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우리들 모임은 안정 단계에 들어섰다. 오늘 어부인이 단 한분이라 좀 어색했지만
성품이 원만해 함께 식사하고 헤어졌으며, 정재일은 한울회에 3인의 대표로 참석했고,
김용선은 회사 차량 2대 구입해 고사에 참석하느라 빠진 자리였다.
새로 등산로 정비를 하며 휀스 밧줄 고정목을 나무로 깔끔히 고쳤고, 다리도 아치로 새단장했다.
다리를 건너다가 만난 노영부의 부부 사진을 담을 기회를 잡았다.
위는 등산로 휀스목으로 명을 다하고 퇴역하는 시멘트 기둥들
일찍 도착해 기다리는 일행들이 10시 13분인데 이렇게 많이 모여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광교저수지에서 거북이를 보다니 세 마리 사진을 편집해서 아래,위로 올립니다.
6월초 공사가 진행되더니 완공되었다. 아래 첫 계단은 10개 다음은 12개의 계단이 놓였다.
수고가 많은 사무총장 사진을 편집해 보고 두 장 다 올립니다.
등나무 쉼터의 일행들 좀더 걸었으면 좋으련만 여기가 반환점이다.
12시부터 식사시간은 13시10분을 넘겨서 끝낸 '한그릇뚝딱'식당을 담아 봅니다.
광교공원 분수대에서 분수쇼를 하는 모습을 발췌했습니다.
꽃 사진들은 수원천을 걸으며 담은 꽃들이 삼희교 전까지에서 담았다.
삼희교 공사현장을 담았는데 교량의 4차선 중 2차선을 절단해 공사를 하고 있다.
수원 팔색길을 걷다. 수원이 지닌 8(팔)의 긍정적 의미를 담아 수원 곳곳을 연결하며 수원의 역사•문화•자연을
느낄 수 있는 거리를 만들다.
수원팔경(水原八景)[널리 알려진 수원의 빼어난 여덟 군데 절경]
팔달산(八達山)[수원의 주산(主山)이자 혈처(穴處)인 수원의 대표 상징 팔달산]
사통팔달(四通八達)[사방으로 통해있고 팔방으로 도달한다는 교통의 중심지 수원]
▫ 영화역과 화성 축성비 아끼기
수원 화성을 축성할 때 든 비용은 약 89만 냥 정도였다. 이 금액은 당시 국가의 재정을 휘청거 리게 만들 정도의 거금이었다. 따라서 조정에서는 인건비,자재비 등 축성비의 마련이 급선무였다. 이와 관련하여 화성의 사대문 앞에 주막을 직접 운영하여 재원을 아꼈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이 일화가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화성 건설에 투입된 인원이 1만 2천여 명이나 되었으므로 장안 문 밖과 화서문 밖에는 많은 주막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어렵지 않다.
특히 장안문 밖에는 영화역이란 시설이 있었으므로 주막들이 번성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영화역 은 장안문 밖 동쪽 1리쯤(현재의 수원교육청 사거리부근)에 있었다. 1796년(정조20) 8월 29일 화 성 직로(直路)에는 역침이 없고 장안문 밖은 인가가 없어 흠이 됐기 때문에 경기 양재도역(良才道 驛,지금의 양재역)을 옮겨 이 곳에 설치하고 역마(驛馬)를 뒀다. 영화관(迎華館),내아(內衙),별당(別 堂),아전청(衙前廳),내삼문(內三門) 등으로 이루어 졌으며 모두 52칸의 규모다. 영화관의 상량문은 이면응(李冕膺)이 지었고 외삼문에 ‘영화독우아문(迎華督郵衙門)’이란 편액을 걸었으며 영화역 찰 방이 북성의 척후장(斥候將)을 겸직하게 했다. 영화는 ‘꽃을 맞이한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화성을 맞아들인다’는 뜻으로 영화관 상량문에서도 “준마가 바람처럼 달리니 지방 수령을 따라 임금께 뵙 고 부노(父老)에 앞서 의장(儀仗)을 보겠구나 좋은 이름을 당정(塘亭)에 지었으니 빛나는 현판은 우사(郵舍)로서 알맞은구나”라고 하였으니 화성으로 행차하는 군왕의 화려한 행렬을 화성의 척후 로서 가장 먼저 맞이한다는 의미다. 영화역은 수원 춘팔경 화우산구(華郵散駒,말들이 이리저리 뛰 노는 영화역의 풍경)의 경관으로 가꿔졌으며 현재의 영화동은 바로 영화역에서 동명(洞名)을 따왔 다.
영화역이 있던 곳은 시가지가 형성되어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됐다.
(출처: 수원시청, E 수원 뉴스, 수원문화원) 위 글을 복기한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많은 자료 담아다 올리느라 수고 많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