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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할렐루야 거룩한 주님의 날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저와 여러분들의 삶의 형편 속에 일하시는 하나님의 큰 은혜가 날마다 넘쳐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앞뒤 좌우 계신 분들과 사랑의 고백, 축복의 인사 나눕니다.
주님 안에서 사랑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한 나무꾼이 있었습니다. 이 나뭇꾼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명확하지 나무를 열심히 배는 겁니다. 열심히 배서 많이 배는 만큼 그의 삶은 넉넉해지는 것이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쉴 사이 없이 계속해서 톱질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무는 점점 잘 베어지지 않는 거예요. 왜요? 말이 점점 무뎌지니까 내어지지 않으니까 어떻게 됩니까? 몸이 점점 지쳐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명은 나무를 베는 것이기 때문에 열심히 하루하루 고된 몸을 이끌고 나아가 나무를 베는 거예요.
어느 날 지나가던 현인이 그를 보고 묻습니다.
왜 그렇게 힘들게 나무를 베십니까?
나무꾼이 대답하죠.
먹고 살기 위해서 제가 아침부터 저녁 늦은 시간까지 나무를 베야 합니다. 그런데 이 도끼가 무뎌져서 잘 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더 힘들고 더 힘을 써야만 하고, 그러다 보니 점점 지쳐갑니다.
그러자 이성인이 말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왜 도끼를 갈지 않습니까?
내가 지금 이 도끼질 하기도 바쁜데 언제 이것을 갈고 있습니까?
그러자 말합니다.
바로 그게 문제입니다. 도끼를 가는 시간은 낭비의 시간이 아닙니다. 도끼가 날카로워지면 훨씬 더 수월하게 일하게 될 것입니다.
나무꾼은 그제서야 깨닫게 된 것이죠. 그래서 시간을 두고 걷기를 날카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잠시 멈췄던 그 시간을 다시 도Rl질로 나아가게 된 것이죠. 놀랍게도 날카로운 날로 인해서 나무는 쉽게 베어지고 예전보다 더 적은 힘을 들여서 더 많은 나무를 베었다.
이 이야기는 사실 많은 사람들이 잘 아는 이야기죠.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쉼없이 달려가는 인생, 끝없는 업무, 과중한 책임, 마음에 짊어진 짐 불안 더 많이 성취해야 되고 더 잘 살기 위해서 열심히 일해야 되는 우리의 인생. 어쩌면 일 중독에 빠져서 쉼 없이 살아가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애쓰고 또 애쓰죠. 위로해 보겠다고 시간들을 투자하고 또 나를 위해서 여러 가지 개발하겠다고 투자하지만 여전히 지쳐가는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럴수록 우리의 영혼은 지쳐가고 마음은 점점 무뎌져 가는 것이죠.
여러분 하나님께서 거룩한 주의 날을 주신 것은 우리의 일상이 무뎌지지 않도록 쉼이라는 것을 통해서 그동안 무뎌져 있던 칼을 가는 시간이 바로 주의 날, 거룩한 하나님의 시간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이 쉼이야말로 다시금 재충전해서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놀라운 은혜의 시간. 따라서 예수님이 주시는 이 쉼이라는 것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는 시간이며 우리의 영혼을 회복시키는 시간이고 누려진 삶의 날을 다시 날카롭게 만들어 가는 참된 쉼의 시간이라는 거예요.
오늘 이 시간, 지난주에 이어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된 쉼에 대해서 조금 더 깊이 묵상하려고 하는데, 이 말씀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들의 지친 마음이 위로가 되어지고 영원히 새로워지는 은총이 있어서 주님 안에서 한 주간도 믿음으로 승리하며 살아가는 존귀하신 성도님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렇다면 참된 쉼을 얻으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라는 거죠. 먼저 오늘 29절을 보시면 그리하면 쉼을 얻으리라 말씀하면서 앞서 어떻게 해야 쉼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두 개의 단어로 제시해 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29절 말씀을 함께 읽어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여러분 이 구절에 예수님께서 두 가지 동사를 제시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보이십니까? 예수님께서 이것 이것이라고 말하면서 두 가지 동사를 제시해 줬어요.
첫째는 메고 나는 메라는 동사, 두 번째는 배우라라는 거 오늘은 이 두 단어 중에서 메라라는 이 단어를 함께 묵상하면서 참된 쉼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매야 되는지 함께 말씀을 묵상해 보려고 합니다.
여러분 참된 쉼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내야 하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명예를 ap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죠. 멍에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원래 소나 짐승이 짐을 나를 때 목에 매는 도구가 멍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기본적으로 단어가 주는 느낌이 어떻습니까? 가볍게 느껴지지 않아요. 단어 자체의 느낌이 벌써 힘들고 지칩니다.
그렇죠 멍에라는 그 단어가 우리를 전혀 가볍게 해주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매우 역설적으로 멍에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쉽고 가볍다는 단어를 제시했다는 거죠. 여기에 놀라움이 있는데 우리가 느끼기에는 멍에라는 것이 무겁게 느껴지는데 예수님은 그 멍예라는 말씀을 이어하시면서 쉽다 가볍다는 것을 제시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멍에에 대해서 그래서 잘 깨닫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여러분 멍에라는 것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성경에서 멍에는 종종 삶의 짐 또는 율법의 요구를 이야기할 수가 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 종교 지도자들은 사람들에게 아주 무거운 율법을 지워줬다는 거 그래서 율법이라는 멍에를 가지고 살아간 거죠. 모세 오경이 율법이잖아요. 이 모세 오경을 쭉 훑어보니까 613개의 명령이 있더라는 거예요. 613개. 그런데 이 계명을 잘 구분해 보니까 365개의 금지 명령이 있고요. 그러면 나머지는 몇 개겠어요? 248개 긍정 명령이 있더라. 그래서 365개는 야 우리 하루에 하나씩 하지 말아야 될 것이 있나 보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248개는 이런 이야기들이 있었어요.
사람의 뼈가 248개인데 그것과 연결해서 그렇게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중요한 건 이것을 해석해 내는 이유가 율법을 사람들에게 지키게 하려고 애쓰는 작업이었다라는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 이 모세 5경에 613개의 명령이 있음 이것이 이들에게는 짐이 되어 버린다. 또한 세세한 규칙과 전통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옭아매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탈무드라는 이야기 들어봤죠 책 이름 미슈나라는 것이 있어요. 이런 데 보면 여기에는 구전이죠. 이 율법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세세한 규칙들을 주는 거예요. 일상 속에서 율법을 잘 지킬 수 있도록 또 다른 규칙을 만드는 거예요.
예를 들면 십계명이 있잖아요. 그중에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이 계명을 잘 지키기 위해서는 첫 번째 두 번째 해 세 번째 39번째 를 잘 해야 된다는 세부 규칙을 넣어놓은 것이죠. 이 중에 몇 가지를 소개해 드리면 걷는 거리의 제한이 있었어요. 안식일을 잘 지키기 위해서는 일하면 되지 않는다. 일하면 안 된다. 그래서 걷는 것도 제한이 있었는데 2천 규빗 이상 걷지 말아라. 즉 1km 이상 걸으면 안돼 그들의 삶의 방식입니다.
또 불을 피우는 것도 금지 사항이었습니다. 그런데 불하면 그냥 우리가 피우는 불도 생각하지만 전기도 키고 끄지 못하도록 그것도 일이다. 그래서 들어보셨겠지만 이스라엘에 가면 엘리베이터가 두 종류가 있습니다. 우리가 누르는 것도 있지만 안식일에는 누를 수가 없어요. 그래서 매 층마다 씁니다. 층마다 서서 사람들이 타고 내리는 세부 규칙으로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만드는 거죠.
음식 준비도 못하게 했어요. 그래서 여러분 안식일 전날에 사람들이 식탁을 다 준비하잖아요. 이런 것들이 39가지 한 계명에만 그렇게 쭈르륵 연결되니까 얼마나 삶이 피곤합니까? 그걸 다 지키고 살려고 하니까 여러분 아마 이런 영향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과거에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요.
보수적인 교단은 주일날 돈 쓰지 말라고 그랬어요. 돈 쓰지 말라 어디 주일날 함부로 돈을 쓰느냐 그래서 교회 주변에 가게 식당들이 잘 안 됐어요.
그런데 요즘은 주일날 이곳저곳에서 열심히 교제하고 나누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것도 율법주의적인 그런 생각들이 있었던 것이죠. 그러니 여러분 하나에만 이렇게 39가지가 나오니까 얼마나 많을까 수백 가지의 그런 규칙들이 삶의 어려움을 가져다주는 그런 목록들이 제시가 되는 것이죠.
반면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무거운 짐 진 자들을 향해서 수고하고 무거운 그 짐 진 자들아 내게로 와라 내가 쉬게 하겠다고 하면서 나의 멍에를 메라 그렇게 말씀하잖아요. 나의 멍에는 쉽고 가볍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이것은 어쩌면 예수님께서 율법주의적 부담이 아니라 은혜와 사랑으로 주어지는 멍에임을 가르치기 위함이었죠.
은혜와 사랑 이 은혜와 사랑은 조금 후에 다시 집중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너희가 메고 있는 그 율법주의적 삶은 굉장히 무거운 것이니 나에게로 오면 은혜와 사랑이라는 새로운 가벼운 멍에를 너희에게 주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멍에를 메는 것은 내가 지고 있는 짐의 새로운 짐을 추가하는 것이 아닙니다.짐을 교체하는 것으로 즉 그 짐의 성격이 달라진다는 거예요.
여러분 짐의 성격이 달라지는 이 차원을 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힘, 우리의 공로로 쌓였던 이 멍에를 벗어버리고 은혜와 사랑 안에서 가벼운 짐을 메라는 요구인 거죠. 따라서 여러분 내가 예수를 잘 믿는 것 같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것 같다고 느껴진다면 먼저 생각해야 될 것. 내가 과연 내가 그동안 짊어지고 있던 짐을 내려놓았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죠. 잘 생각해 보십시오. 내려놓아야 할 것을 내려놓지 않은 채 아무리 가볍다고 하는 것이지만 그것을 내가 하나 더 얻는다면 그게 가벼운 겁니까?
아무리 쉽고 가벼워도 더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에요. 지금 낭떠러지의 차가 떨어질랑 말랑 걸려 있어요. 무게 중심이 조금만 안쪽으로 가면 떨어질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여러분 그 가운데 새 깃털이 하나 쭉 날아와서 이 낭떠러지 방향에 탁 걸쳐 올라가면 어떻게 될 것 같아요? 그 새깃털이 매우 가벼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위험한 상태로 갈 수가 있다는 거죠. 그 상황에서는 새 깃털일지라도 가벼운 게 아닙니다. 굉장히 무거운 요소로 작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아무리 가벼워도 내가 지고 있는 짐 위에다가 추가시키는 것은 그것은 절대 가볍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기존의 짊어진 짐 상태 그 위에 뭔가를 던졌다는 느낌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짊어지고 있는 자기 중심의 삶, 무거운 짐을 먼저 내려놓는 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께서 허락하신 짐을 메는 것이죠.
그렇다면 우리가 실제 매고 있는 나의 멍에를 한번 생각해 보시죠.
우리의 삶 속에서 메고 있는 짐들이 무엇이 있었던가?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메고 살아야 했던 짐이 있습니다. 바로 죄 죄책감이라는 거 이 멍에는 태어나면서부터 존재한 내가 갖고 싶어서 가진 게 아니에요. 죄인의 자녀로 태어난 인생에게 주어진 짐이었다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우리가 이 짐 때문에 끊임없이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죄의 침해 분리 안에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러면서 자신을 정죄하고 죄인으로 만드는 것이죠. 그렇게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가진 죄가 있습니다.
멍에가 있다는 또한 살아오는 동안 스스로 열심히 우리가 만들어 매는 멍에가 있습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미래에 대한 염려를 그렇게 많이 하면서 살아가요. 우리는 그렇죠 내일 일은 난 몰라요. 그런데 왠지 모르게 염려가 됩니다. 그래서 일어나지 않는 것까지 걱정하고 사는 게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 아니겠어요?
연구자들이 연구한 결과가 나왔잖아요. 걱정하는 것 중에 일어나지 않는 일이 85%다. 얼마나 염려? 걱정을 많이 하고 살면 사람들이 이런 걸 연구했겠어요 내가 염려하는 것 중에 85%는 일어나지 않는 일 그런데 우리는 염려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죠.
또한 우리는 언제부턴가 자신의 노력과 공로라는 멍에를 메기 시작합니다. 내가 이것 해야지 그래서 자신을 향해서 잘해야 한다는 채찍을 가하기 시작했던 것이죠. 뭔가 좀 부족하면 더 잘해야 돼. 더 잘해야 돼. 그러면서 나를 힘들게 하는 거 뿐만 아니라 우리는 세상의 기대와 비교라는 멍에를 메고 살죠.
여러분 우리가 얼마나 많은 비교 속에서 사는지 모릅니다. 비교하면서 상처 주고요. 비교받으면서 상처받으면 사는 게 우리의 인생이라는 거예요.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비교의 대상이 되어서 살아가는 우리의 인생 얼마나 무겁습니까? 이러한 비교로 인해 생기는 열등감, 나는 도대체 왜 이 모양인가 왜 이것밖에 안 되지라고 하면서 자책하게 되는 거예요.
이러한 멍예들이 우리들로 하여금 영적으로 지치게 합니다. 정신적으로 지치게 합니다. 결국에는 육신적으로 지치게 만드는 현상들이시죠. 그래서 우리는 이것들을 벗어내야 된다라는 거예요.
왜 그렇습니까? 실제 무거워요. 내가 살아가는데 이러한 짐들이 무겁다는 거예요. 내가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무겁다는 거예요. 그것을 짊어지고 갔는데 끝까지 짊어질 수 있는 힘이 없다는 거예요. 결국 무거운 멍에로 인해서 넘어집니다. 지칩니다. 포기하게 된다는 거예요. 또한 해결할 수 있는 능력도 없습니다.
여러분 내 능력으로 내 공로로 죄의 문제 해결됩니까? 안 되잖아요. 여전히 나는 죄인이고 죄의 굴레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의 삶. 진정한 평안을 내 노력으로 가능한가요? 평안해야지 평안해야지 주문을 외우면 내가 평안해집니까?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어떤 사람도 자신의 죄의 문제라든지 평안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베드로전서 5장 7절을 말씀합니다. 너희 염려를 다 누구에게 맡기라고요? 주께 맡겨라. 그가 돌보시겠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멍에를 내려놓으시고 모든 짐을 예수께 맡기는 참 쉼을 얻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내려놔야 돼요. 내려놔야 돼요. 그러면 어떻게 나의 멍예를 내려놓을 수 있는가라는 거죠. 첫 번째 자백이 필요합니다. 우리 요한일서 1장 9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십니다. 요한일서 1장 9절 시작.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부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오.
여러분 죄의 문제,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던 이 무거운 짐은요. 하나님 앞에 나와 자백할 때에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시겠다 약속해 주셨어요. 그러니 우리의 죄의 문제로 감당할 수 없을 때 우리가 해야 될 것은요. 하나님 앞에 자백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내가 짊어지고 있는 죄의 짐을 내려놓기 위해 주님 앞에 나와 자백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내가 누군가를 미워합니까? 죄의 근원이 있기 때문에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합니까? 죄의 문제예요. 이러한 것들이 나의 삶에 아픔을 주고 아파하는 요소로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자백하는 거 그럴 때 하나님께서 그 문제를 자유롭게 깨끗하게 씻어주십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우리가 이 땅 가운데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죠. 저와 여러분들이 자백을 통해서 죄의 짐을 내려놓을 때 주님이 허락하신 참 자유와 평안을 누리는 큰 은총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두 번째는요. 기도와 간구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빌립보서 4장 6절, 7절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시작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기도를 통해서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길 때에, 간구를 통해서 하나님께 맡길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는데 뭘 지키신다는 거예요?
마음과 생각을 지킨다. 여러분 우리의 염려, 두려움, 우리의 생각들이 우리의 마음들의 문제 아니겠어요.
그런데 하나님께 이것들을 맡길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들을 지키시겠다. 선한 방법으로 오히려 감사의 조건들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겠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여러분 우리의 염려, 근심, 걱정, 이것들을 주님께 내어놓을 수 있는 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히려 세상에 내 마음과 생각을 빼앗겨 가지고 늘 걱정하고 염려하고 근심하며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김을 통해서 우리의 염려도, 우리의 근심도, 우리의 걱정도 다 주님께 맡기는 지혜가 있어 세상이 될 수 없는 평안과 안식과 은총을 누리며 살아가는 우리 존귀한 성도님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세 번째는요. 믿음으로 이겨야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께 믿음으로 맡기는 것이죠. 우리 이사야서 53장 말씀을 함께 읽어봅니다. 53장 시작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치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오,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에 우리에게 허락하신 은혜라는 거예요. 우리 허물 때문에 주님이 죽으셨다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이 죽으셨다는 것을 믿는 자들은 내 허물이 사해졌다는 것을 고백할 수 있는 것이죠. 우리의 상함, 우리의 죄악 때문에 우리 주님이 상함을 받으셨고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징계를 받으셨다. 그러니 예수를 믿는 자들은 징계를 대신 받으신 예수님을 통해서 평화를 누리고 사는 자들이 되어야 된다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찌하든지 간에 오늘 이 시간 그동안에 짊어졌던 죄의 짐, 내 염려와 걱정, 두려움의 짐, 이것들을 다 내려놓을 수 있는 은총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축복합니다. 돌아갈 때 다시 짊어지고 가는 일이 없기를 소망합니다. 다 내려놓고 또 갈 때는 주님 잠시 여기 계십시오 하고 예수님을 메겠습니다. 예수님을 다 메고 나가시면 일주일 동안 또 고되게 살다가 수림 내가 집 내려 놓으러 왔습니다. 지금 보관소가 아닙니다. 그러니 여러분 우리가 일상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라는 것은 바로 짐을 내 짐을 다 내려놓고 주님이 나와 함께 매주시는 은총의 삶을 사는 거예요.
여러분 다시 강조를 드리지만 예수님께서 나의 멍에는 슈퍼대 짐을 가볍다라고 말씀하실 때에 그것이 진짜 쉽고 가벼워지려면 여러분 내가 가진 짐을 먼저 내려놓아야 주님이 허락하신 범위가 진짜 가볍다는 걸 알 수가 있어요.
옷 중에도 진짜 무거운 옷 있잖아. 그런데 요즘 것들은 굉장히 또 가볍다 하네.무거운 옷을 입다가 그것을 벗고 가벼운 패딩을 딱 입으면 굉장히 무거운 것 같았는데 엄청 가볍게 느껴지잖아요.
그런데 무거운 옷을 입고 야 이 가벼운 옷인데 입어보자. 그 위에다 입어보세요. 가볍던가요? 그 가벼움이 느껴지는지 모르겠어요. 왜 이미 내가 무거운 것을 입고 있는데 그것을 입는다고 해서 가벼움이 느껴집니까? 더 무거워질 수밖에 없는 것이 여러분 그래서 우리가 참 쉼을 얻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는데 예수님의 멍에는 왜 씌운 것일까라는 거예요.
앞에 언급했던 두 가지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첫 번째는 예수님의 멍에는 은혜의 멍에이기 때문에 숫자라는 거예요.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의 공로와 자격으로 인해서 얻어지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 구원 죄의 문제 해결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얻는 것이라면 진짜 피땀 흘려야겠죠. 야 이렇게 해서는 내가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다. 어떻게 해서든 나를 더 쳐서 복종시켜서 구원에 이르러야겠다. 24시간 중에 막 10시간을 기도하고 말씀을 막 5시간씩 읽고 그래야 되지 않겠어요.
그런데 은혜라는 것은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라는 거예요. 에베소서 2장 8절 9절 말씀 함께 읽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오.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내가 52주 주님 앞에 집에 빠지지 않고 열심히 신앙생활하겠습니다.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라 그렇다고 여러분 52주를 가볍게 여기라는 게 아니죠.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52주의 귀중함을 아는 거죠.
그런데 은혜가 없이 내가 52주 열심히 교회에 나가서 신앙의 덕을 잘 쌓아야겠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짜 무거운 짐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노력과 공로를 내려놓으시고 오직 우리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 예수님께서 허락하신 그 은혜를 붙잡는 지혜, 그것을 맬 수 있는 지혜가 저와 여러분 가운데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 번째는요. 예수님의 멍에는 사랑의 멍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의 명예 예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와 함께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죠. 즉 동행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거예요. 옛날에 작은 시골 마을에 아버지와 아들이 농사를 짓고 있었습니다. 그 집에는 소가 두 마리 있었어요. 큰 소와 그리고 새끼 두 마리가 있었어요. 큰 손은 딱 보기에도 튼튼해 보이죠. 좀 건강해 보이고 힘도 잘 쓰겠다.
그런데 어린 새끼소는 너무나 나약해 보일 수밖에 없죠. 어느 날 아버지가 아들에게 새끼 소에게 멍에를 씌어라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아들이 생각할 때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저 새끼 소에게 멍에를 씌우는 저 새끼 요소가 잘 할 수 있을까 굉장히 힘들 텐데 걱정이 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저 힘든 밭을 저 새끼소가 읽을 수 있을까에 대한 염려가 있는데 아버지께서 새끼소의 멍에를 베 그런데 새끼 소에만 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도 크고 튼튼한 큰 소에게도 함께 내어줬던 것이죠.
아들은 의아해하면서 이야기합니다.
아버지 저 새끼 소가 너무나 불쌍해 보여요. 저 아기 스스로에게는 좀 벗겨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아버지께서 하는 이야기가 걱정하지 마라. 새끼소는 그저 멍에만 내고 있으면 되는 거야. 저 큰 소가 다 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진짜 무거운 짐은 저 힘센 소가 다 하니까 걱정하지 마.
그렇게 이야기했더라고요. 정말 보니까 어떻게 합니까? 큰 소가 모든 것들을 끌고 갑니다. 그리고 어린 손은 옆에서 그냥 따라간다는 거죠.
분명히 같이 일구었는데 이 어린 손은 힘이 느껴지지 않는 거 왜요?모든 힘을 누가 쓰고 있어요? 큰 소가 쓰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 멍에라는 것이 그렇잖아요. 원래 소 두 마리가 한 절이라고 하죠. 함께. 그래서 어떤 소가 어떤 소와 함께 짝이 되느냐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죠 그래서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큰 소에게 맡길 필요가 있다. 우리도 살다 보면 때로는 너무나 무거운 내가 감당하기 버거운 멍에가 나에게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도때도 없이 불안해짐, 염려의 짐, 미래에 대한 불확실 때문에 두려움의 짐을 짓눌린 채 살아가는 것이죠. 문제는 우리가 새끼 소처럼 힘없고 연약한 존재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 무게가 무겁다는 거 그런데 참 감사한 것은 예수님이 힘센 소로 나에게 찾아와 주셨다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의 짐을 함께 하자 요청하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저 그분과 함께 걷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멍이 혼자 지지 말아라. 내가 함께 져주겠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에게 함께하자고 요청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방향을 잃을 때 예수님께서 앞길을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지쳐 넘어질 때 예수님의 짐을 나누어 주십니다. 우리가 혼자 버거워할 때 예수님께서 우리의 발을 맞춰주시면서 함께 걸어주신다는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불안과 염려가 있을 때 예수님께 기대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인생의 무게가 무거울 때에 그 사람 그 사랑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는 은총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부족함으로 인해서 연약함을 느낄 때 채워주시는 사랑에 그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힘센 동반자가 되어서요. 여러분 언제나 사랑으로 우리를 이끄시면서 참된 힘을 주십니다. 우리도 그분과 함께 걸어 사랑의 멍예를 그래서 자유와 평안을 누리는 존귀하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결론입니다. 이제 무거운 짐을 진 채 홀로 힘겨워하지 마시고 예수님의 초대에 응답하십시오.
그래서 참쉼을 누리시되 내가 짊어졌던 것들을 가볍게 내려놓으시고 가볍다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멍예를 함께 내는 그래서 참된 자유와 그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죄의 문제 그것 때문에 고민하지 마세요. 우리 주님이 해결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의 영역, 우리에게 찾아오는 무게들 주님께 맡기십시오. 주님께서 함께해 주십니다. 마지막 오늘의 내용을 함축적이므로 설명해 주는 말씀을 함께 읽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에베소서 4장 22절, 24절 복음입니다. 이것이 함께 읽을까요?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아 세 사람을 믿으라.
할렐루야 벗어버리십시오. 옛 사람의 것들, 세상이 요구하는 것들 벗어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우리 주님으로 새롭게 성령의 능력으로 사셔서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과 함께 복된 인생의 여정, 이번 한 주도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