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잎 도서관 외 1편
안이숲
드디어 가을 도서관이 오픈했습니다
햇살 아래 밑줄 그으며 읽었던 초록 여름을
차곡차곡 책꽂이에 꽃아 두었어요
비바람 치던 말씀의 흔적이 찬바람을 따라 가벼워지고
사르락
사르락
바닥에 고서들이 쌓이고 있습니다
포개놓은 문장을 소화시키면
샛노란 명언들이 태어납니다
선진리성 가는 길
용남 고등학교 담장 옆에 우뚝 서 있는 네 그루 은행나무 도서관에는
아침마다 방송을 하는 동네 이장님의 안내 말씀과
서쪽으로 건너가는 바다 내음의 유서가 낱장으로 익어가고 있어요
도서관 아래를 지나가는 중졸의 목수 아저씨도
쓰윽싸악 집 한 채 지을 수 있는 전문서적 한 권쯤은
손끝에 쨍쨍하게 쟁여 놓고 살지요
이 동네 저 동네 완행버스보다 빨리 옮겨 다니던
췌장암 걸려 노랗게 물든 그의 가을도
곧 떨어져 내릴 거 같습니다만, 바람보다 빨리 흔들리지는 마세요
가을은 따뜻한 양보입니다
오늘을 접고
봄꿈을 펴면
엔딩 자막이 흘러내리고 도서관은 내년에 문을 엽니다
자두의 귀엣말에 심은
식탁 접시 위에 동그마니 앉아있는 자두 한 알
탯줄이 잘린 꼭지 안쪽으로 하얗게 붙어 있는 귀지들
매달려 있으면서 깊은 이야기를 담았구나
들어주기도 하고
다 털어내지 못해 열린 혹덩어리
여자에게 유독 좋다는 저 붉은 이야기집은 산달을 채웠구나
페인트 가게를 하는 혜정이는
걸을 때마다 두 손이 춤을 추는 2급 지체장애아를 낳은 아픔을
자두의 귀에 풀어내곤 했지
붉어지지 않은 하얀 단물을 뚝뚝 흘리며
귀가 더 깊어지는 자두를 보았지
그러므로 자두는 여자의 한숨으로 단맛을 키우는 집
자두는 별의 이야기를 차곡차곡 쟁여 두었지
붉은 안쪽이 점점 별빛으로 변했지
어쩌다 자두 귀퉁이에 각혈을 한 자국이 생겼어
자두는 옆집 아이보다 심한 장애를 앓았지
아이의 몸에 화성이 들어와 집을 지었기 때문
우리는 한쪽을 도려낸 자두를 입에 넣고 우적우적 씹어 먹었지
자두꽃이 피는 먼 우주가 이빨 사이로 흘러내렸지
안이숲
경남 산청 출생. 경상국립대학교 대학원 졸업.
2021 계간 시사사 신인상 수상.
제11회 천강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