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록 제11권 6장
초기 단계의 연극은 비극(悲劇)이었다. 비극은 우리에게 어떻게 그러한 일들이 자연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가를 상기시켜 주는 인생의 흥망성쇠(비극)를 보여 준다. 그러나 우리는 연극의 무대에서 어떤 기쁨을 맛본다. 따라서 무대에서 보았을 때 기쁨을 준 것이 더 넓은 무대(인생)에서 실제로 일어났다고 해서 괴로워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네가 감상했던 연극배우들을 보라. 그들은 피할 수 없는 비극적 숙명을 타고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의 운명을 견디지 않느냐? 심지어 괴로움에 가득찬 <오, 키타에론이여!>라는 탄식이 터져 나올 때조차도 그것을 참고 견딘다. 더욱이 비극 작가들의 작품에는 여기저기 유익한 격언이 많이 발견된다. 몇 가지 예를 든다면 하늘이 나와 나의 두 아이를 돌보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또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너의 영혼을 괴롭히지 말라. 또는 곡식이 익으면 거두어들이듯 우리의 삶을 거두어들어야 한다.
이와 같은 격언은 얼마든지 있다. 비극 시대가 지나고 초기 희극(Old Comedy) 시대가 왔다. 희극(喜劇)은 마치 교장선생님처럼 사정없이 말을 막 했지만, 오히려 그 솔직함 때문에 사회를 풍자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같은 목적 때문에 디오게네스도 어느 정도 희극을 모방했다.) 그러나 중기 희극(Middle Comedy)과 마지막으로 후기 희극(New Comedy)을 보라. 그들은 얼마나 보잘 것 없었는가? 그들은 얼마 가지 않아 무언극(Mime)의 단순한 모방으로 타락하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이들 중기와 후기의 희곡 작가들은 표현할 좋은 대상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연출은 얼마나 초라하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