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크리스마스 미담 장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있다. 과거에는 오 헨리의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단편 소설들로, 세계 대전 때 크리스마스는 잠시 쉬어갔다는 이야기들로, 현대 들어서는 영화로 명맥을 유지하는듯 하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개봉하는 영화들은 어느새 로맨스가 더 늘어난 것 같지만. 부처님 오신 날 미담이 없는 건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외치며 너무 좋은 자리에서 태어나서 그런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이 책도 익숙하고 오래된 필름 현상 사진 같은 감성 속으로 우리를 이끈다.
이 글을 쓰려고 했을 때의 질문은 과연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 무엇이었냐는 것이었다. 모종의 정합적 논리를 만들고 나서 검토해 볼 겸 소설을 다시 읽는데 정말이지 김빠지게도, 결말 직전의 이 문장을 재발견했다. [펄롱은 미시스 윌슨을, 그분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을, 어떻게 펄롱을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 무얼 알았을지를 생각했다.] 이 문장을 바탕으로 글을 재구성하려고 곱씹는데, 의외로 새로 알게 된 사실이 거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의 무엇이 사소하단 말인가? 자기 혈육이 아닌 아이를 평생에 걸쳐 길러주고 결혼 예물까지 챙겨 준 것? 어머니를 거두고 아버지였던 이를 평생 모른 척 해주며 묵묵히 길러 준 일?
암시를 좋아하는 작가가 이 소설 전체에 배치한, 까마귀같이 시시한 암시를 제외하면, 지그소 퍼즐에 나는 집착했다. 어렸을 적 아빠와 견줄 만큼 가지고 싶었던 지그소를 얻지 못하고, 다른 세 가지 선물을 받게 된다. 이후 딸에게 질문을 받았을 때 화들짝 두 가지 거짓말을 한다. 퍼즐도 받았고 아빠도 찾아왔다고. 크리스마스 당일 그는 거리를 서성거리다 지그소 퍼즐을 사러 상점에 들어가지만 빈손으로 나온다.
이 모티브를 곱씹으며 나는 이런 식으로 해석했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지그소 퍼즐을 받거나 받지 않는 것은 사소한 일이나 이런 일들이 펄롱의 삶에 큰 차이를 일으킨다. 펄롱은 자신이 원하는 것보다 원치 않은 것을 받아 더 나은 삶의 갈래로 가게 된다. 보온 물주머니는 실용적으로도 도움이 되었고 사실은 산타이자 아비가 준 선물이었으며, 자신이 아버지가 되어 자기 딸들에게도 매일 안겨주고 있다. 곰팡내 나는 크리스마스 캐럴은 그의 어휘를 늘게 만들고 아비 있는 아이들 옆에 나란히 설 수 있게 해줬다, 자신의 올해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전으로 받고 싶어질 정도로.
우리가 삶에서 어렵지만 옳은 선택을 해야 할 때, 위의 지시를 항명해야 할 때, 부당한 일을 당하고 그걸 정면으로 풀어 가야 할 때, 부조리하고 이상한 일이지만 참지 않으면 앞으로의 삶이 힘들어질 때, 그럴 때 어떻게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지에 나는 관심이 많다. 가미카제 폭격기를 타야 할 때, 유대인들을 구별하는 서류를 작성해야 할 때, 알바생들의 월급을 최저 이하로 깎아야 할 때 무엇이 그러지 않고 피하거나 맞설 힘을 줄까.
펄롱은 크리스마스 당일 수없이 호화롭고 반짝이는 것들을 지나쳐 가볍고 사소한 것들을 파는 가게에서조차 지그소 퍼즐은 더 이상 팔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며, 자신이 원하는 삶이 별것 아니라는 사실, 자신과 마찬가지로 딸들이 원치 않는 선물을 받게 된다 하더라도 생각했던 것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으리라 믿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세라를 데리고 내려올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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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 깊었던 장면 하나와 다시 읽으며 인상 깊어진 장면 하나로 글을 마무리 지어볼까 한다. 펄롱은 굉장히 눈썰미가 좋은 사람이다. 그는 경기가 나빠져 불행해진 사람들이 눈에 밟힌다. 자신이 올해는 운이 좋았지만 언제 그들과 같은 문제에 봉착할지 모르는 불안도 강하다. 그의 눈썰미는 수녀원에서 나올 때마다 뒤이어 알아챘던 것들에서 빛을 발한다. [텅 빈 식탁에 앉은 아이를 작은 카디건 아래에서 젖이 새서 블라우스에 얼룩이] 지는 걸 보았다는 장면이, 너무 생생해서 기억에 남았다.
펄롱이 세라를 데리고 나와 시내의 한복판을 걷는 장면은 처음 읽을 때도 인상적이었다. 그가 일종의 사회적 자해행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사회적 선언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다시 읽으면서, 구토하는 세라를 보며 다른 관점이 들어왔다. 아마도 매일 석탄 광에 감금되었을 - 왜 감금했는지도 모종의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 세라의 입장을 떠올려 보게 된다. 아마도 대량으로 주문한 석탄들이 겨우내 다 떨어지기 전까지 그녀는 화장실도 갈 수 없이 매일 홀로 갇혀 있어야 했을 것이고, 앞으로 희망은 전무했을 것이다. 그런데 크리스마스에 그 문을 열고 앤디가 아닌 이름을 부르는 친절한 누군가에 의해 수녀원 밖으로 나아간다. 어디로 가게 될까, 아마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나를 풀어주겠지? 조용히 인적 드문 곳에 몇 푼 쥐어주고 모른 척 하겠지?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는 대로변을 떳떳이 걷는다. 모두가 끊임없이 그들에게 다가오고 인사를 하고 질문한다. 세라는 그와 혈연에 가까운 밀착된 관계가 형성됨을 가슴 깊게 깨닫는다. 이루 설명하기 힘든 받아들여짐이 간결하게 묘사되어 있다.
크리스마스 저녁 식탁에, 네드 대신 데려온 세라를 앉히고 안 그래도 집에 사람이 한 가득인데 한 명 더 온다고 뭔 일 나겠어?
P.S. 네드의 건초 빼돌리는 이야기가 이해가 잘 안 된다. 미시스 윌슨의 건초를 빼돌리는 게 죄책감이 들었다는 이야기인가? 돈을 받고 한 것도 아니고 너무나 부족한 겨울이었는데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다.
P.S.2 [더블린 사람들]이 궁금해졌다. 그렇다고 읽진 않겠지만.
P.S.3. 이후 작가 부커상 인터뷰를 살펴보는데 흥미로운 지점이 있어서 옮겨본다. (기계번역)
[일부 독자들은 이 책을 단순히 영웅적인 캐릭터의 이야기로 본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내 성격이 영웅적이지 않다는 말은 아니지만, 나는 펄롱을 자기 파괴적인 사람으로 보고 이것이 그의 붕괴에 대한 설명이라고 본다. 그는 중년에 접어들면서 정체성 위기를 겪고 있고,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고,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과거를 막아왔던 그의 일 중독은 점점 옅어지고 있다.]
그리고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소녀와 여성들이 이러한 시설에서 감금되고 노동을 강요받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거의 또는 전혀 말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답하고 싶었다.] 아이를 구출해내는게 아니라, 왜 아무도 구하지 못하는지에 대한 소설이었다는 것.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이 소설은 '용기'를 이야기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용기는 아무나 가질 수 없다는 것도...
하지만, 시작은 너무나 '사소한 것'에서 시작하죠.
내가 행복을 바라듯이 다른 누군가도 마찬가지라는 자명한 사실을
작가는 다시 일깨우고자 한 것이라고 봤습니다.
식당 주인이 참견하지 않았다면 펄롱은 아무래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을까 싶더군요. 고양이가 까마귀를 물고 있지 않았다면, 들어가는 길에 수녀들 중 누구를 만났더라면, 석탄 광 앞에서도 한 번만 더 고민했더라면 뒤도 안 돌아보고 돌아가지 않았을지.
잘못된 것을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어쩌면 아주 사소한 일이었는지 모르죠. 어느 때는. 그래 작가는 아주 짧은 글로 작품을 마무리 했을 수도 있구요. 그냥 생각해 봤습니다.
본문을 통틀어 다섯 번의 사소함이 나오는데, 개중 하나가 사소한 잘못을 혼내려 펄롱을 찰싹 때리는 네드 이야기거든요. 어쩌면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다는 납득이 됩니다.
왜 아무도 구하지 못하는지에 대한 소설이었다니 좋은 포인트네요.정체성 위기를 겪는 중년이 주인공이라는 지점도요.
내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를 사춘기 이후에 진지하게 고민하는 시기가 중년의 어느 시점이 아닌가 싶어요. 다른 것보다 안위와 보신이 삶의 우선 가치가 되고 직접적으로 내 삶에 피해가 가지 않는다면 타인의 불행이나 부조리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는편이 합리적이고 생존에 이로운 판단이라 생각이 드는 때.. 이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펄롱의 행동이 자기파괴적이라는 것에 이해가 갑니다.
다만 삶에 이로운 판단이 항시 옳은 판단은 아니기에 .. 그럴 때 나라는 인간 혹은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 따라오는 것 같아요.
사람들은 누구나 할 수 없는 일을 행한자를 영웅이라 칭하지만 그 누구나 할 수 없는 일이 사실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사소한 일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사소한 일이 가져올 파장을 "예측"하기에 쉽사리 할 수 없는 거겠죠.
그냥 지금 갇혀 있는 힘든 소녀를 보았기에 도움을 줬을 뿐. 사람이라면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하지만 그게 왜이리 어려운지
인터뷰에서 펄롱이 겪을 수 있는 이야기들을 저자가 언급하는데 얼마나 괴롭고 힘들게 될지 예상하고 있더라구요. 어린 남자 아이가 여자 아이를 광에서 발견하는 걸로 첫 이야기를 구상했다는데, 잃을게 많은 중년 남성으로 바꾼 이유도 충분히 짐작이 갑니다. 이 소설을 대략 오십 개의 다른 버전들로 써봤다고도 하고요. 각각의 이야기들이 어떤 시점, 어떤 기간, 어떤 범위까지 이야기를 다뤘을지 상상하게 됩니다.
그것들이 무엇보다도 사소한 것들이라는게 와닿네요. 앞으로 걷는 것, 어떤 글자를 쓰는 것, 클릭 한 번 하는 것... 마지막 문장에서는 사람이기를 포기하지 말라는 누군가의 말도 떠오르는군요. 소설 전체에서도 펄롱은 말을 꺼내고 싶은데 뭔지 희미하고 꺼낼 수 없는 무언가가 얹힌듯 답답하게 살거든요. 체한 것처럼 살지 않는 것도 쉽지 않아요.
@서정 와우 오십 개 버전이라니~ 정말 대단한 작가네요. 한 시간만에 후루룩 읽어버린 게 송구스런 기분도 듭니다. 곁가지 이야기도 해주셔서 감사해요. 연말 잘 보내시길요~ 😉😊
@삐용이 삐용이 님도 메리 크리스마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저도 이제서야 읽고 한마디 남겨요 ㅎㅎ
미시즈 윌슨이 어머니를 거둬 어머니와 펄롱은 적어도 수녀원에 갇힌 여자애들처럼은 살지 않았던 것은 미시즈 윌슨에게는 사소한 일이었을 수 있으나 어머니와 펄롱의 삶에서는 사소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고, 펄롱이 세라를 수녀원에서 집으로 데리고 가는 것 역시 펄롱도 두려워서 사소한 일이 아닐 수도 있으나 어쨌든 그런 결정을 내렸는데 그 결정으로 행복함을 느꼈고, 그 결정으로 세라의 삶에도 사소한 일은 아닐거라는 거..
댓글 잘 읽었습니다..다양한 생각을 읽을 수 있어서 좋네요!!
잘 읽었습니다. 남의 큰 일이 나에겐 사소한 일일 수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