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후에 황성
후에 황성은 1802년부터 1949년에 이르기까지 약 143년간 베트남을 통치했던 응우옌 왕조의 황궁 역할을 했던 곳이다.베트남 최고의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는 후에는 유적 전체가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베트남 전쟁 당시 파괴된 유적들의 복원, 보존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1789년 6월, 응우옌푹아인은 분열되어있던 베트남을 통일하고 스스로 자롤제로 등극했다. 지관들의 오랜 상의와 토론을 통해, 새로운 황궁과 도시를 어디에 지을지 결정했고, 후에가 적지로 정해지자 1804년 건축이 시작되었다. 수천명의 인부들이 동원되었고, 10km에 달하는 해자, 거대한 벽, 지반들을 지었다.
후에 황궁은 자금성을 본떠 만들었지만, 자금성이 완벽한 남향인 반면 후에 황궁은 그 축이 동남쪽을 향해 흐엉강을 바라보게 되어있다. 황궁에는 자금성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궁전, 정원, 누각들이 들어가 있었다. 이 곳은 1880년에 프랑스 군대가 쳐들어와 베트남의 주권을 빼앗기 전까지 베트남의 정치적, 상징적 중심지였다. 또한 응우옌 왕조가 1945년까지 겨우 명맥을 지속할 때까지, 명목상 베트남의 정식 수도였다. 당시 황궁에는 여러 건물들과 수백개의 방들이 있었으나, 1945년 왕정제가 폐지되며 주인이 사라지자, 황궁은 수많은 약탈, 자연재해에 시달리게 되었다. 가장 큰 피해는 20세기에 베트남 전쟁 당시 입게 되었으며, 그 흔적은 아직까지도 궁전의 벽들에 남아있는 총탄 자국들로 찾아볼 수 있다.
1947년 반군들이 황궁을 점령하였고, 프랑스군과의 격전이 이 곳에서 이루어지며 주요 전각들과 행랑들이 모두 불타버리고 말았다.
1968년, 북베트남 군대가 후에를 점령하기 위해 이 곳에 화력을 퍼부었고, 이미 심각하게 훼손된 상태였던 후에 황궁은 거의 반파 상태로 전락했다. 당시 미군은 문화재 보존을 위해 황성과 문화재 보존 구역에서는 함부로 화력을 사용하지 말 것을 병사들에게 지시했으나, 시가전이 벌어지고 병사들이 그런 것까지 신경쓰지 않게 되며 황성은 또한번 피해를 입게 된다.
황궁에서 남베트남 군대와 북베트남 군대가 직접 충돌하였으며, 군대가 서로에게 공습을 가하며 160개가 넘던 건물들 중 겨우 10개만이 살아남았다. 1993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으로 지정되었으며, 아직까지도 복구, 복원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가장 최근의 복원 프로젝트는 2015년에 모두 끝났다.
심 산
후에 황성↓ 후에 전경↑
후에 카이단 왕릉
카이딘 황제(1885-1925)는 응우옌 왕조의 12대 황제로, 재위기간은 1916년-1925년까지 9년간 이었다. 재위당시 이미 프랑스의 속국으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카이딘 황제는 1923년 자신의 능을 짓기위해 베트남 농부에 대한 세금을 올리면서 베트남을 경제적으로 곤궁에 빠뜨렸다. 그리고 민족주의자들을 탄압하면서 지금까지도 베트남사람들의 미움을 받고 있다. 재위시 통치에는 관심이 없었던 그는 자신의 사후세계에 관심을 갖고 자신의 무덤을 짓기시작한다.1920년부터 자신의 무덤을 만들기 시작했으나 생전에 완성하지 못하고 1931년에 자신의 아들 바오다이황제때 완공된다. 베트남과 유럽의 건축양식이 절묘하게 섞인 특이한 구조의 왕릉으로 콘크리트 석상의 경우 유럽인의 모습과 유사하다. 서구식 건축에 예술적으로도 우아한 멋을 내고 있는 이곳은 다른 릉과는 다르다.
짧은 베트남의 역사이지만 후에 는 1802년 부터 1945년 까지 존속했던 응우옌 왕조의 황제가 머물렀던 궁이 있고 인근에는 황릉들이 있다.중국의 자금성을 모델로 지은 후에왕궁은 성벽으로 둘러쌓인 거대한 공간이다. 베트남의 여러 여행지 중에서도 화려함에 눈을 뗄 수 없는 곳이다.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화려한 왕릉과는 달리 카이딘 황제는 국민들에게 매우 질타를 받던 사치스러운 왕이었다.
황릉 실내 전체를 이런 크리스털과 세라믹으로 치장을 해서 그 현란함에 입을 다물지 못하는데 정말 너무 화려합니다.
사진이나 영상으로는 그 화려함을 다 표현하지 못하는데 실제 보시면 , 정신이 나갈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 ↓
왕을 모신 계성전↓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