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익는 마을의 책 이야기
이순신 지음, 노승석 역주 『난중일기』
제 15회 인문학 축제
11월 2일 책익는 마을에서 보령 출신 한학자 노승석박사를 모시고 이순신의『난중일기』을 가지고 행사를 가졌다. 노박사는 초서전문가로 20년째 연구를 하고 있다고 한다. 2007년 이씨 문중에서 보관하고 있던 일기 32일치를 발견하고 이를 번역했다. 초서로 쓴 일기는 가차법(음이 같으면 편한대로 씀,예: ‘日’-> ‘一’)을 쓰고, 급히 草草(그야말로 대강대강 씀)하게, 혹은 나중에 기억을 더듬어 쓰는 경우도 있고, 인물과 지명이 착오로 쓰여진 경우도 있다한다. 노박사는 이를 일일이 전거를 찾아 수정하고 교정하였다고 한다. 그는 난중일기가 2013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명랑, 한산, 노량으로 이어진 이순신 영화에도 자문을 맡았다고 한다. 난중일기 번역은 1955년 북한에서 홍기문이 하였고, 남한에서는 이은상이 했고, 노박사가 2021년 이 책을 냈다.
일기는 총 일곱 권으로 나뉘어 있었고, 1795년 정종때 유득공과 유희림이 일기를 묶어 이를 난중일기라 명명하였다 한다. 1592년 1.1부터 1598년 11.17일까지 쓰여진 이 전쟁비망록의 내용은 이렇다. 관아의 업무, 작전 및 해전 상황, 공사간 인사(등장인물이 3천명이나 된다), 사회비판과 장졸간의 문제, 산문. 한시. 고전인용, 인간의 도리문제, 국난극복의 강한염원등. 노박사는 난중일기에 바탕이 된 정신으로 ‘ 우국충정, 모친사랑, 애민정신, 솔선수범, 준법정신, 배려심, 공동체의식’을 언급했다.
인조때 조정은 이순신에게 충무라는 시호를 내렸다. 시호는 봉건시대 나름의 규칙을 가지고 내리는 바, 조선에는 김시민등 총 9명 의 충무공이 있었다고 한다. 충(忠)은 ‘몸이 위태로워도 임금을 받들다’는 의미이고, 무(武)는 ‘능히 난리를 평정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여수에는 이순신을 기리는 사당 충민사가 있는데, 1600년 이항복의 상소로 이루어진바 충무공시호 전에 붙여진 이름이다. 일본은 대동아전쟁 시절 이순신의 전략과 전술을 공부했다고 한다. 해군에서는 10년 동안 총 세 차례에 걸쳐 거북선 원형을 복원하려 했으나 다 실패했다고 한다. 다만, 이덕홍이라는 사람이 그의 저서 간재집에서 거북선의 설계도를 그려놔 이와 비슷했을거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거북선은 고려시대에도 있었던 것으로 이순신이 전쟁에 대비하여 만든 것이다. 거북선은 돌격선으로 이른바 초전 박살, 기선 제압용으로 그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
장군의 지도력
일지를 읽기 위해서는 임진난의 전개과정을 이해하고 조선과 왜, 명나라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알아야 한다. 또한 조선군의 전략과 왜군의 대응을 보고, 조선 수군의 활동을 봐야 한다. 그리고 앞날을 모르는 심정으로 장군의 일기를 마치 내가 쓰는 것처럼 읽으면 몰입감이 높아진다. 1592년 전쟁이 반발하고 일기는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을 단문으로 꾹꾹 쓰여져 있다. 일기는 5월 4일부터 28일까지 빠져 있다. 이 시기는 5월 6일 출정이 이뤄지고 옥포해전등 연이은 해전이 일어난 때다. 나는 그 빈 일지에서 공간을 느꼈고, 엄중한 무거움이 다가왔다. 한동안 책장을 넘기지 못 하고 깊은 감정의 울림을 억누르지 못했다. 조선 수군이 느꼈을 불안과 공포, 그리고 분노와 분투, 그리고 그 함성을 말이다.
난 의아했다. 옥포와 사천, 한산의 수군이나, 칠천량 전투의 수군이나, 배설이 숨겨둔 배 12척 앞에 모여든 120여명의 수군이 다 똑 같은 수군이 아니던가. 사령관 한 사람이 달랐다고 어떻게 극과 극을 보일 수 있을까? 노박사는 답한다. 그럼에도 결국 리더의 지도력이 관건이라고. 원균이 엉뚱한 행동을 하고 수하 장군이 불만을 가질 때, 이 전쟁은 질 것이라는 불안감이 진영에 퍼졌다고 한다. 이순신이 삼도수군 통제사가 되고 재정비에 나설 때 왜군은 두려움에 기가 꺽였고, 조선 수군은 힘을 낼 수 있었다고 한다. 장군은 가토 기요마사를 잡아 오라는 조정의 명령을 어기고 투옥이 되었을 때, 감옥지기에게 그랬다고 한다. “死生 存令, 死當死”. 그 심정으로 부하들에게 “生則死, 死則生”을 외쳤을 것이다.
이순신과 원균
두 사람의 관계를 보는 방정식은 참으로 다양하며 미묘하다. 일기에서는 원균을 나쁘게 묘사하는 장면이 너무나 많다. 내가 확인한 바로도 34곳이나 된다. 조정에서도 두 사람의 관계가 너무 안 좋으니 원균을 육군으로 보내기도 했다. 원균의 입장에도 할 말은 있는 것 같다. 폭장이긴 하지만 그는 왜군에게 비겁함을 보이지는 않았다. 원균은 이순신의 출정 전 20여일 동안 왜선의 서진을 막았고, 옥포해전에서는 선봉에서 싸웠다. 당시 옥포가 경상우수영 관할이여서 원균이 자신의 공을 내세웠으나 이순신은 패장은 자격이 없다 했다. 원균은 나중에 이순신이 홀로 장계를 올린 것에 분노했고, 이순신이 원균의 18세 아들 원사웅의 전공을 12세 소실 아들의 허위 공적이였다고 모함하기도 했다. 또한 이순신의 파직과 투옥에 원균의 모함은 없었다. 어찌됐든 역사의 실체는 아무도 모른다. 결국 원균은 패장이였고 이순신은 승장으로 구국의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난중일기의 행간을 읽으면서 이순신도 고독하고, 분노하고, 질투하고, 의심하고, 염려하며 달밤을 뜬 눈으로 지샌 인간이기도 했음을 알 수 있었다.
책익는 마을 원 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