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숙 (3): 2일장(2日葬)
외삼촌은 외할아버지와는 다른 삶을 산 것이다. 젊었을 때 바깥으로 나돌았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나가서 한 일은 완전히 다르지 않은가? 외삼촌한테는 타고난 것도 있었겠지만, 보고 배운 것도 있었을 것이다. 반면교사도 교사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다음 대(代)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외삼촌은 (딸 둘과 더불어) 아들 하나를 두었다고 말한 바 있다. 역시 아들이 귀한 집이다. 이 아이는 할아버지의 삶과 아버지의 삶을 지켜보고 자랐으니 나름대로 결심한 것이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큰 뜻을 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아이가 결심하고 희망한 삶이 어떤 것이었건, 그것은 실현되지 못했으며, 이 아이는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는커녕 집안의 대가 끊어지게 하였다. 이 아이는 20년 동안 병석에 있다가 며칠 전에 세상을 떠났다. 지난 토요일, 12인승 승합차를 타고 광비로 내려갈 때 우리는 이 아이의 영정과 유골을 모시고 있었다.
학준이는 혹시 기억할지 모르겠는데, 20년 전에 건국대학교 앞의 노래방에서 화재가 나서 세 명이 죽는 사고가 발생했다. 당시 건대 학생이던 이 아이는 그 노래방에서 아르바이트생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다행이 목숨은 건졌지만 유독가스로 폐와 기관지를 심하게 다쳤다. 이 사고가 났을 때에는, 외삼촌은 이미 돌아가신 뒤였고, 이 아이의 큰 누나도 세상을 떠난 뒤였다. 아이의 어머니(내 외숙모)는 당시 광비에서 생활하고 계셨는데, 사고가 난 바로 그 날 공교롭게 상경하여 전농동 이모네 집에 머물면서 아들을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아들은 어머니의 말을 듣지 않고 노래방에 일하러 갔던 것이다. 지난 토요일, 외숙모와 우리 일행은, 수십번, 수백번도 더 반복했을 이 이야기를 또 꺼내면서 안타까와했다.
사고가 났을 때 이 아이는 스물다섯이었다. 군대까지 갔다 온 복학생이었다. 이제 막 날아오르려고 할 때가 아니었는가? 이 아이가 20년 동안 받은 고통과 울분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을 것이다. 향년 45세. 금요일날 장례식장에서 열린 조촐한 예배에서 -- 아이의 누나가 성내동의 ‘오륜교회’를 다닌다 -- 목사는 ‘욥기’의 한 귀절을 읽었다.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사고 이후, 집안 전체가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외숙모도 다시 서울로 이사하여 아들을 간호하였다. 하나 남은 누나도 동생의 간호에 매달렸다. 사고가 났을 때 그 누나는 28세였다. 그 나이때부터 누나는 자기의 삶을 완전히 포기하고 -- 결혼만이 아니라 일도 포기하고 -- 동생의 수발을 들었다. 20년을 그렇게 지냈으면서도, 금요일 날의 입관식에서는 동생을 끌어안고 울부짖으면서 “미안해, 미안해” 자꾸 자꾸 미안하다고 말했다. 아이의 누나는 지금 마흔 여덟이다. 인생의 황금기가 그렇게 가버린 것이다. 아이의 누나는 이런 말을 들어본 것일까? “삶은, 사는 것보다 꿈꾸는 것이 낫다. 삶을 사는 것도, 사실은, 꿈꾸는 것이지만, 그것보다는 노골적으로 꿈꾸는 것이 낫다.”
외삼촌이 돌아가실 때쯤 되어서는 재산이라곤 거의 남아있지 않았지만, 그 이후 20년이라는 긴 기간을 그렇게 보냈으니, 그 집의 경제적 형편은 말하지 않아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세 식구가 삶을 지탱해 온 것이 용할 정도다. 기초생활수급자로 지정을 받은 것이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서면의 지주 방(房)면장댁이 기초생활수급자가 되다니...... 아이의 누나와 그 어머니는 조문객 한 명 없이 장례를 치르게 되지 않을까 하고 걱정하였다고 한다. 다행히 조문객이 몇 사람 찾아와 장례식장의 접객실을 채워주었지만, 한 귀퉁이에 앉아 빈한하고 적막한 접객실의 모습을 보니, 사진 속에서 본 60년 전의 화려한 잔칫날 풍경이 떠올라, 나는 슬픔을 감출 수 없었다. 그 다음 날 광비에서도 그러하였다. 대가족이 살던, 그야말로 고래등 같은 큰 기와집은 헐리고 터만 남아, 보는 사람의 마음을 슬프게 하였다.
외숙모는, 당신이 아들의 유골을 들고 고향을 찾는다는 사실을 마을 사람들이 알기를 원하지 않으셨다. 우리는 조용히 들어갔다가 조용히 나왔다. 아이의 유골을 외할아버지(아이의 할아버지) 산소 근처에 묻어줄 계획이었지만, 산소를 찾아내지 못하였다. 20년 동안이나 찾아본 적이 없는 산소를 어떻게 찾아낸다는 말인가? 외삼촌(아이의 아버지)의 산소를 찾아보았지만, 같은 이유로, 그 산소도 찾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할 수 없이 외할아버지 산소로 추정되는 곳 인근의 좋은 자리를 잡아 유골을 안장하였다.
정말로 좋은 자리였다. 죽은 아이의 동네 친구 한 사람이 찾아와 도와주었기 때문에 그런 좋은 곳을 잡을 수 있었다. 불그레하고 미끈한 금강송이 쭉쭉 뻗어있는 조그마한 동산이었는데, 송이 군락지라고 한다. 일종의 수목장이었다. 나무 밑을 한 자(尺) 정도 파고 목함채로 유골을 묻었다. 25세에 삶이 정지되고 20년 동안 죽음이 유예되었던 한 사람이 그렇게 묻혔다. 주변에 밑둥부터 두 줄기로 갈라진 이상하게 생긴 가는 소나무가 한 그루 있어서, 우리는, 그 나무를 잘 보아두면 다음번에 찾기 쉬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이의 어머니와 아이의 누나는 이곳을 다시 찾을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유골 묻은 곳에 아무런 표시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랬으면서도 사람들은 두 줄기 소나무를 기억해 두고 주변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두었다. 정말로 멋진 경관이었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도, 동생을 잃은 누나도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것 같았다. 좋은 자리에, 정성을 다해 유골을 모신 것이 가족들에게 제법 위안이 되었던 모양이다.
이제 점심을 먹고 상경하면 된다. 누군가가 점심은 분천역에 가서 먹자고 제안하였다. 백두대간협곡열차인가, 뭔가 하는 것 탓에 역전이 대단한 관광지가 되어 식당도 많이 들어섰다는 것이다. 분천역은 정말로 그럴 듯한 관광지가 되어있었다. 토요일날이라서 더욱 그러하였겠지만 관광객도 많았다. 우리도 그들 틈에 끼여, 관광객인 척하면서 역주변을 구경하였고, 유쾌한 잡담을 나누면서 식사를 하였다. 메밀전병과 곤드레나물밥, 제육볶음이 나왔다. 우리는 막걸리도 한 잔 하였고 식후에는 아메리카노까지 한 잔씩 마셨다. (계속)
첫댓글 아하...나의 "사학의 명문 건국대" 후배이자 영태교수의 외사촌 동생이 죽어 수목장을 하고 왔구나..앞에 연재된 외삼촌과 외할아버지의 행적을 더듬은 것에 대한 감이 어렴풋하게는 오는데....(계속)
근데 벙거지 쓴 친구가 자네야? 아님 잠바 입은 ??....똑 닮아서 사진으로는 구분이 잘 안되네~
벙거지가 영태교수..
난 돋보기를 이용해 보걸랑~~ㅋㅋ
맞아. 그런데 그 양반하고 내가 닮았을 수도 있다는 것은 평생 처음 생각해 보는 일이로군.
3대에 걸친 삶이 담겼구나. 또 다른 대하소설 토지를 접하는 기분이다.
삶은, 사는 것보다 꿈꾸는 것이 낫다.... 외숙의 아들은 어머니와 누나 덕분에 아름다운 꿈꾸는 삶을 살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