sleep and Atten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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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2898&contents_id=87935
(손민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