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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리는 마리아.
( 마태복음 26장 < 1 > )
강도 만난자와 같이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외면했던 죄와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거짓말 했던 죄도 용서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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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언제나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모든 것을 평가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습성으로 인해서 뜻하지 않게 오류를 범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사람이 눈에 보이는
것으로 모든 것을 평가할 때
크나큰 문제점은 크고 많은 것을 좋은 것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이런 시각이 신앙으로
연결되어질 때 결국 좋은 신앙, 나쁜 신앙의 기준도
눈에 보여지는 것을 통해서 판단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성격이 좋아서
화를 잘 내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저 사람은 신앙도 좋을 것이다'라고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성경을 잘 읽고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을 봐도
다른 것은 두고 볼 것도 없이 신앙이 좋은 사람으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이 자신에게 속는 경우입니다.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러나 크고 많은 것을 좋은 것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지극히 작은 자의 모습에서 주님을
찾기보다는 크고 많은 것에서 주님을 찾으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진짜 주님의 모습을 담고
오신 지극히 작은 자를 무시하고 배척할 수 있고,
그것이 곧 영벌에 들어가는 악인의 모습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나그네 되고, 병들고, 옥에 갇힌 자들은
한마디로 세상적인 기준에서 볼 때는 아무런 쓸모 없는 자들입니다.
교회에서도 있으면 귀찮은 존재이고,
다른 교회로 간다해도 하나도 아쉬워 할 것이 없고
오히려 좋아할 그런 존재인데, 그런데 이들이 주님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지극히 작은 자 속에 계시는 주님을
보지 못하면 결국 눈에 보이는 것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고 주님을 찾아도 모두가 보이는 것을 위해서 찾게 될 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사해주시려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흔히
죄사함도 교회에 와서 자신의 죄를 말하고
용서해 달라고 하면 다 해결되는 것으로 여기는 수가 많습니다.
주일을 빼먹었다든가, 기도를 게을리 했다든가
남의 험담을 말했다든가 누구를 미워했다든가 하는
자신의 행위를 근거로 해서 죄를 끄집어 내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죄사함이란
예배 빠지고 기도 안하고 성경말씀 잘 안보고
교회 봉사 안하고 십일조 제대로 안하는 그런 죄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겨우 그런 문제 때문이겠습니까?
그런 문제 정도라면
예수님이 아니시라도 우리가 조금만
노력하고 의지가 있으면 얼마든지 해결할 수있는 문제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죄사함이란
나의 인생의 어떤 일부분만이
아니라 나의 인생 전체 나의 삶 전체를 두고 말씀 하신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게 죄가 되는 부분만 골라서
용서해주신 것이 아니라 죄사함이란 우리 인생 전체가
주님이 아니었으면 죽고 망할 수밖에 없는 인생이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예수님의 피로
용서함을 받아야 살 수 있는 인생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1. 거짓 종교 지도자들의 음모.
"예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르
시되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 하시더라"
(마태복음 26 :1-2)
예수님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을 다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를 가르치셨습니다.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입니다. 예수님은
무교절 첫날에 팔리시고 무교절 이튿날 십자가에
못박히십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준비일에 십자가에 못박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기 하루 전입니다.예수님은
자신이 오늘 십자가에 못박히기 위하여 팔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 못박힙니다.
유월절 어린 양이
이스라엘의 장자를 대신하여 죽습니다.
예수님은 그와 같이 인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십니다.
"그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아문에 모여 예수를 궤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
하되 말하기를 민요(民擾)가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말자 하더라"
(마태복음 26 :3-5)
예수님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을 다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들은 출애굽의
은혜를 기억하며 죄를 회개해야
했습니다. 마음 속에 죄의 누룩을 제하면서 무교절을 지켜야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흉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하였습니다.
그들은 민란이 날지 모르니 유월절 명절에는 죽이지 말자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십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죽이는 것 같지만
모든 일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 속에서 이루어짐을 알 수 있습니다.
2. 마리아의 헌신과 가룟 유다의 비판.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마태복음 26 :6-7)
시몬이 예수님의 은혜로
병이 나은 후에 예수님과 제자들을 초청한 것
같습니다.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가룟유다의 계산에 의하면 삼백 데나리온이 나가는 비싼 향유였습니다.
향유는 동인도에서 수입한 것으로 여자들이
결혼 지참금으로 준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식사하는 도중이었습니다. 그녀는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그녀는 향유만
부은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자신의 진심과 사랑과 꿈도 예수님께 온전히 드렸습니다.
"제자들이 보고 분하여 가로되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
이것을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마태복음 26:8-9)
제자들은 향유를 허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향유를 유용하게 사용하지 못하였다고
비난하였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돕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께서 아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마태복음 26 :10-11)
가난한 자들은
제자들과 항상 함께 있습니다.
그들은 언제든지 도울 수 있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하루 후면 죽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제자들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향유를 부을 수 있는 것은 항상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보다 우선적입니다. 복음 역사는 구제역사보다 우선적입니다.
3. 모든 세대를 거쳐 성도의 본이 된 여인.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 하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6 :12-13)
예수님은 여자가 향유를 부어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였다고 하셨습니다.
나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여인들이 예수님께
향유를 발라주러 가지만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발라드리지 못합니다.
마라이는 복음의 한 부분을 담당하였습니다. 복음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여 그리스도가 되신 것입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여 복음의 일부에 쓰임 받았습니다.
마리아의 행동은 그리스도의 복음과 닮았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사랑하여 향유를 쏟아부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피를 쏟아 부으셨습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여인의 행한 일도 말하여 기억할 것입니다.
"그 때에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저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마태복음 26 :14-16)
가룟유다는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넘겨줄 테니 얼마를 주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이 은 삼십을
주었습니다. 그때부터 유다는 예수님을 넘겨줄 기회를 찾았습니다.
그는 은 삼십에 눈이 멀어서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 않자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예수님을 배신하였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믿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만난 후에는 예수님 위해서 믿는 신앙으로 바뀌어야합니다.
"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유월절을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가라사대
성 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신대 제자들이 예수의 시키신 대로하여 유월절을 예비하였더라"
(마태복음 26 :17-19)
무교절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와서 유월절 음식을 어디서 잡수실
것인가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성안의 어떤 사람에게 가라고 하였습니다.
그에게 예수님이 그 집에서
유월절 잡수시기를 원한다고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유월절 만찬을 할 객실을 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비밀리에
유월절을 준비시켰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 말씀에 순종해 은밀한 곳에서 유월절을 먹도록 준비시켰습니다.
4. 은 삼십에 팔린 예수님.
"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더니 저희가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마태복음 26 : 20-21)
예수님은 저녁 때에 열두 제자와 함께
유월절 만찬석에 앉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이 먹을 때에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가룟유다의 배신으로 불신에 빠지지
않도록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룟유다의 회개를 돕고자 하셨습니다.
"저희가 심히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내니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마태복음 26 :22-24)
제자들은 몹시 근심하여 각각
나는 아니지요? 라고 확인하였습니다. 각자는
예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가룟유다와 같은 요소를 회개했습니다
가룟유다는 예수님과 함께
손을 넣고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가 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암시적으로 말하여
유다가 스스로 깨닫고 회개하기를
원하였습니다.예수님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가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가로되 랍비여 내니이까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마태복음 26 :20-25)
가룟유다도 뻔뻔스럽게 물었습니다.
그는 이미 예수님을 팔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자신의 속을 모른다고 생각하고 가식되게 물었습니다.
그는 이중적이었으므로 회개할 수
없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을
주여 하며 불렀지만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선생님이여 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그 순간까지도 예수님을
자신의 그리스도로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마음 속에는 예수님은 없고. 돈과 자신의 유익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다에게 네가
대답하였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직접적으로 가룟유다에게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가슴을 치고 통곡하며 회개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직접적인 말씀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주시는
떡을 받아 먹고 밖으로 나갔습니다.그가 밖으로 나가자 밤이 되었습니다.
(신앙 상식)
추도예배는 과연 성경적인가?
추도예배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입니다.
1897년에 추도예배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당시 아펜셀러 선교사 등이
발행한 신문(조선 그리스도인 화보) 9월호에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최초로 추도예배를 드린 사람은
‘이무영’이란 사람으로 정동감리교회 교인이었습니다.
그는 궁궐에서 물품을 관리하는 사람으로 정3품의 높은 직위에
있던 사람으로 ‘윤치호’와 함께 독립협회를 운동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무영은 모친 기일이 되어서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추도예배’를 착안 하였습니다.
이 기사를 보고 다른 교인들이 좋다고 생각하여
그 이후 정동교회에서 추도예배를 많이 드렸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문제 해결 방식이 선교사가
가르치는 대로 따르지 않고 한 교인이 스스로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그 후 1934년 감리교 총회에서 추도예배를
‘교리와 장전’에 삽입했고, 감리교 영향을 받아 구세군과 성결교가
50년대에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장로교는 70년대 말에 인정했습니다.
제사를 추도예배로 바꾼 것은
‘우상숭배’라는 비난을 극복하고
유교사회의 중요한 가치인 ‘효’를 기독교 안으로 받아드린 것입니다.
이것은 가톨릭에서
‘선교’라는 이름으로 불교의 ‘염주(묵주)’와
제물을 차려 놓은 ‘제사’를 받아 들인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처럼 제례 행위들이 전혀 무비판적으로 유포된 채
순수한 기독교 예배 정신을 흐려 놓고 성경적 평가 없이
수수방관하고 권장을 하다 이제는 비 성경적인 행위임을 알고
일부 교단에서는 부당성을 고하고 성명을 발표하고 있습니다.
1) 추도예배의 언어적 의미
추도예배(追悼禮拜)- “죽은 자를 생각하며 슬퍼하며 드리는 예배”
추모식(追慕禮拜)- “죽은 사람을 그리워하며 드리는 예배”
결국 하나님에게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죽은 자를 향한 예배의 의미가 짙게 깔려 있습니다.
예배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이 되어야지 죽은 자가 되면 안됩니다.
그런데 추도예배는 죽은 자를 생각하여
그것도 슬퍼하며 그리워 하며 드립니다. 이것이 예배가
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추도예배는 명백한 우상숭배에 해당됩니다.
2) 성경적 의미
성경에는 죽은 사람을
추모하거나 추도하라고 한
말씀이 없고,죽은 자에게 예를 갖추라고 한 곳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죽은 자를 위하여 성물을
쓰지 말라(신26:14)고 하였고, 시편 106:28에는 죽은
자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어서 하나님의 진노를 산 것이 있고,
에스겔24:17에는 죽은 자를 위하여 슬퍼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나 이삭 야곱도 추도예배를
한 일이 없습니다. 명분은 하나님께 예배 드린다는 것이지만,
실상은 고인을 더 생각하는 것이고 애도와 묵상을 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비는 제사행위와 다름이 없습니다.
(기독교 예배 용어 연구 전문 위원회)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도
경외하는 마음도 없었던 거짓
종교 지도자들이 악한 행위를 서슴없이
자행하는 모습을 통하여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할 수 있는 깨달음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의 남은 삶은 받는 것보다 주는것에 힘쓰게 하시고
구하는 것보다 드리는 것이 더 복된줄 알고 행하는
우리들 되게 하옵시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짐을
감사하는 우리 모두의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24. 2. 17. -샬롬- 예수님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