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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8 평화협상 깨지다~ 이덕구의 죽음까지 )
제7장 제주 4.28평화협상 폭도들에 의해 깨지다
제1절 개요
제주도 4.3사건하면 2.7폭동진압 사건과 이 오라리 사건이 핵심이다. 그 발단의 원인처럼 약방의 감초로 등장한다. 오라리는 제주읍 남쪽 2km 떨어진 마을이다. 당시에 주민이 600여 호에 3,000여 명이 살았다.
이 마을에는일제 때부터 좌익운동을 하는 고사규.박기만.오팽윤.송삼백. 이순정 등 많은 인원이 있었으며 이들은 "이승만은 미제의 앞잡이다. 미군은 이 땅에서 물러나라" 등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주민들은 그러다 보니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47년 3.1절 발포사건 때 관덕정 앞에서 6명이 사망할 때 이곳 마을이 2명이었다.
48년 4월 11일 경찰 송원화의 아버지 송인규가 이 마을에 살다 폭도들에 살해되기도 했고 5.10선거 때는 무려 2,000여 명의 주민이 계획적으로 선거에 불참한 동네였다.
48년 4월 21일, 이순오(35)와 삼촌 고태조(37)가 잃어버린 말을 찾으러 이웃마을 오등으로 갔다가 응원 경찰대가 폭도의 연락병으로 간주하여 총격을 가해 이순오가 죽는 등 일부 인원이 경찰에 연행되어 피해를 입게 된다
제2절 우익 청년과 청년 부인들의 납치사건 발생
평화협상 다음날인 4월 29일 연미마을 대청 부단장 고석종과 단장 박두인이 납치되어 갔다. 4월 30일 대청단원 부인인 여성 2명이 납치되어 마을 밖 1킬로 떨어진 민오름까지 끌고가, 대청단원이 묶여 있는 곳에 가서 소나무에 묶었다. 이 여자들이 경찰에 밀고 했다는 이유였다.
신고를 받은 경찰이 새벽녁에 신고를 받고 출동해 보니 벌써 정보가 들어가 유격대는 한명도 없고, 민청단원도 없었다. 끌려온 여성 1명은 임산부였는데 이미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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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오름 탐문 및 탐색]
사실 나는 북제주에서 벌어진 국민방위군 훈련장을 찾아 제주읍 일대를 샅샅이 돌며 주민 증언과 당시에 방위군이 있었던 학교나 제주 공항 일대를 탐문했다. 여기서 얻은 중요한 정보가 바로 방위병이 들어와 집단으로 몰려 있는데 돌림병이 돌아 수없이 죽어 나가서 단가에 들기도 하고 쓰리코타에 실기도 하고 해서 민오름 일대로 갔다는 증언을 듣고 민오름을 3년에 걸쳐 탐문 및 탐색을 했다. 현재는 해병여단 뒤로 해서 우회도로가 잘 발달되어 많은 사람들의 산책코스로 되어 있으며 길 바로 밑에 제보자들이 알려준 깊은 계곡같은 곳이 있다.
어느날 해병여단 인접에 당시 죽은 국민방위병을 차로 실어와 내려놓는 것을 목격했다는 제보로 현장조사를 했다. 그러나 부대를 확장하는 과정에 현장보존이 안되어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오랫동안 이 부대에서 근무한 부사관을 추적하여 만나 보았으나 부대확장 공사간 특이점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그거야 당시에 도쟈로 밀어버리고 포크레인으로 휘저어 버리면 남아 있을리 없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 야 이새끼 뭐하는 짓이야?"
그리고 그 산책로를 따라 민오름으로 가던 길에 제보자를 만났다.
제보자: 아니 티비에 나오던 분들이네. 잘 만났소. 옷을 보니 알겠네.
나: 감사합니다
제보자: 여기는 어떻게 알고 왔소?
나:(약간 거칠은 어투에 움찔했지만~!) 네. 국민방위군이 제주읍지역에서 훈련받던 중에 역병에 걸려 많이 죽어서 이곳 어딘가에 실어다 가매장했다는 제보가 있어 확인하러 왔습니다.
제보자: 당시에 개판이야. 많이 죽었느데 갔다 버린거지. 무슨 가매장이야. 고생하는데 벌써 몇 년이 지났는데 있겠어?
나: 지금까지 10여 년을 해서 그래도 만여 구를 찾았는데 대부분 지역 주민들의 제보로 찾았습니다.
이때 사건이 발생했다. 우리 동행하고 있던 인원이 우리 대화를 캠코너로 찍으려 했더니 버럭 화를 내며 "야 새끼야, 너 뭐하는 짓이야. 누가 찍으라 했어. 그때나 지금이나 멋대로인 것은 마찬가지야" 하며 "필요 없어"하며 떠나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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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막힌 사례]
참 황당스럽지만 이런 것은 한해에 한두번 발생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전북의 왕사봉.장군봉.운장산.원등산 등을 탐사하는 과정에 당시 북한군 훈련장이 있었다는 제보에 완주군 동상면 신원리 장군산 아래 마당목 일대를 탐사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제보를 해 준 분이 동상초교가 있는 곳의 한 슈퍼마켓 주인이었다. 장비같은 성격의 남자 사장이 우리를 보더니 뭘 하러 다니느냐고 비꼬듯이 말하여 나도 상당히 언짢았다. 그런데 이 모습을 여자 사장님이 보고서 나에게 "아니 우리 남편은 성격이 저래서 오해받기 일쑤라며 절대로 기분나쁘지 마세요". 난 바로 얼굴색을 바꾸어 굽실거리며 한 수 가르쳐 달라고 했다
나: 혹시라도 이지역에 오래 사셨으면 우리는 6.25전쟁 땅시에 숨져간 군인이나 경찰. 학도병 등의 못찾은 유해를 찾고 있습니다.
남주인: 그렇게 해서 찾겠어요. 지금 그때를 알고 있는 분이 이미 다 돌아가셨는데 너무 늦었어.
나: 맞습니다. 그러기에 지금이 너 시급하고 중요합니다. 지금까지 5000여구를 찾았습니다.
남주인: 그래요? 어떻게 찾았어요?
나: 대부분 전투지역인데 실제 가장 중요한 위치를 당시 참전용사보다 지역에 오래 사신 분이 나무하러 또는 나물채취하러 갔다가 . 아니면 당시에 못살다 보니 탄피니 포탄의 신주를 찾아 돈으로 바꾸기 위해 산에 올랐다 보니 그 비참한 모습을 목격한 것을 증언해 주어 찾았습니다.
이때 나와 같이 갔던 지금 모 신문사 기자인 홍ㅇㅇ이 켐코더로 이 내용을 녹화했는데 버럭 화를 내며 "야 임마 싸가지 없는 놈, 누가 찍으라 했어? 다 지워 ?"
그래서 우리는 다 지우고 미안하다고 나와야 했다. 그리고 한 해가 지나 다시 찾아가서 만났더니 어찌된 일인지 아주 상냥하게 증언에 임해 주었다. 살다보면 이상한 일이 많다. 그리고 실제 같이 마당목 지역을 탐사해 주었다. 그런 멋진 아저씨가 그 다음해에 갔더니 돌아가셨단다. 갑작스레 몸이 아파 쓰러져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운명했다는 여사장의 말을 듣고 우리는 묵념을 하고 눈물이 글썽한 상태로 물러난 사실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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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나는 손바닥 손금이 없어지도록 빌었으나 악설만 하고 가버렸다. 이런 상황이 되니 몇몇이 모여 들었다. 웅성 웅성 하면서 나에게 접근하여 뭐가 있느냐고 물어왔다. 그래서 국민방위군 사건을 설명하고 혹시라도 아는 것이 있으면 알려 달라 했지만 방위군 사건은 모르고 4.3사건 때 사람이 죽어 민오름 밑 산굼부리처럼 푹 들어간 곳에 던져버렸다는 소문은 있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는 처음 답사에서는 4.3사건 피해자 탐사가 아니기에 알겠다고 하고 위치를 벗어나 해군 모텔로 가서 하루를 보냈다.
이로부터 강정리 초등학교 인근 방위군 집단 가맹지를 찾아서 40여 구의 유해를 찾은 것이 2003년도이고, 이후에도 강정리에서 10여 구의 유해를 더 찾았고 실제 유가족 중 1명이 유전자 검사로 아버지를 찾는 기쁨아닌 기쁨도 있었다. 그러다 2010년 경에 다시 민오름에 찾아가 바로 그 밑에 있는 깊은 구릉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의 증언이 그곳에는 뱀도 많고 불도 자주 났으며 얼마전까지 구릉 북쪽에서 사람이 들어와 경작도 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통상 이런 곳은 유해의 흔적을 찾기는 어렵다. 대부분 화재와 밭갈이 등으로 나오는 유품이나 유해를 불로 태워버리거나 계곡 물 흐르는 곳으로 처리해 버리기 일쑤다.
역사는 시간 속에 지워져 버린다. 기록으로 남겨야 많이 그 진위여부를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제3절 오라리 방화사건
미 방첩대는 대청단원 임갑생(23)으로부터 납치 경위를 파악하였고, 또한 출동한 경찰로부터 사건 전말을 알게 되었다. 결론은 4.28 평화 협상은 깨졌고, 김달삼은 김익렬을 이용하고 있다는 결론이었다.
5월 1일 사망한 임신한 여인의 장례식이 대청.서청원 3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장례식을 마치고(인근 동네사람은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다.) 이들은 몽둥이 등을 들고 연미 마을로 처들어가서 폭도로 의심받던 집 5세대 12채에 불을 질러버리고 집과 살림살이를 때려부수고 제주읍으로 떠났다.
얼마 후에는 폭도들들이 내려와 불타는 현장을 보고 그들을 잡으려 마을을 뒤졌으나 대청원들은 이미 떠난 뒤라 아무도 없었다. 그러다 연미마을 앞에서 구덕을 지고 가는 아주머니를 폭도 한명이 불러 세우고 물었다.
폭도: 아주머니 어디 가시는 것이요?
아주머니: 나 김규찬 순경 어머니요.
폭도1: 뭐라고요? 김규천 순경 어머니?
이 아주머니는 질문하는 청년이 서청단원인줄 알고 귀찮게 할까봐 경찰 어머니라 대답했다. 하지만 이자는 폭도였다. 옆에서 듣고 있던 폭도가 소리를 꽥하고 지른다
폭도2: 김규찬 어머니라고? 야, 없애버려!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폭도들은 죽창으로 42세의 김규천 순경 어머니를 죽였다. 마을 사람들은 열심히 불을 끄고 있었다.
서문 파출소에 연미마을에 폭도들이 나타나 동네를 개판 치고 있다고 신고가 오게 되니, 즉시 본서에 증원요청을 하여 트럭 2대에 경찰 병력이 타고 현장에 도착 하였다.
그러나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경찰을 보고 불을 끄고 있던 동네 사람들이 모두 산속으로 도망쳐 버려 마을은 텅턴 비어 있었고 집들이 불타고 있었다. 경찰이 차에어 내려 조심조심 마을로 들어가는데 바로 김규창 순경의 어머니가 검붉은 피를 흘리며 죽어있었다. 이에 경찰들이 흥분하여 이잡듯이 마을 뒤졌으나 개미 한마리 보이질 않았다. 이때 고무생(41)여인이 경찰의 정지 명령을 듣고도 도망치다 총에 맞아 절명했다.
휴전 4일째인 5월 1일, 연대장 김익렬은 정보파견소로부터 오라리 마을에 불을 지른 것은 폭도들이 아니라 대청단원들이 장례식에 참석차 왔다가 분풀이로 지른 것이라고 보고 했다.
이에 연대장은 제주군정장관 맨스필드를 만나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김익렬: 군정관님, 오라리 마을 방화사건은 대청과 서청단원이 보복차원에서 불을 지른 것입니다.
군정관: 그래요? 동화여관에 미CIC와 6사단 정보참모부 간부들이 있으니 그들과 상의하시요
그래서 연대장 김익렬은 유격대가 한 짓이 아니고 경찰과 서청단원이 한 것이라 보고 하자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맨스필드 군정관은 폭도들이 4월 29일 2명의 남자를 납치하고, 30일 임산부 여인을 죽인 것으로 4.28 평화 협상은 깨졌고, 경찰 가족을 죽여서 경찰이 총을 쏘아 그들을 몰아냈다고 하였다. 김달삼이 김익렬을 이용한 결론 이었다.
김익렬 연대장은 대청에서 불을 지른 것이라 하였지만, 미 군정장관은 폭도들이 사람을 먼저 죽였다고 강경하게 주장하였다.
그러자 김익렬은 부하들을 보내 제주읍에서 방화 주범인 대청단원 박 씨를 붙잡아 감금했다. 이때부터 유언비어가 제주도민을 흥분시키게 된다.
유언비어는 "시간을 벌기 위해 반도들의 술책에 연대장이 기만당했다. 반도들은 시간을 벌어 전열을 정비하여 대대적인 기습을 준지하고 있다. 연대장이 포로 두목과 내통하고 있다"는 것이고 이 내용은 즉시 맨스필드와 조병옥에게 보고 되었다.
연대 내에서도 "연대장이 폭도들을 기만하여 폭도 전원을 귀순시켜 놓고 일시에 몰살하려 한다"는 유언비어가 폭도들을 흥분시켰다. 김익렬 연재장은 좌우에서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에 경찰이 평화협상을 반대한 이유는 경찰이 제주도에서 추방되는 것과, 비밀리에 경비대와 폭도가 회담을 하였고, 평화협상이 되면 경찰과 조병옥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결국은 경찰은 무장해제가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맨스필드는 분석하고 있었다.
당시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 보고서에는 "9연대장 김익렬이가 사건을 평화적으로 수습하기 위하여 인민군 대표와 회담하여야 겠다고 사방으로 노력 중이니 이것을 교묘히 이용한다면 국경의 산토벌은 억제할 수 있다는 결론을 얻어 4월 하순에 이르기까지 전후 2회에 걸친 군책과 김 연대장의 면담하여 금반 구국토쟁의 정당성과 경찰의 불법성을 특히 인민과 국경을 이간시키는 경찰의 모략 등에 의견의 일치를 보아 김연대장은 사건의 평화적 해결을 위하여 적극 노력하겠다고 약속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198쪽에 "협상 사흘만인, 5월 1일 우익청년단이 제주읍 오라리 마을을 방화하는 세칭 '오라리사건'이 벌어지고, 5월 3일에는 미군이 경비대에 총공격를 명령함에 따라 협상은 깨어지고 이후 제주4.3사건은 걷잡을 수 없는 유혈충돌로 치단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이것은 당시에 주둔하고 있는 미 군정세력을 몰아내는 명분을 만들려는 의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경찰과 군인의 상호 견제가 가져온 것처럼 묘사하여, 마치 본인들인 유격대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 것처럼 하는 내용이다. 분명 죄없는 여인을 죽이고 경찰을 죽이고 민간인을 죽였기에 대청이나 서청도 출동했고, 모두가 짜놓은 각본에 마을 사람이 산으로 피신하는 바람에 그 폭도들을 찾으려다 집에 불을 질렀다. 물론 이것은 과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6.25전쟁 비정규전에 보면 그들은(빨치산) 집이나 곳곳에 은신하여 진출하는 군.경에 뒤에서 역습을 하여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이러한 오열과 제2전선 부대들이 아군의 후방을 교란하여 유엔군과 국군의 전반적인 전투력을 저하시켰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여기에 제5연대 제2대대장 오일균 소령은 김달삼과 접촉하면서 경비대는 토벌작전 보다, 정치적 사상적으로 대원들을 교육시켜 세포조직을 확대하여 김익렬 연대장과 일부 장교를 암살하고 9연대를 반란군으로 하기로 합의 한다. 오일균 소령의 계락에 의하여 김달삼은 연대장 김익렬 소령의 의중을 알아보기 위하여 만난 것이다. 4월 하순까지 2회에 걸쳐 제주 인민군 군책과 김익렬 연대장이 만났다.
제4절 5.3사건
48년 5월 3일 오후 3시경 김익렬 연대장에게 한 건의 보고가 들어왔다,
"연대장님, 산사람 200~300여 명이 귀순한다 합니다"
9연대 병사 7명과 미군 병사 2명 외 드루스 중위가 자수자들을 산에서 인솔해 오고 있었다. 이때 괴한 약 50여 명이 카빈.경기관총.99식 소총으로 무장하고 귀순자들을 공격하였다. 이 사건으로 귀순하던 인원들은 다시 산으로 도망치고 몇은 총에 맞아 숨졌다. 총격전 끝에 괴한들 몇명이 쓰러지자 이들은 부상자를 버리고 도망갔다. 경비대원들이 부상당한 괴한을 수습하여 연대로 돌아와 취조를 하였다.
취조관: 소속이 어딘가?
부상자: 제주 경찰서 문용채 서장 소속 특공대입니다. 상부의 지시에 의해 폭도와 미군과 경비대 장병을 사살하여 폭도들의 귀순을 저지하라는 임무를 받았습니다.
할 말을 잃어버린 연대 정보장교와 미군 중위 드루스가는 바로 문용채 서장을 찾았다.
경비대/미군: 서장님은 폭도 귀순자들을 경호하는 경비대원과 귀순자들과 미군까지도 죽이라고 특수경찰을 보냈는데 이럴 수가 있소? 붙합힌 경찰 포로가 직접 진술한 내용이요.
문용채: 뭐라고요? 나는 모르는 일이요. 철저히 조사해 보겠습니다. 그자가 경비대와 경찰을 이간질 하려 계획적으로 그렇게 한 말인지도 모르는데 부상자 한 명의 말만 듣고 이렇게 흥분하면 되겠습니까? 우리가 만일 계획했다면 완벽하게 하지 무엇 대문에 부상자를 두고 가겠습니까? 경찰은 귀순자를 막을 하등 이유가 없습니다.
경비대원과 미군은 처음 제주경찰서를 찾을 때는 살기등등하던 사람들이 문서장의 달변에 눌려 아무런 말도 못하고 돌아섰다. 오히려 폭도들이 그렇게 하고도 남을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였다.
다음 날 경찰진압군사령관 김정호는 문용채서장의 말을 두둔하고 나왔다. 이번 사건은 경찰과 경비대를 이간시키기 위해서 폭도들이 경찰로 가장한 소행이라 하였다.
오라리 방화사건과 귀순자 공격사건이 있자 김달삼은 전 폭도들에게 "김익렬 연대장은 약속을 위반한 배신자다. 우리는 좌시하지 않고 결사 보복하겠다"고 선포하고 유격대의 무참한 공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김달삼은 남한 건국 5.10선거는 반대하고 북한의 8.25선거에 참여해야 했기 때문에 평화협상은 김익렬을 최대한 이용해서 폭도들에게 유리하게 하기 위한 작전이었다.
제5절 김익렬과 조병옥의 싸움
48년 4월 말, 소련은 UN에서 "미군정이 어떻게 했으면 인민이 경찰에 항거하게 하여 경찰이 인민을 처참하게 죽이게 하느냐"고 제주 사건을 가지고 소리를 높이자, 미국은 입장이 난처하게 된다. 이에 미국은 하지 중장에게 "제주도 사건을 조속히 해결하라"고 하였고, 하지는 딘 소장에게 제주도 사건을 조속히 해결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48년 5월 5일 12시경, 제주중학교 미 군정청 회의실에서 군정장관, 딘소장, 민정장관 안재홍, 경무부장 조병옥, 경비대 사령관 송호성 준장, 제주군정장관 맨스필드 대령, 제주도지사 유해진, 경비대 9연대장 김익렬 소령, 제주감찰청장 최천 등이 모였다.
맨스필드 대령: 제주 폭동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사전에 조직 훈련된 계획된 것이니 군경의 대병력을 투입하여 철저히 토벌해야 한다.
9연대장: 입산자들을 저지하려면 폭도와 일반민중 동조자를 분리시켜 폭도를 도민으로부터 고립시켜야 양민의 피해가 적으며 빨리 진압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무력진압과 선무공작을 병용하는 작전을 전개해야 하며 선무활동에 응하지 않은 자는 토벌해야 한다. "작전의 통일성을 위해 제주경찰은 나의 휘하에 있도록 해 주십시요"하였다.
딘소장: "즉시 경찰을 지휘하시오!"
그러자 다음 발언권을 가져간 조병옥이 불을 질렀다.
조병옥: "김익렬 부친이 공산주의자였오?"
김익렬: 뭐라?
갑작스레 회의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김익렬이 조병옥의 멱살을 잡고 흔들어 댔다. 당시 통역관이 엉터리로 "연대장은 공산주의자이오, 나쁜놈이다"라고 욕설을 한다고 거짓 통역을 하자 김익렬은 통역관을 발로 차버렸다. 이에 딘소장은 자리를 떠나 헌병을 불러 두 사람을 떨어지게 하였다.
제주도를 다녀온 딘은 5월 6일 기자회견을 하여 " 지금 경찰과 국방경비대가 협력하여 불원 완전히 평정되어 평화적 질서를 회복할 것이다" 라고 발표했지만 마음은 불쾌하였다.
그리고 5월 6일자로 제주도 9연대장을 보직 해임하고 후임에 박진경 중령을 임명하였다. 그리고 정부장교 이윤락 중위를 즉시 파면하여 구속하였다. 박진경 중령은 학병출신으로 영어를 잘하며 딘이 잘 알고 있고, 해방 전 일본군 소위로 제주도에서 근무하여 한라산을 잘 알고 있어 박진경을 임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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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경 연대장('18.12.22~'48.6.18)
미군 지휘하에 경비대 제11연대장으로서 제9연대 1대대를 배속받아 4개 대대로 제주 4.3사건을 일으킨 남로당 유격대에 대한 진압작전을 펼치다 군내 침투한 남로당 프락치에게 암살당한다.
박진경은 18년 12.22일 경남 남해군 남면 홍현리에서 출생한다.. 진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오사카외국어대학 영어과를 졸업 후 제2차세계대전 시 학병으로 징집되어 일본 마쓰도 육군공병 에비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공병소위로 임관하여 제주도에서 복무하였다.
그리고 8.15 광복 이후에는 부산에서 우파단체인 경남국군준비대와 부설군관학교에서 활동하다 제5연대 창설요원으로 1946년 1월 29일 이등중사로 입대하여 우수하사관으로 추천되어 소위로 현지 임관한다.(46년 4.25) 그러다 연대 부관을거쳐 송호성 조선경비대 총사령관 전속부관과 비서실장을 을 거쳐 경비대 사령부 인사국장이 되었다. 그리고 1948년 5월6일~15일까지 제9연대장, 48년 5월 15일부터 6월 18일 새벽 암살 시가지 제11연대(48년 5월 1일 창설됨)장(33일)을 역임한다. 6월 17일까지 4.3사건 진압작전을 끝내고 그날 밤에 제주도 지사가 베푼 대령진급 축하연에 참석하고 돌아와 취침중에 부하들인 남로당 프락치들에게 암살 당했다. 당시 제9연대는 사상적 문제인 제1대대장 오일균 소령을 사령부로 보내고 11연대의 2개 대대와 제9연대의 1개 대대로 3개 대대(대위 서종철,대위 김용주, 대위 고근홍)였으며 5월 30일부터 4개 대대로 진압작전을 전개한다.
한편 48년 5월 6일, 박진경 중령이 항공편으로 서울을 떠나 제주도로 향하자, 이를 탐지한 남로당 중앙당은 급히 지도원을 제주도로 보낸는데, 제주도에 도착하여 5월 10일에는 남로당 제주도당 김달삼,김양근 및 경비대 남로당 프락치 1대대장 오일균, 정보장교 이윤락, 대대장 수행장교 소위 나희필 등 4명이 연대장 암살을 게획하고 6월 18일 문상길 프락치 등이 실행했다.
박진경 연대장의 공과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다. 그 중에 가장 큰 것이 많은 무고한 인원을 살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박연대장이 실행한 유격대 토벌적전으로 숨진 인원은 28명에 불과하며, 오히려 폭도와 주민의 격리 활동으로 이 시기부터 산에 올라간 많은 인원이 산에서 내려오기 시작했다. 일설에 6,000여 명의 양민을 학살한 것처럼 회자하고 있으나 이는 제주도 사건에 전체적인 숫자이고 박대령은 불과 한달 여 재임했다. 당시 그 밑에 있었던 채명신(파월 사령관출신) 9-1-3중대 소대장은 경찰이 초기에 처리를 잘못하여 많은 주민이 입산하였으나 선무공작으로 많은 인원이 하산하게 되었다고 증언했다. 이세호 참모총장 출신(당시9-1대대 부대대장)은 인격자라 증언하고, 유근창 함참본부장 출신(당시11연대 군수과장)은 양민을 무조건 학살하지 않았고, 모두들한테 존경받는 인품이라 증언했다. 그의 추도비는 제주도에 현존하고 있고 나는 그 곳에 몇 번 가서 묵념을 올렸다.---
제 8장 남로당 제주도당 5.10선거 반대
제1절 5.10선거를 저지하라
제주도는 제주 4.3폭동 후 통금이 오후 8시부터 다음 날 새벽 4시까지였으며, 제주 마을에는 위급한 사건이 벌어져도 한밤중에는 경찰이 거의 출동하지 못하고 있었다. 경찰이 폭도들에게 눌리고 있었다.
폭도들은 이러한 틈을 이용하여 전단지를 만들어, "경찰에 대항하기 위해 제주도민이여 단결하자! 투표하면 인민의 반역자이다! 단선에 참가한 매국노를 단죄하자!"였다.
밤마다 이들이 설쳐대며 주민들에게 "단선은 분단이요, 반대하면 통일이 된다. 이 통일을 위해 김구선생이 단선을 앞장서 반대하고 김일성을 만나 협상하기 위해 평양을 방문하였다. 오직 이승만만 권력에 눈이 어두워 단선을 지지하고 있다"고 설득하고 설명하니 제주도민들은 선거하는 것이 좋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선거반대운동에 협력하게 되었다.
폭도들은 1948년 5월 10일 선거를 반대하기 위하여, 그들은 지서와 우익단체를 기습하고 국회의원 입후보한 자들의 집에 가서 후보를 사퇴하게 하였다.
김달삼은 한 달만 참으면 제주도는 해방이 되고, 그렇게 되면 해방군이 경찰이 되고 토지도 나누어 주고, 있는자 없는자, 착취자의 자본주의가 아니라 공평하게 나누어 갖는 공정한 세상 평등한 세상"이 된다고 선전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무상몰수 무상분배 는 천금같이 귀중한 소식이었다. 다른 소식을 들을 수 없는 많은 도민들이 그 말을 믿고 성금도 갖다 주고 손자 말도 잡아서 유격대의 부식에 쓰라고 제공하였다.
매일 밤에 서머봉. 살봉. 원당봉. 오름에는 봉화가 오르니 제주도민들은 불안하면서도 흥분하였다.
제2절 남로당 제주도당 5.10선거 지지자 학살
48년 5월 1일 새벽 1시 폭도들은 제주읍 도평리 선거관리위원장 이원백(57)의 집을 습격하여 낫과 도끼로 죽였다. 이어서 같은 날에 이 동네 우익청년 박형종(25) 집도 기습하여 죽창으로 찔러 죽였다. 5월 5일 새벽 2시에는 제주 화북마을 임형권. 장순정.안여창이 산 사람들에 의해서 죽었다.
제주읍 오등리에는 170세대 800여 명이 실고 있었다. 오등리 죽성마을 청년들은 5.10선거 지지운동을 하고 있었으나 마을 사람들은 폭도들의 학살이 무서워 산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대청단장 강익수와 선거관리위원장 김경종(42)은 피신하지 않고 투표함을 마을로 옮겼다. 5월 8일 오전 9시에 김경종 집에 폭도들이 들이 닥쳐 그의 어머니와 딸(12), 처(42)와 2살자리 아들을 죽창 등으로 죽였다. 오등리 마을은 대청단원 등 선거관리위원 할 것없이 폭도들은 무자비 하게 죽였다.
이렇게 하여 도평.신촌.북촌.모슬포.이호 마을의 선거관리소가 습격을 받아 선거인 명부가 탈취당하고, 투표함을 박살내버렸다. 폭도들은 주민들에게 "우리가 혁명을 위해 밤낮으로 애쓰고 있으니 여러분도 각 지역에서 협력해 주시요"라고 일장연설도 하고 다녔다. 여기서 혁명이란 바로 공산화 통일을 말한다. 주민들 일부는 집으로 가지않고 산으로 도망쳤다. 선거에 참여하지 말라고 하면서 선거에 참여하는 자들을 죽였다.
신고를 받고 경찰이나 서청단원들이 출동해 보면 벌써 대부분 정보가 누출되어 폭도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이로인해 점점 경찰과 서청단원들은 마을 사람들을 폭도들의 협력자로 되어 공격목표가 된 것이다.
성산면 수산리 향사마을에서는 주민들 약 50여 명이 투표를 위해 순서를 기다리는데 오전 9시 쯤에 약 30여 명이 철모를 쓰고 투표소로 오고 있어 경비대 인원인줄 알고 안심하고 있는데 공포를 쏘아대며 도망치는 사람들에게 총을 쏘아 죽이고 마을 사람들로 하여금 투표함과 투표용지를 모아놓고 불을 질렀다. 주민들은 경찰에 신고도 제대로 못했다. 왜냐하면 신고를 받은 경찰이 늦게 출동도 하지만 와서는 폭도들과 동네가 내통하고 있다고 오히려 화를 입는 경우가 많아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형편이었다.
5월 10일 오후 중문면 상예2리에 폭도들이 습격하여 대청단장 부부 등을 납치해서 소나무에 묶어놓고 대창으로 학살도 했다.
이렇게 폭도들은 사전에 투표소를 습격하여 방화나 선거위원을 죽이고, 선거기록을 탈취해 소각해 버리기도 하여 선거를 방해하고, 선거 당일에는 투표소에 불을 지르고 토표용지를 파손하거나 투표하러 온 사람을 죽이거나 투표담당 인원을 무자비하게 죽이는등 악행을 서슴치 않았다.
이렇게 폭도들은 5.10선거를 학살과 폭력으로 저지하여 3개 선거구 중 2개 선거구가 무효화 되었다.
함덕지서에서는 48년 5월 13일에 후원회장이라는 자가 음식을 차려놓고 순경들을 모이게 해놓고 기습하여, 경찰관 여렷이 현장에서 죽기도하고 몇명은 붙잡혀 산으로 가서 나무에 매달려 죽창으로 죽기도하여 7명이 죽었다. 폭도들은 경찰에게 고기를 팔았다고 죽이는 경우도 있었다. 한림면 명월리에서는 면직원을 납치하여 죽이고 농가 6채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폭도들은 경찰이나 공무원 기족과 그들의 집을 기습하여 죽이거나 불지르고, 경찰지서 등도 무차별 공격하여 불태워버렸다. 그러다 토벌대가 들이 닥치면 모두 산으로 도망쳐 숨어버리게 된다. 이에 화가 난 토벌대가 해당 마을에 불을 지르기도 하면서 결과적으로 제주도 전역은 폭도들이 불지르고 토벌대가 불지르고 이래나 저래나 국민들의 인명과 재산피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조직적으로 5.10선거를 방해하였다.
이상의 내용들은 사실 진상조사보고서에 발포사건이 기점이 되어 경찰과 서청의 탄압에 저항한 무장봉기라 하고 있다. 그러면 이와같이 우익인원이나 단체, 그리고 경찰지서.면사무소. 투표소 등을 약탈하고 파괴하며 관련을 무자비하게 살해한 것이 과연 무장봉기란 것인지 의문스럽다. 그 원인 제공이란 상대적이다. 우익이나 군경에서는 무장세력이 먼저 사건의 발단을 일으켰으며 그래서 진압을 위해 발포했다는 것이다.
제3절 간첩, 성시백 국회의원 후보자 공작
박헌영이 위조지폐사건으로 국내에서 지탄을 받게 되자, 김일성은 남조선 좌익정당을 남로당으로 끌여들여 복한은 북로당의 김일성, 남쪽은 남로당 책임자를 허헌이 되게 하여 본인의 정적 대상인 박헌영을 끌어내리게 된다. 박헌영이 결국 도피하여 북으로 들어와 본인의 손 안에 있게 되자, 김일성은 남로당을 통해 남한을 공작하는 것이 아닌 북로당에서 직접 남한을 공작하고 정보를 수집하고자 하였다.
여기에 대남 연락부장 임해와 권위있는 성시백을 동원하였다. 김일성은 성시백에게 영웅 훈장을 수여하고 격려해 준다. 그는 47년 5월 10일 새벽 해주에서 출발하여 11일 부산에 도착하여 곧바로 서울로 갔다. 그는 바로 그의 비서들을 이용하여 이발소.양품점.대포 집.목용탕. 요정 등 36곳을 사들여 그들의 아지트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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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제도 검사와 보도연맹
평안남도 안주 출신. 1946년 제1회 판검사 특별임용시험을 통해 서울 지방검찰청과 대검찰청에서 검사로 활동했다.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이념이 대립하는 혼란속에, 보도연맹은 1948년 12월 시행된 국가보안법에 따라 극좌사상에 물든 사람들을 사상전향시켜 이들을 보호하고 인도한다'는 취지와 국민의 사상을 국가가 나서서 통제하려는 이승만 정권이 대국민 사상통제를 목적으로1949년 6월 5일에 조직했던 대한민국 반공 단체로, 보도연맹이라 부른다.
이에 법무부.국방부.내무부. 사회지도자들의 동의를 거쳐 정부 인사의 주도로 보도연맹이 만들어졌다. 오제도는 1949년 보도연맹 창설 때 지도위원을 맡았다.
박헌영의 수하 거물간첩 김삼룡과 이주하를 체포하고 서울 남조선 로동당 총책 홍민표를 검거, 전향시켜 남로당원 33만명이 자수하여 전향한다.
이에 남로당의 다이너마이트 '남조선 불바다' 폭동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남로당을 와해시켜 남한내 공산주의 활동을 사실상 모두 와해 시켰다. 이로인해 거물간첩인 성시백.김삼룡.이주하 등을 체포하여 6.25전쟁시 박헌영의 20만명 무장봉기 게획이 무산 되기도 햇다.
남로당 출신 인사들이 주를 이뤄 보도연맹이 결성되었기 때문에, 이들은 전향한 자들로서 6.25 당시 북한군에 동조할 우려 때문에 학살당한다. 이것이 보도연맹 사건이다. 그러니 일반적으로 이승만 정권이 그런 짓을 벌인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은 6.25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반공교육 및 순화교육을 거쳐 사회에 적응하여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갔을 것이다.
보도연맹 사건은 6.25전쟁의 또 다른 비극으로 기억되어야 한다. 너무도 많은 인원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죽어갔다. 어떤 재판이나 형식을 취할 겨를도 없이 전쟁 중이라 군경이 전향서를 들고 차에 태워 계곡이나 골짜기 등에 데리고 가 무차별 사격으로 죽였다. 사실 그 당시 전향서에는 꼭 남로당원이나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도 그 당시에 실적을 올리려고 동네마다 마구잡이로 명단에 올려 본인이 아무런 행위를 한적이 없는데도 명단에 들어가 끌려가 죽어야 했다.
국민방위군 사건은 무엇인가?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한만 국경선에 도달할 순간, 중공군의 개입에 유엔군은 후퇴를 해야 했고, 다시 수도 서울을 적에게 내주는 결국 1.4후퇴로 이어진다.
따라서 부족한 병력 수를 채우기 위해 100만여 명에 달하는 청장년(제2국민병)을 남쪽으로 후송하여 교육을 시켜 군에 충원하는 계획을 수립했다. 1950년 12월 15일, 국민방위군 설치법을 국회에 상정하여 12월 16일 공포하여 발효시켰다.
이에 총 동원된 인원이 50만이란 설도 있고 20만이란 설도 있지만 아마도 30만이 맞는다고 본다. 허나 간부들이 예산을 횡령하고 질병에 대한 조치를 취하지 않아아사자, 병사자, 동사자가 속출하여 무려 3만여 명이 죽어나갔다고 한다.
공식으로 남아 있는 기록에는 1,000~2,000명이라 하나 실제로는 100,000명이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1951년 1월 15일부터 부산에서 열린 피난국회에서 정부의 대책을 추궁하게 되고, 결국 2월 17일 36세 이상의 장정들을 귀향시키고 5월 12일 국민방위군은 해산되었다.
최초 이승만은 김두한을 사령관으로 임명하려 했으나 반대가 심하여 씨름꾼 김윤근(신성모 장관의 사위?)을 육군 준장으로 임명하였다. 이 사건으로 신성모와 부통령 이시영이 물러났다. 핵심범법자인 김윤근 등 5명이 사형에 언도되어공ㄱ개 처형되었다.
그들은 횡령한 비용으로 20여 명의 국회의원들에게 공작비와 여비의 명목으로 제공되었다 한다.
전국에 52개 교육대를 설치 운용했다. 나는 이 교육대에서 돌림병이나 기아로 순직한 방위군을 찾으러 전국의 교육대를 거의 찾아가 보았다. 이로 인해서 영천 은해사 입구에서는 50여구를 발굴하였고, 제주 강정리에서도 발굴 하여 1명의 신원을 유전자 감식으로 확인했다.
하지만 울산 서상리나 창녕. 김해, 영천 고경지역, 대구 경산 삼성기념관 지역 등 아직도 발굴행야할 곳이 너무도 많다. 이미 진상조사단에서 대부분 조사하여 실태를 파악해 놓았지만 사실 여기서는 피해자들의 녹취에 중점을 둔 느낌이고 지역의 지표조사는 좀더 전문적인 요원의 빠른 실태조사가 요구되는데 보도연맹 피해자처럼 그 유족이 목숨걸고 나서질 않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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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제도와 홍민표, 그리고 박헌영의 서울 불바다 계획 차단
앞에서 언급한 대로 정판사위조지폐사건으로 북으로 도망쳐 있던 남로당 총책 박헌영은 그의 정치적 야심을 버릴 수가 없었다. 박헌영은 제주 4.3사건과 여순 14연대 반란사건이 토벌군에 진압고 ,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불안감을 갖게 된다.
따라서 남한 내에서 자신의 대행임무를 하고 있던 김삼룡에게 1949년 4월을 기해 남로당원을 총동원하여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어 남조선을 해방시킬 것이라며 서울시당 위원장인 홍민표에게 그 임무를 맡기라고 지령을 내렸다.
이에 김삼룡은 공작금 2,000만원을 홍민표에에 주면서 수류탄 1만개를 확보하고 당원 6만명을 동원하여 이무를 수행하라고 지시하였다.
지시를 받은 홍민표는 그러나 이미 숙군작업이 진행되어 군의 세포들을 이용한 탄약확보가 물건너 갔고, 군의 동조를 받기가 어렵게 되었다는 것을 너무나 잘알고 있었다. 여기에 군과 연관된 사회 각분야에도 세포조직이 들통나 검거되면서 홍민표는 거사 일을 차일 피일 미루게 되었다. 또한 일부 조직책들이 수류탄 상자를 옮기다 경찰의 불신검문에 걸려 압수당하기도 했다.
그래서 홍민표는 결국 김삼룡을 찾아가 서울에서 폭력혁명은 어렵다, 더구나 제14연대 반란도 실패하면서 군지원없이 민만인 당원만으로 폭력혁명은 불가하다고 보고했다.
그러자 김삼룡은 이 사실을 북에 있는 박헌영에게 보고 했고, 박헌영은 홍민표를 북으로 소환하라고 지령을 내렸다. 이에 김삼룡은 소환장을 홍민표에게 주면서 평양으로 가라고 했다.
그러나 이미 홍민표는 평양으로 가면은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전향하기로 마음을 먹고, 그냥 자수하면 당원들에게 암살당할 위험이 있기에 경찰에 체포되는것처럼 꾸미기 위해 대낮에 을지로 한복판을 걷다가 경찰의 불신검문에 걸려 체포되었다.
그는 오제도 특별수사본부장을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하여 "서울 불바다 계획"을 떨어놓았다.
"오제도와 홍민표의 특별한 저녁식사"
심문을 받으면서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 오검사가 밖에서 식사를 가져오려하자 홍민표는 오검사에게 오검사 집에 가서 식사를 하고 싶다고 한다. 어이없는 요청이었지만 오제도는 그렇게 하자고 하고 집으로 갔다.
사실 홍민표 속셈은 김삼룡이나 본인들 남로당의 우두머리들이 호의호식하기에 분면 적어도 특별 수사반장인 오제도는 특별히 잘살고 있으리라 믿어 한번 화인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런데 오제도 집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홍민표는 놀랐다. 낡은 구두에 허름한 집이 믿기지 않았다. 들어가 내부를 보니 이건 완전히 가난한 민초들의 집 수준이었다. 저녁을 달라는 오제도의 말에 머뭇거리는 아내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사실 오제도 집에는 손님을 맞이하여 식사를 내놓을 만한 반찬거리도 식량도 부족했다고 한다.
놀란 홍민표는 여기서 탐복하여 세포조직 명단을 내놓게되고, 본인이 직접 서울각지부장들을 소집하여 설득해서 귀향토록 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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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특무부대장 김창룡 소장(1916~1956.1), 함남 영흥 출신. 지역에서 학교를 마치고 만주로 건너가 남만주 철도주식회사에 취직하였다.
6.25전쟁을 전후하여 숙군과 남로당 세력을 일망타진하여 대한민국을 위기에서 구한 반공주의자의 상징이다. 1947년 군에 입대하여 일생을 반공을 위해 살았고 그 도정위에서 대한민국 현대사의 거룩한 발자취와 또 한편 그로인해 많은 악연을 남기고 삶을 마감한 군인이다.
김창룡의 활동무대는 중국 만주지역과 북한, 그리고 남한이다. 이 지역들은 모두가 공산주의와 깊은 관계가 있다. 중국 동북부 만주는 김창룡이 1940년대 5년간 활동한 곳이다. 만주는 1917년 볼셰비키 공산혁명으로 세워진 소련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곳으로 1940년 관동군 헌병교습소에 입소하여, 일본군 헌병보조원으로 근무하였다. 여기서 소만 국경부근으로 파견되어 중국공산당과 소련에 대한 첩보를 수집했다.
1943년, 상하이에 파견되어 중국공산당 거물 왕진리를 체포하여 그를 이용한 소만 국경일대에서 활동하던 지하조직을 색출한 공으로 일본 헌병 오장으로 특진했다. 1943년 9월부터는 만주일대에서 항일조직을 색출하는 임무도 수행한다.
해방후 고향으로 귀향했으나, 1945년 11월 김일성.소련에 의해서 전범으로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탈출하였다. 그러다 다시 체포되여 사형을 또 언도받았으나 탈출하여 월남하였다.
이후 만주군 장교출신들의 추천으로 국방경비대에 입대하여, 일반 사병 및 정보하사관으로 근무중에 1947년 조선경비사관학교 제3기로 입교했다. 단기교육을 마치고 그해 4월에 소위로 임관, 국경 제1연대 정부주임의 보좌관으로 활동하면서 숙군작업을 벌여 군내부의 좌익세력을 숙청하였다.1948년 1월 중위로 , 다시 정부 수립후 대위로 진급하여 방첩부대 전신인 정보국 3과(SIS:특별조사과)에서 좌익 혐의자 조사를 담당했다. 그해 10월에 여순반란사건이 발생하자 대대적인 숙군작업으로 소령으로 특진했다. 박정희 전대통령도 이때 체포되었다.(광주 4연대 작전과 재직중 여순사건 반군군 진압을 위해 출동)
1949년 6월 육군 정보국 방첩대장이 된 직후 벌어진 김구선생 암살범 안두희를 특무대 영창으로 이감, 특별 배려하면서 배후 은폐에 가담했다는 구설에 휩싸여 있다.
또한 전쟁 중에 1952년 부산정치 파동(이승만의 재선을 위해) 부산형무소의 무기수들을 사살한 후 총을 쥐어 주고 빨치산들이라고 속이고 52.5월 25일 부산을 포함한 경남과 전라남북도 계엄을 선포하고, 7월 7일까지 1차 개정헌법이 공포될 때까지 임시 수도인 부산에서 벌어진 정치적 소요사건이다. 이것은 1950년 5.30 선거결과 국회가 60% 이상이 무소속이 당선되면서 이승만의 대통령직 연임이 불투명해지자, 재집권을 위해 대통령 직선제와 상하 양원제를 골격으로 하는 개헌안을 내놓은 동시에 세력 확장을 위해 자유당을 창당했다.
하지만 국회에서 개헌안이 부결되자 장면 국무총리를 해임하고 장택상을 임명했다. 이어 계엄령을 선포하고 개헌에 반대하는 국회의원을 구속하는 등 국회기능을 마비시켰다. 이후에 계속하여 이승만을 비판하는 세력이나 언론사 등에 대한 테러와 압력이 가중되면서,국회의원 50명이 탄 버스를 납치하여 헌병대로 연행 공산주의자와 결탁했다는 혐의를 씌우기도 했다. 1952년 7월 4일 경찰과 군인이 의사당을 포위한 가운데 기립표결로 7월 17일 제1차 개정헌법이 통과 되고, 7월 28일 비상계엄이 해제되어 부산정치 파동은 일단락 된다. 여기에서 주동적 역활을 김창룡이 기획하고 통제했다는 것이다.
1950년 6.25전쟁 이후 경남지구 방첩대 대장을 거쳐, 10월 군.검.경 합동 수사본부장으로 재직했다. 1953년 육군 준장, 1955년 육군 소장으로 진급했다. 1956년 1월 30일 과거 부하였던 육군대령 허태영의 지시를 받은 특무대 출신 신초식 등에 의해 저격되어 순직했다. 육군 중장으로 추서되고 최초의 국군장으로 안양의 사설 묘역에 안장되었다가 1998년 대전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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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시백]
성시백은 북로당 남반부 정치위원회 총책이었다.성시백의 밑에는 세포원이 200여 명이나 되었다. 성시백은 6척의 배를가지고 무역을 하였는데 해주와 중국을 통하여 밀무역을 하였다. 그는 북로당 직영 청도 조선상사로부터3만 달러를 공작금으로 지원 받고 북한에서 사용하다 폐기된 조선은행권을 지원받아 거의 돈으로 매수하여 사람을 사고 사상교육을 시켰다. 여기서 나오는 이익금 등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문화에파고들어 남한의 비밀을 빼내 평양에 보고하고, 이 돈으로 조선.중앙일보도 창간하였다. 그 책임자가 이우적이고 제주도 사람 고준석이었다.
주로 박헌영에 반대자들이 성시백에 협력하고 있었으며, 사로당의 강병도.이우적, 민전 중앙상임위원 김광수. 일본 공산당 중앙위원을 지낸 송선철. 서기장을 지낸 김기도 등 20여 명이 성시백의 밑에 있었다.
성시백은 황해도 태생으로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여 중국공산당 프락치로 장개석 군대 중령이었다. 그는 1947년 한 해 동안에 막대한 자금과 조직력으로 장사를 하여 사업가로 변신하여 기반을 다졌다. 김일성은 남로당과 전혀 관계없이 성시백을 통하여 독자적으로 정보를 수집하였다. 성시백은 막대한 자금력으로 박헌영과 관계없이 남한의 국회를 장악하려고 후보들을 돈으로 매수하는 작전에 들어간다.
당시에 특별수사본부의 조재천 검사는 위조지폐사건의 재판이 끝나자 공산당의 협박이 심하고 과로 등의 이유로 오제도 검사가 임명되게 되었으며 성시백을 체포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드디어 5.10선거를 위한 국회의원 입후보가 결정되어, 198명을 뽑는 선거에 937명이 입후보하였다. 남로당 출신은 박헌영의 지령에 아무도 없었고, 선거 반대 투쟁을 벌이게 된다.
성시백은 성분조사를 937명을 대상으로 실시하여 포섭자를 골랐다. 직접 유세장에 나가기도 한다. 선거는 5.10일 남로당의 방해공작에도 참가자는 96.5%이었다. 그러나 제주도는 50%미만으로 가장 저조하였다. 선거결과 이승만 계열의 대한 독립촉성국민회의 소속이 55명, 김성수.장택상.조병옥 계열의 한국민주당이 29명, 대동청년당이 12명, 민족청년당이 6명 당선되었다. 하지만 김구계열의 한국 독립당은 9명이 입후보하여 한 명도 당선되지 못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당선된 198명 중에 성시백이 지원한 후보는 62명이었다. 만일 남로당이 선거에 참여했다면 70%까지는 가능하여 국회에서 대통령을 뽑으니 남로당 출신이 대통령으로 당선될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1950년 2월경부터 정보당국은 본격적인 내사를 시작하여, 2월 10일에 남반부정치위원회의 본거지를 파악하고 최고 부책임장딘 김명용을 체포하고, 관련서류를 확보하였다. 서울 지방검찰청은 같은 달 12일 오제도 검사를 수사총지휘자로 임명, 1950년 5월 15일 오전 3시, 졸로구 효제동에서 체포하고 전쟁발발 후 6월 27일 처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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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로당의 5.10선거 반대 폭도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가.방화사건: 경찰관서 16개, 관공서 18개, 양민가옥 69호
나. 사망: 선거공무원 15명, 입후보자 2명, 경찰 61명, 일반공무원 128명, 폭도 330명
다. 부상: 선거공무원 61명, 입후보자 4명, 경찰 128명, 경찰가족 107명, 일반공무원 41명, 양민 384명, 폭도 131명ㅇ었으며 도로.교량 파괴 48건, 기관차 71건, 객화차 11건, 철도선로 65건 등이다.
선거결과로 초대 국회를 개원하여 의장에 이승만, 부의장에 신익희.김동권이 선출되고, 7월 17일 제헌헌법을 공포하고, 7월 20일 국회에서 이승만을 대통령, 이시영을 부통령에 선출한다. 이승만은 7월 24일 대통령에 취임하였고, 8월 15일 하지중장은 미군정이 끝나고 대한민국이 시작되었다고 공포하였다.
남로당 서울시당 홍민표도 김삼룡에게 여러번 5.10선거에 참여하여 국회를 장악해야 한다고 건의 했다가 묵살당하였다. 그는 차후 서울시당 간부들을 모아놓고 김일성과 박헌영 명령을 따라야 되느냐고 설득하여 모두 자수하게 하였고, 49년 9월 남로당원 33만명을 자수시켜, 1950년 6월 28일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후 서울에서 3일 동안 먹고 자고 놀면서 남로당의 폭동을 기다리고 있을 때에 남로당에서 폭동을 일으킬 수 없도록 결정적인 타격을 준 인물이다.
김달삼과 이덕구와 제주남로당 간부들이 "3일이면 북한 인민군이 남한을 적화통일 한다, 현재 북한 인민군이 수원까지 왔다"고 하는 거짓 선동에 제주 남로당원들이 속아서 결국 명분도 실효도 없이 폭도소리만 들어가면서 수많은 사람이 죽고 죽여 지금까지 그 고통이 계속되고 있다. 당시 선거에서 제주도는 선거인 85,517명 중 53,698명이 투표에 참여하여 62.8%가 참여하지만 북제주군 갑구 43%, 을구 46.5%등 2개 선거구는 과반수에 미달하였다. 선거 후에도 제주지역은 계속하여 습격과 방화, 그리고 이에 대한 진압작전으로 제주섬은 초토화 되어갔다.
제9장 제주도에 부임한 각 연대장의 작전
제1절 11연대장 박진경 중령의 작전
박진경은 이미 기록한 것과 같이 일본 대학 영문과를 나와 학병 출신으로 제주도 일본 사단에서 소위로 해방을 맞이했다. 부산 5연대 사병으로 있을 때 특채 임관되었다.
박진경은 48년 5월 6일 김익렬 연대장의 후임으로 부임하였으며, 48년 5월 15일에 9연대는 11연대에 배속되고, 부대를 재편하여 제주.모슬포.한림.서귀포.성산포에 병력을 부산 배치 하였다. 11연대 장비는 지프 1대, 쓰리쿼터 2대, 소총은 일제 99식 이고 무전기는 한 대도 없었다. 경찰에 비하면 무기가 한심한데 당시 미 제6사단 20연대장 브라운 대령이 제주에 오면서 최신무기가 11연대에 지급되었고, 연대는 3개 대대가 되었고 경찰과 합동으로 토벌작전을 합의 한다.
1. 세포 오일균과 문상길의 활동
이에 연대에 침투해 있는 세포들은 더이상 경찰과 합동작전을 연기하자고 말을 하지 못하였다. 오일균은 즉시 문성길 중위를 불러 이 내용을 김달삼에게 보고하였다. 그리고 작전상황을 즉시즉시 김달삼에게 알려주었다.
이러다 보니 경찰과 군경이 진압작전을 펼치면 폭도들은 벌써 은거하게 되고 매복하여 기습을 하게 됨에 따라 많은 피해가 발생한다. 이에 연대장이 오일균에게 "연대장이 직접 김달삼을 만날 테니 주선을 해 주시오!"하니 오일균은 뜻밖의 말에 놀라서 나와 세포 조직을 통해 김달삼에게 만남을 주선했다. '
그러나 김달삼은 즉시 한마디로 거절하고, 지대장 들을 소집하여 "어떠한 일이있어도 경비대원에게 총질을 하지 말라"고 훈시를 한다. 그리고 남로당원을 시켜 경비대를 환영한다는 대자보를 붙이게 하였다. 연대장과 경비대가 적개심을 갖지 않도록 하려는 개책이었다.
반면 박진경 연대장은 유격전에서 적과 양민을 구분하기 어렵다는 점과, 유격전은 정보가 가장 중요한데 정보가 새어나가지 않게 하여야 했다. 또한 유격대가 경비대의 활동이 공격인지 훈련인지 모르게 하여 밤낮으로 피로하게 하여 지치고 정신 못차라게 해야 한다고 봤다.
그래서 작전의 세부방침은 작전과장안 임부택 소령하고만 검토하여 결장하였다. 부대가 매일 출동하니 유격대는 훈련인지 공격인지 잘 몰랐고, 작전을 밤낮으로 하니 유격대는 큰 타격을 입게 되었으며 경찰은 군과의 협조된 작전으로 서서히 주도권을 잡아가게 되었다.
2. 토벌대의 무차별적인 작전의 피해
그동안 당하기만 하던 경찰은 특히 유격대에 반감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마을마다 색출작전을 하여 잡아들였다. 군 또한 제주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산에 있는 자를 내려오개 선무활동을 하되, 산사람에 대해서는무조건 체포령을 내렸다.
5월 10일, 남원지서 경찰들이 의귀리에서 투표에 참여하지 않은 7명을 체포하여 가자 "검거되면 죽는다"는 소문이 제주 전역에 퍼져 가며 마을 사람들이 산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연대는 5월 12일 제주읍 오등마을 부근에서 193명, 애월면 광명에서 25명, 14일에는 한림에서 5명을 연행하였다. 5월 16일에는 오등리와 오라리에서 166명을 체포하였다. 19일에는 송당리 교래리에서 여자 21명. 남자 179명을 체포하는 등, 경찰과 경비대는 5.12~5.27일까지 3,126명을 체포하고, 경비대에 저항하는 자 8명을 사살하였고 연행자를 조사하여 500여 명을 기소하였다.
이렇게 되자 마을마다 주민들은 순번제로 보초를 서고, 보초의 깃발과 나팔수와 징까지 동원하여 토벌대가 오면 산으로 도망치게 하였다. 그러다 미쳐 도망치지 못한자들은 토벌대에 걸려들게 되는데 주로 나이 많은 노인이나 아녀자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들은 입을 굳게 다물고 도망친 곳을 말하지 않기에 토벌대는 불속에 산채로 집어넣어 죽이기도 하고, 과거 유격대가 저지르던 보복을 재현하였다.
3. 11연대 폭도 포위작전 / 대령 진급
연대장 박진경은 제주도 사태를 희생없이 해결하려면 산에 잇는 자는 무조건 내려오라 하고, 산에서 내려오지 ㅇ낳고 도피한 자는 무조건 체포하여 수용소에 연금한 후 폭도를 가려내면 제주도 사태가 해결되리라 판단 하였다.
이 압박작전에 군경 4,000명이 참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작전은 이미 김달삼에게 오일균과 문상갈을 통하여 정보가 새 났고, 그들은 농민으로 위장하여 농사를 짓고 집안 일을 돌봄으로 위장한다. 따라서 작전의 성과는 그리 높지 못했다.
1948년 5월 31일, 박진경 중령은 오전 8시 30분, 직접 3대대를 지휘하여 대정면 동굴 속에 있던 폭도사령부를 공격하여 사살 2명. 포로 10명. 소총/죽창/전화기 등을 노획하였다.
미군정은 박진경에게 6월 1일부로 대령으로 승진시켰고, 딘 소장이 직접와서 계급장을 달아주었다. 배선엽 중령이 부산의 제5연대장을 할 때 박진경은 사병이었는데 이제는 백선엽 연대장보다 한 계급이 높게 초고속으로 진급하게 되엇고 경비대에서 가장 기대되는 장교가 되었다.
4. 11연대 장병 41명 탈영 후 유격대에 합세, 경찰 28명 전사
48.5.10일 선거일에 제주읍에서 남로당 김달삼과 군경 측에서 오일균 1대대장 및 부관, 9연대 정보관 등이 만나 정보교환과 무기 공급 문제를 중심으로 토의를 하였다.
주 내용은 박진경 연대장 등을 숙청해야 한다. 이를 위해 정보교환과 무기공급, 탈출병을 적극 추진키로 하였다. 당시에 박연대장의 토벌작전은 많은 효과로 군경의 사기가 올라간 상태였다.
결국 어쩔수 없게 된 오일균이나 문상길은 김달삼의 지령으로 탈영을 시키기 위하여 야간 특수작전을 이유로 소대원을 집합하여 하사관 11명, 사병 30명을 트럭에 태우고 대정지서를 들어가 태연하게 토벌작전을 나온 것처럼 가장하고 각 초소에 분산배치하여 경계 근무중인 경찰관들을 죽이고 서귀포경찰서로 향했다.
서귀포경찰서에 도착했으나 경찰이 99식이 아닌 M1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어 자칫 당할지도 모른다는 판단에 차량만 한대 가지고 도망치기로 하고 병력을 분산하여 싣고 갔다. 그러나 경찰 차 운전수가 탈영병들의 모의 내용을 엿듣게되엇고, 산악으로 이동중에 엔진에 열을 낮추어야 한다며 개울을 찾는척하다 도망쳐서 이 사실을 본대에 알렸다.
연락을 받은 서귀포 경찰은 모슬포 지서에 달려가 총을 맞고 불에 타 죽은 동료들의 시신을 확인하였다. 박진경은 해가 밝아서야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 1대대장 직무대리인 이세호(차후 참모총장에 이름) 중위로 부터 보고를 받았다. 하사관 11명, 사병 30명 계 41명이 실탄 5,600발을 가지고 탈영햇고 주모자는 누구인지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는 보고였다.
*"밥좀 해 주시오" 탄로난 경비대 탈열병
한편 탈영병들은 최상사와 함께 문상길 중대장과의 접선 장소로 갔으나 접선에 실패하고 산속을 헤매다 몹시 불안하게 되었다. 운전사가 도망치는 바람에 시간이 지연된 것이다. 그들 41명은 대정면 중간산 마을에 있는 집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배가 몹시 고파서 집주인에게 밥을 부탁했다. 하지만 그당시에 경비대는 혹시 지역 프락치들이 밥에다 독극물을 넣을 수 있다는 가정에 절대로 민가에서 밥을 구하지 못하도록 통제하였다. 그런데 밥을 달라하니 당시 집 주인은 이상하게 여기고 남자가 뒷담을 넘어 죽을동살동 달려서 대정지서에 신고하게 된다.
연대장이 직접 병력을 이끌고 달려가 집을 포위했다."자수하는 자는 살려 주겠다"
하지만 그들은 자수하지 못했고, 21명은 사격으로 죽고 20명은 체포되어 19정의 소총과 3,600발의 실탄과 함께 본대로 실려왔다. 결국 이 보고를 받은 미군정은 깜짝 놀랐고 제주출신 경찰과 공무원, 경비대는 사상적을로 의심을 받아 천대를 받게 되었다. 연대는 이 사건으로 연대본부를 모슬포에서 제주읍 농업학교로 옮겼다.
48년 6월 24일에는 제주경찰 임영관 경위가 28명의 경찰을 지휘하여 토벌에 나갔다가 산속 깊은 곳에서 매복에 걸려 임영관 경위 이하 28명 전원이 전사하였다.
5. 문상길 중대장 11연대장 박진경 대령 암살 지령
1948년 5월 10일, 선거일에 제주읍에서 남로당 대표, 군책(김달심). 조책 2명과 국경 측(경비대)에서 오일균 대대장 및 부관, 9연대 정보관 이소위(이윤락) 등 3명이 모여 회담을 하여"박진경 연대장 이하 반동 장교를 숙청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의견 일치를 보았다. 박진경 연대장의 부임 4일 만의 일이다.
김달삼은 오일균과 합의 하여 문상길 중대장에게 "6월 17일 저녁 옥성정에서 박진경이 중령에서 대령으로 진급한 것을 기관장들이 축하해 준다는 것이요. 그러면 반드시 박진경도 술을 먹을 것이고 참모들이나 장교나 부대의 경비가 소흘할 것이요. 이대 술을 먹고 온 박진경을 아예 없애버리는 것이요"라고 레포를 통해 지시를 받은 문상길은 정보계 선임하사 남로당 세포 양희천 상사를 불렀다." 17일 저녁 술을 먹고 오는 박진경을 사살하라. 그래서 다시는 경빋대가 해방군을 공격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은 감달심 동무의 지령이다"라고 했다.
축하연에서 복귀한 연대장이 잠들자 그들은 계획된 대로 손선호 하사(22,경북 경주 출신.대구폭동에 가담했다가 경찰의 추적을 피해 경비대에 입대)가 M1소총을 머리에 당겼다. 48.6.18일 새벽 3시 15분이었다. 그이 나이 28세였다. 남조선에서 가장 유능하다는장교 한 명이 창군 이래 제일 먼저 남로당원에 의해 순직하였다.
통위부는 즉시 최경록 중령을 11연대장에 임명하였고, 최중령은 서울에서 올 때 독일산 개 세퍼트를 데리고 와서 자기를 지키게 하였다. 헌병, 방첩대, 미CIC 등 모든 수사요원이 동원되었지만 완전 범죄였다. 부연대장으로는 송요찬 소령이 부임하였다.
48년 6월 22일 오후 2싱에 진행된 장레식에서 딘 소장도 직접 제주도를 찾아 오열하였다.
그런데 사건 7일 후에 연대장 앞으로 한장의 진정서가 왔다.
진정서: 연대장님 이번 박진경 연대장을 사살한 범인은 문상길 중위(경북안동 출신으로 국군 준비대인 좌익단체에 입대한 후 대구경비대 6연대 1기생으로 입대, 육사 3기로 임관했다.)와 연대 정보과 하사관들이 저지른 사건입니다. 이들을 문초하며 범인을 잡을 수 있습니다"
최경록 연대장:"세상에 이럴 수가...". 헌병대장, 즉시 헌병을 데리고 가서 3중대장 문상길 중위와 연대 정보계 선임 하사관 최상사와 3명의 하사관과 문상길 애인을 즉시 연행하여 이리 데리고 와. 극비로 해!
서울로 압송된 문상길은 계속하여 모른다고 일관하고, 가슴에 빨간 부적을 달고 잇는 것은 아파서 빨리 나을려고 했지 마음이 두근거려 그런 것은 아니라고 버텼다.
조사관: 장교가 치사하게 거짓말 하면 되겠나?
문상길: 나는 도대체 아무것도 모른다.
조사관: 그러면 양희천과 대질신문을 해야 토사할건가? 장교라면 이제 불어라?
문상길: 눈을 감고 한참을 머뭇거렸다. 그래 알았다.
조사관:김달삼과는 누가 만난는가?
문상길: 내가 직접 만났다.
문상길은 본인의 애인인 고양숙이 조사를 받는 것을 보고 혼동스러웠다. 오일균 소령등 연대내 좌익 세력 80여 명을 불자니 김달삼과 제주도 해방투쟁은 끝나게 되니 당을 위해 애인을 희생하기로 마음 먹었다. 하지만 결국 모든 것이 들통이 나고 48년 8월 14일 문상길.손선호.배경용.신상우 사형, 양희천 무기, 강승규 5년이 선고되었다.
이 사건에 따라 정보국에서 경비대 안의 남로당을 파악하니 잘못했다가는 각 연대가 좌익에 의해 반란이 일어나고 국가가 위기에 처할 것 같아 정보국에서는 미행을 철저히 하였다.그때가지만 해도 남로당원이라 모두 체포할수 없어 고민이었다. 이때부너 남로당을 처벌할 수 있는 보안법의 필요성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제주도 4.3진상조사보고서는 은근히 피고인들의 최후진술을 기록하면서 장황하게 기록하여 연대장을 죽인 것을 정당하다는 식으로 피고인을 비호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박진경 연대장은 부임하여 얼마 되지도 안했고 유격대를 그렇게 토벌하지도 안했고 양민을 죽이거나 착취하지도 안했다. 그러나 피고인들은 그동안 있었던 이런저런 피해상황을 마치 박진경 연대장의 지시인 것처럼 과장하고 그래서 그들이 좋아하는 인민의 이름으로 처단했다는 식이었다.
지금 우리 사회에 안고 있는 여러 민주화에 얽힌 사건들이 그런 식으로 오염되어 한방향으로만 잘못된 내용을 담고 있고 역사의 옳바른 판단에 많은 고려사항이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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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균소령: 이 사건이후에 정체를 숨기고(세포들이 일절 자백을 하지않음.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었음) 있다, 자기 부하인 정보계 상사가 암살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대대장을 사임하고 수용소장을 열망하여 수용소장을 했다.
그는 들어오는 수용자들을 분류하여, 게릴라와 게릴라 가족, 일반 양민을 구분하여 양민과 게릴라의 연락을 단절시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게릴라와 용의자를 석방하고 일반 양민만 수용하는 등 이상한 행동을 계속했다. 그러나 결국 양민의 고소에 의해 폭로되어 지금까지 그의 정체를 의심하여 오던 정보당국에 의해 결국 49년 수원에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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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9연대 프락치와 폭도의 관계
제주남로당 군책 김달삼과 9연대 남로당 프락치 문상길은 대책회의에서 제주인민군과 9연대 경비대와 밀접한 정보교환, 최대한 무기 공급, 탈영병 추진 및 교양자료 배포, 최후 단계에 경비대 총궐기 등을 합의한다. 5월 10일에 김달삼과 1대대장 오일균.연대정보관 이 중위. 제주남로당 조직부장 김양근과 대책회의에서 경비대의 토벌이 시작되면 투쟁이 실패하므로 프락치는 토벌에 대한 적극적인 사보타지 전수 사용하고, 9연대의 호응투쟁을 중앙당에 건의, 반동의 거두 박진경 연대장과 반동 장교 숙청(박진경이 김달삼과 협조하지 않으니 아예 죽여버리기로 합의), 상호 정보교환.무기공급. 병사들의 탈출을 적극 추진하며 이에 따라 52명의 탈출이 생기고 , 연대장을 암살하고, 많은 무기를 9연대애서 제공 받게 된다.
*한심한 무기공급과 탈출 현황
가. 4월 중순경 문소위로부터 99식 소총 4정, 오일균소령으로부터 카빈 탄환 1,600발, 김익렬 연대장으로부터 카빈 탄환 15발 공급받음
나.5월 중순 5연대 통신과 동무로부터 신호탄 5발을 공급받음
다.5월 17일 오일균으로부터 M1소총 2정, 탄환 1,443발, 카빈 2정. 탄환 800발을 공급받음
라.5.20일 문소위 지시로 9연대 최상사 이하 43명이 각각 99식 1정과 탄환 14,000발을 차에 실어 탈출, 도중에 대정지서 습격하여 경찰 5명을 죽이고 서귀포 경유 상산하려다 경찰차 운전병의 지개로 실패하여 22명은 피검, 탄환 다수 분실. 혹은 압수 되고 4/5일이 지나서야 연락됨(이 당시 문상길과 탈영병들의 연락방식이 차이남)
마.5.21, 5월 말에 대정에서 2명이 탈영하여 인민군 입대하고 애월에서 4명, 연대 본부에서 고승옥 상사 등 7명이 무기가지고 탈영하여 유격대 입대
바.6월초 대정에서 해경 1명, 7.1일 대정에서 10명, 7.12일 대정에서 1명, 7.14일 9연대에서 2명 등 많은 인원이 유격대에 탈영하여 입대하고, 99식 소총 56정, 카빈 3정, M1 8정, M1탄 1,443발, 카빈탄 2,415발이 폭도들에세 들어갔다.
이상의 내용을 진상조사보고서에서는 언급을 피하여 폭도들과 연계된 프락치들의 죄과를 밝히지 않음으로써 제주도 해방군의 모습을 어떻게든 숨기려했다는 사실을 누가 알겠는가!
제2절 최경록 연대장의 작전
48년 6월 18일 제주도 제11연대장에 부임한 최경록 중령은 다음과 같이 진압방법을 제시하였다
가.폭도와 양민을 분리하기 위해 수용소를 설치한다
나.수용된 용의자들에게 선무 교육으로 사상을 선도한다
다. 산중에 입산한 주민들도 선무공작으로 하산시켜 폭도들과 분리하여 재생의 기회를 준다
라.해안선 마을은 마을 자위대에서 치안을 유지한다
마.폭도와 민중을 분리시켜 폭도들은 산중으로 몰아 넣는다
연대는 48.6.18일부터 7월 14일까지 1,454명을 연행 조사 후 600여 명을 기소하고 나머지는 수용소에 보냈다. 폭도들은 견디지 못하고 산속 깊숙히 은거하여 경비대에 저항을 못하였다. 마을이나 지지서도 습격하는 일이 없어 경비대는 폭도들을 완전 소탕한 것으로 판단하게 되었다.
하지만 폭도들은 다음 작전을 위해 경비대 장병을 탈영시켜 입대시키고, 세포원을 통해 다량의 무기를 빼돌려 화력을 보강하고 마을마다 정보원을 보강하고 식량보급망도 강화하였다.
이에 연대장은 부락마다 자위대를 강화하여 밤중에 폭도들이 마을을 기습하여 먹을 것을 못가져가게 하고, 지금까지 경찰이 토벌하고 경비대가 해안선을 지킨 것을 바꾸어 경찰이 해안선과 도로를 지키고 경비대가 토벌하게하였다. 수용소를 건립히고 2대대장인 오일균 소령이 청원하여 수용소장 임무를 맡겼다.
갈수록 산에서 하산하는 인원이 몇 백 명식 늘어나고, 경비대나 지서를 기습하는 일이 없어지자 연대장은 제주감찰청장을 만났다. 그리고 경찰의 청을 받아 육지에서 온 경찰 400여 명이 다시 육지로 가도록 조치하였고 다른 경찰을 일부 충원받는다.
48년 7월 12일, 이형근 통위부 참모총장은 제주도 폭동은 일단락 되었다고 기자회견을 하였다.
48년 7월 15일, 통위부에서는 11연대를 재편하여 부연대장인 송요찬 소령을 9연대장에 임명하고 제주도에 주둔하던 11연대 2대대를 7월 24일 수원으로 원대 복귀시켰다. 최경록 중령은 대령으로 진급하고, 임부댁 대위는 대위에서 소령으로 진급하여 통위부로 전출된다.
제3절 송요찬 연대장의 작전(48. 7.24~)
9연대장으로 임명된 송요찬 소령은 대대장들과 연대 참모들에게 폭도들이 완전히 소탕되었다고 생각되지 않고 산 속 어디엔가 잔당이 숨어있으리라 본다며 이들의 뿌리가 뽑아져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그 핵심세력인 김달삼이나 간부들이 사살되거나 체포된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에 송연대장은 산을 타는 훈련을 강화하여 장병들이 장단지에 알이 박혀 지치지 않는 전투력을 배가 하였다. 연대장 스스로 매일 장병들과 한라산을 등반하여 등산훈련을 했다. 이렇게 한달여 훈련을 하고1주일간 산을 뒤졌으나 아무 것도 없었다.
폭도들은 농사일을 하는 것처럼 가장하여 논과 밭에서 경비대의 움직임을 낱낱이 파악하고 있었으며 자급자족하고 먹을 것을 동굴 속에 비축하고 있었다.
1.어느날 연대장에게 진성서가 한장 날아 들었다.
진정서: 연대장님 억을 합니다. 저는 폭도가 아닌데 폭도에 몰아넣고 제가 알고 있는 자는 총을 들고 경찰과 싸웠는데 양민으로 구분되어 일반수용소에 있습니다. 자세히 조사하여 억울함을 풀어 주십시요
송요찬: 정보과장, 은밀히 오일균을 조사하라
정보과장: 연대장님 오일균이 폭도를 합법적으로 풀어주고 일반 양민을 수용한 것이 사실로 나타났습니다
송요찬: 헌병, 오일균을 잡아오라
헌병: 연대장님 오일균 소령 잡아왔습니다
송요찬: 오소령, 어찌 폭도는 석방시키고 일반인은 수용하였습니까? 혹시 김달삼과 내통하여 그겋게 한 것은 아닙니까?
오일균: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시오? 난 그런적 없소.
송요찬: 헌병, 폭도로 왔다가 석방된 인원을 모조리 잡아와라?
헌병: 모조리 잡아왔습니다
송요찬: 이래도 아니라고 할겁니까?
오일균: 체념한듯 고개를 떨구고 눈을 감았다. 그는 군법회의에서 사형이 선고되어 49년 수원에서 처형되었다.
2.김달삼의 줄행랑과 이덕구의 등장
이렇게 하여 유격대의 중요 경비대 세포들이 줄줄이 잡혀들자 제주도당 유격대내에서는 김달삼의 작전을 비판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문상길과 하사관 핵심 멤버들, 그리고 이제 오일균까지 잃게 되었다. 그들은 무모한 마구잡이식 습격이 결국 반감을 사고 이에 따른 살상으로 그들의 방패막이인 인민들로부터 멀어지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김달삼은 진퇴양란에 처하여 대정면 하모리 이태우의 집에 20일 동안 숨어 있으면서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유격대 내에서 불평이 쏟아지고, 김달삼은 제주도를 빠져나갈 궁리를 하게 된다. 북로당에서 해주에서 있을 남북 총선거에의한 전국인민대회가 소집되는데 여기에 참석해 달라는 것이다.
김달삼: 내가 북으로 가야 되겠소?
이덕구: 아니 총책이 가면은 이곳은 어떻게 되는거요?
김달삼: 동무가 날 대신해서 해방군을 이끌어 주시요. 내가 해주에 가면 무기를 지원받아 오겠소. 내가 올 때까지 절대로 움직이지 마시요
이덕구: 알겠습니다. 잘 갔다 꼭 빨리 오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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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구
1920년 제주도조천읍 신촌리에서 부유한 집안에서 출생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 일신상업학교를 졸업, 교토의 리츠메이칸대학 경제학부 재학 중 1943년 학병으로관동군에 징집되어, 소위로 광복을 맞았다.
1945년 귀향한 뒤 46년 3월 지역유지들과 함께 조천중학원을 세워 역사와 체육 교사로 근무 했다. 1년뒤 47년 3.1절 집회시 경찰의 총격에 항의하다 3.10 총파업에 참가하다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으로 고막이 터졌다. 이후 한라산에 들어가 제주도 남로당 인민유격대 3.1지대자을 맡아 제주읍.조천읍.구좌읍 일대에서 활동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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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달삼이 1948년 8월 21일 황해도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차 올라가면서 제주도 인민유격대 사령관 직책을 이어받았다.
이덕구가 유격대 사령관이 되면서 지서습격과 경찰관을 비롯한 인명살상이 늘어났다. 1948년 9월 15일을 기점으로 남로당 무장대는 다시금 군경과, 우익인사들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군경과 서청에 의한 민간학살도 더욱 늘어나게 되었다. 이에 대한민국 정부는 1948년 10월 11일 제주에 경비사령부를 설치하여 토벌작전을 단행하게 된다.
1948년 10월 24일, 이덕구는 군경에 포고문을 발표하고, 이후에 11월 2일 경비대 6중대를 공격해서 21명이 전사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정부에서는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강압진압작전을 전개하게 되었다.
체포된 많은 사람들이 계엄고등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사형에 처해지고, 징역형을 받은사람은 육지의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군경과 서청의 토벌대는 지리산을 이잡듯이 뒤져 잡아내고, 때로는 무장대 복장으로 마을에 들어가 방화와 처형을 하는가 하면, 반대로 무장대는 토벌군 복장으로 같은 행위를 반복하여 군민만 고스란히 피해를 입는 아비규환이 되었다,
계속적인 토벌작전과 선무공작으로 이덕구유격대는 많은 인원이 빠져 나가고, 49년 3월에 설치된, 유재흥 대령의 제주지구전투사령부의 강력하면서도 전향자에게는 죄를 묻지않는 선무공작이 효과를 가져와 49년 5월 15일에 사령부를 해체한다.
이후 이덕구는 49년 6월 7일 밀항 또는 월북을 위해 피신하다 부하의 밀고로 위치가 탄로나 경찰과 교전하다 죽었으며 시체를 관덕정 앞에 내걸어 "이자는 공비의 수괴 이덕구로서 대한민국 국시를 범한 반역자이다. 이덕구의 말로를 보라"고 적혀 있었다. 그후에 시체는 부패하여 산지천 남수각 근처에서 화장하였고 비가 내려 모든 것이 씻겨나가 버렸다.
3. 폭도에 협조한 9연대 2대대장 체포
"이상한 대대장, 김창봉 대위"
유창훈 소위는(육사 5기)는 제5연대 1개 중대가 제주도 11연대에 차출 편입되어 소대장으로 제주도에 가게 되었다. 이 부대는 함덕에 주둔하였다.
이들은 한라산 일대를 중심으로 약 4개월 간 폭도 소탕작전을 위해 한라산 정상을 수없이 오르내렸다. 육지에서 간 장교들은 제주도 사투리에 많은 애를 먹고 있었다. 여기에 경비대 병들 중에 제주도 출신들이 통역을 하는 과정에 읿주러 엉터리 통역 때문에 양민을 잡아다 죽이기도 하고 오히려 폭도를 풀어주기도 했다.참으로 골치아픈 일이였다. 폭도들은 낮에는 숨어서 잠을 자다 밤에만 부락에 나타나 양민을 위협해서 곡물을 양민들에게 지워 글고 가는데, 반대하는 사람이 있으면 가차없이 현장에서 죽여버렸다.
어느날 조천지서에서 지원요청이 왔다.
조천지서: 폭도들이 조천마을을 습격하고 있으니 빨리 와 주세요?
2대대 정보장교: 알겠소, 즉시 출동하겠소
대대본부: 손영로 중대장이 출동하여 갔다 오라
송영로 중대장: 대대장님 , 조천에 폭도들이 나타나 진압하고 왔습니다
김창봉 대대장: 야, 너 출동하려면 대대장에게 보고하고 출동해야지, 네 멋대로 출동해?
송영로 중대장: 죄송합니다. 폭도들이 나타났다고 급하게 전화가 와서 시간을 지체하면 양민이 다칠까봐 순간적으로 출동하느라 그랬습니다. 다음부터는 주의하겠습니다
김창봉 대대장: 너, 육사 나온지 몇 개월 안 된 소위가 중대장이 되니 보이는게 없나? 대대장도 무시하고 너 멋대로 중대를 출동해?
송영로 중대장은 대대장의 지나친 고함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이거 출동을 빨리 하여 오히려 적이 가져갈 것을 못가져하게 하지않았느냐의 질책같아 보였다.송영로는 연대 정보과에 있는 동기생 김두현 소위를 찾아가 상의하였고, 김두현 소위가 김창봉 대위의 뒤를 은밀히 조사하고 미행하게 되었다.
조사팀은 대대장이 조천의 한 한의사를 자주 만나는 것을 확인하고 급습하여 실토를 받아 냈다. 처와 자식들이 붙들려와 있는 모습을 본 한의사는 김창봉으로부터 총과 실탄을 공급받아 유격군들에게 공급한 것이다. 그리고 작전계획을 알려주면 이를 유격대에 보고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보고를 받은 송요찬 연대장은 헌병 1개 소대를 데리고 가서 2대대장 김창봉 대위를 체포하도록 하였다.
제4절 함병선 연대장(2연대)의 작전(48.12.29~) : 초토화 작전의 전형적인 지휘관
육본에서는 48년 12월 31일을 기해 계엄령을 해제하려 했다. 지금까지 9연대는 전사자가 93명가 부상자가 많았고, 반란자 86명을 처형하였으나 탈영병들이 너무 많아 재편성을 위해 대전으로 이동하고, 남로당 좌파가 가장 적었던 대전의 2연대를 제주도로 이동시켜 48년 12월 29일 제주도에 도착하였다.
함병선 연대장이 지휘하는 2연대는 제주도에 폭도가 소탕되었다고 보고 부대 이동간에 경계를 소흘히 했다. 연대와 2대대는제주읍에, 1대대는 서귀포에, 3대대는 한라산 중턱의 오등리에 주둔하게 하였다.
예정대로 12월 31일 계엄령이 해제되고, 마을에서는 국군 장병을 환영해 주는 등 오랜만에 평온이 온 것처럼 보였다. 제주도민들은 마음이 든든하였다.
제주 인민군 국군 제2연대 공격 / 제주지구 전투 사령부 설치
49년 1.1일 폭도들 600명이 국군 제3대대를 완전 포위하고 있다가 이덕구의 권총소리에 맞추어 공격을 개시했다. 하지만 3대대는 사전 그들의 기습에 대비하여 즉각출동할 수 있는 준비를 하고 잠들어 있었기에 처음에 일시적 혼란을가져왓으나 바로 전세를 역전시켜 폭도들을 제압하기 시작했다.
이덕구는 토벌군이 강력히 저항하자 산속으로 숨어버렸다. 3대대는 폭도들이 철수 후에 수습을 하고 보니 폭도 10명이 죽어 있고, 3대대는 전사 10명에 부상자가 다수 발생하였다. 3대대는 폭도들에 대한 불안감과 함께 적개심이 불타올랐다.
함병선 연대장이 2대대를 지휘하여 3대대에 왔을 때는 상황이 끝난 상태였다.
육본은 제2연대의 폭도 기습공격을 보고받고 놀랐다. 이에 따라 토벌대는 앞선 9연대보다 더한 선무공작으로 산으로부터 지역 주민이 내려오도록 노력하면서, 내려오지 않음면 육.해.공군의 연합작전으로 한라산을 이잡듯 수색정찰을 강화하였다.
진압군이 오름을 수색하자 많은사람이 하산하여 수용소에 들어오게되었다. 연락기에서도 수류탄을 투하 하는 등 수색작전은 탄력을 받아 폭도들의 근거지는 점점 소멸되어 갔다. 이 시기에 구호물자를 지급하고 사상계몽을 통하여 재기하게 하여 양민으로 인정된 자는 귀향조치 하였다.
제10장 제주 좌익 남한의 5.10선거는 반대하고, 북한의 8.25선거 참여
제1절 북한의 8.25선거
박헌영은 남로당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48년 5.10선거가 남쪽에서 무사히 끝나자 난감하였다. 그는 신탁통치를 성공시켜 통일정부가 세워지면 남로당대표로 참여하여 한반도를 장악하려고 하였는데, 신탁통치도 5.10선거도 다 본인 의지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남.북에 정부가 들어서게 되면서 본인의 자리가 위태로워진다.
소련은 분단 정부를 강력히 반대하는 박헌영보다 분단을 인정하는 김일성을 내세어 친소정부를 세우기를 원했다. 이렇게 되자 박헌영은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48년 6.29~7.5까지 평양에서 남조선 단독선거 실시와 관련하여 조국통일을 위한 남북지도자 협의회가 개최되었다. 48년 7월 5일 인민공화국 수립을위한 선거문제가 토의되고, 7월 10일 인민회의에서 8월 25일 선거를 하되, 남북한이 동시에 해야 한다며 남한에서는 각 시.군에서 5~7명의 대표자를 선출하여 해주에 모여 이들이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선출하자고 합의를 보았다. 그래서 인구비례에 따라 남한에서 360명. 북조선에서 212명을 선출하기로 하여 박헌영은 김달삼에게 이남에서 비밀리에 선거인의 선거를 하여 대표자를 해주까지 파송하라는 지시를 김삼룡에게 하였다.
남한에서는 1,080명을 선출하여 해주로 보내기로 하고 7월부터 360개 선거위원회를 조직하고, 2,500명의 남로당 선거위원이 선정되었다. 지하선거 전권위원회는 5,000개가 넘었고, 위원은 8만여 명이 되었다.
7월 중순부터 남로당.전평.전농.민애청 등이 중심이 되어 전국적인 남로당 지하선거가 시작되었다. 산간 마을 등에서는 밤에 남로당 전권위원들이 찾아 다니며 투표를 하여, 남한에서는 총 유권자 8,681,746명 중 77%인 560만 명이 지하선거에 참여하였고, 제주도는 85,551명의 선거안중 85%인 72,000명이 선거에 참여하여 이걸 김달삼이 기지고 해주대회에 참가함에 따라 그 증거가 된 것이다. 이 당시에 제주 남로당원은 3만 정도 되었다 한다.
도.시.군 대표 1,080명의 대의원을 선출하는데 앞에서와 같이 총 유권자의 77%인 860만 명이 참여하여 하게 되고, 이때 남로당원의 수가 150만, 그 가족 산하 단체까지 하면 700만이라는 계산이 된다. 이들은 남로당원의 안내에 따라 개성.의정부.동두천.주문진 등에소 38선을 넘게 되는데 8월 10일경 80여 명만 경찰에 체포되고 1,000여 명은 무사히 해주에 도착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만약 남로당이 5.10선거를 반대하지 않고 선거에 참여하였다면 제주도 폭동도 없었고, 국회를 70%이상 장악하여 김삼룡이든 박헌영이든 그들이 미는 넘로당원이 대통령에 당선될 수도 있었다는 끔찍한 상황이 연출된다.
제2절 제주도민 52,000명 8.25선거에 참여
제주도 대표는 안세훈.김달삼.강규찬.이정숙.고진희.문등용 등이 8월 2일 성산포에서 어선을 타고 목포에 도착하여 열차편으로 서울을 거쳐 38선을 넘어 월북하였다.
남조선 인민대표자회의는 48.8.21~6일까지 인민회당에서 개최되었고, 주석단에 박헌영.허헌.홍명희.이영.김원봉.이승엽. 등이었고 김달삼도 끼여 있다. 이들은 8.25일 남측 대의원 360명을 선출하였다.
[*여기서 김달삼이 연설을 하게 되는데, 그는 인민유격대는 45회 이상의 지서 습격 및 야외 투쟁을 통해 57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고 각종 시설물을 파괴하는 한편, 다수의 무기를 탈취하는 등의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고 보고한다. 그리고 말미에 김일성 박헌영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만세를 불렀다.]
그러나 북한은 9월 1일 수상선거에서 투표로 하지않고 박수로 김일성을 추대하게 된다. 소련의 강력한 지지를 받는 김일성이 이미 짜놓은 각본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숫자가 우세하여 혹시나 본인이 될 수도 있다고 믿고 있던 박헌영과 남로당원 들은 기가 막혔다. 닭쫒던 개 하늘을 쳐다보는 꼴이 된 것이다.
여기서 김일성은 김달삼에게 2급 국기훈장과 영웅칭호를 부여하였다. 그리고 49명의 인민공화국 헌법 위원회에 선출되었다. 조선 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에서는 만장일치로 김일성이 수상이 되고, 박헌영은 부수상겸 외상, 이승엽은 사법상, 농림상에 박문규, 노동상 허성택, 보건상 이병남 등이 선출되어 권력이 없는 직책은 남로당 출신에게, 권력이 있는 민족보위상(국방장관)에 최용건, 내무상에 박일우를 임명하여 군과 경찰은 김일성이 장악하였다.
결국 이렇게 하여 김일성은 박헌영.이강국.정태식 등 남로당 5명의 좌파의 씨앗을 말렸다. 월맹이 월남을 접수한 후에 숙청을 먼저한 것은 좌파 데모꾼부터 였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공산당들의 전략전술을 다시한번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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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국: 경기 양주 출신
1930년 경성제대 법문학부를 거쳐 독일에서 베를린 대학 법학부를 나온 천재로, 풍채도 좋고지식과 인격을 겸비한 소위 지식인 공산주의자였다고 한다. 국제무대에서 활동한바 박헌영의 신임이두텨웠다. 이강국은 위조지페 사건 때 경찰의 수배를 피해 애인 김수임의 도움으로 월북했다.
월북 후에 북조선 인민위원회 외무국장을거쳐 이른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초대 외무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6.25전쟁이 끝난 후 1953년 8월 3일부터 시작된 평양의 최고재판소 특별군사재판에서 미국 간첩이란 누명을 쓰고, 그토록 충성했던 김일성의 손에 사형을 당했다.
김수임 국제 여간첩(이강국 애인) : 개성 출신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11세 때에 남의 집 민며느리로 있었다. 그의 집에서 나와 어느 선교사의 도움으로늦게야 여학교를 마치고, 이하여전 영문과를 졸업, 세브란스병원 영어 통역사로 있었다.. 그녀는 남이 따를 수 없는 천재적ㅇ딘 사교술을 지녔고, 영어에 능숙하고, 그 기질 또한 서구적이어서 당시 수사기관의 최고 고문으로 있던 미국 고관 베어드(미 군정청 헌병 사령관 대령)의 사랑을 받아 동거(아들을 낳아 그는 미국에서 교수) 중에 있었다.
김수임은 어느 파티에서 우연히 이강국과 알게 되었는데 서로 호감을 갖고 만나다 연인이 되었다. 이강국은 위조지폐 사건 때 경찰의 수배를 피해 애인 김수임의 도움으로 월북했다. 김수임이 박헌영과 이강국에게 미군의 체포령이 있을 것이라 알려준 것이다.
이강국은 월북후에도 대남공작을 게획하면서 김수임을 적극 이용하였고 김수임은 자신의 집을 남로당 중앙간부 아지트로 내주었다.
김수임은 베어드 대령과 동거하면서 그를 통해 빼닌 정보를 이강국에게 알려준 간첩죄로, 1950년 3월 19일 체포되어 1950년 6월 16일 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이 선고되었다.
김수임은 최후 진술에서 "나는 공산주의를 모릅니다. 다만 이강국을 너무 사랑해서 그의 요구를 들어 준 것뿐입니다"라고 고백하면서 국가를 반역한 내가 더 살아서 무엇하겠느냐며 전향을 거부하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형을 당했다.
정태식 : 충북 진천 출신
정태식은 1910년 충북 진천에서 태어나 1929년 청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 경성제국대 법문학부를 나왔다. 해방이후 정태식은 김삼룡.이승엽과 함게 남로당에서 박헌영의 제2인자 위치에 있었다. 1950년 4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검거되어, 징역 20년을 선거 받았다. 6.25전쟁 때 석방되어해방일보를 복간하였고 9.28 서울이 수복될 무렵 퇴각하는 인민군을 따라 북으로 올라가 농림성 부처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1953년 남로당 숙청 때 숙청되어 목숨을 부지하고 출판사에서 심부름하는 말단 직원으로 생애를 마쳤다. 죽음보다 더한 비참한 말로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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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장 제주인민사령관 이덕구의 9.15사건
제1절 이덕구 제주인민군 사령관이 되다.
김달삼이 북으로 들어거게 되자 남로당 제주도당은 이덕구를 새로운 사령관으로 추대했다. 이덕구는 조천면 신촌사람으로 당시 28세였고, 일본에서 학병으로 끌려가 관동군 소위로 임관하여 해방을 맞았다. 이미 그는 좌익사상을 갔고 있었는데 관동군이나 민주군 출신에 모택동의 공산당의 영향력이 컸다고 봐야 한다.
당시 제주도에는 한라산 어승생 밀림지역과 관음사가 동당 사령부였고, 폭도들은 샛별오름.눈오름.돈네코남이악.김녕곳 등 130여개 동굴에 숨어 있었다.
이덕구는 46년 3월에 조천 중악원이 개교하자 그는 역사와 체육을 담당하였다. 그는 치밀하여 작전계획을 잘 수립함으로써 부하들의 신임을 얻었다. 마을마다 자위대를 조직하여 마을을 장악하고, 조직으 강화하였다. 남로당 제주도당 안에는 당책과 읍면에 책임자가 있어 3만 명의 다원을 동원하여 폭도들을 지원케하였다. 마을마다 보초를 세우고 정보원을 두어 토벌군의 동태를 파악하고 마을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동당 사령부에 보고하도록 통제하였다.
유격대(폭도)들은 낮에는 평범한 양민으로 위장하여 들에 나가 일을 하고 짐승을 기르고 나무를 하게 하고, 밤에는 폭도로 되어 토벌군을 공격하였다. 주간으로 신문을 발행하여 소식을 전하며 주민들의 협조를 요청하였다. 그들은 "높이 들어라 붉은 깃발을 원수와 싸워서 죽은 우리의 죽음을 슬퍼 말아라, 붉은 기는 전사의 시체를 싼다. 또 시체 죽어서 식기 전에 우리들은 붉은 기를 지킨다."는 노래를 부르도록 했다.
하지만 북에 가서 무기를 갖고 온다는 김달삼이 오지않게 되자 유격대 내에서는 서서히 불평이 처지기 시작했다. 유격대들은 식량확보.무기 탈취.생산투쟁. 통일전선 강화 확대, 민주부락 고수와 확대 등에 중점을 두고 중간산 지구를 해방구로 중심적 역활을 하여 제주 전역을 해방시킨다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북한의 김일성은 김달삼과 박헌영이 부탁하는 무기요청을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그는 남로당을 키우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제2절 제주인민군 사령관 이덕구의 공격 개시
폭도들은 지하 선거를 끝내고 서서히 활동 하기 시작했다. 그 주요 사건을 보면 다음 같다
1.9월15일, 중문 도순리 대동청년단 문두천 칼로 난자하여 학살
2. 9.18일, 성산 고성 2구 민보단장 김만풍과 양민 오만순을 이장으로 오인하여 칼로 찔러 학살
3. 9.25일, 7명의 폭도들이 김녕리에서 박인주 학살
4. 10.1일, 제주읍 도남리에서 경비대 복장으로 위장하여 장례식 장에 나타나 정병택 등 3명 학살
5. 10.1일, 중문 도순리에 있는 증원 경찰을 기습하여 경찰 5명 전사. 2명 납치 등이 발생하면서 중앙까지 보고되어 새로 탄생한 정부와 국민들에게는 충격적이었다.
6. 10.6일, 김녕리에서 폭도 40여 명과 경찰이 총격전, 같은 날 색달리에서도 약 40명의 폭도들이 경비대와 전투하여 군인 1명 전사, 4명 부상
7. 10.7일, 조천지서에 폭도 200여 명이 몰려와 "경찰은 물러가라" 시위로 살기등등한 폭도들 앞에 경찰은 수세에 몰렸다.
제3절 제주도에 진압사령부 설치
육군은 이상의 사건 보고에 따라 48년 10월 11일 제주도에 진압 사령부를 신설하고, 여수 14연대 1개 대대를 차출하여 9연대에 배속시켰다. 그리고 제주경찰과 해군 함정도 경비사령부에 배속시키고, 사령관에는 5여단 김상겸 대령을 임명하였다.
48년 10월 17일 제9연대장 송요찬 중령은 포고문을 발표하여 해안으로부터 5키로 이상 중산간지역으로의 통행을 금지시켰다.
하지만 진상보고서는 이상의 사건들은 말하지 않고 진압사령부를 설치하여 본격적으로 강경진압작전을 벌인다는 신호탄이었다고 하여 비판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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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군의 변천사 소개
군은 최초 연대단위에서 여단에서 사단으로 발전하게 된다. 연대의 창설은 앞에서 언급되었다.
우리 군은 해방을 맞이하여 민족의 장래가 불투명한 시기에 일본.만주.중국 등지에서 귀국한 군사경력을 가진 인사들이 건군의 주역이 되기를 자처하며 연고관계를 중심으로 여러 군사단체를 결성햇다. 이때 공산주의자들도 정권수립의 주도권을 행
사하기 위한 수단으로 군사단체를 결성하게 된다. 따라서 30여 개의 군소 군사단체가 난립하여 사회혼란을 야기하였다.
이때 한국측 군정의 치안 책임자인 경무과장 조병옥이 이응준.원용덕 등의 조언을 받아 국방부 설치를 미군정에 건의하자, 사설 군사단체의 해산을 전제로 1945년 11월 13일 군정법령 제28호에 의거 국방사령부를 설치하고 예하에 군무국과 경무국을 두고 군무국에 육군부와 해군부를 설치하였다.
45년 12월 5일에는 군사영어학교를 설치하여 약 4개월간 축차적으로 110명을 임관시킨 후 폐교하였다. 다시 경비대 간부 양성을 위해 46년 5월 1일 조선 국방경비사관학교를 창설하여 군사영어학교에서 졸업하지못한 인원을 입교시켰다. 이 학교는 조선경비사관학교를 거쳐 육군사관학교로 거듭나게 된다.
미군정에서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정치적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는 창설에 관한 어떤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그 대신 점령군의 경비임무 부담을 덜기 위해 경찰을 미군 무기로 장비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이에 미군정 신임국방부장 참페니 대령은 경찰기능에 가까운 경찰예비대 창설을 건의하게 되는데 1개 도에 1개 연대씩 모두 25,000명 규모의 8개 연대를 편성하도록 하였고 이를 "뱀부 계획"이라 불렀다
이에 따라 조선국방경비대가 발족하게 되는데, 뱀부계획에 의거 경찰예비대 2만 5천과 해안경비대를 설치하게 된다. 경비대는 46년 1월 15일 태릉에서 제21연대 제1대대 A중대 창설을 계기로 단지 소총으로 무장한 경보병 중대를 창설하기 시작해 2월 7일 경비대 총사령부를 설치하면서 4월 1일까지 8개 중대를 편성하여 일단 8개 연대의 창설을 완료한다.
창설시 간부는 주로 군사영어학교 출신들을 배치하였다. 병력은 모집하여 충원하게 되는데 이때 사살군사단체의 인원이 받아들여짐으로서 좌익사상을 지닌 인원 다수가 입대하여 큰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47년 3월까지 제주도를 추가하여 9개연대가 편성되지만 대구의 6연대는 구성원 중에 좌익세력이 문제를 일으켜 편성이 늦어졌다. 이때 편제는 3개 소대.3개 중대. 3개 대대의 3각 편제였고 미군으로부터 지원받은 일본군의 38식 및 99식 소총으로 장비하고 일본식 복장을 착용하다 46년 9월 이후에 미제 병기와 미국식 피복으로 전환하게 된다.
*연대 창설 내역
제1연 :46.1.15 태릉 정위 채병덕 제2연 : 46.2.28 대전 정위 이형근 제3연 : 46.2.26 이리 부위 김백일
제4연 :46.2.15 광산 부위 김흥준 제5연 : 46.1.29 부산 참위 박병권 제6연 :46.2.18 대구 참위 김영환
제7연 :46.2.7 청주 참위 민기식 제8연 : 46.4.1 춘천 부위 김종갑 제9연 :46.11.16 모슬포 부위 장창국
제10연 :48.5.1 강릉 소령 백남권 제11연:48.5.4 수원 중령 박진경 제12연 :48.5.1 군산 중령 백인기
제13연 :48.5.4 온양 중령 이치업 제14연 :48.5.4 여수 소령 이영순 제15연 :48.5.4 마산 중령 조암
*지원부대 내역
보급부대 : 46.7.1 대방동 소령 채병덕 제1병기 대대 ; 48.1.1 영등포 소령 소병기 제1공병대대 : 48.1.1 김포 중령 오규범
제1의무대대 : 48.5.1 영등포 대위 한왕용 제1육균병원 : 48.5.1 영등포 중령 신학진 제51통신대대 : 48.5.1 수색 중령 정운완
해군은 손원일.정극모 등이 사살단체인 해사대를 조직하였다가 미 군정시 건준에 가담하였다가 조선해사보국단과 통합하여 조선 해사협회로 개칭하였다. 이후에 군정과 몇차례의 토의를 거쳐 약 200명의 해안경비대를 구성키로 하고 진해에 해안경비대를 설치키로 한다. 45년 11월 11일 해안경비대를 창설하고 명칭을 해방병단이라 했으며 46년 1월 14일 국방사령부에 편입되었다. 46년 1월 17일 해방병학교를 설치하고 조함창을 설치하였다. 해방병학교는 후에 조선해안경비 사관학교로 개칭되고 해군 창설 요원을 양성하였으며 정부 수립 후에 해군사관학교로 발전하게 된다.
이와 같이하여 국방사령부가 창설되고 있을때에 46년 3월 29일 군정청의 각국이 부로 승격되어 국방사령부는 국방부로 개칭되엇다. 그러나 소련 대표북다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정부기관을 의미하는 명칭을 사용하는 의도가 무어냐고 항의하여 46년 6월 15일에 국내경비부로 개칭하고, 국방경비대는 조선경비대로, 국방경비대 사령부는 조선경비대 사령부로, 해방병단은 조선해안경비대로 개칭된다.
이에 한국의 군관계자들이 항의하자 하지 사령부는 미.소관계를 고려 다시 통위부로 46년 9월 12일 개칭하여 조선경비국과 조선해안경비국을 두었다. 초대 통위부장에 유동열 장군이, 초대 경비대 사령관에 이형근 중령이었다. 이렇게 하여 9월 12일 부로 사실상 군의 지휘권이 한국인에 이양되고 미군은 고문관 역활을 하게 되는데 이 고문관들은 통위부에 약 20명, 사령부에 10명선, 각 연대는 1명이 2개 연대를 맡아 모병.행정.조직 및 훈련을 담당하였다.
통위부는 47년 12월 1일부로 기존의 9개연대를 3개 연대씩 묶어 3개 여단을 편성하고, 경비대 확장 게획에 딸 48년 4월 과 5월에 추가로 6개 연대와 2개여단을 증편하였다. 그 현황은 다음과 같다
제1여단: 제1.7.8연대로 서울에서 47.12.1 창설, 초대 지휘관 송호성 대령(1연:서울)
제2여단: 제2.3.4연대로 대전에서 47.12.1 창설, 초대 지휘관 원용덕 대령(2연:대전, 3연:이리, 4연:광산)
제3여단: 제5.6.9연대로 부산에서 47.12.1 창설, 초대 지휘관 이응준 대령(5연:부산, 6연:대구, 9연:제주)
제4여단: 제7.8.10연대로 서울에서 48.4.29 창설 초대 지휘관 채병덕 대령(7연:청주, 8연:춘천, 10연:강릉)
제5여단: 제3.4.9연대로 광주에서 48.4.29 창설 초대 지휘관 김상겸 대령
제6여단: 48.11.20 청주에서 제4여단의 개칭
제7여단: 제1.9.17.19연대로 용산에서 창설, 초대 지휘관에 이준식 대령
연대의 증편이 48.8.15~49.6.10일 어간에 11개 연대가 증편 된다
제16연대: 48.10.28 마산 창설, 지휘관 박시창 중령 / 제17연대: 48.11.20 시흥 창설, 지휘관 백인엽 중령
제18연대: 48.11.20 포항 창설, 지휘관 최석 중령 / 제19연대: 48.11.20 광주창설, 지휘관 민병권 중령
제20연대: 48.11.20 광주 창설, 지휘관 이성가 중령 / 제21연대: 49.2.1 광주 창설, 지휘관 박기병 중령
제22연대: 48.4.15 대구 창설, 지휘관 오덕준 중령 / 제23연대: 49.4.20 마산창설, 지휘관 김종평 대령
제25연대:49.6.20 대전 창설, 지휘관 유해준 중령 / 기갑연대: 48.1.1 수색에서 창설, 지휘관 이용문 소령
여기서 제20연대는 여순반란부대에 가담한 제4연대를, 제22연대는 대구반란을 일으킨 제6연대를 개편 창설하였다.
그리고 주한미군의 잔류부대 철수에 따라 미 군사고문단의 활동이 시작된 49년 7월경에는 국군의 상비군 병력이 10만 명에 이른다.1949년 5월 12일에 6개여단을 사단으로 개편하고, 6월 10일에 다시 제8사단과 수도경비사령부를 창설하여 비로소 8개 사단이 확보 되었다.
제1사단: 제11.12.13연대로 수색에서 창설, 김석원 대령 / 제2사단: 제5.16.25여ㅕㄴ대로 대전에서 창설, 유승열 대령
제3사단: 제22.23연대로 대구에서 창설, 이응준 소장 / 제5사단: 제15.20연대로 광주에서 창설, 송호성 준장
제6사단: 제2.7.9연대로 원주에서 창설, 유재흥 대령 / 제7사단: 제1.19연대로 의정부에서 창설, 이준식 대령
제8사단: 제10.21연대로 강릉에서 창설, 이형근 준장 / 수경사: 제3.8기갑연대로 서울에서 창설, 권준 대령
이중 4개 사단만이 3개 연대 편성이고, 나머지 사단은 2개 연대였다. 제1.7.6.8사단과 제17연대가 38선 경비를 담당하고 나머지 사단은 후빙지역 방어, 특히 공비토벌작전에 임하였다.
국방부는 대통령령과 국군조직법에 근거, 예비군의 편성에도 착수하여 1949년 육군본부에 호국군사령부(초대사령관 송호성 준장)를 두고 같은 해 1월부터 7월까지 모두 7개여단 18개연대를 지역별로 편성하여, 생업에 종사하면서 소정의 군사교육을 받았다. 그러다 49년 8월 6일 "국민개병주의"를 지원병제에서 의무병제도로 전환하면서 8월 31일부로 호국군 제도를 폐지하였다. 그 대신 육군본부에 청년방위국을 신설하면서 대한청년단 조직을 중심으로 청년방위대를 도.시.군.면.동.리 당위로 조직하였으나 훈련이 되지않아 유명무실하였다.
그 밖에 육군은 북한에서 탈출한 청년들과 귀순장병들로써 수색학교(독립 제1대대), 호림부대(영등포 학원), 보국대대(제803독립대대) 등 특수부대도 창설하여 남파되는 유격대와 지방공비의 소탕작전에 운용하고, 일부는 대북공작도 준비하였으나 이는 실천하지 못했다. *해군과 공군은 군편성편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음------
2. 여수 14연대 반란
육군본부는 제주도에 토벌대 병력이 부족한 것으로 판단, 여수의 14연대 1개 대대를 10월 20일까지 진압사령부에 배속시켜 진압작전을 지원하도록 한다. 이때 남로당 군사부장 이재복은 남로당 전남도당 김백동과 여수인민위원장에게 반란을 선동하였다. 이에 여수인민위원장은 지창수 상사를 선동하여 제14연대 안의 남로당원과 여수남로당원이 합세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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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복과 군의 숙군 작업]
*이재복(박정희 소령의 형 박상희의 친구, 이재복의 수첩에서 박정희가 적혀있었다)
1903년 경북 안동 임동면 중평동에서 태어났다.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활동을 하다 교토 신학대학을 졸업, 평양 출신 길공주와 결혼 했다. 해방을 맞아 아내와 함께 귀국한 후 여운형 게통에 있다가 좌익 계통인 인민당에 입당, 경북 인민위원회의 보안부장을 거쳐 박헌영의 신임을 얻었다.
그러다 당시 군사부장이었던 이중업이 이북으로 도망산 사이 공석이 된 군사부장의 자리를 맡게 된다. 이재복은 10월 1일 대구 폭도이후, 지하로 잠적하여 제주 4.3폭동, 여수 14연대 반란까지 주도하였다. 이재북은 제주도 폭동에 이어 내륙에서의 반란으로 국군의토벌병력을 단절, 또는분산시켜 우선 제주의 위기를 감소시키고 내륙에서의 제2전선을 형성하여 전군적인 호응을 긷대했다. 그러나 군의 전격적인 토벌작전이 성공을 거두고, 전군적인 숙군작업으로 세포들이 대부분 체포됨으로써 국가 전복의 꿈은 사라진다.
그는 1949년 12월 18일 오전 3시경 제1연대 정보관 김창룡 대위 이하 3명에 의해서 성동구 신당동에서 체포 되었으며 오랜 설득끝에 500명의 당원 명단을 넘겨주었고, 전향하라는 제의에 "내가 얼마나 많은 국민을 죽였는데 살아서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니겠는냐"며 전향을 거부하고 1949년 5월 26일, 전 제15연대장 최남근과 함께 수색에서 총살되었다.
*이중업(남로당 중앙조직부 총책). 1912년 경북 예천 출신
1928년 서울 경복중학교를 졸업하고 1928년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입학. 1929년 광주학생운동을 계기로 사회주의 운동에 참가했다. 1930년 경성제대 법문학부에 진학하면서 맑스주의 연구. 1931년 8월 중국공산당 동민특위 조선 국내공작위원회에 가입하였으며 1931년 12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되어(공산주의 활동, '33년도 재학중)1934년 징역 4년을 선거받았다. 해방 후 박현영을 중심으로하는 조선공산당 재건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박헌영이 월북후 남로당 조직 책임자로 1946년 11월 남조선 노동당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9년 2월 25일 김창룡에게 홍제동에서 체포되었으며, 1949년 7월 17일 용산기지내 육군형무소를 탈옥(그의 딸이 간수를 유혹하여)하여 월북했다. 월북이후에 그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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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발발 전후, 군 간부들 사이에 6.25전쟁 때 누가 간첩질을 했느냐가 관심사다. 과연 군에 얼마만한 간첩이 있었느냐?
1948년. 4. 3일 제주도에서 남로당 세포들에 의한 무장폭동이 발생하고, 이어서 10월 19일 여수순천 반란사건이 발생한다. 이승만 정부는 1948년 9월부터 육군 정보국 내에 특별수사과를 설치하여 총살.유기형.파면 등의 조치를 취했다. 양개 폭동에 가담한 폭도들이 산속(지리산)으로도망치고, 일부는 1949년 5월 2개 대대를 만들어 월북한다(춘천 8연대 사건).
반란군을 토벌할 임무를 수행하던 토벌사령관 송호성은 6.25가 발생하자 인민군 복장으로 갈아입고 인민군 소장(후퇴하지 못하고 있다 북한군에 강제 합류의중)이 되었으니 그 당시의 대한민국의 실태를 알 수 있다.
1948년 12월 1일 국가보안법을 시행하여 6.25직전까지 4회에 걸쳐 대대적인 숙군을 실시하고, 전쟁 에도 3차례에 걸쳐 숙군작업이 진행되었다.
1차 숙군은 48.10.19 여순사건 직후부터 49년 3월까지 육본 정보국 김안일 대위와 김창룡 대위의 지휘아래 진행되어 현역 장병 324명, 군관계 민간인 40명 등 364명을 검거했다. 주요 검거된 자는 제15연대장 이던 최남근 대령, 여단장 대리 김종석 중령, 제1공병단장 오규범 중령, 제9연대 1대대장 오일균 소령, 육사교수부장 조병건 소령, 박정희 소령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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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전대통령은 1946년 12월~47년2월까지 제1연대 중대장으로 재직, 당시 제1연대는 태릉에 있었고 그 건물안에 새로 생긴 장교 양성소(사관학교)가 있었으며 1947년 3월과 4월에 졸업한 제3기생들이 주로 전직 사병 출신들이 많았다. 그후 박정희는 47년 9월~48년 9월까지 육군사관학교 학생 파견대 중대장으로 근무하며 김종필 등 육사 8기생들과도 친분이 맺어진다. 감창룡에게 48년 11월에 체포되어 49년 2월에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내부조직을 고발(?)하여 김창룡의 수사에 합류하게 된다. 49년 4월에 이중업이 체포 되는데, 여기에 아마도 박정희가 기여했다는 후문이 있다. (과거 몇번의 술자리를 하는 것을 목격했다는 증언(최경록 중장의 증언).
박정희는 이로인해 채병덕 총장, 정일권부참모총장. 정보국 백선엽 등이 구명을 탄원했고, 징역 10년으로 감형에서 다시 집행유예로 풀려나 군복을 벗었다. 그러다 백선엽이 박정희를 정보국에 문관으로 채용하였고 전쟁이 나자 재입대가 자연스레 이루어졌고 54년 1월에 장성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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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숙군은 49.5월부터 9월까지 5개월간에 실시됐다. 49년 2월 남로당 총책 이재복의 비서였던 민간인 김영식을 체포, 3월에는 이재복의 뒤를 이은 총책 이중업을 체포한다. 수사팀은 이들에게서 얻은 500며의 좌익세포조직과 제1차 숙군시 얻은 정보로 현역 장병 215명, 군관계인 30명 등 245명을 소탕한다.
제3차 숙군은 49년 10월부터 50년 3월까지다. 이 당시는 북한의 보위부 최금경이 군내반란 야기, 폭동, 파괴, 요인 암살 등의 지령을 받고 잠입한 시기로 수사팀은 군인 212명, 군관계 민간인 320명 등 532명을 검거했다.
제4차 숙군은 50년 3월 북로당 남반부 정치위원회 총책 성시백이 잠입한 시기로 수사팀은 군인 및 군속 50명, 군관계 민간인 136명 등 186명을 검거했다. 이 시기에 남로당 정치고문 이주하. 남로당 당수 김삼룡을 3월에 체포하고, 5월에 성시백(김일성의 충복으로 김구선생을 회유하여 북으로 가게했던 인물임)을 체포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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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로 출발하기에 앞서 1948년 10월 19일, 제14연대 안의 남로당원 지창수 상사외 40명이 주도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14연대 전체가 동요하였고, 대구 6연대와 광주의 4연대도 일부가 반란에 참가하였다. 마산의 제15연대 최남근 연대장이 반란에 가담하여 군은 온톤 빨갱이로 가득했다.
제14연대는 여수를 장악하고 순천.벌교.광양을 점령, 여세를 몰아 구례.남원을 향해 진격하였다. 북한에서도 11월 18일 180명의 인민유격대를 오대산을 통해 남파하여 대한민국은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러한 소식을 신문을 통해 알게 된 이덕구와 제주남로당원, 각 면대표 그리고 각 중대장들과 산으로 올라간 사람들은 만세를 부르고 사기가 충천하게 된다. 그들은 4.3때부터 김달삼 이덕구가 곧 남조선이 해방된다고 장담해 왔으므로 이 소식을 듣고 곧 해방이 되는 줄 알았다. 그들은 곧 대한민국이 망하고 공산화되는 것으로 믿었다. 또한 북한의 인민군이 남하하여 남한을 공산화 시키기를 소망하고, 제주도를 공산화하는데 목숨받치기로 다짐한다.
3.진압군, 폭도들의 공격에 수세에 몰려
14연대 반란군 1개 대대가 제주도 인민군을 돕기 위해 상륙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자 폭도들은 사기가 충천하고, 제9연대 프락치들을 통하여 무기가 들어오고 탈영병들이 합세하여 전력이 크게 강화되어 경찰과 국군 토벌대는 수세에 몰렸다.
제9연대 안의 세포들이 국군의 작전과 부대 상황을 알려주게 되어 토벌대는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되는데 폭도들을 토벌하기 위해 투격하면 매복에 걸려 당하고, 부대에 있으면 잠잘 때에 공격한 후 도망치고, 또 추격하면 매복에 걸려 피해를 입었다.
4. 제9연대 안의 남로당원 강의원 소위 반란 실패와 반란진압부대의 반란
48년 10월 28일, 송요찬 연대장이 이근양 5중대장을 불러 2개소대를 이끌고 조천 해안에 상륙하여 사람들에게 "우리는 14연대 해방군인데 제주도 해방군을 돕기 위해 상륙했다"라고 하면 폭도들이 환영과 안내를 하려고 모일 것이다. 이때 폭도들을 모두 생포하라고 지시하게 된다. 이근양 중대장은 연대장 명령에 출동준비를 하게 된다.
이렇게 명령을 지시한 송요찬 연대장은 경찰의 동요를 막기위해 이 사실을 경찰국장 홍순봉에게 비밀리에 알려주려고 전화기를 들었다. 이때 들리는 소리가 있었다.
[경찰 교환수: 세포동무, 오늘 조천해안에 경비대가 상류간다.
폭도 세포: 무슨 소리야 경비대가 어떻게 이곳 해안으로 온단 말이야?
경찰 교환수: 오늘 연대 교환수한테 지금 막 연락이 왔어. 경비대가 14연대 지원군으로 위장 상륙한다고
폭도 세포: 뭐 알았습니다. 곧 바로 덕구동무에게 알리겠습니다.]
송요찬 연대장은 기가 막혔다. 아니 직접 이근양 대위를 불러 비밀리에 작전지시를 했는데 어떻게 이 내용이 전화기에서 흘러나오는지 어처구니가 없었다. 연대 교환수가 경찰교환수에게알려주고 경찰교환수는 다시 폭도들에게알려주고 있었던 것이다.
연대장은 즉시 헌병대장 송효순을 불렀다.
연대장: 헌병대장, 즉시 출동하여 연대 교환수와 경찰서 교환수를 동시에 한 놈도 빼지말고 다 잡아 와!
헌병대장: 무슨 이유로 다 잡아오는지 알려주어야?
연대장: 그 이유는 헌병대장도 알아서는 안 돼! 극비로 해!
헌병대장: 알겠습니다. 즉시 잡아들이겠습니다. 그는 1개분대는 제주경찰서로 보내고, 2개 분대는 연대 교환수를 잡아오게 하였다. 출동하는 헌병중에도 좌익이 있었다.
헌병대장의 통제로 연대 통신병 17명과 경찰서 교환원 모두가 체포되어 왔고, 바로 직전에 근무한 통신병을 연대장이 직접 심문하였다.
연대장: 너 오늘 저녁 연대 작전을 어떻게 알고 경찰서 교환수에게 알려 주었냐? 내무반에서 같이 잠을 자고 같이 밥을 먹는 너가 어덯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느냐? 그러니 우리가 매번 출동하면 폭도들의 매복작전에 많은 인원이 전사하는 등 큰 피해만 발생하고 있었지. 차라리 옷을 벗고 폭도들에 가담하여 총을 겨누어라. 뒤통수에서 총을 겨누는 비겁자가 되지 말고. 너 누구한테 이 작전을 들었나?
교환수: 모릅니다.
연대장: 이놈아, 모른다고? 너가 너 입으로 경찰 교환수에게 말을 하는 것을 내가 직접 들었는데 모른다고?
교환수: 모릅니다
연대장: 너는 전달한 죄밖에 없다. 누구에게 들은 것과 연대내 있는 좌익을 모두 말하라.
교환수: ( 창백해 지는 얼굴로 머뭇거리기만 한다)
연대장: 나의 임무는 폭도들을 자수시켜 새로운 삶을 살도록 하는데 있다. 너희들 결국 다 죽는다. 너의 결단이 새명을 구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분명 너는 잘못이 없다. 내가 보장한다. 남로당에 속아 빨갱이 노릇이 잘못 되었다고 너도 알 것이다.
교환수: 알겠습니다. 꼭 목숨을 살려주시요.
연대장; 내가 보장한다. 약속이다.
교환수: 출동하는 5중대 안에 선임하사 조항기 이하 8명이 연대장님과 이근양 중대장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려 합니다. 장교 6명, 사병 80명이 세포원입니다. 오일균 소령과 문상길이 처형되자 연대 구매관 강의원 소위(육사4기), 박겨포 부대 박노구 소위(육사5기)가 책임자며, 5중대가 공비와 합류하는 것은 시간문제 입니다.
연대장: 뭐라 기가 막히군. 아니 나도 죽이려 한다. 정말 너희 프락치들은 부모형제도 없다더니 사실인 모양이구나. 같은 민족인데 어쩌다 그렇게 되었느냐?
교환수: 나는 정부를 수집하여 언제든지 새벽1시에서 2시 사이에 알려주는데 오늘은 저녁에 작전을 실시한다고 하여 알려주다 전화선이 합선이 되어 연대장님이 저의 말을 도청하여 발각되었습니다. 사실 그 전화선이 연대장님의 모든 전화를 도청하는 선입니다.
연대장: 언제부터 그랬느냐?
교환수: 사실 오일균 소령이 있을 때 연대를 모두 우리 편으로 만들어 해방군에 합류하려고 하였는데 오일균 대대장이 체포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오랫동안 침묵에 머물던 송요찬 연대장이 헌병대장을 불렀다.
연대장: 헌병대장, 우리 연대 안에 좌익이 장교 6명, 사병 80명이 있는데 책임자가 구개관이다. 그러니 헌병 전원을 극비에 동원하여 장교부터 체포하고, 중.상사 그리고 사병을 체포하되 같은 시간에 동시에 한순간에 체포하고, 도망치지 못하게 만전을 기하고 무기고를 철저히 경계하고 작전에 들어가라.
헌병대장: 아니 연대에 그렇게 많이 좌익이 있습니까?
연대장: 부대를 완전히 포위해서 체포할 것. 그리고 한 놈이라도 놓치지 말고 철저히 체포하여 철야조사를 해라
이렇게 하여 체포된 인원이 86명이었다. 따라서 헌병대장과 참모들이 즉각 처형을 건의 하였다.
헌병대장: 연대장님 이놈들 한명이라도 살려주면 다시 반란을 일으킬 놈들입니다. 재판까지 갈 필요가 없습니다.
참모/ 우익장교: 그렇습니다. 이제 틈만 나면 반란을 일으켜 우리를 다 죽이려 할 겁니다
그러나 86명 중에 6명이 탈출하였고, 처형장에서도 4명이 도망쳤다.
육본은 이러한 보고를 받고 초비상이 걸렸다. 이렇게 많은 빨갱이가 들어와 있다면 다른 연대도 많을 것인데 어떻게 그들을 찾아낼 것인지 고민이 많아졌다.
당시에 반란에 가담한 각 연대들의 사정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제14연대: 좌익인 지창수 상사가 제주도 진압명령을 받은 여수의 제14연대 1개 대대를 반란부대가 되게 하자 나머지 2개 대대도 반란에 합세하여, 순식간에 장교 20명을 죽였다.
김지회 중위가 반란군의 사령관이 되어 여수와 순천의 경찰서를 단숨에 점령하고 순천,보성,벌교,광양을 점령, 이 지역 인민위원회에 넘겨 인민회의에서는 현재 온갖 만행이 다 저지르고 있었다.
반란군은 여세를 몰아 구례와 남원을 점령하고 북상하려다 군산의 제12연대 백인엽 부연대장이 반란군과 싸워 승리함으로써 반란군은 지리산으로 도망쳤으나 제12연대도 많은 피해를 입고 현재 구례에서 치열한 전투 중에 있었다.
제4.15.6연대: 광주의 4연대가 진압 차 출동하였는데 일부가 반란군에 가담하였다. 마산의 제15연대는 진압 차 출동 했는데 최남근 연대장이 반란군에 가담하였다. 대구 제6연대가 반란 진압 차 출동했을 때 부대 안에 남아 있던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켜 반란 진압을 위해 출동했던 병사들이 차를 타고 다시 부대로 돌아오던 중 2차 반란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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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근 연대장(백선엽의 만주군관학교 1기 선배): 1911년 만주에서 태어나 봉천군관학교를 졸업, 보병 소위로 임관하여 간도특설대에 배치 되었다. 일제 패망 당시에 중위로 간도특설대 신병교육대에 근무했다. 해방 후 북한에서 반민족주의자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사상전향을 서약하고 풀려났다. 이후 백선엽. 김백일과 같이 월남하여 조선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국방경비대 중위가 되었다.
군복무 중 해방신학을 가진 이재복 목사에게 포섭되어 남로당에 입당하여 대전 제2연대장 김종석과 나란히 당내 거물급이 되었다. 춘천 8연대에 근무할 때 포섭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여순사건이 나면서 마산 제15연대장 신분으로 진압명령을 받고 출동, 반란군을 쫒다가 포로가 되었다. 그리고 탈출하게 되는데 위장탈출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반란군을 쫒다가 우연히 마주쳤으나 적극적으로 대항하지 않고 부관 조시형 소위와 같이 포로가 되어 지리산에 입산하여 반란 주모자 김지회를 설득하려다 실패하였다.
김지회 처가 묵인하에 탈출하여 화개장터에 나타난다. 그는 여러사람에게 스스로 포로가 되었다는 의구심을 받게 되는데 과거 그의 부하였던 김점곤 소령에게 수사를 받고 풀려난 후에 상부에서 임명받은 부대로 복귀하지 않고 충북으로 탈영하였다.
수일 후에 대전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남로당이라 자백했다. 그는 조직을 불지않고 결국 사형을 언도받아 수색에서 총살형으로 삶을 마감했다.
그가 남긴 일화는 동생에게 "형은 좌익에게 맞아 죽고 나는 우익 손에 죽는다. 이럴 때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하여 처신 잘 하고 부모님을 잘 모시거라" 였다. 그는 의리도 있고 호탕한 성격으로 명망이 높았다고 한다. 하지만 한 번 물들은 빨간 물은 지울 수 없었다.
훗날 미군 고문관 하우스만 대위는 백선엽에게 왜 최남근을 살리지 않고 박정희를 살려 주었느냐고 물었는데, 백선엽은 공적인 일을 한 것 뿐이라며, 최남근은 현역 연대장으로 반란군과 내통하였으며 지은 죄가 너무 무거워서 살릴 수 없다고 대답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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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당시에 국군은 총 8개 연대 5만 정도인데 이 8개 연대중 9연대.4연대.6연대.15연대 등 4개연대 일부가 반란에 가담하였고, 군 안에는 약 10,000여 명 이상이 좌파 남로당원이 있어 대한만국은 전복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따라서 정보국에서는 각 부대에서 평소 의심이 가는 장교와 하사관을 철저히 미행하여 사전 모의를 차단하고 있으며, 특별수사본부에서 전국 경찰을 동원하여 남로당원 검거에 전력을 다하였다. 특히 김삼룡.이주하.이재복 등 남로당 거물급을 검거하기 위해 밤잠을 자지않고 체포에 열을 올리고, 군 안의 남로당원은 김창룡 대위가, 일반인 남로당원은 오재도 검사가 좌파들을 차단하고 나섰다.
5.보안법이 태동하다:48년 12월 1일
정보국에서는 국군 안의 남로당원을 파악해 놓고도 이들이 잘못을 하지 않는 한 남로당원이라고 해서 체포할 수 있는 법이 없어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래서 정부에서 48년 12월 1일 보안법을 만들어 이 법에 따라 남로당원을 체포하여 반란을 미연에 방지하려 하고 있었다.
제3절 제주인민군의 잔인한 양민학살
애월면 고성리 구엄초등학교 교사 문기호가 4.3폭동 중책을 맡았고, 3.1발포사건시 중문지서 강수현 순경이 이 마을 출신으로 그는 제주인민군에 입대하였다.
4.3직 후 고성리로 오던 경찰 가족이 폭도들에게 한 살인 아이와 함께 학살 되었다.
48.10.23일 조천면 함덕지서와 조천지서를 공격하였다. 여기에 경비대가 지프를 타고 가다 공격을 받았다.
48.10.24일에 애월 수산리 경찰 김창순이 피살되었다.
48.10.26일 고성마을 김창언을 학살한다.
48.10.27일 구좌면 하포리 부도형과 그의 부친을 잔혹하게 학살했다.
48.10.27일 애월지서를 습격하여 경찰 3명이 전사하고, 6명이 부상했으며 폭도 1명이 부상당했다.
48.10.28일에 애월면 신엄 3구 양영호.강병호를 학살하고 11.7일에는 강병호 부친 강위조가 실종된다.
48.10.28일 조천면 신흥리 김태배의 친인척 4명을 학살하는데 그 중에 1명은 만삭의 여자였다.
48.11.11일에 다시 조천 김태배 집에 나타나 그의 친인척 8명을 모두 학살하였다.
이에 경비대는 고성리에서 총격전으로 마을을 수색하여 20여 명을 총살하게 된다.
48.11. 2일에 성산면 수산1링에서 조태흡이 학살되고, 11.4일에는 한림면 청수2리에서 경찰 고태화의 아버지와 동생을 학살했다.
제4절 48.11.1일,좌파 경찰의 제주도 적화 음모 실패
지금까지의 내용은 주로 경비대에 관한 것이다. 지금부터는 경찰 관련 내용을 좀 알아보려 한다.
48.10월 31일 제주경찰서 안의 이발소에서 근무하는 서용각이 위생계장 고창호에게 다급하게 보고하였다.
서용각: 합동통신 김기가작 저에게 하는 말이 "이제 곧 제주도는 해방 된다"며 지금 산으로 올라. 산에 올라가면 영웅 대접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여 깜짝놀라서 여기로 왔습니다.
고창호계장: 알았다. 즉시 서장에게 보고 하겠다.
서용각: 지금 폭도들이 무엇인가를 꾸미는 것 같습니다. 김 기자를 미행하면 무슨 일인지 전모가 밝혀질 것 같으니 빨리 미행을 하십시오. 이것은 은밀히 해야지 경찰 안에도 남로당 프락치들이 우글거리는데 우리의 행동이 이들에게 알려져 그 놈들이 폭도들에게 알리면 우리가 위험하게 됩니다.
고창호계장은 경찰서장에게, 서장은 다시 경찰청장에게 이 일을 상의 하였고, 제주경찰서장은 즉시 사찰과장 박태의를 불러 합동 통신 김기자를 미행하고, 그와 접선하는 놈은 무조건 연행하라 지시했다.
이렇게 하여 김기자와 6명이 특별수사대로 연행하여 문초가 시작되었다.
수사관: 김가자, 너희는 이제 죽었다. 나는 저승사자다. 오늘 밤에 뭘 하려는거냐?
김기자: 야 풋내기야 너가 날 아무리 지지고 볶고 고문해봐라 . 난 모른다
수사관: 글래 너는 병신 되는거야. 야 이새끼 저 지하에 처넣어! 저기 눈 큰 놈 끌고 나와.
수사관: 어이 너는 빨갱이가 아닌 것 같은데 어쩌다 그 놈들한테 걸려들었는냐?
눈 큰 놈:( 어리둥절하며 감격하게 된다) 저는 사실 잘 몰라요
수사관: 그래 너는 잘 모르는게 맞아. 너를 이용해야 되니까 별 대우도 못받고 너는 이용만 당하고 있는거야!
눈 큰 놈: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사실은 저의 먼 친척이 경찰총에 그만... !
수사관: 그래 맞아. 너 그당시에 누가 지서에 불지르고 경찰 가족을 죽였는지 알아?
눈 큰 놈: 산에 올라가니 경찰이 무자비하게 죽였고, 경비대가 마구 불질렀다고 했습니다.
수사관: 그거봐라, 그놈들은 자기들이 동네에 불지르고, 경찰 가족이라고 찢어죽이고, 우익이라고 친구도 죽이는 놈들이니 뒤집어 씌우는 것이 전부다. 너는 속고 맹목적인 이용을 당하는거야. 무슨 해방이 되니 오히려 육지에서 토벌군이 오고 있는데. 내가 너는 분명 살려준다. 그리고 이곳에서 보호도 해 줄 것이다. 걱정마라. 여기 커피 한 잔 해라.
눈 큰 놈:(눈물이 흐르면서) 실은 제주도 인민공화국을 건설하기 위해 경찰 간부들을 죽이고 경찰서를 점령한 다음 남로당을 총동원하여 항쟁을 일으켜 제주도를 완전히 점령한다는 계획입니다. 오늘 밤, 10시에 폭도들이 산에서 내려와 11웕 1일 새벽 4시에 경찰서를 공격하면 경찰서 안의 죄익들이 강부들을 죽이고 경찰서를 해방군들이 함께 점령한다는 계획입니다.
이렇게 하여 긴급히 서청. 경비대에 알리고, 우체국.전화국.송신소 등에 나가 있느느경찰을 체포해 옷을 벗기고 수갑을 채웠다.
"여기에 폭도들과 같은 편인 경찰이 11명이 있다. 이게 명단이다!"
수사관2: 경찰이 좌익이라니?폭도들과 내통하고 우리를 다 죽이고 경찰서를 점령하여 제주도를 해방시킨다고?
체포된 경찰들: 아니 우리를 무슨 근거로 동료를 폭도로 취급하는거요?
수사관2: 그래 너희들 동료다. 그런 동료를 죽이려 폭도들과 내통한 것이 다 들어났다. 하나 둘씩 대질로 그 사실을 증명하지.
체포된 경찰1: 나는 절대 아니다. 그런 소리도 못들었고 나는 그 놈을 알리도 못해
체포된 경찰2: 아무리 해봐라. 나는 모른다
수사관3: 너희들 계속 그렇게 나오면 아무리 같은 밥을 먹은 동료라도 어쩔수 없다. 너가 한 그대로 한번 맛을 봐라.
그러다 보니 만신창이가된 체포된 경찰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여기에 폭도들과 같은 편인 경찰이 11명이 있다. 이게 명단이다!" 기가 막히게도 11명의 명단에는 특별수사요원도 2명이 있었다. 1명은 체포되었으나 1명은 산속으로 도망쳤다. 이들이 밝힌 좌파는 도청.법원.검찰청.읍사무소.해운국 등에 75명이 있었다.
즉시 경찰은 비밀리에 이들을 체포하여 죄질을 구분하여 A급 20명, B급 38명, C급 25명으로 분리하여 A급은 즉시 처형되게 되면서 "이덕구는 9연대. 경찰 등에 침투한 좌파들로 11월 1일 새벽 4시를 기해 제주도를 완전히 공산화 하려다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따라 특별수사대도 김병택 반장을 제외하고, 모두 육지 출신으로 바꾸게 된다.
제5절 폭도들 9연대 2대대 6중대 공격 "중대장 이하 14명이 전사하다"
48.11.2일, 한림에 국군 제2대대 6중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이덕구는 제14연대가 반란에 성공했다는 것을 알고 폭도들을 선동하여 만세를 불렀다. 그들은 곧 북한인민군이 38선을 넘어 남조선을 해방시킨다고 선전하여 제주도인민군들과 산사람은 그렇게 알고 참고 살았다. 따라서 그동안 경찰지서는 공격해도 경비대는 공격하지 않았느데 대담하게 공격을 하게 된다.
이덕구는 도당사령부에서 폭도들과 분대별로 하산하여 주간에 한림에 모여들었다. 그리고 경비대 6중대는 갑작스레 총알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감쪽같이 사라져 버리자 살아난 경비대들이 중대장의 지휘하에 폭도들을 추격하게 되는데 여기서 다시 매복에 걸려 중대장 이하 14명이 전사한다.
긴급출동 명령을 받은 제3중대는 부상자들을 수습한 후에 다시 폭도들을 추격하기 위해 깊숙한 산 속을 수색하던 중에 역시나 다시 매복습격을 받아 기관총 등 많은 무기와 실탄을 버리고 많은 병사가 전사하고 물러났다.이에 다시 대대장은 제5중대장(이근양대위: '79.12.12 사태시 제3군사령관)에게 폭도들을 찾아내라고 지시했다. 중대는 수색대를 산속에 집어넣고, 3개 소대는 주변을 철저히 경계하였다. 이윽고 수색대로 부터 중산간 집에 폭도들이 있는 것을 확인하여 본대에 알렸다.
원래 5중대도 8명의 세포가 있었다. 그러나 이미 색출하여 처단함으로써 정보가 새지않고 있었다. 중대는 새벽을 기다려 마을을 집중공격하여 벌집을 만들었다. 마을에 들어가 확인결과 100여 명이 죽어있고, 몇 명은 땅에 엎드려 있고 나머지는 탈출하였다.
부상자들을 심문하여 폭도들의 보급창과 무기 수리공장,식량창고 등을 찾아냈다.
"기가 막혀버린 연대장, 어떻게 이렇게 많은 무기와 식량을 보관할 수 있느냐?"
사실 폭도들은 중간산 마을 주민들과 내통하지 앟고는 준비할 수 없었다. 중대 선임하사들이 내통자들을 색출하여 처던해야 한다고 강력히 건의하여 한림면의 좌익활동을 한 사람을 모조리 잡아서 한림초등학교에 수감하니 학교 교실이 초만원이었다.
송요찬 연대장은 군 작전에서 양민을 보호하기 위해서 중산간 마을을 해변가로 이사시켰다. 이때부터 제주이님군과 협조원이 많이 죽게 되었다. 그러나 진상보고서는 앞에서 언급한 이덕구의 9.15사건부터 이상의 사건은 언급하지 않고 있다. 국군이 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계엄령을 선포한 이유는 설명하지 않고 다만 "강경작전준비를 완료한 진압군은 소개된 중산간 마을을 모두 불태워버리고, 남.녀.노.소 구분없이 총살하는 등 강경진압을 했다고 기록하여 모든 것이 진압군의 강경진압처럼 좌편향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사실 김달삼이 북으로 월북한 시기까지는 48.7.20일까지 경찰 53명, 우익 235명이 살해되었고 인민유격대와 협조한 자는 15명이 죽었다. 여기서 끝이 났으면 그렇게 많은 피해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덕구가 제2대 사령관이 되던 48.9..15일부터 다시 우익과 경찰을 죽이기 시작했고, 10월 24일에는 대한민국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그리하여 48.11.2일에 9연대 6중대를 공격하여 중대장 포함 21명이 전사하면서 국군과 폭도들간에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48.10.28일의 9연대 강의현 소위 외 80여 명이 박진경 연대장을 암살하듯 송요찬 연대장을 암살하려다 사전 발각 되어 실패하고, 48.10.31일에는 제주 경찰 및 공무원 75명이 남로당과 합세하여 제주도를 공산화 하려다 실패하였다. 정부에서는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폭동을 진압하게 되면서 사실 일부 무고한 양민의 피해도 발생하게 되는 것 또한 사실이라본다.
그런데 진상조사위 박원순 변호사. 이해찬 총리 등은 이러한 과정은 따 빼버리고 오직 유격대 피해(중산간 마을 피해자 포함)만을 마치 군.경의 양민학살로 인한 피해라 묘사하여 오직 피해보상과 민주화 투사로 진상조사 보고서에 기록하고 했다. 하지만 이 관련 당시 제주도에서의 폭력사건은 분명 기록으로 존재하고 있다.
인민유격대들로부터 경찰 153명, 국군 186명, 우익인사 1,673명이 무참히 죽었다. 이렇게 죽어간 것이 명약한데도 그들은 사살된 공비들을 희생자로 둔갑하여 폭도는 한명도 없고 이승만 대통령과 군.경이 제주 양민 13,000여 명을 학살했다고 규탄하고 있다. 실제 그 선량한 피해자는 약 2,000명 정도라 하는데, 물론 내가 그걸 증명할 아무런 기록이나 이를 사실 증명할 근거는 없다. 더구나 이제 제주도를 민주화의 성지인양 정치권이 여야를 불문하고 그 선봉에서 앞장서 과거사를 왜곡하는데 누구도 나서 '아니다"라고 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지금 우리사회는 진실규명이 아니라 진영 논리로 범벅이 되어 많은 사람이 진실로부터 멀러져 가고 있다. 특히 평화 공원에 기록된 내용은 다분히 좌 편향적이지만 누가 감히 아니다라고 말하지 못한다. 나는 몇 번에 걸친 제주도지역 국민방위군 피해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에 많은 지역주민을 만났다.
사상범은 무섭다
하지만 이제 누구도 "아니다"란 말을 할 수 있는 원로들이 없다. 다만 한맺힌 분(?)들의 유족이나 그 이익관계에 관련된 사람들은 결사항전으로 사실을 덮어 버리고, 군.경의 모략과 헤게모니 싸움에 억울하게 숨져간 것으로만 역사는 남겨지고 있다.
당시의 군인이나 경찰은 이제 이 땅에 남아 있지않다. 누가 진실을 말하려는가 멀기만 하다. 고 예)이종록 중령(당시 송요찬 연대 대대 정보장교)이 나에게 남겨준 이야기는 사상범은 무섭다는 것 뿐이다. 당의 지령을 수행하는데는 부모형제도 없다는 것이며, 말로써 민족을 내세우고 민중을 팔아 선량한 국민을 선동하여 산속으로 오르게 한 그 선동은 이제 정당방위처럼 이 땅에 남겨지는 현실이 두렵기만 하다.
"홍민표의 솔직한 술회 : "간부를 혁명의 소모품으로 이용하는데 있다"
해방이후 서울시 인민위원장으로 30만 명의 조직 명단을 오제도 검상에게 넘긴 홍민표(전향)는 공산주의 인간존엄성을 이렇게 말하였다. "직업적 혁명가라 함은 마르크스 레린주의 사싱을 가지고 전 생애를 공산주의 혁명에 이바지할 것을 결심하여 혁명활동을 직업으로 하고 있는 사람이다. 간부는 인재자본 혹은 간부자본이다. 인간을 하나의 자본으로 본다는 것은 계급이익의 촉진을 위한 수단으로 밖에 보지 않는 사회주의적 휴머니즘의 본성을 들어낸 것이다. 공산주의 혁명은 인간의 이이ㅣㄱ을 생각하고 인ㄱ단의 존엄을 높이기 위해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도구의 역할까지 추락시키는 비인간화 작업이다. 사실 공산주의와 인간의 존엄이라는 것을 양립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남로당은 간부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표어 밑에 간부 정책을 세웠으나, 그 속셈은 간부를 혁명의 소모품으로 이용하는데 있다"라고 술회했다.
제6절 인민군 사령관 이덕구의 공격 개시 명령
이미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같이 김달삼이 북으로 떠나간 다음 사령관이 된 이덕구는 여순반란사건이 마치 성공한 것처럼 소문이 나자 9월 15일부터 적극적인 전복활동에 나서게 된다.
9월 15일, 중문면 도순리에 대청단원 문두천이 양민으로 위장하고 농사를 짓고 있는 폭도들에게 난자당하여 죽게 되고, 9월 18일에는 성산에서 민보단장 김만풍을 칼로 학살하고 이장도 학살했다. 9월 25일에는 김녕리 장례식장에 나타나 특공대장 박인주를 찔러 죽이고 10월 1일에는 제주읍 도남리에서 무고한 우익인사를 학살하는 등 만행을 저지르자, 결국 48년 10월 11일 제주도 경비사령부를 신설하고 여수 제14연대에서 1개 대대를 차출하여 9연대에 배속하려 했다.
연대장 송요찬은 48년 10월 17일 포고문을 발표하여 해안으로부터 5킬로미터 이상 중간산 지역으로부터 통행을 금지토록 했다.
1. 대한민국 정부에 선전포고
포고문은 "침략자 미제를 이 강토에서 쫒겨내기 위하여 매국노 이승만 일당을 반대"하기 위하여 당신들은 총부리를 놈들에게 돌려라"라는 선전포고였다.
여수 반란군이 제주도의 게릴라를 응원하기 위하여 곧 오게 된다는 소문이 온 섬에 퍼지자, 제주도 학생들이 시위를 전개하고 북한 깃발을 게양하기에 이르자 학교 폐쇄령이 내려지는 등 추산 2만 여명이 제주인민군에 가담하여 협조하였다.
2. 폭도들의 과감한 공격
가. 중문지서 공격
이덕구와 폭도들은 거칠 것이 없었다. 11월 5일 새벽에 그들은 중문지서를 공격하기 위해 먼저 안덕지서를 공격했다. 그러나 안덕지서의 철통 방어에 점령하지 못하였다. 보고를 받은 서귀포 경찰서와 군경 합동 토벌대는 안덕을 향해 질주했다.
이 시간에 약 200명이 중문지서를 포위하고 공격을 개시하여 면사무소 곡식을 산으로 옮기고 우익들의 집에 불을 질렀다. 그러나 경찰이 완강히 방어하자 접근을 못하고 불을 지르려 했으나 여읯치 않았다.
지서가 비록 폭도들이 완전 포위되었지만 점령되지 못하는 과정에 결국 밖의 경찰서와 연락이 이루어져 증원군이 도착하게 되자 폭도들은 마을에 불을 질러 가옥 40여 채가 전소하게 되었다. 인접 경찰들은 접근하는과정에 많은 인원이 매복에 걸려 피해를 입었다.
"무분별한 좌익인원 총살이 화를 키웠다"
결국 모슬포의 3대대가 출동하게 되었다. 하지만 3대대가 도착 했 을때는 이미 폭도들은 산속으로 은거해 버렸다. 박격포를소며 추격했지만 허사였다. 대대는 마을에 있는 좌익 인원들을 색출하여 빨갱이들이라고 대부분 총살해 버린다. 이런 것이 소문을 타면서 군.경이 씨를 말린다고 확대되면서 많은 인원들이 산속으로 들어가는 원인도 되었다.
이렇게 화여 서청도 11월 19일 16명을 처단하고, 안덕 근방에서는 폭도들에 협조한다는 이유로 20여 명이 처형되는 등 토벌대는 폭도들에게 협력하는 마을을 불지르게 되었다. 폭도들은 교묘히 숨어있으면서 연락을 주고받아 토벌대가 찾기란 어려웠다.
나. 서귀포 공격
당시 서귀포 경찰서에는 100여 명의 국군이 있었다. 폭도들은 국군을 산으로 유인한 다믐 서귀포를 공격할 작전계획을 세우고 11월 7일 대대적인 공격을 하기로 한다.
그들은 일부러 역정보를 흘리며 군경을 쌀오름으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경찰에서 정보를 수집하여 본부에 보고하고, 드디어 군.경은 폭도들이 내려오기 전에 공격하기 위하여 먼저 50명의 군.경토벌대가 11월 6일 경찰서를 출발 하였다.
중대장이 수색대를 앞세우고 쌀오름으로 도착할 무렵 폭도들의 기습이 시작되었다. 얼마 간 총격전이 있는 후에 중대장은 일단 어둠을 기다려 11월 7일 새벽 쌀오름을 공격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토벌대를 유인한 다음 11월 7일 아침 8시경 서귀포 경찰서로 향했다. 폭도들은 경찰서를 공격하지 않고 민가 72채에 불을 지르고 도망쳤다. 이 사건에 폭도 6명 사망, 경찰 3명 전사, 일반인 3명이 사망하게 된다. 여기서 철수한 폭도들은 다시 서귀포 근처 발전소로 가서 공격하고 도망갔다.
이렇게 되자 국민들은 도대체 누굴 믿을 수도 없었다. 폭도들이 나타나도 군.경이 오지도 않는 경우가 많고, 폭도들이 가고나면 폭도들과 내통하여 저지른 일이라고 경찰이 사람들을 끌고 갈 것이니 도대체 누굴 믿어야 되느냐고 원성이 높아갔다.
다. 폭도들의 우익 학살과 진압군
이렇게 되자 경비대는 폭도들에게 정보를 제공하는자, 선거에 앞장선 자, 도로를 파괴하여 출동을 지연시킨자. 삐라를 뿌린자 등을 찾아내 처형하게 된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
서흥리.호근리에서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양민 19명이 처단되었다. 주민들은 폭도들이 시키는 것을 안하면 반동분자라 하여 죽이니 어쩔수 없아 협조해야 했다. 이에 토벌대는 또 빨갱이와 내통하고 협조하였다고 하여 죽이니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었다.
주민들은 이럴 바에야 아예 산으로 도망치자 하고 너도나도 산으로 도망치니 그 숫자가 수천 명이 산으로 몰렸다.
48년 11월 3일, 토벌대는 남원면 수망리와 의귀리 한남리 주민 5명을 처형하고 마을에 불을 질렀다. 이곳은 가옥이 300호 정도 되는 큰 중간산 마을인데 20호 정도만 남기고 다 타버려 마을 사람들이 살 곳이 없어 결국 산으로 피신할 수 밖에 없었다. 제주도 전역의 중간산 마을은 대부분 이런 상황이 되었다.
의귀리에 가면 당시에 처형되어 매장된 묘지가 있다.
그 가족들 모두가 빨갱이로 죽고, 살아 남은 인원은 그 후에 어디론가 고향을 떠나버렸다. 이 묘지는 바로 동네에 있다. 지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 묘의 슬픈 사연을 보거나 들어서 안다고 한다.
나는 국민방위군의 실태조사를 위해 이곳에 몇 번 갔다. 이유는 성산지역으로 들어온 방위군이 이곳을 거쳐 도보로 강정리 ㅈ역으로 갔다는 제보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당시에 얼마나 바람이 심하게 불어대는지 눈을 뜨고 걷기가 힘들었다. 이러다 보니 많은 방위군 징병자들이 호흡기계통의 질황이 과다 발생하였고 상부에서 이들에게 지급되는 부식류나 월급 등을 모두 착복하여 빈사 상태로 육지에서 여기 제주까지 배로 와서 일부는 지금의 제주항인근에, 또 일부는 바로 모슬포에서 강정리로, 또 일부는 성산지역에서 강정리로 도보행군으로 이동하는 과정에 기아와 돌림병이 돌아 훈련도 받기 전에 상당수 인원이 순직하게 되었다.
따라서 나는 강정리에서 국민방위군을 60여 명 발굴하는 자료를 수집해서 통제하였다. 이 중에 1명은 유전자 검사로 신원도 확인되었다,
제주에는 여러 곳에 유공자 묘지가 있다. 대부분 4.3사건과 관련된 희생자들의 묘역이다. 물론 그 후에 6.25전쟁이나 월남전 참전, 기타 제주지역이나 육지에서 작전간 순직. 전사한 인원들의 묘지다. 물론 조천에도 커다란 묘지가 있고 유공자 묘비가 있다. 이제 세월이 흘러 일부는 그 누구도 찾아와 주지 않는 쓸쓸한 묘지도 많다.
거문오름 탐사구간에는 깊은 동굴이 있고, 이 속에서 숨져간 유해가 발견되기도 했고 지금도 있다고도 한다. 나는 그 입구에 서서 묵념을 올렸다.
많은 시간을 유해탐사에 쏟다보니 사실 무고하게 죽어간 인원도 많이 발생했다는 것을 이해한다. 그렇다고 군.경을 무자비한 토벌대로 몰고 가는 것은 절대 반대한다. 그 원인을보면 전우나 동료가 무참하게 난자당하여 죽고, 우익인사나 그 가족들. 군.경의 가족들이 또한 엄청나게 잔인한 테러로 죽어간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당시에 분명한 것은 김달삼이나 이덕구나 분명 공산주의자였고, 남로당원이 거의 3만에 이르는 제주는 북한 김일성 일당이 한반도를 공산화 하는데 해방구로 이용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과잉진압이 부른 화근이라 하면 안된다. 2.7사건이나, 3.1절 사건. 4.3일 사건 등은 전체로 볼 때 큰 피해는 아니였다. 하지만 이럴 때마다 남로당 세포들의 선전 선동으로 많은 인원이 산으로 오르고 군.경 내부에 침투한 프락치 들과 연동하여 무고한 양민과 그 집에 불을 지르고 진압군과 이간질을 한다.
이러다 보니 서청이나, 군.경 토벌대가 일부 과잉 진압으로 어느 동네는 산에서 내려오라 해도 나오지 않고 오히려 은거하여 있다가 매복 기습으로 죽다보니 신흥 조천같은 곳은 남자들은 다 죽게 되는 비극이 발행했다.
김달삼이 육군의 3대 대포 중 한 명인 당시 세번째 연대장 김익렬과의 평화회담은 사실은 시간을 벌고, 내부에 침투해 있는 프락치들의 연결과 포섭을 하기 위한 술책이지 진정으로 평화를 자유를 위한 것이 아니다. 이미 북한에 가있는 박헌영 등 남로당의 지시와, 조선 전체를 공산화 하려는 김일성의 의도였으며, 그가 북으로 간 이후의 이덕구의 9.15사건부터도 이미 남북한에 정부가 수립되었는데 그들은 6.25남침을 위한 여건 조성을 위해 제주도를 그 해방구의 출발점으로 이용했다.
이로부터 여수의 제14연대 반란과 대구 6연대의 반란, 마산 제15연대 연대장의 반란이 이어지면서 제주는 힘든 섬이 되었던 것이다. 정부를 믿지않고, 남로당의 지령에 따라 움직이는 산사람들의 행동은 비록 몰라서 그랬다 하더라도 의사는 아니다.
[폭도들의 학살과 토벌대의 처형 반복]
11월 11일 새벽 3시경, 폭도들 30여 명이 조천리와 신엄리를 분산 공격하였다. 신엄리에 가서우익대표 김여만의 집에 가서 대표가 없자, 그의 처와 3살짜리 딸등 일가족을 칼로 찔러 죽인다. 그래도 경찰은 폭도가 무서워 지서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이런 식으로 조천리도 공격항여 30여 채에 불을 질렀다. 11일 날이 새면서 폭도들이 철수히자 그때서야 경찰도 지서에 나와 마을을 둘러보았다.
구좌면 행원리 마을 사람들은 특히 좌익들이 장악하였다. 5.10선거를 마을 전체가 반대하여 참여하지도 않고, 반대로 8.25 인민위원회대표 선출 지하선거 때는 모두 참여하였다. 이곳은 11월 7일 군인.경찰.서청으로 구성된 토벌대가 마을을 덮쳐 7명을 처형하고 가옥 20여 채를 불을 질렀다. 이렇게 하여 11월 9일에 2명, 10일에 5명, 13일에 3명을 처형하였다.
11월 1일에 함덕리에서는 이장이 나서 신원을 보장한다고 하는데도 이장까지도 처형하는 악순환이 되었다.
라. 폭도들의 공격, 진압군의 공격
이덕구의 명령에 따라 11월 11일 새벽, 폭도들이 조천지서를 포위하고 일부는 면사무소에 불을 질렀다.
11월 4일에는 2대대가 면사무소 방화 소식을 듣고 중간산마을에 있었으나 함덕초등학교 본부로 주력부대가 내려왔다. 이날 오후 4시에 토벌대는 함덕과 신흥을 덮쳐 남자들은 모조리 죽였다. 함덕에서 9명, 신흥에서 19명, 조천에서 8명이 처형되자 ,폭도들이 조천의 우익인사 가옥 30여 채에 불을 질렀다.
폭도들은 여세를 몰아 식량을 보내주지 않은 이장원의 집을 포위하고 처와 동생 그리고 어린 자식 2명을 무참하게 살상하고 불을 질러 방에 숨어있던 3명의 자식들은 불에 타 숨졌다. 다시 그들은 신흥리에서 경찰가족 6명을 칼과 죽창으로 죽인다.
폭도들을 잡기 위해 출동한 제2대대는 출동해 보니 아무도 보이지 않자, 행여나 그들의 매복에 걸려 다 죽는 줄 알고 역으로 대흘 2리에 들어가서는 주민 20여 명을 내통자라며 처형하게 된다. 이러다 보니 서로간에 불신은 극에 달하게 된다. 이래서 마을 사람들은 산속으로 숨게 되는 것이고 토벌대는 모두 똑같은 빨갱이라며 죽였던 것이다. 사실 양민과 폭도를 구별하기가 힘들었다.
토벌대는 11월 3일에 제주읍 연동마을 덮쳐, 산으로 미쳐 도망치지 못한 7명을 처형했다. 9연대 내부에서 색출된 세포 80여 명이 유치장에 구금되어 있는데 이중에 4명이 탈출하는 사건이 생기자 토벌대는 젊은 사람은 다 잡아 드렸다.
11월 6일 토벌대는 제주읍 삼양리를 덮쳐 여기서도 민간인 7명이 처형되고, 11월 13일에는 조천면 교래리에 들어가 집집마다 불을 질렀다, 그리고 얼씬거리는 인원은 모두 잡아 14명을 처형한다. 이러다 보니 이불과 식량을 가지고 애를 등에 업고 산속으로 들어갔다.
마. 토벌대의 계속되는 선무 방송
이렇게 되자 송요찬 연대장은, 주민들을 해변가로 소개하라고 방송하면서 자수하여 광명을 찾으라고 전단과 대자보를 붙였다. 산에서 내려오지 않으면 공빌로 인정하여 즉시 사살하겠다는 내용이었다.
토벌대는 경찰과 합동으로 이미 작성된 관련자 명단을 가지고 색출작업을 계속하였다. 자수하는 사람은 모두 수용소에 있게 하고 한라산을 이 잡듯이 뒤졌다. 산에서 얼씬 거리는 인원은 폭도로 판단하여 무조건 사살했다.
이러한 참극은 바로 남로당 유격대가 바라던 바로 이렇게 됨으로써 자신들의 세력이 공고하게 뭉쳐지고, 국민들의 토벌대에 대한 원성이 쌓이어 자기 편으로 돌아온다고 믿었다.
제12장 제주도 계엄령 선포와 계속되는 공방
제1절 개요
지금까지의 내용은 주로 이선교 저자의 "제주 4.3사건의 진상"이 주 내용이고 인터넷에서 개인의 프로필 등을 가져왔다. 제주 4.3사건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 당시의 토벌대(군.경)의 작전을 변호할 사람이 대부분 타계 하였다는 것이다. 더욱이 우익이라 할 제주도의 당시의 우익인사는 군.경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타계하였고 그 가족들은 숫자의 열세에 따른 시대 변화에 모두가 힘을 잃고 대세에 밀리어 침묵하고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당시에 폭도거나 폭도와 관련되는 사람은 때는 이때다 하고 뭉쳐서 한 목소리로 억울함과 토벌대의 무자비한 살육만을 부추기고, 여기에 정치권이 편승하여 진실을 왜곡 하고 있다.
사실 지금까지 언급된 사건들은 대부분 진상조사 보고서에는 누락되어 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진상조사 위원이나 그 증언하는 분들이 대부분, 2/3 수준이 그 분들과 관련이 있다. 이러다 보니 아닌 말로 폭도들은 자유의 투사로, 민족수호자로 거듭나고 당시에 나라를 지키고 자유를 수호하는 군.경은 마치 극악무도한 파렴치 범으로 전락하고 있다.
내가 어느 부분에선가 밝힌바 있다. 여순반란사건(구)과 관련하여 뱀사골에서 희생자들에 대한 위령제가 내가 육본에 근무할 당시에 있었고 참가를 해 보았다.
당시에 육군이나 국방부 수뇌부는 모두 빠지고 지역 부대장이 참여하게 되는데 나는 당시 유해발굴책임자로써 참가하라는 권유로 참가하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 참석하는 분들과 유력인사들이 대부분 호남지역이고, 정치권도 그곳 사람들인데 모두가 군경을 역도로 몰아가는 험담으로 일관하는것이다. 나는 발언권이 없기에 아니 발언권이 있다할지라도 그 분위기에 눌려서 안타갑다는 말 밖에는 못했을 것이다.
"그럼 왜 그때는 박수치고 하셨습니까?"
그런데 엉뚱한 곳에서 나는 화풀이를 할 수 있었다. 순천에서 유해발굴 영결식을 하는 해인데(당시 31사단장에 모00소장이었고 기억됨) 당연히 내가 통제하는 추모식이라 참가하였다. 문제는 식이 시작되기 전에 웅성거리는 소리와 고성이 오가게 되어 행사가 지연되게 되었다. 앞으로 나서 다가서 보니 6.25참전용사님들이 행사 주최하는 지역 사단에 불평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요지는 왜 우리가 역도냐며 나라위해 싸운 것밖에 없는데 위령비에 새겨진 비문 내용이 엉터리라며 고칠 것을 주장하며 행사 진행을 막고 있었다.
나는 앞으로 나가 대표자분을 만났다. 대부분 한 두번은 내가 찾아가 만난 분들이다. 대한민국 참전용사 중에 생존해 있으면서 거동이 가능한 분은 대부분 직접 만나서 인터뷰를 해 보았기 때문이다.(약 3만 명 정도, 지역주민은 거의 10만은 된다) 그래서 그 어른께 말씀드렸다. 이 행사는 바로 선배님들과 함께 싸우다 전사했으나 유해를 찾지 못한 분들의 유해를 전후 50년만에 찾아서 그 뜻을 기리는 행사로 지역 사단이 아니라 육본에서 통제하는 행사라 말씀드렸다. 이유야 어찌 되었던 당시에 전우의 시신을 거두지 못한 그 책임을, 이제 후배들이 50년 만에 발굴하여 영결식을 거행하는데 오히려 미안함과 고마움으로 우리를 지켜주시고 함께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되물었다.
그리고 행사를 진행했다. 행사를 마치고 나서 우리는 다시 모였다. 여러 용사님들이 마구 큰소리로 말씀하셨다. 이 정치가 나라 말아먹는다며 명예를 되살려 달라는 내용이고, 참전용사에게 매월 드리는 수당을 올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물었다. 아니 지난번 뱀사골에서 위령제를 지낼 때에 참여하신 분을 확인하니 많은 분이 참석했다. "여기서 지역기관장이나 유족들이 당시 군경을 역도라고 표현했는데 왜 그때는 아무 말씀이 없었느냐고 질문했다. 모두가 박수로 열을 냈었다.바뀐 것은 나라의 대통령이 바뀐 것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울먹이며 물었다. 잠시 주변이 숙연해졌다.
나는 이어서 계속 말했다. 누가 뭐래도 용사님들이 없었으면 이 나라는 김일성이 나라가 되었으며 우리 모두는 공산당의 총칼 앞에 매일 노동현장에 끌려다니고 밤이면 사상비판을 해야 되는 지옥에서 살았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혔다. 선배님들의 희생으로 우리 나라는 자유와 평화를 누리고 개인의 행복을 누리고 지금 살고 있어 너무도 고밉다고 말씀드렸다.
"제발 말좀 통일해서 오라"
바로 이런 문제가 지금도 지리산 동맥에 좌우이념적 대결이 남아있다. 지난 20년간 전국을 다니며 탐문활동을 하면서 우리나라는 너무 시끄러운 민족이라고 생각하게되었다.
이 문제는 우리가 주권을 잃고 임정이 상해에서 활동할 때에 그 해당 인원들이 당파를 지어 너무 각양각색의 활동과 의견을 말하고 다녀서 당시 몰려 있는 실세국가들로부터 "제발 말좀 통일해서 오라"는 비아냥을 듣기도 한 것이 사실이다.
제2절 계엄령 선포 / 계속되는 공방전
앞에서 언급된 사건들이 계속하여 발생하자, 정부는 48.11.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계엄령은 앞에서 열걷된 사건에 따라 선포했음에도 진상조사보고서에는 마치 아무런 일이 없었는데 토벌대가 제주도를 쓸어버리려 계엄령을 선포하고 제주도민을 정식 재판 절차도 없이 처형하려 했다는 식으로 기록을 남겼다.
양민들을 집단으로 학살하고, 군.경을 사살하며 우익인사나 그 가족, 군.경의 가족을 무참하게 죽인 폭도들의 행위는 정당방위처럼 미화한다. 김달삼이나 이덕구, 그리고 그 세포들의 공작에 곧 제주도에 해방군이 온다는 선전에 많은 국민이 현혹되었던 것도 시실이고,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 군.경의 과도한 무력진압으로 또 솔직히 양민이 피해를 입은 것도 사실이다라고 하면 안될까!
1. 진압군, 자수자도 처형
제9연대와 증원경찰은 중산간 마을 주민들을 해변으로 이사시키고 중산간 마을을 모두 불살라 폭도들의 은신처를 없애버렸다.
남로당원과 그 세포들의 명단을 작성하여 추적하고, 자수를 권고하였다. 그러면서 마을을 조사간에 조금만 수상하면 총으로 쏘고, 불질러 버리는 바람에 도민의 반감이 높아져 이 또한 산속으로 들어가는 빌미가 되었다.
낮에는 토벌군의 편이 되고 , 밤이면 폭도들의 편이 되어야 살아나는 비극이 계속 되었다. 양민만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 지옥이었다.
가.대정면
대정면 안성리는 김달삼의 장인 강문석이 45년 10월 고향에 내려와 대정인민위원회를 구성하였다.이러다보니 신평리 윗쪽 역구왓은 폭도들의 아지트였다. 토벌군은 48년 12월 1일, 보성리 고명도 외 16명을 총살한다. 8.25비밀선거에 도장을 찍은 이유였다. 12월 6일에는 대정지서에 갇혀있던 김곡분외 13명을 폭도들과 내통했다며 총살한다.
48년 12월 12일, 군인들이 상모리와 하모리에 사는 주민들을 모아놓고 자수하면 살려준다며 폭도들에게 부역한 자들은 나오라고 하자, 48명이 살려준다고 하여 나왔으나 모두 처형해 버렸다. 하지만 같은 상모리 이교동 마을 사람들 중에 100여 명은 민보단장 김남원과 모슬포 교회 조남수 목사가 나서 모슬포 경찰서장을 만나 협상을 하여 식량을 제공했고 간략하게 쓰고 모두 살아나기도 했다.
해가 바뀌어 49년 1월 5일, 폭도들이 뿌린 삐라를 신고하지 않고 불질러 버린 보성초등학교 교장 송병길외 6명이 총살된다. 같은 날 폭도들이신도 1구를 기습하여 식량을 약탈하고 이를 막으려던 주민 6명을 학살했다.
나. 북촌리
48. 11.18일, 폭도들이 마을에 보초를 서고 있던 경찰후원회장과 이장을 학살한다. 밤마다 폭도들이 설쳐대니 마을마다 자경대, 민보단, 특공대를 조직하였다. 특공대장 이원하가 49년 1월 군부대에 무기지원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당시 군은 이원하가 당시 이범석 장군의 족청계라는 이유로 10여 명을 모슬봉으로 끌고가 처형하였다.
이와같이 하여 제주도 전지역은 48년 11~12우ㅝㄹ, 49년 1월의 3개월 동안에 제일 많이 죽었다.
2. 폭도들 남원면 사무소와 경찰지서 공격
48년 11월 18일 폭도들은 남원 태흥리를 습격하여 민보당원 몇 명을 학살하고, 도로ㅓ에 장애물을 설치한다. 태흥에서 총소리가 나자 남원리 민보단원들이 남원지서에 모였다. 이때 폭도들이 경찰서를 공격하여 우익 30여 명이 죽이고 그들 집에 불을 지르고 도망갔다.
같은날 새벽 6시에 폭도 200여 명과 협조자 500여 명이 남원리와 의귀리를 동시에 공격하였다. 가옥 250여 채에 불지르고 50여 명을 학살하고 산으로 들어가 버렸다.
48년 12월 14일, 진압군은 모슬포.서귀포.남원리.한라산 부근의 폭도들을 진압하기 위해 지역 주민3천여 명도 합세하였다. 이 작전에서 폭도 105명을 사살하고, 99식 소총 10정과 식량을 노획하였다.
48.12.31일~49.1.10일 사이에 진압군은 의귀리에서 100여 명을 총살하였다. 49년 1월 20일에도 30여 명이 총살되었다.
48년 12월 1일에 폭도들이 염돈마을을 기습한다. 그러나 자경대에 걸리어 물러났다가 다시 공격해 들어와 마을에 불을 지르고 8명을 학살한다.
49년1월 3일, 폭도들이 남원면 하례리를 공격하게 된다. 이유는 폭도들에게 기여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토벌대에 밀착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마을을 기습하여 김윤수 외 26명이를 처참하게 학살하고 가옥과 학교에 불을 지르고 식량과 의복을 약탈해 갔다.
그외에도 폭도들은 49년 1.6~7일에는 갑산리 공격했고, 1월 22일에는 산에 있던 사람들이 토벌군에 붙잡혀 정방폭포에서 총살된다.
3. 제주인민군 사령관 이덕구의 고민
일제시대 일본군이 한라산 곳곳에 파 놓은 120여 개의 굴속에는 숨겨놓은 무기와 식량이 있었다. 이에 폭도들은 이것을 활용하면서 부족한 것은 마을을 습격하여 약탈하였다.
폭도들은 여순사건에 전개과정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주민들을 상대로 곧 해방군이 온다고 속여서 주민들이 산속에 머물도록 유도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흘르수록 양민들이 하산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대부분 약탈이 이루어져서 먹을 것을 쉽게 구하기가 어려워졌다.
이덕구는 행여나 김일성과 박헌영이 무력통일을 위해 곧 남침해 주기를 기다리며, 산속에서 많은 동료들을 잃고 동굴 속에서 추위와 싸워야 했다. 군.경 토벌대가 계속하여 유격대 근거지를 찾아서 계속적으로 한라산에 오르게 되어 무기와 식량이 토벌군에 대량으로 넘어가게 되고, 주민들이 다수 하산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동료들은 죽어가고, 산속에 올라 온 사람들이 하나 둘씩 하산하는 바람에 인원수가 급격하게 줄어들고, 동굴 안에 갖고 있는 식량이나 실탄 등 화력이 고갈되어 가고 있었다.
4. 제주 9연대, 대전 2연대와 임무교대
육본에서는 제주도에 공비가 없고 있다해도 몇 명애 불과 하리라 보고, 48년 12월 31일을 기해 계엄령을 해제하려 했다. 지금까지 9연대는 전사자가 93명가 부상자가 많았고, 반란자 86명을 처형하였으나 탈영병들이 너무 많아 재편성을 위해 대전으로 이동하고, 남로당 좌파가 가장 적었던 대전의 2연대를 제주도로 이동시켜 48년 12월 29일 제주도에 도착하였다.
함병선 연대장이 지휘하는 2연대는 제주도에 폭도가 소탕되었다고 보고 부대 이동간에 경계를 소흘히 했다. 연대와 2대대는제주읍에, 1대대는 서귀포에, 3대대는 한라산 중턱의 오등리에 주둔하게 하였다.
예정대로 12월 31일 계엄령이 해제되고, 마을에서는 국군 장병을 환영해 주는 등 오랜마네 평온이 온 것처럼 보였다. 제주도민들은 마음이 든든하였다.
5. 제주 인민군 국군 제2연대 공격 / 제주지구 전투 사령부 설치
49년 1.1일 폭도들 600명이 국군 제3대대를 완전 포위하고 있다가 이덕구의 권총소리에 맞추어 공격을 개시했다. 하지만 3대대는 사전 그들의 기습에 대비하여 즉각출동할 수 있는 준비를 하고 잠들어 있었기에 처음에 일시적 혼란을가져왓으나 바로 전세를 역전시켜 폭도들을 제압하기 시작했다.
이덕구는 토벌군이 강력히 저항하자 산속으로 숨어버렸다. 3대대는 폭도들이 철수 후에 수습을 하고 보니 폭도 10명이 죽어 있고, 3대대는 전사 10명에 부상자가 다수 발생하였다. 3대대는 폭도들에 대한 불안감과 함께 적개심이 불타올랐다.
함병선 연대장이 2대대를 지휘하여 3대대에 왔을 때는 상황이 끝난 상태였다.
육본은 제2연대의 폭도 기습공격을 보고받고 놀랐다. 이에 따라 토벌대는 앞선 9연대보다 더한 선무공작으로 산으로부터 지역 주민이 내려오도록 노력하면서, 내려오지 않음면 육.해.공군의 연합작전으로 한라산을 이잡듯 수색정찰을 강화하였다.
진압군이 오름을 수색하자 많은사람이 하산하여 수용소에 들어오게되었다. 연락기에서도 수류탄을 투하 하는 등 수색작전은 탄력을 받아 폭도들의 근거지는 점점 소멸되어 갔다. 이 시기에 구호물자를 지급하고 사상계몽을 통하여 재기하게 하여 양민으로 인정된 자는 귀향조치 하였다.
6. 명덕리 전투
49년 1월 6일, 제주읍에서 8KM 떨어진 명덕리에 폭도들 350명 이 모여서 뭔가 준비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함병선 연대장이 직접 토벌군을 인솔하여 유격대를 포위, 4시간의 소탕작전을 통해 153명이 사살되고, 군인은 7명이 전사하게 된다.
7. 폭도들 제주읍 공격
폭도 500여 며이 49.1.8일 새벽 1시에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경찰이 강력하게 방어하고, 군도 함병선 연대장이 직접 지휘하여 성공하지 못한다.
이에 육본에서는 49년 3월 2일 제주도 지구 전투사령부를설치하고, 사령관에 유재흥 대령, 참모장에 함병선 중령을 임명하였다. 그리고 제6사단 유격대대를 증파하여 제2연대를 보강하여 폭도 진압에 나선다.
8. 북촌마을 사건
북촌마을은 332호 1,864명이 살고 있는 큰 마을이다.1948년 5월 16일 우도에서 제주읍으로 가던 어선이 풍랑을 만나 북촌마을 포구에 피했다. 여기에 우도 지서장 양태수가 타고 있었는데 마을 폭도 3명이 지서장을 권총으로 쏘아 죽인다.
49년 1월 17일, 2연대 3대대가 함덕초등학교에 주둔하고 있었다. 대대병력 일부가 대대본부가 있는 함덕으로 가던 중에 폭도들이 기습하여 2명이 전사했다. 이에 신고를 받은 중대장이 북촌 마을 사람들을 초등학교에 집합시키고 폭도 세포들의 자수를권유하지만 아무도 하지 않는다. 그러자 모인 사람을 차례로 처형하기 시작하여 1차 40명, 2차 40명을 처형하고 3차 처혀을 하랴할 때에 함병선 연대장이 보고를 받고 처형 중지를 지시하였다.
그러나 다시 대대로 간 주민들 중에도 일부 처형이 되어 마을인구 1,864명 중에 120여 명이 죽었다. 이 마을 이방림집안은 며느리까지 6명 모두가 죽고, 12가구는 가족이 다 죽어 대가 끊겼다.
이렇게 되자 국군에 대항해서는 제주도 사람이 씨가 마르고 이길 수 없다고 하여 자수하러 산에서 내려오는 사람이 많았다.
9. 제주 인민군, 국군 제2연대 2중대와 국군 공격
49년 1월 11일, 폭도 200명이 남원 의귀리 2중대를 포위하고, 1.12일 새벽 5시에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 전투로 폭도는 96명이 죽었고, 군인은 일등상사 문석준 등 4명이 전사하고 중대장 등 10명이 부상하게 된다.
안덕초등학교에는 철도경찰.서북청년.민간인 특공대.국군 등이 합숙을 하고 있었는데 폭도들은 겁이 나서 공격을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토벌군이 49년 1월 27일 주위의 토벌에 나서자 폭도들이 국군을 공격하게 된다. 49년 1월 29일 성산포로 가는 길에 2연대 1대대 솟곡 국군이 이동 중에 속칭"개폭대기"에서 기습을 하여 특무상사 정항상 등6명이 전사했다.
1949년 2월 4일에는 제2연대 3대대 1개 중대 장병이 트럭 2대에 타고 무기 150정과 함께 성산포에서 제주읍으로 가던 중에 북촌마을 김녕리 부근에서 폭도들이 매복하고 있다가 기습하여 박재규 중위외 장병 23명이 전사하고 99식 소총 150정이 피탈되었다. 폭도들은 장병들의 옷가지를 모두 벗기고 일부 시신은 불로 태웠다.
10. 국군과 폭도간의 치열한 전투
가.월평리 전투
49년 1월 6일, 관음사 밑의 월평리에 폭도 1개 중대가 있다는 정보에 따라 2대대 6중대가 공격에 나섰다. 중대장 전동식 중위가 부상을 당하면서 폭도 30여 명이 사살되고 끝났다.
나.남원면 산록전투
49년 2월 15일, 산록에 폭도주력이 다음 공격준비를 하고 있다는 제보에 따라 2연대장 함병선이 직접 150명의 본부중대를 지휘하여 야영을 했다. 그러나 이 정보가 새나가 폭도들이 역 포위를 하게 된다. 4시간의 격전으로 폭도 160여 명이 사살된다.
49년 2월 5일, 연대는 대대적인 수색정찰을 시작했다. 해군과 공군이 지원하여 제주 360개 오름에 대한 정굴지역에 숨어있는 폭도들을 찾으러 토끼몰이식 작전이 계속 되자, 동굴 속에는 대부분 산에 오른 일반 주민들이 남녀노소가 여름 옷을 걸치고 영양실조에 굶어죽은 사람도 있었다.
이에 연대장은 수용소를 설치하고 하산자 보호에 노력하였다. 당시에 폭도들이 북조선 해방군이 수원까지 왔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퍼트려 그걸 믿고 있는 삶도 많았다.
전단지를 뿌리고 선무방송으로 산에서 내려오면 잘 보호한다고 하니 많은 사람들이 동요하여 내려왔고 실제로 총을 들고 하산해도 죽이지 않고 잘 보호했다. 이런 소문은 또 빠르게 산속으로 파고들어 실제 많은인원이 하산하고 대부분 보호를 받았다.
다. 녹하악 전투
49년3월, 제2대대와 3대대가 포위망 한 곳을 터놓고 폭도들을 포위하면 제1대대가 남제주의 중문 서북방정악-노르악-한대악을 연하는 선에서 폭도들을 섬멸하는 작전이 개시 되었다.
부상당한 폭도를 심문한 결과 이덕구가 1,000여 명의 폭도들을 지휘하고 있다고 했다. 기관총과 박격포로 지원을받으며 섬멸작전으로 폭도 178명이 사살되었다.
라.노루오름 전투
49년 3월 9일, 제2연대를 지원하러 온 제6사단 유격대대가 애월초등학교에서 다시 원마을에 주둔하고 있다가 폭도들의 기습으로 군인 36명이 전사하였다.
이상의 내용은 명확한 사실관계가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진상조사 보고서에는 진압군이 양민을 죽인 것만 기록하고, 국군이 피해를 본 것과 전투에 대해서는 대부분 누락하였다.
마. 2연대 정보과 활동
2연대 정보과장 김명 대위는 50명의 특수부대를 조직하여 한라산에 침투하여 정보를 수집하게 하였다. 조직은 1개분대는 국군, 1개 분대는 경찰, 나머지는 민보단원으로 조직하였다.
49년 4월 7일, 공작대 이윤 중사는 남제주군 특수공작대 10명을 직접 선발하고, 귀순자 오송주 노인을 포함시켰다. 4월15일 공작대는 오송주 노인의제보로 동굴 1개소를 새벽에 기습하여 26명을 생포하였다. 여기에는 오송주의 며느리도 있었으며 4월18일 그동안 생포한 남자 32명, 여자 16명을 데리고 하산한다.
4월 23일에는 남제주군 남로당 군당 특공대가 은거하고 있다는 곳을 기습하여 13명을 생포하였다. 이중에는 자원하여 특수공작부대에 협력하겠다는 인원도 있었다.
5월 14일, 위의 협력자로부터 남원면 남로당 위원당 김계원과 제주 남로당 간부들이 모두 남원면에 와 있다는 정보를 제공해 주어 이윤 중사는 국군 1개 소대를 지원받아 26일 새벽에 남원군 수악계곡에 있던 이들의 숙영지를 포위 기습하여 23명을 사살하고 8명을 생포하였다. 이 8명의 포로중에는 제주경찰청자의 딸 강영숙(제주인민일보 편집자로 완전공산주의였으며, 아버지도 수차례 협박한 장본인다. 체포된 후에 자수한다)도 있었다. 생포된 위원장 김계원은 남원면에서 공산당으로 입당시킨 인원이 무려 1,000명이 넘는다고 진술했다.
이 내용도 진상보고서에는 정보과에서 특수부대를 50명 규모로 운용했다는 내용만 있지 이상의 내용은 없다.
바. 폭도들과 내통했다고 자수해 놓고 무슨 말이오? "마을 사람을 다 죽인 토벌군"
49년 3월 10일, 폭도들이 신촌초등학교에 숙식을 하고 있는 경찰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학교 건물에 불을 지르고 사라졌다. 진압군 중대장이 신촌마을 사람들을 모두 학교 운동장에 모이게 한 후에 폭도들과 내통한 자를 찾아내라고 하였다. 그러나 누구도 나오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도 안나오자 모두를 처형하려 기관총을 거치하였다.
"중대장님 제가 책임지고 찾아내겠습니다. 시간을 좀 주십시오?" 제주 경찰서 정보과에 근무하는 김순철 순경이 나선 것이다 "제가 잘못하여 이런 기습을 당했습니다. 짐작가는 몇 사람이 있으니 설득하여 데리고 가겠습니다" 라고 하여 대대장으로부터 허락을 득하였다.
그러나 마을로 다시 돌아온 주민들 중에 폭도들과 내통한 자는 밤을 이용하여 모두 산으로 도망쳐 버렸다. 김순경이 책임지고 살려준다고 해도 나오는 자가 없었다. 약속 시간이 와도 아무도 안나왔다.
이때 마을 민보단장 양귀환이 김순경을 만나 마을사람 전체가 자수하러 가자고 의견을 내놓고, 마을 사람 모두가 여기에 자의반 타의반 동의하여 함덕초등학교로 모두가 대대장을 만나러 갔다.
대대부관: 대대장님 밖에 두 분이 찾아왔습니다.
대대장 : 들어오라 해.
김순경: 마을 전체가 자수하러 왔습니다.
대대장:폭도들과 내통자를 찾아오라 했지 마을 사람을 다 자수하라고 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민보단장: 대대장님,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마을 전체가 몽여서 회의를 했는데 내통자를 모른다 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다 같이 자수하자고 해서 왔습니다.
대대장: 그래요, 그럼 폭도 토벌에 다 같이 갑시다.
밖으로 나온 대대장과 두 사람은 마을 사람들 앞으로 갔다.
대대장:여러분 잘 오셨습니다. 여러분이 자수한다고 하니 폭도들 토벌에 협력해 주십시오. 여러분 옆에 있는 군 차량에 모두 승차 하십시오.
대대장 말에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마을 사람들은 군트럭 3대에 나누어 올라타고 제주읍에 도착하였다. 그러자 진압군이 차 위로 올라와서 마을 사람들을 무조건 포박한 후 호로를 덮고 다시 출발하였다. 이를 의아히 여긴 1호차량 사람들이 중대장에게 질문을 하였다.
마을사람: 중대장님, 우리들을 왜 이곳으로 데리고 왔습니까? 토벌하러 온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중대장: 폭도들과 내통했다고 자수해 놓고 무슨 말이오?
마을사람: 아니 우린 김순경과 민보단장이 공동으로 자수하지고 해서 온 것이지 폭도들과 내통한 사실은 전혀 없습니다
중대장: 아니 당신들이 직접 발로 걸어와서 자수해 놓고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소?
마을사람: 아니 우리가 언제 자수했어요? 민보단장이 가자고 해서 갔지 우리 입으로 자수한다고 한 일도 없고 도장 찍은 일도 없습니다
중대장: 이 자식들이 이제 와서 오리발투쟁이야? "중대 사격준비-, 쏴!
이런 식으로 모두가 죽어갔다. 일부는 차량에서 뛰어 내려 산속으로 도망쳐 살기도 했다. 이 소식을 들은 마을에 남아 있던 사람 중에는 그 충격으로 정신이상이 된 사람도 생겼다. 마을은 온통 대성통곡으로 넘쳐나고 그 한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사. 폭도들 마을 침입 완전 차단
유재흥 사령관은 제주도에 도착하여 보고를 받고 분석한 결과 폭도들을 색출하지 못한 것은 결국 도민들이 협조하기 때문이었는데, 이는 도민들이 자진해서 폭도들을 도운 것이 아니고 대부분이 어쩔수 없이 도울 수 밖에 없었다고 파악하였다. 따라서 폭도와 도민을 분리해야 근본 문제가 해결된다고 결론을 내렸다.
따라서 군.면.동 지권과 청년단 간부 등으로 민보단을 더욱더 강화하여 훈련을 시킨 다음, 군.관.민으로 혼성부대를 만들어 중간산에서 폭도들이 내려올 만한 길목을 차단하여 폭도들이 해안마을에 오는 것을 막았다.
이렇게 되어 중산간 무을의 허리를 완전히 토벌군이 장악하게 되자 이덕구는 식량을 확보하기가 어려워 대원들이 며칠을 굶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폭도들은 소나 말을 잡아서 고기를 말려서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먹었다. 반면 산에 들어온 사람들은 춥고 배고픈 겨울을 나야했고, 그래서 차라리 내려가서 죽자고 내려오기 시작했다.
이덕구 일당은 내려가는 이들 중 몇 명을 인질로 잡아놓고, 이들 가족에게 식량을 가져오게 하였다. 이러다 보니 폭도들의 아지트는 진압군의 정보망에 걸려들 수 밖에 없었다.
함병선 연대장은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라산 전체의 폭도들의 움직임을 파악했고, 연락기들이 위치를 알려주면 곧바로 매복하고 있다가 소탕하게 되었다.
"토벌군의 위장, 폭도행세로 도민을 속이다"
육사 7기 1소대장 이동준 소위는 중대에서 몇 명을 골라 폭도 복장으로 기장시켜 마을에 잠입시켰다.
위장 폭도: 여러분 진압군이 또 오면 우리가 쓸어 버릴겁니다
주민1: 뭘로 그걸 믿어요. 우리 지난번에도 그걸 믿고 따라 갔다가 다 죽었다던데~
위장폭도2: 그래요, 그건 우리 내부에도 토벌군의 프락치가 있어서 정보를 알려주어서 그랬습니다.
주민2: 그런데 언제인가 해방군이 곧 온다고 하던데 아직도 안왔나요?
위장폭도: 아니요, 곧 옵니다. 남조선 해방은 시간문제요. 여러분 토벌군 반동들에게와 검정개 반동새끼들에게 밀고하는 자는 삼족의 씨를 말리겠소. 우리 해방군에게 지지 협조하시오. 우리 유격대는 김일성 원수의 지령으로 제주도의 영웅적 인민 해방 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잠수함으로 우리들은 방금 상륙했소
그러자 모인 700여 명의 도민들 사이에 수군수군 하는 소리가 들렸다.
주민다수: 저 사람 저거 가짜 아닐까? 이상한데.
주민3: 저거 가까구만. 가가짜야!
주민다수: 목소리가 이상해. 그리고 조선민주주의 인민 유격대라 우리 들어왔잖아. 그런데 지금까지 인민유격대라고만 하잖아!
운동장에 모인 마을 주민 700여 명은 혼란이 왔다. 주변에는 여성동맹원들과 민청 회원들이 열렬히 환영하고 있었다. 모두가 작전이다. 진압군들은 학교를 포위하고 신호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민다수: 우리 저 사람들 붙잡아 문초를 해 보자구. 아무래도 수상해. 여러분 앞에서 연설한 사람부터 잡읍시다?
이러는 사이에 위장하고 들어간 토벌군은 누가 선동하는지 눈여겨 보았다. 더 시끄러워지기를 기다렸다. 협조자와 비 협조자로 구분해졌다. 그리고 공포를 한 방 쏘아 주민들을 조용하게 만들었다. 우르르 포위하고 있던 토벌군이 들이닥쳐 20여 명을 체포했다. 운동장은 한순간 아수라장이 되었지만 곧 수습되고 체포된 사람의 진술로 한라산 도로 주변의 10여 개 무기고를 급습하여 무기를 회수하였다.
피해없이 세포들을 찾아내고 또한 한라산의 유격대들의 아지트와 무기고 등을 찾아내는 성과를 거뒀다.
아. 한 소년의 자수
어느날 함병선 연대장은 수용소에 한 소년이 면담을 요청하여 직접 수용소로 가서 몸수색을 하고, 소년을 차에 태워 왔다.
함병선: 너 나이가 몇 살이지?
자수자: 17세입니다.
함병선: 이름은?
자수자: 김정진입니다.
함병선: 집은 어디지? 학교는?
김정진: 대정이 집이고 오현중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함병선: 나를 만나자고 한 이유는 뭐냐?
김정진: 저는 이덕구 사령관님의 경호원입니다
함병선: (놀라며) 아니, 너가 경호원이라니. 그런 너는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아나?
김정진: 저는 그건 것은 잘 모릅니다. 저의 집은 가난해서 할 일이 없고, 살아가기가 막막했는데 어떤 친구가 앞으로 좋은 세상이 온다고 해서-.
함병선: 좋은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김정진: 땅을 많이 가진 사람 것을 빼앗아서 우리들에게 공평하게 나누어 주어 농사 일을 해서 먹고살게 해주는데 이 일을 하는 분이 김달삼.이덕구.박헌영. 김일성 장군이 한다기에 그런 고마운 분들도 있는가 하여 저는 이덕구 사령관을 정성껏 받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덕구사령관이 제주도를 완전히 해방시켜서 똑같이 나누어 주는좋은 세상이 올 것 같지 않아 또 진압군 수가 많고 무기가 많아 도저히 해방군이 이길 것 같지도 않고 이제는 친구들도 다 죽고 몇 명만 남았는데 먹지 못해 배가 고파 죽을 것 같아서 귀순했습니다.
함병선: 그런데 왜 나를 만나자고 했지?
김정진: 이덕구 사령관이 이기지 못할바에야 그분을 위해서나 진압군을 위해서나 도민을 위해서 싸움이 빨리 끝나냐 되겠다고 생각해서 모든 정부를 제공하러 왓습니다. 특히 이덕구사령관만 사용하는 특별병기창,보급창 등을 제가 알고 있어 안내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덕구 사령괸이 숨어 다니는 제1아지트에서 제4아지트까지 알려줄테니 4군데를 동시에 기습하는데 이덕구사령관을 죽이지 않는 조건입니다.
함병선: 왜 이덕구를 죽이지 말라고 하지?
김정진: 이덕구사령관은 저를 동생같이 생각 하고, 참으로 저에게 잘 해주었습니다. 제가 그 분과 같이 죽어야 하는데 죽으면 뭐합니까. 살아야지요. 제가 한 번은 사령관님께 도저히 이길 수 없으니 같이 자수하자고 하니까 "정진아, 나는 사령관이니 그랗게 못한다. 나는 여기서 끝까지 있ㅎ다가 죽을 것이다. 정진아 너는 오늘 귀순을 해라. 그리고 아무 말을하지 말고 집에 가서 보모님 잘 섬겨라"하고 등을 두들겨 주며 떠나는 사령관님의 마음이 너무 고마워서 저는 그 분이 살아서 그 분을 형님으로 모시소 그 분과 같이 살고 싶어요!
함병선:(눈물이 고이는 것을 피하며) 알았다. 내가 어떠한 일이 있어도 너의 사령관을 자수하게 해서 너와 같이 실게 해 주마. 내가 이 약속은 꼭 지키겠다. 그런데 그분은 사령관이고 국군을 너무 많이 죽여서 내 힘으로는 못하고 이승만 대통령께서 정진이의 참뜻을 이해하고 살려주면 정진이와 살 수 있을 거다. 최선을 다해 보자
진압군은 김정진의 진술 내용을 이용하여 제2대대가 출동하였다. 어승생악 지하 동굴을 기습하자 동굴안에 무려 370여 정의 소총과 실탄 등 많은 군수품이 쌓여 있었다. 이것은 국군 안의 세포들이 빼돌린 것이다.
자. 제주도 폭도 사령관 이덕구의 죽음
제2연대 1대대 정수성 상사의 혼성붇대가 생포한 포로 중 한 명인 고창열을 설득하여 이덕구의 아지트를 알게 되었다. 49.4.20일 이 아지트를 기습하였는데 이덕구는 도망치고, 사살된 수십명 중에는 조직책 김민성, 인민위원회 부위원당 김용관도 있었다. 김민성은 일본 명치대 졸업생이다.
함병선 연대는 육.해.공을 동원하여 폭도 소탕에 들어갔다. 결정적인 타격을 입은 이덕구는 경호원만 데리고 섬을 탈출하여 지리산에 들어가 이현상과 합류하려고 밤을 이용하여 하산하였다.
이덕구는 해변가 가까운 제주시 봉개동 바닷가어느 집에 숨어 배가 ㅈ접안하기만 기다렸다. 이것을 전향자 고창율이 알고 화북지서에 신고하여 경영주 경사는 즉시 경찰을 출동시켜 포위하였다.
김경사: 이덕구 포위 되었다. 자수하라, 10분을 준다
이덕구: 무슨 개소리야, 난 자수안해? 너희들이 먼저 간다. "탕탕탕~!"
김경사: 쏴라. 마구 쏘라!
"김성규.고성구는 제9연대에서 탈영한 세포다"
이렇게 해서 벌집이 되어 이덕구는 죽었다. 49년 6월 7일의 일이다. 다음 폭도 대장은 김의봉이 된다. 하지만 김의봉도 전향자의 신고로 와흘 뒷산 대못이라는 곳으로 도망치다 죽는다. 그후 김성규와 고성구가 잔당 100여 명을 데리고 한라산 깊은 곳에 꼭곡 숨어들었다. 아직도 한라산에 100여 명이 남아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1949년 7월, 2연대는 원대복귀하고 7월 15일 독립 제1대대(대대장 김용주 중령)가 제주도에 도착 토벌작전을 진행했다. 다시 1949년 7월 25일 독립 제1대대가 철수하고 해병대(사령관 신현준 대령)가 폭도 잔당을 진압하게 된다.
1950년 7월 25일, 좌파 폭도들은 중문 하원리 지서를 습격하고 민가 99채에 불을 질러 세를 과시한다. 폭도들은 북한 인민군이 목포까지 점령하자 금시 대한민국이 망하고 제주도가 공산화가 될 것이라 선동하며지서를 습격하고 우익을 죽이고 세를 확장해 갔다.
1951년 3월 좌익 폭도들은 허영삼을 사령관으로 추대하고 , 경찰과 민간인을 공격한다.
제주도에 있는 해병대는 6.25전쟁이 발발 하여 원대 복귀하고, 제주 경찰국에서 246명으로 의용경찰대를 조직하여 폭도 소탕작전에 들어갔다.
1952년 11월 1일 100전투사령부를 신설하여 4개 부대 500명으로 좌익 폭도 소탕에 들어가, 폭도사령관 허영삼이 사살되자 김성규 바로 9연대에서 탈영한 자가 사령관이 되면서 폭도들은 김성규 파와 권팔 파로 갈라져 내부에서 큰 파벌싸움으로 ㄱ권팔 파가 전멸되었다. 그러나 세력이 약화되었고 이들은 52년 9월 16일에 제주방송국과 서귀포 수력발전소를 습격하게 되는데 이는 휴전회담에서 북한측에 유리한 상황을 조성하기 위한 작전이었다.
제주인민군 잔당은 1953년 1월 29일 육군 특수부대인 박창암 소령 부대가 완전히 진압하였다.
1957년 4월 3일 경찰은 사살 7,893명, 생포 7,000여 명, 귀순 2,000여 명이라고 발표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당시의 진압과정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분들의 누명을 벗기고 명예를 회복해 주려고 특별법을 만들었다. 그러나 일부 진상조사 위원의 편파적 선정과 이들의 비정상적 실태 조사 등으로 수천 명의 폭도들도 희생자가 되었다. 폭도사령관 김의봉도 희생자가 되는 등 13,000명이란 희생자를 선정하게 된다. 조사단은 군.경이 이 모두를 총살하였다고 하면서 4.3사건의 책임을 이승만 당시 대통령과 당시 지휘관인 송요찬, 함병선 등 국군을 학살자로 뒤집어 씌우고 있다.
자. 함병선의 위기
하루는 함병선이 자수했던 이덕구의 경호원 김성진을 불러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함병선: 정진아, 너의 도움이 컸다. 참으로 고맙다.
그러나 함의 인사가 끝나기가 무섭게 김성진이 함중령 옆에 있는 총을 잽싸게 들어 함중령을 쏘았다. 그러나 총의 안전핀을 뽑지 않했기 때문에 총알이 나가지 않아 무사했다.
함병선:너 이게 무슨짓이야? 나에게 총을 겨누었느냐?
김정진: 사령관을 죽여서 약속을 어긴 참모장님을 죽이고 김일성한테 영웅 칭호를 받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제주읍에 있는 사령관님의 시체를 보고 나는 탄식했습니다. 제가 신고한 것은 우리 사령관님이 자수하여 나와 같이 살려고 한 것이었는데 제가 신고하여 우리 사령관님이 죽은 것을 생각하면 저는 이 세상에서 더 살 마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참모장님을 죽이려 했습니다
함병선: 그래 할 말이 없다. 미안히다. 일이 어떻게 되어서 그랬던 간에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은사실이다. 내가 용서를 빌 마. 이덕구를 알고 신고한 사람이 군에 신고한 것이 아니고 경찰에 신고하여 경찰에 의해서 이덕구가 죽었다. 만일 군에 신고했다면 내가 나가서 절대 죽이지 않고 생포할 수 있었다. 그것은 이덕구는 권총을 휴대하고 실탄이 6발을 휴대하고 있기 때문에 군은 계속 공포를 쏘아 이덕국가 총알을 다 쏘고 탄창을 바꾸던, 아니면 총알이 떨어져 없기를 기다려 생포하려고 했다. 그런데 경찰이 공을 세우려고 무자비 하게 총을 쏘아 사살해 버렸다. 경찰도 그동안 이덕구의기습으로 많은 동료들이 숨졌고 그 가족들이 폭도들에게 난자당해 학살되어 그 원한이 사무쳐 죽인 것이다. 일이 그렇게 되어 약속을 못지키게 되었다. 다시 한번 미안하다
김정진: 잘았습니다. 제가 참모장님께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함병선: 아니야. 너의 심정을 내가 잘 알고 있다.이제는 대한민국 사람으로 떳떳하게 살아서 훌륭한 일을 해야지. 그리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꼭 나에게 오너라.
김정진은 오해가 풀려 인사하고 나왔으나 그는 살 길이 막연하였다.
1949년 5월 15일, 제주도 전투사령부가 해체되었고, 5월 20일 9연대와 2연대 장병 전사자 119명의 위령제가 제주읍 농업학교에서 가족들이 참여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제주도 4.3 사건 결과, 국군 186명 전사.경찰 153명 전사. 우익 1,518명 사망 하였다. 관공서 228동 소실. 학교 224동 소실. 피해부락 160부락 15,228호 였고, 폭도들은 7,895명이 사살되고 생포 7,061명. 그리고 귀순이 2,004명이었다.
제12장 끝맺는 글
물론 기록에 있다고 다 그것이 진실이라 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해방전후의 우리 사회는 사실 무정부 상태였다고 한다. 일본의 패망이 가져온 우리의 광복은 제대로 된 준비가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전혀 준비가 없었던 것 또한 아니다. 상해 일원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만주일대는 독립군이 일제와 맞서 싸웠다. 국내에서는 좌우익을 떠나 일본의 압박에 벗어나려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또한 많은 선각자들이 각국에 일본의 무력 침략을 알리고 우리의 독립 타당성을 주장하려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무수히 많은 독립단체들이 난립하여 서로 각양각색의 주장을 설파하므로써 도대체 뭘 요구하는지 아리송하게 들리기도 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구한말부터 이어진 뿌리깊은 당파싸움으로 극도로 부패하였으며 부국강병에는 전혀 힘을 쏟지 못했다. 매관매직과 세도정치로 피비린내 나는 당파싸움이 끊이지 않고, 탐관오리들이 늘면서 사리사욕에 빠져들어 국민들은 생활고에 허덕이고 과도한 세금 착취에 살 수가 없었다.
바로 이러한 틈바구니를 이용해 서방 열강들이 한반도에 그 힘의 축을 밀어붙이고 결국은 청과 일본의 헤게모니 싸움에 일본이 이기면서 우리를 식민지로 만들어 버렸다.
세상의 흐름을 파악하지 못하고, 쇄국정책으로 신 문물의 단절을 가져오고, 대원군과 민비의 갈등은 결국 이땅에 청나라와 일본군의 주둔을 가져오게 만들었다.
이와같은 엄연한 사실을 마치 의회민주주의 시초라는 등, 허무맹랑한 논리로 우리의 우수성을 보장받으려 하는 극단적 우익, 아니 민족주의 파가 광복이후에는 북한의 스탈린식 공산화를 알지 못하고 남북한 통일이라는 대의 명제로 또 다시 신탁 . 반탁으로 갈라져 국론이 분열되어 결국 남한내에 김일성을 따르는 남로당이 제주 4.3사건이나, 여순 사건 등을 일으키면서 결국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이 땅에 발생하였다.
가. 북한의 계속되는 무기개발과 현존하는 도발을 잊어서는 안된다
반미.극일을 외치고 민족을 외치면 민족주의자가 되고, 친미와 일본과의 협조적 관계를 말하면 매국노가 되는 이상한 현실이 무섭다. 2천 오백만 북한 동포를 굶주리게 하고, 핵무기 개발과 중단거리 미사일을 개발하고 계속적인 도발을 하는 북한의 현존하는 위협에는 같은 민족이라는 이유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실을 그냥 방치해서는 안된다.
이미 트럼프와 김정은의 짝사랑으로부터 얻은 것은, 그 시간을 이용한 북한의 화성 17호와 같은 무기개발이다. 더구나 북한과 맺은 7.4공동 성명이나 9.15합의 등의 내용은 종이 조각이 되었다고 봐야 한다. 북한은 무인기를 이용하여 우리 수도 서울을 촬영하여 넘어갔다. 대낮에 눈뜨고 있는데 군사분계선을 넘어 수도 서울 상공까지 오고, 계속적으로 무력도발을 자행하는데도 주저 앉아서 같은 민족이니 눈감고 지켜보자는 식의 안일한 태도는 버려야 한다.
상대방은 극악 무도한 스탈린식 세계 공산화를 꿈꾸는 공산집단이다. 평화를 말하면서 뒤로는 군비를 확충하여 다시 제2의 전쟁을 벌이고 우리를 무력으로 침공하여 공산국가를 만들려는 북한 집단의 야욕을 잊어서는 안된다.
나. 따라서 제주4.3사건의 진상을 제대로 알아야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제주도 4.3사건을 마치 민주화의 상징처럼 받아 들이고 있다. 다시 말하면 4.3 사건이 뭔지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이며, 이는 바꾸어 말하면 이 땅에 스며들어 국가전복을 꾀했던 중차대한 사건임을 잊고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2000년대에 들어서 진상조사단에서 발표한 사건의 전말은 군경이 마치 무지막지한 도륙으로 힘없는 백성을 척살한 것처럼 하여 그 원인의 시작이 군경에 있다고 기록하고 당시 김달삼을 축으로 하는 남조선 제주지역 폭도(유격대)들의 군경 사살 및 무고한 우익인사와 경찰 가족의 처참한 학살은 언급하지 않음으로서 진실을 왜곡하고 있다는 것이다.
잘잘못을 지금 따져 다시금 그 원흉에 칼을 꽂으려는 것이 아니라 명확한 책임소재를 밝혀줌이 옳바른 역사의 발전에 기여할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최초 작전간 그리고 재판 과정에서 기록된 사실은 보호되어야 하며 몇몇의 화려한 미사여구로 그 진실이 바뀌어지는 일이 없어야 한다.
이것이 시대정신이다. 희생자에 대한 개인 보상과 명예회복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무책임하게 모두가 다 민주화의 화신이고 당시 토벌대는 역도로 인식 된다면 또다른 역사의 비극을 초래한다고 본다.
나는 사사로운 감정이나 누구의 지도도 없이 제주도 4.3사건에 접하게 되었고 나름 진실게임을 어느정도 시차별 논리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지식을 구했다. 하지만 이것이 꼭 진실은 아니라고 본다.
5.18광주 민주화 운동 또한 내가 당시에 충정부대 소위로써 실제 참여한 경험적 요소로 어느정도 사실에 대한 비판적 논리를 습득하였다. 하지만 이것 또한 정치적 이슈가 되어 유불리를 따지는 작금의 상황에서는 진실을 말하기란 매우 어려운 것이 실정이다.
따라서 다시 한번 앞에서 열거된 내용을 시차별로 요약하여 4.3 사건의 진실게임에 노크를 던지고자 한다.
1. 사건의 발단은 제주 47년. 3.1 발포사건이 도하선이 된다? "NO"
47년 3월 1일 제주 오현중학교에서 있었던 3.1절 기념행사에 25,000여 명이 모였고(좌악성향17,000, 8,000이 일반) 여기서 구호가 3.1정신으로 독립을 쟁취하자와 모스크바 삼상회의(신탁통치)를 지지 한다는 것이였다. 여기에 붉은 완장을 찬 여자들이 반미 전단지를 뿌리고, "양과자를 먹지 말자.신탁통치를 지지한다. 민족반역자를 처단하라." 그리고 반미 구호와 경찰을 비방하는 구호를 외치면서 인민공화국 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거리로 나가 가두시위를 전개 했다.
여기에 기마경찰이 경찰서로 가던 중에 6살 어린 아이를 치고 그대로 경찰서로 가려하자 군중들이 "어린아이를 치어 놓고 어딜 그냥 가느냐"며 "경찰을 죽여라"하고 으싸으싸 하자 무서워서 그냥 달려 경찰서 안으로 들어갔다. 이것을 망루에서 보고있던 경찰이 또 폭동이 나는 줄 알고(이미 대구폭동을 기억하고 있고, 육지에서 제주도에 온 경찰은 공포감을 느꼈다) 군중을 향해 무차별 사격하여 6명이 죽고 6명이 부상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관덕동에서의 경찰 발포 사건은 순식간에 제주도 전역에 퍼졌고, 경찰은 육지 경찰의 증원을 요청하였고(목포 경찰 100명 지원), 피해를 당한 3.1절 행사 준비위원회에서는 이에 대한 진상조사를 요구하게 된다.
이에 따라 제주남로당이 투쟁위원회를 조직하여 적극적으로 투쟁에 참가하며, 주민들을 선동하여 3.10일부터 제주도 총파업을 단행하여, 관공서, 공장,회사,심지어 파출소,면사무소, 상점까지 파업에 가담하여 제주도의 모든 행정이 마비 되었다.
이를 수습하기 위해 제주도에 내려간 조병옥 경무부장(미군정하)이 전남경찰 122명, 전북경찰 100명, 경기도 경찰 99명을 제주도로 파견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파업 주동자를 색출하다 보니 "제주도 젊은이는 경찰에 잡히면 죽는다"는 유언비어(남로당이 유포)로 산으로 숨고 바다로 일본에 밀항하게 되고 일부는 제주의 제9연대로 입대하여 경찰의 추격을 피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차 후에 9연대에 좌익이 많은 부대가 되었다.
조사결과 경찰도 66명이 파업에 가담(도청 직원도 10여 명 등, 공무원이나 선생 등 그 수는 많았다)했고, 경찰이 파업 주동자로 검거한 약 200여 명이 육지에서 온 경찰에게 조사를 받았다.이에 따라 총 500여 명이 체포되어 199명이 기소하고, 61명은 기소유예, 178명 계속 구금, 258명은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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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청이란?]
단원은 북에서 월남한 청년들로 46년 대구사건 후 11월 30일 서울에서 조직되었다. 처음에는 6,000여 명이었으나 47년 6월에는 2,000여 명으로 줄었으며 이들을 조병옥과 이승만이 정략적으로 이용했다고 본다.
반면에 당시에 민청이 전국에 17,6761개 지부에 826,940명이 활동하여 서청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족청이란?]
먼저 족청부터 알아보겠다. 족청은 해방 후 철기 이범석 장군이 이끌던 조선민족청년단(족청)에서 시작된다. 이범석은 그 유명한 청산리 전투를 대승으로 이끌었던 광복군 제2지대장을 역임한 독립투사다.
부산정치파동을 주동적으로 이끌었던 족청은 그때까지는 이승만정부의 첫째가는 정치세력이었다. 철기는 초대 국무총리와 국방장관을 하다 부산 정치파동 때는 내무장관이 되고 족청계는 무소불외의 권력을 휘둘렸다. 그러나 이범석이 부통령이 되어 앞날을 도모하려 할때에 이범석은 장기집권을 하려는 이승만계에게 쉽게 말해 숙청이 된다. 정부통령선거에서 나붙은 철기의 벽보는 찟겨지고 무소속으로 등록한 함태영 목사가 이박사의 지원으로 부통령에 당선되는 이변이 일어났다. 그 후에 족청계는 힘을 잃게 된다.
[민청이란?]
서청이 우익이라 하면 민청은 좌익에 가까운 단체였다. 해방직후 결성된 조선청년자위대가 46년 4월에 의해 해산된다. 이어서 조선민주청년동맹으로 남로당의 하위 조직이 되었다.
따라서 처음에는 세력이 서청보다 월등했으나 조병옥이 하지에게 건의하여 47년 5월 16일 해산된다. 하지만 서청은 경찰만의 힘으로 치안을 유지할 수 없다고 하여 해산되지 않았다. 이에 민청은 다시 47년 6월 5일 이름을 민애청으로 바꾸어 다시 출범하였다.
[민전이란?]
미군정시기 정치단체로서1946년 2월, 서울에서 결성된 좌파 계열의 연합이다. 민주주의 민족전선을 줄여서 민전이라 부른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이 결정을 놓고 남한에서는 좌우로 완전히 갈라져 이념분쟁이 시작되어 결국 46년 2월에 좌파계열 정당 및 사회주의 단체가 집결하여 결성되었다. 의장단은 여운형.박헌영.허헌.김원봉.백남운.이후에 전 법무부 장관 조국의종조부 조맹규도 이곳에 중앙위원을 역임했다.
이후 미군정이 정판사위조지폐 사건을 일으킨 조선공산당 활동을 불법화시켜 참여자들이 미군정을 피해 월북하거나 피신하여 지하조직으로 활동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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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것은 이미 제주도가 남로당에서 해방구로 이용하여 신탁을 찬성하고, 5.10선거를 지연시켜 북한이 남침하는 시기까지 남한사회를 혼란에 빠뜨리려는 전략전술 이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2. 47. 8. 12일 전국 남로당 간부 검거와 전국남로당 5.10선거 반대, 48. 2.7폭동"
47년 7월 20일 남산에서 민전이 주최한 미.소공동위원회 재개, 인민 대회 때 좌파 20여 만 명이 모이고, 이들이 8.15행사를 기해 남로당이 전국적인 폭동을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에 따라 경찰에 좌파단체 간부들을 전원 체포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따라서 8.12일 좌익 간부1,300여 명이 체포된다.
그러나 이 당시는 미군정시대라 우리에게 사법권이 없어서 대부분 훈방하게 된다.
이에 따라 48년 2월 7일 전평 산하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가, 유엔 한국위원단 철수와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반대, 국제제국주의 앞잡이 이승만.김성수 등 친일파를 타도하자. 양군 동시 철수로 조선통일민주주의 정부수립을 우리 조선에게 맡겨라, 노동법과 사회보장제를 즉시 실시하라, 정권을 인민위원회에 넘겨라,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에게 무상으로 나누어주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만세 등의 구호를 외치게 된다.
그 피해는 경찰 15명 순직.후보의원 2명 및 공무원 11명 사망, 양민 107명 사망, 부상자는 경찰13명, 공무원12명, 우익63명, 시위자 35명이었다. 결찰서 피습26건, 무기 약찰 12건, 동맹 휴교 60건, 검거인원 8,479명이었고 총 참가 인원 30만 명을 넘었다.
3. 48년 1월 22일: 조천에서 회의 중인 제주도 남로당원 연행자 221명 죄목이 없어 3월 초순에 전원 석방
4. "남로당 제주도당 48. 5.10선거 반대 2.9폭동"
이렇게 제주도는 2.7일 전국적 폭동 때는 핵심간부들이 연행되어 조직적인 폭동을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한 것은 아니다. 2월 9일부터 지역별로 작은 시위들이 감행되어 경찰들이 긴장하고 있었다.
"술 한잔이 빚어낸 폭동의 씨앗"
48.2.9일 안덕지서 최 주임과 오 순경이 사계리 순찰 중 술 한 잔하고 주막에 곯아 떨어져 이를 프락치들이 린치하여 고문하다 경찰에 연락되어 경찰 이 출동하였다.
하지만 비명소리에 마을 주민이 지서에 신고하게 되고, 경찰이 급습하여 주동자 임창범 등은 모두 산으로 도망치고, 경찰은 목숨은 구했다. 그런데 임창범의 집 수색에서 100여 명의 이름이 있는 수첩을 발견하여 마을을 이잡듯이 뒤지자 마을 유지들이 경찰서에 가서 본인들이 설득하여 청년들을 찾아내겠다고 하여 모두 풀어주고 임창범 등 7명이 자수하였다. 임창범은 대구형무소 복역 중에 6.25전쟁 때에 처형되었다.
48년 2월 10일에는 한림 고산마을 청년 300여 명이 5.10선거 반대 시위를 하는 등 48.2.8~10일 까지 17건의 반대 시위를 하였으며 조천중학교 교사 및 학생은 완전히 좌익이었다. 조천은 과히 조선의 해방구였다.
이상의 내용은 47년 3.1사건과는 관련이 없다. 3.1사건은 경찰이 공포에 질려 무차별 사격으로 밀리오는 군중에게 발포하여 발생한 피해 사건이고, 당 시 경찰은 체포 되어 사법적 처벌을 받았다. 그런데 진상조사 보고서는 마치 이 모든 것이 그 연장선에서 민이 관.군에 갖고 있는 불신이 도하선이 되었다고 본다. 그러면서 그 행위를 주도한 인물들의 좌익활동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않는다.
5. 신촌회의 48. 4.3 폭동 결정 / 48.3월 6일.14일 경찰 고문치사 사건 발생
1948년 남로당의 육지 2.7폭동 후 김달삼은 중앙당으로부터 제주도에서 폭동을 일으키라는 지령을 받았다. 48년 2월 20일경 조천 신촌리에서 김달삼을 비롯한 주요간부 19명이 모여, 지난 1월 22일 회의도중 경찰의 기습 연행으로 의결하지 못했던 당의 진로를 결정하기 위한 것인데, 여기서 5.10선거 반대 투쟁을 더욱 강력히 추진하기로 한다. 그래서 2월 25일에는 군사부를 조직하고 2월 28일에는 전남도당 책임자가 제주를 방문하여 제주 4.3폭동작전을 세우게 된다.
그런 어느날 경찰서에 청년들이 5.10선거 반대시위를 하다 끌려와 심문을 받게 도는데 이 과정에 죽게 되면서 공분을 사게 된다.
6. 5.10선거 반대 제주도 4.3폭동
가. 개요
이들은 성산.서귀.안덕.추자 등 5개면을 제외한 제주.조천.애월.한림.대덩.중문.남원.표선 등8개면에서 유격대 100명, 자위대 200명 , 도.군위 소속 특경대 20명 등 320명을 조직하고, 면단위에 전투경험자를 위주로 30명씩 선발하여 인민유격대에 조직하였다. 다라서 4.3폭동 전에는 면에서 중대까지 조직하고, 연대는 4.3폭동 후 48년 4월 15일 조직하였다.
무기는 99식 소총과 권총 수류탄 등이고 기타 죽창과 철창으로 준비했다. 훈련은 3월 20일 한림의 샛별오름 공동묘지에서 일부 67명에 대한 합숙훈련도 했다.
당시 그들은 제9연대 내에 프락치가 800명 중에 400명은 확실하고 그중 200명은 마음대로할 수 있다고 보였다. 그들은 투재의 목표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수립될 때까지 투쟁한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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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연대장들의 알 수 없는 병 발생과 교대]
초대 연대장 장창국 중위 : 제9연대는 46년 11월 16일 모슬포 비행장에서 찰설되었고, 초대 연대장은 장창국 중위(일본육사 , 22세로 해방후 46년도 육사 부교장에서 전입)였다. 사병은 광주 4연대에서 50명이 차출되었다. 장교들과 장병들이 마을을 찾아다니며 경비대에 입대를 설득해도 모병이 안되었다. 모병이 안되는 이유는 이미 남로당에서 계획적으로 세포들을 입대시켜 부대를 장악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몸이 아파서 47년 5월에 총사령부 작전국으로 전출되었다.
2대 이치업 소령 : 연대장이 아무리 애를 써도 모병이 안되자, 소대장 들을 모아 이유를 물었다. 2개 대대에 1개 대대병력밖에 안되었다. 그러자 이곳주민들이 대부분 좌익이라 응모를 안한다는 것이다. 그러다 이치업 연대장도 47년 12월 1일 전입이후 게속하여 배탈과 힘이 빠져 그만 서울 병원으로 입원하였다.
여기 두 연대장은 연대의 세포 주동자인 문상길(안동, 육사 3기, 오일균 육사 구대장의 포섭으로 남로당에 가입하여 9연대 조직 책임자가 됨)이 유격대 김달삼. 이덕구와 접선하여 제9연대를 남로당 군대로 만들려고 공작을 하였다. 이 공작에 장창국과 이치업이 말을 듣지않자 약을 먹여, 잦은 배탈과 힘을 빠지게 하여 서울로 쫒아 버린 것이다.
당시 제주도는 전 제주지사 박경훈이 인민투쟁위원장이고, 제주읍장이 부위원장이며 각 면장이 면투쟁위원장이었으니 제주도가 공산화 되는 것은 시간 문제처럼 보였기에 자신감을 가지고 폭동을 자행하게 된 것이다
3대 김익렬 소령 : 제9연대의 부연대장이었던 김익렬 소령이 47년 12월 1일 부임하였다. 그는 48년 4월 2일, 백선엽 중령의 배웅차 제주에 갔다가 한림여관에서 하룻밤을 보내던 중에 폭도들의 수류탄 공격을 받았으나 피해를 보지않고 빠져 나와 본대로 합류했다. 김익렬은 48. 4. 28일 평화협상 결렬과 5.3사건(귀순자. 경비대.미군을 경찰이 고용한 프락치가 공격, 이 사건으로 조병옥과 김익렬이 미 군정장관 딘 소장 앞에서 멱살잡고 싸움) 처리 문제로 해임되었다
4대 박진경 중령 : 48년 5월 6일 부임하여 6월 1일 박진경은 중령에서 대령으로 진급을 하였다. 폭도들을 포위하여 체포하여 양민과 구분하는 전략을 세웠다. 그러나 이미 김달삼으로부터 지령을 받은 문상길은 정보계 선임하사 남로당계 양희천 상사를 불러 17일 저녁 먹고 오는 박진경을 사살하라 지시하였다. 양상사는 세포원인 손선호 하사가 잠들은 그의 머리에 총을 쏴, 48년 6월 18일 새벽 3시 15분! 그의 나이 28세에 운명하였다. 창군이래 가장 유능하다는 장교 한 명이 창군 이래 제일 먼저 남로당원에 절명하였다.
5대 최경록 중령
48년 6월 18일 제주에 부임한 최경록은 경비대와 경찰을 총동원하여 해안선에서부터 한라산까지 이 잡듯이 뒤져 산에서 얼씬거리는 사람은 무조건 잡아다가 수용소에 수용시키고 거기서 폭도들을 가려내었다.
48. 6.18~7.14일까지 1,454명을 연행하여 600여 명을 기소하고 나머지는 수용소로 보냈다. 폭도들은 견디지 못하고 산속 깊숙히 숨어 지내며 저항을 하지 않았다,
특히 최연대장은 부락마다 조직한 자위대를 강화하고 방벽을 더욱더 튼튼히 하여 밤중에 폭도들이 마을을 기습하여 먹을 것을 가져가지 못하게 하였다. 이러자 폭도들은 은둔상태로 들어가고 이렇게 되자 육지에서 온 경찰 400여 명이 원복을 요구하여 원대 복귀시키게 된다.
이렇게 하여 48. 7. 12일, 이형근 통위부 참모총장은 제주도 폭동은 일단락되었다고 발표하고, 7월 15일 11연대를 재편하고 부연대장인 송요찬 소령을 9연대장에 임명하여 제주도에 주둔하게 하고 11연대 2대대는 7월 24일 수원으로 원대복귀하였다. 최경록 중령은 대령으로 진급하였다
6대 송요찬 연대장
7월 15일 연대장이 된 송요찬은 지금까지의 작전을 분석한 결과 세포들이 부대 내에도 잔존하며 작전계획을 빼내 대응하고, 주민들이 많은 인원이 폭도들에게 호응하여 정보를 주고 식량 등을 지원하는 한 작전의 성공을 가져올 수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중간산 마을을 소개시켜 바닷가로 옮기고 수용소에 있게 하였으며, 응하지 않고 산으로 도망치는 자는 폭도로 간주하여 처형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선무방송을 실시하고 한라산을 토끼몰이식으로 이 잡듯이 수색하여 폭도들을 궁지로 몰아 넣었으며, 11월 17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게 된다
7대 함병선 연대장, 사령부 참모장
육본에서는 제주도에 공비가 없고 있다해도 몇 명애 불과 하리라 보고, 48년 12월 31일을 기해 계엄령을 해제하려 했다. 지금까지 9연대는 전사자가 93명가 부상자가 많았고, 반란자 86명을 처형하였으나 탈영병들이 너무 많아 재편성을 위해 대전으로 이동하고, 남로당 좌파가 가장 적었던 대전의 2연대를 제주도로 이동시켜 48년 12월 29일 제주도에 도착하였다.
함병선 연대장이 지휘하는 2연대는 제주도에 폭도가 소탕되었다고 보고 부대 이동간에 경계를 소흘히 했다. 연대와 2대대는제주읍에, 1대대는 서귀포에, 3대대는 한라산 중턱의 오등리에 주둔하게 하였다.
12월 31일 계엄령이 해제되고, 마을에서는 국군 장병을 환영해 주는 등 오랜마네 평온이 온 것처럼 보였다. 제주도민들은 마음이 든든하였다.
49년 1.1일 폭도들 600명이 국군 제3대대를 완전 포위하고 있다가 이덕구의 권총소리에 맞추어 공격을 개시했다. 하지만 3대대는 사전 그들의 기습에 대비하여 즉각출동할 수 있는 준비를 하고 잠들어 있었기에 처음에 일시적 혼란을 가져왔으나 바로 전세를 역전시켜 폭도들을 제압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산사람이 하산하자 진압군은 이들을 수용하여 갱생원을 만들어 구호물자를 배급하고 포로들을 처형하지 않고 사상계몽을 하여 재기하게 하고, 양민으로 인정된 자는 귀향조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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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4월 3일 폭동 개시
48년 4월 3일 봉화불을 신호로 제주 전역에 폭동이 일어났다. 우익 세력의 집을 공격하여 그 가족을 죽이고,경찰 12개 지서와 서청 숙소를 기습하여 죽이게 된다.
여기서 바로 김익렬 연대장 일행 9명이 육지에서 오는 군 간부를 배웅차 나와서 한림의 한림여관에 서청.경찰 일부와 머물렀는데 구사일생으로 살아 탈출하였다.
4월 3일 하룻만의 폭동으로 경찰 4명 전사.8명 부상.2명 행불이 되었고, 우익 8명 사망. 부상 19명, 좌익 폭도 3면 사망, 생포1명 등이 발생했지만 폭도들은 계속하여 잔인하게 우익 양민들을 학살하게 된다. 특히 자기들에게 비 우호적이었던 경찰이니 그 가족의 집을 기습하여 약탈, 살인 방화를 일삼고, 우익 단체인 대청단원들도 기습하여 죽창과 철창으로 죽이는 등 임신한 6개월의 경찰관 부인의 배를 갈라 죽이는 참혹한 짓을 서슴치않고 자행했다.
그러나 그들은 어느 한 곳의 지서도 탈취하지 못했고, 무기를 확보하지도 못하자, 김달삼은 여기에 대한 질책을 받았다. 조직을 재편성하고 인민군의 아지트로 애월의 샛별오름.어믐지경 바리악, 조천의 선홀지경 거문오름 등이 지정되었고, 제주 인민군을 5월 10일까지 1,000명으로 확대하였다.
7. 육지경찰 증파와 경찰의 진압 실패
제주의 폭도들 만행을 진압하기 위해 미군정관의 승인을 거쳐, 4월 5일 8개 중대 1,700며이 증파되고, 제주비상경비사령부가 신설되었다. 서청도 500명이 제주도에 증원된다. "경비사령부는 4월 17일 4.3폭동을 진압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이러한 경찰의 작전은 모두 남로당 프락치들에 의하여 김달삼에게 보고 되어, 계속하여 피해를 보게 되면서 경비사령부는 증파를 하게 된다. 이에 부산 5연대에서 4월 10일, 선발대를 항공편으로 , 제2대대는 4월 20일 선편으로 진해에서 이동시켰는데 이 2대대장 오일균 소령이 남로당원 이었다. 당시 9연대는 현지 장정들이입소를 기피하여 3개 대대가 아닌 겨우 900여 명으로로 1개 대대만 있었다.
하지만 군의 작전계획은 이미 내부에 침투한 문상길 중위 등의 세포 활동으로 김달삼에게 모두 보고 된다. 따라서 이미 문상길과 오일균도 서로 알고 있는 관계로 은밀히 즐기고 있었다.
8. 48. 4. 28일의 김달삼과 김익렬의 이상한 만남과 경찰의 공작?
경찰은 제주시 주변 마을에 마치 폭도들이 불을 지른 것처럼 불을 지르고 군의 출동을 요구했지만 계속하여 거절하게 된다. 따라서 48.4.3~48.5.3 가지 피해는 경찰 전사 12명. 가족 6명이 사망하고 공무원 5명과 민간인 37명이 죽었으며 45건의 방확가 발생하였다. 이를 남로당들은 계속하여 확대 증폭하여 민심교란에 이용하게 되었다.
여기에 김구.김규식 선생이 주도한 남북 협상이 48년 4월 14일 평양 모란봉 극장에서, 남로당 등 28개 단체 395명의 인원이 38선을 넘어 북으로 들어가 북측 북로당 15개 단체 300명과 연석회의를 열었으나 결국 김일성의 조선민주주의 민민공화국을 만들기 위한 거수기 대회로 끝나면서 많은 기대감을 가졌던 남북한 민족주의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게 된다. 신탁찬성과 소련의 사주에 의한 미군의 철수를 전제로한 남북한 총선거는 해결 책이 없이 오직 북한이 6.25전쟁을 일으키기 위한 시간만 벌게 해 주는 격이었다.
"김달삼과 김익렬 연대장의 협상을 건의한 오일균 제2대대장"
김달삼은 9연대만 중립을 지키면 제주도와 9연대를 완전히 장악하는 것은 어렵지않다고 보았다. 따라서 싸움은 경찰과 하고 군과는 협상이 유리하다고 판단 하게 된다.
48년 4월 28일, 드디어 김익렬(27)과 김달삼(25)은 구억초등학교에서 만나, 72시간내 완전 전투중지, 유격대의 무장해제, 주모자신병 보장 등에 합의하게 된다. 이를 보고 받은 제주지역 군정관 맨스필드가 이에 만족하여 경찰의 작전을 중지 시키고 군에 작전권을 주게 되면서 경찰이 군을 의심하는 관계가 되었다.
경찰은 이러한 미군정의 지시에 격분하며, 즉시 제9연대 내부에 침투한 남로당 프락치를 파악하는 내부 사찰에 들어가게 된다.
9. "제주 4.28 평화협상, 폭도들에 의해 깨지다"
4월 29일 평화협상 후 하루가 지나 연미마을 대청부단장 고석종과 대청단장 박두인이 폭도들에 끌려가고, 4월 30일에는 대청단원 부인인 강공무(23)와 임갑생(23) 등이 폭도들에 끌려가 민오름까지 올라가 소나무에 묶었다. 이유는 동네 밀고자란 것이다. 경찰이 출동하여 겨우 임갑생을 구출 했다.
10 .오라리 방화사건 . "아이 밴 여자를 죽이다니 너희들이 사람이냐?"
미 방첩대는 임갑생을 통해 납치경위를 파악하고, 출동한 경찰을 통해 전말을 알게 된다. 결론은 4.28평화협상은 깨지고 김달삼은 김익렬을 이용하고 있다는 결론이었다.
5월 1일, 연미마을에서 강공부 여인의 장례식이 있었다. 대청.서청원 30여 명이 참석하였지만 마을사람은 없었다. 장례식 후에 대청.서청원들이 연미 마을에 달려갔다. "아이 밴 여자를 죽이다니 너희들이 사람이냐?" 단원들은 폭도로 의심받는 허두경 강병일 등 5세대 12채에 불을 질렀다.
"이번 사건은 경찰이 분풀이로 저질은 사건이다", "아니요 당신이 이용당한 것이요?"
휴전 4일째에 김익렬 연대장은 정보부서로 부터 제주읍 사건 보고를 받고, "오라리 방화사건은 유격대가 아니라 대청원들이한 것"이라고 미 군정관 맨스필더를 만나 이 사실을 보고 했으나 맨스필드 대령은 다 알고 있다며 방첩대 간부들과 상의 하라는 식으로 대답했다. "
이에 연대장 김익렬은 부대원을 이용하여 방화 주범 대청단원 박 씨를 제주읍에서 체포하여 연대에 강금하면서 유언비어가 제주도민을 흥분시키게 된다. "시간을 벌기 위한 반도들의 술책에 연대장이 기만당했다"는 내용과 "연대장이 폭도들을 기만하여 폭도전원을 귀순시켜 놓고 일시에 몰살하려 한다" 는 유언비어가 난무하였다.
하지만 진상결과 조사 보고서는 마치 오라리 사건이 미군이 경비대에 총공격을 명령함에 따라 협상이 개져 4.3사건이 걷잡을 수 없는 유혈충돌로 치닫게 되었다고 작성되어 있다.
이와같이 4.28평화협상은 48년 5월 1일 방화사건 때문에 깨진 것이 아니라, 4월 29일 폭도들이 두 명을 납치하고, 4월 30일에도 두 여인을 납치하여 학살 함으로 해서 깨진 것이다.
11. 48. 5.3사건과 연대장과 조병옥의 싸움, 그리고 김익렬 연대장 해임
가. 사건의 발단, "제주경찰서 소속 문용채 특공대원이었다?"
48년 5월 3일, 산사람 200~300여 명이 귀순해 온다. 이에 연대는 병사 7명과 미군 병사 2명 외 드루스 중위가 자수자들을 산에서 인솔해 오고 있었다.이때 괴한 약 50여 명이 카빈.중기관총. 99식 소총으로 무장하고 귀순자들을 공격하였다. 괴한들은 미군과 경비대 군인에게도 사격을 가하였다.
이에 경비대와 미군도 즉시 응사하여 괴한 5명이 죽고 부상자가 있는데 그대로 도망쳐 버렸다. 여기서 부상당한 한 명이 신문결과 "제주경찰서 소속 문용채 서장 소속 특공대원이었다. " 그는 상부의 지시에 의거 폭도와 미군과 경비대 장병을 사살하여 폭도들의 귀순공작을 저지하라는 임무를 받았다"고 진술한다.
그러나 진상파악을 위해 미군과 경비대가 문서장을 찾았을 때에 그는 "이번 사건은 경찰과 경비대를 이간시키기 위해서 폭도들이 경찰로 가장한 소행이다"라고 답변하였다.
나. 소련의 남한 무정부 상태 비판과 미군정관의 조치
미.소는 계속하여 한반도에서의 헤게모니를 쥐려고 하였다. 소련의 사주를 받는 김일성은 남한의 남로당 등을 선동하여 미군의 조기철수를 요구하며 남한의 무정부 상태를 비판하고 있었다. 이에 미군장관 하지 중장이 제주문제를 빨리 매듭지을 것을 요구하게 되자, 군정장관 딘 소장이 제주도를 48년 5월 5일 방문하여 경무부장 조병옥, 경비대 사령관 송호성 준장, 제주군정관 맨스필드 대령, 제주지사 유해진, 9연대장 김익렬 소령, 제주감찰청장(경찰) 최천 등이 모여 회의를 하였다.
"제주 경찰을 내가 지휘하게 해 주시요", "알았소, 제주경찰은 연대장 지휘속에 들어가시요!"
제주경찰 총수 최천은 제주 폭동은 공산주의자들이 사전에 조직된 유격대를 이용한 조직적인 것으로 군.경의 대병력을 투입하여 합동작전을 해야 한다고 보고하였다.
제주 9연대장 김익렬은 입산자들을 처리하려면 폭도와 일반 민중 동조자들을 분리시켜 폭도들을 도민으로부터 고립시켜야 한다며 그러기 위해서는 무력진압과 귀순공작을 병용하는 작전을 해야 하고 작전의 통일성을 위해 경찰을 지휘하게 해 달라고 보고 하였다. 이에 딘 소장은 즉석에서 제주경찰은 경비대 연대장의 지휘하에 있도록 승인을 하였다.
그러나 다음 발언권을 넘겨받은 조병옥이 김익렬 부친은 공산주의자라고 발언하여 김익렬과 싸움이 벌어졌다. 회의장이 난장판이 되고, 김익렬은 통역관을 발로 걷어차고 조병옥 멱살을 잡아 흔들어댔다.
딘소장과 맨스필더는 회의장을 떠나고, 제주도를 다녀온 딘 소장은 5월 6일 경찰과 군이 협력하여 평화적 질서를 회복할 것이다"라고 담화를 발표했다. 그리고 김익렬을 해임하고, 영어를 잘하는 박진경 중령을 새로 임명하고 정보장교 이윤락 중위는 즉시 파면하여 구속하였다. 박진경 중령은 해방 전에 일본군 소위로 제주도에 근무했다.
12. 남로당 제주도당 5.10선거 반대 폭동
제주도는 4.3폭동 후 오후 8시부터 다음날 아침 4시까지 통금이 실시 되었다. 폭도들은 48.5.10선거를 반대하기 위하여 야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김달삼은 북조선 인민군이 남침하여 수원까지 왔다고 선전하고, 가나한 사람들에게 무상분배와 토지를 나누어 준다는 선전, 착취자의 자본주의가 아니라 공평하게 나누어 갖는 평등 세상이 실현된다고 선전하여 많은 사람이 현혹되어 있었다.
이렇게 하여 제주도 선거는 3개 선거구 중 2개 선거구는 15개 지역에서 투표소 방화와 투표함 파괴로 선거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이 당시에 제주도는 160개 넘눈 리마다 좌우로 갈라져 갈등이 심하였다. 4월 3일 이후에는 좌익이 마을을 장악하고 우익은 숨어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경찰서가 가가운 곳으로 피신해야할 지경이었다.
폭도들이 5월 13일, 함덕지서에 술과 안주를 제공하는 척 하며 기습하여 7명의 경찰이 죽었고, 다음 날에는 아예 폭도들이 총을 들고 지서를 공격하다 4명이 피살되면서 물러나는 등 치안부재의 아수라장이 되어갔다. 폭도들은 우익인원이나 군.경가족, 대청단원이나 그 가족들을 무참하게 죽창이나 낫 도끼 등으로 혹은 임신한 여자의 배를 갈라 죽이고 어린아이도 죽이는 등 그 만행은 표현할 수가 없었다.
1948년 5월 10일, 제주도 선거인 85,517명 중 53,698명이 투표에 참여하여 62.8%의 투표율을 보였다. 그러나 북제주군 갑구와(43%), 을구(46.5%) 등은과반수에 미달하였으며 폭도들은 선거후에도 계속하여 경찰과 우익을 습격하고, 제주도를 해방구로 만들어 한반도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으로 세우겠다는 김일성의 목표를 실현하려 노력하게 된다.
남로당의 5.10선거 반대 폭동의 결과 경찰 61명과 일반공무원 128명, 그리고 양민 107명, 폭도 330명이 죽었다. 방화로는 경찰관서 16개소, 관공서 18개소, 양민가옥 69호가 불에 타버렸다. 이어서 도로.교량 파괴가 48건, 기관차 71건, 객화차 11건, 철로선로 65건이 피해를 보게 되었다.
13. 간첩 성시백의 국회의원 후보자 공작
당시 남한의 사회상은 간첩 성시백의 사건에서 잘알 수 있다.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의 많은 수가 북한공작원의 자금지원을 받았고, 사상적으로도 많은 인원이 동조되어 말이 자유민주주의 국가였지 사실은 내부적으로 프락치들이 범람하여 사회는 술렁거리기 일쑤였다.
성시백은 김일성의 직계로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에 대한 연락업무와 남한 정세파악 및 좌우합작과 3당 합당 사업의 최선두에서 활동하였다.
1946년 12월, 김일성의 특사로 서울에 와서 지하운동에 종사하며 남한 내 우익 및 중간 정당.단체들, 미군정청, 경찰,첩보대,군부, 심지어 재외 대표부가지 산하조직을 만들었다.
성시백은 박헌영을 반대하는 사로당과 막대한 자금으로 남한의 국회를 장악하려고 후보들을 돈으로 매수하게 된다. 반면에 박헌영은, 남로당원은 대한민국 건국 수립을 위한 국회의원선거에 출마를 하지 않게하여, 선거 반대 투쟁에 나서게 된다.
이렇게 하여 당선자 198명 중 성시백이 지원한 후보는 62명이었다. 만일 남로당이 선거에 참여했다면 우리의 국회는 그리고 최초 대통령은 누가 되었을까 한번 쯤 깊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하여 당선자 198명 중 성시백이 지원한 후보는 62명이었다. 만일 남로당이 선거에 참여했다면 우리의 국회는 그리고 최초 대통령은 누가 되었을까 한번 쯤 깊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한편 서울의 경찰 및 여러 군수사기관에서는 1949년 즈음하여 북한의 김일성으로부터 특수지원과 자금을 받아, 남한의 주요 기관에 비밀공작원을 잠입시켜 기밀을 빼내는 등의 할동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여 "북로당 남반부정치위원회"가 핵심이라는 것을 알고 1950년 2월경부터 내사에 들어가 1950년 5월 15일 오전 3시, 성시백을 서울 종로구 효제동에서 체포하였다. 그는 군사재판에서 간첩죄로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6월 27일 처형되었다.
남로당이 선거에 참여했다면 우리의 국회는 그리고 최초 대통령은 누가 되었을까 한번 쯤 깊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14. 신임 연대장 박진경 부임과 폭도들과의 대치
48년 5월 6일자로 수원에 있던 제11연대가 연대장 박진경 중령함께 제주에서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제9연대는 11연대에 배속되었고, 부대를 재편하여 제주.모슬포.한림.서귀포.성산포에 병력을 분산 배치하여 출동을 신속히 하도록 했다.
연대는 처음에는 선무공작으로 산에 올라간 사람들을 하산하게 하는 공작을 벌이게 되도, 반면 김달삼은 내려가면 죽는다고 역 선전으로 맞서게 되는데 경찰과 합동으로 5.12~5.27일까지 3,126명을 체포하고 500여 명을 기소하였다.
"11연대 장병 41명 탈영 후 폭동에 합세"
이들은 대정면 중산간 마을에서 어느 민가에 들어가 밥을 달라고 요구하다, 이곳의 신고로 출동한 연대장에게 포위되어 21명이 죽고 20명이 체포되어 19정의 소총.실탄 3,600발과 함께 모슬포 1대대로 끌려왔다. 결국 11연대 제주출신 1대대를 무장 해제한 다음 체포된 20명은 전원 군법회의에 기소하였다. 이렇게 하여 연대본부는 모슬포에서 제주읍 농업학교로 옮겼다.
15. 문상길 중대장의 세포 손선호 하사, 박진경 연대장 암살 :48.6. 18일, 대한민국 최초의 장교 암살
6월 1일 박진경은 중령에서 대령으로 진급을 하였다. 그러나 계속적인 작전활동으로 진급축하연을 못하다가 6월 17일 제주읍 간덕정 옥성정 요리집에서 하기로 하였다. 미군 장교와 통위부에서 파견된 장교, 그리고 지역 기관장들이 참석하여 18일 새벽 1시경 끝났다.
그러나 이미 김달삼으로부터 지령을 받은 문상길은 정보계 선임하사 남로당계 양희천 상사를 불러 17일 저녁 먹고 오는 박진경을 사살하라 지시하였다. 양상사는 세포원인 손선호(대구폭동에서 경찰의 추적을 피해 경비대에 들어온 하사). 신상우 중사. 배경용 (19)하사 등을 불러 임무를 부여하였다.
결국 최종 임무는 손선호가 부여받고 방아쇠를 머리에 당겼다. 48년 6월 18일 새벽 3시 15분! 그의 나이 28세에 운명하였다. 창군이래 가장 유능하다는 장교 한 명이 창군 이래 제일 먼저 남로당원에 절명하였다.
16. 5대 최경록 중령 연대장 부임과 연대장 살해범 체포
장례식을 마친 후 신임 연대장 최경록 중령은 헌병대, 방법대, 미CIC 등 모든 수사요원을 동원하였고, 전임연대장 그 당시에 여수 제14연대장으로가 있던 김익렬까지 서울로 연행하여 조사했으나 단서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부연대장에는 송요찬 중령이 부임하였다.
한장의 편지, "연대장님 이번 사건은 문상길 중위와 연대 정보과 하사관들이 저지른 사건입니다"
이렇게 하여 7명이 색출되어 문상길 등 4명은 48.9월 23일 경기도 수색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1명은 무기, 1명은 5년, 2명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문상길은 경북 안동 출신으로 국군 준비대인 좌익단체에 입대 후 대구경비대 6연대 1기생으로 입대, 육사 3기로 임관하였다. 이에 따라 국가보안법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진상조사보고서는 사형집행된 자들의 장구한 최후진술을 부각하여 기록하여 박진경의 과도한 폭도 통제와 무자비한 진압작전이 빚은 결과라는 식으로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 사실 박진경 연대장은 제주도에 온지 1달도 안되는 상태였다.
김익렬 연대장은 어떻게 보면 김달삼과 평화회담을 했다고 지금 제주도에서는 크게 역도(?)로 폄하하지 않는다. 그것은 폭도들이 재무장할 수 있는 시간과 중간산 마을에 아지트를 구축하는 시간과 무기를 축척하는 기간이었기에 그렇다고 볼 수도 있다. 김달삼이나 이덕구 등은 처음부터 평화협상은 없었다. 남로당의 최종 목표가 남한사회의 공산화인데 그런 약속은 웃기는 속임수에 불과했다.
[계속적인 경비대의 무기 / 실탄 들고 탈영]
4월 중순경 문소위로부터 99식 소총 4정, 오일균 대대장으로부터 카반 탄환 1,600발. 김익렬 연대장으로 부터 카빈탄환 15발을 받는 등 이미 김달삼은 내부 세포들과 결탁하여 많은 인원이 경비대를 탈영하여 폭도대열에 들어갔다.
특히 5월 17일 오일균대대장으로부터 M1소총 2정. 동 탄환 1,443발, 카반 총 2정. 동 탄환 800발을 공급받는다. 5월 20일 43명이 99식 1정식. 그리고 탄환 14,000발을 들고 탈영하고, 5월 21일 2명이 탈영하고, 5월 말 애월에서 4명이 탈영하고, 6월 초순 대정에서 문동오 상사가 탈영, 7월 1일에는 대정에서 보초 10명이 탈영하는 등, 박진경 연대장에게 체포된 22명을 제외하고도 52명이 탈영하여 폭도들에 들어가고, 99식 소총 56정. 카빈 3정, M1 8정이 폭도들의 손에 들어갔다.
하지만 진상조사보고서는 이러한 폭도들과 경비연대와의 관계를 누락하여, 그들이 여차하면 반란이 이루러질 수 있었다는 것을 은폐하려 했다.
[최경록 연대장의 작전]
48년 6월 18일 제주에 부임한 최경록은 경비대와 경찰을 총동원하여 해안선에서부터 한라산까지 이 잡듯이 뒤져 산에서 얼씬거리는 사람은 무조건 잡아다가 수용소에 수용시키고 거기서 폭도들을 가려 내었다.
48. 6.18~7.14일까지 1,454명을 연행하여 600여 명을 기소하고 나머지는 수용소로 보냈다. 폭도들은 견디지 못하고 산속 깊숙히 숨어 지내며 저항을 하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48. 7. 12일, 이형근 통위부 참모총장은 제주도 폭동은 일단락되었다고 발표하고, 7월 15일 11연대를 재편하고 부연대장인 송요찬 소령을 8연대장에 임명하여 제주도에 주둔하게 하고 11연대 2대대는 7월 24일 수원으로 원대복귀하였다. 최경록 중령은 대령으로진급하고 임부택 대위도 소령으로 진급하여 통일부로 전출되었다.
17. 소령 송요찬 연대장의 작전, 그리고 오일균 소령 체포
송 연대장은 폭도들이 아직 산속에 들어 있으며 이를 경비대가 체력적으로 따라잡지 못하기 대문이라 보고 무자비한 훈련을 시켰다. 일명 "지옥훈련"이다.
연대장 스스로도 대대장들과 매일 한라산을 올라서 체력단련을 몸소 실천하고 있었다. 그러나 산속에는 이상하게도 폭도들의 아지트를 찾지 못했다.
"연대장님 저는 억울 합니다. 저는 폭도가 아닌데도 폭도로 몰아넣고, 총을 들고 경찰과 싸운 폭도는 양민으로 일반수용소에 있습니다. 자세히 조사하여 억울함을 풀어 주십시오"
송요찬은 진정서를 받고 비밀리에 헌병을 불러 소용소 소장 오일균을 잡아오게 하였다. 폭도로 석방된 인원들을 다시 잡아들여 대질 신문결과 오일균의 범행이 밝혀지고 말았다. 그는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49년 수원에서 사형되었다.
18. 김달삼의 비밀 월북과 제9연대 2대대장 대위 김창봉의 체포
사건이 이렇게 하여 폭도들이 설 땅이 없어지고, 점점 옥쇄를 죄어오자 김달삼은 48년 8월, 해주에서 열리는 남로당인민회의 참석을 이유로 이덕구에게 사령관 자리를 주고 배를 이용 목포로 가서 기차로 이동하여 38선을 넘어갔다.
한편 유창훈 소위(육사5기)가 지휘하는 제5연대 1개 중대가 11연대에 차출되어 제주로 가서 함덕에 주둔하게 되었다. 무려 4개월간을 한라산을 오르내리며 폭도들의 은신처를 찾으려 했으나 모두가 모른다고 얼버무렸다. 그만큼 제주는 흔들리고 있었다.
어느날 조천마을에 폭도들이 들이닥쳤다고 조천지서에서 연락이 와, 손영로 중대장이 즉시 출동하여 진압하고 왔다. 그리고 그 결과를 보고하는 자리에 대대장 김창봉 대위가 화를 벌컥내며 왜 보고도 없이 움직였느냐며 문책한다. 화가 난 중대장은 연대 정보과에 근무하는 동기생 김두현 소위를 찾아가 대대장이 아무래도 수상하다고 진언했다.
결국 뒷조사결과 대대장이 지역 한의사를 만나 작전기밀과 총. 실탄을 제공하였으며 헌병 1개소대가 출동하여 한의사 집을 수색, 증거물을 확보하여 군법에 회부하게 되었다.
48년 7월 2일에는 모슬포 1대대에서 11명이 탈영하여 유격대로 들어가고, 또한 41명이 탈영하여 이중 21명이 입산에 성공하여 폭도들과 합세하게 되어 폭도들은 무기와 탄약 그리고 병력을 보강하게 되었다.
18. 남한의 5.10선거는 반대하고, 북한의 8.25선거 참여
가. 북한의 8.25선거
소련은 분단정부를 반대하는 박헌영보다, 분단을 인정하는 김일성을 내세워 친소정권을 세우게 된다. 이렇게되자 박헌영은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48년 6.29~7.5일까지 평양에서 "남조선 단독선거 실시와 관련하여 우리 조국에 조성된 정치정세와 조국통일을 위한 장래 투쟁대책에 대한 문제 토의" 라는 제목하의 남북지도자 협의회가 지난 4월 말에 이어 두번째로 개최되었다. 여기서 북한의 선거를 8.25일 하기로 정하고, 선거는 남북한이 모두 해야 한다고 합의를 하여 남한에서는 각 시 군에서 5~7명의 대표자를 선출하여 이들이 해주에 모여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선출하기로 한다. 그래서 남한에서 인구비례에 따라 360명, 북에서 212명을 선출하기로 했다.
이에 박헌영은 서울의 김삼룡에게 비밀리에 선거를 하여 대표자를 해주까지 파송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남한에서는 이승엽이 중앙 책임으로 도.시.군은 남로당 각 단위위원장이 책임을지고 투표를 하도록 하여, 남한에서는 총 유권자 8,681,746명 중에 77%인 560만 명이 참가 하였다. 제주도는 총 85,5176명의 투표 대상자 중에 85%인 72,000명이 참여하여 바로 김달삼이 52,000명의 투표용지를 해주까지 가지고 가서 증거물로 제시하였다.
이렇게 하여 선출된 1,080명의 대의원들이 8월 10일경 개성.동두천.주문진 등 38선 근방에서 월북하려다 80명만 체포되고 나머지 1,000여 명은 무사히 해주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제주 대표는 안세훈.김달삼.강규찬 등으로 8월 2일 성산포에서 어선을 타고 목포에 도착하여 열차로 서울에 모여 38선을 넘어갔다.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는 8월 21일부터 6일 동안 해주 인민회당에서 개최되었다. 박헌영의 개회선언에 이어 35명의 주석단이 선출되는데 여기에 남로당 박헌영.허헌.홍명희.이승엽. 김달삼 등이었다 여기서 8월 25일 남조선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360명을 선출하였다.
이 대회에서 김달삼이 연설을 통해 제주 인민 유격대눈 45회의 지서습격 및 야외투쟁을 통해 57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고 각종 시설물을 파괴하는 한편 다수의 무기를 탈취하는 등 무장투쟁을전개하였다고 하며 "김일성 박헌영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문세"를 불렀다.
남한의 대표 수가 북한보다 많아서 박헌영이 투표로 하면 수상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9월 1일 수상선거는 투표로 하지않고 소련의 강력한 지지를 받는 김일성이 만장일치로 박수로 추대되어 버리자, 남로당 계열은 불평이 이만 저만이 아니였다.
김일성은 남한의 좌파인 남로당을 이용하여 정권 창출의 명분은 살리고, 그들을 허수아비로 만들어버렸다.
19. 제주인민군 사령관 이덕구, 그리고 48년 9.15사건
이덕구는 조천면 신촌 사람으로 당시 28세였고, 일본에서 학병으로 끌려가 관동군 소위로 임관하여 해방을 맞았다. 이때 이미 이덕구는 좌익사상을 갖고 있었다.
제주지역 인민군사령부는 어승생지역에 사령부를 두고 당책과 읍.면에 책임자가 있어 3만 명의 당원을 동원하여 폭도들에게 협조하게 하였다. 마을마다 보초를 세우고, 토벌군의 동태를 파악하여 사령부에 보고 되도록 하였다.
48년 9월 15일, 중문면 도순리의 대청단원 문두천이 하원리에 갔다가 양민으로 변장하고 농사를 짓고 있던 폭도의 눈에 띄여, 연락을 받고 몰려들은 폭도들에게 칼로 난자 당하여 죽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덕구가 사령관이 된 이후에 발생한 최초의 사건이다. 이 9.15사건을 도화선으로 폭도들은 9월 18일 성산 고성 2구에서 민보단장 김만풍. 마을양민 오만순을 칼로 학살하였다. 9월 25일에는 폭도들이 김녕리 장례식장에 나타나 사람을 죽이고, 10월 1일에는 제주읍 도남리에서 토벌에 앞장섰다는 이유로 우익인사를 죽였다. 같은 날 중문면 도순리에 응원경찰이 주둔하고 있다가 기습을 받아 경찰 5명이 비참하게 죽고 여럿이 부상하였으며 2명이 납치 되었다.
20. 제주도 경비사령부 창설과 여수 제14연대 반란
계속되는 폭도들의 만행을 제압하고자 48년 10월 11일, 제주도에 경비사령부를 신설하고 여수 14연대 1개 대대를 차출하여 9연대에 배속하였으며, 제5여단 김상겸 대령을 경비사령관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진상조사보고서는 앞에서 언급된 폭도들의 만행은 언급없이 제주에 진압사령부를 설치하여 강경진압을 본격적으로 벌이게 되었다고 하였다.
[여수 제14연대 반란사건]
제주도의 폭도들을 진압하기 위해 여수 제14연대의 1개 대대를 10월 20일까지 진압사령부에 배속시켰다. 이때 남로당 군사부장 이재복은 남로당 전남도당 김백동과 여수인민위원장에게 반란을 일으키도록 선덩하고, 여수인민위원장은 14연대 지창수상사를 선동하여 14연대 안의 남로당원과 여수남로당원이 협력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진압군이 제주도로 떠나기 전 1948년 10월 19일 여수 14연대 안의 남로당원 지창수 상사외 40명이 주동이 되어 반란을 일으켜 순식간에 장교 20명을 살해하였으며 무기고를 탈취하는 등 각 대대에 퍼져있는 세포들이 동시에 선동하고 나섬으로서 반란부대가 되어 버렸다. 여기에 대구 6연대반란과 광주 4연대의 일부가 반란에 가담하였고, 마산의 제15연대 최남근 연대장이 반란에 가담하여 국군은온통 빨갱이 부대 같았다.
이와같은 비슷한 시기에 북한에서도 11월 18일 180명의 인민유격대를 오대산을 통해 남파하여 대한민국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이덕구와 제주 남로당 간부와 각 면 단위 대표, 각 중대장들과 산으로 올라간 사람들이 만세를 부르며 곧 남조선이 해방되는 것처럼 좋아했다고 한다.
14연대 안의 좌익인 지창수 상사가 주동하여 제주도 출동 1개 대대가 반란부대가 되자, 2개 대대도 반란에 합세하였으며 , 김지회 중위가 이 반란군의 사령관이 되어 여수와 순천경찰서를 단숨에 점령하고, 순천,보성, 벌교,광양을 점령하고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반란군은 여세를 몰라 구레와 남원을 점령하고 북상하려다 군산의 제12연대 백인엽 부연대장이 반란군과 싸워 이겼다. 반란군은 지리산으로 들어가고 구례에서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현재 국군은 총 8개 연대 5만 정도인데 이 8개 연대 중 9연대, 14연대, 6연대, 15연대 일부가 반란에 가담하여, 군 안에는 10,000명 이상이 좌파 남로당원이 있는 것으로 이를 제거하지 못하면 대한민국이 전복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9연대 안의 남로당원 강의원 소위 반란 실패, 48.12.1 보안법이 태동하다]
48년 10월 28일, 송요찬 연대장이 5중대장 이근양 대위(12.12사태시 3군사령관)에게 조천 해안에 위장상륙하여 폭도와 폭도를 지원하는 세포들을 생포하라는 임무를 부여했다.
그리고 송 연대장은 이 계획을 경찰국장에게 알려주려고 수화기를 들었다. 그런데 교환수가 경찰서에 교환수에게 보고하는 것이 발각되었다. 이에 연대장은 은밀히 헌병을 통해 연대 교환수 17명과 경찰 교환수 모두를 체포하고, 당시의 연대교환수를 설득하는데 성공하여 내막을 알았다. 연대안에 장교 6명, 사병 80명이 세포원이라는 것과, 출동하는 이근양대위 중대에 선임하사 이하 8명이 남로당원으로 중대장을 죽이고 공비와 합류하려 했다는 것이다.
연대의 책임자는 연대 구매관인 강의원 소위(육4기), 박격포 부대 박노구 소위(육5기)가 책임자였다는 것이다. 연대장은 헌병을 극비리에 동원하여 이 모두를 일망 타진하여 위기를 벗어나게 되었다.
이런 일련의 사태로 정보국에서는 국군안의 세포조직을 색출하여 엄벌하기 위해서 48년 12월 1일 보안법을 만들게 된다.
21. 이덕구의 48년 11월 1일, 제주도 적화야욕이 불발하다
48.10.23일, 폭도 40명이 조천면 함덕지서와 조천지서를 공격하고, 10월 24일에는 애월 수산리 경찰 김창순(230이 폭도들에게 죽고, 10월 26일, 폭도를 비판하는고성 마을 김창언을 무참히 죽이고, 이에 군경은 또한 여기에 맞대응하여 마을을 수색하고 토벌하는 과정에 무고한 양민이 또 숨지게 되니 제주도는 정말 내란의 도시처럼 변해버렸다.
한편 48년 10월 31일, 제주 경찰서 안의 이발소에서 근무하는 서용각이 위생계장 고창호에게 합동통신 기자를 알려줌으로서" 이에 경찰은 합동통신 김기자를 미행하여 김기자와 만나는 사람을 소리없이 6명을 연행하여 조사결과, 한명으로부터 유효한 증언을 입수했다.
"실은 제주도 인민공화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경찰 간부를 죽이고 경찰서를 점령한 다음 남로당원을 총동원하여 항쟁을 일으켜 제주도를 점령한다"는 증언이다.
끈질긴 설득 끝에 그들이 밝힌 경찰 은 11명이고, 이중에 2명은 특별수사요원도 있었으니 1명은 산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도청.법원.검찰청.읍사무소.해운국에 포진한 죄익 75명의 명단을 확보하여, A급 20명은 즉시 처형하고 B급 38명은 구속수감하고 C급 25명은 훈방함으로써 이덕구의 11월 1일 제주도 공산화 음모는 실패하게 되었다.
22. 여수 제14연대 반란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이덕구 경비대 제2대대 재6중대를 대낮에 공격하다
여수반란사건이 성공했다고 전해지자 폭도들은 만세를 부르며, 곧 북한이 38선을 넘어와 남조선을 해방시킨다고 선전하여 산에 올라 있는 양민들은 그렇게 알게 되었다.
용기를 얻은 이덕구는 11월 2일, 한림에 있는 제2대대 6중대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조직적인 방어에 그들이 물러나는데 사전 매복을 알지 못하는 6중대장은 밀어붙이다 그만 그 매복에 걸려 중대장 이하 14명이 전사하였다. 대대장은 즉시 제3중대를 투입하였으나 3중대 또한 기습을 받아 다수의 피해를 입었다. 새벽을 기해 일제 기습으로 그들 아지트를 공격하여 무력화 시키고 그들 숙영지를 수색한 결과 100여 명이 죽어있고, 여럿이 땅에 엎드려 있다 포로가 되었다.
포로된 자들의 진술에 따라 집중 수색으로 보급창, 무기 수리공장, 식량창고 등을 알아내 모두 압수하여 보니 어떻게 확보했는지 경비대로부터 많은 무기와 실탄이 들어와 있어 기절할 지경이었다.
이에 토벌군은 중간산 마을 주민들을 모두 한림초등학교에 수감하여 놓고 세포 색출작업을 벌였으며, 이때부터 송요찬 연대장은 군 작전에서 양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중간산 마을을 해변 가로 이사시키게 된다.
"하지만 진상조사보고서에는 바로 48.9.15 민간인 학살로부터 이 11월 2일까지의 사건을 빼버리고, 경비사령부를 신설하고 계엄령을 선포한 이유도 설명하지 않고, 강경 작전준비를 완료한 진압군이 소개된 중산간 마을을 모두 불태우고 남.녀.노.소 구분없이 총살 하는 등의 좌편향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23. 제주 이덕구 부대의 과감한 공격
이덕구는 선전포고문을 지하에서 발행하는 제주도당 "제주 통신"을 통해 14연대를 본받아 게릴라 활동에 합류할 것을 호소하였다. 제주도 학생들이 일부 시위을 전개하고, 도내 학교가 폐쇄되면서 2만여 명이 제주인민군에 협조하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가. 11월 5일, 중문지서 공격
인민유격대는 안덕지서를 공격하는 척 하면서 중문지서를 공격하게 된다. 유격군 70명과 협조자 200명 정도가 새벽 5시에 기습하였다. 그러나 화력의 차이로 점령은 못하게 되자 마을일대를 온통 분탕질하여 식량 의복 등 닥치는대로 약찰하고 면사무소 등 집 40여 채에 불을 질렀다
서청도 11월 19일 16명을 처형하였다. 토벌대는 안덕근방에서 20여 명, 사계리 5명, 서호리 3명, 서호리 옆의 자연마을 주민 8명을 처형하고 호근리 마을을 덮쳐 폭도들에게 협력했다고 마을에 불을 지르고 16명을 처형하였다.
이렇게 되자 폭도들은 양민으로 가장하여 돌담을 만들어 숨던가, 묘지 내부에 들어가고, 밭 속에 축성물을 만들어 숨던가 비트나 굴속에 은신하게 되어 찾기가 어려웠다.
나.11월 7일 서귀포 공격, 제주도 계엄령 선포 : 48년 11월 17일
서귀포 경찰서에는 100여 명의 국군이 있었다. 폭도들은 국군을 산으로 유인한 다음 서귀포를 11월 7일 , 공격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가짜 정보를 선전부를 통해 흘리고, 경찰은 경찰대로 경찰을 위장시켜 산에 입산시켜 정보를 입수한 결과 서귀포를 대대적으로 공격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11월 6일, 토벌대가 50여 명으로 쌀오름을 향해 출동하였다. 11월 7일 새벽 토벌대가 쌀오름을 공격하는 싯점에 서귀포경찰서 인근에 나타났다. 하지만 엉겁결에 경찰이 기관총을 쏘아대자, 놀라서 경찰서를 공격하지 못하고 민가 72채에 불을 지르고 도망쳤다. 이 사건에 폭도 6명 사망, 경찰 3명 전사, 일반인 3명이 죽었다.
주민들은 폭도들이 72채의 집에 불을 지르고 약탈을 저지르는데도 군경이 아무런 조치도 못하면서, 폭도들이 가고나면 거꾸로 폭도들과 내통했다고 지역주민을 끌고 갈 것이니 원성이 높았다.
이렇게 폭도들이 직접 경비대와 경찰서를 공격하고, 민가에 불을 지르게 되자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다. 폭도들의 공격과, 진압군의 공격
"군경의 과도한 색출작전에 산으로 오르는 사람들
"무조건 도망치자. 잡히면 죽는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데 산으로 가 숨자"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11월 3일에는 제주읍 연동마을을 덮쳐 도망가지 못한 7명을 처형하고, 11월 4일 토벌대는 함덕과 신흥을 덮쳐 28명을 처형하고, 11월 6일에는 조천리 청년 8명을 처형하였다. 같은 날, 제주읍 삼양리를 덮쳐 삼양초등학교에 주민들을 모이게 하고 8명을 처형하게 되는데 이 마을은 결국 아무도 남지 않았다 한다.
조천 교래리에서는 100호 정도가 사는 마을인데 11월 13일 새벽에 토벌군이 덮쳐 폭도들을 찾기 위해 집집마다 불을 지르고 남아 있던 14명을 모두 처형했다. 와산리와 와슬 2구도 이렇게 하여 토벌하다 보니 많은 사람이 산속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누가 폭도고, 누가 양민인지 구별이 어려워 송요찬 연대장이 중산간 마을의 주민들을 해안가로 나오게 하여 중산간 마을은 이잡듯이 수색하게 되었다.
[ "폭도들의 공격"]
11월 11일,신흥리 지서 경찰 6명을 죽이고, 신엄의 지서.우익대표 김여만의 집, 조천을 기습하여 우익인사 와 일가족을 죽이고 그 가옥 30채에 불을 질렀다. 조천리에서 또 자신들에게 식량을 내주지 않는다며 이장 가족을 죽이고 30여 채에 불질렀다.
49년 1월 11일 폭도들이 상모리에서 민보단 책임자인 이삼백(33)을 학살하고, 그 집에 불을 질렀다.
[진압군, 자수자도 처형]
9연대와 증원경찰은 중산간 마을 주민들을 해변으로 이사시키면서 중산간 마을을 모두 불태워 폭도들의 은신처를 없애버렸다.
밤에는 폭도들이, 낮에는 토벌대가 찾아와 마을을 쑥밭으로 만들어 버리니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 것처럼 되어 마을 사람들이 산으로 숨어들었다., 더구나 계엄령이 선포되자 토벌군은 조금만 이상하면 무조건 총을 쏘았다.
12월 6일 진압군은 대정지서에 갇혀 있던 안성리 김옥분 등 14명을 총살하였다. 13일에는 상모리와 하모리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향사에 모이게 하여 자수하면 살려준다고 하면서 48명을 모두 총살시켜버렸다.
대정면 안성리는 폭도 사령관이던 김달삼의 장인인 좌익 강문석의 고향이이다. 강문석은 해방 후 남로당 중앙당 선전부장을 한 인물이다. 45년 10월 인민위원회를 전국적으로 조직할 때 고향에 내려와 대정인민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러다 보니 이 곳에는 좌익이 조천과 같이 많았다는 것이 일반적 사실이다. 따라서 48년 12월 20일 대정면 3개 리에 사는 인원 17명을 총살하였다.
반면 ,48년 12월 13일 상모리에서 비극이 발생하자, 민보단장 김남원과 모슬포 교회 조남수 목사가 나서서 모슬포 경찰서장을 만나 자수자를 살려달라 청원하여 이교동동네 100여 명은 간단한 자술서를 쓰고 죽지않고 살아났다.
해가 바뀌어, 49년 1월 5일, 폭도들이 마을에 뿌린 삐라를 신고하지 않은 보송초등학교 교장 등 7명이 총살되었다. 이러한 무도한 처형은 분명 비판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토벌군이 그렇게 하지않으면 안되었던 것은 누가 폭도인지 알지 못했고, 내버려 두면 어디서 나타나 바로 토벌군이 죽게 되면서 이런 엄청난 비극이 자행되었다.
[폭도들 남원면 사무소와 경찰지서 공격]
48. 12. 14일 진압군이 모슬포. 서귀포. 남원리. 한라산 부근의 폭도들 진압작전을 펼쳤다. 이때 마을 주민들 3천여 명이 합세하였다. 이 작전에서 폭도 105명을 사살했다. 48. 12. 31일 ~49. 1. 10일 어간에 진압군이 의귀리 일대에서 수색활동 중에 100여 명을 의귀리 학교에 가두고 총살하고, 1월 22일에도 30여 명이 총살된다.
반면 폭도들이 이에 대한 보복으로 하례리 마을에서 "토벌군의 앞잡이 노릇이 얼마나 처참한가를 보여주자"며 30여 명을 죽이고 집에 불지르고 마을은 모두 잿더미로 변했다. 염돈 마을도 또한 이렇게 잿더미로 변했다.
특히 우익인사나 그 가족, 경찰가족 등이 있는 마을은 모두 피해를 입었다고 보면 된다. 그러니 폭도들을 찾아내기 위해 중산간 마을을 해변으로 이동시켜야 했는데 이를 초토화시켰다고만 하여 토벌군의 잘못된 것으로 조사했다.
24. 폭도 이덕구의 고민과 토벌군 공격
이덕구는 계속적으로 한라산 토굴이나 아지트에서 버티기에는 이제 식량부터 전투무기들이 고갈되어 어려움이 발생한다. 그렇다고 북으로부터 지원은 불가능한 상태였으므로 일시적으로 잠적해 버렸다.
이에 정부에서는 제주도의 계엄령을 해제하고 제9연대와 대전의 제2연대(연대장 함병선 중령)로 부대교대를 실시한다. 그동안 제9연대는 전사자가 93명과 많은 부상자가 발생했고 반란자 86명을 처형했으며 , 탈영병도 많아서 재편성을 해야 하기에 육징에서 남로당파가 가장 적었던 제2연대를 제주도로 보내, 48년 12월 29일 도착하게 된다.
가. 제주 인민군 국군 제2연대 3대대 공격
이덕구는 제2연대가 제주도에 들어와 적응하기 전에 12월 31일 야밤에 하산하여 다음날 49.1.1일 기습공격하였다. 폭도 600명이 침투하여 10여 명이 죽고 많은 수가 부상했다.
이에 맞불작전으로 토벌군은 1월 6일 제주읍에서 8KM떨어진 명덕리에 유격대 350명 정도가 작전회의 중이란 제보로 그십흐여 153명을 사살한다.
나. 폭도들 제주읍 공격, 제주지구 전투사령부 창설
49. 1. 8일 폭도들이 제주읍을 기습하여 식량과 부식과 그들이 필요한 것을 약탈하고, 제주읍을 빠져 나갔다. 폭도들이 소탕된 줄로 알았던 육본에서는 49년 3월 2일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를 창설하고 사령관에 유재흥 대령, 참모장에 제2연대장 함병선 중령을 임명하였다. 그리고 여기에 제6사단 유격대대를 증파하였다.
반면 폭도들은 전단지를 만들어 지역에 살포하여 그 투쟁을 계속하려 했다. 그 전단지 내용은 김일성이 곧 구제하려 온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25. 북촌마을 사건 "국군의 무차별 처형"
조천면 북촌마을은 332호 1,864명이 살고 있는 마을로, 1948년 5월 16일 우도에서 제주읍으로 가던 어선이 풍랑을 만나 북촌마을 포구에 피했을 때에 이 배에 타고 있던 우도 지서장을 이 마을 폭도들이 권총으로 쏴 죽인 곳으로 조천.선흘.대흥과 같이 제주의 해방구였다.
이런 마을에 49년 1월 17일 2연대 3대대 일부 병력이 함덕으로 가던 중에 이곳 북촌망르일대에서 2명이 전사한다. 이에 토벌군이 출동하여 폭도들의 자수권유와 마을 사람들을 대상으로 회유를 하였으나 누구도 나타나지 않게 되자, 1차로 40명 2차로 40명을 총살시켜버렸다. 이어서 다시 주민들을 소개시켜 조사하면서 일부가 또 총살되어 1,864명중 120여 명이 죽어나가, 이방림집안은 며느리까지 6명이 다 죽ㅇ엇고 12가구가 가족이 다죽어 대가 끊겼다.
헌데 이 사건은 또 한편으로는 토벌대에 맞서면 다 죽는 다는 소문이 돌아 산에 올라간 많은 인원이 하산하여 바닷가 수용소로 내려오는 효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26. 폭도들 제2연대 공격
남원 의귀리에 있던 2중대를 49년 1월 11일 폭도들이 기습공격하지만 이미 정보를 입수하여 대비한 관계로 국군 피해는 4명이 전사하지만 폭도들은 100여 명이 죽었다.
반면 49년 1월 29일 이동중이던 제1대대 병력을 기습하여 특무상사 정항상 등 6명이 전사하고, 2월 4일에는 3대대 병력이 차에 소총등 무기를 실고 이동하는 것을 기습하여 박재규 중위등 24명이 죽고 99식 소총 150여 정이 피탈되었다. 폭도들은 장병들의 오가지를 모두 벗기고 일부 시체에는 불을 질러 죽였다.
27. 국군과 폭도간의 치열한 전투 : 녹하악 전투와 노루오름 전투
49년 1월 6일, 관음사 밑의 월평리에서, 49년 2월 15일에는 남원 산록에서 전투가 벌어져 폭도들 160여 명의 시체를 버리고 달아났다.
함병선 연대장은 하산자 보호를 위해 소용소를 건립하고, 전단을 뿌리고 연락기를 이용한 한라산에 선무방송을 하여 엄청난 숫자가 내려오게 되었다.
49년 3월에는 녹하악 일대에서 토벌군은 제1대대 4중대장 김주형(직접 만난 참전용사님)의 증언에 의하면 178명의 폭도들이 사살되었다.
49년 3월 9일, 토벌대 제6사단 유격중대가 노루오름에 진입하다 먼저 정보를 입수한 폭도들이 유리한 지형을 선점하여 기습공격으로 국군 36명이 전사하고 총 40여정이 피탈되었다.
하지만 진상조사 보고서는 국군이 피해를 입힌 전투는 열거하여 양민을 죽인 것을 부각하고자 하였고, 여기 노루오름 전투는 피해정도를 기록하지 않았다.
제2연대에서는 50여 명의 특수부대를 만들어 한라산에 침투시켜 정보를 획득케 하였다. 토굴속에서 많은 인원을 생포하여 하산시키는 가운데 5월 26일에는 수악계곡에서 23명을 사살하고 8명을 생포한바, 이들 중에는 제주경찰청장의 딸 강영숙도 있었다. 그는 차후에 전향하게 된다.
28. 토벌군의 신촌 마을 집단 처형의 비극이 발생하다.
49년 3월 10일, 폭도들이 신촌초등학교의 경찰들을 기습하게 된다. 하지만 건물이 전소하고 폭도들은 모두 사라졌다. 믿지 못하는 국군은 신촌마을 사람을 학교 운동장에 모이게 한 후에 아무도 자수하지 않자, 모두를 차에 태워 한 장소로 이동하여 모두를 집단 처형해 버렸다.
29. 진압군, 폭도들의 마을진입 완전 차단
유재흥 사령관이 제주도에 도착하여 사태를 분석한 결과 토벌하지 못하는 근본 이유는 폭도들을 자진해서 협조하는 사람도 있지만, 폭도들이 밤에 와서 강제로 협조를 요청하기 때문이라 분석했다.
그래서 중간산 마을의 허리를 완전히 장악하여 폭도들이 한명도 내려오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자 산에서 하루에 수백 명씩 내려왔다.
30. 한 소년의 자수
그런 어느날 귀순자 한 명이 함병선 참모장에게 면담을 요청하게 된다. 그는 바로 폭도 사령관 이덕구의 경호 담당 김정진이었다. 그는 공산주의가 뭔지 아느냐는 질문에 그런 것을 모르지만 못살고 못먹는 국민을 위한다고 하여 이덕구 사령관을 모시게 되었다고 대답했다.
함병선 :너 왜 폭도가 되었니?
김정진 " 저의 집은 가난해서 할 일이 없고 앞으로 살아가기가 막막했는데 어떤 친구가 앞으로 좋은 세상이 온다고 해서
함병선 : 그럼 어떤 세상이 좋은 세상인데?
김정진 : 땅을 많이 가진 사람 것을 빼앗아 우리들에게 공평하게 나누어 주어 농사 일을 해서 먹고살게 해주는데 이 일을 하시는 분이 김달삼.이덕구.박헌영.김일성 장군이 한다 기에 그런 고마운 분들도 있는가 하여 저는 이덕구 사령관님을 정성껏 받들었습니다.
함병선 : 그런데 왜 자수를 했어?
김정진 : 그런데 이덕구 사령관이 제주를 완전히 해방시켜서 똑같이 나누어 주는, 그런 세상은 올 것 같지도 않고 이제는 친구들도 다 죽고 몇 명만 남았는데 먹지도 못하고 배가 고파서 죽을 것 같아서 귀순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덕구의 아지트를 알려줄테니 이덕구를 살려달라고 했다.
김정진 : 이덕구 사령관은 저를 동생같이 생각하고 참으로 저에게 잘해 주었습니다. 그 분과 같이 죽어야 하는데 죽으면 뭐합니가? 살아야지요. 제가 한번은 사령관님께 도저히 진압군을 이길 수 없으니 같이 자수하자고 하니가 "정진아 나는 사령관이니 그렇게는 못한다. 나는 끝까지 있다가 죽을 것이다. 정진아 너는 오늘 귀순을 해라.그리고 아무 말을 하지말고 집에 가서 부모님 잘 섬겨라" 하고 등을 두들겨주며 떠나는 사령관님의 마음이 고마워서 저는 그 분이 살아서 그 분을 형님으로 모시고 그 분과 같이 살고 싶어요
함병선 : 그래 알았다. 내가 대통령님께 너의 참뜻을 잘 건의하여 그렇게 되도록 하겠다.
이렇게 하여 어승생악 일대의 아지트는 진압군에 의해 토벌 되어 병기창이며 군수 보급창 등 모두를 급습하여 370여 정의 소총과 실탄, 식량 등이 회수되었다.
정말 당시 우리 군대는 장개석군대(?)와 비슷했다.
드디어 49년 4월 20일, 이덕구의아지트를 급습했다. 그러나 이덕구는 배를 타고 도망쳐 지리산으로 들어가려고 제주시 봉개동 절물이라는 견월악 바닷가 어느집에 숨어들었다.
이 사실을 전향한 세포가 경찰에 신고하여 49년 6월 7일, 출동한 경찰과 대치 중 사살되었다.
1949년 5월 15일 제주도 전투사령부가 해체되고, 5월 20일 9연대와 2연대 장병 전사자 119명의 위령제가 제주읍 농업학굥에서 전사자 유족들의 통곡 속에 진행되었다
이덕구 이후에 김두봉, 김성규,고성구(김성규와 고성구는 탈영한 군인 세포 출신임)로 이어지는 폭도들의 지휘부는 점점 무력화 되어 갔다.
48년 4월 3일 폭동이 일어나 49년 6월 10일 제주도 폭동이 진압되는 데는 1년 2개월이 걸렸다.
49년 7월 2일 제2연대는 원대복귀하고, 7월 15일 독립 제1대대( 대대장 김용주 소령)가 제주도에 들어와 폭도들을 추적하고, 49년 12월 27일 독립 제1대대가 철수하고 해병대(사령관 신현준 대령)가 폭도 잔당을 진압하게 된다.
1950년 7월 25일 폭도들이 중문 하원리 지서를 습격하고 민가 99채에 불을 질러 세를 과시했다. 좌파 폭도사령관 김의봉은 부하들을 데리고 조천 농촌지대에 침투하여 생존하고 있었다.1951년 3월 폭도들은 허영삼을 사령관으로 추대하여 경찰과 민간인을 공격하였다.
제주도는 해병대가 한국전으로 인해 원대복귀하고, 제주 경찰이 246명의 의용경찰대를 조직하여 소탕작전을 계속하였다.
1952년 11월 1일, 100전투사령부를 신설하여 4개 부대 500명으로 폭도를 소탕하게 된다.
폭도들은 내부에서 파벌싸움으로 서로 죽이고 하면서 세가 약화되지만 휴전협정에서 유리한 고지를 유지하려 서귀포 일대 발전소등을 공격하였다.
그러다 결국 53년 1월 29일 육군 특수부대인 박창암 소령 부대가 5개월 만에 소탕하게 되고, 그 후로도 잔당이 남아 1957년 4월 3일 완전히 소탕하게 되었다.
1957년 4월 3일, 경찰은 사살 7,893명, 생포 7,000여명, 귀순 2,000여명이라 발표하였다.
진압군의 피해는 국군 전사자 186명, 경찰 전사자 153명, 우익 사망 1,518명이었다. 관공서 소실 228동, 학교 소실 224동, 피해가옥 15,228호였다.
결론적으로 :
공산주의가 뿌리내리는 좋은 세상은, 우선 빈부격차가 심하여 양극화가 심화되면 자생적으로 뒤엎으려는 자들이 나타나게 되고 돌째는 사회가 부정부패가 심하여 노력해도 갈 곳이 없을 때에 선동꾼들의 공작이 먹혀들게 된다. 세번째는 경제불황으로 실업자가 들고 사회가 불안해 지면 그 틈을 이용 국가를 폭력혁명으로 뒤엎으려는 공산주의자들이 득세하게 되는 것이다.
제주도가 바로 이판사판이니 산에 올라 폭도들이 되고 폭도들이 하라는 대로 하게 되었다. 토벌군도 공명정대한 임무수행을 할 능력이 부족했다. 그 내부 또한 세포들이 들어와 조직을 와해시키는 역할과 무기와 탄약을 넘겨주고 작전정보를 폭도들에게 넘겨주는 역할을 했다.
이러니 국민들이야 해방직후 갑작스런 인구증가와 아직 남아 있던 일제의 망령들이 존재하니 새로운 세상은 오지않았다는 폭도들의 선전공작이 먹혀들었다.
여기에 북한의 김일성 일당이 입맛 나는 토지몰수와 무상 분배를 외치고, 일제압잡이를 처단한다고 하니 얼마나 흥분되었을까?
하지만 그들은 또다른 폭력집단으로 그들의 권력을 독차지 하고, 결국 모든 것을 국가소유로 빼앗아 감을 제대로 교육이 되지 못한 그 당시로서는 그 꼬드김에 넘어가게 되었다.
참고적으로, 4.3진상조사 보고서 초안 집필진 4명중 팀장 포함 3명이 제주 유족 측이고, 초안을 검토하는 기획된 위촉직 10명 중 제주 유족 측이 7명이고, 안을 검토하는 심사위원회의 위촉직 5명 중 유족 측이 4명, 보고서를 통과 시키는 위원회의 위촉직 12명명 중 제주 유족 측이 9명이었다. 폭도 사령관 김두봉도 희생자로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