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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요한계시록 22:10-15
10 또 내게 말하되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11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
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14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15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
계 22:10-15 / 그리고 천사는 내게 다음과 같이 지시하였습니다. '그가 기록한 것을 봉인하지 말라. 그 일이 실현될 때가 가까워졌다. 11) 그때가 오면 악한 일을 저지르는 자는 더욱더 악한 일을 행하고 더러운 자는 더욱더 더러워질 것이다. 그러나 올바른 사람은 더욱더 올바른 행동을 하고 거룩한 자는 더욱더 거룩하게 될 것이다.' 12) 그때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속히 가겠다. 나는 너희 한 사람 한 사람이 행한 대로 갚아 주기 위하여 상을 가지고 가겠다. 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끝이다. 14) 그 도시의 성문으로 들어갈 자격과 생명나무 열매를 먹을 권리를 얻으려고 자기 예복을 깨끗이 빨아 간수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15) 성밖에는 하나님을 떠난 자와 마술사, 부도덕한 자와 살인자, 우상 숭배자와 거짓말을 밥먹듯 하고 또 거기에 귀 기울이는 모든 자들이 우글거리고 있다.
본문은 종말의 때에 하나님의 백성과 그렇지 않은 자들이 어떻게 갈라지는지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천사는 요한에게 이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이는 이 말씀이 감추어질 비밀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지금 당장 전해져야할 공개된 메시지라는 것을 뜻합니다.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10) 다니엘서에서 예언은 마지막, 곧 종말 때까지 인봉되었습니다(단 12:4). 하지만 요한계시록의 말씀은 즉시 전파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때가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이 복음은 비밀로 숨겨둘 진리가 아니라, 모든 민족과 백성에게 전해져야 할 구원의 소식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에 때가 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때를 분명하게 사는 것이 지혜요 명철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대로 하라(11) 본 절의 그대로 하라는 네 가지의 말씀은 종말이 가까울수록 사람들의 영적 상태가 더욱 고착화된다는 의미입니다. 은혜의 때가 끝나면 회개할 기회도 사라집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때를 무시하면 훗날 핑계하지도 못할 때가 올 것입니다(롬 1:20). 그러므로 오늘이 바로 회개와 결단으로 나아갈 은혜 받을 만한 때, 구원의 날입니다(고후 6:2).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주리라(12-13) 예수님은 내가 속히 오리라고 말씀하시며, 각 사람의 행위에 따라 상급이나 심판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알파와 오메가이시며, 모든 처음과 마지막, 시작과 마침을 주관하시는 분이기에, 그 심판은 완전하고 공의롭습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는 말씀 그대로입니다(잠 19:21).
성을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14-15) 생명나무에 나아가고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는 자는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를 씻음받고 거룩함을 유지하는 성도를 가리킵니다. 반면, 성 밖에 있는 자들은 개들, 점술가들, 음행하는 자들, 살인자들, 우상 숭배자들, 거짓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들로, 이는 죄 가운데 끝까지 회개하지 않은 자들을 상징합니다. 참된 믿음은 참된 행실로 증거되기 마련입니다(약 2:14, 18).
우리는 말씀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담대히 전하며, 날마다 회개로 거룩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속히 오실 예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도록, 오늘도 말씀 안에서 자신을 씻고 준비하고 있습니까?
오늘 나의 불행은 언젠가 잘못 보낸 시간의 보복이다.-나폴레온 힐. 성실함은 그 어떤 것보다도 강력한 무기입니다. 거북이의 느림을 비웃었던 토끼는 결국 거북이의 성실함에 패하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빠른 능력만 믿고 게으름을 피웠던 탓이지요. 당신은 능력만 믿고 낮잠을 자다가 패배한 토끼가 되고 싶은가요? 아니면 조금 부족하더라도 끝까지 열심히 달려 마침내 승리한 거북이가 되고 싶은가요?
호크마 주석
=====22:10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 '인봉하지 말라'는 10:4에서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고 명령한 것과 대조를 이룬다(사 8:16;단 8:26;12:4, 9). '인봉하지 말라'는 명령에 대해서 혹자는 죄인들이 더이상 구원을 얻을 길이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나(Swete) 재림의 때가 가까워 더 많은 사람들로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구원의 길을 걷게 하기 위함임을 나타낸다. 그 명령은 이 예언의 말씀을 더이상 감추지 말고 드러내라는 의미로 본서의 예언의 말씀이 교회가 알 필요가 있으며 모든 사람이 들어야 하는 것임을 암시한다(Johnson, Morris). 한편 '때가 가까우니라'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임박성을 시사하는 것으로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다. 본서의 예언의 말씀은 근본적으로 마지막 때에 이루어질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의 무리, 즉 적그리스도와의 전투를 시사함은 물론 역사의 매순간에 하나님과 사단의 영적 전투로 드러난다. 그러기에 '때가 가까우니라'는 재림의 임박성과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기대성을 암시한다.
=====22:11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 혹자는 본절이 더이상 회개의 기회가 없는 것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Charles, Swete). 그러나 17절에서 회개의 초청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본절을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부당하다(Beasley-Murray, Ladd). 본절은 마지막 때에 사람들이 자신들의 마음과 행위대로 열매를 거두게 됨을 시사한다. 그러기에 본절은 지금 이때에 회개해야 함을 강조한다(Morris, Mounce).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는 7절의 반복이다(3;11). 이와 같이 악한 자와 의로운 자를 구별하여 심판하시는 것과 연결된 재림은 사 40:10의 심판하시기 위해 오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반영한다. 이는 권능의 손을 휘둘러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권세가 재림하시는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됨을 시사한다(Beasley-Murray). 한편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목적을 가리킨다. 이처럼 행위에 근거한 판단이나 심판은 성경 전체에서 자주 나타난다(2:23;잠 22:12;렘 17:10;롬 2:6;벧전 1:17). 이것은 마지막 백보좌 심판을 묘사할 때에도 (20:13) 동일하게 사용되고 있다. 본절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의로운 자에게 주어지는 '상'(* ,미스도스)은 많은 핍박과 고통 가운데서도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충성을 다하고 믿음을 인내로 지킨 자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이다(13:10;14:12, Ladd). 의로운 자에 대한 보상은 상대적으로 악한 자에게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그를 추종하고 따른 자들에게 보상이 주어지는 즐거움을 가져다 주나 짐승과 사단을 숭배하여 하나님을 대적한 자들에게는 두려운 심판만을 가져다 준다.
=====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 이 칭호는 하나님의 칭호이나(1:8;21:6) 본절에서는 십자가의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칭호로 나타난다(1:17;2:8). 이 칭호는 그리스도께서 의로운 자에게는 상을 주시고 악한 자에게는 심판을 하시는 심판자로서의 권위와 능력의 근거를 시사한다. 본절에 나타난 세 가지 표현, 즉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 그리고 '시작과 끝'은 동일한 의미를 지닌 표현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역사의 주로서 완전한 심판자가 되심을 시사한다(1:8, 17;2:8;21:6 주석 참조).
=====22:14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 본문은 본서에 나타난 일곱 가지 복 중 마지막 복에 대한 묘사이다(7절;1;3;14:13;16:15;19:9;20:6). 두루마기를 빠는 상징은 이미 7:14에서 언급되었다. 이것은 사람들이 죄로 인하여 더럽혀진 옷을 그리스도의 피로 씻어 그리스도의 구속에 참여하는 것을 나타나낸다. 두루마기를 씻어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영생을 소유하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영광을 공유하는 것이다. 특별히 7:14에서 부정 과거 시제가 사용되어 역사적인 십자가 상의 구속 사역에 참여함을 시사한 반면 본문의 '빠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플뤼논테스'(* )는 현재 시제로 지속저인 행위를 나타낸다. 즉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목욕한 자는 발만 씻으면 된다고 말씀하신 것처럼(요 13:10) 핍박과 환난 가운데 서도 계속적으로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며 오직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만 충성을 다해야 함을 시사한다(요일 1:7, Morris, Ladd, Mounce).
이는 저희가 생명 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 본문은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두 가지 복에 대한 묘사이다. 여기서 '생명 나무'는 영생에의 참여를 나타내며 '성에 들어갈 권세'는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들만이들어갈 수 있는 새 예루살렘 성에의 참여를 가리킨다. 즉 오직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고 그에게만 충성하여 그의 고난과 죽음에 기꺼이 동참하는 자들, 즉 구속함을 받은 자들은 새 예루살렘 성에 속하여 영생을 누리게 된다.
=====22:15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 - '개들'을 제외한 나머지 다섯 부류의 사람들, 즉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자들'은 이미 21:8에서 언급된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할 자들의 명단에 있는 자들과 동일하며 더욱이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낸다'는 것은 그들이 미혹하여 속이는 자인 사단과 근본이 동일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임을 시사한다(Beasley-Murray).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들어갈 자들의 명단에 들어있지 않은 '개들'은 성경에서 더럽고 악한 자들을 가리킬 때 사용된 표현이다. 신 23:18에서는 남창을, 마 15:26에서는 이방인을, 빌 3:2, 3에서는 유대인의 율법을 강요한는 자들을 가리킬때 사용되어 이 '개들'이 하나님의 뜻과 통치하심을 거부하고 대적하는 자들을 가리킴을 시사한다. '개들'과 불못에 들어갈 다섯 부류의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피로 두루마기를 빨아 구속에 참여한 자들과는 달리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지 못하며 둘째 사망에 참여하는 자들이다(20:13-15). 한편 혹자는 본절에서 성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이미 현재에 결정된 사실로 이해한다(Caird). 그러나 이것을 현재 사실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14절에서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 미래에 그 복을 성취하는 것으로 보아 본절도 미래에 성취될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Johnson, Mounce, Ladd).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계 22장 10~16절 / 이종철목사(빛과생명의교회)
연말이면 대학교수들을 중심으로 우리 사회의 지난 한 해를 규정하는 사자성어를 발표를 합니다. 금년은 '거세개탁(擧世皆濁)'이라는 어려운 사자성어가 선택되었습니다. 그 뜻은 ‘세상이 온통 탁하다’는 뜻입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시인인 굴원의 글에서 따온 성어입니다. 한 어부가 굴원에게 물었습니다. “높은 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이 왜 여기에 와서 헤매고 있는가.” 굴원이 대답했습니다. “온 세상이 탁해도(거세개탁) 나 홀로 맑았고, 모든 사람이 취했어도 나 혼자 깨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세상에서 함께 더러워지지 않아서 시기를 받아 밀려났다는 의미입니다. 교수들은 이 사자성어를 풀이하면서 “혼탁한 대한민국 사회에서 위정자와 지식인의 자성을 요구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금년뿐만 아니라 이명박 정부 들어서 한 해를 마무리하며 선택된 단어들은 그리 밝은 의미들이 아니었습니다. 지난해에는 귀를 막고 종을 훔친다는 뜻의 엄이도종(掩耳盜鐘)이었는데 이는 나쁜 일을 하고 비난을 듣기 싫어 귀를 막지만 소용없다는 의미였습니다. 2010년에는 머리를 숨겼으나 꼬리는 드러난다는 뜻의 장두노미(藏頭露尾)였는데 이는 진실을 숨겨두려 했지만 그 실마리는 이미 만천하에 드러나 있다는 의미였습니다. 2009년에는 '일을 바르게 하지 않고 그릇된 수단을 써서 억지로 한다'는 의미의 '방기곡경'(旁岐曲逕)이었습니다.
모두가 정상적인 길에서 벗어났고, 진실을 외면하는 거짓된 삶에 대한 고발이었습니다. 정치권에 대한 비난이 담겨 있는 말들인데 우리 자신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오늘은 금년 한 해의 마지막 주에 드리는 예배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우리 삶을 되돌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을 점검하는 표준이 지나치게 손 안에 있는 성과를 기준으로 평가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 손 안에 성과가 가득하면 잘 산 것이고, 성과가 없으면 한 해를 보람 없이 보낸 것처럼 생각합니다. 우리들의 판단 기준은 그런 점에서 매우 현실적이고, 실용적입니다.
그러나 오늘 읽은 말씀이나 성경의 판단의 기준은 성과가 아니라 바름에 있습니다. 성과가 많지 않더라고 바른 길을 살았다면 잘 산 것이요, 성과가 많더라고 그것이 옳은 길에서 벗어난 것이었다면 잘 못 산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마지막 심판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14절과 15절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영광스런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자들은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입니다. 두루마기를 빤다는 것은 악과 타협하지 않고 믿음의 길, 말씀의 길이라는 성결의 삶을 살아가는 자들을 말합니다. 성 밖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 사람들은 15절에 있는 부류들입니다.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 다시 말씀드리지만 성과가 아니라 바른 삶입니다. 금년 한 해를 되돌아보면서 하나님 말씀의 관점에서 나는 어떻게 살았는지 되돌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기준은 시편 1편의 기준과 동일하다 할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손 안에 열매가 가득한 사람이 아닙니다. 악인의 꾀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판단을 따라 사는 자입니다.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하나님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자입니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고 하나님 말씀을 즐거워하며 묵상하는 자입니다. 우리 판단의 기준이 하나님 말씀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사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형통함과 풍요로움의 열매입니다. 열매는 바른 길에서 얻는 결과입니다.
이런 점에서 연말연시, 특별히 12월 31일에서 1월 1일로 넘어가는 시간은 매우 특별한 시간관념을 우리에게 줍니다. 그전에는 시간이라는 것이 마치 시계의 바늘 마냥 끊임없이 회전하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오전 12시라는 시간은 오늘 놓치면 다음 날에 다시 경험할 수 있는 시간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한 해가 넘어가는 시점이 되면 갑자기 시간이 원이 아니라 직선임을 깨닫게 됩니다. 2012년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시간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런 점에서는 모래시계가 우리 인생을 보다 진실 되게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흘러내린 시간은 돌이킬 수 없습니다. 지나간 한 해는 내가 하루하루 살아온 삶들이 만들어 놓은 작품입니다.
한 해를 정리하는 시간에 우리는 두 가지 것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는 축하입니다. 열심히 살아온 자신을 축하하는 것입니다. 결과야 어쨌든 올 한해 나름대로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축하해 주십시오. 나라는 인격과 내 인생은 조금 더 완성되었고 더 뚜렷해졌습니다.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에서 나는 한 발자국 전진한 한 해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내년도에는 더욱 힘차게 도약할 수 있기를 소망하고 결단하십시오. 매년 좋아지고 매년 더 원숙하게 완성되어 가는 자신을 생각하십시오. 인생은 쌓여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목표를 바라보며 달려가는 일만 포기하지 않는다면 결국에는 그 목표에 닮은 모습으로 완성되어 있을 것입니다.
알파와 오메가
오늘 말씀에서 고백하고 있는 예수님은 알파와 오메가의 하나님입니다. 13절입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알파와 오메가는 영어 알파벳으로 따지자면 첫 자 A와 마지막 글자 Z에 해당하는 글자입니다. 처음과 끝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마지막 종말의 하나님이십니다. 나중이라는 단어는 에스카토스 곧 종말을 뜻합니다. 시작이라는 것은 아르케 곧 태초를 말합니다. 성경에 시작을 다루는 창세기가 있고 마지막을 다루는 요한계시록이 있는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은 완성되었고 완전합니다.
초점은 오메가의 하나님입니다. 종말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우주와 우리 인생은 이 종말의 지점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 악과 악인들에게는 그 종말이 심판의 날일 것이지만 의인들에게는 종말은 완성의 날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심판의 의미가 강하지만 저는 이 오메가를 완성의 관점에서 보려 합니다. 온 우주와 우리 인생은 이 완성을 향하여 가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진화의 이론들이 가지고 있는 목적성을 성경은 분명히 제시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알파이신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우리 인생은 오메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음으로 최종 완성이 됩니다. 여기 “시작과 끝”이라고 할 때 끝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텔로스인데 이는 동시에 목적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목적지에 도달할 때 우리의 여행은 끝이 납니다. 그 목적지가 어디냐 하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 하나님을 부동의 동자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은 움직이지 않지만 모든 사람들을 자신을 향하여 움직이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또한 목적인이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사물을 움직이게 하는 힘은 바로 이 목적입니다. 목적지가 있으면 그곳을 향하게 만들고 그곳으로 모든 운동은 향하게 됩니다. 우리의 목적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 인생의 목표가 그리스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만큼 성결하고, 그리스도만큼 사랑하고, 그리스도만큼 능력 있고, 그리스도만큼 지식이 넓어지고, 그리스도만큼 자유롭고, 그리스도만큼 풍성한 생명에 이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다음과 같은 기도가 우리의 목표라 할 것입니다.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빌4:8)
알파와 오메가 되신 분이 우리의 목적을 정하셨다면 우리는 염려할 것 없습니다. 그분의 뜻과 의지가 그렇게 우리를 만드실 것입니다. 작품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위대한 작가의 머리에서는 이미 작품이 완성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돌덩이에 불과하지만 서서히 모습을 갖추어 갈 것이고 결국에는 아름다운 작품으로 빚어져 나올 것입니다. 조각가 미켈란젤로는 어느 날 아주 잘 생긴 돌 하나를 발견하고는 큰소리로 웃으면서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야, 다윗이 걸어 나온다. 다윗이 걷고 있어.” 이렇게 해서 완성된 것이 그 유명한 ‘다비드 상’입니다. 우리는 완성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메가의 하나님을 믿는다면 오메가의 관점에서 우리의 현재를 바라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스포츠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마지막 종료 휘슬이 울리기 전까지 알 수 없습니다. 마지막 역전 골이 터지면 그 경기는 한편의 드라마가 됩니다. 오히려 위기에 몰렸던 때가, 실수했던 것이, 그때는 어려웠지만 그것이 있음으로써 경기는 더 아름답게 되었습니다.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사란 것이 좀처럼 우리가 그리는 이상처럼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실망도, 좌절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메가의 하나님을 믿는다면 역사 또한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방향으로 만들어갈 것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최근 개봉된 영화중에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영화로 ≪레미제라블≫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장발장이란 제목으로 알고 있는데 원 제목은 레미제라블, 곧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프랑스 혁명기의 가난한 민중들의 삶을 그린 소설이며 가난을 극복했던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장발장이었습니다. 장발장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배고픈 어린 조카를 위해서 빵 한 조각을 훔치다 죄인이 되었고, 여러 번 탈옥을 시도하다 결국 19년을 감옥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이후 가석방되어 한 신부와의 만남을 계기로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장발장의 삶뿐만 아니라 당시의 가난한 민중들의 삶과 그들의 혁명 이야기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레미제라블의 저자인 빅톨 위고는 19세기의 프랑스 혁명기에 살았던 인물입니다. 빅톨 위고 생존 당시에도 혁명은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는 1789년 대혁명을 계기로 공화정을 세웠지만 이후 나폴레옹 황제가 등장을 했습니다. 다시 1830년에 7월 혁명을 성공했지만, 다시 왕정이 복고되었습니다. 1848년에는 2월 혁명이 성공을 했지만 나폴레옹 3세가 집권을 했습니다. 결국 1870년에서야 최종적으로 혁명에 성공하여 공화정을 세우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자유, 평등 박애를 향한 민주주의의 역사였습니다.
영화는 1830년대 어간의 왕정복고기에 실패했던 혁명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지막 엔딩은 그 혁명이 최종적으로 승리하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거대한 바리케이트를 쌓고 수많은 사람들이 민중의 노래를 부르면서 마칩니다. 절로 감격의 눈물과 박수가 나오는 장면인데 민중의 노래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민중의 노래가 들리는가, 성난 사람들의 노래가?
다시는 노예가 되지 않을 사람들의 노래라네.
심장 박동 소리가 울려 퍼져 북을 울리고
내일이 밝으면 새로운 삶이 펼쳐지리.
이런 민중들의 투쟁과 노고 끝에 얻은 것이 바로 민주주의입니다. 우리는 민주주의가 하나님 나라에 가장 가까운 체제임을 압니다. 우리는 우리 역사의 결론과 목표를 압니다. 그것은 정의와 평화와 사랑과 생명으로 가득한 하나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우리는 그 희망을 가지고 있으며 알파와 오메가되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룰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좌절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역사는 서구에 비하면 그를 길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사람들이 정의와 자유와 평등에 대한 이상보다는 빵과 안정에 대한 욕구가 더 강합니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민주주의를 훈련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희망을 갖습니다. 잠깐 좌절하거나 후퇴하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완전한 민주주의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희망입니다. 역사의 오메가에 가서야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경륜에 찬양하며 감사할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지금 과정 중에 있습니다. 아직 오메가 포인트까지 다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인생을 섣불리 단정하지 마십시오. 종료 휘슬이 울리기 전까지 게임은 알 수 없는 법입니다. 터키의 시인 나짐 히크메크가 감옥에서 썼던 다음과 같은 시를 불러보십시오.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
최고의 날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메가 포인트에 가서야 우리는 우리 인생을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뿐만 아니라 내 자신에 대해서도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아름다운 목표가 있고, 그것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속히 오리라
그러나 그 날이 무작정 늘어질 것이라고 나태하지 마십시오. 오늘 말씀에서 계속 반복해서 울리는 말씀은 주님께서 속히 오시겠다는 말씀입니다. 7절과 12절과 20절입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10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때가 가까우니라” 주님은 속히 오신다고 하면서도 2천년이 넘도록 오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오심이 지연되는 데는 다른 하나님의 뜻과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주님께서 속히 오신다고 하시며 위기를 조장하는 이유 중 하나를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생에 긴장감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단순한 협박이 아닌 이유는 주님의 재림의 날은 언제일지 알 수 없지만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날은 정말 속히 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에 대해서 좀 다급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례 요한은 우리를 향하여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다고 합니다. 이미 3년의 기간이 지났고 1년 유예된 삶을 살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현재입니다. 내년에는 좀 더 달라져야 하겠고, 좀 더 성숙해져야 하겠고, 더 열매 있는 인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잘 안 바뀝니다. 11절입니다.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라는 말씀은 그들의 행위를 방치하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도무지 바뀌지 않는 사람들의 완악함에 대한 주님의 절망적인 분노입니다. 그렇게 한 번 살아봐라 마지막 날에는 가만 두지 않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삶을 지금 바꾸어야 합니다.
최근 도서 출판계의 키워드 중 하나는 ‘힐링’입니다. 경쟁과 상처로 힘든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이 대세입니다. 그래서 위로하거나 평범한 일상사에서 행복과 쉼을 맛볼 수 있도록 돕는 책들이 많이 팔렸습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대표적이고, 요즘은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등 스님들의 책들이 많이 팔립니다.
이런 경향에 비추어보면 주님의 메시지는 매우 급한 것 같습니다. 우리를 마구 몰아쳐 갑니다. 이것은 아마도 신약성서가 교회 선교기, 이단과의 투쟁, 고난과 핍박기에 쓰여서 그런 것 같습니다. 주님은 물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하며 위로도 주십니다. 그러나 알파와 오메가의 하나님은 직선의 하나님입니다. 끊임없이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는 것이 우리 인생이고, 우리 역사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목표를 향하여 끊임없이 걸어가는 순례자요, 유목민들입니다. 쉬고 상처를 치유 받은 후에는 다시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성령의 위로로 쉼을 얻고 다시 신발끈을 매고 앞으로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늘 상급을 기억하라
계 22장 12~14절 / 스테반황목사
천국의 풍성함을 누리는 비결은 얼마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았는지와 비례합니다. 예를 들어, 음악은 귀가 막히고 음치이면 전혀 음악의 즐거움을 모릅니다. 미술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언어 같은 경우 실력이 되지 않으면 아무런 대화를 나눌 수 없기 때문에 사귀는 재미가 없습니다. 물론 통역을 사용하는 방법이 있지만, 통역이 없다면 오직 언어를 이해하는 만큼 다른 나라의 문화와 즐거움을 맛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땅에서 얼마만큼 하나님 나라 시민으로서의 실력을 쌓느냐에 따라 그 나라에 갔을 때 그 즐거움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장차 우리가 누리게 될 천국의 기쁨은 영적인 성숙도와 비례합니다. 천국의 풍성함은 무한할 것이지만 그 무한함을 받는 그릇이 그곳에 도착한 사람들마다 다 다를 것입니다. 이미 벌써 이 땅에서 천국의 기쁨과 풍성함을 누리는 정도와 차원이 많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을 깊게 해야 하며,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크게 갖고 열심히 영적인 실력을 연마하여 그리스도의 형상에 이르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가서 우리가 즐기며 누리게 될 영원한 영광을 성경은 상급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에 의해 주어집니다. 하지만, 각 성도가 그곳에서 누리게 될 영광은 각자가 이 땅에서 얼마나 제대로 경주를 달렸는지에 비례할 것입니다. 즉, 각 사람이 받을 상급은 크게 다를 것입니다.
이에 바울은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4-27).라고 말하였습니다.
즉, 상을 받기 위해 그 목표를 향해 최선을 다해 달리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썩을 상을 위해서도 사람들이 그토록 노력하고 수고하는데 너희를 기다리는 상은 영원한 상이기에 결코 그 상을 놓치지 않도록 더욱 절제하고 노력하며 분명한 목표를 갖고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나중에 상급을 놓치게 되면 그 후회는 막급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에 바울은 상급을 바라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내 몸을 쳐 복종시킨다고 말합니다. 즉, 철저한 절제의 삶을 산다고 말합니다.
이 의미를 알고 싶다면 올림픽 선수나 스포츠 선수, 또는 예술계를 떠올리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최고의 예술인이 되기 위해 어렸을 때부터 얼마나 많은 절제의 삶을 사는지 모릅니다. 올림픽 선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스포츠 선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최고의 자리에 올라 상을 받는 사람들의 특징은 한결같이 절제의 삶을 통해 집중하는 삶을 살았다는 사실입니다. 남들이 놀 때 그들은 놀지 않고 밤이나 낮이나 절제하며 한 가지 목표를 향해 훈련을 하였습니다.
저는 종종 문학 경기장으로 산책을 가는데 그곳에는 훈련 숙소가 있고 늘 코치의 지시를 받으며 훈련 받는 운동선수들이 있습니다. 몇달 몇년을 합숙 훈련하면서 집중적으로 훈련하며 노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결코 남들처럼 하고 싶은 것 다 하며 게으르게 보내는 일이 없습니다.
바울이 말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성도를 기다리는 상들이 있습니다. 그 상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 이유는 하늘 나라에서 기다리고 있는 상급의 영광은 영원토록 찬란하기 때문입니다.
부활 승천하신 영광의 주께서 친히 약속하십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그러면 어떤 상이 있습니까?
성경을 보면 면류관이라는 상이 있습니다. 먼저 만왕의 왕이시며 만유의 주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수없이 많은 면류관을 쓰고 있습니다.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그 눈은 불꽃 같고 그 머리에는 많은 관들이 있고 또 이름 쓴 것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계 19:11-13).
“그 머리에는 많은 관들이 있고 …”. 즉 예수 그리스도는 수없이 많은 면류관을 쓰고 있습니다. 이는 영원한 영광을 무한하게 얻으셨다는 뜻입니다. 이 면류관들은 주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맡기신 사역을 충성스럽게 감당하심으로 얻으신 면류관들입니다.
그런데 우리 신자들도 주께서 재림하실 때 면류관을 얻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전혀 면류관이 없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한개의 면류관을 쓸 것이며, 또 어떤 다른 사람은 많은 면류관을 쓸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주시는 면류관은 썩지 않는 면류관입니다. 즉, 그 영광이 영원합니다. 영원히 잊혀지지 않습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내는 서신을 보면 디모데에게 의의 삶을 살아 의의 면류관을 받으라고 권하는 말이 있습니다. 즉, 복음을 위해 집중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라고 권합니다. 이때 바울은 릴레이 경기를 떠올리며 말합니다. 즉, 자신이 달릴 분량을 최선을 다해 달렸으니 디모데 너도 네가 달릴 분량을 힘차게 달리라는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경주를 마치고 경기장에서 물러날 것입니다. 그러면서 확신하는 것은 자신을 위해 면류관이 준비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너 디모데도 면류관을 받기 위해 최선을 다해 달리라고 권합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베드로도 바울과 마찬가지로 영원한 상급인 면류관에 대해 언급합니다. 주께서 맡기신 양무리들을 잘 섬겨서 그들로 하여금 풍성한 삶을 살도록 하면 반드시 면류관을 받게 될 것을 말합니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벧전 5:2-4).
베드로의 말에서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은 그 당시 로마 제국에서 올림픽 선수들에게 주는 이 세상의 관과 비교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면류관의 영광은 시간이 지날수록 사라지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신 목자장이 주시는 면류관은 영원히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이라는 것입니다.
한편, 하늘의 상급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내가 필요합니다. 따라서 야고보 사도는 인내를 권면합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약 1:12)
마찬가지로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친히 그분의 위대한 설교인 산상수훈에서 하늘의 상급에 대해 언급하십니다. 즉, 복음 때문에 핍박을 받더라도 인내하고 참으면 ‘큰’ 면류관을 얻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1-12).
이로 보건대, 하늘 나라의 상에는 큰 상도 있고 작은 상도 있습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하늘의 면류관은 종종 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과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에 당하는 핍박이나 환난이 있다면 죽기까지 충성하기 바랍니다. 그러면 반드시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면류관에 대해 생각해 보았는데, 면류관의 이름도 많고 종류도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의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등입니다. 그리고 면류관의 영광도 다르다는 사실도 확인하였습니다. 즉, 믿음의 분량대로, 희생의 분량대로, 환난을 당한 분량대로 면류관의 영광이 비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는 언제나 ‘영원한 상급’에 대해 강조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주님의 가장 유명한 설교인 산상수훈을 보겠습니다. 산상수훈을 보면 상급에 대한 언급이 계속 되풀이 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미 인용한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 5:11-12)고 하셨습니다.
또한 사람에게 보이려고 의로운 척하면 상을 놓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1-6; 16-18).
그리스도 예수님의 교훈은 자명합니다.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기 위해 수고하면 이 땅에서 영광을 받을 수는 있지만 하늘 아버지의 칭찬과 상급을 놓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모든 수고는 오직 주 하나님을 의식하며 행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하늘 상급을 쌓을 수가 있습니다.
특히 헌금이나 물질적인 봉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마 6:19-20).
우리 교회가 헌금을 드릴 때 무명으로 하는 이유 역시 여러분이 하늘 상급을 받을 수 있도록 돕기 위함입니다. 여러 교회들이 헌금을 누가하며 얼마를 하는지 공개하는데 이는 바르지 못합니다. 물론 제직이나 지도자를 뽑을 때 헌금을 하지 않는 사람을 뽑을 수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물질과 신앙은 맞물려 있기 때문입니다. 주 하나님께 십일조를 포함한 헌물을 제대로 드리지 않는 자는 결코 신앙이 깊은 자가 아니며, 따라서 지도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사람들 앞에서 생색을 내려고 헌금한다면 이미 이 땅에서 상을 다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만을 의식하면서 열심히 보물을 하늘에 쌓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수고는 전부 헛되게 될 것이며 나아가 엉뚱한 도둑들의 배를 부르게 만들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디모데에게 성도들로 하여금 물질을 바르게 사용할 수 있도록 가르치라고 명합니다.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딤전 6:17-19).
이처럼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영원한 나라에 상급을 쌓기 위해 우리에게 주신 재물을 청지기로서 잘 사용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마태복음 25:14-30을 보면 예수님의 비유가 나오는데, 그 비유는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재능과 은사와 인생을 어떻게 사용하였는지 결산할 때가 오는데 그 때 그 결산에 따라 주인께서 보상하실 것을 가르쳐줍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각각 어떤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 어떤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 또 어떤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타국으로 떠납니다. 그리고 주인이 일을 마치고 돌아와 그들과 결산을 하는데,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자는 각각 수고하여 주인을 위해 이윤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종은 땅에 그 돈을 묻었다가 아무런 이윤을 남기지 못하고 그대로 한 달란트를 주인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이때 주인은 이윤을 남긴 종들에게는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고 말씀하시며 보상하십니다. 즉, 상을 베푸십니다. 그러나 주인을 위해 이윤을 남기지 못한 종에게는 “악하고 게으른 종아!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고 하십니다. 즉, 주인을 위해 아무런 유익을 남기지 못한 그 종은 주인에게 아무런 상을 받지 못할 뿐더러 심지어 바깥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 비참을 당하게 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는 이 땅에서 우리가 주인을 기억하면서 충성하고 수고한 모든 행함에 대해 주께서 친히 보상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열매가 없는 종은 그의 신앙이 거짓으로 탄로나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야고보 사도 역시 이 사실을 증언합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 2:14).
열매가 없는 믿음은 거짓 믿음이며 따라서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바로 이러한 경우가 한 달란트 받은 종의 경우입니다.
따라서 마지막 결산 때 주께서 보시는 것은 오직 우리의 행함입니다. 물론 구원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구원하는 믿음은 반드시 그 인생을 통해 행함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에 천국에 들어간 자들은 조금이라도 믿음의 행함이 있을 것이며, 따라서 매우 작은 상이라도 반드시 받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행함이 전혀 없는 자들은 한 사람도 천국에 들어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믿음이 거짓으로 판명나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이처럼 우리의 믿음이 참이라면, 반드시 주인을 위한 수고의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즉, 인생을 사는 동안 주인을 위해 이윤을 남기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윤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 확장과 영혼 구원입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것입니다. 주님으로 인한 선행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처럼 우리가 남긴 이윤에 따라 영원한 상급이 각자에게 차별적으로 주어질 것입니다. 이에 어떤 사람은 큰 상을 받아 태양처럼 영화롭게 될 것이며, 어떤 사람은 작은 상을 받아서 작은 촛불처럼 빛나게 될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고전 15:40-41).
그때 주 예수 그리스도의 결산은 그 누가보아도 완전하며 공의로울 것입니다. 이 우주 상에 그 어떤 존재도 주님의 공의로운 결산에 항의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에 모든 피조물이 다 같이 주 예수께 찬송과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기 바랍니다. 나는 과연 나의 창조주시며 구속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 유익한 이윤을 남기는 신자안가? 다섯 달란트 및 두 달란트 받은 종에 해당하는가? 우리 주께서 재림하실 때 우리의 수고에 비례하는 영원한 보상을 주실 것입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 16:27)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라”(계 20:12)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상급을 잃지 않도록 상급을 쌓는 비결을 알려줍니다. 바울은 그 비결을 알려주기 위해 우리 믿음의 인생은 마치 건물을 쌓는 것으로 비유합니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고전 3:11-15)
주께서 신자의 인생을 결산하실 때 그분의 모습은 타오르는 불꽃 같습니다.
“그의 눈은 불꽃 같고”(계 1:14).
즉, 그분 앞에서는 인간의 동기가 다 드러나기 때문에 속일 수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각 사람의 공적을 불로 밝힌다는 뜻입니다.
복음과 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수고한 자들은 그 동기가 옳기 때문에 상을 받습니다. 그러나 자기 영광을 위해 종교적인 수고를 한 자들은 동기가 이미 자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상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해를 받으리니”라는 뜻입니다. 자기가 받을 수 있는 상이 코앞에 있었는데, 주님의 불꽃같은 눈 앞에서 그가 수고한 동기가 자기 영광이었던 사실이 드러나면서 상을 잃는 것입니다. 이때 아무런 할 말이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불에 타지 않고 그대로 있으면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주께서 하신 교훈에는 하늘 상급을 받게 되는 착한 일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행하는 일들이라고 합니다. 즉, 그리스도를 사랑하다보니 이기적인 동기가 사라진 가운데 자신의 선행에 대해 본인도 잘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행위들에 대해 영원한 상급을 받게 될 것이라고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5장에는 예수님의 양과 염소의 비유가 있습니다. 그 비유는 이 사실을 알려줍니다.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니라”(마 25:37-40).
즉, 이 말씀은 우리 주 예수님을 사랑하며 그분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자신도 모르게 복음 때문에 행한 모든 작은 일들까지 영원한 상급을 받는 근거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신자들에게 간절하게 권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골 3:23-24)
우리가 말씀 가운데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무의식적으로 기도한 작은 일들까지 주께서 기억하시고 상을 베푸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히브리서 역시 영원한 상급을 바라보도록 믿음을 권합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 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이르시되 내가 또 한 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이 또 한 번이라 하심은 진동하지 아니하는 것을 영존하게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드신 것들이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히 12:1-2, 26-29).
우리의 인생은 하늘의 상급을 바라보는 경주입니다. 그 경주을 끝까지 완주하고 큰 상을 받으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절대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분을 경주의 목표로 정확하게 삼을 때에 우리는 큰 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바라보는데 가장 큰 방해는 세상에 대한 관심들과 얽매이기 쉬운 죄악들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향한 욕심을 버리고 죄를 멀리해야 그리스도 예수님을 바라보며 힘차게 경주할 수 있습니다. 이때 경주하면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세상에 속한 영원하지 않은 것들은 다 불타서 사라진다는 사실입니다. 오직 영원한 것들만이 새하늘과 새땅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을 붙들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7-58)
그렇다면 영원한 것들이 무엇입니까? 바로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하였으니, 우리 평생에 사랑을 위해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최고의 상급을 받는 비결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아가페 사랑입니다. 즉,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우리가 이 땅에서 행하려면 다른 길이 없습니다. 내가 죽고 그리스도를 높이는 아름다운 동기로 행하여야 합니다.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내 자존심을 버리고 그 영혼에게 맞추어 주는 행위입니다. 원수마저도 미워하지 않고 그 영혼이 주께로 돌아오기를 기도하는 행위가 사랑입니다.
이 땅에서 사랑을 행하는데 가장 큰 방해는 이기심입니다. 자기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부패한 동기를 십자가에 못박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나타난 사랑을 알아 우리도 그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사랑할 때, 그것이 바로 우리가 영원한 상급을 얻는 비결입니다. 따라서 그 사랑은 언제나 복음 및 영생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천국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마 13:44-46).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위한 수고는 사랑의 수고가 되는 것이며 이로써 주님의 기쁨이 되고 자신도 알지 못했던 영광의 상급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 힘써 기도하기 바랍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교회와 영혼들을 위해 기도함이 얼마나 귀한 믿음의 수고인지요? 또한 더욱 희생하며 봉사하며 수고하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심은 그대로 결산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열심이 재물도 하늘에 쌓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썩어져 냄새가 나서 많은 영혼들을 파괴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착한 일들에 힘쓰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 모든 믿음의 행위로 인하여 우리의 짧은 인생을 가장 보람되고 가치있게 보내어 영원한 상급을 놓치지 않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천국에서 온 포인트 적립금
계 22장 12~16절 / 이서영목사(제자들교회)
세상이 참으로 많이 변했습니다. 사람들의 손에 핸드폰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새로운 열풍이 또 하나 불고 있습니다. 그것은 포인트를 적립해주는 적립카드입니다.
이 카드는 비행기나 기차를 타면 적립되고, 마트나 인터넷 등에서 쇼핑하면 10원이든 100원이든 포인트가 차곡차곡 적립됩니다. 이렇게 적립된 포인트 금액은 현금처럼 사용할 수 있습니다. 때론 상품권으로 받기도 합니다.
이 적립금을 사용하면 기분이 참 좋습니다. 그런데 이 적립금을 사용할 때 마치 공짜 같은 생각이 들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평소에 물건을 사고 시설물을 이용했기 때문에 포인트가 차곡차곡 적립된 것입니다.
천국의 삶도 이와 같습니다. 성경에 따라 살면 그때마다 해당되는 포인트가 천국에 차곡차곡 적립됩니다. 적립금이 차면 주님께서 그 포인트대로 축복을 내려주십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우리의 행위로는 한 사람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수난 당하셔서 흘리신 보혈의 공로로만 가능합니다. 그러나 천국의 풍성한 삶을 누리는 것은 행위를 요구합니다. 천국의 상급은 믿고 행한 대로 얻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 11:12). ‘침노’라는 말은 힘이나 폭력을 사용해서 밀고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폭도들에게 습격을 당하고 탈취를 당하고 빼앗기는 모습을 말해줍니다.
이처럼 천국은 지금까지 거룩한 침입을 당하고 있습니다. 무차별적으로 공격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것을 좋게 여기시고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복음을 통해 천국이 침노당하고 순종을 통해 천국이 침노당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예수님은 탈취 당하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가져가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천국은 빈둥거리는 자의 것이 아니라 분투하는 자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천국의 풍성함은 이렇게 힘을 다해 밀고 들어가는 사람이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모세는 기도하고 여호수아는 나가서 전쟁했습니다. 모세가 기도만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기도를 하고 여호수아는 나가서 열심히 아말렉을 무찔렀습니다. 그래서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처럼 천국의 풍성함은 가만히 있는 사람에게 오지 않습니다. 나가서 맹활약한 사람에게 옵니다. 기도하면서 힘을 다해 쳐들어갈 때 천국의 풍성한 삶이 찾아옵니다. 천국의 풍성함이 저절로 찾아오는 것이라면 예수님께서 굳이 침노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이처럼 천국의 풍성함은 침노하는 사람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국이 가져다주는 온갖 풍성한 삶을 얻기 위해서 천국으로 밀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침노할까요? 예수님께서 방법을 일러주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천국에 들어가서 빼앗아 올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할 때 어린아이와 같은 자세로 행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 하시고”(마 19:14). 이렇게 어린아이처럼 시키는 대로 잘 따라하는 사람, 고분고분한 사람, 잘 받아들이는 사람이 천국에 잘 침노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와 같기를 바랍니다.
이제 어린아이와 같은 자세가 되었다면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잘 듣고 그대로 따라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천국을 잘 침노하려면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강한 것을 결박하는 것입니다. 결박한 후에 쳐들어가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장군을 쓰러뜨리면 전쟁을 쉽게 이길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모릅니다.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셔서 천국의 풍성함을 주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제발 이 좋은 것을 가져가라고 하십니다. 오죽하면 강도짓을 예화로 들어서라도 가르쳐 주려고 하셨겠습니까?
마태복음 12장 29절에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어디든 쳐들어가 강탈하려면 먼저 강한 자를 묶어야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진짜 강도짓을 해서 강탈하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강도의 집을 강탈하려면 먼저 그 강도를 제압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강도가 들면 우리를 어떻게 합니까? 강도가 들어와서 사는 게 불쌍해서 돈을 주고 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을 보면,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아멘.
예수님은 생명인 천국을 주시고 더 풍성한 천국의 삶까지 주십니다. 그런데 강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도둑질하고 죽이고 빼앗고 멸망시킵니다. 그러므로 강도가 들면 안 됩니다. 물리쳐야 합니다.
이 강도는 일차적으로 악한 영들을 말합니다. 이것이 들어오면 사람도 가정도 교회도 파괴시킵니다. 이차적으로는 우리 마음속에 불법으로 점령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마음에 들어와 있는 불신과 불순종, 부정적인 것, 불건전하고 불경건한 것, 불결한 것 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죽이고 멸망시키는 이러한 강도를 먼저 결박해서 나를 잘 되게 하고, 가정을 잘 되게 하고, 나라를 잘 되게 하고, 교회를 잘 되게 하고, 하나님 나라를 잘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강도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6장 9절~10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이런 강도짓은 천국에 침노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강하게 막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위는 천국의 풍성함을 누리지 못하도록 훼방하는 강도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좋지 않은 악한 영들과 옳지 않은 행실들을 꽁꽁 묶어 결박하고 물리쳐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잘 결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천국 포인트를 잘 적립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적립을 아주 자연스럽게 잘 할 수 있다면 예수님께서 굳이 강한 자를 결박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것과 반대 방향으로 가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힘을 다해 필사적으로 결박하고 물리치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천국의 풍성함이 좋아도 쳐들어가서 얻지 못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림의 떡일 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를 진실로 사랑하시는 예수님께서 제발 천국에 쳐들어와서 온갖 보화들을 가져가서 풍성하게 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마음과 우리 영혼과 우리의 풍성함을 훔쳐가는 강도들을 먼저 결박하길 바랍니다. 그냥두면 방해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악한 영들과 부정적이고 불신앙적이고 불순종적이고 불건전한 것들을 결박시키고 멀리 물리치시길 바랍니다.
이제 우리가 이렇게 먼저 강도를 결박하였다면 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천국에 차곡차곡 적립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천국을 침노하여 천국의 풍성함을 얻고 풍성하게 누리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주일성수를 이사야 58장 13절 말씀대로 잘 지키는 사람입니다.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이렇게 주일을 사사롭게 사용하지 않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주일로 지킨 사람은 천국에서 쌓은 포인트 적립금대로 풍성한 삶을 살게 됩니다. 58장 14절입니다. “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아멘.
주일 성수 한 가지만 잘 해도 이렇게 엄청난 복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먼저 주님 안에서 즐거움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사는 게 신이 나고 즐겁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주일 성수를 잘하고 있는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제대로 지키면 주 안에서 즐겁다고 했기에 즐겁게 됩니다.
또한 주일 성수를 잘 하면 높은 곳으로 자꾸 올라갑니다. 지금 무언가 내려가고 있다면 주일성수를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주일성수 제대로 하면 이처럼 땅에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게 됩니다. 하는 일도 잘 되지만 신분도 가문도 점점 높이 올라갑니다.
그리고 주일 성수 잘하면 야곱의 기업으로 양육을 받습니다. 기업은 상속을 말합니다. 야곱은 거부였습니다. 좋은 신앙이 있었습니다. 열두 족장의 아버지였습니다. 우리가 주일 성수 잘하면 재산만 상속받는 것이 아니라 귀한 신앙도 물려받고 좋은 가풍까지도 물려받습니다.
우리가 이처럼 주일성수 한 가지라도 제대로 하면 즐겁게 살고 신분이 올라가고 야곱의 기업을 상속 받습니다. 이 모든 것은 평소에 쌓은 천국 포인트에 의해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일성수 더 잘 해서 이 귀한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시길 바랍니다.
이 외에도 우리가 조금만 신경 써도 적립할 것은 매우 많습니다. 우리가 조금만 더 부지런하면 더 귀한 것을 더 많이 얼마든지 쌓을 수 있습니다.
하나만 더 예로 들어볼까요? 마태복음 25장 31절~46절을 보면 최후 심판의 장면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비유가 아니라 마지막 때에 일어나는 실제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의 보좌에 앉아서 모든 민족을 심판하십니다. 그 때 양과 같이 잘 순종한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은 내가 주릴 때 먹을 것을 주었다. 목마를 때 마시게 했다. 외국인과 나그네 되었을 때 대접했다. 헐벗었을 때 옷을 입혀주었다. 병들었을 때 돌보아주었다. 옥에 갇혔을 때 와보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창세로부터 예비된 나라를 상속 받아라”
이럴 때 사람들은 말합니다. “언제 우리가 예수님께 그렇게 대접하고 돌보았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한 번도 직접 뵙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때 말씀하십니다.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아멘.
오늘 본문 1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행한 대로 갚아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에 합당하게 줄 상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상이 분명히 있음을 믿고 소망을 가지고 적립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적립한 대로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거듭 거듭 강조하셨습니다. 그만큼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 27절.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마태복음 18장 23절.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아멘.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우리가 적립한 것을 반드시 결산하십니다.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에서도 이와 같은 말씀을 많이 당부하셨습니다.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주리라”(계 2:23).
그러므로 우리는 행한 대로 거두게 되기 때문에 돌이켜 좋은 것을 적립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점을 매우 강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하신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는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17절을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가 “나는 부자니까 부요해서 부족한 것이 없다”라고 해도 예수님께서 “그렇지 않다”고 했습니다. 알고 보면 천국 포인트 적립금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 3:19)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그동안 우리가 천국에 쌓은 것이 얼마가 되는지 바라봅시다. 천국에서 온 포인트 적립금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봅시다.
우리가 천국에서 온 포인트 적립금이 얼마인지 볼 수 없다고 해서 적립이 안 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눈에 안 보여도 천국 포인트는 계속 적립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통해서 포인트가 적립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은혜 받고 “아멘” 으로 받아들이며, 돌이키고, 물리치고, 성경말씀을 따르기로 결단하는 것을 통해서 적립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앞으로 가서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고, 구제하고, 선행을 베풀고, 주일 성수하고, 교회봉사하고 헌신할 때 우리의 적립금이 그만큼 차곡차곡 더 많이 쌓일 것입니다.
이러한 아름다운 적립을 통해 주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상급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적립한 것을 하나도 잃지 않고 되돌려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립시다. 또한 받은 상급을 풍성하게 누릴뿐만 아니라 다함께 풍성하게 나누시길 간절히 기원드립니다.
예수님은 시작과 끝
계 22장 13절 / 장경준목사
본문에서 예수님은 모든 일의 알파와 오메가 즉 시작과 끝이 되신다고 했습니다. 시작과 끝이 된다는 말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사람들은 모든 것 속에 시작과 끝을 둡니다. 시간과 공간과 일에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1) 시간의 시작과 끝을 두고 삽니다. 하루에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한 주간에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한달에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일년에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2) 사람들은 공간적인 시작과 끝 안에 삽니다. 작은 방에도 한쪽 끝이 있고 다른 쪽이 있습니다. 작은 운동장도 시작하는 곳이 있고 끝나는 곳이 있습니다. 높고 낮은 모든 산이 시작하는 곳이 있고 끝나는 곳이 있습니다. 모든 좁고 넓은 땅에 시작하는 곳이 있고 끝나는 곳이 있습니다. 3) 모든 일에도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연필 한 개를 깍아도 깍기 시작하는 때가 있고 다 깍은 때가 있습니다. 작은 종이비행기 하나를 날려도 날기 시작하는 때가 있고 날기를 마치고 땅에 내리는 끝이 있습니다. 풀잎 하나도 생명이 심어질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습니다. 인간 개인도 모든 만물도 그 생명에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른 시각에서 생각하면 사람들이 구분하는 시작이 결코 시작이 아닙니다. 또한 끝이 끝이 아닙니다. 시작이 끝이 되고 끝이 다시 시작일 수 있습니다. 엄밀히 말해 시작은 다른 끝을 향한 과정이 될 수 있고, 끝은 다른 시작을 향한 또 하나의 과정이 될 수 있습니다. 시작과 끝은 서로가 서로를 향한 변화의 같은 순간일 뿐입니다. 사실 시작과 끝 그 중간을 이루는 모든 과정이 전체가 하나의 시작이며 곧 끝입니다. 모든 시작은 끝이요, 모든 끝은 시작으로, 모든 과정은 매 순간 마다 시작이며 끝이기도 합니다. 시작과 끝은 곧 전부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보편적 시작과 끝의 개념 속에는 그 일반 개념을 뛰어넘는 영원성이 내재 되어 있습니다. 이 의미를 깨닫는 사람은 시작을 끝과 같이, 끝을 시작과 같이, 삶의 모든 순간 순간을 시작과 끝으로, 모든 작은 것을 모든 것으로 여기며, 모든 순간을 영원의 삶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시작과 끝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질 때에 예수님이 자신을 알파와 오메가라고 말한 깊은 뜻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은 시작과 끝이 되신다고 했습니다. 시공의 구분성 있는 피조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 나타나시는 예수님은 시작으로 나타나고 끝으로 나타나 지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생으로서 시작이시며, 영생으로서 끝이십니다. 각기 시작과 끝에 나타나는 예수님은 영생이신 동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시작과 끝 사이의 모든 과정 가운데 동일한 영생으로 존재하고 관계하고 일하십니다. 예수님이 알파와 오메가라고 말씀하신 의미는 영생이신 하나님이 사람의 모든 것 가운데, 동일하게, 전부로서, 함께 한다는 의미의 말씀입니다.
이런 의미를 우리의 지난 일년 동안의 삶과 연과 시켜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보낸 2003년의 시작부터 이 시간까지의 모든 것이 예수님의 것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이루어진 모든 것이 예수님께 받은 은혜임을 깨닫게 되고 큰 감사를 돌리게 됩니다.
1. 하나님은 예정하신 뜻을 갖고 우리의 모든 일이 당신의 뜻을 이루는 방편 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의롭고 은혜로운(시145:17)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한 목적을 갖고(창 45:5-1) 만물(느9:6), 세상(사50:2-3)과 자연(창8:22),그리고 세계사(행17:26-27)와, 국가의 존폐(욥12:23), 인간의 삶(시75:4-7)을 사소한 것까지도(마10:29-30) 지배하고 계십니다.
엡 1:5을 보면 “그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행 4:28)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했습니다. 엡 1:11을 보면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했습니다.
모세의 삶은 하나님이 섭리대로 인도함을 받은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모세는 민족주의를 품은 모세는 결국 동족을 괴롭히는 애굽 사람을 살해하고 광야로 도주하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죽음을 피하여 미디안으로 도주하여 광야 생활 40년을 했습니다. 모세가 80세가 되던 때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광야에 있는 모세를 불러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게 했습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길을 인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80- 120세 까지의 광야사역을 위해 40-80세 까지의 광야 생활을 채험케 하신 것입니다. 모세의 삶은 하나님의 뜻을 이르는 방편이었습니다.
마르틴 루터다. 루터는 종교개혁의 바람이 거세게 불 때 그는 "... 나는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나의 앞길이지만 나는 그 길을 모른다. 다만 나는 하나님을 믿고 살아갈 뿐이다. 나에 대한 모든 일은 하나님의 섭리 중에 맡기고 이루어지기를 원하고 산다“고 고백했습니다.
지난 일년을 돌아 봅니다. 우리에게 이루어진 모든 일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함께 했다고 믿음을 가지십시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대상29:11,12;잠3:6),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억(시37:1-40;139:10)하며, 겸손하게(욥1:21;시119:75), 기뻐함(시107:42)으로 나갑시다. 옳다고 생각하고 시작한 일이지만 이상하게도 길이 막히고 어려움이 올 때, 낙심하거나 계속고집을 부리는 대신에 하나님이 새롭게 열고 나를 인도하시는구나 하는 생각을 갖고 위로 받고 용기 얻고 새로운 길을 시작합니다.
제가 즐겨 부르는 찬송 중에 하나가 434장 입니다.“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그의 사랑 어찌 큰지 말로 할 수 없도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하리라”
2. 하나님은 당신의 공급으로 우리의 모든 일이 이루어지게 했습니다.
골 2:19을 봅니다.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했습니다. 성도를 향한 모든 하나님의 섭리는 하나님의 공급하는 것으로 이루어 집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진리입니다.
1)공급하시는 섭리:
광야의 이스라엘에게(신2:7):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하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고 네가 이 큰 광야에 두루 행함을 알고 네 하나님 여호와가 이 사십 년 동안을 너와 함께 하였으므로 네게 부족함이 없었느니라 하셨다 하라 하시기로
광야의 엘리야에게(왕상19:5-8):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여호와의 사자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선지자의 아내에게(왕하4:1-6): 선지자의 생도의 아내 중에 한 여인이 엘리사에게 부르짖어 가로되 당신의 종 나의 남편이 이미 죽었는데 당신의 종이 여호와를 경외한 줄은 당신이 아시는 바니이다 이제 채주가 이르러 나의 두 아이를 취하여 그 종을 삼고자 하나이다 엘리사가 저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 내게 고하라 저가 가로되 계집종의 집에 한 병 기름 외에는 아무것도 없나이다 가로되 너는 밖에 나가서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라 빈 그릇을 빌되 조금 빌지 말고 너는 네 두 아들과 함께 들어가서 문을 닫고 그 모든 그릇에 기름을 부어서 차는 대로 옮겨 놓으라 여인이 물러가서 그 두 아들과 함께 문을 닫은 후에 저희는 그릇을 그에게로 가져오고 그는 부었더니 그릇에 다 찬지라 여인이 아들에게 이르되 또 그릇을 내게로 가져오라 아들이 가로되 다른 그릇이 없나이다 하니 기름이 곧 그쳤더라
기근시의 사마리아에게(왕하7:7-8): 황혼에 일어나서 도망하되 그 장막과 말과 나귀를 버리고 진을 그대로 두고 목숨을 위하여 도망하였음이라 그 문둥이들이 진 가에 이르자 한 장막에 들어가서 먹고 마시고 거기서 은과 금과 의복을 가지고 가서 감추고 다시 와서 다른 장막에 들어가서 거기서도 가지고 가서 감추니라
주를 따르는 자들에게(마14:19-2120):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은 사람은 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지난 일년을 돌이켜 봅니다. 하나님의 공급하심이 시시 때때로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심으로 살았습니다.
3.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일이 당신께 영광이 되게 하셨습니다.
벧전 4:11을 보면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했습니다. 성도의 모든 삶은 그 행하는 모든 것의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입니다. 성경의 모든 사람들의 삶의 결과는 기쁜 것이던 괴로운 것이던 그 것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돌렸습니다.
1) 베드로과 제자들에게 이루어진 기적들로 인해 영광을 받으셨다: (행 4:21) 관원들이 백성을 인하여 저희를 어떻게 벌할 도리를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러라
2) 스데반의 죽음을 통해 영광을 받으셨다: (행 7:2)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행 7:55)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3) 바울의 기적을 통해 영광을 받으셨다: (행 21:20) 저희가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심 있는 자라
계 5:13을 보면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했습니다.
지난 일년을 돌이켜 봅니다. 예수님이 처음과 끝이 되시어 모든 일 가운데 함께 하셨습니다. 당신의 계획을 우리의 삶 위에 세우시고, 우리의 모든 삶 속에 당신의 은혜를 공급하심으로 그 모든 것을 이루어 가셨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의 일년 동안의 삶이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의 영광을 들어내었습니다. 이에 지난 일년을 감사하며 하나님께 찬양 돌립니다. 할렐루야
처음과 나중.송구영신
계 22장 13절 / 김중곤목사(들풀교회)
숨 가쁘게 달려왔던 한해, 이제 우리는 흐르는 세월 속에 지금 한해를 보내고 새 해를 맞는 순간에 서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고, 하나님께서 베푸신 복이고, 인도하심이었습니다.
은혜찬양 142장 ‘오신실 하신 주’ 찬양 시 입니다.
“하나님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 / 지나온 모든 세월들 돌아보아도, 그 어느 것 하나 주의 손길 안 미친 것 전혀 없네 /
후렴: 오 신실하신 주 /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 약속하셨던 주님 / 그 약속을 지키사 / 이 후로도 영원토록 /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하나님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지나친 우리의 욕심이 우리를 좌절하게하고 실망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지난 모든 세월을 돌아볼 때 주님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 이 믿음을 고백하며 한해의 끝자락에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해마다 12월이 되면 한자 문화권인 한중일 각국이 ‘올해의 한자’를 선정해서 발표합니다. 금년에 일어났던 여러 가지 사건과 사고는 물론 흐름을 나타내는 데에도 한자가 편리하기 때문입니다. 중국과 대만, 일본은 대대적인 응모와 투표를 통해 한 글자만 발표하는데 반해, 우리나라에선 2001년부터 교수신문이 전국 대학의 교수로부터 설문응모를 받아 투표로 ‘올해의 사자성어’를 결정하는 것이 다릅니다. 2015년 우리나라 교수들이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로 '혼용무도'(昏庸無道)가 선정됐습니다. 세상이 온통 어지럽고 도리가 제대로 행해지지 않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요즈음의 어지러운 정치, 사회분위기를 초래한 것은 어리석고 무능한 지도자의 책임이라는 뜻이겠지요. 왜 우리는 남의 탓만 하는지 교수님들도 예외는 아닌가봅니다. 일본에선 지난 12일 ‘편안 安(안)’, 중국은 21일 ‘청렴할 廉(렴)’, 대만은 ‘바꿀 換(환)’을 뽑았다고 합니다.
아는 것이 많다고 지혜로운 사람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많이 아는 것으로 인해 오히려 오만한 사람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고개를 숙일 줄 알고 자기의 부족함을 아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유대인의 속담에 ‘태양은 당신이 없어도 뜨고 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주만물에서 인간의 존재는 미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작은 지식을 가지고 자신을 나타내려하는 것은 오만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많은 지식이 있다 해도 우리는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겸손히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잠3:34)고 하셨고,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 (잠18:12)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왕상3:4-14절에 솔로몬은 왕이 된 후 기브온에서 하나님의 제단에 일천 번제를 드린 후, 밤에 솔로몬의 꿈에 하나님께서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고 말씀하실 때, 솔로몬이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버지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주께서 택하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그들은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라고 지혜를 구했을 때,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네가 자기를 위하여 장수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 원수의 생명을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으니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네 앞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네 뒤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내가 또 네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왕들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네가 만일 네 아버지 다윗이 행함 같이 내 길로 행하며 내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또 네 날을 길게 하리라’고 구하지 않은 부귀와 영광도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인 우리는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하나님의 빛이 되는 겸손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두 손을 꼭 움켜쥐면, 모든 것을 움켜잡을 것 같은데, 움켜쥐면 쥘수록 잡았던 것도 모두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작은 것이라도 그것을 나눌 때 더 큰 유익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우리의 두 눈으로 나만을 위해 보았다면, 이제 그 두 눈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고 찾아가서 도움을 주는 눈이 되고, 두 귀로 자신에게 달콤한 이야기만 들었다면 이젠 그 두 귀로 이웃이 무엇을 바라는지 간구하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문제를 해결해주는 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입으로 늘 불평과 원망만 하고 부정적인 삶을 살았다면, 이제부터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우리가 만나는 사람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긍정적인 입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마음 문을 꼭 닫고 살았다면, 이제 우리의 마음 문을 열고, 우리 이웃에게 열린 마음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사랑을 받으려하기 보다 내가 먼저 사랑할 때, 섬김을 받기보다 먼저 섬기려할 때, 어둡게만 보이던 이 세상은 그리스도의 빛으로 어둠은 물러가고 환하게 비추이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처음과 마지막이 되는 알파와 오메가는 헬라어 알파벳의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로 영어로 말하면 첫 번째 글자 에이(A)와 마지막 글자인 제트(Z)라 할 수 있고, 한글 자음으로는 첫 번째 글자인 기역(ㄱ)과 마지막 글자인 히읗(ㅎ)에 해당합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알파와 오메가는 모든 문자가 서로 연결되면서 만들어지는 시작에서부터 끝나는 언어의 영역으로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는 시작과 끝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모든 역사하심이라고 할 것입니다.
사44:6절에 이스라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느니라. 그리고 계 1:8절에‘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하셨고, 계21:5-7절에는‘5.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7.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말씀하고 있습니다.
시작이 있어야 끝이 있습니다. 한해를 시작한 것이 바로 얼마 전인 것 같은데 마지막 날이 되고, 새로운 해를 또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원리가 처음과 나중이며 시작과 마지막 끝이 되는 ‘알파’와 ‘오메가’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넌 뒤 광야에서 40년의 긴 세월을 보냈습니다.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까지 직선거리로 14일이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는 길을 무려 40년을 광야생활을 하게 된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출16:2-3절에 보면 이스라엘 온 회중이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였다’고 불평과 원망을 토해 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민수기 13-14장에는 ‘바란 광야 가데스’에 이르러 모세는 이스라엘 12지파의 지휘관들을 보내 가나안 땅을 정탐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들은 40일 동안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에게 약속한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 결과를 보고하는데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하고는 함께 갔던 사람들은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고 악평을 하자,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민14:1-3) 하면서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민14:4)고 할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하시고 홍해 길을 따라 광야로 들어가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하시면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29.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중에서 이십 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30.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하시고, ‘너희의 자녀들은 너희 반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 년을 광야에서 방황하는 자가 되리라 34. 너희는 그 땅을 정탐한 날 수인 사십 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쳐서 그 사십 년간 너희의 죄악을 담당할지니 너희는 그제서야 내가 싫어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알리라’(민14:27-34)고 명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처음과 나중’이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을 믿지 않고 불순종하고, 원망과 불평하다가 언약의 땅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 광야에서 소멸되어 거기서 죽음을 맞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정탐한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것을, 그들이 직접 보고 알았으면서도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견고한 성과 아낙자손이 두려워 스스로 메뚜기 같다고 좌절하고 포기함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고 종살이하던 애굽을 그리워하고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길은 뒤로 물러서는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앞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은 지난 일에 연연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즐기던 것들에 매이거나 붙들리지 말고 과감하게 버리고 오직 주님만 따라가야 합니다. 그 길이 사는 길이요 우리가 가야할 영원한 생명의 길입니다.
이제 가는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합니다. 새 해를 맞이하면서 우리 앞에 닥쳐올 일들을 바라보며 힘차게 이기며 나아가야 합니다. 2016년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임하고, 앞으로 우리의 생애에 큰 복이 임할 것을 기대하고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하늘나라의 상을 바라보고 앞으로 힘차게 나아가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지난날에서 교훈을 얻고, 바로 지금을 중요하게 여기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내일을 준비하며, 하나님의 선한 일을 행하며 우리의 믿음생활을 바르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힘과 위로가 되었던 성도들을 잊지 말고, 깊이 감사하고 마음에 상처와 아픔을 준 사람들까지도 용서하고 품으면서 성도들과 화목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성숙한 성도의 모습입니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지난 것에 연연해하면 새해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지난 세월을 돌아보며 주의 도움과 함께 달려온 바울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빌3:13-14)
바울사도는 지난세월을 회상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만 과거에 얽매이거나 과거에 집착하거나 머물지 않습니다. 늘 앞을 향해 나아가는 미래지향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앞을 내다보며 기대하고 소망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늘 ‘처음과 나중’이 되시는 하나님에 대한 소망과 꿈이 있었습니다. 그 꿈을 향해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갔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신앙이요, 믿음입니다. 성숙한 믿음의 사람은 과거에 얽매이거나 과거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믿음의 삶은 날마다 꿈과 소망과 기대감을 가지고 앞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은 믿음의 삶을 이렇게 강조합니다.
“16.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17.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롬 12:16-18)
새해를 맞으며 한 해를 인도하여 주시고 우리에게 주실 ‘처음과 나중’이 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면서 감사를 드립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언약을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꿈을 이루며 살도록 합시다. 새해에도 우리에게 주실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기대하며, 우리에게 주시는 사명을 온 힘을 다해 감당할 힘을 주실 것을 기도하고, 세상에 얽매이거나 뒤돌아보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 만 바라보고 믿음으로 살 것을 결단합시다. 그리고 성도들과 우리 이웃과도 좋은 관계를 맺고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면서 믿지 않은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우리 교회로 인도합시다. 새해를 맞이하는 우리 성도님들과 가정과 자녀 손들과 일터와 우리 들풀쉼터교회를 ‘처음과 나중’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은혜와 복을 내려 주시고, 우리 모두를 강건하게 하여 주실 것을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요한계시록 22:10-15
찬송가 176장 / 김광욱목사
요한계시록 22장 6절부터 마지막 21절까지는 요한계시록 전체의 맺음말에 해당합니다. 이 맺음말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6절에서 11절은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천사의 끝맺는 말입니다. 둘째, 12절부터 17절은 속히 오실 예수님의 끝맺는 말씀입니다. 셋째, 18절부터 21절은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사도 요한의 끝맺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첫째 천사의 말 일부와 둘째 예수님의 말씀 일부입니다.
또 내게 말하되(10-11절)
10 또 내게 말하되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또 내게 말하되’의 주체는 6절의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에서 언급된 ‘그’입니다. 그는 21장 9절에서 누구인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일곱 천사 중 하나’입니다. 천사가 사도 요한에게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고 합니다. 두루마리는 당시 기록물의 형태입니다. 오늘날처럼 책의 형태가 아닌 두루마리 형태로 성경 말씀이 기록되었습니다. 천사가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는 것은 예언의 말씀, 즉 요한계시록은 비밀로 감추어질 것이 아니라 만인에게 공개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공개되어야 하는 이유는 때가 가깝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주님의 재림이자 심판의 시간입니다. ‘때가 가까우니라’는 천사의 말은 2천년이 지나도 성취되지 않았기에 의문을 가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기서 때는 물리적 시간이 아니라 질적 시간을 뜻합니다. 즉 특별한 사건의 시간입니다. ‘때가 가까우니라’는 말은 예수님의 재림의 임박성을 느끼게 합니다. 이 말을 귀담아듣는 사람은 긴장감을 가지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 긴장감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이 긴장감은 신앙생활에 중요한 요소입니다.
11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
천사가 ‘불의를 행하는 자’와 거룩하지 않다는 의미의 ‘더러운 자’에게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그대로 더럽게 살도록 하라는 말은 이미 심판이 완료된 듯한 느낌이 들 수 있습니다. 이는 불의를 행하는 자와 더러운 자의 행위를 그대로 두어, 그들이 회개하는 일이 없도록 방치하라는 말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천사의 말은 10절에서 ‘때가 가까우니라’의 말처럼 재림의 임박성을 강조한 말입니다. 주님께서 아직 다시 오시지 않은 이유는 죄인 한 사람이라도 회개하여 주님께로 오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오래 기다려 주심에도 주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여,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그대로 더럽게 살아간다면 행위대로 심판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12-15절)
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이는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속히 오리니’라는 주님의 말씀은 ‘때가 가까우니라’와 마찬가지로 재림의 임박성을 알려주시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주님께서 속히 오시는 이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상을 주시고 각 사람에게 행한 대로 갚아 주시기 위함입니다. 상을 주신다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상’은 일의 대가, 보수, 보응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상’은 가치 중립적인 의미로 긍정적인 의미의 상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즉 의로운 자와 거룩한 자에게는 복을 의미하는 유익한 상을, 불의를 행하는 자와 더러운 자에게는 심판을 의미하는 상을 내리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선을 행한 사람은 ‘선’의 대가, 악을 행한 사람은 ‘악’에 대한 보응이 있습니다. 행한 대로 갚아 주신다는 주님의 말씀은 20장 12절에서도 있는데, 주님께서 흰 보좌에 앉으셔서 행위를 따라 심판하신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행위에 따른 보응 또는 보상은 요한계시록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과 행동을 그리스도인답게 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습관적으로 하는 말과 행동이 주님께서 보시기에 선한지를 성찰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말과 행동이 의롭고 거룩하게 되어, 주님께서 오실 때 상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12절에 이어서 속히 오실 분이 누구시며, 행위에 따른 보응 또는 보상을 주실 분이 누구신지를 명확히 알 수 있는 구절입니다. 알파는 헬라어 알파벳의 첫 글자이고 오메가는 헬라어 알파벳의 마지막 글자입니다. 영어로 에이(A)와 지(Z)에 해당하며, 우리말은 기역과 히읗에 해당하는 글자입니다. 그러니까 알파와 오메가는 처음과 마지막이고 시작과 마침의 의미입니다. 주님께서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는 만물의 창조주이시고, 동시에 최후 종말의 주관자이심을 뜻합니다. 1장 8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계1:8)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성부 하나님께서 알파와 오메가라고 말씀하시듯이 성자 예수님께서도 알파와 오메가라고 밝히신 것은 성부와 성자가 동일 본체이심을 알려주시는 말씀입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께,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맡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 인생을 내 마음대로 살아가려고 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습니다. 내 인생의 주관자는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이심을, 우리가 한순간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14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주님께서 복을 선언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인지를 알려주십니다.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 복이 있습니다. 두루마기는 옷입니다. 옷을 세탁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말씀인데, 이는 7장의 ‘흰 옷을 입은 사람’에 해당합니다. 흰 옷을 입은 사람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 하나님의 백성을 뜻합니다. 7장에서 옷을 씻어 희게 만들 수 있는 것은 비누가 아닌 주님의 보혈, 즉 ‘어린 양의 피’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보혈로 성도는 옷을 희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 구절은 주님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두루마기를 ‘빨다’에 해당하는 원어는 현재 분사형으로 되어 있기에, ‘계속해서 옷을 씻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의 보혈로 우리가 흰 옷을 입은 사람이 되었지만, 우리가 입은 옷은 세상에서 때가 묻게 됩니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옷을 씻는 사람, 즉 두루마기를 빠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그때 사도 베드로는 주님께서 발을 씻어주심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서 처음에는 거절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당황한 베드로는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요13:10中) 우리는 주님의 보혈로 목욕을 한 사람이지만 끊임없이 발을 씻어야 존재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우리의 옷이 주님의 보혈로 희게 되었지만,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옷이 오염될 수 있기에 매일 주님의 보혈로 두루마기를 빠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이 땅에서도 복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주님께서 오실 때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습니다.’ 생명나무는 영원한 생명을 받음을 뜻하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음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은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인지를 주님께서 알려주십니다.
15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
여섯 그룹은 11절에서 천사가 말한 불의를 행한 자들과 더러운 자들에 해당합니다. 개들은 비열하고 추잡하고 포악한 자들을 비유하는 말입니다. 점술가들은 알파와 오메가이신 주님이 인생의 주관자이심을 부인하는 자들이며, 또한 사람들에게 주님을 부인하도록 하는 유혹자들입니다. 여섯 그룹 중 특이한 그룹은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들입니다. 살인과 간음에 해당하는 자들이 거룩한 성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수긍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강도나 도둑질한 사람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시지 않았는데 거짓말을 좋아하고 지어내는 자들은 언급하셨다는 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강도나 도둑질하는 사람이 거룩한 성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거짓말의 심각성을 알려주십니다. 거짓말은 개인의 범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줍니다. 거짓말 죄의 심각성을 21장 8절에서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는 여섯 그룹이 포함된 사람들이 받을 형벌을 알려주는데,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진다고 합니다. 이 형벌을 둘째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21장 27절에서는 여섯 그룹 중에 유독 거짓말하는 자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천사가 ‘이들은 거룩한 성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증거합니다. 본 구절에서 주님께서 한 번 더 이들이 거룩한 성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거짓말은 살인과 음행과 포악한 행위에 비해 결코 가벼운 범죄가 아님을 잊지 마십시다.
과거 우리는 회생할 수 없을 정도로 상한 썩은 옷과 같았고 도저히 고칠 수 없는 부식한 기계와 같았습니다. 어떤 수선가나 수리공이라도 원상 복구할 수 없는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렇게 죽었던 우리를 주님께서 살려주셨습니다. 주님의 보혈로 우리는 살아났습니다. 흰 옷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과 연합한 자로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로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요한계시록의 말씀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까지 거짓말과 불의함과 더러움을 버리고 의로운 자, 거룩한 자로 살아가기를 촉구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하는 이유는 때가 가까웠고 주님께서 속히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때가 가까웠음을 기억하며 주님의 사람으로 살아가십시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알파와 오메가가 되셔서 만물의 처음과 마지막을 주관하여 주시고 모든 인생의 시작과 마침을 주관하여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보혈로 흰 옷을 입은 자, 두루마기를 빠는 자로서 복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길 원합니다. 선을 행하며 의로운 자로, 더러운 것을 버리며 거룩한 자로 살아가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주님 앞에 설 때 유익한 상을 받게 하시옵소서. 오늘 하루도 속히 오실 주님을 의식하며 살아가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천사가 ‘두루마리의 에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고 말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2. 천사가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라고 말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3. 주님께서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나는 무슨 상을 받겠습니까?
4.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 복이 있으니’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5.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사람이 주의해야 할 ‘불의와 더러운 일’은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요한계시록 22:10-15 해설
10 요한계시록 22:10에서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는 명령은 요한계시록의 예언들이 비밀로 묶여진 채 감추어져 있지 않고, 누구나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공개되어 있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이는 종말이 가까워졌다는 경고를 모든 사람에게 전파하여 회개의 필요성과 구원의 기회를 강조하는 메시지입니다. 여기서 '때가 가까우니라'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계획이 임박하였음을 나타내며, 성도들에게 깨어있음과 준비를 촉구합니다.
11 이 구절은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장에서 주어지는 권면 중 하나로, 종말의 때와 그 이후에 대한 경고와 이로 인한 도덕적이고 영적인 상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날이 다가올 때, 사람들은 이미 선택한 길을 계속 걸어가게 될 것이며, 이는 그들의 운명을 결정짓는 요소가 됩니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게 남아 있는 반면 의로운 자와 거룩한 자는 그렇게 계속해서 정결을 지킬 것입니다. 이는 궁극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자의 삶과 선택이 심판받을 것이라는 것을 경고하며, 우리에게 지금의 신앙과 행위가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12 이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약속하며, 그가 다시 올 때 모든 사람에게 행위에 따라 상을 줄 것임을 말합니다. 이는 기독교 신자들에게 경각심과 희망을 동시에 주는 말씀으로, 그동안의 신앙 생활과 선행에 대한 보상이 준비되어 있음을 상기시키며, 성실하고 진실된 삶을 살아갈 것을 권면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신자의 믿음과 생활의 결말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므로, 이 구절은 믿음으로 인한 의로운 삶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13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알파와 오메가, 즉 그리스 알파벳의 처음과 마지막 글자를 사용하여 자신이 시작과 끝을 의미하는 분임을 선언하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영원하신 하나님으로서 역사의 처음부터 끝까지 주관하시고, 모든 것이 그분 안에서 시작되고 완결됨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선언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신적 권위와 주권을 믿고 신뢰할 수 있는 확고한 근거를 제공합니다. 또한, 우리의 시간을 포함한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완벽하게 이루어짐을 기억하고 소망 가운데 살아가도록 격려합니다.
14 이 구절은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부분에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회개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씻음을 받은 신자들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영생을 상징하는 생명나무에 접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새 예루살렘 성(지금의 이스라엘 지역)에 들어갈 권리를 얻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은 자들에게 주어지는 축복과 특권을 나타냅니다.
15 이 구절은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경고로,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에서 제외될 자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개들'은 종교적 또는 도덕적으로 부패한 사람들을 비유적으로 지칭하며, 점술가들은 미신과 이교적 관습을 따르는 자를 의미합니다. 음행하는 자들은 성적으로 부도덕한 행위를 하는 사람들,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은 각각 고의로 생명을 해치는 자들과 하나님 외에 다른 것들을 숭배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끝으로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들은 진실을 왜곡하거나 속이는 행동을 일삼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부도덕하고 불경건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영원히 함께할 수 없으며, 그 영광된 새 예루살렘 밖에 있을 것임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는 성결과 진리가 하나님의 왕국에서 중대한 가치임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생명나무의 권세
요한계시록 22:10-15 / 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구원”이란 말의 사전적인 의미는 “위험이나 곤란에 빠져 있는 사람을 구하여 준다”라는 뜻이다. 이 말이 종교적으로 쓰일 때는 “인류를 죄악과 고통과 죽음에서 건져내는 일”이라고 정의된다. 그런데 성경은 인류 모두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신다고 말씀한다(마 1:21).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죽음으로 흘린 피는 자기 백성들의 죄를 위한 대속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선택 안에 있는 자와 선택 밖에 있는 자로 갈라놓고 말씀하실 뿐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이고 권세이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하나님의 권세를 말씀한다.
“또 내게 말하되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10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이라고 번역하였는데 이전 개역한글에서는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이라고 하였는데 ‘책’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10:4에서는 “일곱 우레가 말을 할 때에 내가 기록하려고 하다가 곧 들으니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말하기를 일곱 우레가 말한 것을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 하더라”라고 하였는데 이때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진노를 참으시고 긍휼을 베푸시겠다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인봉하지 말라”라고 말씀한다. 다니엘서에 이렇게 말씀한다.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단 12:4)
“간수하고”라는 표현의 히브리어 ‘사탐’은 ‘막다, 메우다, 폐쇄하다, 봉쇄하다, 잠그다’라는 뜻이고, “봉함하라”의 ‘하탐’은 ‘인을 찍다, 봉인하다’라는 뜻이다. 한마디로 봉인하여 잠궈서 알리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다니엘 선지자에게 주셨던 말씀과는 대조적으로 요한 사도에게는 인봉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 이유는 다니엘에게 주셨던 계시는 “마지막 때까지”라고 하셨기 때문이고 요한계시록의 상황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성취된 것이 다 드러났기 때문이다. 다니엘 선지자가 전한 “마지막 때”를 신약에서 이렇게 나타낸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 1:15)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 4:4-5)
“(왜냐하면) 때가 가까우니라”라는 말씀에서 우리 성경에 번역되지 않은 ‘가르’(왜냐하면)가 있다. “때”라는 ‘카이로스’는 하나님께서 일하신 결정적인 시점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가까우니라”라의 ‘엥귀스’는 시공간적으로 가까운 상태에 있다는 뜻으로 현재형으로 썼다. 즉 이 책의 말씀을 인봉하지 않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 죽음으로 대속을 이루신 언약 성취의 때이며 하나님 왕국이 계속 주어져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도 이렇게 선언하였다.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롬 10:8)
그러므로 지금 이 책의 말씀은 열려 있다. 예언의 말씀이 열려 있고 공개된 상태 이것을 종말이라고 한다. 더 이상 다른 계시가 있어야 할 이유가 없고 필요도 없다. 따라서 우리에게 이 말씀이 읽혀지고 들려져 마음에 새겨지면 그것이 복이다. 이것은 성령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기에 은혜이다.
그래서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11절)라고 말씀한다. 즉 말씀을 인봉하지 않은 상태로 두면 십자가에 의해 불의를 행하는 자와 의롭고 거룩한 자로 갈라져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 말씀 역시 다니엘 선지자가 선포한 말씀 안에 있는 것이다.
9 그가 이르되 다니엘아 갈지어다 이 말은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할 것임이니라 10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하게 하며 희게 할 것이나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하리니 악한 자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단 12:9-10)
“불의를 행하는 자”와 “더러운 자”가 짝을 이루고, “의로운 자”와 “거룩한 자”가 짝을 이루어 “불의를 행하는 자”와 “의로운 자”, “더러운 자”와 “거룩한 자”를 대조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불의를 행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능동태이고 거룩한 자에 대해서는 수동태로 썼다는 것이다. 불의한 자는 자기 능력으로 행하지만, 거룩한 자는 하늘에서 주어지는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모든 말씀은 비유라는 의미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13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14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16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 13:13-16)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12절). 불의한 자, 더러운 자와 의로운 자, 거룩한 자를 왜 여전히 그렇게 두시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한 대로 갚아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라는 말씀은 이미 앞에서 생각하였던 대로 ‘지금 신속히 계속 오고 계신다’라는 의미이다.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라는 표현에서 “상”이란 ‘미스도스’로 ‘품삯, 임금, 보상’이라는 뜻으로 궁극적으로 구원을 의미한다.
“그가 행한 대로”라는 말씀은 ‘에르곤’으로 ‘일, 행위’라는 뜻으로 ‘그의 일대로’라는 의미이다. “갚아 주리라”라는 말씀은 22:2에서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라고 하였을 때 앞의 “맺되”는 ‘포이에오’(만들다, 창조하다, 행하다)였고 뒤의 “맺고”는 ‘아포디도미’라고 하였는데 같은 단어로 ‘넘겨주다, 나누어주다, 돌려주다, 보상하다’라는 뜻이다. 즉 불의한 자, 더러운 자의 일은 불의를 행하는 그 일대로 넘겨주고, 의로운 자, 거룩한 자의 일은 의로운 일, 거룩한 일 그대로 넘겨준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의로운 자, 거룩한 자의 일은 무엇인가?
28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 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요 6:28-29, 32-33)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고 출애굽 때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듯이 하늘에서 주시는 참 떡으로 상징되는 “생명”을 주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의로운 자, 거룩한 자에게 넘겨주시는 생명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것이 생명을 넘겨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라는 말씀은 교회 봉사를 얼마나 많이 하였는가를 따져서 차등 있는 상급을 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죽음으로 의로운 자, 거룩한 자로 만드시고 그들에게 넘겨주시는 것은 생명이라는 의미이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5)
우리가 무엇이 잘나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것이 있겠는가? 우리는 죽은 죄인이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것을 받아야 할 당위성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주신다면 그것은 ‘생명’이라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있을 수 있을까? 따라서 죽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런 점에서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13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알파와 오메가”는 헬라어 처음과 마지막 철자인데 히브리어로 말하자면 “알파”는 ‘알렙’이고 “오메가”는 ‘타우’이다. ‘알렙과 타우’가 결합된 첫 단어가 창세기 1:1의 ‘에트’이다(‘베레쉬트 바라 엘로힘 에트 하샤마임 웨에트 하아레츠’). 여기서 ‘에트’가 목적격으로 쓰였는데 직역하면 ‘그 하늘들과 그 땅을’이라는 말이다. 앞에서 말씀한 것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정관사를 붙였다면 어떤 특별한 것을 지칭한 것이다. 그래서 창조 언약 안에서 보자면 땅인 우리를 하늘들로 새 창조를 이루신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렇다면 “알파와 오메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처음과 마지막, 시작과 마침”이란 창조 언약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새 언약으로 완성하셨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일을 머리이신(‘베레쉬트 – 로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하신 것이다.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14절). “두루마기”의 ‘스톨레’는 ‘겉옷, 긴옷’으로 어떤 의식을 위해 격식대로 차려입은 옷으로 특히 제사장의 옷을 의미한다. 옷을 빨았다는 것은 죄 씻음의 은혜에 동참되어 영원한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었음을 의미한다(히 6:20, 계 7:13-14). 직역하면 ‘그들의 겉옷들을 빠는 자들은 복이 있다. 그들의 권세가 생명나무에 있도록, 그리고 그들이 문들을 통해 그 성에 오도록’이라는 말이다. 교회요 성도는 생명나무의 권세, 거룩한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도록 권세를 받은 자라는 뜻이다.
그러나 교회가 아닌 자들, 곧 영원한 생명을 누리지 못하는 상태를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15절)라고 말씀한다. 이 표현은 문자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진리와 관련된 표현이다. “개들”이란 토한 것을 도로 먹는 존재이다(잠 26:11, 벧후 2:22). 그래서 “행악하는 자들”을 “개”라고 하였다(빌 3:2). 여기서 “행악하는 자들”의 헬라어 ‘에르가테스’는 ‘교사, 일꾼’이라는 뜻으로 ‘악한 교사’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진리는 소화하지 못하고 뱉어내고 기존에 먹었던 율법으로 다시 먹어 종교 행위로 돌아가는 거짓 교사를 지칭한다(참고 마 7:6). 그래서 율법에서는 창기를 개로 비유하였다(신 23:17).
“점술가들, 음행하는 자들, 살인자들, 우상 숭배자들,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이란 이미 21:8에서 나누었던 것처럼 진리에 진리가 아닌 것을 섞는 자들이며, 비진리와 연합하여 놀아나는 자들이고, 진리를 깨뜨리며, 진리를 우상으로 삼는 자들로 비진리를 전하는 자들이다.
“성 밖”이란 당연히 거룩한 성 예루살렘 밖을 의미한다. 기존의 예루살렘에 있는 자들은 건물 성전을 중심으로 율법적 행위를 하는 자들이 자기 의를 위해 진짜 의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성 밖으로 몰아내어 십자가에 죽였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록자는 영문 밖에서 죽임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자고 하였지만(히 13:12-13) 이제 상황이 바뀌었다. 성 밖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임을 당한 경험이 없는 자들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안에 들어갈 수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미래에 죽어서 갈 천국의 성 밖에 있다는 말이 아니라 거룩한 새 예루살렘 성이 되어 생명을 누리는 상태와 대조해서 성 밖의 현재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생명나무의 권세, 거룩한 성 예루살렘의 권세는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주어진다. 그러기에 자기 죽음을 그 십자가를 날마다 확인할 수 있는 은혜가 있는 자가 교회요 성도이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계 22:6-12 / by 조정의
시한부 종말론은 언제나 이단적이다.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라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정면으로 대적하기 때문이다(마 24:36). 예수님은 때와 시기를 알고자 하는 것도 명백히 금하셨다: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행 1:7).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반하는 행위 곧 종말의 시기를 추측하거나 계산하려는 행위를 즉시 멈춰야 한다. 국제 정세나 환경 오염, 심각한 죄의 만연 등으로 세상의 끝,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절대 말하지 말라.
그런데, 우리가 경계해야 할, 종말을 바라보는 또 다른 이단적 관점이 있다. 바로 종말을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것이다. 베드로가 경고했던 말세의 조롱하는 자들은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을 부정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만물이 그대로 있을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니 종말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정욕을 따라 행하라고 권면했다(벧후 3:3-5). 이 거짓 가르침은 시한부 종말론만큼이나 이단적이다. 그리스도께서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라고(7, 12, 20절) 선포하시면서,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라고 분명히 말씀하셨기 때문이다(12절).
어떻게 하면 종말의 때와 시기를 알려 하지 않으면서도, 주가 속히 오신다는 것을 굳게 믿으며 살 수 있을까? 어떻게 종말에 관한 말씀이 속히 이루어질 것이란 사실을 올바른 근거를 가지고 붙들 수 있을까? 과도한 관심과 잘못된 열정을 쏟아붓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관심과 건강한 열정을 적극적으로 가질 수 있을까? 주 오심을 기다리며 경건한 삶을 살 수 있을까? 요한계시록의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본문이 그 질문에 답을 준다.
1. 천사의 증언(6절): 하나님 말씀은 신실하고 참되다
먼저, 천사의 증언을 들어보자. 6절에서 증언하는 자를 “그”라고 했다. 거슬러 올라가면 어린양의 신부, 새 예루살렘 성을 안내해 준 천사가 그 주인공이다(21:9). 천사는 지금까지 자신이 요한에게 한 말 곧 천국에 관한 하나님의 계시가 ‘신실하고 참되다’라고 선포했다. 작은 것 하나도 허구로 드러나지 않고 철저하게 하나님이 계획하신 때와 방법대로 이루어질 것을 확증한 것이다.
단지, 천국에 관한 계시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모든 계시를 말한다(이 말):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6절). 이 말씀은 계시록의 첫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1:1). 계시록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A~Z)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께 주시고, 주께서 천사를 통해 요한에게 보여주시고 들려주신 것을 기록한 것이다(1:19). 그리고 기록된 계시의 특징은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 “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구약과 신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다(딤후 3:16; 벧후 3:21). 하나님은 “내가 말하였은즉 반드시 이룰 것이요 계획하였은즉 반드시 시행하리라”라고 선언하셨다(사 46:11). 예수님도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라고 확신하셨다(마 5:18). 우리가 계시록에 기록된 하나님의 종말 계획이 속히 이루어질 것을 믿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이것이 하나님의 권위가 담긴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종말에 관한 잘못된 확신은 잘못된 근거에서 비롯된다. 이스라엘을 비롯한 세계 정치, 군사, 경제 상황, 자연재해와 범죄의 빈도수로 종말이 임박할 것을 확신하지 말라. 하나님 말씀이 그것을 말하지 않는다. 반대로, 하나님 말씀이 분명히 증언하는 것을 부정하거나 무시하면, 당신은 계시록에 기록된 모든 것이 ‘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이라는 것을 확신하지 못할 것이다. 우린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라고 고백해야 한다. 주가 말씀하셨다. 당신은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실 하나님을 믿는가?
2. 예수님의 증언(7, 12절): 보라 내가 속히 오리라
본문의 7절과 12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이다. 계시록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이지만, 특별히 이 두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을 직접 인용한 것이란 말이다. 주님은 똑같이 두 번 반복하여(강조) 이렇게 말씀하셨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라”(7, 12절). 각각 “보라”(behold)로 시작하는 것이 인상 깊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선포하신 순서는 먼저 천사의 증언이 있고 나서(7절), 그리고 요한의 증언이 있은 후에(12절) 위치한다. 주님은 각각이 증언을 마치고 난 후, 모든 사람을 주목하게 하시고, 그리고 모두가 똑똑히 듣고 기억하고 믿을 수 있도록 단순 명료하게 두 번 반복하여 말씀하셨다: “내가 속히 오리라”.
이는 세상에서 가장 진실하신 분의 증언이다(“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벧전 2:22).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증언을 온전히 신뢰할 수 있다. 이는 또한 세상에서 가장 우리를 사랑하신 분의 증언이다(“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 13:1). 그래서 우리는 그분 말씀에 사랑으로 반응할 수 있다. 속히 오신다고 말씀하신 주는 우리에게 어떤 반응을 요구하실까? 주를 사랑하는 자는 속히 오실 그분을 어떻게 기다려야 할까?
주님은 이 두루마리의 예언 즉 계시록의 말씀을 지킬 것을 요구하신다: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7절). 예언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계시록의 일차 대상이 아시아 일곱 교회였다는 것을 잊지 말라. 그들에게 주님은 두루마리의 예언을 본격적으로 풀어주시기에 앞서, 회개하라고 명령하셨다. 처음 사랑을 회복하고,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세속적인 삶을 청산하고, 거짓 교훈을 물리치고, 말과 삶이 다른 신앙, 미지근한 신앙을 버리라고 하셨다. 전심으로 주를 따르고 믿음을 지키며 죽도록 충성하라고 하셨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기는 자”로 살라는 것이다(현재형). 그런 자에게 주님은 계시록에 기록된 복을 주신다. 그렇지 않은 자에겐 반대로 계시록에 기록된 심판을 내리실 것이다.
당신이 진정으로 주께서 속히 오실 것을 믿는지 믿지 않는지 분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당신의 삶이 그것을 확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주가 속히 오실 것을 믿는 자는 이기는 자로 산다. 믿지 않는 자는 주를 향한 사랑을 잃고, 고난을 두려워하고, 세속적인 삶을 살고, 거짓 교훈에 속고, 신앙의 고백과 실천이 따로 놀고, 미지근한 삶을 계속해서 살아간다. 그런 삶을 사는 이에게 주님의 속히 오심은 도둑이 들이닥치는 것과 같을 것이다: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계 3:3). 주님의 속히 오심은 즉각적이고 적극적이며 근본적인 회심을 항상 요구한다(마 24:42). 오늘 주가 오신다고 생각하며 항상 준비하고 있으라.
주님의 속히 오심은 경고를 알리는 알람 소리일 뿐만 아니라 승리를 알리는 나팔 소리이기도 하다: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12절). 주님의 본심은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는 것이다(겔 18:23; 33:11; 벧후 3:9). 주님은 우리에게 상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라는 표현에서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줄 상을 기쁨으로 예비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리고 주님은 실제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아 주실 것이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을 주님께 한 것으로 보시고(마 25:40), 지극히 작은 일 곧 물 한 그릇을 주는 일에 관해서도 상 주실 것이다(마 10:42).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내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8). 주가 속히 오셔서 당신의 수고에 보상하실 것이다.
3. 요한의 증언(8-11절): 때가 가까우니라
8-11절의 화자는 분명 요한이다: “나 요한이니”(8절). 요한은 계시록의 기록이 참되다는 증거로 자기 자신을 증인으로 내세운다. 자신이 직접 보고 들었다는 말을 두 번 반복하여 강조하면서: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내가 듣고 볼 때에(8절). 증인으로서 요한의 증언이 신뢰할 만하다는 사실은 그가 고백한 실수를 통해 더욱 분명해진다. 요한은 천사 숭배를 할 뻔했다(19:10).
계시록에 기록된 크고 무서운 환상 그리고 경이롭고 환상적인 장면에 완전히 압도되고 매료된 요한은 이 일을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다(8절). 그러자 천사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두루마리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하나님께 경배하라”(9절). 이 말은 오직 하나님만 경배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심을 분명히 한다. 하나님이 계시자이시다. 계시를 받은 선지자들, 계시를 따르는 성도들, 심지어 계시를 전달한 천사들이라도 하나님을 섬기는 종으로 그분을 경배하는 것이 마땅하다. 마지막 남은 사도이자 온 교회의 아버지로서, 이런 실수를 기록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부끄러운 일이다. 하지만, 요한은 보고 들은 모든 것을 빠짐없이 상세하게 기록했고, 이것이 그 분명한 증거다.
우리가 정말 주목해야 하는 요한이 직접 보고 들은 중요한 증언은 바로 이어서 나오는 천사의 이 말이다: “또 내게 말하되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10-11절).
이 말씀의 핵심은 ‘때가 가까우니라’에 있다. 주가 오실 때가 가깝기 때문에 계시록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은 인봉하여 감추어 둘 것이 아니라 모두가 듣고 보고 경고를 받고 위로를 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마지막 때 일어날 일들을 계시하시고 나서 “이 말은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할 것임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단 12:9).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한에게는 인봉하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때가 가깝기 때문이다. 주가 진실로 속히 오실 것이다. 계시록의 말씀은 성령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칭찬과 격려와 책망의 말씀이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천사를 통하여 불의를 행하는 자, 더러운 자에게 회개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그대로 있으라고 하셨을까? 이 또한 일차적으로 시간이 급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악한 길에서 돌이킬 시간이 거의 없을 정도로 때가 가깝기 때문에, 회개하고 돌이켜야지 하고 어물쩍거리다가는 순식간에 그날을 만날 것이기 때문에, 그대로 있으라고 하신 것이다. 날짜를 계산해 보면 아직도 멀리 남은 것 같은 때가 바쁜 일상을 살다 보면 어느새 눈앞에 와 있을 때가 있다. 정해진 때를 향한 시간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할 때도 계속 일정한 속도로 흘러간다. 계시록에 기록된 하나님의 종말 계획은 기약도 없이 먼 미래의 언젠가 펼쳐질 일들이 아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계획은 도미노처럼 하나둘 넘어지며 성취되고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때 종말에 이를 것이다. 당신의 시간만 흐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시간도 흐른다.
우리의 행위를 바꿀 수 없을 만큼 시간이 촉박하다는 말은 그래서 우리의 행위를 바꿀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반드시 잘못된 행위를 돌이키고 올바른 행위를 가져야 한다. 그래서 주님이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7절). 유독 계시록에는 ‘행위’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처음 행위를 가지라, 죽도록 충성하라, 끝까지 내 일을 지키라, 회개하여 온전한 행위를 가지라, 가진 것을 굳게 잡으라, 열심을 내라). 믿음은 마음의 변화에서 비롯된 행위의 변화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계시를 믿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믿음의 열매인 행위를 가져야 한다. 죄를 버리고 의를 행하라. 삶의 더러움을 제거하고 거룩함을 입어라. 예수님은 그런 자들을 가리켜 “이기는 자”,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라고 하셨다(14절).
시한부 종말론은 신도에게 모든 시간, 재물, 삶 전체를 바치라고 강요한다. 반대로 종말의 계시를 부정하고 무시하는 가르침은 성도가 오직 자신을 위해서 시간과 재물을 사용하게 만든다. 성경적인 종말론은 양극단으로 치닫지 않는다. 철저히 우리가 선택하도록 자유를 허용하되, 아주 강력한 힘으로 우리가 무엇을 위하여 시간과 물질을 사용해야 하는지 제시한다. 주께서 진실로 속히 오신다. 지금 당신은 올바른 것에 시간을 투자하고 있는가? 주께서 곧 오셔서 당신의 행위 대로 보상하신다. 당신은 영원히 보상 받을 일을 위하여 당신의 물질을 사용하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