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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1950년 9월 28일
서울(1차)수복 후부터 ~ 휴전까지(188개 이미지)
6.25 전쟁 - (1) 에서 이어짐
1950년 10월 초 부터 1953년 7월 휴전까지
1950. 10. 1. 38선을 돌파하고 북진하는 국군용사들
1950. 10. 1. 한국전 발발 2개월 후 창설한 육군 제 11사단(화랑부대)가 38선을 돌파하고 북진하고 있다
1950. 10.. 초 38선(한탄강)을 돌파하고 북진하는 한국군 용사들
1950.10. 1. 38선을 돌파하고 북진하는 유엔군
1950. 10. 7. 불타고 있는 김포 비행장.
1950. 날짜 미상. 죽은자를 바라보고 있는 유엔군 모습. 고지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가를 보여주는 사진이다.
총탄이 관통한 철모형태를 봐서는 북한군 시체로 보인다. 오른쪽 아래는 얼굴이 함몰된 시체도 보인다.
(부서진 집 한켠에 희귀한 물건이 놓여 있는데 철제 난로가 아닐까?..)
날짜 미상. 북한군의 만행 양민학살 현장
1950. 10. 12. 원산의 학살 된 시신들
전선에 투입되는 학도병
부상당한 학도병과 미군 병사
1950. 10. 12. 청진항을 향해 함포사격을 가하고있는 미 전함 미주리호.
이에 앞선 9월 13일 인천상륙 이틀 전 미주리함은 상륙장소를 속이기 위해 서해의 인천이 아닌 동해바다
삼척 앞의 먼 바다에 머무르고 있었다. 인천상륙의 성공은 기만작전 이였다.
1950. 10. 12. 미전함 미주리호가 청진 앞바다에서 함포사격하는 모습
1950. 10. 12. 위와 같은 이미지 컬러사진.
1950. 10. 13. 경기도 파주, 참혹하게 학살된 시신들.
1950. 점령군이 바뀔때마다 깃발을 바꿔야만 했다. 함흥자치위원회 중앙리지부 깃발이 보인다.
1950. 10. 13. 함흥의 우물에서 공산군에 의해 학살된 시신을 건저 올리고 있다
1950. 10. 18.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 멀리 북악산과 중앙청 돔이 보인다.
중공군 한국전쟁 개입 - 유엔군의인천 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이 붕괴되어 가고 또 한국군 및 유엔군이 38선을 돌파
진격하자 아무런 통고도없이 한국 전선에 병력을 투입하기 시작했다. 1950 년 10월25일 국군제1사단 15연대가 개마
고원지구 운산에서 최초로 중공군 1명을 포로로 잡았다. 포로의진술에의하면 벌써 동년 10월 중순 에 약 2만명의 중공
군이 압록강을건너 한국전선에 투입 되었다는 것이다. 10월 29일에는 동부전선에서도 3명의중공군을 포로로 잡았다.
그리하여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은 11월 5일 중공군이 한국전에 개입하였다고 유엔에 보고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압록강까지 진격함으로서 국토의 전역을 거의 수복하고 조국통일을 눈앞에둔 우리 국군은 다시후퇴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1950. 10. 19. 압록강을 건너 입북하는 중공군 40군 병력들.
설명이 잘 못된는지 10월 중순인데 압록강이 얼어 중공군 병력이 걸어서 건너서 입북한 것이 믿기지 않는다.
날짜 미상. 결사 항전을 외치는 중공군 병사들, 선전용 사진으로 추정
북한의 기와집 앞의 중공군이 따발총으로 불리는 ‘슈파긴 기관단총’ 을 파지하고 있다
1950. 11. 1. 서울 중앙청 앞 지금의 문화관광부 자리.
1950. 11. 1. 황해도 평산에 진격하는 유엔군, 이를 지켜보는 주민도...
1950. 11. 2. 원산의 한 성당. 신도들이 포격에 부서진 잔해를 치우고 있다.
1950. 11. 2. 적십자사에서 피난민에게 구호물자를 나눠주고 있다.
1950. 11. 2. 거리에 버려진 아이들이 트럭에 실려 고아원으로 가고 있다.
1950. 11. 6. 북한의 어느 농촌. 전란 중에도 추수를 하고 있다. 바람개비로 알곡을 가리고 있다.
비행사의 생존장비.
한국전 당시 유엔군 비행사가 휴대한 생존장비에 포함된 것으로 한,중,일,영문으로 작성되어 있다
1950. 11. 6. 북한의 어느 농촌. 추수한 집단을 달구지에 싣고 있다
전쟁으로 고아가 된 아이들
1950. 11. 11. 바지 저고리를 입은 포로들 총이나 한번 제대로 쏴보았는지...
1950. 11. 13. 지아비가 생매장 된 갱도 어귀에서 오열하는 지어미.
1950. 11. 13. 함흥 덕산광산.
북한당국에 의해 482명을 생매장한 갱도에서 시신을 꺼내 늘어놓은 것을 한 아버지가 아들을 찾고 있다.
"제발 내 아들이 아니기를..."
1950. 11. 18. 미군 폭격으로 파괴된 흥남 비료공장.
1950. 11. 18. 미군 폭격으로 파괴된 흥남 송전소.
1950. 11. 19. 북한의 한 지하 동굴속 무기공장.
1950. 11.20. 국경지대 미군이 소달구지로 보급품을 운반하고 있다.
1950. 11. 23. 함경도 갑산. 미군 폭격으로 성한 집이 드물다.
1950. 11. 24. 서울역 앞 세브란스 병원.
1951. 11. 말. 살기 위해서 또 남쪽으로 가야만 했다.
1950. 12. 3. 평양 대동강변의 피난민 행렬 속의 한 여자 어린아이가 축축한
모래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있다.
1950. 12. 3. 파괴된 대동강 철교와 피난민.
이 사진은 데스퍼 보다 하루 전날에 다른 종군기자가 촬영한 사진. 데스퍼의 4일 사진에는
많은 피난민이 달라 붙어 있지만, 3일 사진에서는 피난에 대한 급박성을 강하게 느낄 수 없다.
1950. 12. 4. 평양을 떠나 대동강의 부교를 건너 후퇴하는 국군.
1950. 12. 4.의 대동강 철교와 피난민. AP통신기자 맥스 데스퍼(Max Desfor)사진
6·25전쟁의 비극을 가장 잘 보여준다는 평을 받고 있는 ‘대동강 철교’ 사진
그는 이 사진으로 1951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막스 데스퍼의 증언
1951년 1월 혹독한 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평양. 데스퍼는 유엔군이 중공군 인해전술에 밀려 퇴각하고 있을 무렵
그들과 함께 대동강을 건넜다. 부교를 띄워 강을 건넌 군인들 틈에 끼어 있던 그는 부서진 대동강 철교 위를 주목
했다. 한동안 눈을 뗄 수 없었다. 난생 처음 보는 처참한 광경이었다.
황급히 강 남쪽 둑에 올라 철교 난간에 ‘개미떼같이 붙어 있는’ 피란민 행렬을 향해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머리나 등에 짐을 진 사람도 많았다. 그들 중 상당수는 다리 난간 위에서 몸을 가누지 못한 채 강 아래로 떨어져
죽어 갔다. 강 북쪽에는 다리에 오르지 못한 수천 명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셔터를 누르는 데스퍼의 손은
얼어 붙었지만 정신만은 또렷했다.
그는 “45년간 사진기자를 했고 그중 10여 년은 제2차 세계대전 등 끔찍한 전쟁터를 돌았는데, 그날 같은 장면은
정말 처음이었다”고 말했다. (중앙일보 2009.6.25 기사 중에서)
AP통신 종군기자 맥스 데스퍼 (Max Desfor)씨
1950. 12. 6. 황해도 사리원, 피난으로 남행하는 증기기관차에 오르려 몰려들고 있고
기관차 연료(석탄)더미에도 앉아 있는 모습
1950. 12. 8. 경기도 금촌, 38도선을 넘어 후퇴하는 유엔군 차량들.
1950. 12. 9. 끊어진 한강 철교. 미 공병대가 임시 부교 설치를 하는 듯
1950. 12. 10. 포화에 불타는 마을.
미 9사단을 공격중인 중공군 38군. 유기된 미군차량 모습도 보인다.
날짜 미상. 중공군 제 39군들한테 포로가 된 미군들
장진호 배경
인해전술로 공격해오는 중공군. 사진 앞쪽 오른쪽 두명은 무기대신 징을 들고있다.
중공군에게 포위된 미군들
동사한 미군 시신들
함경남도 개마고원의 장진호 전투는 북진중이던 미 7사단이 중공군 개입으로 큰 피해를 입고, 이를 지원하던
美 해병 1사단이 장진호 북방에서 7개 사단의 중공군에 포위된 혹한 속에서 철수,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
당시, 미국의 뉴스위크지는 "진주만 피습 이후 미군 역사상 최악의 패전" 이라고 혹평하였고 미군의 전사에
"역사상 가장 고전했던 전투"로 기록되어 있을 만큼의 유명한 전투였다.
다시 전하자면, 거듭 승승장구하며 북진하던 유엔군은 영화 30~40도가 오르내리는 혹한에 동상에 걸린 병사가
늘어나고 폭설로 육로로의 부급품 공급이 원할치 못하던 차에 중공군 개입과 그들의 인해전술로 인해 전세가
불리해 지자 후퇴를 결행하게 된다.
장진호 서북방의 미 해병 1사단은 공세에서 수세로 작전을 바꾸고 중공군의 공격에 대비한다.
11월 28일 중공군 7개 사단병력이 공격해와서 미 해병 1사단은 모든 화력을 동원해서 중공군에 맞써 싸웠다.
지원 요청에 의해 동해의 항공모함에서 출격한 전투기들이 포탄을 퍼부어 댔지만 역부족이였다. 중공군이
겹겹이 포위한 상태였고 1,000m가 넘는 고원지대에 고립된 미 해병은 정면 돌파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사단장 스미스 장군의 말은 지금도 유명하다. 그 말은 다음과 같다. "제군들 우리는 후퇴하는게 아니다 새로운
방향으로 공격하는 것이다" 스미스 장군의 장진호 전투는 현대전쟁사에 전설처럼 회자 되고 있다.
美 해병 1사단과 보병 7사단은 장진호 전투에서 절반 가량의 많은 희생을 냈지만 흥남까지 와서 남쪽으로 가는
흥남철수를 하게 되었고, 193척의 군함으로 민간인과 군인 20만명이 흥남철수를 통해 남쪽으로 탈출하는데 성공
했다. 같은 날 평양에서도 철수가 시작 됐는데, 흥남철수 작전이 바로 1.4후퇴의 시작이 된것이다.
장진호 전투로 인해 중공군 7개 사단은 궤멸적 타격을 입게 되었고, 중공군의 함흥지역 진출은 2주간 지연 됐었다.
전열을 가다듬는 해병 병사들
포위당한 해병에게 찾아와 스스로 항복한 중공군 포로들.
중공군 그들도 살고 싶고, 추위와 격렬한 전투에 무서웠을 것이다.
1950년 11월 27일 부터 12월 11일 까지 벌어진 장진호 전투 <사진 국방부 제공>
1950. 12. 계속된 전투와 혹독한 추위로 지쳐버린 미 해병 병사들.
당시 철모 위장포는 해병만 얼룩무늬..
좌측 미 해군 1사단 우측 미 보병 7사단이 험로를 뚫고 흥남으로 퇴각중이다.
미 해병 1사단은 전사자 및 부상자를 실고 갈 최소한의 차량과 장비를 제외하고 모두 파괴해서 버리고
험로를 통하여 퇴각해야 했다.
1950. 12. 후퇴하는 미군
1950. 12. 후퇴하는 미 해병
1950. 12. 후퇴하는 미 해병
1950. 12. 10. 중공군의 개입으로 강추위속에 후퇴하는 행렬속에 모포를 뒤집어 쓴 병사의 모습.
이 모습 만으로도 당시 혹한을 가늠 할 수 있을것 같다.
허벅지까지 차는 눈을 헤치고 되각중
1950. 12. 장진호 전투에서 후퇴하는 미군
1950. 12. 장진호 전투 중 중공군의 저지선을 뚫고 이동하는 미군 해병 제 1 사단
초신(Chosin)으로 부리는 장진호 전투
함경남도 개마고원 장진호전투는 1950년 11월 27일부터 2주 동안 중공군 7개사단 12만명에 포위되어
보급로 차단과 혹한의 강추위속 이중 삼중 포위망을 뚫고 군인 12만명과 10만여명을 성공적으로 철수
시킨 가장힘들고 치열했다. 전멸위기를 극복하고 후퇴작전에 선공한 불가사의한 전투로 불리고 있다.
또한 美 해병대가 투철한 군인신으로 전쟁과 죽음의 공포라는 극한상황을 극복해 중공군 7개 사단을 궤
멸 시켜 남하공격을 저지하는 등 공산군의 전력을 크게 약화 시켰기에 미국은 전사(戰史)에서 가장 고전
했던 전투라는 진주만 피습이후 최악의 패전이라는 전투로 잊지 않기 위해 미 대통령은 매월 1월 4일을
알링턴 국립묘지를 찾아 장진호 전투에서 전사한 이들을 참배하고, 해병대 전술 교리화 하고, 이지스 순
양함 이름을 초신(chosin-장진)으로 부르는 등 참전용사와 가족들을 최대 예우해주고, 국가가 받들고
있음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의미가 크다...
1950. 12. 12. 유엔군들이 인천항을 통해 장비를 이송시키고 있다.
1950. 12. 12. 유엔군이 후퇴하면서 적의 남하 지연을 위해 교량 폭파작업을 하고 있다.
무거운 짐을 잔뜩 이고 지고 있으면서도 피난길에 지쳐 쓰러진 딸을 일으켜 세우는 어머니
1950. 12. 21. 경북 왜관의 낙동강 철교 어귀에 소련제 북한군 탱크.
1951. 12. 24. 폭파되는 흥남 부두와 미해군 USS Begor (편의상 흥남부두 사진을 연결 함)
1950. 12. 열차를 타려는 피난민들 화물열차 까지도.. 더 이상 탈 틈이 없다.
1950. 12. 30 서울역앞의 피난행렬. (1.4후퇴 전) AP통신 맥스 데스퍼 촬영
1950. 12. 말. 한강의 얼음위를 걸어서 남쪽으로 가는 피난행렬
1951년 1월 2일, 서울을 떠난 마지막 피난열차.
1·4 후퇴(後退)는 한국 전쟁 중이던 1950년 12월말에서 이듬해 1월초 사이, 중공군의 공격으로
국제 연합군의 주력이 서울에서 물러나고 공산 진영이 서울을 재점령한 사건을 가리킨다.
1951. 1. 6. 수원역에서 남행열차를 기디리는 피난민들
1951. 1. 한강남쪽에서 작전중인 영국군 처칠탱크. AP통신 맥스데스퍼 촬영
1951. 1. 20. 부자의 피난 길. 다른 가족은 전란에 모두 죽었다고 되어 있다.
1951. 1. 26. 철원의 인민군. 모두 방한복을 입고 있다.
1951. 2. 7. 전선을 시찰하는 맥아더 장군.
1951. 2. 15. 대한민국 해상이동방송선(HLKT)을 방문한 장면 총리 일행.
1951. 2. 피의능선 전투
고지의 LMG 기관총 사수와 부사수가 총을 겨누고 있다.
LMG 기관총 방어 진지. 총안구로 전방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 내부에 수류탄을 매달아 놓은 모습이다.
탱크킬러 3.5인치(88.9mm) 로켓포(일명 바츄카포)와 구형 2.36인치(50.95mm)로켓포를 비교하고 있는 미군
사격중인 81mm 박격포
사격중인 4.2인치 박격포. (105 미리의 포탄이지만 포구 장전식의 박격포이다)
105 미리 곡사포. 포앞의 장약통을 보면 얼만큼 포탄을 날렸는지 짐작이 간다
155mm 곡사포가 적진을 향해 불을 뿜고 있다
1951. 2. 26. 부산근교의 임시 포로 수용소
1951. 3. 4. 한강부근 마을에서 적진에 발사하는 60mm박격포 옆에서 아이들이 귀를 막고 있다.
1951. 3. 5. 한강 인도교 북쪽 북한군 진지에 포격을 가하고 있다.
1951. 3. 15 재 탈환후의 서울. 중앙청의 돔이 파괴되었고 불에탄 흔적이 보인다. AP통신 맥스 데스퍼
1951. 3. 16. 하늘에서 내려다 본 경복궁과 중앙청 일대.
1951. 3. 16. 하늘에서 내려다 본 중앙청, 경복궁, 수송동, 팔판동 일대.
1951. 3. 16 지붕 한쪽이 내려앉은 세종로 칭경기념비전. AP통신 맥스 데스퍼 촬영
대한제국 시대 고종 즉위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서울 종로구 세종로 칭경기념비전
1951. 3. 16 폐허가 된 종로일대. AP통신 맥스데스퍼 촬영
1951. 3. 17 전쟁중에 열린 서울의 노천시장. AP통신 맥스 데스퍼 촬영
1951. 3. 19. 구호 양곡을 먼저 탄 소년과 양곡을 타기 위해 줄을 선 주민들의 표정이 밝다.
1951. 3. 23 폐허로 변한 명동, 충무로 일대. AP통신 맥스 데스퍼 촬영
1951. 4. 3. 한국전쟁에 참가한 미군 전선시찰. 왼쪽부터 리지웨이 중장, 히키 소장, 맥아더 총사령관
1951. 4. 23. 중공군 춘계 대공세로 다시 피난길에 오른 사람들
1951. 4. 25 지게에 아이와 짐을 지고 세종로를 건너는 아버지. AP통신 맥스 데스퍼 촬영.
1953. 4. 26 중앙청 앞 휴전반대 시위. Ap통신 맥스 데스퍼 촬영.
1953. 4. 26 휴전반대 시위. AP통신 맥스 데스퍼 촬영.
1951. 4. 29 한강 인도교 아래 부교를 건너 서울로 돌아오는 피난민 들. AP통신 맥스데스퍼 촬영
중공군의 대공세가 시작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내일 무슨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알 수 가 없었다. 영화 '금지된
장난' 처럼 언제 적의 포격이 떨어질지도 모르기에 간단한 세간을 지고, 이고, 정처 없이 남으로 향하며 흔들리는
부교에 몸을 맡껴야 했다.
1951. 5. 3 거리에서 빨래를 하는 여인들. AP통신 맥스 데스퍼 촬영
1951년 5월 22일 - 국군 6사단, 용문산 전투 대승
용문산 전투- 이 전투는 1951년 한국군 제 6사단이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의 병력을 막아내는 방어전투의 모범으로서
6.25전쟁 최대의 전승으로 기록된 전투다. 중공군의 춘계대공세때 중공군 작전사령부는 UN군이 포진하고 있는 지역을
피하고 자기네들이 판단하길 비교적 열세한 한국군 지역을 택해서 용문산 일대에 주저항선을 구축중이던 6사단 지역에
1951. 6. 27. 다리부상으로 소를타고 피난길에 나서다.
1951. 7. 4. 철원. 군트럭에 실려 피난을 떠나고 있다
1951. 7. 6. 서울, 전쟁 폐허의 잿더미 속에서도 시장은 열리다
피의 능선전투는 1951년 8월 18일부터 9월 5일까지 강원도 양구 북방에서 일어난 전투이다. 공격과 후퇴를 거듭하며
9월 초가 되도록 능선에서의 공격은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능선 왼쪽에서 공격하는 한국군과 오른쪽에서 공격하
는 미군의 공격이 성공하자, 적이 점령중인 983고지는 포위 위기에 있었다. 결국 9월 3일 적은 983고지에서 후퇴하였으
며, 미군은 9월 5일 14시경 983고지를 점령하였다. '피의 능선'이란 이름이 붙은 이유는 많은 사상자가 발생해 능선이
피로 넘쳐 흘러 종군기자들이 이 능선을 '피의 능선(Bloody Ridge)'라는 이름으로 보도하면서 생겨났다.
1951년 8월 대대적인 지원 포격과 함께 피의 능선 공격이 개시되었다.
1951년 8월 피의 능선
1951. 8. 피의 능선
1951. 9. 피의 능선
1951. 9. 콜트 미 8군 부사령관의 이임식 (왼쪽부터 허정, 콜트, 무초 주한 미대사)
1951. 9. 20. 총구 앞에 한 북한군 병사가 수풀속에서 짐승처럼 기어 나오고 있다.
1951. 11. 27. 판문점 정전회담에서 북한군측 장춘산대표와 유엔군측 머레이대표가 지도를 펴놓고
휴전선 확정을 협의하고 있다.
인민군 포로
고지점령 후 상,하반신이 잘려진 인민군 시체를 바라보고 있는 유엔군.
1952. 12. 3 꼬맹이들이 중앙청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AP통신 맥스 데스퍼 촬영
1952. 12. 4.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 당선자가 취임에 앞서 한국전선을시찰하고 있다.
뒤에 동승한 사람이 클라크 주한 유엔군 사령관
거제포로수용소 철조망에 걸린 스탈린 김일성 초상화
1952년 5월 9일 한국전쟁 중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감중이던친공포로들이 수용소 소장인 도트(Todd)준장을
납치 강금한뒤 대규모 폭동을 일으켰다. 당시 16만명에 달하던 인민군 포로들 중 이념상으로 북한에 송환되길
거부하는 반공포로들과 송환을 희망하는 친공 포로들간에 갈등이 점차 심화 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임 수용소 소장에 도트 미 육군 준장이 부임하자 친공포로들은 음식에 독극물이 들어갔다고
억지를 쓰면서 단식투쟁을 벌였다. 친공 포로들은 수용소장과의 면담을 요청해 왔고, 그때까지 상황 파악을 못하고
있던 도트는 아무 생각없이 그들의 수용동을 찾아 갔다가 순식간에 감금을 당하고 말았다.
결국 탱크와 장갑차로 중무장한 유엔군이 투입되어 수용소를 완전히 포위하고 강경진압으로 맞서자 사태의 불리
함을 깨달은 포로들이 72시간만에 도트준장을 풀어주고 스스로 해산했다.
도트준장은 이 사건으로 종신 대령으로 강등된 뒤 불명예 제대를 하고 말았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폭동사건은 수용소 내에서 포로들간의 교전이 벌어지고 수용소 소장이 포로들에 의해 포로가
되고 포로수용소 역사상 전후무후한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1952. 2. 18.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폭동을 진압하고 있는 유엔군
1952. 2. 18. 거제도 포로수용소 폭동을 진압하고 있다.
(위와 같은 이미지인데 왼쪽은 조금 잘려 나갔고 출입문이 조금 더 보인다)
1952. 2. 23 풍선껌을 부는 방법을 소년에게 가르고 주고 있는 미군. AP통신 맥스데스퍼 촬영
1953. 4. 26 중앙청 앞 휴전반대 시위. AP통신 맥스 데스퍼 촬영
1953. 4. 26 휴전반대 시위. AP통신 맥스 데스퍼 촬영
1953년 휴전선이 그어진 최후의 백석산 진지
1953. 5. 8.정전회담 북한측 남일대표가 회담장을 떠나고 있다.
1953. 6. 11. 부산, 학생들이 정전회담 반대시위를 하고 있다.
1953. 7. 26.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이 백악관 집무실에서 정전 담화문을 발표하고 있다.
1953. 7. 27 정전 협정문서 김일성과 클라크 대장의 싸인
남한측의 이름이나 싸인은 그 어디에도 없는 정전협정문.
1953. 10. 23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서울거리
1954. 1. 24 반공포로 귀환 환영.
1954. 2. 16. 귀환을 거부하는 북한포로를 북측 대표들이 설득하고 있다.
6.25란 남·북 그 어느쪽의 승자도 패자도 없는 무모한 전쟁이 아니였던가?..
강대국 간의 얽힌 복잡 미묘함 때문에 38도 선이 그어 졌고, 저들 공산세력은 조국 해방이란 미명으로 남침을
했고, 우리는 자유 민주주주의를 위해 이에 맞써 싸웠다. 기왕 벌어진 싸움이니 내친김에 남북통일을 하여 한
민족끼리 얽혀 살려고 했다. 동족상잔의 무모한 전쟁으로 인한 그 큰 비극을 어찌 말로 다 하랴!.. 전쟁은 종식
된게 아니고 휴전이 된 상태다. 쉬운말로 땅 따먹기 할려다 평행선의 38선이 이름만 바뀌여 대신 휴전선 이란
이름으로 155마일 (약 249.5킬로미터) 삐딱하게 대신 그어져 있다.
여기 실린 사진들은 6.25 가 발발하자 종군기자들에 의해 당시 생생한 기록물을 전세계에 알리게 되었고,
미국 메릴랜드 주에 있는 NARA(국립문서기록보관청,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5층 사진자료실에 보관된 “KOREA WAR(한국전쟁)” 사진들과 그 외의 자료입니다. 이미지 날짜의 순서 배
열이 약간 틀린것은 연결되는 사진의 이해를 돕고자 함인점 양해 바랍니다. 생과 사를 오가는 전쟁터에서
당시의 상황을 사진으로 기록해 주신 모든 종군기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인터넷을 하며 써핑중 간간히 넷상의 흩어져 있는 사진을 수집하여 보관했던 자료중 상태가 양호한 376개를
한국전쟁 63주년을 맞아 6.25를 상기하자는 의미에서 재구성 편집하여 이 게시물을 작성했으며, 자유수호를
위해서 목숨을 받친 호국영령들과 유엔군으로 참전하여 목숨을 잃은 많은 용사들께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해 주신 숭고한 정신을 가슴깊이 기리며 이 작성을 끝맺습니다.
[출처] 수복 후부터 ~ 휴전까지(188개 이미지) |작성자 청봉 산인 이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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