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면 이상주의자인 뒤낭의 성격은 협상과 조율이라는 구체적인 실무를 담당하기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결국 뒤낭의 역할은 점차 줄어드는 반면 모이니에의 역할은 점차 늘어났으며, 1863년 10월 26~29일에 열린 제네바 회의에서도 뒤낭의 역할은 그리 두드러지지 않았다. 그로부터 1년 뒤에는 스위스 의회의 주도로 최초의 제네바 조약이 체결되었지만, 이때도 뒤낭의 역할은 보조적인 차원에 머물고 말았다.
국제적십자위원회의 창립과 뒤낭의 말년
제네바 회의에는 14개 국가(오스트리아, 바덴, 바이에른, 프랑스, 하노버, 헤센-카셀, 이탈리아, 네덜란드, 프러시아, 러시아 제국, 작센, 에스파냐, 스웨덴-노르웨이, 영국)에서 온 36명의 대표가 참석했다. 이때 논의된 주요 의제는 부상병 구호를 위한 국제단체 설립, 부상병을 위한 중립 및 보호 유지, 전장에서의 구호를 위한 자원봉사자의 활용, 주요 의제를 향후 법적 구속력 있는 국제조약으로 만들기 위한 회의 조직, 그리고 전장에서 의료요원을 보호하기 위한 공통 상징 도입 등이었다. 1864년 8월 22일에 이 회의에서는 “전장에서 부상자의 상태 개선에 관한” 제1차 제네바 협약을 채택했다. 이후 이 협약은 “해양에서 부상자 및 난파자의 상태 개선에 관한” 제2차(1907년), “전쟁 포로의 대우에 관한” 제3차(1929), “전시의 민간인 보호에 관한” 제4차(1949) 협약 등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인류를 위한 고귀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사이에 뒤낭의 삶은 크나큰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1867년 초에 제네바의 한 은행이 파산하면서 뒤낭의 회사도 결국 파산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과정에서 의혹이 불거지면서 스캔들로 비화되는 바람에 체포 영장이 발부되었던 것이다. 가까스로 형벌은 면했지만 뒤낭은 엄청난 빚더미를 떠안게 되었으며, 사회적으로도 체면이 크게 손상되었다. 결국 뒤낭은 국제 적십자 협회의 임원 직에서 물러났고, 이후 위원회는 본격적으로 모이니에의 주도 하에 운영되었다. 본인이 설립한 YMCA 제네바 지부에서도 불명예스럽게 퇴출당한 뒤낭은 결국 고향 제네바를 떠나 평생 다시 찾지 않았다.
파리로 간 뒤낭은 빈곤한 생활 중에도 여전히 박애주의 활동을 위해 노력했다. 1870년부터 시작된 프랑스-프러시아 전쟁 당시에는 ‘공동구조협회’를 조직했고, 곧이어 ‘질서문명공동연합’을 결성했다. 나아가 국가 간의 분쟁을 조정하기 위한 ‘국제 법정’의 설립을 제창했으며, 한편으로는 ‘세계도서관’의 설립을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경제적 곤궁은 해결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으며, 아직 주위에서 도와주던 지인들도 하나 둘씩 등을 돌렸다. 적십자 운동이 큰 호응을 얻고 빠른 속도로 번져 나가던 1874년부터 1886년까지 뒤낭은 유럽 각국을 전전했다. 그러다가 먼 친척의 도움으로 경제적 안정을 이룬 뒤낭은 1887년에 스위스의 하이덴으로 이주해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오랜 궁핍 때문인지 그는 50대 후반의 나이에 외모가 거의 노인처럼 보였다고 전한다.
1892년에 뒤낭은 하이덴의 어느 양로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1895년 9월, 장크트갈렌의 한 신문에 적십자의 창립자 앙리 뒤낭에 대한 기사가 실리면서 다시 한 번 세간의 시선이 그에게 쏠리게 되었다. 뒤늦은 명성과 지원 덕분에 뒤낭의 입지는 크게 향상되었으며, 1897년에 이르러서는 적십자의 설립과 역사에 관한 책에서도 이전과 달리 뒤낭의 역할이 크게 강조되었다. 1901년에 뒤낭은 국제적십자운동의 창립자이며 제네바 협약의 발안자로 인정받아 제1회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공동 수상자인 프랑스의 평화주의자 프레데리크 파시는 ‘국제평화동맹’의 설립자였으며, 뒤낭과는 일찍이 질서문명공동연합에서 활동한 바 있었다. 물론 모이니에와 적십자 단체 역시 노벨 평화상 후보로 올라 있었으며, 뒤낭의 후보 및 수상자 자격을 두고 한동안 잡음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대세는 뒤낭의 편이었고, 오랫동안 뒤낭을 냉대하고 외면했던 국제적십자운동에서도 다음과 같은 찬사를 보냈다. “이러한 영광을 받을 사람은 귀하 외에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40년 전 전쟁터에서 부상자들을 구호하기 위한 국제기구를 만드는 일에 착수한 사람은 바로 귀하이기 때문입니다. 귀하가 아니었다면 19세기에 최고의 인도주의의 성취인 적십자는 아마도 생겨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뒤낭은 상금 가운데 10만 4천 스위스 프랑을 받았지만, 이 돈은 그의 사후에 거의 대부분 평생 지고 있던 빚을 갚는 데 사용되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무를 모두 청산하지는 못했다.
1903년에 뒤낭은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다. 말년에는 우울증과 피해망상으로 인해 고통을 받았으며 오랫동안 지켜 왔던 기독교 신앙을 저버렸다고도 전한다. 그는 1910년 10월 30일 사망했다. 좋은 일을 하기 위해 만났지만 안타깝게도 사이가 틀어져 이후 평생 원수로 지냈던 귀스타브 모이니에가 사망한 지 2개월 뒤였다. 그는 취리히의 묘지에 묻혔고, 그의 생일인 5월 8일은 오늘날 국제적십자운동의 기념일이다. 그가 여생을 보낸 양로원은 앙리 뒤낭 박물관이 되었고, 국제적십자운동 소속 회원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에게는 2년에 한 번씩 앙리 뒤낭 메달이 수여된다.
오늘날의 국제적십자운동
적십자의 상징인 ‘흰 바탕에 붉은 십자 표시’는 뒤낭을 비롯한 발기인들의 모국인 스위스의 국기(붉은 바탕에 흰 십자 상징)의 역상으로 1863년에 처음 생겼다. 하지만 기독교의 상징과 똑같다는 이유로 터키를 비롯한 이슬람 국가에서는 초창기부터 반발이 나왔다. 1877~78년의 오스만-러시아 전쟁 중에 국제적십자위원회 소속의 자원봉사자들은 십자가 대신 이슬람 국가의 상징인 초승달(신월) 상징을 사용했고, 이는 1929년에 공식 인정되어 현재 33개 이슬람 국가가 사용하고 있다. 그 외에도 이란에서 제안한 ‘붉은 사자와 태양’, 이스라엘에서 제안한 ‘붉은 다윗의 별’ 등의 상징이 있지만 공식 인정되지는 못했고, 2005년에 이스라엘의 구호단체인 마겐 다비드 아돔과의 공조를 위해 마름모꼴의 ‘적수정’ 상징이 공식 인정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