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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노음산(노악산)
2024년 12월 22일(일요일)
산행코스 : 남장사 석장승(10:15) - 옥녀봉 - 복장사갈림길(11:30) - 노음산(11:50) - 관음선원(12:55) - 남장사(13:20) - 주차장(13:25)
산행거리 : 8.2km
노음산 들머리
남장사 석장승(경상북도 민속자료 제33호)
석장승
노음산(露陰山) 중턱 남장사 입구의 불교사찰과 민속신앙이 접목된 석장승입니다. 장승에 팔 아래에 새겨진 '하원당장군 (下元唐將軍) 임진구월입(壬辰七月立)'이라는 명문(銘文)으로 보아 조선 순조 32년(1832) 혹은 고종 29년(1892)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전체높이 186cm의 자연 돌을 그대로 살려 조각했느네, 머리 한쪽이 조금 부셔졌습니다. 큰머리 , 좁은어깨, 그리고 왼쪽에서 오른쪽 허리로 내린 팔 하나가 새겨져 있습니다. 한쪽으로 치우친 비뚤어진 얼굴에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 왕방울 눈과 작은 귀, 커다란 주먹코, 야무지게 다문 입술에 송곳니가 아래로 뻗어있습니다.
고려 초에 강감찬(姜邯贊) 장군이 상주(尙州) 목사로 있을 때 비둘기 한 쌍을 구워먹은 부부에게 살생을 하지 말라는 불가(佛家)의 전설이 얽혀 있는, 단독으로 세워진 돌장승입니다. 자연 그대로의 화강석을 최대한 살려서 좌우 대칭을 잃은 거대한 돌의 윗 부분에 마을 미륵 형태의 얼굴을 조각하였습니다.
안부에 도착했습니다.
정상 2.2km, 석장승 0.9km, 남장사 1.6km
석장승 1.0km, 노음산 2.1km
저멀리 국수봉이
가야할 노음산
나무사이로 국사봉이
능암리 갈림길
능암리 2.6km, 석장승. 19km, 남장사 2.6km, 정상 1.2km
가야할 노음산이 나무사이로 보입니다.
복장사 갈림길
석장승 2.6km, 정상 0.5km, 북장사 1.8km
복장사로 가는 길은 등산객이 별로 안다녀서 길이 희미합니다.
조망바위에서 바라본 구병산 방향 파노라마
좌측 백화산, 팔음산
당겨본 백화산 한성봉
구병산, 속리산과 중앙 채릉산, 복장사가 보입니다.
당겨본 구병산
당겨본 청화산, 남산
암릉구간이 보입니다.
암릉구간으로 올라갑니다.
암릉구간에서 바라본 갑장산 방향 파노라마
좌측 학가산, 비봉산, 건지봉, 병풍산, 식산, 백원산
중앙에 천봉산
당겨본 학가산
당겨본 비봉산, 건지봉
좌측 식산, 백원산, 갑장산, 수선산, 기양산
백원산 뒤로 청화산, 냉산이
당겨본 청화산, 냉산과 그 앞으로 백원산
맨뒤 능선 좌측 갑장산, 수선산, 기양산, 백운산, 내남산, 웅시산, 국수봉
그 앞으로 좌측 국수봉, 서산, 백화산
당겨본 갑장산
당겨본 수선산, 기양산과 그 뒤로 금오산
좌측 서산, 국수봉, 황악산, 눌의산, 백화산, 만경봉, 주행봉, 백화산한성봉, 팔음산
저멀리 황악산과 그 앞 좌측 국수봉, 눌의산, 지장산
암릉구간에서 바라본 속리산 방향 파노라마
좌측 백학산, 만경봉, 주행봉, 백화산한성봉, 천대산, 팔음산, 원통산
당겨본 맨뒤로 지장산, 백학산
당겨본 주행봉, 백화산 한성봉
좌측 팔음산, 천택산, 구병산, 봉황산, 대궐터산, 청계산두루봉, 속리산 천왕봉, 문장대과 중앙 채릉산
당겨본 팔음산과 중간 우측 무지개산
좌측 구병산, 봉황산, 대궐터산, 청계산두루봉, 속리산천왕봉, 문장대, 도장산, 청화산, 남산, 조항산
당겨본 구병산, 봉황산
당겨본 청계산 두루봉, 속리산 천왕봉, 비로봉, 문장대
당겨본 청화산, 남산, 조항산
청화산, 남산 조항산, 대야산, 둔덕산, 희양산
당겨본 청화산, 남산, 조항산, 대야산, 둔덕산, 장성봉, 악휘봉, 마분봉과
둔덕산 앞으로 소파우봉, 성주봉
당겨본 구왕봉, 희양산, 뇌정산, 작약산, 백화산
가야할 노음산
노음산 정상이 바로 눈앞에
노음산 정상
남장사 2.3km, 석장승 3.0km
남장사 2.3km, 석장승 3.0km
천봉산과 그 뒤로 안동 학가산
뒤돌아본 노음산
팔각정
팔각정 앞 조망바위에서 바라본 조망
좌측 병풍산, 식산, 갑아산, 수선산, 기양산
남장사 갈림길
정상 1.0km, 남장사 1.8km, 중궁암 0.1km
뒤돌아본 노음산
남장사 1.7km, 중궁암 0.1km, 정상 1.1km
관음선원 해탈문
말사인 남장사(南長寺)의 부속 암자입니다.
통일신라 말기에 진감(眞鑑)이 창건하였고, 그 뒤 중건 및 중수를 거듭하다가, 1668년(현종 9) 의익(義益)이 중창하였으며, 1752년(영조 28) 환응(喚應)이 조실(祖室)을 중건하였습니다.
1797년(정조 21) 보인(寶印)이 관음전을 중건하였고, 1802년 청파(靑坡)가 조실을 중건하였으며, 1878년(고종 15) 치능(致能)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법당인 관음전을 비롯하여 2층의 누각과 승방·요사채 등이 있습니다.
이 중 관음전 내에는 관세음보살좌상과 목각탱화·청동반자(靑銅飯子) 등이 있습니다.
관세음보살은 토불이며, 목각탱화는 본래 천주산 상련암(想蓮庵)에 봉안되어 있었던 것을 1819년에 옮겨온 것으로서 제작연대는 1694년(숙종 20)입니다.
가로 162cm, 세로195cm 두께13cm로써 1987년 7월 16일 보물 제923호 지정되었습니다.
해탈문(解脫門) 편액
요사채
정면이 4칸, 측면 2칸인 겹처마 맞배지붕 2층 누각형태의 이 당우는 요사채입니다.
환성영각의 위층에는 여러 조사들의 진영과 현판으로 만들어진 영음산 남장사 관음전중창기 상주노산관음전불상급후불목탱개금기 등이 있다고 합니다.
환성영각(喚醒影閣) 편액
관음전
중앙 법단에는 15세기에 조성되고 2020년 6월 보물 제2067호로 지정된 관음선원 관음보살좌상과, 1987년 7월 보물 제923호로 지정된 조선시대의 관음선원 목각아미타여래설법탱이 있습니다
관음전(觀音殿) 편액
남장사 관음선원 목조관음보살좌상(尙州 南長寺 觀音禪院 木造觀音菩薩坐像) (보물 제2067호)
남장사의 목조관음보살좌상은 조성발원문이나 처음 제작과 관련된 기록이 부족해 정확한 제작 시기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귀족풍의 단정한 얼굴, 멋스럽게 주름잡은 옷깃, 무릎 앞으로 펼친 부채꼴 주름, 화려한 영락(瓔珞)장식 등이 조선 전기인 15세기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조선 초기에 제작된 불상의 현존 사례가 극히 드문 현실을 감안하면 남장사 목조관음보살좌상은 조선 초기 불교 조각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기준작으로 역사적, 예술적, 학술적 가치가 높습니다.
2012년 개금중수 과정에서 발견된 1701년 중수관음존상복장발원문' 과 1841년에 작성된 '불상 및 후불탱개금기' 를 통해 불상의 제작 또는 중수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았습니다.
남장사 관음선원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尙州 南長寺 觀音禪院 木刻阿彌陀如來說法像) (보물 제923호)
보물 제923호로 지정된 남장사 관음선원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尙州 南長寺 觀音禪院 木刻阿彌陀如來說法像)
은 관음전 관음보살상의 후불탱으로 봉안된 작품입니다.
흔히 목각탱이라 부르며 이는 불화와 불상의 성격을 동시에 가지는 특수성 때문입니다.
관련 기록으로는 「尙州露岳山觀音殿佛像及後佛木幀改金記(상주노악산관음전불상급후불목정개금기)」가 있고,
『天柱山北長寺事蹟記(천주산북장사사적기)』에는 더욱 확실한 내용이 남아 있습니다.
즉, “木幀後佛甲戌年造成化主僧熙善也(목정후불갑술년조성화주승희선야)”라 하여 목탱후불이라는 명칭과 함께 갑술년인 1694년 화주 희선에 의해 조성되었음이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1819년 천주산 상련암에서 남장사로 이안되었음도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최근의 조사에서 목각탱 뒷면에서 ‘康熙三十四年乙亥(강희삼십사년을해)’라는 묵서가 발견되어
1695년이라는 정확한 제작 연대가 다시 밝혀졌습니다.
관음선원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은 높이 162㎝, 너비 195㎝로 중심부를 이루는 5매의 판목과 상, 하부 각 1매를 합친 총 7매의 나무판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관음전의 이 목각탱은 전술한 6대 목각탱 중 가장 단순한 배열을 하고 있습니다.
중심의 3판목에는 불, 보살을 2단으로 배치하고 좌우 판목에는 나한상과 사천왕을 배치하였습니다.
본존불은 아미타여래이며 그 옆으로 4대 보살, 아난존자와 가섭존자, 사천왕을 조각하였습니다.
윗부분에는 아미타여래의 두광에서 뻗어 나가는 서광과 그 양 끝에 타방불을 3구씩 조각하였고, 아랫부분에는 커다란 연잎과 연꽃, 연봉우리를 좌우로 넓게 배치하여 아미타가 서방극락정토에서 설법하는 모습을 형상화하였습니다.
아미타상은 배 모양의 광배를 지니고 연화좌 위에 앉아 있으며 머리와 육계의 불분명한 경계, 방형의 큰 얼굴, 변형통견식 대의, 간결한 옷 주름 등 전형적인 17세기 불상의 특징을 보입니다. 좌우에 배치된 네 구의 보살들은 얼굴이나 옷 표현 등이 본존상과 유사하며, 2단으로 배치되었습니다.
앞줄의 두 보살상은 각각 연꽃 가지 위에 놓인 정병, 연꽃 가지를 받쳐 들고 있으며, 그 뒤의 두 보살상은 모두 합장을 하고 있습니다.
(대승사의 목각탱과 같은 구도라면 합장한 두 보살은 제석천과 대범천으로 추측됩니다.)
노인의 모습인 가섭존자와 젊은 스님의 아난존자 역시 합장인을 취하였는데 늙고 젊음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었습니다.
목각의 네 가장자리에는 부릅뜬 눈에 갑옷으로 무장한 사천왕을 배치하였습니다.
본존 오른쪽의 위, 아래 2단으로 용과 여의주를 든 남방 증장천왕 보당과 탑을 든 서방 광목천, 그 왼쪽에는 장검을 든 동방 지국천왕과 비파를 든 북방 다문천왕이 조각되었습니다.
관음선원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은 아미타극락회상도를 조각으로 옮긴 후불 목각탱으로, 조선 시대에 7점 정도만 남아 있는 희소한 가치를 지닌 작품입니다.
목각탱의 내력을 담은 기록을 통해 1694년에 조성되었고 상을 이안(移安)한 내용 등이 담겨 있는 점에서 더욱 귀중한 자료라 할 수 있습니다.
남장사 후문입니다. 편액은 금난방(禁亂榜)으로 되어 있습니다.
주차장이 바로 이 아래에 있어 후문으로 들어가면 바로 본전인 보광사 극락보전과 종각 일주문까지 역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남장사 보광전(普光殿)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다포식 팔작지붕입니다.
보광전은 처음에는 무량전으로 불렀으며 내부에 아미타불을 안치했던 곳입니다.
그러나 극락보전이 본전으로 되면서 무량전은 보광전으로 편액이 바뀌었습니다.
법당 안에는 철불비로자나불(보물 제990호)이 모셔져 있고 후불탱으로 아미타목각탱(보물 제992호)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보광전(普光殿) 편액
보광전의 우측 측면 모습입니다.
상주 남장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尙州 南長寺 鐵造毘盧遮那佛坐像) (보물 제990호)
상주 남장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비로자나불이 앉아있는 모습을 무쇠로 만들고 그 위에 금물을 입힌 불상입니다.
이 불상은 통통하고 작은 얼굴에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온화하고 단아한 인상을 줍니다. 치마는 배꼽 위에서 매듭을 지었고 겉옷은 굵직한 주름을 그리며 무릎을 덮고 있습니다.
상주 남장사 보광전에 봉안된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불상 뒤 원광인 광배(光背)가 없고 불신(佛身)만 남아 있습니다.
크기는 불상 높이 133㎝, 머리 높이 34㎝, 어깨 폭 58㎝, 무릎 폭 103㎝입니다.
온화한 얼굴에 길쭉한 신체 비례, 주름 간 간격이 넓지만 부드러운 옷 주름, 둥근 조형감 등이 특징입니다.
엄숙한 얼굴 표정, 치마의 매듭과 왼쪽 어깨에 드리운 옷자락 등의 기법으로 미루어 보아 조선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철불이지만 단아하고 부드러운 생김새와 표현법, 그리고 겉면에 분할선 없이 제작된 기술력 등이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됩니다.
조선 광해군 9년1617 이준이 편찬한 '상산지' 사찰조에 '천년이나 된 철불이 있어 병란이나 심한 가뭄이 닥칠 때는 스스로 땀을 흘리는 영험함이 있다'고 전합니다
상주 남장사 보광전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 (尙州 南長寺 普光殿 木刻阿彌陀如來說法像) (보물 제922호)
높이 236㎝, 두께 10∼12㎝, 너비 226㎝이며, 불화와 불상의 성격을 동시에 가지는 특수성 때문에 목각탱이라고도 불립니다.
아미타를 주제로 한 목각탱이 걸린 보광전은 원래 무량전으로 아미타를 봉안한 도량이었으나, 현재는 편액명이나 주존불의 도상에서 화엄사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남장사보광전중건여단청기(南長寺普光殿重建與丹靑記)」를 통해 1891년 중건 불사가 있었음이 밝혀졌습니다. 이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의 조성과 관련된 기록은 없지만, 1675년 조성된 문경 대승사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과 구도와 형식, 조각 기법 등이 유사하여 제작 시기는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엽으로 추정됩니다.
유리벽 안에 모셔진 보광전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은 중심부를 이루는 7매의 장방형 판목과 상부 1매를 합친 총 8매의 나무판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중앙에 본존불인 아미타여래를 배치하고, 상하 4단으로 나뉘어 아래에서부터 사천왕상, 8대 보살과 범천·제석천, 10대 제자가 좌우 대칭 구조를 이루며 나란히 있습니다.
가장 윗부분은 본존불의 머리에서 뻗쳐나가는 서운과 천개가 장식되었고 그 아래로 조각된 존상들 사이에는 연봉우리, 연잎과 넝쿨들로 구획하며 빈 곳을 메웠는데 연화세계에서 아미타가 설법하는 모습을 극대화한 것입니다.
주불 뒤에 있는 후불탱화를 그림으로 그리지 않고 나무로 조각한 것이 특색입니다. 극락보전에는 중앙의 아미타불(阿彌陀佛)과 좌우에 관세음(觀世音), 대세지(大勢地) 두 보살을 모셨습니다. 또한 응향각 안에는 역대 조사(祖師)의 진영(眞影)을 안치하였는데 열두 폭을 주위에 걸어 놓았습니다. 이것은 불화 형식을 갖춘 것으로 명주에 채색하여 그렸는데 탱화와 공통점이 많습니다.
보광전 천정의 2마리 용
향노전
차향실(茶香室) 편액
교남강당
남장사 보광전 옆으로는 교남강당이라 쓰여진 전각이 보입니다.
정면 8칸, 측면 7칸의 팔작지붕이며, 총 68평의 건물입니다. 본래의 기능은 강원이었으나 현재는 강당과 요사의 복합기능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교남강당은 옛적 청천료(淸泉寮)로 불리었으며, 승려만이 아니라 상산 선비들의 문회, 시회의 공간이 되어 많은 시문을 탄생시킨 건물입니다.
교남(嶠南)이란 문경새재의 남쪽, 즉 영남(嶺南)을 의미하는 단어이며, 교남강당이라는 표현에는 영남 최고의 강원이라는 자부심이 들어 있습니다.이 표현 하나로도 과거 남장사의 규모나 영향력을 가늠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교남강당(嶠南講堂) 편액
교남강당 편액의 관지에는 말미에 눌사(訥史)라고 글씨를 쓴 사람의 아호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조선 후기 문신으로서 승정원동부승지를 지낸 눌사 이우회(訥史 李友會)가 쓴 글씨같습니다.
금륜전, 산신각
금륜전과 산신각의 2개의 편액이 붙어 있지만 법당은 일반가람의 삼성각과 같이 중앙에 치성과여래, 좌우에 독성과 산신을 봉안했습니다.
금륜전(金輪殿) 편액
진영각(眞影閣)
진영각에는 중앙의 달마대사 진영과 창건주 진감국사와 고려때 각원대사의 진영이 있고, 좌측에는 임진왜란 후 이곳에 한동안 와 있으면 승병을 모았던 사명대사의 진영등 14점이 걸려있습니다.
원래 이 진영각에는 32분 스님들의 진영이 걸려 있었는데, 1991년 23점이 도난을 당했고, 지금은 모사품을 포함 14점이 남아있습니다.
남장사 맷돌
고려 중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상부재는 멸실된 것으로 전해왔는데, 2019년에 발견하여 현 위치에 상부재와 하부재를 연결하였습니다. 상하부재가 모두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고 하여 더 가치가 높습니다.
영산전
영산전(靈山殿) 편액
영산전 나한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좌우에 갈라보살(羯羅菩薩)과 미륵보살을 협시(脇侍)로 봉안하였습니다.
설법전
건물아래에 만들어진 대웅전 앞마당으로 나아가는 누하진입(樓下進入)을 통해 남장사의 본전인 보광전으로 향합니다.
설법전(說法殿) 편액
범종루에서 보면 2층이고, 보광전에서 보면 1층이다. 계단을 오르면 보광전이 나타납니다.
남장사 극락보전(極樂寶殿)
극락보전(極樂寶殿)은 남장사의 중심 전각입니다. 앞면과 옆면 각 3칸씩으로 된 맞배지붕의 건물입니다.
극락보전의 초창은 1203년(고려 신종 6)이지만, 조선시대인 1635년(인조 13)에 소실되었습니다. 그뒤 1776년(영조 52)과 1856년(철종 7)에 중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극락보전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노전(爐殿)인 향로전이 있는데 극락보전 주변 전각을 관리하는 요사로 사용되었습니다.
극락보전 내부에는 건칠 아미타삼존불좌상이 모셔져 있으며, 1741년(영조 17)에 조성한 미타회탱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그 밖에 오른쪽에 삼장탱(三藏幀)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극락보전(極樂寶殿) 편액
상주 남장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尙州 南長寺 木造阿彌陀如來三尊坐像) (보물 제1635호)
상주 남장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은 아미타여래삼존불이 앉아 있는 모습을 나무로 조각하고 금물을 입힌 불상으로 청허 등 승려들이 1645년에 조성하였습니다.
극락세계의 주인공인 아미타불을 본존불로 가운데에 두고, 자비를 상징하는 관세음보살을 왼쪽 협시보살로, 지혜를 상징하는 대세지보살을 오른쪽 협시보살로 배치했다. 아미타여래의 양감이 강조된 방형의 큼직한 얼굴, 당당한 어깨 등으로 보아 청허의 작품과 양식적으로 흡사합니다.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높이가 139㎝이며, 목조관음보살좌상은 높이가 128㎝이며, 목조 대세지보살 좌상은 높이가 131㎝입니다.
이 삼존좌상은 조성 원문을 통하여 1645년에 청허(淸虗) 등 6명의 화승이 조성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불상 속에서 발견된 조성 원문에 따르면, 순치 2년(조선 인조 23, 1645)에 많은 사부대중이 발원에 참여하고, 지희(智熙) 스님의 증명 아래 청허(淸虛), 영색(英賾), 현욱(玄旭), 천휘(天輝), 나흠(懶欽), 법찬(法燦) 등 화승들에 의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불상 조성을 주도했던 조각승 청허는 조선 시대 17세기의 대표적인 조각승인 청헌(淸憲)과 같은 인물로 추정됩니다.
특히, 이 불상은 17세기 전반기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으며 조성연대가 분명하여 조선후기 조각사 연구의 기준자료가 되는 귀중한 작품으로 평가됩니다.
아미타불(阿彌陀佛)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통견식의 착의 형식에 결가부좌하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신체 비례가 적절하며, 양손을 무릎 위에 올려 손가락을 구부린 설법인을 결하고 있습니다.
불상의 정수리에는 원통형 정상계주가 있고, 나발 사이에는 반달형 중앙계주가 있습니다.
얼굴은 비교적 넓은 방형으로서 뚜렷한 인중과 작은 입술에서 근엄한 모습이 나타납니다.
넓은 이마와 부풀어 오른 눈꺼풀, 살짝 뜬 눈, 돌출한 코 등 17세기 불상의 특징을 골고루 갖추고 있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상체는 다부진 모습으로, 가슴이 편평하며 아랫배가 살짝 나와 있습니다.
결가부좌한 하체는 무릎이 낮고 넓어서 안정감을 줍니다.
법의는 통견 형식으로 착용하였다. 내의는 가슴까지 올려 수평을 이루며, 왼편의 대의 자락은 발가락을 덮고 있으며, 오른편의 것은 부채살 모양의 주름으로 형식화되었습니다.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목조 대세지보살 좌상은 상호와 신체 비례, 수인, 착의법 등 형식적인 특징은 목조아미타불좌상과 동일하다.
그러나 목조관음보살좌상은 수인과 신체 비례, 상호 등이 아미타불상, 대세지보살상과 같지만, 착의법에서 차이가 납니다. 비록 관음보살좌상이 통견형식으로 법의를 입었지만, 세부적으로는 여러 곳에서 차이를 보여준다. 이는 여러 명의 조각승이 일을 분담하여 여래삼존상을 조성하였기 때문입니다.
관음보살(觀音菩薩)
두 보살좌상의 세부 모습을 살펴보면, 정수리에 틀어 올린 보개는 비교적 높은 편이며, 보발은 어깨에 닿아서 세 개의 원형을 이룬 후 다시 세 가닥으로 흘러내립니다.
또한, 꽃문양의 귀걸이와 팔찌를 착용하였고, 목걸이는 하지 않았습니다.
남장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은 청허가 조성한 불상 가운데 삼존의 형식을 완전히 갖추고 있다는 점 외에도
상호의 표현과 안정된 신체 비례 등 원숙한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주목됩니다.
즉 조선 시대 17세기의 조각승 청허의 역작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극락보전 서수상으로 극락보전의 내부 대들보와 천정 아래에 장식되어 상서로운 동물상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좌측에는 청사자
우측에는 흰코끼리가 서까래를 떠 받치고 있습니다.
삼장탱(三藏幀)
삼장탱은 하늘, 땅, 지하 삼계(三界)를 제도하는 천장보살(天藏菩薩), 지지보살(地持菩薩),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묘사한 불화(佛畫)입니다. 이는 석가모니부처님을 법신, 보신, 화신의 삼신불 또는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불로 확대시켜 나간 것처럼 지옥계의 주존(主尊)인 지장보살을 확대시킨 것입니다.
우리나라 삼장탱의 도상(圖像)은 조선 전기에서 나타나는데, 조선 시대 불화에 영향을 끼쳤던 명(明)나라의 수륙재(水陸齋) 그림에도 삼장보살이 등장하고는 있습니다.
이로 보아 삼장탱은 망자(亡者)의 혼(魂)을 위로하고 천도하는 사상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앙의 천장보살은 천부중(天府衆)을 거느리고 진주보살(珍珠菩薩)과 대진주보살(大珍珠菩薩)이 협시로 등장하며, 좌측의 지지보살은 지부중(地府衆)을 권속(眷屬)으로 삼고 용수보살(龍樹菩薩)과 다라니보살(陀羅尼菩薩)을 협시로 대동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측의 지장보살은 왼손에 석장을 짚고, 오른손에는 보주(寶珠)를 쥐고 있습니다.
권속으로는 명부중(冥府衆)을 대동하고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협시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삼장탱은 우리나라에서만 발견되는 특이한 탱화로 현재 전통적인 우리나라 사원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는 탱화이지만 다른 탱화와는 달리 신앙의 표상으로, 혹은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의미는 이미 잃은 지 오래입니다.
3층석탑
1978년 7월 영산전의 후불탱화에서 부처님상과 16나한산을 조성할 때, 석가모니부처님의 진신사리 4과와 칠보류들을 봉안했다는 기록과 함께 부처님 진신사리 4고와 7보가 담겨 있는 지신사리함이 발견되어 이 사리를 봉안하기 위하여 1979년 극락보전 앞 마당에 9.8m의 석탑을 비롯한 석등 2기를 조성한 것입니다.
범종루
범종루 누각에는 범종과 법고, 목어와 운판 등 불전사물(佛殿四物)이 봉안되어 있으며, 안쪽의 양쪽 벽면에는 문수동자와 보현동자의 그림이 그려져 있어서 범종루의 전면은 사천왕문, 후면은 금강문(해탈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범종루(梵鐘樓) 편액
수령 400년 느티나무 보호수와 도안교(到岸橋)
남장사 일주문(南長寺一柱門)
남장사 일주문 (경상북도 유형문화제 제468호)
일주문은 일자형 정면 1칸(4m), 측면 1칸(2.6m)형태의 3평의 건축물로 이 건물의 특색은 양쪽 둥구리 기둥 앞뒤로 방주를 붙여 세우고 다시 또 하나씩 활주(活柱)를 고여서 중앙을 받치고 있는데 그 주두(柱頭)가 용(龍)모양을 하고 부리 부리한 두 눈이나 코, 입, 구 등이 보통 석조조각에서와 같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등 그 규모가 웅장하고 세련미가 뛰어나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주문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일주문 천정 쌍학
일주문 편액
노악산남장사(露嶽山南長寺)편액은 정면 추녀 밑에는 광서8년(光緖八年) (1882)에 해강(海岡) 김규진(金奎鎭 1864~1933)의 글씨로 쓰여져 있습니다.
김규진은 평안남도 중화(中和)출신으로 농가에서 태어나 외숙으로부터 서화의 기초와 한문을 배웠고, 18세 때인 1885년(고종 22년) 청나라로 유학을 가서 8년간 중국의 서화를 공부한 후 1894년에 귀국하였습니다,
광서 8년은 1882년이니 유학을 떠나기 전에 쓴 글씨가 분명합니다.
광서(光緖)는 청나라의 제11대 황제였던 덕종이 재위기간 동안 사용한 연호로 1875년부터 1908년까지 사용되었습니다.
조선에선 갑오개혁 이전인 1894년(광서 20년)까지 사용하였습니다.
계해癸亥(1923)...
편액의 노악산 상주3악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서쪽의 노악인 노음산, 연악인 갑장산, 그리고 북쪽의 석악인 천봉산을 가리킵니다.
남장사 주차장
첫댓글 노음산 산행 수고하셨구요
주변산군들 자세한 설명과 멋진사진 잘보고갑니다
노음산 의 풍광 담아왔구만요
수고하셨습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올 한 해 덕분에 즐거운 산행했습니다.
멋진 영상 즐감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