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녀 백일
2020.4.19.
석야 신웅순
선친께선 어머니가 애기를 낳으면 금줄을 쳤다. 아들이면 숯과 빨간 고추를, 딸이면 숯과 솔가지를 왼새끼줄에 끼워 사립문 양 기둥에 매달아 놓았다. 부정 타지 말라는 표시였다.
금줄을 보며 동네 사람들이 지나면서 그랬다.
“허허, 이 집에 또 딸 났네 그려.”
아들이면 함께 축하해주고 딸이면 함께 아쉬워했다. 내 아래로 4명이 전부 딸이었다. 셋째는 마의 선 100일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다섯 번 째 아들을 낳고서야 질주가 멈췄다. 남아선호 사상 때문이었다.
나의 손녀는 ‘코로나 19’ 때 최근에 태어났다. 면역력이 전무인 아이에게 코로나 19가 스칠까 식구들은 노심초사했다. 서너달을 동영상으로만 보아야했다. 별난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다. 지금은 한 둘 밖에 애기를 낳지 않아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손녀를 안아줄 때도 마스크를 껴야 했다.
‘젖은 잘 나오느냐, 똥은 쌌느냐, 고개는 가누었느냐, 잠은 잘 잤느냐’ 등등이 요새 매일의 안부 인사이다.
백일은 집에서 조촐하게 지내기로 했다.
딸이 전화했다. 백일 기념으로 날 보고 뭣 좀 해달란다. 아이 족적에다 축하 글씨를 써달란다. 무슨 문구로 했으면 좋을까 며칠을 생각했다. 아내와 상의 끝에 ‘총명하고 건강하게 자라거라’ 로 정했다.
구성은 세상에 없는 아주 예술적인 것이어야 한다. 여기에 무슨 글씨체가 어울릴까 이런저런 글씨를 써보았다. 많은 숙고 끝에 그래도 진중한 한글 궁체 정자를 선택했다.
세로로 쓰는 한글은 생활 서예에서는 별로 선호하는 편이 아니다. 한글 궁체 쓰기는 세로가 편하지만 가로 쓰기는 여간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된다. 또 하나는 낙관이다. 낙관은 마지막 화룡점정이다. 잘못 찍으면 격이 떨어져 이도 심사숙고해야한다.
집사람은 내가 조금이라도 삐뚤게 쓰는 것도 삐뚤게 찍는 것도 허용하지 않는 성격이다. 창작은 세상에 단 하나이어야 한다. 그런 생각 때문에 나는 늘 정도에서 벗어나고 그 때문에 힘들어하기도 한다. 아내가 사실화 쪽이라면 나는 대체로 추상화 쪽이다. 나는 이 번에도 딸에게 물어 지금의 작품으로 함께 합의를 이끌어냈다.
창작의 어려움은 어떤 때는 상상을 초월하기도 한다. 한글은 단순해서 잘 못 쓰면 유치한 글씨가 되어 위대한 한글의 품격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신중을 기하지 않고 정성을 들이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이다.
이번 손녀를 위한 작품은 구성과 글씨는 내가 했지만 판정은 아내와 딸이 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어미의 합작품인 셈이다.
총명하고 건강하게 자라거라
손녀 백일 기념 작품
손녀에 대한 우리 가족의 기원문이다. 손녀의 방에다 걸어야할 일생 손녀가 기억해야할 선물이다. 먼 훗날 이 글과 글씨를 보며 손녀는 무슨 생각을 하며 자랄까. 그것은 순전 손녀의 몫이다.
최고보다는 최선을 다하는 사람으로 자랐으면 좋겠다. 최선은 사람의 몫이지만 낙점은 하늘의 몫이다.
어제는 어미가 보내준 동영상을 보았다.
애기를 엎어놓았다. 고개를 들고 앞으로 나아가려고 끙끙대며 발버둥을 치는 모습이었다. 몇 번을 보고 또 보았다. 아이야 들릴 리 만무이겠지만 나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서 응원을 했다. 그러면서 ‘왜 아이를 힘들게 엎어놓느냐’, ‘때가 되면 다 되는 것인데’ 나는 어미에게 손녀가 안쓰러워 뭐라 했다.
선친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홍역을 치뤄야 내 아들이다.” 옛날엔 홍역을 앓으면서 많은 아이들이 죽었지만 우리는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그래서 늦게 호적을 올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날이 다시는 오지 않을 줄 알았더니 어린 손녀 앞에 또 다른 홍역, 코로나 19가 나타났다. 지금이야 의술이 발달해 옛날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할아버지의 마음은 산너머 산이다.
그래, 높은 산이 있어 달은 뜨고, 먼 들이 있어 달이 지는 것이 아닌가.
석야 신웅순의 서재, 매월헌
첫댓글 정말 귀하디 귀한 선물이겠습니다.
외손녀를 사랑하시는 극진하신 마음이 가득담겨 있으니요.
지혜롭고 총명하고 예쁘고 건강하게 잘 자라니길 기원드립니다. ^^*
예원.축하 댓글 고마워요.손녀 참 예쁘죠.감사해요.
멋집니다
하나밖에 없는 백일족적
그렇네요. 단 하나밖에 없는 족적.감사해요.
이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일까요?
앙징스런 족적...
너무 귀여울 것 같습니다.
선생님 늦게나마 축하드립니다.
소중한 곳에 행복한 발걸음
흔적을 남기는 건강한 아이로
자라길 기도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건강하게 자랐으면 좋겠습니다.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